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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코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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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코섬 위성사진
비오코섬 위치
비오코섬 지도
적도기니, 비오코섬 지도

비오코섬(영어: Bioko Island, 스페인어: Bioko)은 아프리카 서부 기니만(Gulf of Guinea)에 위치한 적도기니으로, 적도기니의 수도인 말라보가 위치해 있다. 섬의 길이는 70km, 너비는 32km, 면적은 2,017km²로 적도기니 전체 면적의 7.2%를 차지하고, 인구는 33만4463 명(2015년 기준)으로 적도기니 전체 인구의 27.4%에 이른다.[1]

개요[편집]

비오코섬은 아프리카 기니만, 대서양 해안에 있는 섬이다. 비오코섬은 섬에서 남동쪽으로 156km 떨어져 있는 적도기니의 아프리카 대륙 지역인 리오무니(스페인어: Río Muni)와 함께 적도기니의 주요 영토를 이루며 적도기니의 수도 말라보가 비오코섬 북쪽에 위치해 있다. 본토의 바타보다 카메룬의 두알라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비오코섬은 화산섬으로 해발 3,012m에 달하는 봉우리 피코 베이즐(Pico Basile)이 있다. 섬에 거주하는 인구는 대부분이 부비(Bubi)족이다. 그 밖에 페르난디노스(Fernandinos)와 스페인 사람, 그리고 리오 무니(Rio Muni), 나이지리아(Nigeria), 카메룬(Cameroon) 등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주요도시로는 수도 말라보(Malabo)와 루바(Luba), 바니(Baney), 리아바(Riaba) 등이 있으며 이 도시들이 장방형의 수송 루트를 이루고 있다. 포르투갈이 발견했지만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일시적으로 영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지만 최종적으로 스페인령이 되었다가 독립했으며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서 스페인어가 널리 쓰이고 있다. 1967~1970에 있었던 나이지리아 내전(Nigerian Civil War) 동안에 비아프라(Biafra)로 가는 비행기 기지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넓은 육지가 아닌 멀찍이 떨어진 섬에 수도가 위치해 있다보니 비오코섬과 육지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심지어 비오코섬에서는 분리주의 운동이 있을 정도이다. 이에 적도기니 정부는 새로운 수도를 말라보에서 육지 부분에 있는 시우다드데라파스로 천도할 계획을 세우고 있고 공사중에 있다.[2][3]

이름[편집]

과거에는 페르난도포섬(스페인어: Fernando Pó)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던 섬이다. 1472년 포르투갈의 항해사인 페르낭 두 포(포르투갈어: Fernão do Pó)에 의해 발견된 뒤부터 "아름다운 꽃"이라는 뜻을 가진 포르모자플로라섬(Formosa Flora)으로 명명되었다. 1494년 페르낭 두 포를 기념하기 위해 페르낭두포섬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스페인에서 독립한 후에는 독재자 마지 누에마 비요고(Masie Nguema Biyogo)의 이름에서 비롯하여 마지 누에마 비요고 아일랜드(Masie Ngueme Biyogo Island)라고 불렸고 1979년 실각한 후 비오코 아일랜드(Bioko Island)라 부르게 되었다.

역사[편집]

