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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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Portugal)은 남유럽 이베리아반도 서쪽 끝에 위치한 국가이다. 정식 명칭은 포르투갈 공화국(포르투갈어: República Portuguesa 헤푸블리카 포르투게자, 영어: Portuguese Republic)이며 수도는 리스본(Lisbon, Lisboa)이다.
1143년 레온 왕국으로부터 독립, 15~16세기에는 남미의 브라질 등 전 세계에 걸쳐 식민지를 건설해 거대 제국이 되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침입과 1822년 브라질의 독립 이후 국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1910년에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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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포르투갈은 유럽 서남부에 위치한 나라로, 이베리아반도의 서부와 북대서양 상의 군도들을 그 영토로 한다. 국토의 총 면적은 92,090 km²로, 동쪽과 북쪽은 스페인, 서쪽과 남쪽은 대서양을 맞댄 대륙부와 대서양 상의 두 자치지역인 아소르스제도와 마데이라제도로 구성되어 있다. 포르투갈은 유럽 대륙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나라이다. 이름은 제2의 도시 포르투의 라틴어 이름 "포르투스 칼레"(라틴어: Portus Cale)에서 유래하였다. 포르투갈은 온난한 항구라는 뜻이다.
오늘날 포르투갈의 국경 안에 포함된 지역은 선사 시대부터 계속 사람이 거주해 왔다. 갈라이키족과 루시타니족 같은 켈트인들은 후에 로마 공화정에 통합되었고, 이후 수에비족과 서고트족 같은 게르만족이 정착하였다. 8세기부터는 무어인이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하기 시작한다. 기독교도의 헤콩키스타 도중에 초기엔 갈리시아 왕국, 후엔 레온 왕국의 일부로 포르투칼레 백국(포르투갈어: Condado de Portucale 혹은 Condado Portucalense)이 성립된다. 1139년 포르투갈 왕국의 성립과 1143년 독립 승인, 1249년 국경의 확립을 통해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 국가로 거듭난다.
15세기와 17세기 사이에 대항해 시대 탐험의 결과로, 포르투갈은 서양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남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를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하였고, 이를 통해 전 세계에서 경제, 정치, 군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강대국으로 거듭났다. 포르투갈 제국은 사상 첫 세계 제국이었고, 1415년 세우타 정복[8]부터 1999년 마카오의 중국 반환까지 거의 600년 동안 이어진, 가장 오래 지속된 식민지 제국이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국제적 중요성은 19세기, 특히 식민지였던 브라질의 독립 이후 크게 줄어들었다. 1910년 10월 5일 혁명으로 공화국이 성립되었고, 포르투갈 왕가는 추방되어 제1공화국이 성립되었지만, 권위주의 정권인 이스타두 노부가 형성되었다. 1974년 카네이션 혁명 이후 대의 민주주의가 성립되었고,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이 종식되어 마지막 해외 주였던 모잠비크, 앙골라 등이 독립하게 된다.
오늘날 포르투갈은 비교적 HDI와 1인당 GDP가 낮지만 선진국 중 하나로 여겨지며, 인간 개발 지수 역시 "매우 높음" 수준에 속한다. 삶의 질은 19위로, 세계적으로도 최상 수준의 의료시스템을 가지고 있고, 가장 세계화되고 평화로운 나라에 속한다. 포르투갈은 국제 연합 (UN), 유로존, 솅겐 조약을 포함한 유럽 연합 (EU), 북대서양 조약 기구 (NATO), 경제 협력 개발 기구 (OECD),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 (CPLP)의 창립 회원국이며, 유엔 평화유지군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국가 상징[편집]
국호[편집]
현행 정식 국호는 1910년 10월 5일 혁명을 통해 최초로 사용된 '포르투갈 공화국(República Portuguesa [ʁɛˈpuβlikɐ puɾtuˈɣezɐ])'이다. 약식 국호인 '포르투갈(Portugal [puɾtuˈɣaɫ])'은 중세 포르투갈의 중심지였던 포르투의 라틴어 명칭인 '포르투스 칼레(Portus Cale)'에서 유래했다. 정식 국호상에서 쓰인 표현인 포르투게자(Portuguesa)는 형용사인 포르투게스(Português)의 여성형 표현이며, 포르투스 칼레(Portus Cale)의 형용사형인 포르투칼렌시스(Portucalensis)에서 유래한다.
"포르투갈"이라는 이름은 서기 930년과 950년 사이에 등장하였고, 1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더 빈번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1세가 1067년 아들 가르시아 2세에게 영토를 주면서 공식적으로 포르투갈이라고 명명하였다. 수에비족의 통치하에 있던 5세기에 이미 히다티우스(라틴어: Hydatius)는 수에비족의 왕 레키아르(라틴어: Rechiar)가 도피한 장소를 "포르투칼레"(라틴어: Portucale)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 "Rechiarius ad locum qui Portucale appellatur, profugus regi Theudorico captivus adducitur: quo in custodiam redacto, caeteris qui de priore certamine superfuerant, tradentibus se Suevis, aliquantis nihilominus interfectis, regnum destructum et finitum est Suevorum" ("포르투칼레라고 불리는 곳으로 도망간 레키아르는 포로가 되어 테오도릭에게로 끌려갔다. 감시 속에 붙잡혀 있었고, 비록 몇몇은 죽었지만 이전 전투에서 살아남은 나머지 수에비족은 항복하였다. 이렇게 수에비 왕국은 파괴되어 종식되었다.")
오늘날 빌라노바드가이아인 "칼레"(라틴어: Cale)는 이미 고트족 시기에 "포르투칼레"(라틴어: Portucale)로 알려졌다. 841년 작성된 문서에서는 갑작스럽게 "포르투갈"(portugalense) 주에 관해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아스투리아스의 알폰소 2세는 루고의 주교의 통치권을 확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Totius galleciae, seu Portugalensi Provintiae summun suscipiat Praesulatum." ("그가 갈리시아 주와 포르투갈 주의 모든 최고 행정부의 자리에 임할 것.")
하지만 "포르투갈"이 오늘날의 포르투에 정박해서 정착한 그리스에서 온 우두머리 고이델 글라스(아일랜드어: Goídel Glas, 라틴어: Gathelus, 포르투갈어: Catelo 카텔루)가 지은 "포르토가텔루"(Portogatelo)란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문장의 요소로써, 포르투갈의 이름은 초대왕인 아폰수 엔리케스가 1129년 캄펠루(포르투갈어: Campelo)에 위치한 성 바르톨로메오 교회(포르투갈어: Igreja de São Bartolomeu de Campelo)에 보낸 기증서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한국어권에서는 포르투칼로 많이 불리고 있다. 앞의 'ㅌ' 이 유기음이라서 뒤의 'ㅋ' 도 덩달아 유기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 영향으로 '르' 까지 '루' 로 바꿔 포루투갈로 부르는 사례도 적지 않다. '투' 에서 어느 쪽에 강조를 하면서 부르느냐에 따라 이렇게 불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포르투갈어 북부 방언을 제외한 어떤 언어에서도 포르투칼이라고 불리는 일은 없다.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것이 일반화되어 구글이나 네이버에서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대학 교수가 수업 자료에 포르투칼이라고 써 놓는 경우도 있다. 포루투칼도 가끔 보인다. 또한 한자 음차로는 포도아(葡萄牙)라고도 한다.
국기[편집]
포르투갈의 국기는 2:3으로 분할된 초록과 빨강의 직사각형이 수직으로 배열되어 있고 분할선 중앙에는 포르투갈의 문장이 들어 있다. 문장 안쪽에 있는 파란색 도형은 본래 국왕이 쓰던 방패에 장식된 파란색 십자가였으나 십자가의 문양이 훼손되어 5개의 분할된 방패 모양으로 바뀌었다. 이후 방패 문양에 빨강 가장자리와 노란 성채를 더한 형태로 포르투갈 문장이 완성되었다. 1495년 왕정 시기부터는 문장 위에 왕관이 씌워졌고 1835년 마리아 2세 치하에서는 문장 바깥에 흰색과 파란색 배경을 사용했다. 1910년 혁명으로 공화국이 된 이후엔 왕관이 지워졌고 배경이 지금의 초록과 빨강으로 바뀌었으며 포르투갈 문양 바깥에 혼천의가 채워졌다. 초록은 희망을, 빨강은 1910년 10월 5일 혁명에서 흘린 피를 나타내고 혼천의는 새로운 항로의 발견으로 이룩한 포르투갈의 위대한 역사를 의미한다.
국장[편집]
포르투갈의 국장은 1911년 6월 30일에 공식 제정되었다. 현재의 국장은 1910년 10월 5일 혁명을 계기로 포르투갈에서 공화정이 수립되면서 새로 제정되었다.
국장 가운데에는 노란색 혼천의가 그려져 있으며 혼천의 안에는 빨간색 방패가 그려져 있다. 빨간색 방패 바깥쪽에는 7개의 노란색 작은 성이 그려져 있으며 방패 안쪽에는 하얀색 바탕에 5개의 파란색 작은 방패가 그려져 있다.
국장 양쪽을 노란색 올리브 가지가 감싸고 있으며 포르투갈의 국기를 구성하는 색인 초록색과 빨간색 두 가지 색으로 구성된 리본이 이를 묶고 있다.
혼천의는 대항해시대의 천체 관측 기구이자 항해 도구로 포르투갈 선인들의 측량 기술의 발달과 새로운 항로의 발견으로 이룩한 포르투갈의 위대한 역사를 의미한다.
빨간색 방패 바깥쪽에 그려진 7개의 노란색 작은 성은 아폰수 3세 시대였던 1249년에 일어난 무어인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승리하여 되찾은 7개의 성을 의미하며 방패 안쪽에 그려진 5개의 파란색 작은 방패는 1139년에 일어난 오리케 전투에서 아폰수 1세가 5명의 무어인의 왕들을 죽이고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왕의 문장으로 사용했다는 설과 예수 그리스도의 5개의 성흔을 의미한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국가[편집]
포르투갈의 국가는 'A Portuguesa'이다. 앙골라-모잠비크 방면에 있던 포르투갈군을 철수하라는 영국의 최후통첩을 포르투갈이 받아들여 철수하게 되면서 반영 감정이 극도로 심할 때 작사 및 작곡된 국가로, 이후로도 왕정 시기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가 마누엘 2세 강제 퇴위 후 국가로 지정되었다. 라 마르세예즈만큼은 아니어도 "대포에 맞서 전진하라"는 호전적인 가사가 돋보인다.
