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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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Canada)는 북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국가이다. 수도는 오타와(Ottawa)이고, 최대 도시는 토론토(Toronto)이다. 1763년 영국이 프랑스와 맺은 파리조약 이후 영국의 식민 상태로 있다가 1867년 캐나다자치령으로 독립하였다. 1951년 정식국명을 캐나다로 변경하였다.
개요[편집]
캐나다는 북아메리카 대륙의 북쪽에 위치한 연방국이다.
태평양 상의 밴쿠버 섬에서 오대호에 이르는 북위 49도선 이북을 통치하고 있는 나라로, 총 10개의 주(Provinces)와 3개의 준주(Territories)로 이루어져 있다. 지리적으로는 빙하기 당시 그린란드와 육로로 이어져 있었던 만큼 북극과 가장 가까운 나라 중 하나이며, 대표적인 상징은 국기에도 그려져 있는 사탕단풍(설탕단풍, Sugar maple)과 비버(아메리카비버, C. canadensis)다.
정치적으로 캐나다는 영국을 본따 입헌군주제와 내각제를 채택했지만, 땅이 넓은 관계로 이웃 미국의 제도를 모방해 연방 국가가 되었다. 이 모델은 호주 연방 결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독립된 연방국체로서의 캐나다는 1867년 3월 29일 영국령 북아메리카 법(British North America Act)이 통과되며 온타리오, 퀘벡,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가 연합해 결성한 캐나다 자치령(Canadian Confederation)에 근간을 둔다. 이후 시간이 지나며 인근 자치령들을 흡수, 1949년 마지막으로 뉴펀들랜드 자치령이 가입하여 현재의 영토를 이룬다. 1982년에는 캐나다 법(Canada Act 1982 / Loi de 1982 sur le Canada)이 통과되어 영국 국회의 간섭 없이 헌법을 수정할 수 있는 고도의 주권이 성문법적으로도 보장되었고, 캐나다는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된다.
정부수반은 캐나다 총리로 2022년 현임자는 제23대 쥐스탱 트뤼도이다. 명목상 캐나다의 국가원수는 캐나다 국왕이며, 이는 영연방에 속한 동군연합으로서 영연방 왕국 구성국들의 국왕인 찰스 3세가 맡고 있다. 엄밀히 캐나다를 기준으로 영국 왕과 동일인물을 '캐나다 국왕'으로 둔 나라일 뿐, '국가 원수가 영국 왕'은 아니다. 그러나 영국 국왕이 런던에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영국 왕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영국과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효율적인 업무를 위해 캐나다 현지의 저명 인사가 캐나다 총독으로 임명되어 국가원수의 대리를 맡는다.
캐나다의 국토는 대략 1천만 제곱킬로미터에 육박해 러시아의 뒤를 이어 세계 2위의 면적을 자랑한다. 중국의 1.04배, 미국의 1.01배이며, 남한의 99.5배, 일본의 26.4배 정도 되는 면적을 가지고 있다. 또한 러시아를 제외한 나머지 유럽 나라들을 모두 합친 면적의 0.98배이며, 캐나다가 소속된 영연방과 프랑코포니 두 기구를 통틀어 가장 영토가 넓다. 앵글로아메리카에서 면적으로는 1위이고, 인구수도 미국에 이은 2위다. 다만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북극권과 가까운 영토 북부는 본격적으로 사람이 살기 너무 춥기 때문에, 실제 가용 면적은 생각보다 적다.
인구는 약 3,800만 명으로 국토의 1%에 불과한 남한보다도 적어서, 전체 국토면적으로 봤을 때는 인구 밀도가 매우 낮은 나라다. 가장 인구 밀도가 적은 주는 곰이 사람 넷 당 하나 비율로 있다고 할 정도. 하지만 인구의 대부분은 국토 남부의 도시권역 및 미국과의 국경지대에 몰려 있어서, 실질 인구밀도는 그리 낮지 않다.
수도는 오타와이다. 과거 프랑스계 인구 비율이 높은 몬트리올과 영국계 인구 비율이 높은 토론토가 수도 자리를 두고 다투다, 국가의 균형 발전을 위해 아예 인구 2만이 채 될까 말까 한 마을 하나를 수도로 정해 개발했다. 또한 최대도시는 토론토, 두 번째로 큰 도시는 몬트리올이며 그 외 주요 도시로 밴쿠버, 캘거리, 에드먼턴, 퀘벡 시티, 위니펙, 핼리팩스, 새스커툰 등이 있다.
2022년 기준 국가별 명목 GDP 순위는 8위이며, 국가별 1인당 명목 GDP 순위는 11위로 (인구 천만명 이상 국가중에서는 3위, 3천만명 이상 2위) 세계 최상위권 경제 대국이다. 또한 의외라면 의외겠지만 세계 3위의 산유국으로, 아랍 산유국들보다도 석유가 많이 난다. 다만 석유나 천연가스 같은 자원의 경제적 가치는 단순한 매장량뿐 아니라 채굴 비용도 많은 영향을 끼치는데, 캐나다는 중동 국가들에 비하면 채굴 비용이 많이 높은 편이다. 그렇다고 미국처럼 셰일가스 기술이 한참 앞서있는 것도 아니라 국가 경제가 유가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일례로 2015년 유가가 급락하면서 캐나다 경제가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는 등 침체에 들어갔던 적도 있다.
영연방 왕국의 회원국이지만, 사실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 국가보다는 미국과 더 많이 닮아 있다. 캐나다의 주요 공항마다 미국 출입국 심사대가 따로 있고, 반대로 미국은 캐나다인들을 아예 자국민 심사대와 같은 곳으로 받는다. 결정적으로 다른 영연방 국가와는 달리 차량이 미국처럼 오른쪽으로 다닌다. 원래 지역에 따라 차량이 좌측통행을 하는 곳과 우측통행을 하는 곳이 나뉘어 있었는데, 미국을 왕래하는 수요가 많다 보니 결국 우측통행으로 통일시켰다. 마지막까지 좌측통행을 했던 유명한 지역으로 1949년 들어서야 캐나다 연방에 가입한 뉴펀들랜드(현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주)가 있다.
국가 상징[편집]
국호[편집]
국호 '캐나다'는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연맹인 이로쿼이 연맹의 말 '카나타(kanata, [kana:taʔ])'에서 유래하였으며, '정착', '마을' 등의 뜻이 있다. 신항로 개척 시기, 훗날 퀘벡 시가 될 이로쿼이 부족 정착지 스타다코나(Stadacona)에 도착한 자크 카르티에가, 정착민들에게 "여기가 어디인가?"하고 물어봤고, 주민은 "마을이다(카나타)."라고 대답했다. 자크 카르티에를 위시한 프랑스 탐험가 일행은 그걸 지명이라 생각했고,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 전부를 '카나다(Canada, /ka.na.da/)'로 명명한 것. 이것의 영어 발음이 '캐나다(Canada, /ˈkænədə/)'이다. 지금도 오타와 근교에 카나타(Kanata)라는 작은 마을이 존재한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캐나다라는 명칭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을 영국인들과 구분하여 부르는 말이었다. 근간이 퀘벡 시 근교를 일컫는 명칭이었기도 했고, 실제로 몬트리올의 아이스하키 팀 레 카나디앵 드 몽레알 등 그 흔적들이 여럿 남아 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영국령 북아메리카가 대영제국 최초로 자치령(dominion)을 구성하게 되면서, '캐나다'를 퀘벡만이 아닌 연방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삼게 되었다. 당시 캐나다 외에 명칭 후보가 여럿 있었다. 라틴어로 '남쪽의 땅/나라'를 뜻하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대칭을 이루게 Borealia(북쪽의 땅/나라)로 하자는 제안도 있었고, 그레이트브리튼의 옛 이름인 알비온(Albion)에서 딴 Albionoria(북쪽의 Albion) 또는 New Albion으로 하자는 제안도 있었고, 심지어 Efisga로 하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캐나다의 공식 명칭은 심플하게 캐나다로 -국(國), -공화국(共和國), -연방(聯邦)과 같은 별도의 수식어가 없다. 과거 명칭은 'Dominion of Canada/Dominion du Canada'로 한국어로는 '캐나다 자치령'이라고 부른다. 이후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과 함께 주권이 보장되고, 1982년에 영국 의회와 함께 캐나다 법(Canada Act 1982)을 통과시키며 완전한 주권 국가가 되자 본래 명칭에서 자치령(dominion)을 뺀 '캐나다'를 공식 국호로 쓰게 됐다. 다만 이 캐나다 법에서 국호에 대한 정식 수정은 없었고, 처음 국호를 결정하였던 1867년의 영국령 북아메리카법(British North America Act of 1867)도 여전히 유효하므로 법률상의 국호는 캐나다 자치령이다. 물론 오늘날까지 자치령이 들어간 국호를 사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이 국호가 법률상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본래 자치령 설립 논의 당시, 캐나다 현지의 영국계 주민들이 원한 명칭은 Kingdom of Canada, 즉 캐나다 왕국이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이 제안을 듣고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괜히 옆에 있는 미국과 쓸데없이 마찰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 당시만 해도 미국은 영국의 왕정 체제에 커다란 반감이 있었다. 적대 관계는 아니었지만, 서로 독립 전쟁과 미영전쟁을 치른 지 50년이 조금 지난 시기였기 때문. 쓸데없는 마찰을 피하고 싶었던 영국은 결국 Dominion of Canada를 정식 명칭으로 결정했다.
요즘은 거의 쓰이지 않지만, 한자 음차로는 '가나다(加那陀)'로 쓴다. 언론 기사 헤드라인 등에서 '加'라는 약호가 쓰여 있으면 '캐나다'로 생각하면 된다. 관련 기사. 한편 한국에서는 일례로 1970년 캐나다-중공 수교를 다룬 기사에서도 조선일보는 '캐나다', 동아일보는 '캐너더', 경향신문은 '카나다'라고 표기할 만큼 표기가 제각각이었다가 80년대 말엽까지 카나다라고 통일해서 불렀고, 현재는 캐나다로 불린다. 중화권에서는 '가나다(加拿大)'로 쓴다.
국기[편집]
캐나다의 국기는 단풍잎기(The Maple Leaf 메이플 리프) 또는 하나의 잎(l'Unifolié 뤼니폴리에)로 알려져 있다. 빨강 바탕에 가운데 흰색 정사각형이 있고 여기에 붉은 단풍잎이 그려져 있다. 1964년 국민 공모로 제정되어, 1965년 2월 15일, 캐나다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승인을 받아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1965년 이전에는 왼쪽 위에 영국의 국기가 삽입되고, 오른쪽에 캐나다 각 주의 상징을 넣은 상선기(Civil Ensign)을 사용했다. 상선기와 형태는 같으나 빨간색 배경 부분이 파란색으로 그려진 기는 정부기(Government Ensign) 및 해군기(Naval Ensign)로 사용했다.
좌우에 있는 빨강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중앙에 있는 단풍잎은 캐나다의 상징목인 단풍나무의 단풍잎으로 캐나다가 태평양과 대서양 사이에 있음을 알리고 있다.
국장[편집]
캐나다의 국장은 1921년 11월 21일에 처음으로 제정되었으며 전체적으로 영국의 국장과 비슷하게 생겼다.
국장 가운데에 그려져 있는 방패에는 5개로 나뉜 작은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방패 위의 왼쪽에는 빨간색 바탕에 세 마리의 금색 사자와 오른쪽에는 노란색 바탕에 빨간색 사자가 그려져 있고 중앙의 왼쪽에는 파란색 바탕에 하프와 오른쪽에는 파란색 바탕에 3개의 노란색 백합 문양이 그려져 있으며 방패 아래에는 하얀색 바탕에 3개의 단풍잎이 달린 잎가지가 그려져 있다.
방패 왼쪽에는 영국의 국기를 든 금색 사자가 그려져 있으며 오른쪽에는 파란색 바탕에 3개의 노란색 백합 문양이 그려진 기를 든 하얀색 유니콘이 그려져 있다. 국장 위쪽에는 왕관이 그려져 있으며 왕관 아래에는 오른쪽 발에 단풍나무 잎을 든 왕관을 쓴 사자가 그려져 있다. 사자 아래 투구의 좌우에는 10개의 빨간색과 하얀색 두 가지 색의 단풍나무 잎이 장식되어 있다.
방패 뒤쪽에는 캐나다의 훈장의 표어인 "더 좋은 나라를 바란다"("desiderantes meliorem patriam")라는 문구가 쓰여 있으며 국장 아래쪽에 있는 리본에는 캐나다의 나라 표어인 "바다에서 바다로"("a mari usque ad mare")라는 문구가 라틴어로 쓰여 있고 리본 아래쪽에는 장미꽃과 엉겅퀴, 세잎 토끼풀과 하얀색 백합꽃이 그려져 있다.
국가[편집]
캐나다의 국가는 〈오 캐나다(O Canada / Ô Canada)〉이다. 이 곡은 1880년에 퀘벡 주 부총독(Lieutenant Governor)[22]인 테오도르 로비타유(Théodore Robitaille)의 의뢰로 판사이자 작사가인 아돌프바질 루티에(Adolphe-Basile Routhier)에 의해 프랑스어로 작사되었으며 작곡가 칼릭사 라발레(Calixa Lavallée)에 의해 작곡되었다. 이후 1901년도부터 여러 영어 가사가 존재하였으나 몬트리올의 변호사인 로버트 스탠리 위어(Robert Stanley Weir)가 1908년에 쓴 영어 가사가 가장 큰 사랑을 받았으며 1927년부터 널리 통용되었다. 약간의 수정을 거쳐 1980년에 국가로 공표되었으며 2018년에 가장 마지막으로 수정되었다. 프랑스어 가사는 원본 그대로이다.
지리[편집]
자연[편집]
캐나다는 유럽 전체보다 땅이 넓어서 러시아 다음으로 큰 나라이다. 그러나 국토의 북쪽 절반은 메마른 툰드라 지대이고, 실제로 사람이 활동하는 지역은 동서 약 6,000km에 걸쳐 뻗쳐 있으며, 미국과의 국경에서 200∼300km 사이에 있는 지대에 한정된다. 약 200만 개의 호수가 있다. 캐나다는 여섯 지형구로 나뉜다. 먼저 동부 대서양 연안의 애팔래치아산계, 서부 태평양 연안의 코르딜레라 산계, 국토의 중앙의 북쪽에서 허드슨만이 파고들어 이루어진 허드슨만 저지, 이것을 둘러싸고 국토의 절반을 차지하는 캐나다 순상지, 동쪽의 세인트로렌스강 연안 저지, 서쪽의 내륙평원인 프레이리 등이다. 이들 대지형의 배열은 대규모의 지각 변동에 따라 형성되어 제각기 다른 지형을 구성하였으나, 캐나다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는 빙하의 영향을 받은 점이 전체적으로 공통된 점이다. 또한 나무가 우거진 곳이 많다.
캐나다는 15개의 육상생태권과 5개의 해상생태권으로 나누어진다. 이 생태권들에는 약 8만 개가 넘는 캐나다 고유 야생종들이 살아가고 있으며, 이와 비슷하거나 더 많은 수의 야생종들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캐나다 정부 차원에서 타국에 비하여 생태계 보전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인간 활동으로 인하여 자연이 훼손되는 것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다보니 약 800여 종의 동물들이 멸종 위기에 놓여 있으며 더 많은 종들이 위험 위기에 처해있다. 현재 캐나다 국토의 절반 넘게가 아직까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처녀지이며, 각종 환경 규제를 통하여 그 자연환경을 보호받고 있다. 캐나다의 타이가 숲은 그 규모가 약 300만 제곱킬로미터가 넘어가며 도로, 도시, 공장 따위 로 더럽혀지지 않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처녀림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캐나다의 전체 국토 가운데 약 42% 정도가 숲으로 덮여있으며, 덕분에 전세계 숲 면적의 8%를 캐나다가 차지하고 있다.
캐나다 정부는 전 국토의 약 12.1%를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해놓았으며, 이 외에도 국토의 11.4%에 달하는 면적을 또다시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어 놓았다. 호수나 강들의 경우에도 전체의 13.8%가 자연보호구역이며 8.9%가 개발제한구역이다. 캐나다의 첫 국립공원인 밴프 국립공원은 1885년에 설립되었는데, 그 면적이 약 6,641 제곱킬로미터가 넘어가며 얼음 벌판, 만년빙, 빽빽한 타이가 숲 등이 풍부하여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아름다운 국립공원들 중 하나이다. 캐나다의 슈퍼리어호 국립 해상 보호구역은 그 면적이 1만 제곱킬로미터가 넘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담수호 보호구역이기도 하다. 캐나다에서 가장 거대한 야생보호구역은 스콧 섬 해상국립 야생구역으로, 면적이 11,570 제곱킬로미터가 넘어가며 브리티시 컬럼비아에 살고 있는 야생 조류들의 40%가 넘게 거주할 정도로 생물들이 풍부하다. 캐나다는 약 18개에 달하는 유네스코 생태보존구역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지형과 지질[편집]
캐나다의 지형은 실로 다양한데, 아한대 숲이 전 국토에 걸쳐 있으며 북부 지역은 북극에 가까워 얼음으로 뒤덮인 동토로 되어있다. 캐나다 남서부는 비교적 평평한 땅을 이루고 있어 대초원을 조성하고 있는데, 이 지역에서 농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오대호는 남동쪽으로 흐르며 저지대 캐나다 경제 생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세인트로렌스강(Saint Lawrence River)의 수원이다. 약 2,000,000개 이상의 호수가 있으며 그 중 563개 정도는 100㎢(39sq mi) 규모의 큰 호수로 세계 담수의 상당량을 캐나다 호수가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캐나다 로키산맥, 해안산맥 및 북극 코딜라(Arctic Cordillera)에도 담수 빙하가 있으며, 지질학적으로 활동적이며 많은 지진과 잠재적인 활화산, 특히 미거산 대산괴(Mount Meager massif), 가리발디산(Mount Garibaldi), 케일리산(Mount Cayley), 에지자산 화산단지(Mount Edziza volcanic complex)가 있다.
크게는 동부 대서양 연안의 높지 않은 애팔래치아고지(高地), 서부 태평양 연안의 높고 험한 코르디예라 지역, 이들 사이에 끼인 로렌시아대지(臺地:캐나다 순상지), 허드슨만(灣) 저지(低地)와 북극해 제도, 세인트로렌스강(江) 연안 저지, 내륙평원(그레이트플레인스)으로 대별할 수 있다. 애팔래치아 지역은 뉴펀들랜드주(州)·노바스코샤주·뉴브런즈윅주에 걸쳐 있으며 미국 애팔래치아산맥의 연속이다.
북동∼남서 주향(走向)의 고생대층 지질구조를 반영하여, 지형도 같은 방향으로 이어지는 완만하고 낮은 구릉지와 폭넓은 골짜기로 구성되어 있다. 지표는 홍적세(世)의 대륙빙(大陸氷)에 의하여 침식된 곳이 많으나 빙퇴석(氷堆石)이 얹혀 있는 곳도 볼 수 있다. 뉴펀들랜드섬 앞바다에는 세계 3대 어장인 그랜드뱅크스가 있으며, 노바스코샤주의 펀디만은 조수 간만의 차가 14m나 된다. 코르디예라 지역은 환태평양산계의 일환을 이루는 신기조산대(新期造山帶)에 해당되며, 중생대 말기 이후의 큰 조산운동에 의하여 지층이 습곡·단층을 받아 크게 변하고 있다. 캐나다에서는 가장 불안정한 지역이다.
