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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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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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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포
탐페레
반타

핀란드(Finland, 핀란드어: Suomi)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발트해와 맞닿아 있는 북유럽의 국가이다. 정식명칭은 핀란드공화국(Republic of Finland, 핀란드어: Suomen tasavalta 수오멘 타사발타), 또는 수오미(Suomi:호수의 나라)라고 한다. 수도는 헬싱키이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와 함께 흔히 말하는 북유럽 선진국 중 하나로, 북유럽의 노르딕 5개 국가 중 아이슬란드와 함께 공화국이다. 그러나 지리학적으로 스칸디나비아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1155년 스웨덴 십자군에 정복되어 스웨덴 일부로 병합되었고, 1809년 러시아의 자치령인 대공국이 되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 후 독립을 선언하였고 1918년에 공화제를 실시하여 처음으로 독립된 통일국가를 이룩하였다.

개요[편집]

핀란드는 북유럽에 있는 노르딕 국가 가운데 하나다. 발트해, 보트니아만, 핀란드만을 두고서 서쪽으로는 스웨덴, 동쪽으로는 러시아, 남쪽으로는 에스토니아, 북쪽과 북동쪽으로는 노르웨이와 접하고 있다. 핀란드 수도인 헬싱키는 핀란드에서 가장 큰 도시다. 다른 핀란드 주요 도시로는 에스포, 탐페레, 오울루, 투르쿠, 이위배스퀼래, 라흐티, 쿠오피오 등이 있다.

핀란드 인구는 2022년 9월 기준으로 555만 9198명이며, 핀란드 중앙과 남부에 사는 인구 대부분이 핀란드어를 사용한다. 핀란드어는 북게르만어군과 관계 없는 우랄어족의 핀어군에 속한다. 핀란드는 유럽에서 8번째로 큰 국가이며, 유럽 연합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낮은 국가다. 핀란드는 의원내각제 국가이며, 310개 지방자치단체가 있으며, 이 가운데 올란드 제도는 자치행정구역이다. 핀란드 전체 인구 가운데 140만 명이 헬싱키 수도권에 살고 있으며, 이 지역은 핀란드 전체 GDP의 30% 이상을 생산한다. 핀란드 공식 언어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이 사용한 언어는 스웨덴어로 올란드 제도와 핀란드 중부 해안지역 사람들이 주로 사용한다. 핀란드인 절대 다수는 핀란드 복음루터교회를 믿고 있다.

핀란드는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이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9000년 경으로 추정한다. 기원전 5200년에 빗살무늬토기 문화가 핀란드에 들어왔고, 전부문화가 농업과 함께 기원전 3000년부터 기원전 2500년까지 이어졌다.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 때 핀란드는 발트 지역 및 페노스칸디아인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이 시기에 핀란드에는 3개의 주요 문화권이 형성되었는데, 그 문화권은 남서핀란드 문화, 해메 문화, 카렐리야 문화이다. 13세기부터 핀란드는 북방 십자군과 스웨덴의 식민지로 스웨덴에 병합되었다.

1809년 핀란드는 핀란드 대공국이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제국의 자치령이 되었다. 1906년 핀란드는 유럽에서는 최초로 모든 성인에게 선거권을 부여했으며, 세계에서 최초로 모든 성인들에게 공직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핀란드는 핀란드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독립을 선포했다. 1918년 핀란드는 볼셰비키가 이끄는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과 독일 제국의 지지를 받는 백핀란드로 분열되어 내전을 겪었다. 핀란드 왕국이 일시적으로 수립되었지만, 1919년 핀란드 헌법이 도입됨에 따라 핀란드는 공화국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핀란드는 소련과 겨울 전쟁 및 계속 전쟁을 치렀고, 이 과정에서 카렐리야, 살라, 쿠사모의 일부와 페차모주소련에 할양했다.

1950년대까지 핀란드는 농업 국가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이 전쟁 배상을 요구함에 따라 핀란드는 산업화를 시작했다. 핀란드는 노르딕 모델에 기초한 복지 국가를 만드는 한편,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룩하여 고소득 국가가 되었다. 핀란드는 국가경쟁력을 평가하는 교육, 경제, 삶의 질, 인간 개발, 시민의 자유 등의 순위에서 상위권에 있다. 2015년 핀란드 세계 인적 자본 지수와 언론 자유 지수에서 1위를 달성했으며 2011년부터 2016년까지 취약국가지수에서는 가장 안정적인 국가로 꼽혔다. 세계 성별차 보고서에서는 2위였으며, 2018년과 2019년에는 세계행복보고서에서 1위를 달성했다.

핀란드는 1955년 유엔에 가입했으며 중립정책을 표방하고 있다. 1948년 핀란드-소련 조약을 통해 냉전 기간 동안 소련은 핀란드 국내 정치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핀란드는 1969년 경제협력개발기구, 1994년 평화를 위한 동반자 관계, 1995년 유럽 연합, 1997년 유럽-대서양 동반자 의회, 그리고 1999년 유로존에 가입했다.

국가 상징[편집]

국호[편집]

현재 국제적으로 쓰이는 '핀란드'란 이름은 스웨덴어 국명으로 최소 13세기부터 쓰였고 '핀인의 땅'이라는 뜻이다. 원래 '핀란드'라는 이름은 지금의 핀란드 영토 중 투르쿠를 중심으로 한 남서부 해안을 가리키던 명칭으로 수세기 동안 핀란드를 지배한 스웨덴이 핀란드 영토 중 맨 처음으로 정복한 지역이었다. 이후 스웨덴이 동쪽과 북쪽으로 진출해 정복하면서 '핀란드'는 지금의 핀란드 일대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핀란드어로는 수오미(Suomi)라고 하는데, 핀이나 수오미나 본래 뜻과 어원이 명확하진 않다. 수오미는 슬라브어나 발트어로 '땅'을 가리키는 말에서 나왔으며 사미(Sámi)인과 관련있다는 설도 있다. 사미어로 핀란드는 수오프마(Suopma)라고 한다. 민간어원에 따라서 '호수의 나라'를 뜻한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호수는 핀란드어로 '얘르비(järvi)'라고 부르며 이 단어도 핀란드 내에서 지역명 등에 매우 자주 쓰인다.

같은 핀-우그리아어파 계열 언어인 에스토니아어에선 소메(Soome), 카렐어에선 슈오미(Šuomi), 라트비아어에선 소미야(Somija), 리투아니아어에선 수오미야(Suomija)라고 하나 '핀랸디야(Финляндия, 러시아어)', '핀란(Finland, 노르웨이어)', '핀란트(Finnland, 독일어)', '핀란디아(Finlandia, 이탈리아어)', '팽랑드(Finlande, 프랑스어)', '핀니아(Finnia, 라틴어)'와 같이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핀란드를 핀인의 이름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부른다.

과거에는 한자로 분란(芬蘭)이라고 적기도 했으나 현재 한국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국기[편집]

국기
핀란드 국장

핀란드의 국기는 Siniristilippu(청십자기)라고도 불리며, 20세기 초부터 사용하였다. 흰색 배경에 파란색 스칸디나비아 십자가 특징이다. 1918년 법률적으로 공식적인 핀란드의 국기로 인정되었다.

핀란드의 국기는 일반 국기와 국가 기구에 의해 사용되는 국기로 구분된다. 모든 핀란드 국민들은 필요에 따라 일반 국기를 게양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반면, 정부 국기는 국가 조직체를 제외한 어떤 단체나 사람들의 경우 그 사용이 제한되어 있다. 이 깃발은 파란 십자 가운데에 국장(붉은 정사각형 바탕의 바닥에 타타르인의 굽은 칼이 놓여 있으며, 유럽의 칼을 들고 있는 금색 사자)이 추가되어 있다.

핀란드의 국기는 스칸디나비아 십자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핀란드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 많은 핀란드 애국자들이 나라를 위한 특별한 국기를 만들고 싶어했지만, 결국 19세기의 디자인을 다시 채택했다. 국기의 파란색은 핀란드의 수많은 호수와 하늘을, 흰색은 겨울의 눈에 덮인 하얀 토지를 의미한다. 이 색상 조합은 핀란드의 각종 정부 기관, 군사 기관, 마을에서 수세기 동안 사용되어 왔다.

국장[편집]

1580년, 스웨덴 왕 요한 3세가 자신의 왕자시절 영지였던 핀란드를 대공국으로 격상시키면서 확립했다. 기원은 13세기의 스웨덴 국왕이었던 에리크 10세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재의 문장은 스웨덴 웁살라 대성당에 있는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석관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의미는 스웨덴의 상징물인 사자가 한 손에는 서쪽 스웨덴을 상징하는 직선 검을 휘두르고 있고 두 발은 동쪽 러시아를 상징하는 곡선 검 시미터를 밟고 서 있는 것이다. 다분히 스웨덴 기준이고 러시아 입장에선 좀 기분나쁠 수도 있겠으나, 핀란드가 오랫동안 스웨덴의 일부로 간주되었던 역사를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1809년, 프레드릭스함 조약으로 핀란드가 러시아 제국에 넘어간 뒤에도 러시아를 상징하는 쌍두독수리의 가운데에 작게 남았고 독립 후 국장으로 확정되었다. 군주제 분위기가 나는 국장이지만 공화국인 지금까지 잘 쓰고 있다.

국가[편집]

핀란드의 국가 제목은 '우리의 땅(Maamme)'이다. 핀란드어에서 maa는 '땅, 나라' 등을 의미하고, -mme는 접미어로 '우리의'라는 의미를 가진다. 1848년에 스웨덴계 핀란드인 요한 루드비그 루네베리(Johan Ludvig Runeberg)가 작사했고, 독일계 핀란드인 프레드리크 파시우스(Fredrik Pacius)가 작곡했다. 원 가사는 스웨덴어로 쓰여 있었으며, 이후 파보 카얀데르(Paavo Cajander)가 핀란드어의 가사로 개사했다. 가사는 11절로 이루어져 있으나 일반적으로 1절과 11절만 불리고 있다.

특기사항으로, 에스토니아 국가와 후렴구가 핀란드는 두 번, 에스토니아는 한 번인 것만 빼면 완전히 동일한 멜로디를 사용한다. 가사는 핀란드 쪽이 좀 더 빨리 제정되었다.

비공식 국가 취급받는 음악으로는 핀란디아가 있다.

지리[편집]

핀란드의 지형도
라플란드
핀란드 남동부의 풍경
북부 카렐리야의 삐에리넨호(Pielinen)

핀란드는 약 60°~70°N의 위도와 20°~32°E의 경도 사이에 놓여있으며 세계에서 최북단 국가 중 하나이다. 핀란드는 북쪽은 노르웨이, 서쪽으로는 스웨덴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서쪽은 보트니아만, 남쪽은 발트해, 남쪽은 핀란드만과 맞닿아 있다. 보스 만 건너편은 스웨덴, 핀란드 만 건너편은 에스토니아다. 동쪽에서 남쪽 걸쳐 러시아와 육로로 국경을 접하고 있다. 또한 스칸디나비아반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발트해를 중심으로 페노스칸디아 순상지의 일부를 차지하는 핀란드는 오랫동안 기반암이 삭박(削剝)되어 낮고 평평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기반암은 선(先)캄브리아대의 결정암과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4기에는 전국토가 스칸디나비아 빙상(氷床)으로 뒤덮여 빙식(氷蝕)을 받았으며 빙상이 물러간 뒤에는 많은 퇴적물이 남아 있었다. 그 후 짧은 기간 동안 하천의 침식이 있었으나 심하지 않았으므로 퇴적물은 빙상이 물러날 당시의 지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빙상에 의한 퇴적지형에는 빙상의 이동방향을 나타내는 오스와 빙상후퇴(氷床後退)의 정체기를 나타내는 단퇴석렬(端堆石列)이 있다. 오스는 빙하기에 빙하 밑바닥에 흐르고 있던 강의 지반에 모래와 자갈이 조금 쌓여 있는 높은 지대이며 에스커(esker)라고도 한다.