지리[편집]
포르투갈의 대륙부는 유럽의 남서쪽 끝에 위치하며 오직 스페인 한 국가와 국경을 접한다. 대륙부의 국토는 가장 중요한 하천인 테주강을 중심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북쪽은 내륙으로 이 지역에서 농업이 발달한 사이사이 낀 고원을 가진 산악지역의 풍경을 보인다. 남쪽으로는 알가르브 지방까지 드문드문 산맥이 나타나는 평원이 큰 특징으로 나타난다. 다른 주요 하천으로는 테주강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 발원하는 도루강, 미뉴강, 과디아나강 등이 있다. 이들 강 사이사이로 강줄기가 포르투갈 영토 내에서만 흐르는 강이 있다. 이러한 강으로는 보가강, 사두강 등이 있으며, 더불어 이러한 포르투갈 내에서만 흐르는 강 중 가장 긴 몬데구강은 포르투갈 대륙부에서 가장 높고, 포르투갈 내에서는 아소르스제도의 피쿠 산 다음으로 높은 세하다이스트렐라 산맥(해발 1,993m)에서 발원한다.
아소르스제도는 대서양중앙해령의 열곡에 위치하며, 1563년 상미겔섬 분화와 1957년의 파이알섬 서쪽 면적이 늘어난 카펠리뉴스 화산 등 몇몇 섬에서는 최근에도 화산활동을 보여줬다. 동조앙드카스트루 퇴(堆)(포르투갈어: Banco D. João de Castro)는 테르세이라섬과 상미겔섬 사이 해저 14m 깊이에 위치한 거대 해저화산이다. 1720년 분화를 시작하면서 섬 하나가 생성되어 수 년 동안 수면 위에 남아 있었으며, 새로운 섬이 머지 않은 미래에 솟아 오를 가능성이 있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높은 곳인 피쿠섬의 피쿠산은 해발 2351m에 달하는 화산이다.
대서양 중앙해령의 열곡 지대에 위치한 아소르스제도와 달리, 마데이라제도는 아프리카 판 안쪽에 위치하며 지각판 이동이 아닌 열점 활동으로 생성되었다. 이러한 안정적이고, 지각판 내부에 위치한 까닭에 포르투갈에서 지진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다. 증거가 있는 마지막 화산 분출은 약 6000년 전 마데이라섬에서 일어났으며, 현재는 도로 터널 또는 본섬 내륙의 물 저장 갱도 굴착 과정에서 배출된 화산가스나 뜨거운 탄산수 같은 간접적 형태의 화산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마데이라에서 가장 높은 곳은 후이부 봉으로 해발 1862미터로, 이는 포르투갈에서 세 번째로 높은 곳이다.
포르투갈은 본토 1230 km, 아소르스 667 km, 데제르타스제도, 셀바젱스제도, 포르투산투섬을 포함한 마데이라가 250km로, 긴 해안을 갖는다. 이러한 해안은 다양한 절벽과 모래사장과 함께 아름다운 해변을 형성하고 있다. 암석으로부터 생성된 본토의 해안과 달리, 포르투산투섬에는 조개껍질과 같은 유기물로 만들어진 9km에 달하는 사구가 있어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포르투갈 해안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아베이루 가까이 위치한 보가강 하구의 아베이루 히아(포르투갈어: ria de Aveiro)로, 길이 45 km, 최대 폭 11km에 달하며, 어류와 해양 조류가 풍부하다. 4개의 수로 사이에 여러 크고 작은 섬들이 있고, 4개의 강이 대서양으로 접어든다. 또한 사취가 형성되어 석호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포르투갈의 해안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 중 하나로 여겨진다. 포르투갈은 유럽에서도 큰 축에 속하는 약 1,683,000 km²에 달하는 배타적 경제 수역을 갖는다.
기후[편집]
포르투갈은 지중해성 기후를 나타내며,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라 남쪽은 "Csa", 북쪽은 "Csb"로 분류된다. 포르투갈은 유럽 국가들 중 가장 온화한 기후를 갖는 나라 중 하나로, 포르투갈 본토의 연 평균 온도는 북부 내륙 산악지역이 13 °C, 남부 과디아나강 유역이 18 °C 정도의 다양성을 보인다. 북부 지방 고지대와 최북단 해안 지방, 중부 지방에서의 여름은 온화한 편이다. 가을과 겨울은 보통 바람이 많이 불며, 비가 많이 내리고 선선하다. 중부와 북부 지방의 주에서 가장 추우며, 이들 현 가운데 일부에서는 가장 추운 기간 중에는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기도 한다. 하지만 포르투갈 남부 지방의 도시에서는 온도가 0 °C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 드물며, 대개의 경우 5 °C 정도에서 머문다.
보통 봄과 여름에 낀 달에는 날씨가 맑다. 온도는 건조한 7, 8 월에 가장 높은데, 심한 날의 경우 포르투갈 대부분 지역에서 간간히 최대온도가 40 °C를 넘으며, 알렌테주 지방 내륙에서는 이러한 일이 더욱 빈번히 발생한다. 여름에는 최근 기상 연구 보고서 기록의 도루강 계곡의 코아 계곡 선사유적 공원의 예와 같이 50 °C까지 올라갈 수 있다. 테주강과 도루강 유역과 같은 몇몇 지역에서는 연 평균 기온이 20 °C에 달할 수 있기도 하다.
최고 기온은 상조앙다베스케이라의 히오다드스에서 기록된 50.5 °C 다. 총 연평균 강수량은 북부 산악지방에서 3,000mm를 조금 넘고, 알렌테주 지방 남부 지역에서 600mm에 못 미치는 등의 편차를 보여준다. 일조 시간은 연 2500~3200 시간으로, 평균적으로 겨울엔 일일 4~6시간, 여름엔 일일 10~12시간 정도이며, 남동부 지역에서 최대, 북동부 지역에서 최소 값을 보인다.
눈은 북부 지방의 구아르다 현, 브라간사 현, 빌라헤알 현, 비제우 현 등 4개 현에서는 주기적으로 내리며, 남쪽으로 갈수록 빈도는 줄어들며, 알가르브 대부분 지역에서는 이를 찾아 볼 수 없다. 겨울에 세하다이스트렐라 산맥, 세하두제레스 산맥, 세하드몬테지뉴 산맥 같은 제한된 곳에서 온도가 영하 10 °C까지 내려가고, 자주 눈이 내리며, 이들 장소에서는 10월부터 5월 사이에도 눈이 오기도 한다.
생물다양성[편집]
기후와 지리적 다양성은 포르투갈의 식물상을 형성하였다. 포르투갈의 산림은 경제적인 이유로 소나무 (특히 "피나스터소나무" 및 "돌소나무" 종), 밤나무 ("유럽밤나무"), 코르크나무 ("Quercus suber"), 털가시나무 ("Quercus ilex"), 포르투갈오크 ("Quercus faginea"), 유칼립투스가 널리 퍼져있다.
포유류 동물군은 매우 다양해, 여우, 오소리, 이베리아스라소니, 이베리아늑대, 들염소 (Capra pyrenaica), 야생고양이 (Felis silvestris), 토끼, 족제비, 이집트몽구스, 사향고양이 및 더 많은 동물을 포함하고, 페네다-제레스 국립공원과 가까운 미뉴강에서는 회색곰이 가끔씩 나타난다. 포르투갈은 유럽과 아프리카를 오가는 철새들에게 중요한 경유지로, 상비센트 곶이나 세하드몬시크 산맥과 같은 곳에서는 가을에는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봄에는 반대방향으로 날아가는 수천마리의 새를 감상할 수 있다. 포르투갈에는 약 600여종의 조류가 서식하며, 이들 중 235종은 텃새이며 거의 매년마다 새로운 종이 등록된다.
포르투갈에는 100여 종이 넘는 민물 어류가 서식하며, 테주국제자연공원의 거대한 유럽왕메기(Silurus glanis)에서 서부 지역의 작은 호수에서만 사는 작은 고유종까지 다양한 보습을 보여준다. 이들 중 몇몇 특정 희귀종은 서식지 감소, 오염, 가뭄 등으로 인해 상당한 수준의 멸종 위협에 처해있다. 포르투갈의 해양은 세계에서도 풍부한 생물다양성을 보여주는 곳 중 하나다. 해양생물종은 정어리 (Sardina pilchardus), 가랑어, 대서양고등어를 포함해 수천 종에 이른다.
또한 특히 포르투갈의 서부 해안에서는 용승 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데, 이는 바다의 영양과 생물다양성을 매우 풍부하게 해준다. 포르투갈의 보호 구역은 페네다-제레스 국립공원부터 이스트렐라 산맥 자연공원에 걸친 국립공원 (parque nacional) 1곳,자연공원 (parque natural) 13곳 (가장 최근엔 2005년 지정), 자연보호구역 (reserva natural) 9곳, 천연기념물 (monumento natural) 5곳, 경관보전 지역 (paisagem protegida) 6곳이다. 2005년 이스포젠드 해안경관보전 지역(포르투갈어: Área de Paisagem Protegida do Litoral de Esposende)이 "해안선과 물리적, 미학적, 경관적 자연요소의 보존"을 위해 북부해안 자연공원(포르투갈어: Parque Natural do Litoral Norte)으로 승격되었다.
역사[편집]
원래는 포르투갈 백국이라는 아주 작은 나라에서 시작했다. 포르투갈 백국이라는 명칭에서 보다시피 국가원수의 작위가 고작 백작에 불과할 정도로 낮았으며 사실상 스페인에 얹혀서 월세방을 사는 것과 비슷한 신세였다. 국토 역시 지금의 포르투갈을 2등분해서 북쪽만 해당되었으며 현재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은 포르투갈 백국 시절 당시에는 되려 무어인의 영토였다. 그러던 포르투갈이 헤콩키스타를 거처 남쪽으로 점점 성장해 오늘날의 국토 모습을 갖췄다.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기 시작하면서 유럽인들의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이후 전 세계를 누비면서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곳곳을 식민지로 점령하면서 포르투갈 제국으로 대표되는 식민제국의 서막을 열기도 했다. 당시 교황의 중재 아래 스페인과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해서 전 세계를 양분할 정도의 해양 강대국이었다. 남아메리카의 [[브라질], 아프리카의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인도의 고아, 중국의 마카오 등이 포르투갈 식민지였다.
하지만 식민지에 대한 과도한 의존으로 부작용도 많이 생겨났다. 주앙 6세 시절에는 페드루 왕세자가 최대 식민지였던 브라질을 차지하고 1822년에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영향력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후 유럽의 이류 국가로 전락해서 강대국들 간의 패권 경쟁에서 소외되었다. 그나마 기니비사우, 앙골라, 모잠비크 등 아프리카 지역과 동티모르, 마카오 등 아시아 일부 지역의 식민지 해외 영토들만을 유지하면서 20세기까지 유지했지만 이 와중에 혁명과 군부 쿠데타, 36년간 집권한 독재자 살라자르와 카에타누 치하의 독재 정권을 겪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기니비사우, 앙골라, 모잠비크 등 아프리카 식민지의 독립 운동을 무력으로 저지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현지 독립 운동 세력들의 무장 투쟁이 거세게 불타오르면서 수렁에 빠진다. 식민지 전쟁에 막대한 국가 재정과 병력들이 투입되면서 힘이 상당히 분산되었고 결국 1974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독재 정권이 무너지면서 민주화가 되었다. 새로 들어선 민주 정부가 식민지의 독립을 인정하고 철군하면서 1974년 기니비사우의 독립을 시작으로 1975년 모잠비크, 카보베르데, 상투메 프린시페, 앙골라가 독립했다. 그리고 1999년 마지막으로 남은 해외 영토인 마카오를 중국에 반환하면서 포르투갈의 식민지는 모두 반환되었다.