비오코섬은 기원전 1천 년 중반, 본토에서 온 반투족이 거주했으며 그들은 부비족을 형성하였다. 1472년 포르투갈의 항해사인 페르낭 두 포(포르투갈어: Fernão do Pó)는 섬을 발견한 최초의 유럽인이다. 그는 "아름다운 꽃"이라는 뜻을 가진 '포르모자플로라섬'(Formosa Flora)으로 명명하였다. 1494년 포르투갈인에 의해 식민지로 주장된 후 그를 기리기 위해 '페르난도 포'로 개명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이 사탕수수 작물을 위해 섬을 개발했고 품질이 나쁘다고 여겨졌지만 정제소의 생산량은 페르난도포 설탕이 유럽의 무역 중심지를 잠시 지배할 정도였다. 164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포르투갈의 동의 없이 그 섬에 무역 기지를 세우고 그곳에서 일시적으로 기니만의 노예무역을 집중시켰다. 1648년 포르투갈인들은 이 섬에 다시 나타나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노예무역에 전념하고 이웃 섬인 코리스코에 설립한 회사로 대체하였다. 부비족은 특히 몰람보와 같은 몇몇 지역 추장들의 활동 이후, 섬에 새로운 왕국의 중심을 설립하는 더딘 과정을 시작했다. 이 지역에서 노예화가 증가하고 있는 기간 동안, 지역 부족들은 해안 정착지를 버리고 안전한 내륙에 정착했다. 1778년 엘파르도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은 페르난도 포와 안노본, 그리고 기니 해안 리오 무니를 스페인에 양도했고 이들은 모두 현대 적도기니를 형성했다. 이 조약은 포르투갈의 메리 1세 여왕과 스페인의 찰스 3세에 의해 아메리카대륙의 영토와 맞바꾸어 서명되었다. 스페인은 아르겔레호가 이끄는 페르난도 포 원정대를 파견해 4개월간 머물렀다. 1778년 10월, 스페인은 스페인 사절단이 섬을 떠날 때인 1780년까지 머물던 총독을 섬에 임명했다. 몰람보 족장은 로포아(1810–1842)를 계승한 또 다른 지역 지도자 로리테(1760–1810)에 의해 계승되었다. 영국의 대서양 노예무역을 폐지한 후 1827년부터 1843년까지 영국은 아프리카 노예 무역 순찰대를 위해 포트 클라렌스(말라보)와 산 카를로스 기지를 임대했다. 포트 클라렌스 정착촌은 윌리엄 피츠윌리엄 오언(William Fitzwilliam Owen)의 감독하에 건설되었다. 그는 이전에 대부분의 아프리카 해안 지도를 만들었으며 열렬한 노예 반대 운동가였다. 그의 3년간의 지휘 기간 동안, 그의 군대는 20척의 배를 억류하고 2,500명의 노예를 해방시켰다. 혼합 위원회 법정은 노예 배에서 해방된 노예를 해방하는 법적 절차를 촉진하기 위해 시에라리온의 프리타운에서 클라렌스로 이전되었다. 1843년 3월, 후안 호세 레레나(Juan José Lerena)는 스페인 국기를 클라렌스(산타 이자벨로 개명) 항구에 꽂아 섬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은 1855년에 영국의 임대 계약을 취소했다. 마다비타(1842–1860)와 세포코(1860–1875)는 스페인이 섬을 다시 지배하게 된 기간 동안 주요 지방 추장들이었다. 1861년부터 1865년까지 주목할만한 거주자는 영국 탐험가 리처드 버튼이었는데, 그는 이 기간 동안 아프리카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썼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수십 명의 스페인 학자들과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수백 명의 아프로 쿠반인들이 이곳으로 추방한 것으로 표시되었다. 게다가 스페인은 필리핀 혁명에서 218명의 혁명가들을 이곳으로 추방했는데, 그들 중 94명만이 오래 살아남았다. 1923-1930년 국제연맹은 라이베리아와 스페인 식민지 페르난도 포 사이의 계약 이주 노동력 수송을 조사했다. 연맹은 라이베리아의 협정에 관심을 집중했지만 면밀히 조사한 결과 페르난도 포의 조건에서 노동 착취가 발생했음이 밝혀졌다. 19세기 후반, 섬의 크리오 농장주들은 야자유 거래에서 코코아 재배로 전환했다. 그들의 이주 노동에 대한 의존과 유럽인들과의 경쟁 심화는 20세기 초에 경제 위기를 초래했다. 플재배자들은 노동력을 억류했지만 계약금을 지불하지 않아 다음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라이베리아는 노동 거래자들이 자국민들과 계약하는 것을 금지했다. 1920년에는 내륙으로 스페인의 영향력이 확대된다. 스페인의 내전이 끝난 1939년 직후 식민지 정부는 중대한 지역에 대한 개발이 이루어졌다. 부분적인 통합을 1963년에 보증 받았고 섬과 본토는 적도기니란 이름하여 통합되었다. 독립은 1968년에 이루어졌다.[4][5]

적도기니[편집]

적도기니(스페인어: Guinea Ecuatorial, 프랑스어: Guinée équatoriale, 포르투갈어: Guiné Equatorial, 영어: Equatorial Guinea) 또는 적도기니 공화국(스페인어: República de Guinea Ecuatorial, 프랑스어: République de Guinée équatoriale, 포르투갈어: República da Guiné Equatorial, 영어: Republic of Equatorial Guinea)은 아프리카 서부의 기니만(灣)에 면한 나라이다. 적도기니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작은 나라 중 하나로, 크게 카메룬가봉 사이에 있는 대륙 부분인 리오무니(Río Muni)와 수도인 말라보가 있는 비오코섬(Bioko), 그리고 작은 섬인 안노본섬(Annobón)으로 나뉜다.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아프리카에서 (분쟁 지역인 서사하라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나라이다. 적도기니의 대륙 영토인 리오무니는 대체로 북위 1° ~ 2°10′20″ 사이에 위치하고 있지만, (기니나 기니비사우보다) 적도에 가깝고 적도의 북쪽 뿐만 아니라 남쪽에도 영토(안노본섬)가 있기 때문에 적도기니(Equatorial Guinea)라고 한다. 최근에는 유전의 개발로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 아프리카 서부의 기니만(灣)에 면한 나라이다. 북쪽으로 카메룬, 남쪽과 동쪽으로 가봉, 서쪽으로 기니만(灣)에 면하며, 비오코섬은 카메룬의 가장 가까운 해안에서 약 3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적도기니는 비오코섬 등의 도서부와 본토의 육지부로 구성된다. 비오코섬은 화산성(火山性)의 섬으로, 남부는 깊은 단애(斷崖)의 계곡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고 교통도 불가능하다. 육지부의 리오무니 지역은 면적 2만 6,000㎢로, 해안평야는 열대우림에 덮여 있고, 중앙에 구릉 지대가 있다. 기후는 고온다습하며 폭풍과 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자주 일어난다.[6]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비오코섬〉, 《위키백과》
  2. 비오코 섬〉, 《나무위키》
  3. 비오코섬(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4. 비오코〉, 《요다위키》
  5. "Bioko", Wikipedia
  6. 적도기니〉,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중앙아프리카 같이 보기[편집]

중앙아프리카 국가
중앙아프리카 도시
중앙아프리카 지리
중앙아프리카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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