지형상으로는 동부산지(로키산맥)·중앙대지·해안산지(코스트마운틴스)의 3가지로 나뉘며, 높은 부분에서는 산악빙하를 볼 수 있다. 로키산맥은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 유콘주 및 노스웨스트주를 향하여 북쪽으로 뻗어 있으며, 금·은·우라늄·납·아연의 광상이 풍부하다. 해안산지에는 캐나다의 최고봉인 로건산(6,050m)이 유콘주의 북동쪽에 솟아 있다. 로렌시아대지는 허드슨만을 둘러싸면서 캐나다 전체의 1/2 이상을 차지하는데,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는 선캄브리아대(代)의 편마암, 기타의 결정질암, 이를 관입(貫入)하는 화강암 등으로 구성된 안정된 육괴(陸塊)이다.
일반적으로 해발고도 200∼1,000m로 기복이 많은 고원상(高原狀)의 준평원을 이루고 낮은 부분에는 호수가 많으며, 전체적으로 보면 움푹 팬 허드슨만을 중심으로 하여 주위가 높아지는 지형이다. 이 지역은 선캄브리아대의 빙하시대에 캐나다의 거의 대부분을 뒤덮었던 대륙빙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므로 빙식작용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허드슨만 저지는 퇴적 이래 거의 흐트러지지 않고 북쪽으로 완만하게 경사지는 고생층(古生層)으로 구성된 구조평야이며, 이 연장부가 배핀섬과 엘즈미어섬으로 이어져 있다. 이들 섬의 높은 부분에는 지금도 빙하가 보인다.
세인트로렌스강 연안 저지는 주로 고생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층은 거의 흐트러지지 않았으나 지표는 대륙빙의 후퇴시에 생성된 기복 있는 지형을 나타낸다.이 유역 저지는 토양이 비옥하고 좌안의 급사면은 수력발전에 적합한데, 서부 태평양 연안과 더불어 캐나다에서는 가장 온난한 기후의 혜택을 받는 지역이므로 낙농·과수원을 비롯하여 각종 작물의 재배가 집약적으로 영위된다. 공업이 발달되었으며, 이 지역에 캐나다 전 인구의 반수 이상이 살고 있다.
내륙평원은 로렌시아대지와 로키산맥과의 사이에 펼쳐지는 광대한 평원이다. 평원에서는 고생대·중생대·제3기의 지층이 서부의 로키산맥 산기슭 부근을 제외하고는 거의 흐트러지지 않고 퇴적되어 있다. 지표는 침식되어 생긴 침식면으로 서부에서 해발고도 1,000m, 동부에서 20m의 고원을 이룬다. 지표는 빙하기에 대륙빙의 영향을 받은 미지형(微地形)을 나타낸다.
기후[편집]
지형이 다양한 만큼 캐나다의 기후 역시 다양하다. 남쪽의 온난한 기후부터 북쪽의 북극성 기후까지 크게 12기후 지구로 나뉜다. 툰드라 지역 서부는 건조한 지역으로 7월 평균기온이 10도 이하, 연평균 강수량은 250㎜ 이하다. 동부는 서부에 비해 강수량이 많으며 연평균 강수량이 500㎜ 정도이다. 내륙 북부는 겨울이 길고 6개월 이상 눈이 쌓여 있다. 오대호 남쪽 연안의 겨울은 온난하고 짧으며, 7월 평균 기온은 15도를 웃돈다. 태평양 연안은 캐나다에서 가장 온난한 지역으로 가장 추운 달의 평균 기온이 0도이며, 연평균 강수량은 1,000㎜로 비가 많이 내린다.
캐나다의 평균 겨울과 여름 최고 기온은 지역별로 상당히 차이가 난다. 특히 대륙성기후를 경험하는 내륙과 프레리 지방의 겨울은 상당히 혹독한 편이며 일평균 기온은 -15℃ 정도지만 심한 바람과 함께 -40℃(-40℉) 이하까지 기온이 떨어지기도 한다. 북쪽 지역에서는 일년 내내 눈이 오기도 한다. 브리티시컬럼비아 해안 지역은 평균적으로 온화한 기후를 가지고 있는데 겨울 역시 온화하며 비가 많이 오는 것이 특징이다. 동부 해안과 서부 해안의 평균 최고 기온은 일반적으로 20℃(70 °F)이고, 해안 사이의 여름 평균최고 기온은 25~30℃(77~86℉)이며, 일부 내륙 지역의 기온은 때때로 40 °C(104℉)를 넘어가기도 한다.
캐나다 북부 대부분은 얼음과 영구 동토층으로 덮여 있는데 최근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인해 영구 동토층마저 녹아내리고 있어 기후 변화를 톡톡히 겪고 있는 나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캐나다의 연평균 기온 변화를 보게 되면 이를 알 수 있는데, 1948년 이후 1.7℃(3.1℉) 이상 기온이 상승했으며, 지역에 따라서 1.1~2.3℃(2.0 ~ 4.1℉)의 기온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기온 상승의 효과는 북쪽 동토층 지대와 대초원 지대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캐나다 남부 지역의 금속 제련, 석탄 발전 등 산업화가 그 큰 원인 이라고 할 수 있다.
생물다양성과 보전지역[편집]
지형과 기후가 다양한 만큼 캐나다의 생태계 구성 역시 매우 다양하다. 15개의 육상 생태계와 5개의 해양 생태계에는 약 80,000 종 이상의 생물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종들도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국토의 절반 이상이 개발이 되지 않은 상태이고 42%의 국토가 산림으로 덮여 있지만, 온난화와 인간 활동 등으로 약 800종 이상의 생물이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고 한다. 보존 지역으로 지정된 곳은 캐나다 최초의 국립 공원인 밴프 국립공원(Banff National Park), 가장 오래된 알곤퀸 주립공원(Algonquin Provincial Park), 슈페리어호 국립해양보전지역(Lake Superior National Marine Conservation Area) 등이 있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오래전부터 인디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었지만, 백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1678년 프랑스의 선교사 헤네핑이 폭포를 발견한 후이다. 폭포가 떨어지는 벼랑을 케스타 벼랑이라고 하는데 벼랑이 굳은 석회암으로 되어 있지만 폭포의 물이 떨어질 때 비교적 약한 바위의 아래를 깎아내리기 때문에 이 절벽은 해마다 70~110cm 정도 깎여져 나간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브라질 아마존의 이과수 폭포,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크며, 북미 대륙에서는 제1의 폭포로 여겨진다.
역사[편집]
유럽인 도착 이전[편집]
북아메리카에 처음으로 도래한 사람들은 빙하기 시절 베링 해협을 통해 북아시아에서 육로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시기는 확인되지 않지만 많은 역사학자, 고고학자, 고인류학자들은 약 3만 년 전에 처음으로 북미 대륙이 인류에게 발견됐고, 1만 5천 년~2만 년 전 대규모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마지막 빙하기를 필두로 아프로유라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육로는 완전히 끊어졌고, 곧 아메리카 대륙 전체로 퍼진 고대인들은 다양한 문화와 문명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북미 전역에 너무나도 많은 부족과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북미 원주민 문화'라고 한 단어로 퉁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때문에 식민지 시대 이전의 역사는 짧게 정리하기 굉장히 어려워진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이들 문화는 고인디언(Paleo-Indian, 혹은 Paleo-American) 문화에 기반을 두고 발달했으며, 많은 문명이 현재 미국과 캐나다 일대의 대평원과 오대호 주변, 또한 서부 및 남부 지역에 자리잡았다. 이들은 서로 비슷한 창조 신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미시시피 호를 숭상하던 애니미즘 정서와 관련히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2세기경, 온타리오 호수 일대에 이로쿼이 연맹이 결성된다. 현대에는 프랑스어인 '이로쿼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있지만, 정작 이로쿼이 연맹의 사람들은 부족연맹을 하우데노사우니(Haudenosaunee; 긴 집에 함께 사는 사람들)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렀다. 이로쿼이 연맹의 거주지는 현재의 미국과 캐나다 영토에 걸쳐 있었으며, 언어와 문화가 유사한 모호크족, 오네이다족, 오논다가족, 카유가족, 그리고 세네카족 총 5개 부족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었다.
이로쿼이 연맹은 히아와타를 비롯한 데가나위다(일명 피스메이커, Peacemaker), 지곤사세 등 각 부족의 평화주의적 지도자들이 결성한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연맹이었다. 각 지도자들은 언어적, 문화적인 특성을 깊게 공유하는 다섯 부족들이 서로 함께 평화로운 이웃 사촌으로 살아야 한다는 일념 하에 연합을 결정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히아와타는 전쟁에 시달리던 다섯 부족의 구성원들을 위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부족장들을 설득하며 설득하며 연합을 이뤄냈고, 끝내 공포정치와 전쟁을 일삼던 모호크족의 지도자 타도다호까지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히아와타는 '대평화율법'을 선포하여 다섯 부족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진다. 흔히 이로쿼이 외에도 연합의 특성에서 착안해 '오족 연합(Five Nations)'라고도 불리는데, 1722년 투스카로라족이 가입하며 잠시 '육족 연합(Six Nations)'이 되었다.
유럽인의 도래[편집]
지금의 캐나다 땅은 서기 1000년경 바이킹들의 방문 후 한동안 유럽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러나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항해와 함께 서유럽 국가들이 '신대륙'에 흥미를 가지고 아메리카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그 중에서도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현 캐나다 지역에 관심을 보였다.
영국의 개척[편집]
1497년, 영어식으로 존 캐벗(John Cabot)이라고도 알려진 이탈리아인 탐험가 조반니 카보토(Giovanni Caboto)는 잉글랜드 왕국의 헨리 7세의 재정 지원과 함께 동양으로 향하는 항로 개척을 위해 항해를 떠난다. 오래도록 바다 위를 떠돌던 카보토 일행은 마침내 육지에 도착하지만, 다다른 곳은 동양이 아닌 신대륙이었다. 이에 카보토는 지명을 뉴펀들랜드(Newfoundland; 새로이 찾은 땅)라고 명명한 후 잉글랜드 왕국의 땅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첫 탐험 이후 잉글랜드에 헨리 8세의 성공회 창립, 메리 1세의 가톨릭 진흥정책 등 온갖 종교, 정치적 혼란이 도래하며 식민지 개척은 잠시 중단되었다.
잉글랜드가 다시 아메리카 대륙 개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엘리자베스 1세 시기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83년에 험프리 길버트(Humphrey Gilburt)를 캐나다 동부로 보냈다. 본래 군인이였던 길버트는 아일랜드 일대의 반란을 진압하며 그곳에 식민지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훗날 대서양 너머 신대륙이 부상하며 자신의 못다 한 꿈을 신대륙에 실현하려 했다. 1578년 길버트는 북미 땅을 식민지화하라는 여왕의 명을 받아 지금의 뉴펀들랜드 세인트 존스(St. Johns)에 도착했다. 세인트 존스를 여왕의 땅이라 선언한 길버트는 뉴펀들랜드를 떠나 항해를 계속하지만, 항해 도중 배 한 척을 잃는 바람에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했지만, 대서양 상에서 폭풍을 만나 길버트 일행은 모두 사망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가지만, 잉글랜드의 북아메리카 개척은 계속되었다. 길버트를 이어 캐나다 지역을 탐사했던 사람은 제임스 1세 시대의 잉글랜드 탐험가 헨리 허드슨(Henry Hudson)이었다. 허드슨은 대항해시대의 도래와 함께 동양으로 향하는 항로를 찾기 위해 방백으로 노력하지만,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자금 지원이 끊겼다. 1609년 결국 지원을 받기 위해 영국을 떠나 네덜란드로 향한 허드슨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서포트를 받고 러시아를 지나는 북동항로를 탐사하지만, 북극해의 부빙에 가로막혀 GG를 치고 북서항로로 기수를 돌렸다. 항해를 계속하던 허드슨 일행은 대서양 건너 지금의 노바스코샤 지역에 도착하여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만났고, 북아메리카 동부 연안을 항해하다 얼마 후 기수를 돌려 유럽으로 돌아갔다.
1610년 이번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지원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 허드슨은 곧바로 탐험대를 꾸려 신대륙으로 떠났다. 지금의 래브라도 북쪽에 다다른 허드슨 일행은 자신들이 알던 땅 북쪽에도 널찍한 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고, 자신의 이름을 따 허드슨 만(Hudson Bay)으로 명명한다. 북서항로 개척을 목표로 탐사를 계속하던 허드슨 일행은, 겨울이 되어 바다가 얼어버리자 탐사를 포기하고 육지에 잠시 머물렀다. 이듬해 봄이 되어 얼음이 녹자 허드슨은 다시 항해를 나서려 하지만, 계속되는 여정에 지쳐버린 선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선원들은 허드슨이 자신들의 의견을 무시하려 들자 그를 납치해 먼 바다로 나포해버린 채 영국으로 향했다.
허드슨 일행이 발견한 땅은 훗날 찰스 1세에 의해 영국 영토로 선포되고, 그의 외조카인 컴벌랜드 공작 루퍼트(Rupert)의 이름을 따 루퍼츠랜드(Rupert's Land)라 불린다. 이후 영국 내전과 올리버 크롬웰의 독재를 거쳐 즉위한 찰스 2세는 1670년 허드슨 베이 회사(Hudson's Bay Company)를 차리고, 루퍼츠랜드 일대의 모피 독점 거래권을 허용했다. 이들은 탐험가들을 초빙해 캐나다 중서부 내륙을 탐험하며 훗날 식민지가 될 땅을 개척해 나갔다.
프랑스의 개척[편집]
프랑스 왕국의 캐나다 식민 역사는, 프랑스령 북아메리카 전체를 통칭하는 이름 누벨프랑스로도 잘 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첫 캐나다 지역 탐사는 1534년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가 주도한다. 카르티에는 20일간의 항해 끝에 가스페 반도에 다다르게 되고, 그곳에 "프랑스 왕 만세"라는 글귀가 적힌 깃발을 꽂았다. 이것이 프랑스의 퀘벡 개척의 시작이었다. 카르티에는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가스페 반도에 살던 이로쿼이 족의 일파 세인트로렌스 이로쿼이 족(St. Lawrence Iroquoians) 족장 돈나코나의 두 아들을 배에 싣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카르티에의 보고를 받은 프랑스 왕은, 황금 어장과 빽빽한 삼림이 있다는 말을 듣고 흥분하여 2번째 원정을 보내게 된다.
1535년 다시 가스페 반도에 도착한 카르티에 일행은 우선 돈나코나의 두 아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원주민들에게 강 상류에 가면 큰 마을과 더욱 더 큰 강이 존재한다는 것을 들은 카르티에는 탐사에 나서고, 지금의 세인트로렌스 강을 발견한다. 강을 따라 항해를 계속한 카르티에 일행은 어느 날 강가의 스타다코나(Stadacona)라는 마을에 도착하게 되고, 현지 원주민들에게 이곳이 어디냐고 물었는데, 원주민들은 북쪽 연안을 가리키면서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카나타(Kanata)'라고 했고, 이것이 지금의 국명 캐나다의 유래이다. 그들은 항해를 계속하여 지금의 몬트리올 일대의 마을 오슐라가(Hochelaga)까지 도달했다.
오슐라가 일대의 특성과 원주민들의 언어를 메모한 카르티에 일행은 스타다코나로 돌아가 머물지만, 너무나도 추운 날씨 탓에 선원들 사이에 괴혈병이 도는 바람에 이듬해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아들들이 아닌 추장 돈나코나 본인을 납치한 채로 말이다. 돈나코나는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카르티에 일행과 프랑스 왕에게 카르티에가 발견한 땅 북쪽에 금은보화가 가득한 '사그네 왕국'(Kingdom of Sagney)이라는 신비의 땅이 존재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혹해버린 프랑스 왕은 1541년, 사그네의 보물을 탈취하고 세인트로렌스 강 일대에 영구 정착지를 건설하라는 명령과 함께 다시 한 번 카르티에 일행을 캐나다로 보냈다.
스타다코나에 다다른 카르티에 일행은 스타다코나에서 수 km가량 떨어진 곳에 정착지를 건설하고 샤를부르-로얄(Charlesbourg-Royal)이라 이름지은 뒤 지역을 요새화한다. 이후 돈나코나가 말한 사그네 왕국을 찾으러 떠나지만, 석영과 황철석 등 당시 기준에서 쓸모없는 광물들만 잔뜩 발견한 채 돌아온다. 그러나 오랜만에 다시 찾은 샤를부르 일대도 평화롭지만은 않았는데, 주변에 살던 이로쿼이 족이 프랑스인 정착지를 침범하며 충돌을 일으키는 바람에 일대가 혼란해져버린 것. 결국 카르티에 일행의 세 번째 여정은 상처만을 남긴 채 1542년 프랑스로 귀국하며 마무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왕국은 퀘벡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 머지 않아 리슐리외에 의하여 일백조합인상사(Compagnie des Cent-Associés)가 설립되어 식민지 교역을 독점하였고, 지속적으로 원주민과의 모피 교역을 확장해 나갔다. 당시 프랑스의 교역과 함께 발전한 도시가 몬트리올이다. 이들이 정착한 캐나다 북동부는 훗날 아카디(Acadie)/아카디아(Acadia)라고 불리게 된다. 하지만, 야심차게 시작한 식민지 운영은 지나치게 적은 인구로 인해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1660년 당시 프랑스 정착민들의 인구는 겨우 2500명이었다. 17세기에서 18세기 중반까지 상당수의 프랑스 정착민들이 신대륙으로 향했지만, 적응에 실패해 죽거나 프랑스로 되돌아가는 수도 많았다. 오늘날 캐나다와 미국에 거주하는 프랑스계 1천만 명은 초기 정착민 2,600명의 후손들이다.
영국령 북아메리카[편집]
위트레흐트 조약과 7년 전쟁[편집]
한편, 루퍼츠랜드 일대에 식민지를 개척하던 영국은 프랑스가 차지한 퀘벡과 아카디아를 욕심내기 시작했다. 영국 입장에서는 본국에서 캐나다 내륙으로 들어가기 위해 프랑스 땅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못마땅했다. 무엇보다 이 지역의 거대한 어족자원 역시 탐나는 자산이었다.
1714년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에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위트레흐트 조약이 맺어지게 된다. 주된 조약 내용은 스페인 및 프랑스 왕국의 유럽 내 영토와 식민지를 타국에 할양라는 지시였으며, 이 과정에서 프랑스 영토였던 루퍼츠랜드와 뉴펀들랜드 섬, 노바스코샤 지역이 영국으로 넘어갔다. 이로서 영국은 아카디아 전역을 손에 넣게 되었다. 영국은 한동안 프랑스인들을 계속 아카디아에서 살도록 허락했으나, 얼마 후 7년 전쟁이 일어나자 아카디아 거주 프랑스인들의 충성심을 의심해 모두 쫓아내 버렸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프랑스인들은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가거나 노바스코샤 일대 케이프 브레턴 섬 및 생피에르 미클롱 섬 등으로 도망쳤고, 일부는 루이지애나 등 북미 대륙 남쪽으로 추방되었다. 노바스코샤에서 일어난 아카디아인 축출 등의 사건은 캐나다 동부의 아픈 역사의 일부이다.