오스는 북서쪽에서 남동방향의 것이 많고, 남부에는 '살파우셀케(Salpausselk)'라고 불리는 두 줄의 단퇴석렬이 동서 방향으로 이어져 있으며 이곳에 도로나 취락이 생겨났다. 빙상의 후퇴와 육지의 상승에 의한 해안선의 변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현재는 빙상이 소실됨으로써 아이소스타시(isostasy:地殼平衡說)적인 융기가 계속되어 남해안에서는 연 4mm, 발트해의 깊은 곳에서는 연 12mm 정도 상승을 계속하고 있다. 이로 인해 남해안과 서해안에서는 새로운 해안평야가 생기고, 섬 숫자도 늘어나고 있다. 빙식으로 생긴 요지(凹地)는 물이 가득 채워져 호수가 되었으며, 호수의 면적은 국토 면적의 10%에 이른다. 국토의 최고봉은 북서쪽 국경 부근의 할티아툰투리산(1,324m)이며 200m가 넘는 지역은 북부와 동부 지역뿐이고 평균 높이는 150m이다. 이것은 유럽 전체의 평균높이 330m의 절반 이하이다.

핀란드는 호수와 섬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호수와 섬이 많다. 호수 187,888개와 섬 179,584개가 있다. 사이마호는 유럽에서 4번째로 크다. 핀란드에 있는 큰 호수는 다음과 같다.

  • 네시호
  • 빠이엔네호
  • 사이마호(Saima)
  • 오리호
  • 삐에리넨호
  • 오울루호
  • 로카호
  • 이나리호

핀란드 국토의 4분의 1 정도는 북극권에 있어 여름에는 백야 현상이 관찰된다. 핀란드 최북단에서는 여름에는 73일 동안 해가 지지 않고, 겨울에는 51일 동안 해가 뜨지 않는다.

기후[편집]

핀란드의 날씨는 정말 괴팍하기로 유명하다. 멕시코 난류의 영향을 받는 지역치고는 추운 편에 속한다.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남부는 Dfb, 중북부는 Dfc로 연중 내내 강수가 있고 여름이 선선한 냉대기후에 해당된다. 본토 전지역이 죄다 냉대기후에 속하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에스토니아와 핀란드가 유일하다. 일단 위치부터가 몹시 북쪽인 데다가 대륙에 있기 때문이다. 헬싱키의 2월 평균기온은 바다의 영향으로 -4.7℃을 띄어 비교적 따뜻하다. 한국과 비교하면 제천과 비슷하다. 하지만 남부 지방이라도 탐페레의 2월 평균기온은 -6.9℃로 상당히 춥다. 북쪽으로 갈수록 추위는 심해져 로바니에미의 1월 평균기온은 -11.8℃에 달한다. 핀란드에서 가장 춥다는 우치오키(Utsjoki)의 경우 1월 평균 기온은 -14.0°C. 12월~1월 한겨울철 고위도에서는 아침시간 기온이 -30℃ 정도인건 우스울 정도다. 참고로 핀란드의 역대 최저기온은 1999년에 기록된 -51.5°C 이다.

매서운 바람은 없지만, 냉기가 바닥부터 올라와 발바닥이 시려울 정도다. 거기에 지형도 비교적 평탄하고 대부분의 도시가 호숫가에 위치해있어 습도가 연일 80%대일 정도라 체감온도도 춥다.

단순 수치로만 보면 상당히 춥게 보이지만, 북위 60°~ 70°의 높은 위도를 감안하면 인접한 러시아에 비해 덜 추운 편이라 볼 수 있다. 캐나다, 러시아처럼 대륙성 기후가 아니라 연교차가 작아서 그런 것도 있기에 이들과 비교했을 때 연평균 기온은 영상 2도 정도로 겨울 기온에 비해 의외로 따뜻한 편이 아니다. 다른 북유럽 국가들처럼 연교차가 동위도에 비해 작은 만큼 여름도 크게 덥지 않다.

핀란드는 북유럽 극지로서 겨울엔 극야로 인해 해가 뜨지 않는 나날이 이어진다. 특히 핀란드에서도 중남부 지역인 탐페레만 해도 12월엔 해가 10시에 떠서 2시에 진다. 로바니에미 근처로 가면 아예 해가 뜨지 않은 채 몇 달씩 지난다. 대신 여름에는 정반대로 백야로 인해 몇 달씩 해가 지지 않으며 남부지역 또한 새벽 2시 반에 떠서 밤 10시가 되어서야 진다.

역사[편집]

선사 시대 ~ 중세 시대[편집]

중세 지도에 실린 핀란드, 카르타 마리나(1539년)의 일부다.
서기 814년 북유럽

빙하기 때 핀란드 땅을 뒤덮었던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서 석기시대인 기원전 8000년 무렵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첫 거주자들은 수렵채집인들이었을 것이다. 기원전 5300년 즈음부터 토기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랄어족의 일파인 핀-우그리아어파 사용자들이 동쪽으로부터 핀란드에 들어온 때는 석기시대 무렵이었을 터이다. 핀란드어와 북부의 소수민족인 사미족이 사용하는 사미어는 둘 다 핀-우그리아어파에 속한다.

기원전 3200년 무렵 핀란드 남부에 전부(전투용 도끼) 문화, 혹은 빗살무늬토기 문화가 들어오면서 신석기 시대 농경문화가 시작한 듯하다. 하지만 그 후로도 북부와 동부 사람들은 주로 수렵과 어업으로 먹고 살았다. 청동기 시대(기원전 1500년-기원전 500년)와 철기 시대(기원전 500년-서기 1200년)에는 스칸디나비아와 루스 북부, 발트해 연안지방과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 시기에는 로마 제국의 유물도 발견되었다.

3세기 이후로는 수장과 같은 귀족 집단이 있었음을 화려하게 장식된 무덤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이킹 시대에도 핀란드는 중앙권력사회로 발전하지 않았다. 스웨덴의 지배를 받기 이전에는 각 족장들이 난립하는 일종의 군장국가들이 존재했다. 바이킹들은 오늘날에 핀란드에 해당하는 지역에 우랄어족 핀인들을 정기적으로 공격하여 노예로 삼았고, 핀란드 동부에서는 카렐인들과 이조라인들이 노브고로드 공화국과 교류와 충돌을 반복했다.

바이킹 시대 이후 핀란드 사회에 일어난 중대한 변화는 가톨릭이 전래되고 스웨덴 왕국의 영토로 편입된 것이다. 12세기 중엽 스웨덴 국왕 에리크 9세십자군이 핀란드에 진입해옴으로써 가톨릭이 전파되었다고들 여겼는데,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는 11세기부터 전파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13세기에 스웨덴이 핀란드 땅을 완전히 정복하여 19세기 초까지 약 600여 년 동안 스웨덴 국왕이 통치하였다.

역대 스웨덴 왕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핀란드에서 스웨덴 영토를 확장했다. 자세하진 않지만 스웨덴의 섭정 비르예르 백작이 1238년, 혹은 1249년에 십자군 원정으로 핀란드 지배의 터를 단단히 다졌다. 1249년 무렵에는 도미니코회가 핀란드에 들어와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3세기 무렵에는 투르쿠에 주교구가 설치되었는데, 주교 중 상당수는 스웨덴인 또는 개종한 핀인으로 채워졌다. 비슷한 시기 에스토니아인 대신 독일인만 주교로 임명되던 에스토니아에 비하면 핀란드의 상황이 비교적 나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핀인 지방 유력자들은 스웨덴 왕국에 봉건적 의무를 수행하였으나, 화전농업이 주가 되던 핀인들의 생활 양식 때문에 농노제는 확립되지 않았다. 스웨덴의 영향은 점점 강해져 스웨덴인은 핀란드 남서부와 북서쪽 해안가, 올란드 제도, 투르쿠와 올란드 제도 사이 여러 섬에 주로 정착하였다. 투르쿠는 스웨덴 왕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가 되었고, 독일인 상인들과 장인들도 투르쿠에 거주하였다. 하지만 투르쿠 밖의 다른 지역에서는 도시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스웨덴어는 핀란드의 다른 지역에서도 높은 계층이 사용하는 언어가 되었다. 지배 계층은 스웨덴인과 독일인 귀족들이 거의 대부분이었지만 스웨덴계 핀란드인 하위 귀족들도 생겨났다.

한편 핀란드 동쪽의 카리알라는 노브고로드 공화국에게 지배를 받았다. 카렐인은 언어나 유전 그룹에서 핀란드인과 가까운 관계로, 스웨덴과 노브고로드 공국은 핀란드와 카리알라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다. 1299년 스웨덴은 비보리 요새를 세워 핀란드 동부 국경을 방어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스웨덴과 노브고로드 공화국 간 분쟁은 1323년에 뇌테보리(Nöteborg)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되며 일단락되었으나, 곧 스웨덴 국왕 망누스 4세가 '이단 집단'을 정벌하려 '십자군 원정'을 시도하였다.

뇌테보리 평화조약의 해석을 두고 보트니아 만(灣)의 북쪽 해안과 핀란드 동부 사보(Savo) 땅은 스웨덴과 노브고로드 사이 최고 분쟁지역이 되었고 그 후로도 때때로 작은 분쟁이 계속되었다. 한편 스웨덴 왕국은 1380년대에 내전에 휩싸였다. 결국 덴마크 왕국의 마르그레테 1세가 스웨덴 귀족들에게 지원받아 1389년 스웨덴 국왕 알브렉트를 몰아내었고, 마르그레테 1세의 후계자 포메른의 에리크가 1397년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의 연합왕으로 즉위할 적에 핀란드도 편입되었다.이후 130년간은 (스웨덴과 핀란드를 모두 다스리던) 스웨덴 귀족들과 덴마크 사이 마찰로 점철되었다. 핀란드도 이따금 이런 분쟁에 휘말렸지만 15세기는 대체로 안정되고 풍족한 시기였다. 인구는 증가하였으며 경제는 발전하였고 14세기 초 파리 대학에 핀란드 출신 학생들이 다녔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하지만 15세기 후반 동쪽 국경의 사정이 달라졌다. 모스크바 대공국이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정복하여 통일된 러시아 국가의 기초를 다졌고, 곧 스웨덴과 모스크바 대공국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1495-97년에는 이들 사이에 격렬한 전쟁이 벌어졌는데 비보리 요새가 포위되었다가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다.