식민지 역시 이중 식민지를 했는데 포르투갈의 식민지 브라질, 브라질의 식민지 우루과이라서 우루과이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의 식민지였으며 우루과이의 입장에서 본 포르투갈은 주인님의 주인님이었다. 물론 나중에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의 도움으로 독립에 성공했다.
기원과 초창기[편집]
포르투갈의 역사는 이베리아반도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선사시대에 이동해 온 켈트족 문화는 기원전 12세기에 이주해 온 페니키아 문화, 기원전 8세기에는 그리스 문화와 결합되었다. 기원전 2세기부터 로마의 속주가 되어 '루시타니아(Lusitania)'로 명명된 포르투갈은 라틴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속어로서 포르투갈어가 발전했다. 또한 농경양식, 도시의 건설, 언어, 생활양식 등에서 로마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들어온 게르만계 서고트족은 포르투갈에 기독교 왕국을 건설했다. 711년 무어인들이 이베리아반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알안달루스(al-Andalus) 이슬람 왕국을 세우자 기독교인들은 북서부로 후퇴하여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건설하고 명맥을 유지하였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이후 기독교도들의 국토 회복운동(헤콩키스타)을 주도하였고, 포르투갈은 이러한 국토회복운동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백작이었던 비마라 페레스(Vimara Peres)는 자신의 군대로 현재 포르투갈 북부를 북과 남으로 구분하는 두로강(Duro) 이북 지역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수복하였다. 이에 대한 공로로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3세는 868년 페레스를 백작에 봉하고 이 지역을 영지로 하사하였다. 페레스가 이슬람인들을 몰아내고 세운 포르투(Portus)와 칼레(Cale) 두 도시의 이름을 따서 '포르투칼레(Portucale)'로 부르다가 '포르투갈리아(Portugália)'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포르투갈의 시초이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924년 레온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레온 왕국의 알폰소 6세는 자신의 딸을 부르고뉴의 앙리와 혼인시키고 포르투갈 백작에 봉했다. 앙리의 아들 아폰수 엔리케(Afonso Henriques)는 테호강 북쪽에서 이슬람 무어인들을 몰아내고 추종자들로부터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1143년 레온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고 1179년 교황청의 확인을 받아 정식으로 포르투갈 왕국이 탄생하였다. 이후 아폰수 왕과 그의 후계자들은 종교기사단의 도움을 받아 무어인들로부터 남부를 정복해 나갔다. 1249년 최남단의 알가르브(Algarve)를 정복해 오늘날 포르투갈 경계를 이루는 대부분의 지역을 회복하면서 포르투갈의 국토 회복운동이 완료되었다. 남부의 실질적인 회복운동이 종교기사단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남부에는 봉건적 귀족령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북부에는 일찍부터 자유농민에 의하여 집약적인 농업 경영이 이루어졌다.
항로 개척과 해외 진출[편집]
국가 통일을 완성한 포르투갈의 1차적 목표는 민족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1279년 왕위에 오른 데니스 1세(Denis I)는 포르투갈어를 공식 언어로 지정하고 대학을 설립하는 등 정체성 확립에 기여했다. 또한 귀족과 교회의 특권을 점차 폐지하는 등 왕권 강화에도 기여했다.
포르투갈이 대내외적으로 튼튼한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스페인의 카스티야 왕국과 치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383년 페르디난도 1세(Ferdinando I)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카스티야 왕국은 포르투갈 왕위를 차지해 병합하려 하였다. 하지만 시민들은 의회를 열어 자체적으로 아비스(Aviz) 가문의 주앙을 왕으로 추대했다. 왕으로 추대된 주앙 1세(João I)는 영국과 윈저조약(Treaty of Windsor)을 체결하고 알류바로타(Aljubarrota) 전투에서 카스티야군을 대파하고 왕위를 지켜냈다. 영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주앙 1세는 리스본의 상인계급과 결탁하여 유럽 최초로 중앙집권 체제를 완성했다.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한 아비스 왕가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해상무역을 통해서 발전한 것처럼 해상무역을 발전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이슬람의 오스만튀르크가 기독교 유럽의 지중해 무역을 막고 있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인도로 가는 항로 개척 경쟁에 뛰어들어 지리상의 발견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황금, 노예, 향료 무역을 보장해 줄 인도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서로 경쟁하였다. 포르투갈의 항로 개척은 주앙 1세의 아들인 항해왕 엔히크(Henrique)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1488년 포르투갈의 바르돌로뮤 디아스(Bartolemeu Dias)는 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따라 잇따라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희망봉에 도착했다. 1492년 카스티야 왕국의 페르디난도 5세와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을 받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인도라고 믿었던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경쟁에서 뒤처진 것을 느낀 카스티야 왕국은 교황청을 사주해 1494년 포르투갈과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브라질 동부지역을 경계로 서쪽은 스페인이, 동쪽의 아프리카 및 아시아는 포르투갈이 세력권을 가지도록 하는 일종의 신사협정이었다. 신사협정이 체결되면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및 아시아에 무역 거점을 확보해 나갔다.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1498년 인도에 도착하였다. 1500년에는 브라질에 도착해 식민지로 삼고 1514년에는 중국과 일본에 도착했다. 인도 항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에 많은 식민지를 건설했고 향신료 무역을 통해 왕가와 귀족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포르투갈은 해양왕국으로 성장했다.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 경영은 사금과 노예의 획득, 향료를 비롯한 몇 가지 농산물의 수입에 주력하였으며, 수도 리스본은 각지로부터 유입된 부(富)의 집산지로 크게 번창하였다. 그러나 부는 왕실과 귀족에게만 집중되었으며, 이들의 낭비와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하여 귀금속을 비롯한 부가 국외로 유출되어 국내 부르주아는 형성되지 못하였다. 포르투갈의 해외 진출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무역과 함께 포교활동이 수반되었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반종교 개혁의 중심으로서 가톨릭교회 세력이 강화되었다. 문화적 측면에서는 이슬람, 인도, 고딕 양식이 뒤섞여 조화를 이룬 마누엘 양식이 확립되는 등 포르투갈의 독자적 르네상스 문화가 개화하였다. 〈우스루지아다스〉로 유명한 국민시인 카몽이스가 출현한 것도 이 시기였다. 1572년에 출판된 이 불후의 명작은 포르투갈 문학 최고의 걸작으로, 그리스의 〈호메로스〉에 비견되는 웅장한 국민적 서사시이며, 그 주제는 바스코 다 가마의 항로 발견 등 포르투갈 역사를 다룬 것이다.
열강의 포르투갈 침공과 재건[편집]
16세기 말에는 스페인과 다시 한번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 계기는 1578년 세바스티안왕(Sebastian)이 후계를 남기지 못하고 북아프리카 원정에서 전사한 것이었다. 이에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 스페인의 필리페 2세가 포르투갈을 침공하여 승리를 거두어 1640년까지 포르투갈을 지배했으며 포르투갈이 강력한 해양왕국의 지위를 잃은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스페인에 통합된 포르투갈은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잃지는 않았지만, 왕이 존재하지 않고 외교권을 잃어 해상무역에서도 점점 네덜란드와 영국에 밀리며 몰락의 길을 걸었다.
1640년 왕으로 추대된 브라간사 공작 8세는 프랑스 및 영국과 동맹을 맺고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시작하여 그 결과 1668년 스페인이 포르투갈의 왕정복고와 독립을 인정하는 리스본 조약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1595년부터 1664년까지 진행된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제외한 식민지 대부분의 지역에서 상업적 이익을 상실하였다. 17세기 후반 브라질에서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면서 포르투갈 왕실의 재정이 튼튼해지면서 절대왕권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축적된 국부의 대부분이 화려한 왕실을 유지하는 데 사용되면서 경제발전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18세기 포르투갈은 폼발 후작(Sebastião José de Carvalho e Melo)의 시대였다. 그는 주제 1세(José I, 재위 1750~1777)의 신임을 얻어 1755년 총리가 되었다. 그는 경제, 군대, 사회 등 전반에 걸쳐서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다. 한편 1755년은 수도 리스본에 대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해 도시 전체가 파괴되는 대재앙을 맞은 해기도 하였다. 폼발은 파괴된 리스본을 1년 안에 재건해 냄으로써 리스본을 새롭게 탄생시켰다. 리스본 재건에서 자신감을 얻고 주제 1세의 신임을 획득한 폼발이 보다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1758년에는 주제 1세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는데 폼발은 여기에 연루된 타보라 가문(Tavora)의 가족 대부분과 아베이로 공작(Duke of Aveiro) 등 의심받은 귀족들 대부분을 공개 처형하고 재산은 왕실에 귀속시켰다. 한편 암살 시도와 연루되었다고 의심받은 예수회 역시 국외로 추방되고 교회 등 모든 재산은 왕실에 귀속되었다. 이 사건을 해결한 폼발은 1770년 후작의 작위를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폼발은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귀족을 제거하면서 다른 귀족들의 저항을 잠재울 수 있었다.
포르투갈도 유럽을 휩쓴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차례로 격파한 나폴레옹은 1806년 대륙봉쇄령을 선포했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대패한 나폴레옹이 영국을 고립시켜 경제적으로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과 동맹관계에 있던 포르투갈은 대륙봉쇄령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1807년 포르투갈을 침공해 점령했다. 포르투갈 왕실은 즉각 브라질로 왕실을 이전하고 영국과 함께 항전을 계속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영국은 장군을 섭정으로 파견해 포르투갈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다. 이에 왕가는 포르투갈로 돌아가지 않고 브라질에 남아 브라질-포르투갈 연합왕국을 선포하고 계속해서 브라질에 머물렀다. 영국의 섭정이 계속되자 포르투갈 국내에서는 1820년 영국의 섭정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나 입헌군주제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에 주앙 6세는 포르투갈로 돌아왔으나 아들인 페드로를 브라질에 남겨두었다. 이후 브라질에서는 페드로를 왕으로 옹립해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결국 1825년 브라질은 독립하고 주앙 6세는 상징적으로 브라질의 황제가 되었다.
