툴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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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루즈(프랑스어: Toulouse, 오크어: Tolosa)는 프랑스의 남서쪽 가론강 연안, 지중해와 대서양으로부터 비슷한 거리만큼 떨어져있는 도시이다. 옥시타니 레지옹과 오트가론주의 중심지이다. 인구는 약 50만 명으로 프랑스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며 근교를 포함한 대도시권은 145만 명으로 프랑스에서 파리, 리옹, 마르세유의 뒤를 이은 4번째이다.[1]
개요[편집]
툴루즈는 프랑스의 남서부 도시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대서양 연안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지점에 있으며 가론 운하와 1996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미디 운하의 분기점에 자리 잡고 있다. 툴루즈는 프랑스 남부 최대의 교통, 산업, 문화의 중심지로 항공우주산업이 특히 발달해 있다. BC 106년 로마군이 들어와 이곳을 톨로사(Tolosa)라고 하고 요새화하였다. 250년경 순교자 세르냉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고, 419년부터 서(西)고트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507년 클로비스가 정복하였고, 이후 아키텐 왕국의 수도로서 에스파냐의 이슬람교도에게 대항하였다. 852년 레몽 1세가 툴루즈 백작이 되어 백작령이 400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 동안 교회 참사회(參事會)가 권세를 휘둘러 거의 독립상태였다. 백작령은 알비즈와 십자군의 토벌로 쇠퇴하고, 1271년 완전히 프랑스 왕령으로 합병되었다. 19세기에 철도가 등장하면서 경제적으로 발전했다. 중세에는 나사(羅紗) 시장이었으나 곡물, 피혁의 거래도 시작되고 현재는 농산물의 대시장이다. 툴루즈는 에어버스, 갈릴레오 항법 시스템, SPOT 위성 시스템, ATR, 에어로스페이스 밸리 본사가 있는 유럽의 항공우주산업의 중심지이다. 또한 인텔의 유럽 지역 본사, 유럽에서 가장 큰 우주 센터인 프랑스 국립 우주 연구 센터의 툴루즈 우주 센터 (CST)도 위치해 있다. 탈레스 알레니아 스페이스와 아스트리움도 툴루즈에 상당한 시설을 지니고 있다. 1229년 설립된 툴루즈 대학교는 10만 명 이상의 학생이 다니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 중 하나이며 파리, 리옹, 릴 대학교 다음으로 프랑스에서 캠퍼스 규모가 크다. 툴루즈 블라냑 공항과 파리 오를리 공항 사이 항공로는 유럽에서 가장 붐비는 항공로이다. 툴루즈를 장미의 도시(Ville rose) 혹은 보라색의 도시(Cité des violettes)라는 별명으로도 부르곤 하는데, 툴루즈의 대부분 건축물이 적황색 벽돌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툴루즈 중심가인 캬피톨(Capitole)에 가면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시청 앞의 광장은 물론 골목 구석까지 모든 건물들이 붉은 벽돌로 지어져 있어,낮에 해가 빚추면 반사되는 벽돌의 색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전형적인 남프랑스의 생동감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이다.[2]
역사[편집]
고대[편집]
툴루즈는 철기 시대부터 피레네, 지중해와 대서양 사이의 무역 중심지였다. 시의 역사적 이름인 톨로사(Tolosa)와 이곳 주민을 일컫는 톨로사테스(Tolosates)에 관한 기록은 기원전 2세기에 처음 나온다.
기원전 107년 로마가 이 지역을 점령하고, 골족은 맞서 싸웠으나 결국 패배했다. 이후 툴루즈는 로마가 점령하던 나르본 지방의 행정적이자 군사적인 수도로 발전했으며, 기원전 1세기에는 현재에도 유적이 남아있는 로마시대 구시가지가 처음으로 건설되어졌다. 그리고 기원후 30년까지 약 14,000석 규모의 원형극장을 비롯해 지금은 사라진 수많은 건물들, 그리고 도시를 둘러싸는 성벽이 지어지게 되었다.