16세기 ~ 18세기: 스웨덴 제국, 이성의 시대[편집]

1658년 로스킬레 조약 이후의 스웨덴 제국

1521년, 칼마르 연합은 결국 와해되었고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스웨덴을 안정된 독립 왕국으로 만들면서 핀란드를 이에 포함시켰다. 그의 지배 아래 스웨덴과 함께 핀란드에서도 루터교로 개종하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여기에는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선제후국의 비텐베르크에서 마르틴 루터에게 수학한 미카엘 아그리콜라의 공이 컸다. 아그리콜라는 신약성서를 핀란드어로 번역하여 1551년 출판하였다. 또 국가 행정도 크게 개혁되었다. 1550년에는 헬싱키가 건설되었다. 하지만 헬싱키는 건설 후 처음 2백년 동안은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1560년 구스타브 바사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세 명이 돌아가며 왕이 되었다. 에리크 14세는 영토 확장 정책을 펴 에스토니아의 탈린을 스웨덴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그 후 160년간 리보니아를 두고 스웨덴과 덴마크, 폴란드-리투아니아, 루스 차르국 간에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되었다. 핀란드인들은 징집과 높은 세금으로 크게 고생하였다. 결국 1596년에 칼 9세의 사주를 받아 '곤봉 전쟁'이라 불리는 농민 반란이 일어났지만 이는 시기스문드 지지 주지사였던 클라우스 플레밍에 의하여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16세기에는 농경지가 확대되었다. 스웨덴 왕실은 사보 지역의 농민들이 핀란드 중부를 개간하는 것을 장려했다. 이로 인해 원래 있던 사미인은 밀려나고, 카렐인들은 수렵, 어업지대를 빼앗기기도 했다. 1580년대에는 핀란드인 농민과 카렐인 간에 게릴라식 유혈 충돌도 벌어졌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군사 개혁을 단행하여 스웨덴의 군대를 유럽 최고 수준으로 훈련시키고 핀란드를 동방 전초 기지로 활용하였다. 리보니아 정복은 완수되었으며 당시 내분 상태이던 루스 차르국의 이조라(Ижора)가 스웨덴에게 넘어가면서 핀란드와 에스토니아가 육로로 연결되었다. 1630년에는 스웨덴군이 유럽 중부에서 한창 벌어지던 30년 전쟁에 개입했다. 이 때 핀인으로 이루어진 경기병대 '하카펠리타트'(Hakkapeliitat)는 용맹성과 잔혹성으로 악명을 떨쳤다.

현재 헬싱키 내에 있는 수오멘린나는 6개의 섬에 지어진 18세기 해상 요새로 구성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1648년 30년 전쟁에 마침표를 찍은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스웨덴은 유럽의 강대국으로 급부상하였다. 전쟁 기간 중 핀란드에서는 몇가지 중대한 발전이 있었다. 1637년-1640년과 1648년-1654년에는 페르 브라헤 백작이 핀란드 총독으로 재임했다. 그는 수많은 개혁을 단행하고 여러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의 재임은 핀란드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인정된다.1640년 브라헤 백작의 건의에 따라 크리스티나 여왕은 핀란드 최초의 대학인 투르쿠에 오보 아카데미(Åbo Akademi)를 세웠다. 오보 아카데미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여성이 세운 대학이라는 말이 있다.1642년 드디어 성경 전체가 핀란드어로 출판되었다. 하지만 높은 세금과 계속되는 전쟁, 추워진 기후(소빙하기)로 인해 스웨덴 제국 시대는 핀란드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시기였다. 1655년에서 1660년까지 다시 전쟁이 일어나 핀란드인들은 리보니아, 폴란드, 덴마크의 전장에 보내졌다. 1676년, 칼 11세 치세에 스웨덴은 절대왕정을 완성하였다.

핀란드 중부와 동부에서는 타르가 대규모로 생산되어 수출되었다. 1697년-1699년에는 기후로 인한 기근으로 인해 핀란드 인구의 30%가 사망했다. 곧이어 스웨덴 왕 칼 12세의 무리한 군사정책으로 시작된 대북방전쟁에서 핀란드의 국토는 표트르 대제가 이끄는 루스 차르국의 대대적 침공으로 일대 타격을 입었다. 18세기 핀란드는 루스 차르국 군대가 점령했으며 비푸리를 비롯한 핀란드의 남동부 일대는 뉘스타드 조약을 통해 루스 차르국에 넘어갔다. 스웨덴은 강대국 지위를 상실하였고 제국을 선포한 러시아는 새로이 강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새로이 스웨덴 권력을 장악한 하타르 당은 러시아 제국이 안나 이바노브나의 사망과 이반 6세의 즉위로 혼란한 틈을 타 표트르 대제의 딸 옐리자베타를 지원하여 대북방전쟁의 실지를 되찾으려 했으나 옐리자베타가 너무 빨리 러시아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실패로 끝났고, 스웨덴의 속셈을 알아챈 옐리자베타는 1741년에 스웨덴을 침공하였다. 작은 분노(Pikkuviha)로 알려진 이 시기에 많은 핀란드인이 러시아로 끌려가거나 굶어 죽었다. 하타르당이 일으킨 이 전쟁은 1743년 오보 조약으로 종결되었고 스웨덴은 퀴메네 강 동쪽부터 사이마 호에 이르는 영토를 추가로 할양하였다. 이로서 스웨덴이 러시아로부터 핀란드를 방어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구스타브 3세는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1788년, 예카테리나 2세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한 전쟁을 이용하여 러시아를 상대로 대 러시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무승부에 그쳤으며 전쟁 초반에는 핀란드 장교들이 무장 봉기를 일으켜 스웨덴과 핀란드의 분기점을 제공하고 말았다.

19세기: 러시아 제국령 핀란드[편집]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나폴레옹과 우호 관계를 맺게 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친영국, 반나폴레옹 국가였던 스웨덴으로 하여금 영국과의 동맹 관계를 청산하고 대륙봉쇄령에 가담할 것을 요구했다. 나폴레옹을 혐오하던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영국과의 동맹을 강화하자 이를 빌미로 러시아는 1808년 2월 21일 스웨덴을 침공하여 핀란드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던 스웨덴은 러시아 제국군의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며 러시아가 승리하면서 1809년 9월 17일 체결된 프레드릭스함 조약으로 토르니오강무오니오강 동쪽의 모든 스웨덴 영토가 러시아 제국에 할양되었다. 1809년 3월 29일 포르보에서 핀란드 귀족들의 신분의회에서 알렉산드르는 스스로 핀란드 대공을 겸임하는 동군연합 형태의 핀란드 대공국을 창설하여 핀란드를 다스리기 시작했는데, 알렉산드르는 직접 다스리는 유라시아의 여러 소수민족 지역들보다 더 높은 자치권을 핀란드에 부여했으며 1772년에 제정된 구스타브 3세의 헌법을 비롯해 정치, 행정, 사법, 사회 제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했다. 러시아 정교회를 강요하지 않고 루터교의 지위가 인정되었으며 심지어 공식 언어도 스웨덴어가 유지되었다. 심지어 1812년에는 러시아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 핀란드(Ста́рая Финля́ндия)로 알려진 비보르크 현(Выборгская губерния)과 고글란트를 핀란드 대공국에게 되돌려주었다.

알렉산드르 1세가 이렇게 핀란드를 유화적으로 대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핀란드는 스웨덴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의 다른 지역보다 사회와 제도가 선진적이었고, 지나치게 무단정치를 시행하면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가려는 여론이 일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핀란드의 수도 투르쿠에서 화재가 일어나자 핀란드의 수도를 스웨덴에 가까운 투르쿠에서 좀 더 동쪽에 있는 헬싱키로 옮겼고, 헬싱키에 대대적인 투자를 해서 초기에는 러시아에 대한 핀란드인의 여론이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헬싱키의 랜드마크인 헬싱키 대성당이 바로 이 시기 러시아가 핀란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지어준 것이다. 러시아의 국교인 정교회 성당도 아닌 루터교 교회인데도.

이렇게 식민지가 아닌 동군연합으로 통치를 시작했고 초기 핀란드 자치에 호의적이었던 알렉산드르 1세 시기까지만 해도 스웨덴 시절과 달리 핀란드에게 높은 자치권을 주었고 스웨덴 시절에 비해 불만이 크지 않았으나, 알렉산드르 1세가 죽은 틈을 타 아르세니 자크렙스키(Арсе́ний Андре́евич Закре́вский) 총독은 핀란드를 러시아와 동화시키는 것을 적극 추진했다. 많은 유럽 국가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타협을 시도하는 와중에도 러시아는 전제군주제를 고집했고 이것에 대한 핀란드인의 불만은 상당했다. 특히 1848년 혁명은 이러한 불만을 확산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핀란드 민족주의가 대두하여 핀란드어 사용 움직임 엘리아스 뢴로트는 1835년-1849년에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를 저술하여 민족주의에 불을 붙였다. 핀란드 민족주의의 대두를 불안하게 여기던 러시아 제국 정부와 친 스웨덴 성향의 스웨덴계 귀족들은 핀란드 민족주의를 탄압했다. 크림 전쟁을 계기로 핀란드의 여러 지식인들은 러시아 정부의 감시를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이후 북유럽에서 등장한 범스칸디나비아주의의 쇠퇴, 알렉산드르 2세 황제의 관용 정책과 근대화 정책을 계기로 핀란드 민족주의는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2세는 인민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고, 아버지의 암살을 본 알렉산드르 3세는 반동 정책과 강력한 소수민족 러시아 동화 정책, 소수민족의 민족주의 탄압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많은 핀란드인의 반감을 샀다. 이러한 직접 지배 정책은 알렉산드르 3세에 뒤이어 즉위한 니콜라이 2세 치세에도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결국 핀란드 총독을 역임하고 있던 니콜라이 보브리코프가 암살당했다.

1892년 핀란드어는 드디어 스웨덴어와 비교할 만한 공식 지위를 얻게 되었고 곧 핀란드어가 정부와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1906년에는 일원 국회가 출범하여 보통 선거제로 뽑혔는데, 유럽에서 최초로 여성들에게도 선거권이 주어졌다.

독립과 내전[편집]

1918년 헬싱키에서 일어난 핀란드 내전 말기에 백승 퍼레이드를 이끄는 총책임자로서 핀란드 군 지도자 겸 정치가인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 본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핀란드도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결정타로 1917년 2월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었고 이는 동군연합이라는 핀란드 통치 구조가 흔들리는 일이었다. 러시아 공화국 임시정부는 핀란드를 달래기 위해 1899년 이후 핀란드의 자치를 축소하기 위해 취했던 조치를 모두 폐기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핀란드 사회민주당이 1917년 6월 완전한 주권 달성을 당의 목표로 선언, 결국은 독립해서 1918년까지 잠시 독일의 보호국 핀란드 왕국이 수립되었고, 독일계 헤센카셀 가를 핀란드 왕가로 추대하는 입헌군주국을 계획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배하면서 핀란드는 완전 독립을 이루었고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러시아가 내전을 겪은 것과 마찬가지로 각각 적위군과 백위군으로 갈라져 핀란드 내전이 벌어졌다. 여기에 소련과 독일 제국이 서로 지원하면서 전쟁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군대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적위군에 블라디미르 레닌이 병력 지원을 많이 해주지 않았고, 군대 체계가 잘 갖춰진 백위군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얻은 많은 피해로 적은 인원수가 파견되긴 했지만 독일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두었다. 내전 기간 중에는 백위군이 저지른 학살로 전쟁이 일어났던 1월~5월 사이에 적위군과 혁명을 지지했던 노동자들이 5만 명 이상 사망했는데, 이는 전체 인구의 1~2%에 달했다. 그러나 이런 학살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반발했다. 이후 핀란드의 정치가 민주적으로 정착되자 다양한 정치집단이 나타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유럽에 퍼졌던 극단주의적인 정치 상황에서도 핀란드인들은 극우 정당에 준 지지율은 많아야 5~6%에 불과했다. 이때 백위군을 지휘했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Carl Gustaf Emil Mannerheim)은 제2차 세계 대전 후반에 대통령 직위를 수행하기도 했다.