포르투갈 공화국의 탄생과 독재 정권 출현[편집]
브라질이 독립을 선언한 뒤부터 포르투갈의 국력은 쇠퇴해 갔다. 프랑스 혁명사상과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포르투갈도 근대화를 겨냥한 여러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국내 산업기반이 취약하여 중산층의 성장이 어려웠으므로, 중앙은행 설립 등을 제외하고는 두드러진 성과가 없었으며, 반대로 19세기에는 정치,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혼란 중에 1908년 국왕 카를로스 1세(Carlos-I) 부자가 암살되었고, 1910년 총선거 후 공화파 혁명이 일어나 카를로스 1세를 승계한 마누엘 2세가 퇴위하여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포르투갈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공화국 탄생 이후에도 쿠데타가 되풀이되어 15년 동안 45번이나 정부가 바뀌었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연합군 측에 가담하여 참전함으로써 국력은 피폐해졌고 경제적 위기는 극도로 심해졌다. 전쟁 막바지인 1919년에는 북부 지역에서 왕정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실패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포르투갈은 승전국이 되었지만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으면서 여전히 정치, 경제, 사회적 혼란 속에 있었다. 이를 틈타 1926년 민족주의 우파 군부 쿠데타가 발생해 코스타(Alfonso Costa) 독재 정권이 출현하였으나 경제정책의 실패로 실각하였다. 새로운 정부에서 재무장관이 된 살라자르(António de Oliveira Salazar)는 전세계적인 대공황 속에서도 극단적 디플레이션 정책을 통해 포르투갈의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국내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1932년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총리직에 올랐다.
총리가 된 살라자르는 '에스타도 노부(Estado Novo: 새로운 국가)'라는 새로운 국가 체제를 제시했다. 이에 따라 1933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어 제2공화국이 탄생하였다. 살라자르의 새로운 국가는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조합국가를 모방한 것으로 강력한 공화제적 조합국가였다. 그는 자신의 국민연합당 이외의 정당은 인정하지 않았으며, 비밀경찰과 검열제도를 통해 감시하고 통제하는 등 36년 동안 강력한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포르투갈은 살라자르의 독재체제 속에서 경제성장을 꾸준히 이룩했다. 하지만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 등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을 막기 위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살라자르 통치 말기에는 재정적 어려움에 처하였다. 그의 독재는 결국 1969년 신병으로 사임하면서 끝이 났다. 후계자가 된 가에타노(Marcelo Gaetano) 총리는 내부적으로 독재체제를 유지했고, '세계 최후의 식민지제국'이라는 국제적 비난을 받으면서도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탄압정책을 계속했다.
카네이션 혁명과 이후[편집]
살라자르와 가에타노에 의해 40여 년 이상 계속된 독재 체제는 '카네이션 혁명(Revolução dos Cravos)'이라 부르는 1974년 4월 일어난 군부의 무혈 쿠데타로 종결되었다. 민주화를 목표로 좌파 소장파 장교들에 의해 발생한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제3공화국이 출범하고 1975년까지 모든 해외 식민지들이 독립하였다. 정권을 잡은 군부는 산업을 국유화하는 등 사회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독재 정권을 유지해 왔던 국민연합당은 해체되고 새로운 정당들이 활동을 개시하였다. 쿠데타 후 대통령에 취임한 안토니우 드 스피놀라 장군은 좌파의 압력으로 1974년 9월 사임하고 프란시스코 다 코스타 고메스(Francisco da Costa Gomes)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75년 3월에는 스피놀라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이를 계기로 정권을 잡은 군부는 더욱 좌경화되었고 최고군사혁명 평의회(Junta de Salvação Nacional)를 통해서 국가를 통치했다.
1976년 사회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명문화한 신헌법이 채택되어 4월 포르투갈 국민들은 50년 만에 민주적 방법으로 제헌의회 선거를 치렀다. 선거에서 사회당이 득표율 34.9%로 107석을 획득, 제1당이 되어 입법의회(정수 263석)가 탄생했다. 7월에는 마리우 소아레스(Mário Soares)를 총리로 하는 사회당 단독내각이 발족함으로써 단원제 의회제 민주주의의 형태가 성립되었다. 제3공화국 헌법은 토지개혁이나 산업의 국유화 등을 명문화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헌법이었다. 정부 구성 역시 사회당은 민주대중당(현재의 사회민주당) 및 군부와 협력해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하지만 카네이션 혁명을 완수한 군부는 이들 정당보다도 훨씬 급진적이어서 공산당과 협력하고 있었다. 이를 우려한 사회당과 민주대중당이 이탈하여 연립정부를 붕괴시키면서 정국은 더 혼미해졌다. 게다가 군부 내의 우파 세력이 반격하는 등 이데올로기 대립이 극심했다.
카네이션 혁명 이후 집권한 사회당 주도의 정부는 경제위기와 정치적 불안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1979년 보수파 연합의 민주동맹(AD)에 정권을 넘겨주었다. 이후 보수파 정권은 국유화 정책의 완화, 농민이 접수한 농지의 일부 반환 등 자유경제 체제로의 복귀를 목표로 하면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1976년 헌법을 개정하였다. 1986년에는 유럽경제공동체(EEC)에도 가입해 EEC로부터 기금(구조기금과 결속기금)을 받아 경제발전을 가속화하고 기업들은 유럽시장에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게 되면서 경제적 안정을 이룩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사회당과 사회민주당의 주도로 양당체제가 이룩되면서 정치적으로도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과 2002년에는 마카오가 중국에 반환되고 동티모르 역시 독립이 승인되어 식민지를 모두 잃고 순순한 유럽국가로 돌아갔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사회당이 경제와 정치 분야에서 무능을 보이는 틈을 타서 사회민주당이 지방과 중앙정부에서 정권을 획득했다. 사회민주당은 인민당과 함께 중도우파 정부를 구성해 정국의 안정을 이룩했다. 2004년에는 총리였던 바로수(José Manuel Barroso)가 유럽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는 등 사회민주당은 국내외적으로 포르투갈을 안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후에는 성장에 집중해서 선진국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고 한 동안 국내 산업이 막장세를 달려 가던 브라질로부터 이민자가 들어오는 등의 호황을 누리다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로화 위기를 맞아 경제가 급속히 안 좋아지면서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처럼 심각한 혼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현재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중에 있다. 이웃 스페인보다 체감 경기는 조금 낫고 실업률과 청년 실업률이 스페인보다 양호한 편이다. 다만 이건 노동 인구가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등으로 빠져나간 영향도 크다. 2010년대 전반기에만 60만명이 빠져나갔고 출산율도 1명대 초반으로 떨어져서 사회 전체의 고령화도 가속화되어가는 중. 그래도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동티모르에서 노동 인구를 인도해 오는 것으로 어떻게든 막아 보고 있다. 2014년 이후부터는 원자재 가격 하락의 여파로 브라질과 앙골라의 경제가 급속히 침체되면서 이민 행렬은 잠시 줄어들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잠시이기는 하고 없던 일자리가 생긴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도 상태가 좋아지기 위해서 많은 정책을 펴고 있다.
정치[편집]
포르투갈은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다. 1975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에스타두 노부라는 독재체제가 무너진 이후 민주화를 추진하면서 1976년 현행 헌법을 제정하였고, 이 때 마련된 정치체제가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전반적으로는 의회의 지지를 받는 총리와 내각이 국정 운영을 주도하지만, 일반적인 의원내각제보다는 대통령의 권한이 크다.
헌법에선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 개념이 아닌 사회민주주의로서의 사회주의로 해석되고 있다. 전반적으로 살라자르 독재 정권 시절을 제외하곤 국가적으로 좌익의 영향력이 더 강했고 국민정서도 급진 개발이나 급격한 경제 성장보단 사회적 안정, 복지 등을 중시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파 독재 시절인 살라자르 정권도 사회문화적인 의미에서 보수주의에 더 가까웠지 경제적으로 반공의 이름아래 산업화를 억지한다는 이상한 경제 정책을 폈다.
입법[편집]
포르투갈의 정치체제는 40여 년간 지속된 독재체제를 종식시킨 카네이션 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1976년의 신헌법에 기초한다. 1976년 헌법은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불완전한 헌법이었다. 카네이션 혁명을 주도한 좌파 청년장교들로 구성된 국군운동(Armed Forces Movement)이 주도하는 혁명위원회에게 대통령과 의회를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혁명위원회는 사실상의 헌법재판소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이 헌법은 개인투자와 기업 활동을 제한하는 사회주의 경제와 노동자의 권리 보호 등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982년 헌법 개정을 통해서 혁명위원회를 폐지하고 헌법재판소를 설립하였다. 또한 1989년 또 한 차례의 헌법 개정을 통해서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인 조항들을 완화하고 수많은 경제 규제들을 철폐하면서 보다 민주적인 헌법이 되었다.
1989년 개정된 헌법에 따라 포르투갈은 대통령과 의회가 권력을 공유하는 준대통령제(semi-presidential government system) 정부 형태를 가진 의회민주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준대통령제는 대통령에 대한 권력 집중을 견제하고 국정 운영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선택한 제도였다. 한편 과거 독재의 경험을 교훈 삼아 권력을 대통령, 의회, 정부, 사법부 등 4개 기관에 분산시켰다.
정부[편집]
국가 수장인 대통령은 1회에 한해 연임이 가능한 5년 임기로 선출되는데, 선거는 보통선거로 결선투표제(two-round system)를 적용하고 있다. 첫 투표에서 50% 이상을 획득한 후보가 없을 경우 2주 후 최다 득표자 2인이 결선투표에 진출한다.
주변 유럽국들의 대통령과는 달리 포르투갈의 대통령은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일상적인 국가의 운영은 입법부와 행정부가 담당하지만 포르투갈의 대통령은 행정부를 이끄는 총리와 장관들을 임명하고 의회에서 통과된 법률안을 거부하거나 의회를 해산하여 조기 선거를 요구할 수 있다. 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의회의 신임을 받아야 한다. 2004년 당시 삼파이우(Jorge Sampaio) 대통령은 의회에서 과반 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던 총리를 해임하기 위해서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대통령은 외교와 국방의 수장으로서 전쟁을 선포하고 외교사절을 접수한다. 또한 사면권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정부의 국가 주요 기관의 장을 임명하거나 해임할 수 있다.
대통령은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기 전 국가평의회(Conselho de Estado)의 자문을 받을 수 있다. 국가평의회는 대통령이 소집하는 헌법상의 국정자문기구이지만 의회 해산, 정부 교체, 전쟁 선포 등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때 대통령에게 자문을 제공함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국가평의회는 대통령을 의장으로 하고 총리, 전직 대통령, 의회 의장, 헌법재판소장, 아조레스 및 마데이라 자치지역 주지사, 대통령이 임명하는 5인의 위원, 의회가 임명하는 5인의 위원 등 20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이들 국가평의회 위원은 평의회의 동의하지 않을 경우 기소되지 않는 면책특권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 의회, 사법부와 함께 4대 주권기관 중 하나인 포르투갈의 정부는 대통령이 임명하고 의회의 신임을 받은 총리가 지휘한다. 대통령은 정당과 협의를 거쳐 통상적으로 선거에서 승리한 정당의 대표를 총리로 임명하고 정부를 구성하게 한다. 하지만 정부는 의회의 신임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제1당이 의회에서 다수를 형성하지 못할 경우 바로 교체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2015년 총선 이후 구성된 중도우파 정부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시 우파 정당연합인 전진포르투갈(Portugal Ahead)은 선거에서 승리했으나 38.6% 밖에 획득하지 못해 사회민주당(PSD) 출신의 코엘류(Passo Coelho) 총리는 의회의 신임을 받지 못하고 단 12일 만에 물러나게 되었다. 중도우파 정부의 뒤를 이어 정부를 구성한 것은 의회에서 좌파 정당들의 지지를 받고 형성된 제 2당인 사회당(PS) 당수 안토니오 코스타(António Costa)였다. 사회당은 2019년 선거에서 제1당이 되어 코스타 정부는 재신임을 받게 되었다.
