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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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섬(Lewis, 스코트랜드어: Isle of Lewis)은 영국 스코틀랜드 아우터헤브리디스제도에서 가장 큰 섬이며 최북단에 있는 루이스해리스섬(Lewis and Harris)의 북부 지역을 말한다. 면적은 1770km²이다.[1]
개요[편집]
루이스섬은 영국 스코틀랜드 본토로부터 노스민치 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서양에 있는 루이스해리스섬의 북쪽의 3분의 2를 말한다. 루이스섬과 해리스섬은 마치 별도의 섬인 것처럼 언급되며 둘 사이에는 많은 문화적, 언어적 차이가 있다. 루이스섬은 대부분 이탄지(泥炭地)로 이루어졌으며 가장 최고점은 575m이며 영국 섬에서 가장 깊은 호수를 가지고 있으며 최대 깊이는 66.7m이다. 루이스는 일반적으로 섬의 저지대이며 다른 지역인 해리스는 산이 더 많다. 면적이 넓고 땅이 평평하고 비옥하기 때문에 루이스섬은 인구의 4분의 3을 차지하며 가장 큰 정착지인 스토노웨이(Stornoway)를 포함한다. 루이스섬의 스토너웨이는 주요 도시이며 인근 여러 마을을 포함하면 약 12,000명의 인구가 있다. 섬의 다양한 서식지에는 금독수리, 붉은 사슴, 물개 등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다양한 보존 지역에서 인정받고 있다. 루이스섬과 해리스섬 사이의 경계는 약 10km에 걸쳐 있으며 서쪽의 로치 리조트(Loch Resor)와 동쪽의 로치 시포르트(Loch Seaforth) 사이에서 섬이 좁아진다. 분리되는 곳은 타베르트(Tarbert)에서 더 분명하다. 1975년까지 루이스는 로스와 크로마티, 해리스는 인버네스셔에 속해 있었다.[2]
역사[편집]
루이스섬에 사람이 거주했다는 최초의 증거는 이탄 샘플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약 8,000년 전에 사슴이 풀을 뜯을 수 있는 초원을 만들기 위해 자생 삼림의 상당 부분이 불태워진 것이 발견되었다. 가장 초기의 고고학적 유적은 약 5,000년 전의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가축 떼를 따르기보다는 영구 농장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람들의 작은 집들은 제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특히 칼로웨이(Carloway)의 다일 므(Dail Mòr)에서 발견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눈에 띄는 위대한 기념물들은 칼라나이(영어:Callanish)와 같은 곳에 있는 사원들과 공동 무덤이다. 기원전 500년쯤, 섬 사회는 철기 시대로 접어들었다. 건물들은 더 커지고 더 두드러져 당시 삶의 불확실한 본질을 증언하는 지역 족장들의 원형 석조 탑인 브로치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루이스에 남아 있는 브로치의 가장 좋은 예는 둔 샤를라브하이(Dùn Chàrlabhaigh)에 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1세기 동안 스코틀랜드 게일어를 도입했고 콜롬비아 선교사들을 따라 6세기와 후반에 기독교가 섬들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루이스는 픽트족에 의해 거주하게 되었다. 서기 9세기에 바이킹족은 바다에서 수년간 약탈을 한 후 루이스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노르드의 침략자들은 지역 주민들과 결혼하여 그들의 이교도 신앙을 버렸다. 당시에 직사각형 건물들은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을 따라 그것들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노르웨이의 분파인 만 왕국과 아일스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1831년 이 섬에서 발견된 루이스 체스맨은 바이킹의 지배를 받던 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노르드어는 오늘날까지 많은 섬 이름과 일부 개인 이름으로 남아 있지만, 후자는 가이드헤알타흐드(Gàidhealtachd)에 상당히 고르게 퍼져 있다.