겨울전쟁과 계속전쟁[편집]

핀란드와 소련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특히 내전 이후 핀란드 내에는 반공 감정이 강했다. 하지만 소련은 핀란드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너무 강한 상대였다.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복원하려는 야심으로 이오시프 스탈린겨울전쟁을 일으켰다. 이미 1939년 8월 23일, 소련은 나치 독일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어 중부유럽, 동유럽, 북유럽의 일부를 독일과 소련이 각각 분할하기로 하는 비밀 의정서를 만들었다. 이 의정서에서 핀란드는 소련의 영향권에 두기로 인정받았다. 이후, 스탈린은 발트 3국을 점령하고 핀란드에게도 영토 일부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핀란드는 이를 거절하였고 1939년 겨울전쟁이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소련은 발트 3국과 마찬가지로 핀란드도 간단히 점령한다는 계획이었으나 핀란드는 국가의 생존을 걸고 저항하였다.

소련군은 수가 적은 핀란드 국방군을 무시했다가 물량 공세로 겨우 힘겨운 승리를 거두었다. 소련이 합병한 핀란드의 영토에는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현재까지도 러시아의 영토로 남았다. 독소전쟁이 개전되자 핀란드는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고 점령당한 땅을 회복했지만, 추축국이 패배할 듯하자 소련과 휴전하고 연합군 측으로 돌아서서 역으로 독일군을 몰아냈다. 일부 병사는 한때는 적이었던 소련군과 함께 베를린 공방전까지 참여하기도 했고 소련 편에서 싸웠던 핀란드 공산군도 있었다. 반대로 핀란드가 소련과 협상하자 독일군 내에 있던 핀란드인들 대다수는 자국의 이러한 결정에 반대하며 독일군에 남아 베를린 결전까지 참여하기도 했다.

1944년 3월 말에 이루어진 모스크바 휴전 회담 때 소련은 6억 달러의 배상금을 요구하였다. 배상금 이외의 조건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4월 12일에 핀란드 국회는 소련의 강화 조건을 모두 거부했다. 소련은 핀란드가 독일과 동맹 파기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9월 15일까지 독일군 병력을 핀란드 영토 내에서 축출하는 조건으로 재강화 협상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5개월 후 강화회담이 다시 열렸다. 소련은 이전과 같은 조건에 해군 기지 임차, 병력 감축 등의 요구 사항을 추가했지만 전쟁 배상금은 3억 달러로 줄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미국-소련 간 냉전이 일어나려는 상황에서 중립을 선언하며 마셜 플랜을 거부했고, 소련에는 배상금 3억 달러를 5년 만에 모두 지불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편집]

핀란드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에 양도한 지역들.

전후 재건은 점차 이루어졌다. 전후 핀란드의 지도자들은 생존을 위하여 구 소련과의 친선 관계 유지에 최선을 다했으나 오히려 서유럽과의 관계가 더 긴밀했고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핀란드를 서방과의 무역창구로 이용하려는 구 소련의 경제정책에 따라, 주요 무역국가는 소련이었는데, 소련과의 원만한 무역관계는 핀란드가 경제발전을 하는 데 기여했다. 이런 중립적인 관계를 통해 서방측과의 교역도 계속하면서 소련으로부터 여러 가지 우방국의 혜택을 받아서 낮은 가격으로 원유나 지하 자원을 공급받아 1970년대 오일 쇼크가 벌어졌을 때도 핀란드는 다른 국가들보다는 그래도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하여 이득을 보기도 해서 핀란드와 소련은 서로 많은 무역을 했다. 핀란드는 소련과 두 번째로 많은 무역을 했는데, 핀란드에서 소련으로 목재가 많이 수출되었다. 소련의 레닌그라드와 에스토니아 SSR의 위치는 핀란드와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서구 세계의 문화가 동구권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동시에 냉전 기간에는 소련의 눈치를 보아야 했고 마셜 플랜을 포기했지만 바르샤바 조약기구 가맹 등을 하지 않는 대신 T-72 전차와 MiG-21 전투기 같은 소련 무기로 군대를 무장했다. 소련의 심기를 거스르게 할 수 있는 주장, 학설 등은 자체적으로 자제하기도 했다. 이렇게 소련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거나 유화적으로 지내면서도 공산화하지는 않는 것을 '핀란드화'(독 Finnlandisierung, 영 Finlandization)라고 칭하기도 했다.
우르호 케코넨(Urho Kekkonen)은 1956년부터 1982년까지 핀란드에서 가장 오래 재임한 대통령이었다.

냉전 시기에는 서유럽 자유진영과 소련 사이에서 중립국의 지위에 있어서 베트남 전쟁 때 베트남 난민들이 핀란드로 유입되기도 했고, 소련 쪽에서 망명한 이들도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핀란드에 정착하곤 했다. 최근에는 아프리카, 이란 등의 정치 망명객들이 선호하는 곳이기도 했다.

1990년대 전반에 공산권이 붕괴하고 소련이 해체하자 소련 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얻던 핀란드도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워졌고, 소련에서 독립한 핀란드 옆 에스토니아도 영향을 많이 받아서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좋지 않은 상황에도 1990년대 말부터 핀란드는 다시 회복을 시작했다. 1995년 1월 1일 핀란드는 스웨덴, 오스트리아와 함께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아직도 러시아와는 국경을 맞대고 있고, 워낙 두 국가가 생활 수준 차이가 많이 나서 러시아인이 들어와 문제를 일으켜 러시아와는 마냥 사이가 좋지는 않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러시아와 가장 긴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리적 위치상 러시아와 여전히 교류를 하고 있기는 하다. 냉전이 끝난 현재는 유럽연합 가입국으로 레오파르트2와 F/A-18이 주전력이 되었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핀란드에서도 스웨덴과 함께 NATO에 가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크게 일어났고, 러시아의 공갈협박에도 불구하고 5월 12일 NATO가입을 공식화했다.

정치[편집]

핀란드의 의회 에두스쿤타
핀란드 국회의사당

정부[편집]

핀란드의 정부구성 내용을 담은 헌법은 2000년 3월 제정되었고 2012년 3월 개정을 거쳐 적용되고 있다. 핀란드는 의회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공화국으로 대통령과 수상을 두고 있다.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최대 2회까지 연임이 가능하다. 핀란드는 일종의 준대통령제로 헌법개정 이후 대통령의 권한이 축소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는 통수권자로서 국무회의와 군사령관과 함께 외교와 안보방위를 지휘한다. 또한 2012년 수정된 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유럽연합과의 관계를 제외한 모든 대외관계 업무를 지휘한다. 2008년 당시 마르티 아티사리(Martti Ahtisaari) 대통령은 UN의 코소보 특사직을 수행하면서 평화정착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46년부터 핀란드 대통령은 대부분 사회민주당(SDP)과 중도당(Center Party)에서 배출되었다. 그러나 2012년 3월에 취임한 사울리 니니스퇴(Sauli Niinistö) 대통령은 보수당(Conservative Party) 출신으로는 최초로 대통령에 오른 인물로 기록되었다.

의회선가가 종료되면 내각 혹은 정부구성을 위한 정당간 협상이 진행되어 다수당을 중심으로 인선이 이루어진다. 핀란드 정치에서는 특정 정당이 의원의 과반수를 점하기 어렵기 때문에 주요 정당간 연정을 통해 행정부가 구성된다. 이에 따라 수상은 다수정당에서 배출되고 재무부 등 주요 부처 장관은 제 2정당에서 인선이 이루어진다. 수상과 부수상은 의회선거 이후 대통령의 지명으로 임명되며 의회는 반드시 대통령의 지명을 승인해야 한다. 핀란드 정치시스템에서는 수상이 실질적인 권력을 갖는데, 수상은 국무회의 혹은 행정부를 통해 13개 부처의 장관을 임명하고 이후 대통령 의회의 재가를 받는다. 핀란드는 전통적으로 국회와 행정부에 여성진출이 활발한 국가로 행정부를 구성한 정당과 무관하게 여성의원과 행정부 내 여성장관 비율은 1/3을 상회한다.

의회와 정당[편집]

에두스쿤타(Eduskunta)로 불리는 의회는 단원제이며 의원수는 200명이고 임기는 4년이다. 의원은 인구비례에 따라 구성된 선거구에서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각 정당은 획득한 득표수에 비례하여 정부 부처의 장관에 임명된다. 입법부로서 의회는 입법과 함께 내각의 사임과 대통령에 대한 거부권(veto)을 통해 행정부 견제기능을 갖는다. 의회는 또한 행정부에 대한 불신임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1957년 이후 이러한 사례는 없다. 1906년 의원선출을 위한 직접투표 시행 이후 현재까지 사회민주당(SDP), 중도당(Center Party), 국가연합 혹은 보수당(National Coalition, Conservative Party) 등 3개 정당간 경쟁구조가 형성되어 왔다. 이들 3개 정당은 매 의원선거마다 전체 득표의 65-80%를 점하여 왔다.

그러나 오랜 기간 지속된 사회민주당, 중도당, 보수당 3당 구조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민자 유입 등 여러 정치경제적 변화로 새로운 정당들이 부상하고 있는데, 좌파와 중도우파 등의 여러 정치적 성향이 합쳐진 대중정당인 핀란드당(Finns Party), 녹색연대(Green League), 좌파연합(Left Alliance) , 스웨덴국민당(RKP) 등이 있다. 또한 1940년대 이후 수십여 년 간 공산당이 제 4당의 위치를 가졌지만 냉전의 종식과 함께 공산당은 쇠퇴하였다.

핀란드 정치에서 사회민주당은 전통적으로 숙련노동자와 화이트칼라 노동자, 소농과 전문직 등 노동계 전반에서 고루 지지를 얻는 정당이다. 사회민주당은 노동계에 확고한 지지기반을 두기 때문에 노조와도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왔다. 이에 따라 사회민주당은 1907년 이래로 거의 대부분의 의회선거에서 다수를 점하여왔다. 보수당으로도 불리는 국가연합은 탈규제, 정부지출 최소화 그리고 낮은 조세율 등 기업과 산업계의 이해를 대표하는 정당이다. 이와 같이 사회민주당과 보수당은 정치적 노선을 달리하지만 양 당은 모두 복지국가 시스템을 고수하며 핀란드의 경제적 이익을 고려하여 1995년 핀란드의 유럽연합(EU) 가입과 1999년 유로존 가입을 지지하였다.

사회민주당과 보수당에 대항하는 중도당(Center Party)은 주로 농촌지역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고 농업부분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정당이다. 이러한 노선으로 중도당은 유럽연합과의 관계에서 사안에 따라 찬반입장을 표명하여 왔다 한편 스웨덴국민당(RKP)은 핀란드 내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국민들을 지지기반으로 소수정파로 오랜 기간 존속하여 왔다. 스웨덴국민당은 핀란드 자치령으로 스웨덴어를 공용으로 사용하는 올란드제도(Åland islands)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헌법에 의해 수상은 대통형의 제가를 받아 의회해산을 결정할 수 있다.

사법부[편집]

핀란드 대법원

핀란드 사법부는 스웨덴의 사법체계와 로마법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였으며 민사, 형사 및 행정법원으로 구성된다. 핀란드 법원은 민형사 사건은 지방법원, 지방항소법원, 대법원에서 다루고 이외에 행정법원으로 일반행벙법원과 최고행정법원으로 구성된다. 고위공무원의 범죄를 다루는 탄핵재판소는 별도로 구성되어 있다. 핀란드는 유럽연합에서도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가 높고 범죄율이 낮은 국가이지만 살인사건과 같은 일부 중범죄는 서유럽 평균치를 웃돈다. 핀란드는 1970-80년대에 정부의 부정부패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경제개혁을 통해 공공조달의 투명화와 공공부분의 독점사업 폐기 등 여러 개혁과 1995년 유럽연합 가입을 통해 정부 청렴도가 높은 국가가 되었다.