행정부는 총리, 부총리, 장관 및 차관 등 70여 명으로 구성된다. 대통령에 의해 지명된 총리는 함께 정부를 구성할 장관들을 지명하고 대통령이 임명한다. 총리는 대통령과 국회에 대해 책임을 지며 각부 장관 밑에는 2~4인의 차관을 두고 있다.
의회와 정당[편집]
다당제를 채택하고 있는 포르투갈은 4년 임기의 230명으로 구성된 단원제 의회를 가진다. 포르투갈 의회는 헌법에 따라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기관으로 성 베네딕트 궁(Palácio de São Bento)에 위치한다. 1834년 이후부터 포르투갈 의회로 사용되어 온 성 베네딕트 궁 안에는 총리 공관이 마련되어 있다.
포르투갈 국회의원은 22개로 나눠진 중선거구에서 폐쇄형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통해 18세 이상의 보통선거로 선출된다. 본토는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18개의 선거구로 구분되는데 인구 비례에 따라 최소 2석에서 48석까지 의석이 할당된다. 이밖에 아조레스제도와 마데이라제도 선거구에 각각 2석이 배정되고 해외선거구로서 유럽과 유럽 이외의 지역에 각각 2석씩이 배정된다. 선거인은 후보자가 아니라 정당에 투표하고 각 정당은 각 선거구에서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받는다. 의석의 배분은 동트방식(D'Hondt method)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거대정당에 유리하다. 의석을 배분받기 위한 최소 득표율은 따로 정해놓지 않았지만 정당의 난립을 방지하기 위해 도입한 동트방식에 따라 의석이 배분되기 때문에 군소정당은 의회 진출이 쉽지 않다. 포르투갈 의원들은 각각의 지역구에서 선출되나 선출되는 지역을 대표하는 것이 아닌 국가 전체를 대표한다. 또한 의원들은 소속 정당에 강하게 예속되어 있어 독립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는 어느 지역구에 출마할지를 결정하는 권한이 출마자 자신이 아니라 정당의 지도부에 있기 때문이다. 의원이 각료로 임명될 경우 의원 자격은 일시 정지되며 정당명부의 차순위자가 의원직을 승계한다.
포르투갈 의회의 권한은 법률의 제정 및 개정, 헌법개정안 의결, 자치지역 법률 승인, 국민투표 실시 권고 등 정치적 및 입법적 권한을 가지고 있다. 또한 행정부 감사, 비상사태 및 계엄선포 동의, 예결산 심사, 대통령의 해외여행 동의 등의 권한을 가진다. 의회의 정기회기는 9월 15일부터 6월 15일까지이고 대통령의 요구에 의해 특별회의가 소집될 수 있다. 의회의 구성은 의장 1인, 부의장 4인을 가지며 12개 분과위원회로 나뉘어져 있다. 마지막으로 포르투갈 의회는 대통령에 의해 해산될 수 있다. 하지만 의회선거 직후 6개월 이내나 대통령 임기 6개월 이내에는 국회를 해산할 수 없다. 의회 해산 시 90일 이내에 새로운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
포르투갈은 다당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중앙정치와 지방정치 모두 좌파정당인 사회당과 자유주의 우파정당인 사회민주당이 지배하는 양당체제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이 두 정당을 필두로 좌파정당인 공산당(PCP), 좌파블럭(BE), 녹색당(PEV)과 우파정당인 인민당(PP) 및 동물권 정당인 PAN 등이 활동하고 있다.
2019년 가준 의회에서 108석을 차지하고 있는 사회당(Pardido Socialista, PS)은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1973년 프랑스와 독일에 망명 중이던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독일에서 창당되어 카네이션혁명 이후 귀국해 1975년 제헌의회와 이듬해 의회 선거에서 승리해 정부를 구성했다. 2019년까지 사회당은 총 8회에 걸쳐 단독 혹은 연정을 통해 정부를 구성했다. 사회당은 계급 없는 사회를 추구하지만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하지는 않는다.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 진보동맹(Progressive Alliance)에 가입되어 있다. 유럽에서도 유럽사회주의당(Party of European Socialist)에 가입되어 있고, 유럽연합(EU)에서는 좌파 진보진영인 사회주의 진보동맹(Progressive Alliance of Socialists and Democrats)에 가입되어 활동하고 있다.
제1 야당인 사회민주당(Partido Social Democrata, PSD)은 1974년 중도 혹은 중도좌파를 표방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창당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민주당은 중도우파 정당으로 변신하였다. 이는 사회민주당이 사회당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선거 때마다 이데올로기 중심이 아닌 반사회당 진영 세력들을 모아 합당을 하는 이른바 빅텐트(big tent)를 형성하면서 나타난 결과이다. 이들 세력에는 공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기독교민주주의자, 자유민주주의자 등이 포함되었다. 사회민주당은 2019년까지 총 9회에 걸쳐서 단독 혹은 연정을 통해서 정부를 구성했다. 유럽연합에서도 우파정당 연합체인 유럽인민당(EPP)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고, 기독교민주주의 인터내셔널(Christian Democrat International)에 가입되어 있다.
좌파블록(Bloco de Esquarda, Left Block)은 1999년에 창당된 좌파 이데올로기 정당이다. 좌파블록이라는 이름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급진좌파로 분류되지만 유연하고 온건한 노선을 견지하면서 때때로 사회당을 지지하고 있다. 좌파블록은 인종차별, 외국인차별, 성차별 등 각종 차별에 반대하고 동성결혼에 찬성하는 등 진보적 성향의 정당이다.
공산당(Partido Comunista Português, PCP)은 1921년 창당된 정당으로 포르투갈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정당이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추구하는 가장 이데올로기적인 정당이다.
행정[편집]
포르투갈은 독특한 형태의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먼저 2개의 자치지역, 아조레스제도와 마데이라제도에는 특별자치권을 부여하고 있다. 본토는 3단계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각 동(freguesias)-시 혹은 군(municípios)-도(regiões administrativas)로 구분된다.
특별자치주로 지정된 아조레스제도와 마데이라제도는 지리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특성에 따른 것으로 본토에서 각각 1,500㎞, 992㎞나 떨어져 있어 지리적 환경 역시 다르다. 16세기 이후 이주한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19세기부터 자치권을 요구했으나, 공화정 및 독재정치로 인해 자치권이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카네이션 혁명 이후 제정된 새로운 헌법에서는 두 지역에 대한 완전한 자치를 인정하였다. 두 개의 자치지역은 각각 자신의 영토 내에서 유효한 입법권 및 집행권을 가진다. 또한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자산의 관리 및 처분 및 조세권도 가진다. 행정적으로는 문화, 농업, 수력, 에너지, 토지이용, 지역개발, 교통, 상업, 공업, 관광, 스포츠 등에 있어서 입법 및 행정적 자치권을 보유하고 있다.
아조레스와 마데이라 자치지역은 각각 자치의회와 자치정부를 가지고 있는데, 의회 의원과 정부의 장인 주지사는 주민들에 의해 선출된다. 두 자치주는 이들에 의해 자치권이 행사되고 있다. 하지만 포르투갈 정부는 자치주를 공화국 대표(Representante da República)를 파견해 통제하고 있다. 이전에는 공화국 장관이라고 불린 공화국 대표는 자치 정부의 임원을 임명하고 자치법령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따라서 공화국 대표를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 연결고리로 활용하고 있다.
사법부[편집]
포르투갈의 법은 로마법 전통에 따른 대륙법 체계를 가지고 있다. 포르투갈 법은 19세기에는 프랑스법의 영향을 받았으나, 20세기에 법학자인 모레이라(Guilherme Alves Moreira) 교수에 의한 노력으로 독일 대륙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포르투갈은 1984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종신형을 폐지했고 사형 역시 폐지하여 최고형은 25년으로 제한된다. 또한 2001년에는 모든 마약의 소지와 이용을 허용하였다. 헌법에 따라 포르투갈 사법부는 다른 주권기관인 대통령, 입법부, 행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군사법원은 2004년 징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함에 따라 폐지되었다.
사법권은 헌법에 규정된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사법부가 관할한다. 사법재판소는 대법원, 1심법원, 2심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행정심판을 담당하는 행정법원, 예산집행을 감독하는 회계법원, 헌법심판을 담당하는 헌법재판소로 이루어져 있다.
헌법재판소는 13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는데, 이들 중 10인은 의회에서 선임되고 나머지 3인은 의회에서 선임한 재판관이 합동으로 선임하도록 되어 있다. 헌법재판소는 사전적 위헌심사 및 사후적 위헌심사를 통해 권력기관 간 견제와 균형의 기능을 수행한다. 한편 대법원은 사법 법원의 최고기관으로 대법원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17인의 사법최고위원회가 실질적인 감독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밖에 헌법기관인 옴부즈맨(Provedor de Justiça)이 있다. 옴부즈맨은 정부, 지방정부 등의 행정업무나 공무원의 부당한 행위에 대한 불평과 항의를 접수해 해당 행정기관에 시정을 건의할 수 있다. 다만 부당행위를 시정하도록 명령할 수는 없다.
국방[편집]
포르투갈의 국방정책은 미국과의 긴밀한 안보협력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통한 집단안보를 축으로 하고 있다. 포르투갈은 1973년까지는 식민지 유지를 위해 21만 명이 넘는 병력을 보유했으나, 식민지가 독립된 이후에는 점차로 병력을 감축해 5~6만 명 수준을 유지했다. 이후 2004년 4개월의 의무병역제가 폐지되고 모병제로 전환되면서 직업군인제도를 채택했다. 2018년 기준 정규군은 약 28,500명으로 육군 12,000명, 해군, 10,000명, 공군 6,500명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정규군 이외에 약 27,000명 규모의 헌병대가 군대 조직에 편제되어 있다. 헌병대는 국방부와 내무부의 지휘 아래에 있으며 해외 파병에도 참여하고 있다.