250년에는 현존하는 생 세르낭 성당명에 이름이 붙은 성인인 생 세르낭이 골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려다 이교도 전도사들에 의해 황소 뒤에 매달려 끌려다니다 순교한 사건이 일어났고, 333년~334년에는 보르도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의 성지순례 여정을 안내하는 "Itinerarium Burdigalense(보르도 여정)"이라는 문서가 작성되어졌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Civitas Tholosa"라는 툴루즈의 구(舊)명이 현존하는 문서상에 언급되어졌다. 403년에는 지역에서 크리스트교가 부흥하면서 건축 자재로써 벽돌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로마제국의 쇠퇴 후로 툴루즈는 서고트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507년의 부이에 전투로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가 도시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골족계 로마인과 서고트인들이 동거를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동쪽의 셉티메니아 대공국과 남쪽의 서고트 왕국을 스스로 견제해야할 필요를 느꼈고, 629년에 툴루즈 왕국(Royaume de Toulouse)을 세웠다가 얼마 안있어 프랑크 왕국 휘하 대공령(Grand-duché)으로 들어가며 7세기와 8세기까지 피레네산맥에서 루아르(Loire), 호데(Rodez)에서 지중해까지 뻗어지는 넓은 영토를 자랑했다. 하지만 721년에는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북쪽으로의 세력 확장을 꾀하던 우마이야 왕조와 프랑크 왕국이 격돌한 툴루즈 전투가 벌어지고 나서는, 중세에 들어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툴루즈 백국이 만들어지며 그것의 수도가 되었다.
1096년에는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생 세르낭 성당의 축성을 위해 도시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1152년에는 현재의 시청 및 시의회 역할을 하는 꺄피툴라(Capitoulat)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현재 툴루즈 시내의 꺄피톨(Capitole)이란 지명의 유래가 된다.1189년의 도시 반란 이후 금전적 부족과 외부의 위협때문에 백작령의 힘은 대폭 축소되었으며, 꺄피톨라는 현재의 시청 자리에 자신들의 첫번째 건물을 건설하게 된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인 1209년에 툴루즈가 속한 랑그독지방에서 카타리파가 힘을 얻자 교황청은 카타리파를 믿는 랑그독지방의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토벌을 명령하며 알비 십자군을 일으킨다.
툴루즈는 십자군 초기에 레몽 6세가 카타리파 토벌에 협조하기로 마음을 바꿔 베지에와 카르카손이 점령당하는 와중에도 그나마 괜찮을수 있었지만, 1211년에 레몽 6세가 다시 파문당하며 십자군은 툴루즈로 향했고, 공성전 끝에 도시가 함락되자 그는 아들인 레몽 7세와 함께 도주했다. 이들은 지역 도시들의 반란을 주도하며 십자군과 대치했는데, 이 과정에서 십자군의 사령관 몽포트가 전사하고 교황이었던 인노첸시오 3세가 사망함에 따라 십자군은 일단 랑그독 지방에서 물러난다.
1222년에 레몽 6세가 사망하자 툴루즈의 백작자리는 그의 아들인 레몽 7세에게 계승되었으나, 그또한 아버지처럼 3년 후 파문당한다. 당시 프랑스 왕국의 왕이었던 루이 8세는 직접 군대를 지휘하고 남하하며 수많은 도시들을 항복시켰고, 공성전 끝에 끝내 아비뇽까지 점령하였지만 1226년 사망한다. 뒤이어 즉위한 나이어린 루이 9세의 섭정인 블랑카 데 카스티야는 레몽 7세의 외동딸과 루이 9세의 남동생을 결혼시켜 이 둘의 자손에게 툴루즈 백작을 계승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결국 1229년에 프랑스 북부의 모(Meaux)에서 만나 협정을 체결했다. 이 때 그가 프랑스 왕실에 잡혀 고문당하다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레몽 7세는 이후로도 툴루즈 백작령을 되찾기 위해 애썼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작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두번의 이혼을 불사하면서까지 자식을 갖고자 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1249년에 사망해 툴루즈는 루이 8세의 8남 알폰소에게 귀속된다. 이후 알폰소와 잔느 역시 1271년 8차 십자군 도중에 자식없이 사망함으로써 툴루즈 백작령은 프랑스 왕실영토에 흡수되었다. 1271년 툴루즈 대학(Université de Toulouse)이 최초로 설립되어 교육 중심지로써 가동하기 시작하기도 했다.
중세[편집]
14세기에 들어 툴루즈는 프랑스 왕실의 지원아래 프랑스 제4의 도시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1337년에 백년 전쟁이 시작되고, 1348년과 1361년, 게다가 15세기에도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도시는 약탈과 강도질을 비롯한 위험에 시달렸다.
15세기 말부터 16세기까지의 르네상스 시기동안에 툴루즈는 파스텔 제조산업이 발달하면서 호황을 누렸다. 장 베르누이 저택이나 아세자트 저택같은 고급 건축물이 많이 지어진것도 이 시기였다. 그러나 16세기 말인 1560년에는 위그노들과 천주교도들 간의 큰 분쟁이 일어났고, 1562년에는 여왕 칙령으로 위그노들이 도시 밖으로 추방당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학살당했고, 그들의 집 또한 약탈당했다.