루이스는 1266년에 다시 스코틀랜드의 영토가 되었고, 퍼스 조약에 따라 노르웨이 왕국에 의해 할양되었다. 스코틀랜드 통치하에서 섬의 영주권은 14세기에 이르러 스코틀랜드 북서부에서 가장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섬의 영주들은 아일레이(Islay)를 기반으로 했지만, 헤브리디드(Hebrides)의 전체를 지배했다. 그들은 200년 전에 헤브리디스와 서해안을 지배했던 갈가이다일의 영주 소머리드 맥 길리브리드(Somhairle Mac Gillibride)의 후손이다. 루이스의 통치권은 처음에는 맥레오드(Macleod) 가문이 행사했지만, 수년간의 갈등과 지역 가문들 사이의 공개적인 전쟁 끝에 맥레오드의 땅은 1597년에 스코틀랜드 왕실에 몰수되었고, 제임스 6세에 의해 파이프 모험가로 알려진 저지대 식민지 주민들의 그룹에게 그 섬을 영국화로 만들기 위한 시도로 수여되었다. 그러나 영국화하려는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고, 1609년 코인네치(Coinneach) 경이 저지대 주민들을 매수했을 때 소유권은 킨테일의 매켄지(Mackenzies) 가문에게 넘어갔다. 1745년 반란과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왕자의 프랑스 망명 이후, 스코틀랜드 게일어의 사용은 중단되었고, 임대료는 현물이 아닌 현금으로 요구되었으며, 민속 의상의 착용은 불법이 되었다. 신세계로의 이민은 세기 후반 동안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점점 더 탈출구가 되었다. 1844년, 루이스는 자딘 메시슨(Jardine Matheson)의 공동 설립자인 제임스 메시슨(James Matheson) 경에 의해 매수되었지만, 그 후의 기근과 토지 사용의 변화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땅에서 쫓겨나고 이민자들의 수가 다시 증가했다. 역설적이게도, 남아있던 사람들은 양떼나 사슴 사냥, 그리고 그로스 사냥을 위해 넓은 경작지가 따로 남겨져 있기 때문에 더욱더 혼잡해지고 가난해졌다. 1880년대 경제 침체기에 루이스는 토지 재정착에 대한 동요가 극심해졌으며, 몇 차례의 토지 습격이 있었으며, 이는 섬 경제가 회복되면서 잠잠해졌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수천 명의 섬 주민들이 군에 복무했으며, 이 중에는 전쟁이 끝난 후 해군요트 이올레어호(Iolaire)가 스토노웨이 항구가 보이는 곳에서 가라앉았을 때 귀국 중이던 이 섬의 해군 예비역 208명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슴을 잃었다. 루이스 출신의 많은 군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 해군과 상선에서 복무했고, 다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그 후, 더 많은 주민들이 아메리카와 스코틀랜드 본토로 이주했다. 1918년 5월, 루이스섬은 스토노웨이를 공업 도시로 만들고 생선 통조림 공장을 지을 의도로 레버훌메(Leverhulme) 경에 의해 매입되었다. 그의 계획은 처음에는 인기가 있었지만, 토지 재정착에 대한 그의 반대는 특히 콜, 그레스, 통의 농장 주변에서 더 많은 토지 습격으로 이어졌다. 여러 마을의 기념물에 기념되는 이러한 습격은 정부가 토지 재정착을 지원하기 위해 법적 조치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성공했다. 이에 직면한 레버훌메는 루이스를 위한 계획을 포기하고 레버버그(Leverburgh) 마을에 힘을 집중했다.[3]
루이스해리스섬[편집]