포르투갈의 군사비 지출은 2019년 기준 약 33억 달러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약 1.41%를 차지하고 있다. 아조레스제도에는 약 770명의 미공군이 주둔하고 있고, 리스본 근처에는 나토군 연합작전사령부(Allied Command Operation) 소속의 리스본 합동사령부가 위치해 있다. 포르투갈 군대는 유럽에서 나토 및 유럽연합과 긴밀한 군사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나토와의 협력은 공군이 발틱 상공 순찰 역할을 수행하고 리투아니아에 육군 전차중대를 파견하여 진행되고 있다. 유럽연합과의 협력은 주로 아프리카에서 군대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지중해에서 해적 퇴치 등 해상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20세기 포르투갈은 1차 세계대전 및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1961–1974) 두 차례의 대규모 군사 개입에 관여하였다.
포르투갈은 또한 동티모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나시리야) 및 레바논 남부 등지에서 평화 유지 활동에 참여하였다.
주민 안전은 공화국 수비대(포르투갈어: Guarda Nacional Republicana, GNR)와 공공안전 경찰(포르투갈어: Polícia de Segurança Pública, PSP)의 임무이다. 이 외에 포르투갈은 주 범죄 수사 조직인 사법경찰(포르투갈어: Polícia Judiciária, PJ)이 있으며, 이들은 주로 조직범죄, 테러리즘, 마약 유통, 부정부패, 금융경제 범죄 등을 담당한다. 사법경찰은 공공부의 지휘 아래 행동하며, 법무부에 통합되어 있다.
포르투갈은 2011년 시작된 경제위기 이후 국방개혁 2020을 통해서 국방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군인 수를 3만 2천명까지 증원하고 군인 훈련 기관을 통폐합해 운영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외교[편집]
포르투갈의 대외 정책은 대항해 시대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과 사라진 포르투갈 제국의 주인이라는 역사적 역할과 이어져 있다. 포르투갈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 (1949), 경제 협력 개발 기구 (1961), 유럽 자유 무역 연합 (1960)의 창립 회원국이다. 유럽 자유 무역 연합의 경우 1986년 당시 아직 유럽 경제 공동체(EEC)이던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해 탈퇴한다.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의 창립회원국으로, 1992년 6월 25일 솅겐 조약에 가입하였으며, 1996년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CPLP)를 공동 설립한다.
포르투갈은 유럽 연합의 주요 수혜국으로, 유럽 통합을 지지한다. 유럽 이사회 의장국 직무를 1992년, 2000년, 2007년 세 차례에 걸쳐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포르투갈은 의장국 임기 동안 유럽의 경제를 더 역동적이고 경쟁력 있게 변화시키도록 유럽연합과 아프리카 간 대화를 추진하였고, 가장 최근의 임기에는 후에 리스본 조약으로 알려진, 개정 조약을 다른 회원국들과 함께 구성, 서명하였다.
포르투갈은 NATO의 창립 회원국으로, 발칸반도 평화유지군에 다수의 파견대를 보내는 등 동맹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포르투갈은 다른 포르투갈어 사용국과 유대관계를 증진시키고자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CPLP)의 창설을 제안하였다. 또한 스페인과 함께 이베로 아메리카 정상회의에 참여하고 있다. 포르투갈은 미국, 아시아 동맹국들, UN과의 긴밀한 협력속에 군대와 자금을 지원하며, 옛 해외주였던 동티모르의 독립을 확고히 지지하였다.
브라질과는 두 나라를 이어주는 역사 외에 조약을 통해서도 우호 및 동맹관계를 갖는다. 또한 영국으로 이어지는 잉글랜드와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영국-포르투갈 동맹(윈저 조약)을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다.
유일한 국제 분쟁으로는 [올리벤사]](포르투갈어: Olivença, 스페인어: Olivenza) 분쟁을 들 수 있다. 1297년 이후 포르투갈의 영토였던 올리벤사는 오렌지 전쟁 이후 1801년 바다호스 조약에 의해 스페인에 양도되었다. 포르투갈은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오늘날 이 도시는 동명의 스페인 도시와 여기서 분리된 탈리가(포르투갈어: Táliga)로 구성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이웃 국가간 양자 외교 관계는 유럽 연합 내에서도 우호적이다.
대한관계[편집]
대한민국이 포르투갈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16세기 초반 포르투갈이 항로와 식민지 개척을 위해 아시아로 진출하면서였다. 이때 이미 한국이 포르투갈의 지도에 표기되기 시작하였다. 1613년 지도학자 마누엘 고디뇨 드 에레디아(Manuel Godinho de Erédia)의 지도에는 한국이 실제에 가깝게 그려졌고 'Coria'라고 표기되었다. 1542년에는 여행가 페르낭 멘드스 핀투(Fernão Mendes Pinto)가 한강 근처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그는 하멜보다 100여 년 앞서 한국에 도착한 최초의 서양인이 된다.
한국과 포르투갈은 1961년 4월 15일 정식으로 수교하였지만 1975년 포르투갈에 대한민국 대사관이 개설되었고 주한 포르투갈 대사관은 1988년에 와서야 개설되었다. 포르투갈은 1975년 2월 주포르투갈 대한민국 대사관이 개설되기 4개월 전에 북한과도 수교를 맺었다. 포르투갈과 대한민국은 1977년 무역협정, 1979년 사증면제협정, 1985년 경제·산업 및 기술협력 협정, 1990년 문화협정, 1996년 투자보장협정, 1997년 이중과세방지협정, 2000년 항공협정이 체결되었다. 2010년 10월에는 한-EU 자유무역협정이 정식으로 서명됨에 따라 자유무역 상대국이 되었다.
포르투갈은 2017년 기준 대한민국의 72번째 수출 상대국이고 67번째 수입 상대국이다. 대한민국으로의 수출은 약 2억 7,000만 달러로 의류 및 섬유제품, 고무제품, 전자기기, 차량, 플라스틱, 보일러 등을 수출하고 있다. 수입은 약 4억 5,900만 달러로 차량, 보일러, 철강, 전자기기, 유기화학품 등을 수입하고 있다. 포르투갈은 대한민국과의 무역수지에 있어서 약 1억 8,9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포르투갈의 대한민국에 대한 누적 투자액은 서비스업과 제조업에 약 5억 달러에 불과하고, 대한민국은 포르투갈에 약 2억 8,800만 달러를 투자하고 있어 양국 간 투자금액은 크지 않은 편이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은 2007년 주포르투갈 무역관을 폐쇄하고 주스페인 무역관이 업무를 대신하고 있다. 현재 포르투갈에는 삼성전자와 LG전자 판매법인이 진출해 있고 자동차 부품기업인 한온시스템이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2019년 현재 포르투갈에는 약 220여 명의 교민이 거주하고 있는데, 주로 유학생이 약 40%, 상사직원 등 일반체류자 약 20%, 영주권자 및 해외동포 약 40% 정도로 구성되어 있다. 거주민은 적지만 1980년 조직된 한인회와 한글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행정구역[편집]
포르투갈의 주요 행정 구역은 308개 자치단체(conselho)와 4,260개 구역(freguesia)으로 나뉜 본토의 18개 현(distrito)과 아소르스 및 마데이라 2개 자치 지방(região autónoma)이다. 현은 포르투갈에서 가장 중요한 행정 구역 단위로, 선거구 등 행정적으로 활용되는 기초로 이용된다.
1976년 이전에는 대서양제도 역시 일반적인 포르투갈의 현 구조에 통합되어 있었지만, 인접 도서의 자치 현 지위에 따라 고유 권한을 가진 총회(포르투갈어: Juntas Gerais)가 존재하는 본토와는 다른 행정 구조를 가졌다. 아소르스에 3개, 마데이라에 1개 현이 존재했다.
- 아소르스 — 앙그라두에로이즈무 현 (Angra do Heroísmo), 오르타 현 (Horta), 폰타델가다 현 (Ponta Delgada).
- 마데이라 — 푼샬 현 (Funchal).
1976년 이후, 아소르스와 마데이라는 현으로 구분되었던 것이 철폐되고, 자치 지방 지위를 갖게 되어 단일한 정치 행정 지위와 고유 정부 기구를 갖게 되었다.
2013년, 기존에 유지되어 있던 본토의 18개 현을 포함한 5개의 지방과 2개의 자치 지방을 합쳐 총 7개의 지방으로 구성되어 있던 행정구역을 인구기준으로 개선하여 2개의 대도시권, 21개의 광역자치단체, 2개의 자치지방으로 개편했다.
새 행정구역제도는 자치단체를 포함한 3단계 형태로, 광역자치단체 아래로 308개의 자치단체(município 또는 concelho로 부름)가 있고, 그 밑으로 다시 교구로 번역되는 Freguesia가 존재한다. 교구는 전국에 3,092개가 존재한다.
한국에 1:1 대응하자면, 광역시로 볼 수 있는 2개의 대도시권과 도(道) 내지 기존 나무위키에서 해석한 현으로 번역할 수 있는 21개의 광역자치단체, 제주특별자치도와 같은 2개의 자치지방이 있고, 그 아래로 구/군급의 자치단체가 있으며, 다시 세분화하는 읍/면/동에 해당하는 교구가 있는 셈이다.
NUTS[편집]
포르투갈은 또한 통계지역단위명명법(NUTS)에 따라 세 지역으로 나뉘다. 이러한 분류는 유럽연합의 모든 나라에서 유효하며, 통계적 목적을 위해 수립되었다. 1단계는 포르투갈 본토, 아소르스 자치 지방, 마데이라 자치 지방 세 지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현이 포르투갈 본토에서 우선적인 행정구역 구분이지만, 또 다른 우선적인 기술적 구분이 있다. 이는 포르투갈 내 NUTS 2단계와 일치하는 지역협력개발위원회(Comissões de Coordenação e Desenvolvimento Regional)에 의해 만들어진 다섯 개의 큰 지방으로 구성된다. 이들의 경계는 자치단체의 경계를 따르지만 현의 경계는 따르지 않아 한 현이 한 개 이상의 지방에 걸치기도 한다.
NUTS 2단계 지방은 NUTS 3단계로 불리는 행정적 의미가 없는 통계적인 준지방으로 나뉜다. 이는 유사한 문제를 가진 인근 자치단체를 묶고 주로 경제계획에 대한 통합적인 자료를 얻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
도시권[편집]
현재 포르투갈에서 도입 과정에 있는 또 다른 종류의 행정구역 구분은 도시권을 포함하며, 이는 여러 자치단체를 묶어 구성된 연속적 영토 통합체로 정의된다. 이러한 도시권은 아래 두 종류로 나뉜다.
- 대광역도시권역 (Grandes Áreas Metropolitanas, GAM): 9개 이상의 자치단체로 구성된 인구 350만명 이상의 도시권
- 도시간 공동체 (Comunidades Intermunicipais, CIM): 3개 이상의 자치단체로 구성된 선거 유권자 인구가 만 명에서 10만 명 사이인 도시권
경제[편집]
포르투갈의 국내총생산(GDP)은 2019년 기준 약 3,450억 달러로 세계 52위에 해당한다. 1인당 GDP는 33,665달러로 세계 42위 정도에 해당해 선진국으로 분류할 수 있다. GDP 성장률이 2017년 3.5%와 2018년 2.4%, 2019년 1.9%로 점차 낮아지고 있지만, 이는 2011년 경제위기 이후 복구과정 때문이었다. 인플레이션 역시 1% 초반대를 유지하고 있어 안정적인 경제구조를 보이고 있다.