아카디아가 넘어가고 나서도 프랑스는 퀘벡을 포함한 대부분의 캐나다 지역을 통제하고 있었지만, 1756년 일어난 프랑스-인디언 전쟁으로 나머지 지역마저 모두 영국에게 넘어갔다.
전쟁 초기 미국의 오하이오 지역에서 영국군과 충돌한 프랑스군은 루이 조제프 드 몽캄(Louis-Joseph de Montcalm) 장군의 지휘 하에 주요 전투에서 승리를 하며 영국군을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온타리오 지역의 영국 주요 교역소였던 오스위고 요새(Fort Oswego)마저 프랑스군에게 함락당하는 등 전황은 영국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영국군은 좌절하지 않았고, 1758년 제임스 울프(James Wolfe) 장군과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역공을 개시했다. 울프의 전장 투입과 함께 루이스버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국군은, 머지않아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을 손에 넣고 퀘벡 공격 계획을 세웠다. 1759년 9월, 제임스 울프가 이끄는 영국군은 퀘벡 주의 아브라함 평원으로 들어서고, 울프 장군을 잃는 처절한 혈전 끝에 프랑스군을 퀘벡 시까지 격퇴시켰다. 퀘벡 시의 요새에서 영국군을 방어하던 프랑스군은, 9월 14일 지휘관 몽캄의 전사하자 끝내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
한편 살아남은 프랑스군은 몬트리올 일대로 퇴각하며 본국에서의 지원을 기다린다. 당시 캐나다 총독이었던 보드레이유 후작(Marquis de Vaudreuil)은 전투 패배의 책임을 모조리 몽캄 장군에게 돌리며 퀘벡 시를 되찾으려 했다. 1760년 4월 퀘벡의 영국군이 전투 후유증과 괴혈병에 시달리며 골골대던 그 때, 보드레이유는 군대를 이끌고 퀘벡 시로 향한다. 전투 대비가 미비했고 병사들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던 영국군은 전투를 피하고 후퇴하려 하지만, 사령관 제임스 머레이(James Murray)의 지시 하에 전투를 감행한다. 전투는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으나, 퀘벡에서 버티기에 들어간 영국군은 한 달 후 키브롱 만 해전에서 프랑스의 수송선을 쳐부수고 넘어온 영국 해군의 지원을 받아 반격을 시도했다. 당황한 보드레이유 군대는 몬트리올로 퇴각해 방어에 들어가지만 사방에서 밀려오는 영국군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1759년 최후의 보루였던 몬트리올마저 함락되며 퀘벡 전역이 영국의 차지가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군은 파리 조약을 체결하여 공식적으로 퀘벡 일대를 손에 넣었다.
합병 이후에도 퀘벡에 남아 있던 프랑스인들은 영국 왕실에 매우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통치 초기부터 반란 등 충돌이 잦았다. 당시 미국 독립전쟁으로 골머리를 앓던 영국은 퀘벡 일대 캐나다 지역이 독립전쟁에서 미국의 편을 드는 것을 우려했고, 이에 1774년에 퀘벡 조약을 맺어 퀘벡의 프랑스계 주민들이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고 프랑스어를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특권을 인정하였다.
미국 독립 전쟁[편집]
1770년대 벌어진 미국 독립전쟁은 캐나다 일대마저 전장으로 만들었다. 당시 미국 독립군은 영국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노바스코샤와 퀘벡 일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에게 자신들과 손을 잡고 같이 미합중국을 이루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꽤나 진지하게 논의되었던 모양인지, 미군은 추후 독립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미합중국에 가입할 식민지 목록에 노바스코샤와 퀘벡을 위한 빈 칸 두 개를 남겨두기도 했었다. 소수의 캐나다인들이 미국 독립을 지지했으나 프랑스계를 포함한 대부분은 중립을 선언하였으며, 노바스코샤와 퀘벡 식민지 정부 역시 미국 독립 정부의 제안에 공식적으로 답하지 않았다.
1775년, 미국 독립군은 리처드 몽고메리(Richard Montgomery)와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 장군의 지휘 하에 퀘벡을 공략하기로 했다. 당시 퀘벡은 북미 대륙에 주둔하는 영국군을 갈라놓을 수 있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방어선이 허술했기 때문. 손쉽게 몬트리올을 점령한 몽고메리 장군은 곧이어 캐나다 측 지휘관 가이 칼튼(Guy Carleton) 장군이 피신한 퀘벡 시를 공격하려 한다. 몽고메리 군대는 우선 물자 재보급을 위해 보급병력을 지휘하던 아놀드 장군을 기다렸으나, 메인 주에서 병력을 보트에 태워 강을 따라 빠르게 퀘벡으로 향하려 했던 아놀드 일행은 거센 강물 때문에 빠른 이동은 커녕 대부분의 보트가 침몰하였고, 부족한 물자에 더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겨울이 가까워지며 폭설이 내렸다. 그럼에도 두 장군은 승리를 위해 무리하게 퀘벡 시 공격을 강행했으나, 결과적으로 크게 패했다.
미국 대륙군은 퀘벡 전투의 패배로 대부분의 병사들과 몽고메리 장군을 잃었으며, 아놀드 장군 역시 부상을 입고 물러났다. 한편 성공적으로 퀘벡을 방어한 칼튼 장군과 영국군은 본토에서 온 지원 병력과 함께 대륙군을 몬트리올까지 퇴각시켰다. 계속해서 대륙군을 쫓아가던 영국군은 1776년, 추가 병력을 확보한 미국군과 뉴욕 주 챔플레인 호수 일대에서 맞붙는다. 발쿠르 섬 전투로 알려진 이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머지않아 또다시 겨울이 찾아오자 칼튼의 군대는 몬트리올로 돌아간다. 그러나 퀘벡 점령 당시 벌였던 대륙군의 횡포 탓에 미국 독립군의 이미지는 크게 추락했고, 소수나마 캐나다에 남아 있던 독립군 지지자들마저 등을 돌리게 되었다.
독립전쟁이 끝난 이후 약 75,000명의 미국 내 왕당파(영국 지지자)들이 캐나다로 피신하면서 캐나다는 명실상부한 친(親)영국 국가가, 미국은 반(反)영국 국가가 되었다. 한동안 총과 칼을 들고 싸우던 두 나라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롭게 왕래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특히 비옥한 캐나다 동부의 토양에 관심을 가진 미국 농부들이 캐나다로 이민을 오기도 했다.
식민지 정부[편집]
미국 독립전쟁에서 패배한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승인한 후 1791년 헌법 (Constitutional Act of 1791)을 제정하여 남은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행정을 재편했다. 영국 의회는 당시 캐나다에 위치한 영국 식민지를 프랑스계 지역 하류 캐나다(Lower Canada)와 영국계 지역 상류 캐나다(Upper Canada) 2개 주로 나누고, 주별로 정부를 형성하여 영국의 허락 아래 자체 법률을 통과시키는 것을 허용했다.[6] 또한 영국은 부총독(Lieutenant Governor)을 임명해 캐나다로 파견을 보냈고, 부총독은 현지의 행정을 도맡을 장관들을 임명했다. 여기에 현지 주민들로 구성된 의회가 차려져 부총독에게 민의를 전달하기 시작했지만, 실질적인 주권은 부총독과 그의 내각에게 있었다.
미영전쟁[편집]
자국군을 꺾고 독립을 한 미국이 아니꼬왔던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이 터지자 영국군 탈영병들을 수색한다는 핑계로 미국 상선들을 맘대로 수색하여 압수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더해서 미국인 상인들을 탈영병으로 몰아 영국군에 강제로 징집하거나 프랑스군과 내통한다는 누명을 씌워 미국 상선들에 발포까지 하기도 했다. 이에 화가 난 미국인들 가운데서 영국과 다시 싸우자는 강경파 여론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동시에 아직 영국령이었던 캐나다에도 반미 여론이 감돌며 두 나라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당시 초강대국인 대영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독립 초기 미국에게 다소 무리한 도박이었지만, 미국은 영국이 나폴레옹과 싸우느라 다른 곳에 파견할 여유 병력이 부족한 틈을 타 전쟁을 일으킨다. 미국은 세계 최강의 해군을 가진 영국의 본토를 직접 공격하기 어려워 영국령 캐나다가 그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에 1812년, 미영전쟁이 발발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영국의 지원 병력이 없던 캐나다는 속수무책으로 밀리기 시작했고, 미국에게 오대호 지역과 토론토, 그리고 몬트리올까지 함락당한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전쟁을 터뜨린 미국 역시 준비가 잘 안된 상태였으며, 특히 영국의 지원을 받고 미국의 원주민 탄압에 대항하던 테쿰세가 본격적으로 캐나다 방어를 돕자 전쟁은 장기전으로 돌입했다. 미국은 영국 본국이 나폴레옹에 정신 팔린 틈을 타 빠르게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폴레옹을 잡은 영국군이 캐나다로 향하는 걸 허용했고, 본토 군대의 지원에 아메리카 원주민까지 등에 업은 캐나다군은 순식간에 미군을 몰아낸 뒤 미국 본토를 침공했다.
영국령 캐나다 군은 순식간에 뉴욕을 함락시키고 빠른 속도로 남진, 수도 워싱턴 DC를 점령하고 백악관까지 불태워버렸다. 미국 역사상 워싱턴 DC가 적군에게 점령당하고 백악관이 전소한 적은 이때가 유일하다. 하지만 미군의 반격도 예상보다 거셌기에 영국군은 유의미한 승리 없이 각지에서 피해를 입으며 손해를 누적시켰다. 결정적으로 교착 상태가 한창이던 와중에 나폴레옹이 유배지 엘바 섬을 탈출하면서 영국 본토가 또다시 전쟁터로 변했고, 이에 계속되는 전쟁에 지쳐버린 미국과 황급히 종전 협약을 맺으면서 캐나다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각지의 반란[편집]
상술한 바와 같이 영국령 캐나다는 실질적으로 영국에서 파견된 부총독 및 그의 내각의 독재로 굴러갔는데, 시간이 지나며 이러한 권력구조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특히 하캐나다(퀘벡)의 경우 소수의 영국계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프랑스계를 제치고 권력을 독점하면서 많은 프랑스계가 불만을 품고 있었다. 상캐나다(온타리오)라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았는데, 성공회 교도 중심으로 이루어진 상캐나다 식민지 정부가 비(非) 성공회 교파 소속 주민을 차별한 것이다.
이로 인해 1830년대 캐나다 전역에서 수많은 현지 주민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1837년과 1838년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퀘벡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반란을 일으키지만 곧 무참하게 진압당했고, 온타리오에서도 1836년에 반란이 일어났다가 철저하게 진압당했다. 하캐나다의 반란은 미군의 지원까지 받으며 제법 끈질기게 이어졌지만, 상캐나다의 반란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반란 이후 하캐나다에서는 영국군에 의한 보복이 횡행했으며, 영국 정부는 반란을 계기로 하캐나다의 프랑스계를 영국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프랑스어 사용을 금지하는 초강경 정책을 도입했다.
더럼 보고서[편집]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잇따른 반란에 놀란 영국 정부는, 제1대 더럼 백작 존 램턴(John Lambton)을 캐나다에 파견해 캐나다 식민지 통치의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해 보고서를 올리도록 했다. 명을 받고 캐나다를 둘러본 더럼은 영국으로 귀국해 더럼 보고서(Durham's Report)를 발간한다. 보고서의 내용은 영국 정부의 양캐나다 통합 정책에 찬성하지만, 동시에 현지의 민심을 무시하는 식민지 정부와 프랑스어 탄압 정책은 지속적인 반란을 낳을 것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었다.
더럼 보고서는 영국 정권계에 큰 논란을 일으켰고, 특히 토리당 인사들을 중심으로 많은 정치인들이 그의 자유주의적 사고관이 담긴 주장을 비판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그의 보고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1841년에 상캐나다 정부와 하캐나다 정부를 하나(Province of Canada)로 통합했다. 영국은 또한 통합 캐나다 정부의 휘하에 서캐나다(Canada West, 온타리오), 동캐나다(Canada East, 퀘벡)이라는 행정구역을 두었고, 이전처럼 총독을 캐나다 현지에 파견하되 행정권은 현지 의회에서 선출한 총리와 장관들이 행사하도록 했다. 이는 영국 식민지 최초의 책임정부(Responsible Government, 자치정부)였다. 물론 퀘벡 탄압 정책도 완화되어 프랑스어도 다시 허용되었다. 한편, 별도의 식민지가 꾸려져 있던 노바스코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뉴펀들랜드, 뉴브런즈윅에도 캐나다와 동일한 이유로 자치 정부가 만들어졌다.
양 정부의 통합으로 캐나다는 수도를 다시 정해야 했는데, 온타리오와 퀘벡은 자신들의 영역에 수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캐나다 주 정부는 킹스턴, 몬트리올, 토론토, 퀘벡 시티 등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빅토리아 여왕의 중재 끝에 온타리오와 퀘벡 중간의 오타와가 수도로 정해지면서 오타와에 정착했다.
이 시기부터 세계 각지에서 캐나다(온타리오, 퀘벡, 동부 지역)로 향하는 이민이 본격화되었다. 마침 아일랜드 대기근이 터지는 바람에 많은 수의 아일랜드인들이 캐나다로 유입되었고, 영국에서도 수많은 하층민들이나 고아들이 캐나다로 유입되었다. 또한 미국이 여전히 노예제를 유지하던 시기 미국의 몇몇 흑인 노예들도 지하철도 등의 반노예제 비밀결사들의 도움에 힘입어 18세기에 이미 노예제를 폐지한 캐나다로 도망쳤다. 이때 미국에서 흑인 노예들을 다시 잡아 들이려 노예 사냥꾼을 캐나다에 파견하기도 했는데, 이들이 캐나다에서 난동을 부려 외교 문제로 번지기도 했다.
브리티시 컬럼비아[편집]
한편 별도의 정부가 꾸려지지 않았던 캐나다 서부 및 루퍼츠랜드, 북서부 변방 지역에도 이민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지역은 태평양에 맞닿아있어 온타리오나 퀘벡에 비해 개척이 늦었지만, 제임스 쿡에 의해 영국에서도 브리티시 컬럼비아 지역이 알려지고 소수의 이민자들이 밴쿠버 섬에 자리잡으면서 이 일대를 관할하는 작은 식민정부가 세워졌다. 얼마 후 브리티시 컬럼비아 내륙 지역에서 금이 발견되었고, 이에 따라 내륙으로도 이민자들이 유입되자 영국 정부는 재빠르게 브리티시 컬럼비아 지역에도 식민정부를 수립했다. 한동안 남남이었던 두 식민정부는 밴쿠버 섬 쪽이 재정난을 겪으면서 하나의 식민정부인 브리티시 컬럼비아로 통합되었다.
캐나다 자치령[편집]
1800년대 들어 미국이 빠르게 발전하자, 영국은 캐나다가 미국에 합병되는 것을 막기 위해 행정, 정치적 통합에 나섰다. 이에 따라 1867년 기존 캐나다 지역이었던 퀘벡, 온타리오에 대서양 일대의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를 더해 총 4개 주로 이루어진 캐나다 자치령이 출범했다.
캐나다에 자치 정부를 수립한 영국 정부는 장차 영국령 북아메리카, 곧 지금의 캐나다 전 지역이 하나로 통합되길 바랐으나, 서로 다른 경위로 구성된 캐나다 주(온타리오, 퀘벡)와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뉴펀들랜드간의 이해 관계 충돌로 통합은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캐나다 거주민들은 미국이 미국-멕시코 전쟁을 벌인 다음 명백한 운명 등의 주장을 하는 걸 보고, 점차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국이 엄연한 주권국 멕시코를 찍어누르고 땅을 뺏는 행위를 정당화하자 어쩌면 자신들도 멕시코와 똑같은 신세가 될 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 남북전쟁의 발발과 함께 북군의 아일랜드인 병사들 일부가 영국령 캐나다에 침입해 난동을 피운 것을 계기로,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 통합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1864년,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 정부 대표들은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정부가 있는 샬럿타운에 모여 통합을 논의했고 이중 캐나다 주,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는 통합에 찬성했다.
1867년 영국 의회에서 영국령 북아메리카법 (British North America Act of 1867)이 통과되며 대영제국 최초의 자치령인 캐나다 자치령(Dominion of Canada)이 창설되었고, 서, 동 캐나다로 불리던 주는 각각 온타리오와 퀘벡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캐나다 자치령은 대영제국의 자치령으로써 영국 정부의 허가 아래 헌법을 수정할 수 있는 높은 권한을 받았으며, 통합된 각 식민지 정부 역시 자치령 휘하의 주 정부가 되어 상당한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국가로써의 캐나다는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되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법안이 통과된 7월 1일은 현재 캐나다의 건국을 기념하는 국가 공휴일인 캐나다의 날(Canada Day)로 지정되어 있다.
캐나다 자치령은 1870년 허드슨 베이 컴퍼니에 30만 달러를 지불한 뒤 루퍼츠랜드를 매입했다. 캐나다는 같은 해 현 캐나다의 유콘 주, 북서부 준주, 누나부트 준주의 일부가 되는 북서부 지역도 사들이고, 이듬해 머나먼 대륙 반대편의 브리티시 컬럼비아까지 통합한다. 당시 브리티시 컬럼비아 통합을 위해 캐나다 정부가 내건 정책은 꽤나 파격적이었다. 우선 브리티시 컬럼비아 영토 내 영국 해군 태평양 기지를 그대로 유지하고, 통합 이전 식민지 정부의 부채를 전액 탕감해주기로 한다. 여기에 10년 내로 대륙 횡단 철도 건설까지 약속해버리자 혹한 브리티시 컬럼비아 정부는 통합을 승인해버린다. 한편 브리티시 컬럼비아 가입 후 2년이 지난 1873년,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가 연방에 가입한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는 원래는 캐나다 연방 창설을 위한 회담에도 참여했지만 정작 연방 결성에는 불참했는데, 철도를 놓아준다는 조건으로 1873년 뒤늦게 연방에 가입했다.
캐나다 자치령이 이처럼 온갖 혜택을 다 주면서까지 브리티시 컬럼비아를 끌어들이려 했던 이유는 명확하다. 만약 영국령 북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태평양과 접한 브리티시 컬럼비아가 미국에 붙는 순간 태평양 해안선은 모조리 미국의 차지가 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한창 미국을 견제하던 영국 입장에서도 좋을 게 하나도 없었기에 어떻게든 브리티시 컬럼비아를 캐나다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이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캐나다 자치령은 태평양을 손에 넣지만, 가입 당시 약속한 대륙 횡단 철도 건설을 차일피일 미뤄버린다. 이에 화가 난 브리티시 컬럼비아 정부 내에서 탈퇴 논의까지 오가자, 캐나다 정부는 민간 자본 투자를 받아 캐네디언 퍼시픽(Canadian Pacific)이란 철도 기업을 설립해 가입 14년만인 1885년에 대륙 횡단 철도를 완성했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통합과 함께 캐나다는 영토 확장과 인구 증가를 위해 서부 개척에 나섰다. 우선 메티스인들과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매니토바 주를 창설하고, 서부 내륙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서스캐처원, 앨버타 주가 창설되었다. 이로써 현대 캐나다를 구성하는 10주와 3준주 중 뉴펀들랜드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자치령에 가입했다. 당시 자치령 가입을 거부한 뉴펀들랜드는 캐나다와 별도의 자치령으로 승격한다.