17세기에는 가톨릭이 대단히 번성하여, 현존하는 교회중 대다수도 이때에 건설된 것이다. 특히 이 시기에는 퐁 뇌프(Pont neuf)와 꺄날 뒤 미디(Canal du Midi)등 현재에도 툴루즈의 명물로 남아있는 사적들이 지어지기도 했고, 또한 오를레앙의 가스통과 함께 내란음모를 꾸미던 몽모렁시의 앙리 2세(Henri II de Montmorency)가 툴루즈의 꺄피톨 광장에서 처형된것도 이 시기인 1632년이기도 하다.
1762년에는 프로테스탄트가 광장에서 수레바퀴형으로 잔혹하고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처형된 칼라 사건(Affaire Calas)이 일어났다. 볼테르가 이 사건을 두고 "Pièces originales concernant la mort des Srs Calas"라는 문서를 작성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프랑스혁명 동안 툴루즈는 몇 번의 작은 약탈사건이나 성벽 공격을 제외하고는 그리 심각한 손실을 입지 않았다. 이 시기에 시의회가 다시 힘을 얻기 시작하기도 했다. 1799년에는 2016년의 레지옹 변경 전까지 쓰이게 되는 "오뜨-갸론"레지옹이 처음으로 구성되어졌고, 툴루즈는 이 레지옹의 수도(chef-lieu)가 되었다.
근대[편집]
1814년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만들어진 프랑스 제국과 대영제국, 스페인 왕국 및 포르투갈 왕국이 툴루즈에서 격돌한 "툴루즈 전투"가 있었고, 나폴레옹의 추락 이후 루이 18세가 재림했을 시기에는 공화주의자와 왕정복고주의자가 도시 내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했었다. 이후 툴루즈에서 도시사회주의가 득세한데 이어 프랑스의 유명 사회주의 정치인인 장 조레스가 "라 데페슈 뒤 미디"라는 현재에도 남아있는 신문을 창간했고, 1856년에는 처음으로 철도역이 생겨나고 19세기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그랑 바자르등을 비롯한 수많은 대형 상점들이 툴루즈 시내 곳곳에 생겨났다.[3]
교통[편집]
툴루즈-마타비오 열차역이 지역 및 국가 철도 서비스를 담당한다. 툴루즈 메트로는 무인으로 운행된다. 트램 노선 T1은 보젤에서 툴루즈까지 운행되며, 블라낙을 경유한다. 트램 노선 T2는 툴루즈 블라냑 공항을 운행하는 1호선의 지선이다. 모든 도시 버스, 지하철, 전차 서비스는 티세오에 의해 운영된다. 미디 운하는 툴루즈에서 시작하여 세트까지 운행한다.[4]
경관[편집]
툴루즈에는 두 곳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17세기에 완성된 툴루즈와 지중해를 잇는 미디 운하는 199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으며, 유럽에서 가장 큰 로마네스크 건물인 생세르냉 대성당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에 대한 중요성 때문에 1998년에 지정됐다.
4세기 이후 주교이자 대주교가 관할하던 툴루즈에는 수많은 중세 교회들이 있다. 생세르냉의 로마네스크 대성당은 11세기에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자들을 위해 건설됐다. 길이 115m, 너비 64m, 높이 21m로 유럽 최대 규모다.
1923년 건립된 생테티엔의 고딕 성당은 1970년 생테티엔 교구가 생기면서 교구 성당으로 승격했다. 라틴십자가 모양의 기본 설계 위에 십자형 교회의 양쪽 날개 부분, 3개의 신도석 그리고 서쪽 전방의 종탑과 함께 건설됐다.
에글리스 데 자코뱅 대성당은 1230년에 지어진 도미니크 수도회의 대본당이다. 대형 벽돌 건물로 남프랑스 고딕 양식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혁명 당시 도미니카교단이 해체된 이후 2세기 동안 여러 가지 다른 목적에 사용됐다. 20세기에 대대적인 복원을 거쳐 21세기 초에 부분적으로 박물관으로 개조됐다. ‘신학대전’의 저자이며 1323년에 성인으로 공표된 토마스 아퀴나스는 도미니크교단의 일원으로 교단의 본부 교회인 자코뱅 대성당에 묻혔다. 1368년 교황 우르바노 5세의 칙령에 따라 1369년 아퀴나스의 유물이 이탈리아에서 옮겨져 자코뱅 성당 제단 옆의 돌로 된 유물함에 보관됐다, 혁명 당시 생세르냉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대성당의 복원이 완성된 후 1974년 쟈코뱅 대성당으로 돌아왔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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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툴루즈〉, 《위키백과》
- 〈툴루즈〉, 《나무위키》
- 〈툴루즈〉, 《요다위키》
- 〈툴루즈(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툴루즈(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