포르투갈이 선진국형 경제구조를 보이고 있지만 서유럽에서는 그리스 및 스페인과 더불어 가장 후진적인 국가이다. 2017년 총 부가가치 기준 산업생산은 농업 2.3%, 공업 22.4%, 서비스업 75.3%로 전형적인 선진국형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노동력 구성 비율은 각각 6.0%, 24.8%, 69.1%를 차지하고 있어 농업 부문에서 노동생산성이 낮음을 알 수 있다.
포르투갈은 대항해 시대에 대규모 선단을 구성해 잇달아 해외 식민지를 개척함으로써 세계제국으로 성장했다. 르네상스 무렵에는 경제적으로도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1822년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던 남미의 브라질을 잃었고, 이후 들어선 입헌군주정 체제는 1828년에서 34년까지 진행된 내전을 극복하지 못하고 1900년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추락했다. 게다가 1932년 취임한 독재자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지대(地代)와 이자에 의존하여 생활하는 상류계급의 이익을 위해 농업 중시 정책을 펼치면서 공업 투자는 억제되었다. 1953년에는 공업발전을 목표로 경제발전 6개년 계획을 수립했으나 큰 성과를 보지는 못했다. 1960년 EFTA에 가입한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경제 자유화에 따라 포르투갈의 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73년 중동에서 시작된 에너지 위기와 1974년 쿠데타로 인해 정정이 불안해짐에 따라 외국자본이 빠져나가고 산업의 국유화 등으로 경제발전 계획은 중단되고 다시 침체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1986년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할 때까지 포르투갈은 두 번에 걸쳐 IMF 구제금융을 지원받기도 했다.
1986년 EEC 가입을 전후로 사회주의적 경제구조가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시장경제)로 전환되면서 경제정책의 기본 틀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특히 EEC로부터 구조기금과 결속기금을 받으면서 경제 기간을 정비할 수 있었고, 유럽으로의 수출이 늘어남에 따라 2000년대 초반까지 경제성장은 계속되었다. EU 가입은 포르투갈 국민들의 경제 발전 심리를 자극하여 내수 증가, 생산의욕 고취 및 공급 증가라는 선순환을 낳아, 경제에 활력을 부여하였다. GDP 대비 총 고정자산은 그리스, 스페인, 아일랜드보다 높은 수준으로 증가하였다. 특히 1989년 국영기업의 민영화 및 통신산업에 민간자본이 참여하면서 1994년 이후 경기 회복이 가속화되었다. 수출, 투자 및 소득증대에 힘입어 1996∼1997년간 실질 성장률은 3∼3.5%로 EU(European Union:유럽연합) 국가 내 최고수준을 기록했다. 인플레이션(2006년 2.5%), 실업률(2006년 7.6%), 환율 역시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성장세가 이어졌다. 이에 따라 2000년 들어 1인당 GDP는 유럽 수준의 70%까지 접근했다.
안정적인 경제성장에 힘입어 포르투갈은 1999년 유로화를 도입할 수 있었다. 2008~2009년 포르투갈의 국제경쟁력은 전체 134개 국가 중 43위에 이르고, 2005년 삶의 질 또한 세계 19위에 이를 정도로 안정적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하지만 포르투갈 경제는 2007~2009년 사이에 발생한 국제 금융위기에 직격탄을 맞았다. 미국에서 시작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급기야 유럽의 국가부채 위기를 가져왔고, 위기는 구조적으로 취약한 포르투갈을 강타했다. 포르투갈 경제는 EU 가입 이후 급속하게 성장했지만 엄청난 국가 부채와 과도한 공공서비스라는 구조적 문제를 낳았다.
2010년 무디스(Moody’s)가 포르투갈의 국채 평가 등급을 낮추자 포르투갈 정부의 국채 이자율이 높아져 국가 부도의 위기에 내몰렸다. 급기야 정부는 2011년 중반 IMF와 EU에 780억 유로에 이르는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구제금융을 받게 되면서 포르투갈 정부는 그동안 유지해 왔던 공공서비스 등에서 정부의 과도한 지출을 더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실업률이 높아져 2013년에 16.2%에 육박하게 되었다. 경제성장률 또한 마이너스 4%까지 떨어졌다. 이후 3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포르투갈 경제는 2014년 5월 구제금융 프로그램 종료와 함께 점진적 회복세를 보였다. 실업률 또한 2015년 12.4%로 좋아지더니 2018년에는 7%로 낮아졌다. 포르투갈은 구제금융 프로그램 종료 후 민간소비 확대, 사회복지망 확충, 공공부문 지출 확대뿐만 아니라 외국자본의 투자를 활성화하는 등 경기부양 정책을 통해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농업[편집]
포르투갈의 총 부가가치 생산에서 농업 및 수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7년 말 기준으로 약 2.3%였다. 하지만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 비율은 약 6%로 주변 유럽연합 회원국들에 비해서 약간 높은 편이다. 1990년에는 전체 인구의 17.8%가 농업 및 수산업에 종사할 정도로 산업국가라기보다는 농업국가의 형태를 띠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도 생산에서 농업 및 수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국내총생산(GDP)의 6.2%에 불과하였다.
농업의 형태는 지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타호강 남쪽, 특히 알렌테주 지방에서는 대토지 소유제가 발달하였다. 반면 타호강 북쪽, 특히 미뉴 지방에서는 소(小)농지 소유자가 많다. 따라서 남부의 대경영에 비해 북부에서는 가족노동에 의한 소규모 영농가가 많으며 낙농이 수반되는 집약적 경영 형태도 보인다.
전 국토의 7.9% 정도를 차지하는 농지에서는 올리브, 포도, 밀, 옥수수, 쌀 등이 생산된다. 특히 포도 재배는 포르투갈 농업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포르투갈은 세계 제11위 테이블 와인 생산국으로 포도주의 품질 유지 및 출처 확인을 위해 40개의 공식 포도원(demarcated regions)을 지정하였다. 포르투갈 와인으로는 포르투(Porto) 와인과 마데이라(Madeira) 와인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포르투갈은 세계 최초로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한 전용 포도원(demarcated wine region)을 개발하였다.
수산업도 중요한 산업인데 1인당 생산, 소비량도 많고, 통조림은 주요 수출품에 속한다. 삼림자원으로는 코르크 및 수지(樹脂)가 있으며 특히 코르크 생산량은 세계적이다.
공업[편집]
농업 중심 사회였던 포르투갈은 1953년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통해 공업을 시작했고, 1961년 리스본 근처에 서독·벨기에의 자본이 참가하는 최초의 근대적 제철소를 건설하면서 본격적으로 공업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이 시기에 뚜렷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고 특히 중공업보다는 식료품, 섬유 등 경공업 위주의 공업이 활발하였다. 게다가 1970년대 초반 에너지 위기로 인해 포르투갈의 공업발전도 타격을 받았다. 1974년 이후에는 전체 생산능력의 약 60%에 해당하는 주요 기간산업이 국유화되어 공업발전에 장애 요인으로 작용했다.
포르투갈의 본격적인 공업발전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 이후부터였다. 민영화가 추진되고 수출이 활성화되면서 적극적으로 공업 발전을 시작할 수 있었다. 현재 포르투갈의 주요 공업은 기계, 전자, 자동차, 조선, 플라스틱, 세라믹, 텍스타일, 가죽, 정유, 석유화학, 시멘트 산업 등이다.
광업은 중석의 매장량이 풍부하며 세계적인 베트몬테 중석광산이 있다. 그밖에 석탄·철·주석이 약간씩 산출된다. 또한 세계 제5위의 자연석 생산국으로 대리석·화강암·석회석·편암 등이 생산되며, 이들 생산량은 세계생산량의 4.3%를 점유하고 있다. 최근 섬유공업에도 특화하여 유럽 내 제2위, 전 세계 제9위의 가죽신발 생산국이 되었으며 생산량의 90%를 주로 유럽시장에 수출하고 있다.
서비스업[편집]
포르투갈은 유럽 내 여타 국가에 비해 비교적 좋은 기후, 전국적으로 고르게 분포하고 있는 해변 및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어 관광산업이 발달해 있다. 2018년 기준 포르투갈을 방문한 외국인은 총 1,280만 명으로 영국과 스페인에서는 2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방문하고, 독일과 프랑스 등에서도 해마다 100만 명 이상이 찾고 있어 유럽 관광객이 80% 이상을 차지한다.
2018년 기준 포르투갈의 관광업 성장률은 8.1%로 유럽연합(EU) 국가에서도 높은 편이다. 관광업 종사자 또한 전체 일자리의 약 21.8%를 차지하면서 약 384억 유로의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교통[편집]
포르투갈은 경제적 개발이 부진하여 육상교통로는 거의 발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 이후 EEC로부터 구조기금과 결속기금을 받아 많은 도로와 철도를 개설하면서 도로 상황이 매우 좋아졌다.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m)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7~2018년 포르투갈의 도로 경쟁력은 세계 8위, 철도 31위, 항만 25위, 항공 29위에 랭크되어 있어 국제적으로 상댕한 수준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도로 총연장은 78,732 km이고, 이 중 고속도로는 44개 노선을 가지고 약 3,000km에 이른다. 철도는 모두 국영으로 약 2,603 km의 광궤와 183 km의 협궤를 가지고 있다.
주요 항구 리스본과 마투시뉴스(레이송이스, 포르투의 외항) 등을 중심으로 하여 일찍부터 항만이 정비되고 해운이 발달하였다. 공항은 총 66개가 있고 국제공항은 리스본, 포르투, 파로, 베자 등 4개가 있다. 리스본은 유럽, 남북아메리카,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국제항공로의 거점이며, 탑포르투갈(TAP)이 국내·국제선을 운항하고 있다.
무역[편집]
포르투갈은 지속적인 무역수지 적자국으로 2010년대 이후 무역수지 적자는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 2013년 기준으로 수출이 473억 유로였고 수입은 570억 유로로 약 97억 유로의 적자가 발생했다. 2018년에는 수출이 579억 유로였고 수입은 750억 유로로 약 171억 유로의 적자가 발생했다. 무역구조를 보면 섬유·의료, 기계·전기, 수송기기 등을 주로 수출하고, 기계·전기, 수송기기, 화학제품 등을 수입한다.