행정[편집]

핀란드는 마쿤타(maakunta)라고 불리는 19개 주로 구성된다. 각 주는 여러 도시와 마을의 대표로 구성된 지역이사회(regional councils)에서 지역발전, 교육, 기업정책 등을 자율적으로 실행한다. 의료보건 서비스 역시 지역이사회에서 관할한다. 지역이사회는 카이누(Kainuu)주에서만 직접선거를 통해 구성되며 나머지 주에서는 각 시와 마을에서 인구비례에 따른 대표로 구성된다. 각 지방정부마다 중앙정부의 고용경제발전센터가 운영되는데 지역 내 노동, 농어업, 임업, 기업정책 등을 담당한다. 또한 각 주마다 핀란드방위군 분소가 설립되어 지역 내에서 모병과 국방관련 업무를 전담한다. 핀란드의 각 주는 순수한 행정구역의 개념이며 지역간 경제상황, 언어와 문화 등에서 여러 차이가 크다.

2011년 1월 이후의 핀란드 행정구역. 회색 선은 2010년 개편 이전의 주 경계선이다.

세부 행정구역으로는 2017년 기준 총 311개에 달하는 마을 혹은 도시 단위의 자치시가 있으며 각 자치시의 인구는 최소 6,000명 이상이다. 자치시는 공공부분 예산의 약 50%를 집행하는데 본 예산은 정부 보조금 이외에 시에서 징수하는 소득세와 기타 수익으로 충당한다.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올란드제도(Åland islands)는 독립적인 이사회를 구성하고 북쪽의 사미족(Sami)이 거주하는 리플란드(Lapland)는 반자치권을 갖는다. 헬싱키(Helsinki), 반타(Vantaa), 에스포(Espoo) 카우니아이넨(Kauniainen)은 인구 110만 명이 거주하는 광역도시권으로 이들 도시를 망라한 공식적인 행정조직은 없지만 헬싱키광역지역이사회(Helsinki Metropolitan Area Council)와 같이 시정부간 협력을 위한 자발적 기구가 운영된다.

  • 라피 지역
  • 북포흐얀마 지역
  • 중앙포흐얀마 지역
  • 남포흐얀마 지역
  • 포흐얀마 지역
  • 카이누 지역
  • 북카리알라 지역
  • 남카리알라 지역
  • 북사보 지역
  • 남사보 지역
  • 중앙수오미 지역
  • 피르칸마 지역
  • 사타쿤타 지역
  • 패이얘트해메 지역
  • 칸타해메 지역
  • 퀴멘락소 지역
  • 우시마 지역
  • 남서수오미 지역
  • 올란드 제도

국방[편집]

핀란드 독립기념일의 레오파드 2A4 전차 행진.
FNS '한코' 하미나급 미사일 고속정

핀란드는 러시아와 긴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로 전통적으로 대외관계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안보문제이다. 이에 따라 핀란드는 유럽연합 회원국 중에서도 GDP 대비 국방비 비중이 가장 높은 국가로 2019년 기준 국방비는 GDP대비 1.29%를 점한다. 안보방위의 중요성으로 핀란드군은 국방사령관의 지휘를 받는데 국방사령관은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통제를 받는다. 핀란드군의 기본 임무는 영토방위로 전방에서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울창한 숲과 호수로 이루어진 지형을 활용한 국지적인 군사적 대응위주로 전력이 편재되어 있다. 핀란드는 종합적인 안보체제로 정부는 물론이고 경제계를 망라한 총체적인 대응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핀란드는 징집제 국가로 약 34,700여명의 현역군을 보유하는데 이중 약 25%는 장교와 기술특기병이다. 이외에 핀란드는 정규군을 지원하기 위해 동원예비군 성격의 지역방위군이 각 지역에 구성되어 있다. 모든 핀란드 18세 이상 핀란드 남성은 6-12개월간 군복무를 하거나 12개월간 여러 공공부분에서 의무근무를 한다. 핀란드는 남성만 징집대상이다. 그러나 매년 약 500여명의 여성이 자발적으로 군복무를 지원하는데 여군은 남성과 동일하게 특수부대와 최전방 보병전투부대 등 병과에 구분을 두지 않는다. 핀란드군은 육해공군 기본 편재에 국경수비대가 별도로 운영된다. 국경수비대는 내무부 소속이지만 상황에 따라 정규군과 함께 임무를 수행한다.

핀란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이 아니지만 아프가니스탄과 코소보 등 전세계의 분쟁지역에서 NATO는 물론이고 국제연합(UN)과 유럽연합(EU) 소속으로 군사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핀란드는 NATO의 신속대응군(Response Force)에 참여하며 2014년 양측간 평화동반자협정이 체결되어 실무수준에서 협력을 취하고, 2015년에는 긴급상황시 NATO 군의 지원이 합의되었다. 핀란드는 또한 약 3,000여명의 소규모 전투병력으로 구성되는 유럽연합의 전투그룹에 참여하여 병력을 파견하고 있다.

핀란드가 유럽국가 중에서 보기 드물게 징집제를 유지하는 이유는 러시아의 잠재적인 군사적 위협 때문이다. 핀란드는 러시아의 강력한 군사력에 대응하여 최대한 안보방위를 강화하고, 러시아에 대한 직접적 자극을 회피하기 위해 NATO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군사적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핀란드는 또한 유럽연합 및 미국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여 북유럽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이외에도 핀란드는 러시아 접경지역의 영토문제에 있어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유화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한편으로 핀란드는 2008년 러시아와 조지아간 군사적 충돌과 2014년 크림반도의 러시아 귀속 등 일련의 사태에 영향 받아 미국과의 외교안보 협력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또한 핀란드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 세계무역기구(WTO) 등 가능한 모든 국제기구를 통해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을 제어하는 안보정책을 취하고 있다.

외교[편집]

핀란드 정치인들은 자국의 외교정책 목적은 '핀란드 삷의 방식의 보존' 이라고 말한다. 외교의 목적은 이러한 국민들의 일상적 삷의 방식이 외부의 압력 없이 지속될 수 있도록 공화국의 안전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핀란드 정치인들의 은유적 표현은 러시아로부터 영토를 지키는 것이 외교의 최대 현안이라는 점을 우회적으로 말한 것이다. 인구가 530여만 명에 불과한 소국인 핀란드는 국제사회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핀란드 외교정책의 핵심은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스칸디나비아 국가와의 긴밀한 협력과 유럽연합을 통한 경제적 번영에 우선을 두는 것이며, 나아가 국제사회에서 규범과 당위성을 존중하면서 평화구축을 꾀하는 것이다.

핀란드 외교정책 내용은 1991년 소련(Soviet Union) 의 붕괴전후로 구분할 수 있다. 냉전시기 핀란드는 소련의 정치적 간섭을 차단하기 위해 국제사회에서 철저하게 중립국 지위를 고수하였다. 당시 핀란드는 경제적 이해를 위해 유럽연합에 가입을 원하였지만, 이는 당시 미국과 유럽을 일컫는 이른바 서방세계와 소련간 힘의 균형에 균열을 야기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자국의 안보를 위해 유럽연합 가입을 유보했다. 대신 핀란드는 공산권경제상호원조협의회(COMECON)에 가입하여 소련과 서방세계간 무역교류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이후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핀란드 외교정책은 중립국 지위를 폐기하고 정치, 경제적 이해를 위해 유럽연합 가입으로 선회하였다. 다만 이웃한 러시아를 의식하여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유럽국가들의 군사적 동맹체인 NATO는 가입하지 않았으며, 여러 경로를 통해 군사적 협력을 취하고 있다.

핀란드는 1952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페로제도 등 북유럽 5개국과 함께 노르딕이사회(Nordic Council)를 결성하였다. 노르딕이사회는 유럽경제공동체(EEC)보다 먼저 설립된 유서깊은 국가간 협력체로 참여국가간 교육, 환경, 지역개발, 인권 등 주로 비정치적 이슈를 중심으로 긴밀한 협력을 목적으로 한다.

핀란드는 소련이 붕괴되자 1995년 스웨덴, 오스트리아 등 냉전시기 중립외교를 취하였던 국가들과 함께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핀란드는 유럽연합 가입 이후 적극적인 친 유럽정책을 취하여 유럽연합에 가입한 스칸디나비아 국가 중 유일하게 1999년 유로존에 가입하였다. 핀란드는 유럽연합을 통한 유럽의 번영을 지지하는 국가로 유로존을 비롯한 경제통합, 쉥겐협정(Schengen Agreement)을 통한 유럽국가간 역내 국경철폐와 사회적 결속에 적극적이다. 또한 핀란드는 프랑스와 독일 등 주요 국가들이 튀르키예의 유럽연합 가입에 부정적 시각을 갖는 것과 달리 강력한 유럽을 위해 튀르키예의 유럽연합 가입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대한관계[편집]

한국은 1973년 8월 핀란드와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헬싱키에 주핀란드 한국대사관을 개설하였고 핀란드는 3개월 후 같은 해 11월에 서울에 주한 핀란드대사관을 개설하였다. 핀란드는 한국과 수교를 맺은 1973년 6월에 북한과도 외교관계를 맺고 양국이 각각 대사관을 개설하였다. 그러나 핀란드는 1992년 4월 주북한 핀란드대사관을 철수하고 주한대사관에서 겸임하고 있다. 북한측에서도 1998년 12월 주핀란드 북한대사관을 철수하고 주스웨덴 북한대사관에서 겸임하고 있다. 2017년 기준 핀란드에는 약 650명의 한국교민이 거주하고 있다.

과거 핀란드는 이웃한 러시아의 간섭으로 냉전시기에는 북한과 보다 긴밀한 협력을 유지하였으나 냉전이 종식되면서 핀란드는 1995년 유럽연합에 가입하고 뒤이어 1996년 10월에 당시 유럽연합 15개 회원국 중 가장 앞서 한국-유럽연합 기본협력협정을 비준할 정도로 한국과 가까운 관계를 지속해왔다. 한국과 핀란드는 1974년 2월 사증면제교환각서를 교환하고 1979년 2월 이중과세 및 탈세방지협약을 체결하였다. 양국은 1989년 5월 과학 및 기술협력협정, 1993년 10월 문화협정과 투자증진 및 보호협정, 1996년 11월 항공업무협정, 2002년 4월 정보통신협력협정, 2013년 10월 원자력협력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2018년 기준 한국의 핀란드 수출액은 3.3억달러이며 주 수출품목은 자동차, 합성수지, 타이어, 무기류, 플라스틱금형 등이다. 동년 한국의 수입액은 13,5억 달러로 정밀화학연료, 선박용 부품, 발전기, 합판, 기타 기계류 등을 집중적으로 수입하고 있다. 2018년 누계로 한국측에서 핀란드에 총 52건에 0.7억 달러를 투자하였다, 또한 2018년 누계로 핀란드는 한국에 총 92건에 2.5억 달러를 투자하였다.

경제[편집]

핀란드 최대 기업 노키아의 본사
2017년 핀란드의 수출 구조

핀란드는 이웃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난했기 때문에 1860년 대기근과 같은 경제적 변동에 취약한 나라였다. 1930년대까지 핀란드의 산업은 농업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1950년대까지도 인구의 절반 이상이 1차산업에 종사했다.