한편 미영전쟁 이후 캐나다와 미국의 관계는 천천히 회복세에 들어섰으며, 양국의 발전과 함께 많은 사람들을 주고받았다. 1800년대 초반에는 캐나다 서부에서도 골드러시가 일어나 많은 미국인들이 캐나다로 건너왔었고, 1800년대 후반 부터는 미국의 캐나다보다 훨씬 빠른 산업화로 인해 수많은 캐나다 사람들이 미국으로 떠나기 시작했으며, 1870년대에는 약 캐나다 인구의 1/6이 미국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또 여러 미국 기업들이 캐나다에 진출하여 캐나다 시장에서 점유율을 넓혀 갔다. 또한 20세기 들어서 캐나다에 라디오가 보급되자 미류 열풍이 불어 라디오 방송 시간의 대부분을 미국 노래들이 차지하기도 했다. 미국 문화의 영향력에 의해 캐나다 현지 문화가 잠식될 위기를 느낀 캐나다 정부는, 자국의 문화 예술 발전을 위해 여러 협회를 창설하고 캐나다 최초의 방송국을 개국하였고, 이것이 지금의 캐나다 공영방송 CBC의 시작이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편집]
19세기 후반[편집]
캐나다 자치령 정부는 1867년 이후 완전한 내정 자치권을 얻었지만, 정작 외교권과 군사권은 계속 대영 제국 정부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본국 정부와 캐나다의 이해관계가 계속 충돌하면서, 남아 있는 외교 및 군사권도 가져와야 한다는 여론이 캐나다에서 일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은 독일 제국이 부상하며 점차 아메리카보다는 유럽 대륙에 집중했고, 따라서 가급적 미국과의 충돌을 피하려고 했다. 이때 영국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867년과 1903년 벌어진 미국-캐나다 국경 분쟁이다.
당시 영국은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와 미국 워싱턴 주, 그리고 캐나다와 미국 알래스카 주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미국의 입장을 많이 들어주며 자기들 멋대로 분쟁을 해결해버렸다. 당연히 이는 현지 캐나다인들의 공분을 샀고, 캐나다 내에서 자주적인 외교와 군사 운용을 향한 목소리가 커지는 계기가 되얶다. 이후 1909년 들어 자치령 독자 외무부를 설립하며 점차 영국으로부터 외교권을 가져오게 되었고, 1926년 밸푸어 선언이 발표됨으로써 마침내 캐나다가 독자적으로 외교권을 발휘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밸푸어 선언 발표 직후 1927년에는 워싱턴 D.C. 주재 캐나다 대사관이 문을 열었으며, 당해 체결된 미-캐나다 어업 협정도 캐나다 수산 장관이 직접 서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편집]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캐나다인들 사이에서 자주 독립의 여론이 생겨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전쟁 초기 자치령 주민들은 캐나다가 영연방의 일원으로서 의무적으로 참전한 사실에 대해 당연히 영국을 도와야 한다며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며 많은 수의 캐나다인들이 전사하였는데도 연합군 병력이 모자라자, 1917년 캐나다 정부는 자치령 일대에 징병령을 내려버린다. 갑자기 내려진 징병령에 캐나다인들, 특히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간 퀘벡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본인들이 자치령 소수민족으로써 영국계와 비교해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자신들과 별 관련도 없는 영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여기에 캐나다인 군부대들이 프랑스어를 금지하고 영어만을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등 차별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프랑스계 캐나다인들 사이에서 민족주의 및 반전 여론이 급속도로 퍼지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전쟁을 계속하고 싶던 정치권은 전쟁에 호의적이었던 영국계 캐나다인들을 등에 업고 징병령을 통과시켜버렸다. 이에 차근차근 쌓여 가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불만이 임계점을 넘어버리며 민족주의 폭동으로 번졌다. 1918년 퀘벡 전역에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폭동이 발발했고, 캐나다 정부는 군사를 동원해 무력으로 폭동을 진압하기에 이른다. 1917년 징병 위기(Conscription Crisis of 1917)라고 불린 이 폭동으로 캐나다 사회는 큰 상처를 입었으며, 당시 줄기차게 징병제를 밀어붙였던 캐나다 보수당은 폭동 이후 한동안 퀘벡 지역 선거에서 쓴맛을 봐야 했다.
어찌됐건 캐나다 병사들은 캐나다군이 아닌 영국군으로써 1차 대전에 참전했고, 불리한 상황에서도 여러 번 승리를 쟁취하며 활약했다. 전쟁 당시 독가스가 처음으로 쓰인 제2차 이프르 전투(Second Battle of Ypres)에서, 캐나다인 병사들은 영국군의 지원이 올 때까지 오줌 적신 수건을 코와 입에 댄 채 독가스를 막고 전선을 사수했다. 1917년의 비미 리지 전투(Battle of Vimy Ridge)는 처음으로 작전 입안부터 실제 동원병력까지 거의 95% 이상이 캐나다군이었던, 캐나다가 주도한 첫 전투이다. 부활절 다음날인 월요일, 캐나다 병사들은 따뜻한 음식과 럼주로 배를 채우고 전투를 시작했다. 이후 포병의 지원사격을 받은 1만 5천 명의 본대가 독일군 제1진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독일군의 격렬한 반격을 뚫고 진흙 구덩이, 철조망, 지뢰를 넘으며 전진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캐나다 병사들은 최전방 방어선을 넘었는지도 모른 채 제2차 방어선까지 진격하며 독일군을 무너뜨렸다.
비미 리지 전투의 승리 이후 캐나다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영국군이고 프랑스군이고 왕창 깨졌던 요충지를 비교도 안 되게 적은 희생으로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캐나다 병사들이 항상 입에 달고 다녔던 말이 "Who won at the Vimy?"였을 정도였다. 상술한 여러 번의 전투에서 성과를 거둔 캐나다 병사들은 서로 출신지에 따라 '온타리오 주 파병 군단', '매니토바 주 파병 군단'으로 구분짓기를 그만두고, 하나의 '캐나다군'으로 생각하며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전쟁의 활약상은 캐나다 본토에도 널리 퍼져나갔으며, 통합과 함께 상호간에 이질감을 느끼던 자치령 주민들에게 '캐나다인'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확립시켜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자국에 대한 캐나다인들의 자부심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고, 점차 캐나다인들 사이에서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온전한 자주 국가를 이루자는 의견이 우세해졌다. 종전 이후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당시 캐나다 총리였던 로버트 보든(Robert Borden)은 유럽 열강들에게 캐나다의 전쟁 피해를 강조하며 캐나다를 영국 자치령이 아닌 독립 국가로써 대우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를 포함한 주요 열강 지도자들이 승낙했고, 베르사유 조약의 체결과 함께 캐나다는 국제 사회로부터 독립국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후 캐나다는 국제연맹에도 자발적으로 가입했다.
한편 전쟁이 끝나 가던 1918년, 본국 영국에서의 서프러제트와 함께 캐나다에서도 여성참정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당시 여성 인권 신장에 호의적이었던 보든 총리는 1917년 우선 전쟁 미망인들과 군인 남편, 아들을 가진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듬해 보든은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여성들에게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줄 것을 약속하고, 뒤이은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연임에 성공했다. 1918년, 보든은 마침내 퀘벡을 제외한 캐나다 전 지역의 여성들에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했다. 이후 1921년 온타리오에서 캐나다 최초의 여성 의원 아그네스 맥페일(Agnes Macphail)이 당선되고, 1940년에는 퀘벡 주도 완전한 여성참정권을 보장하며 지금에 이르게 된다.
전쟁과 함께 캐나다 자치령은 사실상의 독립국으로 인정받지만, 행정상으로는 여전히 영국에 소속된 자치령에 불과했다. 이처럼 독립국도, 속령도 아닌 캐나다의 지위는 1926년 들어서야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당시 자치령 총독 줄리언 빙(Julian Byng)이 총리 매켄지 킹(Mackenzie King)의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요구를 거부하면서, 캐나다 정계는 자치령 내의 헌법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로 왈가왈부하기 시작했다. 이번 일로 크게 데인 매켄지 킹은 당해 제국회의(Imperial Conference)에서 영국 자치령의 지위를 재정의하자는 의제를 올렸고, 논의 끝에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과 함께 모든 자치령이 영국과 동급의 주권을 가지게 되었다. 밸푸어 선언의 내용은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Statute of Westminster)의 제정과 함께 법률로 명시되었다. 이로써 캐나다를 비롯한 모든 영국 소속 자치령이 실질적인 주권 국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편집]
1차대전의 활약상과 함께 온전한 주권국가가 된 캐나다는, 곧이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국회 회의를 통해 연합군으로써 참전을 결정했다. 1943년 12월, 연합군은 이탈리아 전선의 오르토나라는 마을에서 독일 공수부대를 상대로 크게 고전했는데, 좁은 골목과 길거리로 가득한 마을 곳곳에 독일군이 매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착화된 전투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캐나다군은 쥐구멍(mousholing) 전술을 고안, 캐나다군은 시가지 건물마다 몰래 폭탄으로 구멍을 뚫어 진입로를 만들었고, 도시 전체에 걸쳐 이 과정을 반복한 결과 안전한 통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캐나다군의 쥐구멍 작전은 현대전에서 자주 쓰이게 된다.
익히 알려진 오마하 해변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유명하지만, 캐나다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큰 활약을 했다. 다른 연합군 병력과 함께 주노 해변에 상륙한 캐나다군은 상륙한 지 불과 15분만에 독일군의 저항을 분쇄해버리고 해변을 점령했다. 캐나다군은 여기서 더 나아가 영국군이 고전하고 있던 골드 해변의 후방을 우회기동으로 차단하고 조여들어가 독일군을 포위 섬멸하였다. 덕분에 영국군은 1시간 먼저 상륙을 시작한 미군보다 더 일찍 해변을 장악할 수 있었다.
캐나다군이 너무나도 빠르게 독일군을 격파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주노 해변의 방어가 허술한 게 아니었냐는 의견도 나오는데, 당시 사상자 수를 보면 골드 해변의 영국군 사상자가 약 400여명, 주노 해변의 캐나다군 전사자가 359명에 부상자가 574명이였고, 소드 해변의 영국군 및 자유 프랑스군은 683명의 사상자를 기록하였으며, 유타 해변에서는 200여명의 사상자만을 기록했다. 즉 주노 해변은 사상자 수로는 오마하 해변 바로 다음이었을 정도로 저항이 거센 해안이었다. 대전 기간에 윈스턴 처칠은 "나에게 캐나다 병사와 미국의 기술력, 영국의 장교들이 주어졌다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만큼 캐나다 병사들의 전투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캐나다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키워나갔다. 종전 이후 캐나다는 UN에 가입하였으며, 1949년에는 마지막까지 별도의 자치령으로 남아 있던 뉴펀들랜드가 주민투표 끝에 캐나다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1956년 수에즈 전쟁 당시 중립과 평화를 주장하여 영국의 파병 요청을 거절하며 군사, 외교적으로 영국에게서 독립된 자주국임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캐나다는 명목상 자치령으로서 헌법 수정안을 통과시킬 때마다 영국 정부의 허가를 받는 것이 필요했는데, 훗날 1982년 영국과 캐나다에서 동시에 캐나다 법(Canada Act 1982)이 제정되고 나서야 영국 의회의 허가 없이 자체적으로 법을 만들고 수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캐나다는 영국의 직접적인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근현대[편집]
냉전[편집]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이웃나라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도약함에 따라 미국과 국경을 맞닿은 캐나다의 특성상 그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냉전의 양대 축 중 하나인 초강대국이자 20세기 이후 주요 혈맹국인 미국은 캐나다에 있어 냉전 시대 당시 제1우방국이었으며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창립 회원국의 일원이 되었다. 한국전 참전이야 말이 필요하지 않고 추가로 미국과 캐나다는 1958년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North American Aerospace Defense Command; NORAD)를 창설하여 항공우주 공동방위조직을 맺었으며, 이에 캐나다의 영공 또한 미군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냉전 중반기에 미-캐 관계는 미묘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냉전 당시 제1세계와 제2세계 내부에서의 다각화가 일어나자 캐나다는 되도록이면 중재 외의 이유로 국제 분쟁에 끼지 않기를 원했지만, 미국은 캐나다 정부에게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달라는 둥 캐나다에 소련을 견제할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자는 둥 적극적인 군사적 협조를 요구했다. 여기에 캐나다 정부와 합의 없이 독단적으로 캐나다에 영향을 끼치는 외교적 결정들을 밀어붙이자 양국 사이엔 마찰이 일기 시작했다. 특히 이러한 갈등은 베트남 전쟁 때 극에 달했다. 캐나다는 베트남 전쟁 파병을 거부하고 참전을 기피하던 미국인들의 망명을 받아주며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당시 피에르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당신네들 옆에서 사는 것은 마치 큰 코끼리와 자는 것 같군요. 당신들이 아무리 친절하고 얌전한 맹수라고 쳐도 그 옆은 움찔거리거나 잠자는 소리 하나하나가 신경쓰이니까요."라며 대놓고 미국을 비판하는 연설을 한 바 있다. 미국을 코끼리에 비유하며, 미국이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행동 하나하나가 캐나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 미국을 빗댄 내용이다. 같은 북미 대륙 나라임에도 수시로 의견 충돌을 빚던 캐나다와 미국의 불편한 관계는, 소련의 붕괴와 함께 냉전 시대가 끝나고 나서야 회복세에 들어섰다.
퀘벡 독립운동[편집]
한편 프랑스계가 주류를 차지했던 퀘벡은 20세기 초까지도 전근대적, 가톨릭적 구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퀘벡의 구시대적인 면모는 1960년대부터 '조용한 혁명'(Révolution tranquille)으로 일컬어지는 급격한 근대화, 세속화 과정을 거치며 점차 사라져 갔다.
퀘벡 주는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집권한 퀘벡 자유당(Parti libéral du Québec, PLQ)은 주 정부의 주도 하에 강력한 경제 개발을 실시하며 주 내의 경제 주도권을 영국계로부터 빼앗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영국계들의 소유였던 수력 발전 회사 '이드로 케베크'(Hydro-Québec)의 국유화였다. 이후 정교분리 정책이 이루어져 오래도록 가톨릭 교회가 담당하고 있던 교육, 의료 부문을 정부가 통제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사회복지 및 노조에 대한 지원도 확대되었다. 또한 프랑스어의 사용이나 프랑스계 문화 보존에 대한 법률이 여럿 통과되었다.
상술한 조용한 혁명은 퀘벡의 프랑스계들이 스스로를 프랑스계 캐나다인이 아닌 퀘벡인으로 인식을 하는 계기가 되었고, 장차 퀘벡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진다. 퀘벡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에는 급진파 독립운동 단체인 퀘벡 해방전선(FLQ)이 몬트리올에서 퀘벡 내각 관료인 피에르 라포르테(Pierre Laporte)와 영국 외교관 제임스 크로스(James Cross)를 납치하는 테러리즘을 일으켰다. 10월 위기(October Crisis)라 불린 해당 사건을 두고 당시 총리였던 피에르 트뤼도가 전시조치법을 발동하고 계엄령을 내려 사태를 진압하지만, 라포르테는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FLQ는 해체되었다.
연방정부는 독립 열기를 완화하기 위해 퀘벡에 상대적으로 많은 국회 의석, 문화와 언어 인정, 국영 가톨릭학교 개설 등 여러가지 정치적 편의를 제공한다. 이후 1969년 7월 7일에는 연방정부 주도 하에 공용어에 대한 법이 도입되어 프랑스어가 공식적으로 영어와 동등한 지위에 오른다. 연방정부의 노력 끝에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퀘벡 분리 운동은 주류에서 멀어지고, 투표를 통해 합법적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 이로써 1980년과 1995년 두 차례에 걸쳐 퀘벡 주 분리독립 투표가 이루어진다. 첫 투표는 40:60으로 꽤 큰 차로 부결되었지만, 두 번째(1995년) 투표에서는 49:51로 근소한 차로 독립이 부결되었다. 두 번의 실패에도 계속되었던 독립 운동은 21세기에도 정당정치의 형태로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 세가 크게 줄었다.
현대[편집]
1993년 진보보수당의 브라이언 멀로니(Brian Mulroney)가 사임하면서 킴 캠벨(Kim Campbell)이 캐나다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의 자리에 올랐으나, 취임 4달만에 진보보수당이 총선에서 자유당에게 참패하며 총리직에서 물러선다. 후임자로 자유당의 장 크레티앵(Jean Chrétien)이 총리에 당선되었으며, 퀘벡 블록의 약진과 함께 2차 분리 독립 투표가 이뤄졌으나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근소한 차로 부결되었다. 크레티엥 정부는 코소보 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는 군대를 파병하며 국제 분쟁에 관여하였으나 이라크 전쟁에는 파병하지 않았다.
폴 마틴을 뒤이어 취임한 보수당의 스티븐 하퍼(Stephan Harper) 총리는 보수 표심이 강한 앨버타 주의 석유 산업에 투자를 늘렸고, 경제적 이유를 들며 교토의정서를 탈퇴하는 등 반(反) 친환경적 노선을 탄다. 그러나 미국의 셰일 가스 채굴로 저유가 시대가 도래하자 캐나다 경제는 큰 타격을 맞으며 비틀거렸고, 하퍼와 보수당은 민심을 크게 잃고 말았다. 결정적으로 2015년 F-35 도입 관련 스캔들이 터지고 의회가 내각불신임결의을 제출하자 하퍼는 의회해산을 선언한 뒤 총선거를 실시하지만, 결국 자유당에게 참패하고 만다.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든 하퍼는 곧 자리에서 물러나고, 자유당의 쥐스탱 트뤼도가 22대 총리 자리에 올랐다.
아버지 피에르 트뤼도에 이어 총리가 된 트뤼도 총리는 젊고 진보적인 공약으로 그리고 미남이라는 점에서도 세계적 관심을 모았다. 대표적인 트뤼도의 진보적 행보는 남녀 동수 내각, 레지덴셜 스쿨 등 과거사의 사죄, 시리아 난민 수용, 오락용을 포함 대마초 전면 합법화 등이 있다. 또한 향후 5년 동안 적자를 내서라도 돈을 많이 써서 경제를 부양하겠다는, 경제적으로도 과감한 정책을 발표했다. 이는 스티븐 하퍼의 지휘 아래 에너지 산업에 치중했던 캐나다의 경제 구조를 바꾸는 시도로 보인다. 또한 중산층에게 부과하던 세금을 줄이고, 1% 부유층에게 세금을 더 거두겠다고 밝히는 등 사회민주주의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한편,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캐나다 역시도 큰 경제적, 사회적 타격을 받았다. 트뤼도 정부는 강력한 봉쇄 정책 및 백신패스 등 다양한 방역수책을 물색하며 확산세 줄이기에 나서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국제적 경제 침체는 캐나다에도 큰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21세기 캐나다는 G7의 일원으로써 안정적인 사회와 경제 성장을 유지하는 세계적인 선진국으로 거듭났다. 또한 기존의 영국-프랑스계 간의 언어, 문화 평등을 법적으로 보장함과 동시에 개방적인 이민 정책으로 해마다 많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캐나다의 이민 사회는 현지 문화 적응을 강조하는 강압적인 이민 정책과 달리, 모자이크처럼 여러 민족을 포용하며 다양한 문화가 함께 공존하고 어우러지는 환경을 조성하려 노력하고 있다. 여기에 일찍이 차별금지법을 통과하여 인종, 성별, 종교, 성적 지향 등 개개인이 각자의 특성으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국가적으로 천명하기도 했다. 지금의 캐나다는 세계적으로도 인권 의식이 가장 높은 국가이자 다문화주의의 성공적인 선례가 되었으며, 캐나다인들 스스로도 국가적 정체성을 다양성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캐나다의 개방적인 사회 구조는 2010년대 서방 세계의 급속한 우경화에도 꺾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정치[편집]
캐나다의 정치는 연방 정부(Federal Government; Gouvernement fédéral, Federal Government), 연방 의회(Parliament of Canada; Parlement du Canada), 연방 법원(Federal Court; Cour fédérale)이 각각 행정, 입법, 사법을 담당하는 삼권분립의 형태를 띤다.
