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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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Lodz, 폴란드어: Łódź, 이디시어: לאדזש) 또는 로지는 폴란드의 중부에 있는 도시이며 우치주의 주도이다. 현재 수도 바르샤바, 크라쿠프 다음가는 폴란드 제3의 도시이다. 인구는 약 66만 명이며 비교적 새로운 도시로 19세기까지는 작은 마을에 불과하였으나 섬유공업이 크게 발달하게 되면서 인구가 급속히 늘어났다.[1]
개요[편집]
우치는 폴란드의 중앙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남북과 동서를 가로지르는 고속도로가 교차하고, 시내에서 7km 거리에 우치공항(Lodz Airport)이 위치해 모든 길은 우치로 통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교통의 요지이다. 이러한 천혜의 입지로 2004년 폴란드의 유럽연합 가입 이후 제조업 생산기지로 발전하였다. 2010년대 들어서는 정보통신과 영화를 중심으로 한 문화창조산업도 크게 성장해 폴란드 경제발전의 상징적인 도시가 되었다. 도시명은 전설에 야누시(Janusz)라는 남자가 배를 타고 개울을 여행하다 정착해 마을을 일구어 폴란드어로 배를 의미하는 '우치'가 되었다고 한다. 폴란드 도시들이 대부분 오랜 역사를 갖는 반면 우치는 이보다 늦게 19세기 들어 섬유산업 붐을 타고 직물공장이 들어서 공업도시로 발전하였다. 공산주의 시절 소련이 공장도시(factory town) 지위를 부여해 현재도 산업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대표적 산업은 식품, 제약, 가구, 엔지니어링, 정보통신 등이며, 섬유산업은 쇠퇴 하였지만 패션과 디자인산업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아 급성장하고 있다. 시내와 인근의 산업 클러스터에는 후지쯔(Fujitsu), 휴렛 팩커드(HP), 필립스(Philips) 및 스위스의 화학기업 클라리언트(Clariant AG) 등 다국적 제조업체의 지사와 공장이 위치한다. 2010년대 들어서는 아일랜드 정보통신기업 엑센츄어(Accenture)와 회계법인 딜로이트(Deloitte) 등 정보통신과 비즈니스 서비스 분야의 세계적 기업들도 대거 진출하였다.
우치는 공업도시이면서 2017년 유네스코에서 영화의 도시로 선정할 정도로 폴란드 영화산업의 중심지이다. 1948년 국립영화학교가 설립되어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 등 세계적인 감독을 다수 배출하였으며, 많은 영화스튜디오가 활동하고, 매년 드라마 스쿨페스티벌(Drama School Festival)이 개최된다. 시내에는 영화박물관(Film Museum)과 세마포 애니메이션박물관(Se-ma-for Museum of Animation)이 있으며, 1998년에는 할리우드를 본 딴 스타의 거리(Avenue of Stars)가 조성되었다. 시 차원에서도 문화창조산업 진흥을 위해 우치영화기금(Łódź Film Fund)을 조성해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산업화 이후 도시가 조성되어 주요 유적과 역사적 장소들은 대부분 19세기에 이후에 들어선 것이다. 19세기 섬유산업으로 거부가 된 이즈라엘 포즈난스키(Izrael Poznański)가 지은 포즈난스키 궁전(Pałac Poznańskiego)은 대표적인 명소이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활용한다. 시내의 라도고슈치 역(Radogoszcz station)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45,000여명의 유대인이 죽음을 맞이한 기억의 터널(Tunnel of Memory) 있으며, 바르샤바에 이후 폴란드에서 두 번째로 큰 유대인 게토인 리츠만슈타트 게토(Getto łdzkie)는 널리 알려진 곳이다. 2006년에 직물공장을 개조해 문을 연 시마뉴팍트라(Manufaktura)는 쇼핑몰, 박물관과 문화센터가 들어선 종합레저시설로 시의 새로운 명소이다.[2]
명칭[편집]
폴란드어 철자가 'Łódź'인데, 폴란드어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봐도 도무지 '우치'로 읽을 수가 없다. 한국에서 이 도시가 언급된 영어나 독일어 책을 번역하면 십중팔구는 '로드즈', '로지' 등으로 옮긴다. 이 짧은 단어 하나를 읽으려면 폴란드어 읽는 법을 완전히 익혀야 하고, 때문에 폴란드어 관련 밈에서 폴란드어의 악명 높은 발음을 대표하는 단어로 자주 등장한다. 폴란드어로 우치(Łódź)는 배(船)를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도시를 상징하는 문장에 배가 그려져 있다.[3]
지리 및 기후[편집]
우치는 폴란드 국토 한가운데 위치한 덕분에 많은 회사들의 물류센터가 집중돼 있다. 폴란드 남북과 동서를 잇는 자동차 전용도로가 우치 근교를 통과한다. 섬유산업은 1990년 이후 대기업들이 문을 닫는 등 과거에 비해 쇠락했으나 소규모 기업들이 살아남아 러시아와 옛 소련연방 국가들에 생산품을 수출하고 있다.