2차대전 이후, 영국, 프랑스 등과 같은 나라들이 국유화를 진행할 때에도, 핀란드는 국유화를 기피했다. 보호무역주의가 실패한 후, 1973년 유럽공동체와의 자유무역을 위해 무역장벽을 완화하고, 산업의 시장경쟁력을 강화했다. 1980년대에 빚에 바탕을 둔 거품경제가 무너짐으로써 1991년에서 1993년까지 심각한 경기 후퇴가 있었다.

인구가 대한민국의 1/10에 불과한 핀란드는 1980년대 이후 농업 및 임업 중심의 경제 체제에서 휴대 전화의 생산량이 세계 1위에 오르는 등 첨단산업을 핵심으로 하는 산업 선진국으로 현저한 변화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2008년 기준으로, 종사자별로 농림 4.5%, 공업 18.3%, 건설 7.3%, 상업 16%, 재무·보험 14.5%, 교통·통신 7%, 공공 서비스 32.4%로 구성되어 있다. 서비스 산업이 전체 경제의 65.7%를 차지하고, 공업이 31.4%를 차지한다. 주요 공업 부문으로는 전자 21.6%, 기계·자동차·금속공업 21.1%, 삼림공업 13.3%, 화학공업 10.9% 등이 있다.

150년 전 제지업체로 시작한 노키아(NOKIA)와 리눅스(Linux)로 유명하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매년 발표하는 세계 경쟁력 보고서에는 2001년부터 2004년까지 4년 연속 선두가 되었다.(2002년 2위로 발표되었다가 재평가 후 1위로 수정.)

여성의 노동력화는 진행되고 있으며, 특히 법률가, 의사는 여성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기업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여성도 늘고 있지만, 남성에 비하면 아직 적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정규직으로 고용되기 어려운 경향이 있고, 젊은 여성에 계약직 일자리가 많다.(20대 여성의 4%가 파견 사원.) 타임 뱅크 제도를 적용하여 바쁜 시기에 근무하여 바쁘지 않은 때 여가 시간을 쓸 수 있는 제도도 존재한다. 1994년에 16.6%까지 상승한 실업률은 불경기에서 벗어나 해마다 개선되고 있으며, 2006년에는 7.7%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GDP와 구매력이 증가하면서 러시아와 발트 삼국에서 유입되는 노동자의 증가로 일을 찾지 못해 매춘부 같은 성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증가 추세에 있다. 2016년 기준으로 1인당 명목 GDP는 42,654 달러, 국내 총생산량은 약 2,400억 달러이다.

산업정책[편집]

핀란드는 1990년대 이전까지 스웨덴노르웨이 등 이웃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처럼 GDP에서 공공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핀란드 정부의 적극적인 공공부분 지출과 경제개입으로 전체고용에서 공공부분이 1/3을 점하고 GDP 대비 공공부분 지출이 50%를 넘어 유럽에서도 가장 높은 비중을 점하는 국가가 되었고, 경제부분에서 정부의 적극적 개입과 지원으로 핀란드 대기업의 약 30%는 국영기업이 점한다. 국영기업은 금속, 광업, 화학 등의 기간산업 부분에 집중 분포한다. 핀란드에서 국영기업의 의미는 정부로부터 직접적인 보조금을 받거나 독점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며 정부가 100% 출자하거나 50% 이상 지분참여로 경영권을 소유한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국영기업은 민간기업과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을 한다. 단적으로 1990년대까지 핀란드 통신서비스 부분에서는 국영기업인 소네라(Sonera)가 민간기업과 경쟁을 하였다. 다만 주류판매 부분은 국영기업인 알코(Alko)가 독점한다.

핀란드 경제는 1980년대부터 정부의 직간접적인 개입과 지원을 통해 성장하여 왔다. 정부는 정례화된 노사정 회합을 지원하고, 특정 산업부분에 투자가 필요하다면 기업에 대한 인센티브와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정부의 산업계에 대한 지원은 보조금과 대출, 조세혜택, 투자에 대한 보증과 감독 그리고 근로자에 대한 교육훈련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이루어진다. 기술개발을 위한 R&D 총액의 약 1/3은 정부 예산을 통해 진행된다.

1983년에 설립된 기술발전센터(TEKES)는 산업계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센터의 주도하에 R&D 정책과 프로그램 지원으로 핀란드는 1990년대 들어 정보통신분야의 기술강국으로 발돋움 하였다. 기술발전센터는 출범 1년후 이동통신 단말기 분야에서 첨단기술을 보유한 중소기업을 발굴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대표적 사례가 2000년대 중반까지 이동통신 단말기 생산 세계 1위를 점한 노키아(Nokia)이다. 기술발전센터는 1997년 이후 취약한 농업부분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고품질 농산물 생산과 건강기능성 식품 개발에 적극적인 R&D 지원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핀란드 정부는 2010년 들어 스타트업 활성화를 위해 기업설립절차를 간소화하고 전 세계에서 창원지원자 수용을 위해 스타트업 비자를 신설하였다. 또한 정부가 주도하여 전세계 약 3만여 명의 창업지원자가 몰리는 슬러시헬싱키(SLUSH Helsinki) 행사를 주최하고 있다.

에너지 산업[편집]

올킬루오토 원자력 발전소

핀란드는 유럽국가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산업국가로 목재가공과 조선산업에서 많은 산업용 에너지를 소비한다. 핀란드는 또한 높은 국민소득과 추운 기후로 1인당 에너지 소비가 높은 국가이다. 그럼에도 핀란드는 천연가스, 석탄, 원유 등 화석연료 자원이 거의 없기 때문에 기업들은 오래전부터 풍부한 산림자원을 활용한 바이오 메탄과 신재생에너지 개발에 주력하였다. 핀란드 정부 차원에서도 자국의 풍부한 산림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바이오에너지 산업을 집중 육성하여 세계적인 기술선도국가가 되었다.

2000년대 핀란드 에너지 정책의 장기목표는 기후변화대응을 위한 친환경에너지로의 전환이다. 핀란드는 유럽연합이 결정한 2030년 까지 달성할 에너지와 기후변화 전략을 충실하게 시행하고 있다. 2030년 까지 석유소비를 절반으로 줄이고 항공과 선박을 포함한 모든 운송수단의 30%는 신재생에너지로 대체한다는 장기계획을 마련하였으며 2050년까지 화석연료 사용을 최대한 줄이고 청정에너지 활용을 확대하는 탄소제 정책을 시행 중이다. 핀란드는 화석연류 사용을 억제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요하는 항공과 선박 등 주요 운송수단은 바이오에너지로 대체한다는 장기적 목표를 세우고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한편 핀란드는 유럽연합이 제시한 에너지 시장 자유화 조치인 에너지 연합(Energy Union) 조치에 있어서도 여러 스칸디나비아 국가와 함께 모범적인 시행을 하고 있다. 유럽연합의 장기 목표에 따라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는 공통적으로 에너지 기업의 민영화와 에너지 시장 자유화를 효과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노르웨이에 위치한 온실가스 배출거래소(NASDAQ OMX Commodities)와 북유럽현물거래소(Nord Pool Spot exchanges)를 통해 여타 유럽연합 국가들보다 경쟁력있는 에너지 가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특별히 핀란드는 스칸디나비아는 물론이고 유럽에서 에너지 시장자유화에 가장 성공한 국가로 전력을 생산하는 에너지 기업이 약 120여개에 달하고 민영화된 발전소는 400여개에 달한다. 이러한 에너지 시장 자유화와 경쟁체제 도입으로 2007년 기준 핀란드의 산업용 전기가격은 유럽에서도 원전에 의존하여 낮은 산업용 전력가격을 유지하는 프랑스와 유사한 수준이다.

핀란드는 최대한 재생에너지 사용비율을 높이고, 수입에 의존하는 화석연료 사용을 줄여 저탄소 경제를 실현을 위한 에너지 정책을 시행하며 화석연료 저감과 에너지 안보를 위해 전력생산 에너지원을 매우 다양하게 구성하고 있다. 2015년 기준 핀란드의 전력생산 규모는 66.2 Twh 규모로 원자력 33.7%, 수력 25.1%, 바이오에너지 16.2%, 석탄 8.3, 천연가스 7.6%, 석탄의 일종인 토탄 4.1%, 재생에너지 1.2%, 석유 0.3% 등으로 발전형태와 에너지원을 다양화하였다. 핀란드에서 에너지원은 안보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발전단가가 저렴한 석탄의 경우 핀란드 국내수요의 약 50% 이상이 러시아로부터 수입하기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서도 의 다양화에 주력하고 있다.

농업과 운송[편집]

VR 클래스 Sr2 기관차

핀란드는 여러 스칸디나비아 국가와 유사하게 긴 겨울과 척박한 토지로 경작지가 적고 희소한 인구로 농업에 적합하지 않는 환경을 가졌다. 19세기까지 핀란드는 유럽으로부터 사실상 고립된 지역으로 당시 핀란드 농업은 자급자족을 위한 작물재배에 머물렀다. 19세기 말 이후 러시아로부터 값싼 농산물이 유입되고 미국에서도 농산물 수입이 이루어지면서 핀란드도 외국으로부터 값싼 사료를 수입하여 국내수요와 수출을 위한 축산업과 유제품 생산을 본격화하였다. 2차 대전이후 농업과 축산업이 확대되었지만 비유럽연합 회원국이라는 불리한 입지로 농업은 국내수요를 위한 최소한의 규모에 머물렀다.

핀란드의 유럽연합 가입은 농업의 위기인 동시에 전환점이 되었다. 핀란드가 1995년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유럽시장에서 값싼 농산물이 대거 수입되었고, 유럽연합이 실행하는 공동농업정책(CAP)으로 정부차원의 농산물 가격통제가 불가능해지면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핀란드 정부는 건강기능성 식품산업에 특화해 R&D를 집중하면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다.

핀란드는 인구에 비해 영토가 넓고 겨울이 길기 때문에 항공운송이 발달하여 헬싱키 공항, 오울루(Oulu) 공항을 포함하여 27개의 공항이 운영되고 있다. 이중 수도에 위치한 헬싱키 공항은 핀란드의 관문으로 2016년에 약 1,700만명의 승객이 이용하였다. 헬싱키 공항은 핀란드항공(Finnair)의 허브공항이며 이외에 노르딕항공(Nordic Regional Airlines), 노르웨이에어셔틀(Norwegian Air Shuttle) 등 인근국가의 항공사들의 국내선과 국제선이 취항하고 있다. 헬싱키 공항은 서유럽과 동아시아간에 가장 짧고 효율적인 동선에 위치하여 환승공항으로도 유명하다.

핀란드의 철도와 도로 등 운송 인프라는 매우 효율적인데 대부분 2차 대전이 끝나고 1940년대 말부터 본격으로 건설된 것이다. 핀란드의 철도 총연장은 5,865 킬로미터로 인구가 희소하여 상업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매년 정부는 철도 운영을 위해 3억 5,000만 유로의 예산을 소요하고 있다. 핀란드 철도는 국영기업인 VR(Finnish Railways)이 관리하는데 여객운송의 약 80%가 인구가 밀집된 헬싱키와 근교 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2010년 VR과 러시아 철도청(Russian Railways)간 합작으로 벤처기업 형태로 고속철 운영사인 카렐리안철도(Karelian Trains)가 출범하였다. 카렐리안철도는 러시아의 상테스부르그와 헬싱키를 3시간 30분 이내로 주파하는 초고속철도인 알레그로(Allegro)를 운영하고 있다.