캐나다 연방 정부는 캐나다의 최고 행정 기관으로 연방하원(프랑스어: Chambre des Communes, House of Common), 다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내각을 구성하며, 내각의 수장은 총리(프랑스어: Premier ministre, Prime Minister)로 연방 하원 내 다수당 대표가 연임하게 된다. 차관급 미만 연방 공무원은 비정치적, 비선출직 공무 분야 전문인으로 구성되어 정치색을 띠지 않는다. 지방자치제가 발달해 각 주에는 주 정부(프랑스어: Gouvernement provincial, Provincial Government)가 총리(프랑스어: Premier ministre, Prime Minister)의 영도 아래에 연방정부 고유 권한인 외교권과 군통수권을 제외한 거의 모든 행정 영역을 관할한다. 주 단위에서도 삼권 분립이 이뤄져 사법부인 주 법원(프랑스어: Cour provinciale, Provincial Court)과 입법부인 주 의회(Legislative Assembly, House of Assembly, National Assembly, 프랑스어: Assemblée législative, Chambre d'assemblée, Assemblée nationale)가 활동하고 있다.
캐나다는 세계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발전한 국가들 가운데 하나로, 자유주의, 평등주의, 온건한 정치 이념 등을 바탕으로 가히 타국의 모범이 될 만한 정치 체제를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듣는다. 자유주의 국가치고는 사회적 정의에도 상당한 가치를 두고 있으며, 그 외에도 평화, 질서, 권리, 인권 등 서구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가치들을 중심으로 정치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
캐나다의 정계는 현재 크게 2개의 중도파로 나누어져 있는데, 중도 좌파 정당이자 현재 여당인 캐나다 자유당(Liberal Party of Canada), 그리고 중도 우파 정당이자 현재 제 1야당인 캐나다 보수당(Conservative Party of Canada)이 있다. 그 외에도 좌파 계열 정당인 신민주당(New Democratic Party) 등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캐나다 정계에서는 단 한 번도 극우나 극좌 세력이 주도권을 잡은 적이 없으며, 국민들도 대체적으로 사회민주주의적 중도를 선호하며, 온건한 방향의 정당들을 선호하는 편이다. 2019년 총선의 결과로 5개의 정당이 대표를 가진 교섭단체로 의회에 진출하였는데, 이 5개의 정당들 중에서는 현재여당인 캐나다 자유당, 제 1야당인 캐나다 보수당, 좌파 계열 정당인 신민당, 퀘벡 분리주의 정당이자 지역정당인 퀘벡 블록, 환경정당인 녹색당 등이 있다.
캐나다는 영국의 국왕이자 캐나다의 국왕을 최고 국가원수로 하는 의회제도를 가지고 있다. 현재의 국왕은 영국의 찰스 3세로, 그는 캐나다 외에도 15개에 달하는 타 커먼웰스 국가들의 국가원수이기도 하다. 찰스 3세가 여전히 캐나다와 영국의 국가원수를 동시에 겸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캐나다와 영국은 완전히 별개의 국가이며 시스템 제도도 독자적으로 운영한다. 캐나다 국왕은 캐나다 본토에서 자신을 대리할 총독(Governor General)을 임명하며, 이 총독이 총리를 임명하거나 의회를 해산할 수 있고 내각 각료들을 임명하거나 내치는 등 캐나다에서 국왕의 권한을 대신 맡아 수행한다. 다만 실제로 총독이 국민이 뽑은 총리를 내친 경우는 거의 없다. 총독의 권력은 거의 상징적인 것이며, 총리가 단순히 최고 국가원수인 국왕의 권위를 빌어 총독의 명령을 받는 형식을 취하는 것에 불과하다.
캐나다 국왕이 캐나다의 최고 원수이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는 순전히 상징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보통 캐나다의 권력은 국민들에 의하여 선출된 하원과 내각, 그리고 이들에 의하여 선출된 장관들에 의하여 행해지며, 행정수반인 캐나다 총리가 정무를 주로 본다. 국왕에 의하여 임명된 총독은 대부분의 경우 아무 일도 하지 않으나,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서는 장관들의 재고도 듣지 않고 독단적으로 명령을 내릴 권한을 가지고 있기에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총독은 정부의 국정운영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보통 의회에서 의석을 가장 많이 차지한 다수당의 당수에게 총리직을 넘겨주며, 원내 2당의 당수는 공식적으로 야당 대표의 지위를 획득하여 정부가 국정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자연스레 맡게 된다.
현재 하원은 338명의 의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소선거구제에 기반하여 국민들의 총선을 통하여 선출된다. 실질적으로 캐나다의 정치를 이끌어나가는 기관으로, 의회해산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총리와 평민원 의원들의 임기는 4년이다. 10년에 한 번씩 인구조사를 시행하여 각 주에 의석을 배분하는 데, 북부 3개의 준주에 최소 1개를 배분해주며 나머지 10개 주에는 원칙적으로 인구 비례에 따라 배분한다. 선거구의 인구 편차는 최대 1:3:7 정도로 나누어진다. 총선은 기본적으로 총리의 제청에 따라 총독의 명령으로 이루어지며, 헌법에 따라 총선이 한 번 치러진 후 최소한 5년 이내에는 또다시 총선이 치러져야만 한다. 다만 캐나다 선거법에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4년마다 한 번씩 10월에 총선을 실시한다. 상원은 105명의 의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국민들이 뽑지 않으며 총리가 추천하고 총독이 임명한다. 상원 의원들은 주와 준주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고, 각 주 별로 의석 수가 정해져 있다. 헌법에서 상원의 정수가 113명을 넘어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임기는 따로 없으나 정년은 75세로 규정되어 있다.
외교[편집]
캐나다의 대외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미(對美) 관계이다. 영국과의 전통적 관계는 근래 점점 더 희박해져 영연방은 캐나다의 외교정책 중에서 거의 의미를 상실해가고 있다. 이에 반하여 미국과의 관계는 그 지리적 근접관계뿐만 아니라, 캐나다 경제가 사실상 미국 경제의 부속물이 되기에 이르러 결정적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의 캐나다에 대한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의 증대는 캐나다 일반대중은 물론, 대부르주아지 사이에도 반미 기운을 싹트게 하였으며 이것이 진보보수당의 반미·친영적 외교정책의 기반이 되어 있다.
1958년 총선거에서 진보보수당의 압도적 승리는 이러한 반미기운의 고조를 반영한 것이었다. 미국의 핵탄두 반입을 둘러싸고 진보보수당의 반미정책과 자유당의 현실적 대미협조 정책이 부딪쳐 1963년의 총선거에서는 자유당이 승리를 차지하였으나, 그 이후 캐나다의 외교정책은 미국에 완전히 동조하는 일 없이 동서 양 진영의 대립 가운데서 독자의 중립적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쿠바나 중국에 대한 입장이 미국과 크게 다른데, 이것은 영국 이상으로 중립적이다. 캐나다 독자의 중립적 입장은 각종 국제분쟁에서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캐나다에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캐나다는 UN의 창립 회원국이자, 세계무역기구의 회원국이며 G20, OECD의 회원국이기도 하다. 또한 여러 국제기구와 헌장에도 참여하고 있는데, 1976년에는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 조인하였으며 1990년에는 미주기구(OAS)에 가입하였다. 2000년에는 OAS 정상회담을 열었으며 2001년에는 3회 아메리카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또한 환태평양 경제권을 중심으로 경제적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주요 외교정책[편집]
첫째, 자유적 국제주의를 중시한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 등에서의 다자외교를 중시하며, 글로벌 이슈 대응에 대한 기여 강화를 목적으로 한다. 기후변화 대응, 개발협력, 여성평화안보, 유엔 평화유지 임무 참여 확대 등이 국제사회 기여의 주요 이슈다.
둘째, 양자·다자외교의 균형 추구 및 주요국과의 협력 강화이다. 미국 및 북미 3국(캐나다, 미국, 멕시코)간의 협력을 중시하며, 영국과 EU 등 유럽 국가와의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아시아 지역에의 관여에 힘을 쓰고 있는데, 인도-태평양 지역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대중동 외교 다변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영향력 증진을 꾀하고 있다.
셋째, 국제질서에 기반한 자유무역 추구이다. 북미자유무역협정(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 USMCA),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omprehensive and Progressive Agreement for Trans-Pacific Partnership, CPTPP), 캐나다-EU CETA(Canada-European Union Comprehensive Economic and Trade Agreement), 남미 공동 시장(Southern Cone Common Market = Mercado Comun del Cono Sur, Mercosur), 태평양 동맹(Alianza del Pacifico, PA) 등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해외시장 확대를 노리고 있다. 통상관계 다변화를 꾀하며, 이를 통해 신흥시장으로 진출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공공외교를 강화해 캐나다의 글로벌 이미지 제고에 힘쓰고 있다.
대한관계[편집]
캐나다는 남·북한 동시수교국으로, 1963년 1월 14일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1965년 캐나다 대한민국대사관이, 1974년 주한 캐나다대사관이 각각 설치되었다. 북한과는 캐나다는 2001년 2월 6일 수교하였다. 캐나다는 6·25전쟁 참전국으로, 당시 육군 3개 보병대대, 해군구축함 3척, 공군 1개 비행중대가 참전하였다. 1981년 9월 피에르 트뤼도 총리가 방한하였고 전두환 대통령은 아프리카 4개국 순방 후 1982년 8월 캐나다를 방문하였다. 1999년 7월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방문하였다.
양국간 협정으로는 무역협정(1965), 기술협력협정(1976), 원자력개발 응용에 관한 협정(1976), 이중과세방지협정(1978), 섬유류 교역협정(1979), 비자면제협정(1994), 사회보장협정(1999) 등이 체결되었다. 한국과 캐나다는 지난 130년간 교류해온 뿌리깊은 우정을 가지고 있다. 특히, 19세기 말부터 독립 전까지 약 180명 이상의 캐나다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 잘 알려진 선교사로는 한국에 온 첫 캐나다 선교사이자 최초 한영 사전을 편찬한 제임스 스카스 게일, 고종의 주치의이자 세브란스병원과 연세대학교를 설립한 올리버 애비슨, 외국인 최초로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프랭크 스코필드가 있다. 1963년 1월 14일 수교를 시작하며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2013년 수교 50주년을 기념했다. 2014년 최초로 양국 정상이 상호 방문하며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가질 것을 선언했다.
현재 한국과의 투자현황으로는 2020년 총 누계 기준 한국은 캐나다에 251억불 투자, 캐나다는 한국에 113억불을 투자했다. 한국의 대캐나다 투자는 2020년까지 누계 기준으로 251억불을 투자했는데, 투자 주요 내용을 살펴보게 되면 온타리오주 풍력 및 태양광 발전사업 등 에너지 투자가 주를 이루고 있다. 반면 캐나다의 대한국투자는 2020년까지 누계 기준으로 113억불을 투자했는데, 60% 이상이 금융보험 분야 투자였다. 2020년 캐나다의 투자는 18.5억불로 2019년의 대비 약 3배 가량 증가하였다.
무역수지의 경우 대체로 수출이 수입보다 많은 편이다. 2021년 기준으로 총 교역액은 131억불이고 수출액은 67억불, 수입액은 64억불이다. 한국의 주요 수출품은 주로 자동차와 관련 있다. 자동차, 전기차, 자동차 부품이 주를 이루며, 무선 전화기, 철광판 등 공산품을 주로 수출하고 있다. 수입 품목은 유연탄, 동광, 철광, 펄프, 육류 등 지하자원 및 1차 산업 위주로 수입하고 있다. 캐나다 석탄 수출의 25%는 한국이며, 한국에 수입되는 캐나다산 육류의 경우 돼지고기 비중이 높다.
- 캐나다와 한국의 인적교류
캐나다와 한국은 활발하게 인적교류를 진행하고 있다. 1994년 관광 및 방문 목적으로 양국에 입국하는 국민에게 최대 6개월간 무비자를 허용하고 있으며 활발한 교류를 보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방문객 숫자는 대폭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1996년부터 워킹홀리데이 프로그램이 실시되었는데, 18~30세 청년을 대상으로 진행하고 있다. 양국의 청년이 상대국에서 1년간 체류하며 직업에 종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캐나다는 또한 한국인 이민자가 다수 거주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1960년대 초부터 의사, 과학자, 기술자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이주하기 시작했고, 1984년부터는 투자이민도 시작되었다. 1997년 한국이 IMF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이민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최근 몇 년 간 캐나다는 이민자 순위에서 9위~13위를 오가고 있다.
한국인이 본격적으로 이주·이민을 시작한 후 캐나다내에 한국인 동포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짧은 이민역사에 비해 다른 민족보다 빠른 속도로 동포사회가 정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9년 기준으로 약 24만 명의 동포가 있으며, 이들 중 절반 가량이 온타리오, 마니토바(오타와 제외; 127,386명)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많은 곳은 서부지역(BC, 앨버타, 사스캐치완, 유콘, NWT, 누나부트 준주; 98,618명), 동부지역(퀘벡, 뉴브런즈윅, 뉴펀드랜드, PEI; 12,325명), 오타와(3,421명) 순이다. 이들 중 70% 이상이 시민권과 영주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1990년대 이후 동포 2세들의 주류사회 진출이 활발해지고 있다.
한국의 드라마, 음악, 영화 등 한국 콘텐츠는 캐나다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세계 4대 영화제로 알려진 토론토국제영화제에는 한국의 유명 배우와 감독들이 참석하여 한국 영화를 널리 홍보했다.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 특히 토론토의 노스욕 일대에서는 토론토 한인 대축제가 개최되어 성황리에 행사를 마치기도 했다.
퀘벡문제[편집]
1967년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캐나다 방문중에 ‘자유퀘벡 만세’라고 소리쳤던 사건은 캐나다측에서 내정간섭이라고 분개하였을 뿐 아니라 캐나다 정부와 프랑스의 외교관계가 일시 긴박해졌을 정도로 파문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퀘벡문제는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나 이는 원래 캐나다 건국 이래의 큰 문제였다.
퀘벡은 1763년의 파리조약에 의해 영국이 프랑스로부터 할양받은 옛 프랑스 식민지이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프랑스계 주민의 80% 정도가 살고 있다. 이들 프랑스계 주민은 소수민족으로 소외되기 쉬운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중앙정부는 영어 외에 프랑스어도 공용어로 하는 등 각종 융화정책을 취하고 있으나, 민족문제로서의 퀘벡문제는 근래 오히려 격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1970년에 있었던 주의회 선거에서는 연방으로부터 퀘벡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퀘벡당이 압승하여 르네 레베크(Rene Levesque) 당수 주도하에 프랑스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하는 ‘프랑스어 헌장’이 실시되는 등 분리정책이 강행되었다. 1981년 주의회 선거에서도 퀘벡당이 승리하자 이 기세를 몰아 퀘벡주를 포함한 8개주의 주 정부 총리가 오타와에서 회합을 갖고, 주권(州權)을 제한하려는 연방정부의 개헌조항에 대해, 헌법 개정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각주가 독자적으로 결정할 것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퀘벡주 정부가 1987년 신헌법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함으로써 전체 10개주가 신헌법을 승인, 통일 캐나다의 실현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소련연방의 붕괴 등 탈연방 바람이 거세지자 퀘벡 독립의 문제가 다시 부각되었다. 연방탈퇴를 막으려는 브라이언 멀로니(Brian Mulroney) 연방총리는 자치정부수립 허용 등을 다룬 헌법수정안을 1991년 의회에 제출하였다.
자치권을 확대함으로써 퀘벡주를 캐나다 연방의 일원으로 남게 하려던 헌법개정안이 1992년 10월 반대 55%로 부결됨으로써 퀘벡분리독립운동이 가속화되었고 1994년 12월 퀘벡주의 자크 파리조 총리가 퀘벡주 독립초안을 발표하였으나 1995년 선거결과 50.56%의 독립반대로 퀘벡분리가 또다시 부결되었다. 1998년 3월에 실시된 투표에서도 퀘벡주 주민 59%가 독립을 반대하였고 8월에 캐나다 대법원은 퀘벡주의 일방적 분리의 합법성을 부정하는 판결을 내렸으나 캐나다헌법의 수정과정을 밟은 다음에는 가능할 수도 있다는 나타냈다.
2001년 1월 퀘벡주 총리 뤼시앵 부샤르는 퀘벡주의 분리독립을 조기에 실현하지 못한 데 대하여 책임을 지고 물러났으며 3월에 부총리이던 질 디세프(Gilles Duceppe)가 수상에 취임하였다. 질 디세프는 퀘벡주 주권확립 실현에 애쓰겠다고 밝혀 퀘벡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국가적 변수로 남아 있다.
군사[편집]
캐나다의 영연방(Commonwealth) 및 대영제국에 대한 강한 애착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군사 활동에 큰 기여를 했다. 이후 캐나다는 다자주의를 옹호하며 다른 국가들과 협력하여 지구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냉전기간 동안 한국전쟁에 지원군을 파견하는 등 유엔군의 주요 협력자였다. 이후 캐나다는 1989년까지 UN의 평화 유지 노력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50회 이상의 평화 유지 임무에 참여했고 르완다, 구 유고슬라비아, 소말리아 등과 같은 나라에 군대를 파견했다. 소련의 잠재적인 공중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미국과 협력하여 북미 항공 우주 방위 사령부(North American Aerospace Defense Comman, NORAD)를 창설하기도 했다.
캐나다 통합군(The Unified Canadian Forces, CF)은 캐나다 왕립 해군, 캐나다 육군, 캐나다 왕립 공군으로 구성된다. 2021년 캐나다의 군비 지출은 총 약 264억 달러로 캐나다 국내총생산(GDP)의 약 1.3%에 해당히며, 현재 병력 규모는 정규군 68,000명, 예비군 29,000명, 민간인 9,600명 규모이다. 모병제로 군인을 모집하며 만 18세에 지원할 수 있는데, 부모 동의 시 17세에도 지원 가능하다. 국방부 조직은 민간인 국방장관(Minister of National Defence) 예하에 국방차관(Deputy Minister)이 국방정책을 총괄하고, 현역 대장인 국방참모 총장(Chief of the Defence Staff)이 육·해·공군을 통합 운영하는 체제로 구성된다.
행정구역[편집]
캐나다는 10개의 주(province)와 3개의 준주(territory)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이웃한 미국이나 같은 영연방 왕국인 호주와 달리 주를 state가 아닌 province라고 부른다. 캐나다 자치령(Dominion of Canada) 출범 이전 영국령 북아메리카(British North America·BNA) 안에 province를 설치해 두고 있던 게 지금까지 이어졌기 때문. 캐나다는 연방제 국가로서 주 정부는 연방 정부와 대등한 관계로 헌법에 따라 자치가 보장된다. 그러나 준주는 연방 직할 지역에 얼마 간의 자치권을 부여한 것으로, 준주 정부는 연방 정부의 권한을 위임받아 자치권을 행사한다. 그래서 주 정부에 비해 준주 정부는 자치 권한이 작다.