시내 교통은 버스와 전차(트램)이 주종이며 폴란드에서 8번째로 큰 공항인 우치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 국제공항이 시 중심부에서 6km 거리에 있다. 자전거 도로가 발달해 총 130km에 이른다. 공원은 44곳이다. 시 면적의 9.61%가 숲이고 2.37%가 공원이다. 평균 기온은 1월이 영하 4.6℃, 8월은 19.1℃이다. [4]
역사[편집]
우치는 근대에 들어 급속히 발전한 도시이다. 우치가 처음 문서에 등장한 것은 1332년이며, 도시로 공인받은 것은 폴란드 왕국이 야기엘로니안왕조(1386~1596) 치하이던 1423년의 일이었다. 16세기에도 주민 수는 800명이 채 안 됐고 대부분 주변 곡물농장에서 일했다. 폴란드는 1793년 영토의 동쪽은 러시아가, 비엘코폴스카 등 서쪽 지역은 프로이센이 빼앗아가는 2차 분할을 당했다. 이때 우치는 프로이센 영토로 편입돼 남프로이센주에 속하게 되었다.
1807년, 프로이센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황제의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패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와 맺은 틸지트조약에 따라 폴란드 영토 중 프로이센이 차지했던 지역에 바르샤바 대공국을 세웠는데 우치는 여기에 속해 있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 열린 빈 회의에서 바르샤바 대공국 영토 대부분은 러시아 황제가 왕을 겸하는 폴란드 왕국 치하로 넘어갔다. 1816년 러시아가 황제 포고령을 통해 우치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개발에 나섬에 따라 우치는 주변 외국인, 특히 수많은 독일 이민자들을 받아 들였다.
우치는 급속히 산업화되기 시작했다. 1825년에 방직공장이 세워졌다. 1839년에는 당시 첨단기술로 꼽히던 증기기관을 이용한 공장이 세워졌다. 유럽 전역에서 노동자, 기술자, 사업가들이 우치로 몰려들었다. 우치는 러시아 제국의 섬유산업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1850년에는 러시아가 폴란드 왕국과의 교역에서 관세를 철폐하고 1865년에는 철도가 개설돼 도시는 더욱 번창했다.
1823년부터 1873년 사이에 우치의 인구는 10년마다 두 배로 증가했다. 1897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우치는 인구 31만 5,000명으로 러시아 제국에서 다섯 번쨰로 큰 도시였다. 이 시기의 공업도시 우치는 19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작가 브와디스와프 스타니스와프 레이몬트(1867~1925)의 작품 ‘약속된 땅’에 생생히 묘사돼 있다.
공장지대여서 노동자 인구가 집중돼 있었기에 19세기 후반 들어서는 사회주의운동의 중심지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1892년 대규모 파업 때는 시내 대부분의 공장이 가동을 멈추었다.
1905년 러일전쟁 여파로 폴란드의 경제도 악화돼 노동자 10만 명 가량이 직장을 잃었다.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은 우치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 등을 요구하며 여러 차례 파업을 벌였다. 러시아 경찰과 코사크 기병부대의 발포로 사망자가 발생하자 사태는 점점 악화돼 1905년 6월 21일 대규모 봉기가 시작됐다. 봉기는 5일간 이어졌으나 러시아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진압됐다. 폴란드 노동자 수백 명이 사망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때 우치는 독일에 점령당했다. 전후 열린 파리 강화회의와 베르사유조약 덕분에 폴란드는 1795년 망국(3차 분할) 후 123년 만에 독립을 이루었다. 우치의 인구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약 40%가 줄면서 우치는 급속한 성장을 멈추고 활력을 잃기 시작했다. 주된 생산품인 면직물이 서방에선 독일과의 관세전쟁 때문에 동방에선 러시아혁명과 내전으로 인해 판로를 잃어버린 탓이었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우치는 1939년 11월 우치를 독일 영토에 편입됐다. 도시 명칭도 1차 세계대전 때 우치를 점령한 독일 장군(카를 리츠만)의 이름을 따 ‘리츠만 슈타트’로 바뀌었다. 독일은 유대인들을 우치 게토(유대인 집단 거주지)로 몰아넣었다가 다시 집단수용소나 학살장소로 보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우치에는 인구의 3분의 1가량인 23만 3,000명의 유대인이 있었으나 전쟁을 거치며 거의 사망하고 1만 명가량만 살아남았다.
1945년 1월 18일 소련군이 우치에 진입하면서 나치 독일 지배는 끝났고 폴란드는 인민공화국 체제로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다. 수도 바르샤바가 철저히 파괴되었기에 1945~1948년 사이 우치에는 폴란드 정부기구와 관료 대부분이 몰려 있었다. 인민공화국은 전면적인 기업 국유화 정책을 시행했다. 우치의 자본가, 공장주들은 모든 재산을 잃었다. 섬유산업을 중심으로 전후 재건이 시작되었다.
우치의 인구는 1988년 최고(85만4261명)를 기록한 이후 조금씩 줄고 있다. 2007년까지만 해도 바르샤바에 이어 폴란드 제2 도시였으나 곧바로 크라쿠프에 2대 도시 자리를 내주었다. 저출산, 고령화의 영향에다 1989년 폴란드 민주화 이후 시장경제로의 이행과정에서 뒤처졌기 때문이다. 2004년 폴란드가 EU에 가입한 효과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2000년대 들어 옛 공장 터를 현대적 복합 쇼핑몰로 바꾸는 도시 재생 사업과 함께 문화예술 관련 인프라를 늘리는 등 활력을 되찾으려 노력하고 있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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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우치〉, 《위키백과》
- 〈우치(폴란드)〉, 《나무위키》
- 〈우드〉, 《요다위키》
- 〈우치(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우치(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