루이스해리스섬(Lewis and Harris)은 산을 기준으로 구분되는 아우터헤브리디스 제도(Outer Hebrides)에 있는 스코틀랜드의 단일섬이다. 스코틀랜드 최대 섬이며 브리튼 제도에서 영국, 아일랜드섬에 이어 3번째로 크며 면적은 2,178km²이며 영국 면적의 약 1%에 해당한다. 북쪽의 3분의 2를 루이스섬이라 부르며 남쪽 3분의 1을 해리스섬이라고 한다. 루이스해리스섬은 영국 스코틀랜드 아우터헤브리디스 제도 최북단에 있는 섬이다. 본토로부터 노스민치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약 40km 떨어져 있다. 루이스섬과 해리스섬은 마치 별도의 섬인 것처럼 언급되며 둘 사이에는 많은 문화적, 언어적 차이가 있다. 루이스섬의 면적 약 1,640km², 해리스섬의 면적 약 502km²이다. 내륙에는 수백을 헤아리는 호수(湖水)가 있다. 루이스섬은 대부분 이탄지(泥炭地)로 이루어졌으며 가장 최고점은 575m이며 영국 섬에서 가장 깊은 호루를 가지고 있으며 최대 깊이는 66.7m이다. 해리스섬은 섬 전체가 구릉(丘陵)으로 305m 이상의 봉우리가 30개 넘게 있으며 최고점은 약 799m에 이른다. 수많은 소하천에는 연어, 송어 등이 풍부하며 그 밖에 수달, 바다표범, 붉은 사슴, 들토끼, 엽조(獵鳥, 물새 등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경지 면적율은 3.5%에 불과하다. 유일한 도시인 루이스섬의 스토노웨이는 청어잡이의 중심지이나, 1918년 근대식 어법(漁法)의 도입계획에 실패한 이래 젊은 사람들의 전출이 증가하고 있다. 해리스섬에서는 트위드직(織)이 시작된 이래 많은 사람들이 종사하고 있다. 루이스해리스섬은 스코틀랜드 섬 중에서 인구가 많은 섬으로 인구는 약 21,000명이며 주도(主都)인 루이스섬의 스토너웨이(Stornoway)는 주요 도시이며 인근 여러 마을을 포함하면 약 12,000명의 인구가 있다.[4]
아우터 헤브리디스 제도[편집]
아우터 헤브리디스 제도(Outer Hebrides Islands) 또는 너 헬라넌 시어르(스코틀랜드 게일어: Na h-Eileanan Siar)는 영국 스코틀랜드 북서 해상에 있는 열도로 행정 중심지는 루이스해리스섬의 스토너웨이이며 면적은 3,070km²이다. 아우터헤브리디스 제도는 독립된 의회 구역으로 본토로부터 약 65km 해상에 북동에서 남서로 약 210km 길이의 호상(弧狀)을 이룬다. 행정상으로는 1974년 웨스턴아일스주(州)로 독립하였다. 주요 섬은 루이스, 해리스, 노스유이스트, 벤베큘라, 사우스유이스트, 배라 등이며, 그 밖에 많은 무인도가 있다. 리틀민치 해협과 남쪽의 헤브리디스해(海)에 의해 이너헤브리디스 제도와 갈라진다. 주민의 대부분은 루이스섬과 해리스섬에 집중해 있다. 황량한 산지가 많고, 일부의 목양, 목우 외에는 모직물 해리스트위드(수공 고급 모직물)를 짜거나 어업에 종사한다. 스토너웨이는 어업기지이다. 관광이 주산업이며, 루이스섬의 중석기시대 환상거석(環狀巨石)을 비롯하여 선사시대의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아우터헤브리디스 제도는 20세기 초만 해도 게일어 사용자가 75%에 달했으며 2001년에도 절반이 넘게 사용하고 있었다. 이너헤브리디스 제도에서도 2001년 기준 20~30%의 인구가 게일어를 사용한다. 13세기까지도 여기는 로우랜드의 게르만계 왕실과 하이랜드-서부 제도의 게일어권 클랜 사회가 주류였던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노르웨이 왕국의 땅이었던 걸 스코틀랜드 왕국이 가져간 동네라 문화적으론 스코틀랜드 본토와 구별된다. 아우터헤브리디스 제도에서 루이스 해리스 섬이 있는 북부 섬들은 장로회, 남부 섬들은 가톨릭 세가 강하며, 북부 지역에서는 안식일도 엄격히 준수하는 편이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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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루이스섬〉, 《위키백과》
- 〈아우터헤브리디스〉, 《위키백과》
- 〈루이스 섬〉, 《요다위키》
- 〈루이스 해리스〉, 《요다위키》
- "Isle of Lewis", Wikipedia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