캐나다는 본래 영국령 북아메리카 내에서 따로 만들어진 영국 식민지들이 뭉친 연방국가이며, 병합된 식민지들은 연방 내의 주로 남게 되었다. 따라서 각 주에는 영국이 파견하여 영국과 영국 자치령의 국왕(여왕)을 대리하는 주 총독(lieutenant governor)이 있었다. 지금도 주 총독이 있지만 캐나다 총독이 직접 캐나다인(정확히는 그 주 출신 사람) 중에서 임명하고, 실질적인 권한은 없는 명목상의 지위일 뿐이다. 실제 주의 행정 수반은 주 의회에서 선출되어 형식적으로 주 총독이 임명하는 주 총리(premier)가 맡는다. 캐나다 연방 전체의 총독-총리 관계와 비슷하다. 주 총독의 임기는 5년이며 무제한으로 연임할 수 있다.
준주에는 주 총독 대신 준주 총독(commissioner)이 있다. 역시 캐나다 총독이 임명하지만, 명목상 캐나다의 총독과 각 주 총독이 캐나다 국왕(=캐나다 국왕=영국 국왕)을 대리하는 것과 달리 준주 총독은 캐나다 국왕이 아닌 연방정부를 대리한다. 물론 준주에서도 실권은 준주 총리에 있다. 준주 총독도 임기는 5년이며 무제한 연임이 가능하다.
주 의회와 준주 의회는 양원제인 연방 의회와 달리 단원제이다. 주 의회의 경우 원래 양원제가 대부분이었다가 단원제로 축소되었는데, 이 때의 흔적으로 주 의회 내부에 하나의 원(院, chamber)을 두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 준주 의회는 처음부터 단원제였지만, 각 주 의회의 영향을 받아 마찬가지로 의회 안에 하나의 원을 설치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주, 준주와 주요 도시(특별한 언급이 없는 이상 영어 사용지역). 학교에서는 통상 지도에서 보는대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나열하면서 배운다.
한편 캐나다의 주와 준주는 모두 라틴 문자 두 글자짜리 우편 코드가 할당돼 있는데, 이웃한 미국과 협정을 체결해서 미국의 주, 수도 워싱턴 D.C.(DC), 기타 미국령의 우편 코드와 겹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의 또 다른 접경국인 멕시코와는 이런 협정이 없기 때문에, 간혹 캐나다와 미국의 코드 중에 멕시코의 코드와 중복되는 게 있다.
- 캐나다 주는 모두 10개로 다음과 같다.
경제[편집]
캐나다는 주요 7개국 정상회담의 회원이며, 비교적 미약한 대외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세계 경제대국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캐나다는 2022년 명목 GDP는 약 2조 2,210억 달러로 세계 10위를 기록하고 있다. 1인당 GDP는 43,242달러를 기록했다. 캐나다의 경제자유지수는 미국 및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보다 높으며, 소득 격차는 이들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나타나 자유시장경제 및 균형 잡힌 성장을 하는 국가의 대표적인 예로 손꼽힌다. 캐나다 국민의 1인당 평균 가구 실소득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에서 부패가 가장 적은 나라 중 하나이며 세계 최대 무역 국가이다.
캐나다는 세계에서 2번째로 넓은 국토를 보유하고 있지만, 인구가 적어서 인구 밀도는 매우 낮다. 또한 오래도록 G7의 일원이었지만 지역강국으로도 분류되지 않을 만큼 존재감이 낮은데, 바로 옆에 초강대국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거기에 아직까지도 과거 식민지배 주체이자 세계 유수의 선진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을 받고 있어 실제 경제력에 비해 저평가되는 경향이 강하다. 당장 캐나다 대외 정책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는 중요한 존재이다.
그러나 엄연히 국내총생산 10위권에 들어가는 경제 대국이다. 2010년대 이후 한국과 러시아의 약진으로 잠시 10위권 바깥으로 밀려나기도 했지만, 타 선진국들이 휘청이는 와중에 안정적으로 경제를 유지하며 2015년부터는 다시 10위에 등극하였다.
옥토로 가득한 너른 평야와 곳곳에 묻혀 있는 천연자원은 캐나다가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한국을 중심으로 캐나다를 복지 괜찮은 농축산업, 천연자원 대국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캐나다의 경제 구조는 여타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3차 산업이 GDP의 70%를 담당한다.
물론 풍부한 자원 덕에 1차산업의 비중이 비교적 높지만, 공업 기반 역시 미국, 영국, 프랑스의 글로벌 기업의 하청 및 현지 생산을 담당하며 나름 탄탄하게 다져 놓았다. 2017년 기준 캐나다 국내총생산의 분야별 비중은 부동산이 13%로 가장 높았으며, 뒤이어 제조업이 10.4%, 광산개발업이 8.2%, 금융 및 보험 7.1%, 건설 7.1%, 의료 및 보험 6.6%, 공공기관 6.3%, 도소매 5.8%, 유통업 5.6%, 과학 기술 전문 서비스업 5.5%, 교육업이 5.2%로 나타났다.
캐나다의 제조업은 상당 부분이 해외 자본의 투자로 만들어졌다. 그중에서도 캐나다 내 외국 자본의 70%, 연간 수출의 75%를 담당하는 미국의 존재감이 매우 크기 때문에 캐나다의 제조업은 국제 경제 상황, 특히 미국의 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또한 자국 기업이 적어 자주성이 떨어진다는 단점도 있다.
온타리오 주 토론토 일대 골든 호스슈 지역의 자동차 공장은 거의 전부가 해외 기업의 소유다. 2021년 들어서는 캐나다 항공우주 산업의 리더격이었던 봉바르디에가 사세를 급격히 축소하며 산업 기반이 약해지고 있다.
2010년대 말 들어서는 저유가와 스티븐 하퍼 정권의 실각으로 인해 성장률이 한 풀 꺾인다. 보수당 출신이었던 스티븐 하퍼가 본인의 정치기반인 앨버타를 밀어주기 위해 에너지 산업에 많은 투자를 했지만, 얼마 후 셰일가스 혁명과 함께 저유가 시대가 도래하며 쪽박을 친 것이다.
하퍼의 지지율은 이 때를 기점으로 바닥을 쳤으며, 모당인 보수당이 2015년 총선거에서 참패하며 총리 자리를 쥐스탱 트뤼도에게 넘겨 준다. 경제 전문가들은 NAFTA를 포함해 미국과의 통상 협상이 해결되지 않는 한, 캐나다의 경기 침체가 장기화될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고 있다.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는 캐나다 전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캐나다 경제는 통계 작성 이래 최악인 -5.4% 성장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듬해 2021년 7월 14일, 감염병으로 인한 경기 침체 대응을 위해 캐나다은행이 기준금리를 현행 0.25%로 동결하며 캐나다의 6월 무역흑자가 13년만에 최대치를 찍기도 했다. 다만 코로나19의 유행세가 꺾이자 금세 회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22년 8월 31일, 캐나다 통계청은 2분기 캐나다 경제 성장률이 3.3% 정도로, 감염병 대유행 이전 수치로 돌아왔음을 밝혔다.
장차 캐나다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열쇠는 이민이 될 것으로 보인다. 넓은 영토와 반비례하는 인적 자원은 언제나 캐나다의 발목을 잡는 골칫거리였는데, 경제 발전과 함께 출생률까지 하락하면서 인구를 늘릴 뾰족한 방법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평균 수명 증가와 함께 고령화까지 겹치며 노동 가능 인구의 비중이 낮아지자, 캐나다 정부는 이민 정책을 완화해서라도 더욱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캐나다 정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이민자들은 지난 5년간 캐나다 노동력 성장의 80%를 차지했으며 캐나다 기업들도 이민 인구를 국가 성장의 핵심으로 언급했다.
농림수산업[편집]
2019년 기준 캐나다의 농림수산업은 국내총생산의 1.5%를 차지했다. 넓은 영토에 걸맞게 캐나다의 경지면적은 약 7,000만ha에 달하며, 국민 1인당 평균을 환산하면 대략 231ha 정도 수준이다. 특히 캐네디언 프레리 일대 서스캐처원과 앨버타의 경지면적은 총 4,700만ha로 전체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2019년 캐나다에서 가장 많이 재배된 농작물은 단연 밀이며, 밀 다음으로는 유채, 옥수수, 보리, 대두가 뒤를 이었다. 단위면적 당 인구가 적기 때문에 생산량의 2/3을 수출하며, 2020년 전 세계에서 5번째로 많은 밀을 수출하는 국가다.
그 외에도 메이플 시럽, 사과주, 아이스 와인, 치즈, 버터, 크림, 카놀라유나 쇠고기, 돼지고기 등 역시 수출한다. 한국에서도 미국산 쇠고기, 호주산 쇠고기 다음으로 많은 것이 캐나다산 쇠고기이며, 주로 브리티시 컬럼비아, 앨버타에서 생산한다.
캐나다는 세계적으로 많은 양의 임목과 건설 자재용 목재를 생산 및 수출하는 나라다. 캐나다의 질 높은 목재는 자국에서도 자주 쓰이며, 자국 내의 많은 주택들이 경량목 구조로 지어지는데 한 몫 한다. 그리고 신문지 등 제지용 목재 역시 캐나다산이 많다.
캐나다의 삼림면적은 총 347만㎢ 정도로 러시아에 두 번째로 넓으며, 국토 총 면적의 40%, 전 세계 임산지대의 10%를 차지한다. 그 중 상업화하기 쉬운 목재에 적합한 토지는 197만㎢로 전체 삼림면적의 3분의 2에 달한다. 2017년 캐나다는 연간 목재 수출량 세계 1위를 달성했으며, 그중 90%를 침엽수가 차지하고 있다.
수산업 종사자는 약 2만 명으로 다른 산업과 비교해 고용 인구가 적지만, 생산량은 매우 많다. 캐나다는 세계 3대 어장 중 하나인 그랜드뱅크스를 보유하고 있어 수산업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국토 동쪽 대서양에서 생산되는 수산물이 전체 어획량의 75%를 차지하고 있고, 200해리 영해 밖의 어획활동 규제를 위해 현재 북대서양 수산업 기구(NAFO)에 가입 중이다.
캐나다는 세계 최대의 생선 수출국 중 하나로 총 수출량의 50%가 미국으로 공급되며, 나머지 대부분을 일본, 한국과 서유럽 국가들이 수입한다. 특히 랍스터, 연어 수출량이 많다.
공물 및 에너지 산업[편집]
캐나다의 광업은 금융업과 함께 국가 경제를 이끄는 핵심 산업이다. 주요 수출 품목 중 천연 자원을 모도 합하면 그 비중이 20%에 달한다. 넓은 땅덩이 곳곳에 우라늄, 철광석, 아연, 니켈, 티탄철석, 코발트, 몰리브덴 등 다양한 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캐나다의 광물은 매장량 기준 우라늄이 세계 3위, 철광석 9위, 아연 8위, 니켈 7위, 코발트 7위로 세계 수위권의 자원 대국이며, 생산량 기준으로는 칼륨 1위, 나이오븀 2위, 백금 4위, 금 5위, 니켈 5위를 기록하고 있다.
광물 외에 석유 및 에너지 산업의 규모도 매우 큰데, 포브스에서 선정한 글로벌 2000 기업의 석유&가스 산업 부문 57개소 중 무려 10개가 캐나다 기업이다. 여기에 석유 산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송유관 업체 2개까지 포함하면 12개까지 늘어난다. 또한 캐나다는 오일샌드 매장량이 사우디에 이어 세계 2위이며, 오일샌드를 석유 매장량에 포함시킬 경우 베네수엘라,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원유 매장량 3위에 오른다.
한편 캐나다의 석유 산업은 생산 단가가 높아 그닥 효율적이지가 못하다. 내륙의 오일샌드는 사출 비용이 너무 비싸고, 그렇다고 대서양에 해상 유전을 짓자니 탐사에 드릴쉽 건조 비용 등 기반 시설을 갖추기가 부담스럽다.
결정적으로 합성 원유를 실어 나를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산을 해도 판로 개척이 잘 안 된다. 때문에 캐나다의 석유 산업은 유가 변동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시설 부족으로 가공하지 못하는 오일샌드는 대부분을 미국에 헐값으로 팔아치우곤 했다.
또한 하술할 제조업과 마찬가지로 해외 자본 의존도가 높은데, 한때 캐나다 내 해외 자본의 20.1%가 광산업이었으며, 석유 및 가스 채굴 산업으로 한정해도 10%에 달했을 정도이다. 주로 미국, 영국 대기업에 의존한다.
높은 생산 단가로 유가 하락에 취약했던 캐나다의 에너지 사업은, 2010년대 미국발 셰일 가스 산업이 급부상하며 기나긴 불황에 들어간다. 전임 총리였던 스티븐 하퍼 내각은 국가 재정의 많은 부분을 앨버타 일대 에너지 산업에 몰빵했는데, 셰일 가스와 함께 원유 가격이 추락하자 그야말로 대차게 망해버렸다.
그 결과 석유 산업에 크게 의존하던 앨버타 주는 평균 실업률이 10%를 넘어 14~15%까지 찍는 등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마찬가지로 석유 비중이 높았던 서스캐처원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전성기 인력 블랙홀이라 불릴 만큼 화려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그저 씁쓸할 따름. 더 이상 지역 경제가 생산성을 유지하지 못하자 불황은 모든 산업 분야로 전이되었다.
세금 수입 저하로 인한 교육, 의료, 행정 등 공공 분야의 예산이 죄다 삭감되며 공직자들이 떼거지로 실직했고, 서비스 산업이 위축되면서 소비는 계속 줄기만 하는 악화일로에 빠져들었다. 경제 성장의 정정체와 함께 있던 사람들마저 해고당하는 바람에 부동산 경기 또한 직격타를 맞아, 수년 째 집값이 하락하기만 하는 유일한 지역으로 선정되기에 이르렀다.
캐나다 에너지 산업계의 몰락은 중서부를 넘어 전국적인 경제 손실로 이어졌다. 주력 수출 자원이 몰락했으니 국가 경제가 멀쩡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얘기지만, 캐나다의 재정 시스템은 미국과 달리 주 정부 차원에서 벌어들인 자원 수입도 연방 정부의 권한으로 재분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캐나다 달러는 에너지 산업의 몰락의 직격타를 맞아 외환 시장에서 가치가 폭락했고, 국민소득 후퇴와 더불어 캐나다인들의 소비력에도 직격타를 입힌다. 은퇴 후 따뜻한 동남부 플로리다주에서 휴양을 즐기던 캐나다 중노년층, 이른바 스노우버드(Snowbird)들의 소비 급감은 플로리다 주 정부에서 직접 관광 캠페인 및 중소도시 경기 부양 방안을 고려할 정도로 국제적인 이슈가 되었다.
그렇게 뼈를 깎는 긴축에 들어간 캐나다 석유 산업은, 2018년 말 이후 유가가 반등하며 일정선을 유지하자 "이제 캐나다 에너지 업계의 부활을 기대해 봐도 될 것이다"라는 핑크빛 전망을 내비치며 신규 사업 투자를 늘린다. 당시 앨버타-미국 파이프라인 프로젝트 등 여러 인프라 확장 사업이 발표되었으나, 머지않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2020 미국 대선와 함께 모조리 무산되고 만다.
대봉쇄와 함께 실물 경기가 극도로 위축됨에 따라 기록적인 유가는 마이너스를 찍으며 끝없이 추락했고, 캐나다 에너지 업계와 중서부 경제는 위기에 처했다. 그나마 어찌어찌 조업 유지라도 하는 중서부는 그나마 나은 상황이고, 해상 유전을 운영하고 있던 뉴펀들랜드 래브라도는 생산마저 중단하면서 사실상 파탄에 이르렀다. 결국 2000년대 캐나다 경제 호황신화를 이끌었던 동력도, 2010년대 이후의 캐나다 경제 이슈와 불황의 원인도 모두 석유에서 촉발됐다고 볼 수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함께 러시아의 석유 수출이 국제적 제재를 받으면서 캐나다의 석유 산업도 일시적인 회복세에 들어서고 있다. 다만 이번 고유가는 전쟁이 일으킨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며, 무엇보다 이미 여러 번의 쓴맛을 본 캐나다 정부가 기름값 잠깐 올랐다고 석유 산업 투자를 대폭 늘릴 리가 없다.
오히려 캐나다는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실현하겠다고 선언했으며, 탄소 포집을 비롯한 기후변화 대응 기술과 재생에너지 산업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이처럼 친환경 전환과 에너지 효율에 많은 노력을 기하고 있는 캐나다가 경제, 환경 등 모든 방면에서 지속 가능하지 못한 화석연료 사업에 돈을 쓸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한편 캐나다의 발전 산업은 석유 못지않게 중요하다. 자국 내 공급도 공급이지만 미국과의 전력 거래도 캐나다 경제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2019년 캐나다의 자원별 발전 방식은 수력이 60%로 1위, 원자력이 15%로 2위이며, 그 뒤로 천연가스 11%, 석탄 7%, 풍력 5%를 기록했다.
나머지 2%는 석유, 지열, 태양광 등으로 나뉘어 있다. 국제 전력 거래량은 2017년 기준 연간 72TWh를 수출했고 10TWh를 수입했다. 장차 캐나다는 화석연료 발전 사용을 더욱 줄여나갈 예정이다.
제조업[편집]
캐나다는 주요 선진국 중 제조업 비중이 가장 낮은 편이지만, 적은 인구를 감안하면 기반 자체는 탄탄하다. 사실 캐나다 제조업의 존재감이 낮은 이유는 유명한 자국 기업의 부재와 높은 해외 의존도 때문인데, 특히 미국, 영국과 프랑스의 기업들이 다수 진출해있다.
과거 캐나다는 토론토와 해밀턴 등 온타리오 남부, 몬트리올 - 퀘벡 시티와 같은 퀘벡 세인트 로렌스 강 유역의 산업화와 함께 공업 기반을 다져갔고, 지금도 활발한 해외 자본 유치와 건실한 중견, 중소기업 시장으로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하지만 21세기 첨단 기술의 도래와 함께 현대화에 실패한 산업체들은 경쟁력에서 밀려났으며, 잇따른 경제 위기와 해외 신흥 기업의 약진에 봉바르디에, 블랙베리, 노텔 등 몇 없는 자국의 대형 제조산업체들마저 부진을 면치 못하는 중이다.[18]
캐나다의 항공 우주 산업은 세계 5위 규모로서, 2012년 기준 약 220억 달러의 매출을 창출하는 등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분야이다. 캐나다 전역에 400개 이상의 항공 우주 산업체들이 분포하고 있으며, 자체 고용 인원만 약 8만 명에 달하고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모든 제조, 서비스 부문을 포함할 경우 약 16만 명에 달한다.
과거 항공기 설계와 제조 면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전통적 항공우주 공학 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시기도 있었으며 2022년 현재까지도 안전성이 보장되는 민간 제트기를 설계부터 제작까지 독자적으로 해낼 수 있는 몇 없는 나라이다.