대외무역 의존도가 높은 핀란드는 오래 전부터 해상운송이 발달하였고 항만을 통한 선적은 저비용의 효율적 시스템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08년에 완공된 헬싱키의 부오사리항구(Vuosaari Harbour)는 핀란드 최대 규모의 컨테이너 항구이다. 이외에 코트카(Kotka), 하미나(Hamina), 한코(Hanko), 포리(Pori), 라우마(Rauma), 오울루(Oulu) 등의 항구에도 항만시설이 구축되어 있다. 핀란드 내에서는 헬싱키에서 투르크(Turku)와 올란드(Åland)섬의 마리에하먼(Mariehamn)항구 그리고 국제선으로는 에스토니아 탈린(Tallinn), 스웨덴의 스톡홀름까지 여객선이 정기적으로 운행된다. 특히 헬싱기-탈린 구간은 세계적으로도 운항회수와 승객이 가장 많은 해상루트이다.

과학기술과 주요기업[편집]

바다의 오아시스는 투르쿠의 페르노 조선소에서 지어졌다.

핀란드는 전통적으로 제지와 목재 및 조선산업이 산업의 근간이었고 1990년대 이후 정보통신분야의 강국으로 부상하였고, 유럽에서 가장 앞서 5G 통신망 구축을 위한 시험 서비스를 개시하였다.

제지기업으로 출발한 노키아(Nokia)는 1990년대 핀란드를 대표하는 이동통신 단말기 분야의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여 여전히 핀란드의 정보통신산업과 수출에 큰 비중을 차지한 바 있다. UPM-키메네(UPM-Kymmene)는 세계 최대의 출판용 제지회사이며 스토라 엔소(Stora Enso) 역시 목재와 제지분야의 세계적 기업으로 이들 회사들은 최근 노키아의 선례처럼친환경 바이오소재, 정보통신 등 새로운 신사업으로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다. 핀란드는 제지산업의 발달로 관련 기계와 장비분야에서도 코네(Kone), 매쪼(Metso), 벨apt(Valmet), 바르질라(Wärtsilä)등 세계적인 기업을 보유하고 있다.

핀란드는 모바일 게임분야에서 로비오(Rovio), 슈퍼셀(Supercell), 핑커스포트(Fingersoft) 등 다수의 세계적 기업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기업을 포함한 게임산업계는 300여명 이상의 게임개발자가 활동하고 기술개발과 산업화를 위한 생태계가 효과적으로 구축되어 구글과 화웨이는 핀란드를 유럽에서 기술개발의 허브로 활용하고 있다.

의료, 제약 및 헬스케어 분야도 핀란드의 주력산업으로 인공지능을 활용한 헬스케어 서비스 산업이 활발하다. 바이엘(Bayer), 화이자(Pfizer), 머크(Merck), 로슈(Roche), GE의 헬스케어사업부 등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핀란드에서 R&D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핀란드는 바이오에너지를 비롯한 청정에너지재활용에너지 분야에서 높은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고, 4,000여개 이상의 에너지 관련 기업이 있다. 대표적인 기술선도기업으로 멧초그룹(Metso Group)이 있다. 일본과 중국 등 환경분야 후발국가 기업들은 핀란드에 최근 수년간 10억 달러 이상의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한편 핀란드는 전통적인 조선강국이었지만 인건비 상승으로 한국, 일본 및 중국에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유람선쇄빙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제조와 설계는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LNG 쇄빙선은 핀란드에서 최초로 개발되었다. 전세계에서 운용되는 쇄빙선의 60%가 핀란드에서 건조되었고 약 80%는 핀란드에서 설계가 이루어지고 있다.

무역[편집]

핀란드는 작지만 개방적인 경제적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대외교역 규모는 세계 40위권으로 인구와 경제규모에 비해 대외교역 비중이 높다. 이러한 점에서 무역정책은 경제발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정부의 장기적 계획을 통해 정책이 실행되고 있다. 핀란드는 목재 이외에 천연자원이 거의 없고 경작지도 부족하여 거의 모든 산업부분과 농업에서 대외의존도가 높다. 따라서 핀란드는 20세기 초부터 풍부한 산림자원을 활용하여 목재 가공품과 제지산업을 수출산업으로 육성하였다. 이후 핀란드 정부는 1990년대 이후 이동통신기기와 정밀 기계 등 높은 기술력을 요하는 첨단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1995년 핀란드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유럽연합의 단일시장을 겨냥하여 고품질의 유기농과 축산가공품산업이 활성화되었다. 1990년대 이후 핀란드는 정보통신 제조업으로 크게 성장하였지만 여전히 목재와 제지 그리고 기계와 금속가공산업, 정유화학 등 전통적 산업은 수출의 큰 축을 형성한다. 2017년 기준 핀란드의 수출규모는 707억 달러이며 수입은 654억 달러로 약 53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기록하였다. 주요 수출 품목은 정제휘발유, 제지, 철강, 자동차, 펄프 등이다. 또한 주요 수입품은 원유, 자동차, 정체휘발유, 운송장비 부품과 의약품 등이다. 주요 수출지역은 독일, 스웨덴, 네덜란드 등 주요 유럽연합 회원국과 미국, 중국이다. 수입국 역시 독일, 스웨덴, 네덜란드 등 유럽연합 내에 집중되고 유럽연합 이외의 주요 수입국은 중국과 러시아 이다.

인문사회[편집]

인구[편집]

핀란드의 인구는 현재 약 550만 명이다.

핀란드는 서유럽의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인구가 많이 증가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안정적으로 증가해 온 편이다. 아주 잠시지만 인구가 정체했었던 시기도 있지만 핀란드의 인구는 전반적으로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출생아 수 감소와 사망자 수 증가로 인해 2018년부턴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핀란드의 투울라 하타이넨 고용부장관은 2020년 1월 29일에 고용주들이 인력부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면서, 앞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성장 잠재력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해외 노동력의 영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핀란드의 출산률은 2010년대에 급격히 하락하여 2019년엔 합계출산률이 대표적 고령화 국가인 일본 밑으로 떨어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핀란드 통계청은 출산율이 지금 수준처럼 계속해서 감소하는 경우, 2031년에는 총인구 감소가 시작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근에는 급격하게 낮아진 출산율과 빠른 고령화로 인해 포르투갈을 제치고 일본,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3위의 고령국가가 되었다.

주민[편집]

핀인(좁은 뜻의 핀人, 즉 핀란드人)은 우랄·볼가 지역으로부터 이동하여 에스토니아에서 바다를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많은 혼혈이 있었지만 피노우그리아 어족(語族)에 속하는 핀란드어를 유지해 온 핀인들이 핀란드에 정주한 것은 8세기의 일이다. 5세기에 처음으로 올란드(아흐베난마)섬에 이주해왔던 스웨덴인들 역시 바다를 건너 들어왔으며, 13세기경에는 해안지역에 꽤 많은 취락이 형성되었다.

핀란드어를 사용하는 국민은 93%,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국민은 6%, 그밖에 랩인 2,500여 명이 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영어를 사용할 줄 안다. 핀란드어와 스웨덴어가 국어로서 쓰이고 있으나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국민은 전체적으로 출생률이 낮아 인구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해마다 낮아지고 있으며 언어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난 일은 없다. 종교구성은 국민의 88%가 루터파(派)의 프로테스탄트에 속하며 그리스정교도가 1%이다.

인구는 남쪽 지방에 밀집하여 분포하고 북쪽 지방은 인구가 드물다. 헬싱키를 포함한 우시마 지방에서는 인구밀도가 100인/㎢에 이르지만 랩인들이 사는 라피 지방에서는 2인/㎢에 불과하다. 주요 도시는 헬싱키·탐페레·투르쿠 등 세 도시이고 특히 헬싱키는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다. 핀란드 국민 중 67%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고 나머지는 전원생활을 한다.

언어[편집]

핀란드어스웨덴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으며, 특히 스웨덴어는 과거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던 영향으로 인해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비율상으로 핀란드어는 93.4%, 스웨덴어가 5.9%로 2개 모두 공용어이자 1919년에 제정되었다. 모든 도로 표지판, 거리의 이름, 경고문 등이 양쪽 언어로 표기되지만 거의 대부분, 일상생활에서는 핀란드어가 주로 쓰인다. 스웨덴어는 거의 대부분 남서부의 올란드 제도에서 쓰이고 있지만, 이미 핀란드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소수파라고 불리고 있으며, 기업, 산업계에서 영향력을 가지며, 정부에도 주요정당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용어 문제는 역사적인 문제였다. 스웨덴어는 일부에서도 고귀한 언어로 인식되어 받아 들여졌다.

북부의 사미인은 사미어를 쓰고, 1970년대에 지위가 올라갔다. 1999년의 헌법개정에 의해서 준공용어로 명기되었다. 동시에 집시, 그 외의 소수민족에 대한 배려도 더해져 있다.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이 영어에 능통하고 일부는 독일어나 러시아어 역시 구사한다.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하는 러시아출신의 귀환자는 최근 계속 증가하고 있다. 러시아어는 1세기에 걸쳐서 지배사회의 상층부에서만 영향력을 준 것 뿐이었고, 국민사이에서는 침투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것은 러시아어를 야만 민족의 언어로 인식하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수는 에스토니아어를 쓰는 경우도 있다.

생활과 종교[편집]

헬싱키에 있는 루터복음교 템펠리아우키오 교회.

핀란드인들은 일상적인 대인관계에서 유연한 태도를 갖지만 사교성이 적고 과묵한 성격을 갖는 것으로 유명하다. 과묵한 성격으로 대화 중에 침묵은 적의를 갖거나 반대의 표시가 아니며 공공장소에서 큰 목소리로 대화를 하거나 크게 웃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핀란드인의 성격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단면은 엄격성과 정확성이다. 똬한 종교적 신념과 행위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일로 여겨 종교적 믿음에 대한 질문은 무례한 행위로 받아들인다.

핀란드를 대표하는 생활문화 중 하나는 사우나이다. 핀란드인들에게 사우나는 가족과 친구간 일종의 휴식공간이며 거의 모든 핀란드 가정에는 사우나 시설이 구비되어 있고 수영장, 대학교 기숙사 등 여러 시설에 공공사우나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핀란드어와 스웨덴어가 공식언어로 사용중이며, 인구의 약 90%는 핀란드어를 사용하지만 스웨덴어 사용인구도 5.6%에 달한다. 역사적으로 핀란드는 이웃한 스웨덴과의 오랜 교류로 많은 지명들이 핀란드어와 스웨덴어로 동시에 표기된다. 핀란드 도시인 투르크(Turku)는 스웨덴어로 오보(Åbo)이며 두 지명이 모두 사용된다. 도시와 마을 이외에도 거리지명도 핀란드어와 스웨덴어가 각기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울란드제도(Åland Islands)가 속한 남서부 해안지역에서는 일상용어로 스웨덴어가 널리 사용된다.

핀란드의 국교는 스웨덴 국교였으나 이후 1809년부터 1917년까지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스웨덴 국교로부터 분리되어 핀란드 루터복음교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1869년 스칸디나비아 국가 중 최초로 교회법(Church Act)을 제정하여 핀란드 루터복음교(Evangelical Lutheran Church of Finland)의 국교지위를 폐기하였는데, 폐기 이후에도 여전히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는다. 핀란드 교회법은 시대를 앞선 입법으로 스웨덴은 2000년에 스웨덴 교회의 국교회(Church of Sweden) 지위를 파기하였다.

2017년 기준 인구의 70,9%에 달하는 390만 명이 핀란드 루터복음교신자이며, 단일의 루터교회로서는 가장 많은 신자수를 보유한다. 국민 대다수가 신자이지만 예배와 교회에 가는 것은 크리스마스, 결혼식과 장례식 등으로 한정된다.

이미 1960년대 이후 핀란드에서는 갈수록 교회의 신자 등록수와 세례인구가 줄어들어 매년 루터복음교 신자수가 1% 내외로 감소하고 있다. 루터복음교 신자수 감소와 함께 종교를 갖지 않는 인구도 증가 추이로 2000년 13% 수준에서 2017년에는 26.3%로 급증하였다. 이외에 핀란드정교 신자가 1.1%, 기타 프로테스탄트, 가톨릭, 유대교 및 비기독교 인구가 모두 합쳐 1.6%를 점한다. 핀란드에서는 무슬림 인구도 약 2.7%를 점한다.

교육[편집]

헬싱키 중앙도서관 오디(Oodi)는 2019년 세계 최고의 뉴공공도서관으로 선정되었다.

핀란드의 교육기관은 사립학교에서부터 출발하였지만 현재는 학생의 97%가 공립학교에 다니며 3%만이 국제학교 및 외국어 교육을 위해 설립된 사립학교에 재학한다. 핀란드의 공립학교 교육 비중은 스웨덴을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국가와 유럽은 물론이고 OECD 국가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핀란드의 초등교육은 6년 그리고 중동교육은 3년 과정이고 7세부터 16세까지 의무교육을 시행한다. 이러한 의무교육은 각 자치시에서 운영을 담당하고, 커리큘럼은 교육부에서 결정한다.

9년의 초중등 교육을 마친 학생들은 취업을 선택하거나 상업학교 혹은 상위의 중등교육기관인 김나지움으로 진학한다. 김나지움은 높은 수준의 입학조건을 요구하며 진학한 학생들은 전문적인 교육을 받는데 기술위주의 전문가 교육과 대학진학을 위한 교육으로 이원화되어 있다. 이외에 초중등 교육을 마친 학생 중 약 40% 정도는 직업교육을 실시하는 상업학교로 진학한다. 핀란드의 모든 학교는 무상이며 학생들은 정부로부터 생활비 형태의 재정지원도 받는다.

핀란드는 15개의 대학과 24개의 응용과학대학(Universities of Applied Sciences)이 있으며 헬싱키대학(University of Helsinki)은 세계100위 권 이내에 위치한 높은 수준의 학문적 기반을 갖고 있다. 대학에 진학한 학생의 약 30%는 자연계와 이공계 학문을 전공하는데 다수가 생명공학, 환경공학, 재료공학 등 핀란드의 주력 산업계에서 필요한 전공을 택한다. 핀란드는 대학과 이에 상응하는 고등교육기관 진학률이 33% 수준으로 OECD 국가 중에서 상위에 위치한다. 다만 핀란드 대학의 국제화는 미진하여 대학에 외국인 학생비율은 약 3% 그리고 응용과학대학도 7% 정도로 OECD 평균 16.5%를 크게 밑돈다.

핀란드는 오래전부터 성인교육과 재교육이 활성화된 국가이다. 성인교육은 초중등교육 기관의 야간과정, 시민단체와 노동단체, 다양한 학습센터와 직업교욱기관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된다. 학습센터에서는 교육을 원하는 그룹이 자체적으로 학습계획을 세우면 정부로부터 교육과 재정지원을 받는다. 핀란드 역시 성인교육기관으로서 덴마크에서 유래한 시민고등학교(Folk high schools)가 활성화되어 있다. 시민고등학교는 덴마크에서 19세기에 대중의 계몽을 위한 학교로 출발하여 스칸디나비아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핀란드의 시민고등학교에서는 모든 연령대의 성인이 수주간 머물며 수공예부터 경제학까지 자신이 원하는 다양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사회시스템[편집]

핀란드 복지국가의 기본 이념은 모든 국민이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적절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국가의 개입을 통해 복지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핀란드의 복지국가 모델은 전통적인 노르딕 시스템의 연장선에서 스웨덴과 노르웨이 보다 국가의 역할을 더욱 강조하는데 크게 사회적 안전(과 복지로 구성된다. 사회적 안전을 위해 국가는 연금, 질병, 실업, 노동자에 대한 보상 등에 광범위하게 개입한다. 나아가 공공부분의 확대를 통해 가족지원, 자녀양육 서비스, 노년층과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서비스와 같은 복지를 확대하고 있다. 강력한 우파정권의 집권이나 경제위기시 이러한 사회보장시스템에 대한 비판이 일었지만 사회발전을 위한 국가의 개입이 유지되면서 지속적인 개혁이 진행되었다. 핀란드는 정부개입을 통한 복지국가 시스템을 지향하여 의료, 교육, 사회적 안전과 실업 등 여러 사회부분의 공공서비스 지출이 GDP 대비 절반을 넘는다.

사회보장 시스템은 성공을 거두어 핀란드는 국민 삷의 지표를 보여주는 여러 통계에서 상위권에 위치한다. 2017년 기준 핀란드의 인간개발지수(HDI)는 세계 15위로 스칸디나비아 국가 중에서는 가장 낮지만 대부분의 유럽국가보다는 높은 순위이다. 역동적인 경제기반으로 핀란드의 1인당 GDP는 2018년 기준으로 49,845달러를 기록하여 독일 48,264달러보다 앞서는 유럽에서도 부유한 국가에 위치한다.

문화[편집]

미카엘 아그리콜라
스모크 사우나

문학[편집]

최초의 핀란드어 책을 쓰고 신약성서를 핀란드어로 번역한 투르쿠의 주교 미카엘 아그리콜라(1510~1557년경)는 핀란드 문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19세기에 엘리아스 뢴로트가 집필한 핀란드의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는 핀란드 전통 문화에 대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소설가 프란스 에밀 실란패는 1939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소설가 미카 발타리도 전 세계에 알려져 있다.

음악[편집]

음악가로는 《핀란디아》를 작곡한 장 시벨리우스가 유명하다. 핀란드 전통 음악에는 하프와 비슷한 현악기인 칸텔레가 쓰인다. 또한 나이트위시, 소나타 아티카 등 헤비 메탈 음악도 인기를 얻고 있다. 로르디는 2006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우승하였다.

건축[편집]

핀란드는 또 알바르 알토(Alvar Aalto)를 비롯한 유명한 건축가를 많이 배출하였다.

사우나(sauna)는 핀란드의 전통어이다. "사우나"는 핀란드어 중에서 국제적으로 쓰이는 낱말 중의 하나이다. 사우나는 달궈진 돌에 물을 껴얹어 생기는 수증기를 이용하는데, 섭씨 90도에서 100도까지 상승한다.

요리[편집]

생강 쿠키는 크리스마스 전 날에 만들어 크리스마스 시즌 내내 먹는 음식이다. 보통 '글뢰기'라고 하는 매콤한 음료와 함께 먹는데 어른들의 경우 보드카에 섞어 먹는다.

미디어와 통신[편집]

100개 이상의 신문사가 있고, 300개의 잡지, 2000개 이상의 전문지, 60개의 라디오 방송국, 5개의 국영 라디오 채널, 5개의 디지털 라디오 채널이 있다. 매년 30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고, 15,000권의 책이 출판되며, 1000만장의 음반이 판매된다.

국영 방송사인 YLE는 5개의 채널과 15개의 라디오 채널을 5개의 언어로 송신한다.

약 85%의 국민들이 인터넷을 이용하고, 2009년을 기준으로 180만명이 이상이 광대역 인터넷에 접속한다.

관광[편집]

핀란드를 찾는 관광객은 대부분 발틱의 딸(Daughter of the Baltic)로 불리는 수도 헬싱키(Helsinki)에 집중된다. 인구 약 19만의 투르쿠(Turku)는 인구규모로는 핀란드에서 여섯 번째에 위치하지만 핀란드의 예전 수도로 시벨리우스 박물관, 중세시대 성과 성당이 보존되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핀란드 중서부의 항고도시 바사(Vaasa)는 스웨덴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는 도시로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크바르켄 군도(Kvarken Archipelago)와 인접하여 역시 주요한 관광지이다. 이외에 1999년 유럽연합의 정상회담이 열려 널리 알려진 탐페레(Tampere)는 스웨덴 최대 공업도시이면서 문화도시로 많은 박물관이 위치하고 매년 여러 음악제가 열린다. 이외에도 핀란드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도시인 포르부(Porvoo)도 핀란드의 대표적 관광지이다.

헬싱키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는 UNESCO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수오멘린나 요새(Suomenlinna Fortress)이다. 헬싱키를 둘러싼 여러 섬에 산재한 수오멘린나 요새는 18세기 해안가에 건설된 성벽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관광지로 핀란드가 스웨덴의 지배를 받던 1847년에 러시아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설되었다. 수오네린나 요새에는 핀란드 해군이 2차 대전 때 사용한 250톤에 달하는 베시코(Vesikko) 잠수함이 진열되어 있고, 박물관을 비롯한 다양한 볼거리와 함께 여름에는 여러 예술공연이 열려 헬싱키를 찾는 관관객의 필수코스가 되었다. 헬싱키의 또 다른 명소는 항구에 위치한 파우카(Kauppatori) 광장으로 핼싱키의 랜드 마크 역할을 하는 곳이다. 파우카 광장은 채소와 생선을 파는 현지인들이 애용하는 시장이며 봄부터 초가을까지는 야시장이 열린다.

주민 대부분이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올란드 제도(Åland Archipelago)는 핀란드의 다양한 문화와 정서를 볼수 있는 관광지이다. 스웨덴과 핀란드 사이에 위치한 올란드 제도는 몇 개의 큰 섬과 약 만여개의 달하는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19세기에는 러시아, 스웨덴, 영국과 프랑스 등 여러 유럽 강대국간 군사적 대립이 벌어져 독특한 역사적 유산을 볼수 있는 곳이다. 올란드에 위치한 1890년대 핀란드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을 보존한 카리스정원(Karlsgården) 역시 주요 관광지이다. 무엇보다도 올란도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환경과 스웨덴과 가까워 연중 많은 관광객이 몰린다.

핀란드는 척박한 기후로 농업보다는 축산업이 활발하여 우유와 치즈 등 유제품이 풍부하다. 전통음식은 주변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영향을 받아 주식인 감자와 빵에 생선과 육류를 곁들인 음식이 일반적이다. 핀란드 전통음식은 매우 단조로운데 1995년 유럽연합 가입 이후 유럽본토의 음식에 대한 관심이 늘어 전통적인 프랑스와 이탈리아식 레스토랑이 증가하고 있다. 핀란드는 수천 개의 호수와 긴 해안선을 갖는 나라로 오래전부터 생선요리가 발달하였다. 핀란드의 대표적인 생선요리는 발트해에서 잡은 요리한 훈제청어(silakka),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 대중적인 훈제연어(savulohi) 등이 대표적이다. 핀란드 동부에서는 작은 생선을 튀겨 으깬 감자와 함께 요리한 무이꾸(muikku) 요리도 대중적이다. 북유럽의 추운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스튜요리도 다양해 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등을 감자, 양파와 함께 끓인 카리알란파이스티(karjalanpaisti)는 일반적인 음식이다. 이외에도 여러 고기로 만든 소세지와 미트볼도 대중적인 음식이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북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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