21세기 캐나다 중공업의 아이콘은 단연 봉바르디에다. 1970년대를 거쳐 빠르게 사세를 확장한 봉바르디에는 한 때 항공기 사업은 보잉, 철도 사업은 지멘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거대한 기업이었지만, 2010년대 주력 사업이던 중, 소형 여객기 시장이 축소되며 부진을 면치 못한다. 여기에 계속되는 신형기 개발 실패와 항공사업 전반에 먹구름을 드리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까지 겹치며 재정 위기를 겪은 봉바르디에는 철도 사업을 시작으로 각 부서를 매각하기 시작한다. 2020년대 들어서는 여객기 사업을 모두 매각하고, 비즈니스젯 등 소형 항공기만 간간히 생산하는 조그마한 기업으로 전락해버린다.
항공 우주 외 분야도 전망이 좋지 못하다. 캐나다는 과거 핼리팩스급 호위함 등 자국 해군의 주력함을 자체 생산할 만큼 해양 및 방산 산업 규모도 꽤 컸지만, 지금은 고유 모델 생산을 중단하고 영국 BAE 시스템스가 설계한 26형 호위함을 라이센스 생산하는 등 사업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다. 물론 26형 호위함의 건조 자체는 캐나다 조선소에서 이뤄지지만, 여러모로 핼리팩스급 호위함의 성능에 실망한 캐나다 해군이 26형으로 갈아타는 모양새인지라, 캐나다의 건함 개발 산업은 사실상의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21세기 캐나다 제조업 불황의 원인은 단순하다. 타국 시장이 급부상하면서 경쟁력이 떨어진 것. 당장 같은 북아메리카에도 NAFTA 체결 이후 저임금 제조 거점으로 급부상한 멕시코와 세계 최대 경제 국가인 미국이 있다. 안 그래도 한국 - 일본 - 대만과 중국 등 동아시아의 제조업의 성장도 위협적인데 서유럽에도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등 세계적인 제조업 대국들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으니, 인구도 적으면서 산업 기반까지 뒤쳐지는 캐나다는 설 자리가 없다.
캐나다가 가장 두각을 보이는 산업은 바로 로봇인데, 국제 우주 정거장의 로봇팔(Canadarm)이 바로 캐나다의 작품이다. 그러나 기초과학 분야의 높은 경쟁력에도 상용화 비중이 낮아 시장 전체에 끼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캐나다 기업은 산업용 로봇 제조 시장에서 상위 10위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인지도와 점유율이 뒤쳐진다. 따라서 캐나다의 로봇 산업은, 제한된 역량과 자본을 집중해 일정 수준의 기술적 장벽 안에서 시장을 점유하는 형태를 띤다. 이건 비단 로봇 산업뿐 아니라 2차산업 전반의 특징이기도 하다.
한편 자동차 부품 및 완성차 사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정작 자국 유명 메이커는 적다. 캐나다는 주로 미국 및 일본, 독일 등 이미 시장을 선점한 국가들의 생산 전진기지 역할을 하며, 석유 및 광업 등와 마찬가지로 해외 의존도가 높다.
혼다, 토요타, 포드, 제너럴 모터스 등 세계적인 자동차 기업들이 캐나다, 특히 온타리오 남부 일대에 생산기지를 운영하고 있으며, 2021년 기준 세계에서 15번째로 많은 자동차를 생산한다. 의외겠지만 이웃나라 미국과 달리, 캐나다에 공장을 만든 완성차 기업 중 한국 메이커는 없다. 과거 현대자동차가 몬트리올 근교에 제조 기지를 운영한 전적이 있으나, 사업 실패와 함께 철수했다. 캐나다 국내 자동차 브랜드는 서양권 중심으로 알려진 버스 제조사 프레보스트(Prevost), 자회사 노바버스(Novabus)가 있다. 그래도 자동차 부품 부문에서는 이름난 브랜드를 몇 두고 있다. 세계적인 자동차 부품 회사인 마그나 인터내셔널(Magna International)도 캐나다 회사이며, 연 매출만 34조로 현대모비스보다 3조나 더 많은 거물급 기업이다. 상술한 완성차 및 자동차 부품 산업은 캐나다 제조업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분야로, 2021년 기준 캐나다의 전체 수출 품목 중 각각 2위, 3위를 차지했다. 수출액은 도합 408억 달러에 달한다. 또한 자동차 시장의 성장과 함께 철강, 금속 가공, 금형 및 기계 부품 등 관련 산업이 함께 약진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캐나다 내의 2차산업의 중흥기를 이끌어 낼 것으로 예상된다.
캐나다는 농림수산업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관련 산업이 크게 발달했다. 그중에서도 캐네디언 프레리 일대를 중심으로 한 농업 원자재 가공 산업의 규모는 세계적이다. 칼륨 생산량 1위, 질소 비료 생산량 3위에 빛나는 비료 회사 뉴트리엔(Nutrien)이 캐나다 새스커툰에 본적을 두고 있다. 동일 분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호주 이상으로 영향력이 큰데, 2019년 뉴트리엔 그룹이 호주 수위권의 농업 기업을 인수한 다음 상장폐지 시켰을 정도.
또한 풍부한 산림자원에 힘입은 종이와 펄프 산업의 규모도 2011년 기준 세계 5위에 해당된다. 그리고 건축용 자재인 경량목이나 단풍나무 내장재 역시 많이 제조되고 있다. 서울종합운동장 실내체육관의 내장재도 캐나다산 단풍나무이다.
국가 전력 생산의 15%를 차지하는 원자력 발전 기술에서도 두각을 보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원자로인 캐나다 중수로(CANada Deuterium Uranium; CANDU)를 독자적으로 설계하고 제작했으며, 각국의 원자력 사업에 수출하고 있다.
추운 날씨 탓인지 캐나다에는 의외로 명품/고가 아웃도어 브랜드가 많다. 대표적으로 이탈리아 출신의 명품 아웃도어 브랜드인 몽클레르와 함께 프리미엄 패딩계의 양대 산맥으로 통하는 캐나다구스.
이외에도 노비스, 아크테릭스, 무스 너클, 맥 케이지 등 고가 아웃도어 브랜드 대다수는 캐나다 브랜드이다.
금융업[편집]
캐나다 경제에서 금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7.7%로, OECD 평균에 비해 높은 편이다. 실제로 포브스 글로벌 2000 기업에서 선정한 캐나다 내 순이익 상위 10개 회사 중 8개가 모두 보험, 은행, 자산운용 등 금융 섹터에 해당한다.
동일 기준을 타국에 적용했을 때 한국은 2개, 일본은 3개 뿐이라는 점에서 금융업이 캐나다 국가 경제에 끼치는 영향력을 알 수 있다. 캐나다의 금융업은 또한 자산의 건전성 면에서 대단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캐나다 경제가 미국 경제 의존도가 심하다는 건 잘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미국 경제를 파탄 직전까지 내몬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당시 캐나다 은행들은 특유의 보수적인 경영과 정부의 적절한 감독 덕분에 타격을 거의 받지 않았다.
현지에 거주하다 보면 금융업, 특히 은행권이 캐나다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쉽게 알 수 있다. 변변한 오피스 빌딩 수요가 없을 법한 지방 중소도시의 다운타운에서조차 홀로 고층빌딩을 유지하며 간판을 내거는 기업 대부분이 TD, RBC , BMO, CIBC, 스코샤뱅크 등과 같은 메이저 은행들의 현지 지사 건물이다. 여기에 각 지역 최대 도시나 주도 급의 도시에 가면 HSBC와 같은 다국적 은행들도 볼 수 있다.
캐나다의 금융업이 가지는 국제적인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캐나다 은행업계 2위 기업인 TD의 경우엔 국경 너머 미국 북동부 지역, 플로리다와 카리브해 지역에도 영업망이 존재할 정도로 꽤 존재감이 있는 편이다. 또한 토론토 증권거래소(TSX)는 주가 총액으로 세계에서 8번째로 큰 시장이며, 이는 홍콩과 상하이보다 크고 프랑크푸르트보다 25% 이상 높은 수치다.
한편 인구가 증가하며 부동산 산업도 규모를 키우고 있다. 2023년, 캐나다 정부는 집값이 폭등하자 2년간 외국인들의 부동산 구입을 금지시킨다고 밝혔다.
정보통신산업[편집]
캐나다의 IT 산업은 침체기에 들어선 에너지 산업을 대체하여 캐나다 경제를 이끌어 갈 선두주자로 꼽힌다. 캐나다에는 37,000개 이상의 IT 기업이 자리잡고 있으며, 연간 고용규모는 약 52만 명에 달한다. 특이사항으로는 전체 기업 중 85%가량이 고용인원 10명 미만의 소규모 사업장이고, 벤처기업과 컴퓨터 판매 및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자영업이 주를 이룬다.
100명 이상의 고용규모를 가진 중견기업은 1.5% 전후로 주된 분야는 방송, 통신, 소프트웨어 개발, 가전 판매 등이 있다. 캐나다의 정보 통신 산업은 서비스 및 소프트웨어 개발에 집중되어 있으며, 제조업의 비중은 전체의 9%에 불과하다.
캐나다는 특히 IT 스타트업 창업 환경이 좋기로 유명하다. 워털루 대학교를 위시한 업계 최고 수준의 고등 교육과 탄탄한 신규 사업체 지원 프로그램 등 여러 이점에 힘입어 다양한 분야의 소규모 사업체들이 성업 중이며, 이들이 끊임없이 시장을 활발하게 유지하면서 또 다른 스타트업들을 양성하는 선순환 효과를 불러 오고 있다. 캐나다 IT 기업의 85%가 소규모 사업장이란 사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개별 사업체들의 규모가 작다 보니, 자국 기업들로만 한정하면 아직 금융업 및 제조업 등 국가 경제의 근간이 되는 사업들에 밀린다. 당장 토론토 거래소의 최상위 종목들만 봐도 금융, 철도, 광업 등 전통 산업군의 시가 총액 비중이 여전히 높고, IT는 쇼피파이(Shopify)를 비롯한 몇몇을 제외하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캐나다는 마찬가지로 에너지 사업 및 중공업에 크게 의존하다 성공적으로 산업 전환을 이룩한 이웃 나라 미국을 모델로 삼고, IT 산업의 육성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무역[편집]
2018년 기준으로 캐나다의 주요 수출국은 미국(75.85%), 중국(4.32%), 영국(3.24%), 일본(2.17%), 멕시코(1.44%)이다. 주요 수입 상대국은 미국(51.33%), 중국(12.64%), 멕시코(6.33%), 독일(3.20%), 일본(3.12%)로 주요 수출입 상대국은 전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2017년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420,632백만 달러, 총수입액은 432,405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석유(54,037,754백만 달러), 자동차(16,216,430백만 달러), 금 광석(13,112,868백만 달러), 석유 등(11,337,522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자동차(24,734,528백만 달러), 석유(12,768,537백만 달러), 석유 등(12,297,755백만 달러), 트럭(10,646,055백만 달러)이다.
교통[편집]
캐나다는 넓은 땅이 지형적으로 군데군데 끊겨 있고, 3,000만에 가까운 인구가 미국과의 국경과 가까운 남부 (북위 49~50도 사이)에 몰려있는 실정으로, 교통망도 이러한 토대 아래 형성되었다. 현재의 주 교통망은 1885년에 개통한 대륙 횡단철도에서 파생한 철도망, 넓은 국토를 덮는 항공망, 각 가정에 보급된 자동차와 거주지역을 연결하는 고속도로망, 오대호로부터 센트로렌스 물길을 거쳐 대서양에 이르는 선박수송에서 석유, 가스의 파이프라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통 수단이 이용되고 있다. 1962년에 개통된 길이 8,000km에 이르는 캐나다 횡단 고속도로의 구실도 매우 크다. 국토가 너무 넓어 토론토에서 밴쿠버까지 차로는 시속 100km의 속도 기준으로 한번도 쉬지 않고 운전을 할 경우에 약 45시간 걸리기 때문에 미국과 같이 도시와 도시를 잇는 주요 교통 수단은 항공기이다. 캐나다는 에어 캐나다와 웨스트제트 등의 항공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대한민국과는 대한항공과 에어 캐나다 2개의 항공사가 연결하고 있다.
인문사회[편집]
인구[편집]
2021년 캐나다 인구 조사에 따르면 총인구는 36,991,981명으로 2016년 수치보다 약 5.2% 증가했다. 캐나다 인구 증가의 원인을 찾는다면 지속적인 이민과 자연적 성장이 결합되어 인구가 증가한 것으로 파악된다. 캐나다는 비교적 개방적인 이민정책을 펼치고 있는데 특히 가족 재결합 정책에 의해 주도되는 정책은 세계에서 1인당 가장 높은 이민 비율이라는 숫자를 기록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캐나다의 경제정책 역시 이민자를 끌어 들이는 요인으로 볼 수 있다. 2021년 캐나다로 온 이민자 수는 약 400,000명으로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이민자들은 주로 밴쿠버, 토론토, 몬트리올과 같은 주요 대도시에 정착을 했다. 아울러 캐나다 정부는 적극적으로 난민을 수용하고 있는데, 세계 재정착 난민의 약 10% 이상을 캐나다에 받아들이고 있으며, 2018년 기준으로 28,000여 명의 난민이 재정착했다.
전체적으로 인구는 증가하고 있지만 광활한 국토 덕분에 캐나다는 가장 낮은 수준의 인구밀도를 보인다. 1평방 킬로미터 당 4.2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낮다. 지형과 기후 특성상 얼음과 영구 동토로 덮인 북쪽에서는 정착하기 어렵기 때문에 북위 83도선에서 북위 41도선을 아우르는 국토 중 인구의 95%가 북위 55도선 이남에 거주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은 미국과의 국경에서 반경 150km(93마일) 이내 인데, 전체 인구의 4/5가 살고 있으며, 인구의 50% 이상은 오대호, 세인트로렌스강을 따라 위치한 퀘벡주와 온타리오주에 거주하고 있다.
민족[편집]
캐나다는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다문화 사회로 널리 알려져 있다. 경제 발전과 인구 증가를 목적으로 이민자와 난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온 결과다. 캐나다 노동인구의 25% 가량이 이민자이다. 민족 구성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10대 민족은 캐네디언, 영국계, 스코틀랜드계, 프랑스계, 아이리시계, 독일계, 중국계, 이태리계, 원주민, 인도계, 우크라이나계로 외부 민족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6년도 캐나다 인구 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4명이 하나 이상의 민족적·문화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조사되었다. 총 인구 중에서 2천만 명, 약 72%는 유럽 혈통을 가지고 있으며 그 뒤를 이어, 아시아인(17.7%), 원주민(4.9%), 아프리카인(3.1%), 라틴아메리카(1.3%), 오세아니아인(0.2%)이 차지하고 있다. 물론 가장 큰 민족 그룹은 인구의 32%를 차지하는 캐나다인이고, 영국계(18.3%), 스코틀랜드(계)(13.9%), 프랑스어(계)(13.6%), 아일랜드어(계)(13.4%), 독일어(계)(9.6%) 순서다. 중국어(5.1%), 이탈리아어(4.6%), 원주민(4.4%), 인도(4.0%), 우크라이나어(3.9%)가 뒤를 잇고 있다.
원주민 인구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2006년 대비 42.5%가 증가했다. 소수 종족 중 가장 큰 그룹은 남아시아인(5.6%), 중국인(5.1%), 흑인(3.5%) 순으로 나타났다. 2016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캐나다 인구의 21.9%가 자신을 캐나다에 상주한 이민자 또는 영주권자라고 대답했으며, 2021년에는 인도, 중국, 필리핀이 캐나다로 이주하는 이민자의 상위 3개국이 되었다.
원주민[편집]
원주민은 'Aboriginals'로 총칭하고 있으며, 약 163만 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은 크게 퍼스트 네이션스(First Nations), 메이티스(Metis), 이누이트(Inuit) 세 그룹으로 나뉘어진다. 이들은 캐나다 인구 전체의 4.9%를 차지한다. 북미 인디언으로 알려진 퍼스트 네이션스는 약 97만여 명으로 인구의 약 2.8%를 차지하는데 캐나다 전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총 부락의 수는 600여 개 정도이다. 메이티스는 약 58만명으로 총 인구의 약 1.7%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특징으로는 북미 인디언과 유럽인 사이의 혼혈로 프랑스인과의 혼혈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누이트의 경우 약 6만여 명이 있는데 인구의 0.2%를 차지한다. “날고기를 먹는 인간”이라는 뜻의 에스키모로 불리기도 하지만 이는 비하적인 호칭이므로 사용하지 않는다. 주로 북극 지역에 거주한다.
일반적으로 최초로 북미에 다다른 원주민은 약 14,000년 전에 베링해를 건너온 것으로 보고 있으며, 캐나다에서 찾을 수 있는 원주민의 가장 오래된 거주지는 'Old Crow Flats'와 Bluefish Caves의 'Paleo-Indian' 유적지에서 찾을 수 있다. 원주민들은 특유의 농업, 사회 계층 및 상업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었는데, 유럽의 탐험가들이 도착하기 시작한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즈음부터 이들의 생활양식은 붕괴하기 시작해서 현재는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유럽인들이 최초로 정착할 당시 원주민 인구는 적게는 약 200,000명에서 많게는 약 200만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식민지화의 결과 원주민 인구가 40~80% 정도 감소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사라지게 된 원인에는 독감, 홍역, 천연두와 같은 유럽에서 유행하던 전염병의 유입과 함께 모피 무역으로 인한 갈등, 토지 상실 및 자급자족 생태계 붕괴 등 식민 당국과 정착민 간의 갈등이 있었다.
퍼스트 네이션과 메이티스 민족은 캐나다에서 유럽 식민지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북미 모피 무역 기간 동안 유럽의 항해사를 도와 대륙을 탐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반적으로 이누이트족은 유럽 정착민과의 교류가 제한적이었지만 왕실과 원주민은 유럽 식민지 시대에 교류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유럽계 캐나다인들은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문화에 동화되도록 장려했는데,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강제 통합 및 이전과 같은 강력한 정책을 펼쳤다.
언어[편집]
캐나다의 공식 언어는 영어와 프랑스어로 캐나다인의 56%는 영어를 모국어로, 21%는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977년 프랑스어 헌장은 프랑스어를 퀘벡의 공식 언어로 지정했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캐나다인의 약 85% 이상이 퀘백주에 거주하고 있지만 뉴브런즈윅, 앨버타, 매니토바 등 다른 지역에도 상당수의 프랑스어 사용 인구가 있다.
비록 영어와 프랑스어가 공식 언어로 다수를 차지하지만 2016년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약 20%에 이르는 730만 명이 이들 언어 외의 언어를 모국어로 쓰고 있다고 응답했다. 가장 일반적인 비공식 모국어에는 중국어(1,227,680명), 펀자브어(501,680), 스페인어(458,850), 타갈로그어(431,385), 아랍어(419,895), 독일어(384,040), 이탈리아어(375,640)로 나타났다. 캐나다 연방 정부는 캐나다 권리 및 자유 헌장(Canadian Charter of Rights and Freedoms) 및 연방 공식 언어법(Federal Official Languages Act)에 따라 공식적으로 2개 국어를 사용한다. 영어와 프랑스어는 연방 법원, 의회 및 모든 연방 기관에서 동등한 지위를 가지며 두 개의 언어로 연방 정부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소수 민족이 사용하는 언어는 공용어로 사용되어 공교육 제도에서도 이들 언어로 교육이 보장된다. 65개 이상의 다른 언어와 방언으로 구성된 11개의 원주민 언어 그룹이 있다. 노스웨스트주와 같은 곳에서는 몇몇 토착 언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종교[편집]
2021년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캐나다인의 63.2%가 기독교인이라고 응답했으며, 26.3%는 종교가 없다고 응답했다. 다음으로 이슬람은 캐나다에서 가장 큰 비기독교 종교로 전체 인구의 3.7%를 차지하며 이슬람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이외에도 힌두교를 믿는 인구가 1.7%, 시크교도와 불교도는 각각 1.4%, 기타 종교나 신앙을 가진 인구는 1.2%, 유대인은 1%로 나타났다. 캐나다에는 공식적인 종교가 없으며 정부는 공식적으로 종교적 다원주의를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종교의 자유는 헌법에 의해 보장되는 권리이며 어떠한 제한이나 간섭 없이 집회 및 예배를 드리는 것이 허용된다.
이민사회[편집]
처음으로 캐나다에 정착한 유럽인은 다름이 아닌 프랑스 사람이다. 2021년 센서스 기준으로 퀘백에 사는 사람은 약 8백 5십만 명이다. 프랑스계 캐나다인은 1759년 프랑스령 캐나다가 영국에 잠시 점령되었을 당시 그 지역에 거주하던 약 6만여 명의 프랑스인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은 퀘벡뿐 아니라 뉴브런즈윅, 온타리오 등지에서도 살고 있다. 이에 반해 영국계 캐나다인들은 주로 뉴프랑스를 점령한 이후 영국과 미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그 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초 캐나다의 인구 약 60%는 영국계, 30%는 프랑스계가 차지하고 있었다. 20세기 초 경제성장을 위해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인력이 필요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생산업, 광업, 제재 산업 등에 필요한 약 3백만 명의 인력이 서부 캐나다에 정착하였다. 이들 중 2/3는 동유럽과 중부 유럽에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1920년대 말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캐나다로의 인구 유입은 매우 적은 수준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이민자 숫자가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에서 넘어왔다. 당시 숫자로 약 250만 명이 캐나다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기부터 캐나다의 인구 증가는 자연 증가보다는 이주자 숫자 증가로 인해 인구가 늘어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이민은 대부분 독일, 이태리, 동유럽 등 비영국계 사람들이 위주였지만 유럽계 사람들이었고, 캐나다 사람들은 비교적 민족·문화적 갈등 없이 이민을 받아들였다. 1960년대 초 캐나다 인구의 90% 정도는 유럽인이었고, 비유럽계 이민은 거의 없었다. 다만,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 거주하던 약 5만 명의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전에 광산 노동자, 철도 노동자로 이주했던 이주자들의 후손이었다.
1960년대부터 이민자 유입 패턴이 조금씩 바뀌게 된다. 경제가 재건되기 시작한 유럽에서의 이주는 줄고 1970년대부터는 유색인종에 대한 이민 제한이 폐기되면서 중국, 인도, 한국, 일본 등과 같은 개발도상국의 이민자가 대거 증가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이주자의 70% 이상이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출신이었으며,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비유럽계 이민자는 약 10% 정도의 비중을 차지했다. 이중 중국인이 가장 많은 100만, 인도 및 서남아시아계는 70만, 남미와 아프리카 흑인은 60만 명 정도를 차지했다.
한국계 이민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후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한국의 젊은 사람들을 캐나다를 포함해 세계 각지에서 유학할 수 있도록 도와줬고, 캐나다는 그 주요 대상국 중 하나였다. 유학생 중 일부가 캐나다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초기 한국계 이주를 이루었고, 1960년대부터는 유럽, 중남미로 이주했던 한국인들이 캐나다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들어서는 다문화주의 추진,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철폐 등 캐나다 정부의 이민정책 변화로 한국계 이주가 증가했고, 투자 이민자도 늘었으며, 교육 이민 역시 크게 늘었다.
교육[편집]
캐나다의 교육은 연방정부가 아닌 주, 준주 및 지방정부에서 자금을 지원하며, 커리큘럼도 주 정부에서 관리한다. 원주민 및 소수인종교육, 연방교도소 재소자 교육 등과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 교육은 각 주 및 지방별로 조직·감독한다. 캐나다의 교육은 일반적으로 유치원(2년), 초등학교(1~5학년), 중학교(6~8학년), 고등학교(9~12학년)로 구분되며, 학년제에 의한 진급이 아니라 개인의 개성을 강조하는 과목별 진급제(credit system)를 도입하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자만이 학위수여 대학(university, college) 지원이 가능하며 그렇지 못한 경우 커뮤니티 컬리지 등 비학위수여 학교에서 이수과정을 거칠 수 있다. 학사일정은 9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 한 학년으로 진행되며 퀘벡주의 경우 8월 말부터 새 학기를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캐나다에는 많은 국립대학교가 있으며 1663년에 설립된 라발대학교(Université Laval)는 캐나다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이다. 가장 큰 대학은 85,000명 이상의 학생이 있는 토론토대학교이다. 토론토 대학교,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 맥길 대학교 및 맥마스터 대학교 등 4개의 대학교가 정기적으로 세계 상위 100위권에 포함되며, 총 18개의 대학교가 세계 상위 500위 안에 포함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조정한 국제 학생 평가 프로그램(PISA)은 현재 캐나다 15세 학생의 전반적인 지식과 기술을 세계 6위로 평가하였다. 캐나다는 2015년 OECD 평균 493점과 비교하여 평균 학생 점수가 523.7점으로 독해력, 수학 및 과학 분야에서 우수한 OECD 국가이다. 2016년 캐나다는 모든 수준의 교육에 GDP의 6.0%를 지출했으며, 이는 OECD 평균인 5.0%보다 1.0% 포인트 높다. 2017년에는 25세에서 64세 사이의 캐나다인 중 68%가 어떤 형태로든 고등 교육을 받았으며 이는 OECD 평균인 44%보다 56.8%(12.4% 포인트) 높다. 25세에서 64세 사이의 캐나다인 중 57%가 대학 졸업장 또는 대학 학위를 취득했으며 캐나다인의 11%는 직업 교육 기관에서 수료증, 학위 및 견습 과정을 취득했다. 25~34세 캐나다인의 61%가 어떤 형태로든 고등 교육을 받았는데, 이는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며 한국에 이어 두 번째이다. 25세에서 64세 사이의 캐나다인 중 31%가 학사 이상의 학위를 취득했으며 이는 OECD 평균인 31%와 동일하다.
언론[편집]
캐나다는 국제 언론의 자유 보호 및 관행에 대한 강한 의지를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지만, 특히 토착민의 권리 및 토지 분쟁과 관련된 언론 보도와 관련해서는 아직 개선의 여지가 있다.
미디어 환경의 경우 캐나다에서 가장 큰 두 신문인 'The Globe and Mail'과 'the National Post'는 전국적으로 널리 배포된다. 가장 큰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사인 캐나다 방송 공사(The Canadian Broadcasting Corporation)는 세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매일 2시간 분량의 지역 및 전국 뉴스를 제작하고 별도의 24/7 뉴스 채널을 방송한다. 이외에도 지역 신문, 케이블 TV, 기타 온라인 및 라디오 채널이 운영되고 있으나, 캐나다 미디어의 약 80% 이상이 5개 기업에 의해 소유 및 운영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캐나다의 언론은 정치인, 정당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캐나다 방송 공사는 정부 소유이지만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정부 역시 언론의 자유를 민주주의 사회 유지의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하고, 인권 및 시민의 기본적 자유 보장을 위해 언론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캐나다인의 미디어 기관에 대한 신뢰도는 높은 수준이나 최근 신뢰도가 전반적으로 하락하는 추세에 있다. 특히, 소셜 미디어와 같은 온라인 채널을 통해 언론인을 위협하는 사례가 생기고, 여성 및 소수 언론인들은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캐나다는 언론인 및 그 제보자를 보호하기 위한 "보호법(Shield laws)"을 포함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법적 테두리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원주민 권리, 그들의 토지 사용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의 시위를 취재하던 기자들이 정부에 의해 체포되는 등 여전히 더 구체적인 법적 보호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는 실정이다.
복지[편집]
캐나다의 복지체제는 공공이 주도하는 헬스케어 시스템으로, 자국 내에서는 ‘메디케어’라고 부른다. 기본적으로는 1984년에 제정된 캐나다 보건법을 따르며, 전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공의료 체제이다. 캐나다 정부 측에서도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들에게 국가 의료보장체제 구축’을 목표로 막대한 재원을 투입하고 있으나, 여전히 캐나다 국민의 전체 의료비 지출의 30%가 개인 사비를 들이고 있다고 전해졌다. 다만 이같은 지출은 메디케어의 보험대상이 아닌 의료 서비스 때문에 주로 발생하는 것으로, 가장 대표적으로 치과, 안과, 단순처방 제조약 등이 있다. 캐나다인들의 65%에서 75% 정도가 국가의료시스템 외에도 추가적인 개인 의료 보험에 들었으며, 이들 중 대부분이 직장에서 보장해주는 의료 보장 제도를 이용한다. 그 외에도 고령자, 사회적 약자, 소수민족 등의 경우에는 정부에서 추가적으로 의료 기금을 지원해준다.
캐나다는 여러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고령화를 겪고 있고, 이 때문에 복지 지출도 갈수록 늘어만 가고 있는 형국이다. 점차 은퇴자와 고령자가 많아지고 노동가능인구는 갈수록 적어지고 있는 것이다. 2006년에 캐나다인의 평균 나이는 약 39.5세였고, 12년만에 약 42.4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한편 기대수명은 약 81.1세이다. 2016년 캐나다 보건부의 조사에 따르면, 약 캐나다 인구의 88%가 자신이 ‘건강이 매우 좋다’라고 답했다고 하며, 이는 같은 선진국 모임인 G7에서도 가장 높은 수치였다. 다만 캐나다 성인의 80%가 자신들이 흡연, 신체적 장애, 불균형한 식습관, 운동 부족 등 만성적인 위험 요인들을 최소 한 가지 이상은 가지고 있다고 답하기도 했다. 캐나다는 OECD에서 비만율이 가장 높은 국가들 중 하나이며, 당뇨 진단율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또한 4대 만성질환인 암, 호흡기 질환, 당뇨, 심장질환이 캐나다인의 사인 가운데에 약 65%를 차지한다.
2017년에 캐나다 보건부에서는 캐나다의 의료체계 지출이 당시 캐나다의 전체 GDP의 11%에 달하는 약 2,420억 달러에 이른다고 발표하였다. 캐나다 국민들이 의료에 지출하는 금액은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준이라서 OECD 전체에서 약 7위에 달하였다. 캐나다는 2000년대 초반부터 OECD 평균보다 약간 높은 수준으로 의료 시스템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으며, 2017년에는 의사를 만나기 위하여 기다려야하는 대기 시간과 의료의 질을 평가했을 때도 OECD 평균보다는 상위권에 있었으나, 아직까지도 캐나다의 보건 체제가 갈 길이 멀다는 평가도 있다. 캐나다 보건 시스템의 고질적인 약점들 중 하나는 상대적으로 높은 영아 사망률, 만성질환의 만연화, 긴 대기시간, 사후 관리 체계의 부재, 처방약의 부족과 치과 부족 등이 있다.
문화[편집]
'다문화주의'는 캐나다 사회를 잘 나타내주는 말이다. 1971년 각 인종들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다문화주의 정책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채택했다. 다문화주의를 통해 캐나다 정부는 인종·언어·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들이 평등하다는 개방적인 사회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캐나다인으로 유명한 음악가는 브라이언 애덤스·셀린 디옹·사라 맥라클란·레너드 코헨 등이 있다. 몬트리올 재즈페스티벌은 재즈팬들에게는 유명한 음악축제이며, 클래식 음악에서는 대부분의 도시가 자체의 심포니오케스트라를 갖추고 있다. 유명한 클래식 연주가로는 글렌 굴드와 오프라 하노이 등이 있다. 문학은 캐나다 정서의 풍부함과 다양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초기에 프랑스어로 활동한 마르크 레스카르보·윌리엄 커비·스티븐 리콕·마조 드 라 로슈가 알려져 있으며 1940년대 이후에는 휴 매클레넌·W.O.미첼·토머스 래덜·로버트슨 데이비스·마거릿 로렌스·그랑부아 등이 유명하다.
연극부문에서는 샤와스트랏포드 연극축제가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마이클 트렘블레이의 연극은 20개 언어 이상으로 번역되어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스포츠부문에서는 아이스하키와 미식축구가 매우 인기 있으며 국기(國技)는 인디언이 즐겼던 놀이인 라크로스이다. 국립자연과학박물관·국립인류학박물관·국립과학기술박물관·국립캐나다미술관 등 연방정부가 관리하는 4개의 주요박물관이 있고 각주에는 로열온타리오박물관·자연사박물관 등 주가 운영하는 박물관이 있다.
상징[편집]
가장 대표적인 캐나다의 상징물은 국기에도 있는 메이플 나무 잎사귀로, 최소 18세기 초부터 캐나다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이 때문에 캐나다는 현재 이전의 국기, 그리고 캐나다의 국장에도 메이플 잎사귀를 넣고 있다. 현재 캐나다의 국장은 영국의 국장에서 크게 본을 따온 형태로, 다만 지나치게 영국식인 요소는 배제하고 캐나다의 요소를 일부 가미하였다. 그 외에도 캐나다의 표어인 'A Mari Usque Ad Mare', 즉 '바다에서 바다로'도 유명한 캐나다의 상징이며, 캐나다에서 유명한 스포츠인 아이스하키도 있다. 그 외에도 캐나다의 동물인 비버, 캐나다 오리, 말 등도 있으며, 캐나다의 기마경찰, 로키 산맥 등도 캐나다를 대표하는 것들이다. 물질적인 것들로는 캐나다 맥주, 메이플시럽, 카누, 버터타르트 등이 유명하다. 캐나다의 동전들에도 이 것들이 들어 있는데, 1달러 동전에는 캐나다 아비새, 50센트 동전에는 캐나다의 국장이, 니켈 동전에는 비버가 새겨져 있다. 2013년부터 쓰이지 않게 된 페니에는 메이플 잎사귀가 새겨져 있었다. 또한 현재의 20달러 지폐와 모든 캐나다 동전에는 엘리자베스 2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스포츠[편집]
캐나다의 스포츠 역사는 17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이스하키, 농구, 야구, 축구 등 여러 스포츠 등이 캐나다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캐나다의 공식적인 국민 스포츠는 아이스하키와 라크로스 등이 있다. 골프, 축구, 야구, 테니스, 스키, 배드민턴, 사이클링, 수영, 볼링, 럭비, 카누, 스쿼시 등도 인기가 많으며 많은 국민들이 유년기부터 무술을 짧게나마 배우기도 한다.
캐나다는 대부분의 프로 스포츠 리그를 미국과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캐나다의 유명한 프로 스포츠 가운데에는 캐나다 축구 리그, 라크로스 리그 등이 있다. 캐나다는 1900년 이래 거의 항상 올림픽에 참가한 바 있고, 1976년 하계 올림픽, 1988년 동계 올림픽, 1994년 농구 챔피언십, 2007년 FIFA U-20 월드컵, 2010년 동계 올림픽, 2015년 FIFA 여성 월드컵 등 여러 국제 경기들도 여러 차례 유치했다. 캐나다는 2015년에 범아메리카 게임, 2015년 파라판 아메리칸 게임 등도 토론토에서 유치했다. 또한 2026년에는 멕시코와 미국과 함께 2026년 FIFA 월드컵도 공동 개최할 예정이다.
문화유산과 행사[편집]
유네스코 지정 문화 유산으로는 온타리오주의 리도 운하, 퀘벡 역사지구, 로키 산맥공원, 앨버타주 공룡공원 등이 대표적이며 이외에도 17개의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캐나다의 최대 축제로는 추운 겨울 나라의 특징이 반영된 윈터루드 겨울축제가 잘 알려져 있다. 매년 2월 오타와에서 개최되는 이 축제는 1년 기준으로 약 150만 명의 관광객이 찾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퀘벡시에서 2월에 개최하는 퀘벡 윈터카니발도 윈터루드 축제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규모가 큰편이며 1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봄철에는 매년 5월 오타와에서 튤립 축제를 개최한다. 이 축제의 기원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독일 점령으로 네덜란드의 율리아나 여왕은 오타와로 피신을 했다. 전후 1945년에 여왕은 감사의 뜻으로 10만 송이의 튤립을 보내왔는데, 주요 공원에 심어진 약 백만 송이 튤립이 이 축제의 기원이 된다. 이외에도 1976년 이후 매년 9월 개최되는 토론토국제영화제는 세계적인 영화제로 자리 잡았다.
휴일[편집]
캐나다의 휴일은 토요일•일요일, 새해 첫날 (1월 1일), 부활절, 빅토리아데이(5월 24일 혹은 그 이전에 드는 월요일), 건국기념일(7월 1일), 노동절(9월 첫째 주 월요일), 트루스 앤 레컨실리에이션 데이(9월 30일), 추수감사절(10월 둘째 주 월요일), 현충일(11월 11일), 크리스마스(12월 25일) 등이 있으며 그 외 각 지역별 공휴일이 더 있다. 실질적으로 캐나다에서 공휴일이 없는 달은 6월 하나뿐이며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달은 3월과 4월인 셈이다. 대체휴일은 미국과 같이 공휴일이 토요일과 겹치는 경우 전날인 금요일로 지정하고, 일요일과 겹치는 경우 다음날인 월요일로 지정한다. 다만, 1일이 공휴일인데 토요일과 겹치는 경우는 같은 달 안에서 연휴가 형성되도록 하기 위해 월요일이 대체휴일로 지정된다.
다른 서구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쪽 또한 주말에는 집에서 쉬는 게 보편화되어 있다. 상점들도 웬만하면 문을 여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때문에 주말에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미리 금요일 저녁에 장을 봐놓아야 한다.
캐나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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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행정 지도[편집]
캐나다 지형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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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 〈캐나다〉, 《나무위키》
- 〈캐나다〉, 《위키백과》
- 〈캐나다의 국기〉, 《위키백과》
- 〈캐나다의 국장〉, 《위키백과》
- 〈캐나다-Canada〉, 《요다위키》
- "Canada", Wikipedia
- 〈캐나다〉, 《두산백과》
- 〈캐나다의 지형과 지질〉, 《두산백과》
- 〈캐나다의 기후〉, 《두산백과》
- 〈캐나다의 생물다양성과 보전지역〉, 《두산백과》
- 〈캐나다의 대한관계〉, 《두산백과》
- 〈캐나다와 한국의 인적교류〉, 《두산백과》
- 〈캐나다의 군사〉, 《두산백과》
- 〈캐나다의 외교〉, 《두산백과》
- 〈캐나다의 퀘벡문제〉, 《두산백과》
- 〈캐나다/역사〉, 《나무위키》
- 〈캐나다의 경제〉, 《두산백과》
- 〈캐나다/경제〉, 《나무위키》
- 〈캐나다의 인구구성〉, 《두산백과》
- 〈캐나다의 민족구성〉, 《두산백과》
- 〈캐나다의 원주민〉, 《두산백과》
- 〈캐나다의 언어〉, 《두산백과》
- 〈캐나다의 종교〉, 《두산백과》
- 〈캐나다의 이민사회〉, 《두산백과》
- 〈캐나다의 교육〉, 《두산백과》
- 〈캐나다의 언론〉, 《두산백과》
- 〈캐나다의 문화〉, 《두산백과》
- 〈캐나다의 문화유산과 행사〉, 《두산백과》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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