주요 수출 상대국은 스페인,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앙골라 등이다. 주요 수입 상대국은 스페인,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중국, 벨기에, 영국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수출과 수입에서 유럽연합 국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약 80% 정도로 압도적으로 높다. 이는 유럽연합의 경제상황이 포르투갈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사회[편집]
인구[편집]
2021년 기준 포르투갈의 인구는 10,343,066명이며, 이 중 52.4%가 여성이고 47.6%가 남성으로 추정된다. 2022년 평균 기대수명은 82.47세로 나타났다. 비슷한 인구 규모의 국가로 벨기에(1,113만명), 스웨덴(955만명), 그리스(1,078만 명), 헝가리(995만 명), 체코(1,053만 명) 등이 있다. 면적은 대한민국보다 약간 작은데, 대한민국에서 전라북도를 뺀 면적과 거의 똑같으며 인구는 대한민국 인구의 약 1/5 정도이다. 이는 서울과 제주도의 인구를 합한 것과 거의 똑같으며 영남권에서 경북의 인구를 뺀 것과도 거의 똑같다.
포르투갈은 상당히 변동이 심한 인구 변화를 보였던 국가다. 유엔에 따르면 포르투갈의 인구는 1950년 841만 명, 1970년 865만 명, 1990년 989만 명, 2010년 1059만 명까지 증가했으며, 2015년에는 1036만 명으로 소폭 감소했다. 연간 평균 인구 성장률은 1950-1955년 0.5%, 1965-1970년 -0.5, 2005-2010년 0.2%, 2010-2015년 -0.4%로 둔화되었으며, 세계적으로 볼 때 낮은 편이다. 연균 평균 1세 미만 신생아 1000명당 사망률은 1950-1955년 92명에서 2015-2020년 3명까지 떨어졌으며, 출생시 기대수명은 1950-1955년 60.3세에서 2015-2020년 81.8세로 계속 증가하고 있다.
포르투갈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저출산, 기대수명의 증가 등으로 고령화가 많이 진행되었으며, 65세 이상 노인 비율은 1950년 7.0%에서 계속 증가해 2019년 22.4%에 달한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구유지가 가능한 대체출산율 2.1을 밑돌아 현재까지 저출산 국가로 분류된다.
2018년 포르투갈 의회는 2007~2008년 금융위기 때 떠난 사람들을 다시 끌어들이기 위해 귀국 이민자들에 대한 세금 감면을 포함하는 2019년 예산안을 승인했다. 2019년 확장 예산은 의회에서 좌파 다수당의 지지를 받아 가계 구매력을 높이는 동시에 이미 낮은 적자를 더욱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귀국하는 이민자들은 최소 3년 이상 해외에 거주했다면 5년 동안 과세 소득의 절반만 신고할 수 있다. "반환 프로그램"은 2년 동안 운영될 것이다.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약 50만 명의 주민들이 대공황 이후 포르투갈을 떠났다. 그 이후로 약 35만 명이 돌아왔지만, 이 계획은 더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도록 장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포르투갈은 귀국 후 자국에 투자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포르투갈 이민자들에 대한 신용 한도를 승인했다. 게다가, 2019년과 2020년에 돌아오는 이민자들은 포르투갈이 저출산과 고령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포르투갈 원주민들을 다시 불러오고 인구를 활성화하고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부양책의 일환으로 세금이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통계청의 예측에 따르면, 포르투갈의 인구는 현재 1030만 명에서 2080년까지 770만 명으로 감소할 것이고 인구는 계속해서 노령화될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언어[편집]
포르투갈의 공용어는 1290년 국왕 동 디니스의 선포에 따라 채택된 포르투갈어다. 포르투갈어는 2억 1천만 명의 모국어 사용자가 있으며, 세계에서 5번째, 서양에서 3번째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이다. 포르투갈, 브라질, 앙골라, 카보베르데,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상투메 프린시페의 공용어이며, 동티모르, 마카오, 적도 기니에서도 다른 언어와 함께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으며, 옛 포르투갈령 인도 (고아 주, 다만 디우, 다드라 나가르하벨리)에서도 사용되며, 유럽 연합, 남아메리카 국가 연합 (UNASUL), 메르코수르, 아프리카 연합에서 공용어 지위를 갖는다.
또한 포르투갈어 수화 역시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보호되며, 아스투리아스레온어에서 유래한 미란다어는 미란다두도루에서 공식적으로 보호되며, 미란다두도루와 비미오주 일부에서 제2 선택 언어로 학교에서 가르친다. 그러나 본 언어의 사용은 상당히 제한적이어서, 사용자 공동체에 언어적 권리를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는 행동이 진행되고 있다.
포르투갈어는 카스티야어, 카탈루냐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루마니아어, 스위스 로망슈어 등과 함께 로망스어로, 이베리아로망스어 집단에 속한다.
포르투갈어는 우스 루지아다스의 작가 루이스 드 카몽이스의 이름을 따 "카몽이스의 언어", 올라부 빌락의 소네트 "Língua Portuguesa"에서 사용된 표현인 "라티움의 마지막 꽃" 또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사용한 표현인 "달콤한 언어"로도 알려져 있다.
민족 구성[편집]
포르투갈은 인구의 95% 이상이 포르투갈인으로 유럽의 이웃 국가들에 비해서 비교적 단일한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형적인 남부 유럽인의 모습을 띄고 있는 포르투갈인들은 켈트족과 이베리아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과거 아랍인들의 지배 영향으로 아랍인의 피가 섞여 갈색 피부와 검은색 혹은 갈색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이동해 온 게르만족의 영향을 받아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포르투갈이 중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 구성이 복잡하지 않은 이유는 식민지에서 본토로 이주해 온 식민지 주민이 적었기 때문이다. 현재 아프리카에서 이주해 온 흑인 포르투갈인은 10만 명이 넘지 않는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노동인구의 부족으로 포르투갈은 많은 이민자를 받아들였다. 이들은 주로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동유럽 국가들 출신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브라질, 중국, 인도 이민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종교[편집]
포르투갈의 헌법은 완전한 종교의 자유와 종교간 평등을 보장하지만, 사회생활의 여러 측면에서, 가톨릭 교회에 특혜를 주는 협약이 존재하며, 건물 준공식 또는 국가의 공식 행사와 같은 일부 공공 공식 행사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표가 참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선출된 정치인의 종교적 태도는 유권자에게 무관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최근의 두 대통령인 마리우 소아르스와 조르즈 삼파이우는 잘 알려진 세속주의자였다.
202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포르투갈 인구의 80.2%가 로마 가톨릭 신자로 나타났다. 포르투갈에는 작은 개신교, 후기 성도, 이슬람교, 힌두교, 시크교, 동방 정교회, 여호와의 증인, 바하이, 불교, 유대교, 심령술사 커뮤니티 등 커뮤니티가 있다. 인구의 약 14.1%는 자신이 무종교라고 선언했다.
교육[편집]
포르투갈은 1960년부터 의무교육(초등 6년)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현재의 교육체계는 유치원(6세 이하), 초등교육(9년), 중등(3년), 고등교육(대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초등과 중등교육은 의무교육이다. 포르투갈 교육의 문제점은 중등교육에 해당하는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중퇴율이 30% 이상으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는 점이다. 따라서 성인 문자 해독률은 99.4%로 비교적 높은 편이지만 유럽연합 회원국에 비해서 성인교육 수준이 낮은 편이다. 2018년 25~64세 국민 중 대학교육 이수율은 24.6%에 불과하다. 포르투갈은 2005년 학생들의 수학 성적 향상을 위한 대책을 마련해 실시했는데 2016년 국제학생평가프로그램(PISA)에 따르면 포르투갈 학생들의 수학과 과학 성적이 괄목하게 높아졌다.
포르투갈 대학은 1290년부터 존재해 왔다. 가장 오래된 포르투갈 대학은 코임브라로 옮기기 전에 리스본에 처음 설립되었다.역사적으로 포르투갈 제국의 범위 내에서 포르투갈인들은 1792년 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공학 학교(리오 데 자네이루의 포르티파상 에 데센호)와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의과 대학(에스코라 메디코 시루기카)을 1842년에에 설립했다.현재 포르투갈에서 가장 큰 대학은 리스본 대학이다.
주요 도시[편집]
인구 약 50만 명, 광역인구 300만 명의 리스본은 12세기 이후 포르투갈의 수도로, 포르투갈 최대 도시이자 경제 거점이며, 포르투갈 제1의 항구와 공항을 보유하고, 유럽연합 평균을 넘는 1인당 GDP로 포르투갈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이다. 다른 주요 도시로는 인구 24만, 광역인구 150만의 제2의 도시 및 경제 거점인 포르투와 "포르투갈의 베네치아"라 때때로 일컬어 지는 아베이루, "대주교의 도시" 브라가, 천 년의 역사를 가진 샤베스,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를 가진 코임브라, "요람의 도시" 기마랑이스, "박물관의 도시" 에보라, 세 번째로 큰 항구를 가진 세투발, 세 번째로 큰 크루즈항과 알가르브 인터내셔널 서킷(포르투갈어: Autódromo Internacional do Algarve, AIA)이 위치한 포르티망, 파루, 비제우 등이 있다. 리스본 대도시권에는 신트라 자치단체에 속한 아구알바카셍, 켈루스를 비롯해 아마도라, 알마다, 아모라, 세이샬, 바헤이루, 몬티주, 오디벨라스 같은 높은 인구 밀도를 가진 도시들이 있다. 포르투 대도시권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자치단체로는 빌라노바드가이아, 마이아, 마토지뉴스, 곤도마르 등이 있다. 마데이라 자치 지방의 주요 도시는 푼샬이다. 아소르스 자치 지방의 주요 도시는 상미겔섬의 폰타델가다, 테르세이라섬의 앙그라두에로이즈무, 파이알섬의 오르타 등 세 곳 이 있다.
문화[편집]
포르투갈은 문화, 언어 등 모든면에서 스페인과 매우 비슷하지만 좀 더 차분하고 서정적이고 덜 격정적이란 이미지가 있다. 그리고 갈리시아도 포르투갈과 문화적으로 매우 가깝다. 스테레오타입은 스테레오타입 뿐이고, 현지인들은 달가워하지 않지만 사실 외부인의 관점으로 보면 큰 역사적 흐름이나, 문화적 경향이나 '좀 차분한 스페인'이란 이미지가 딱히 틀리다고도 보기 힘들다.
다만 다른 면에서 큰 문화 사회적 궤적은 스페인과 비슷한 면이 많은건 사실이지만 실질적으로 근본은 다민족국가고, 지방간 통합 과정도 늦었고 더디었으며 지금도 사실 '지역감정'이란 단어 자체가 적절하지 않을만큼 민족간 갈등이 심한 스페인과 달리 포르투갈은 비교적 작은 나라지만 포르투갈 안에서는 비교적 안정적이고 일찍 중앙 집권 국가와 통합된 민족 정체성을 이룩했다. 카스티야, 카탈루냐, 바스크, 아스투리아스, 레온, 갈리시아, 안달루시아, 전부 자기네 지방이 얼마나 훌륭하고 독자적인 문화와 근본을 자랑하며 떠들기 좋아하고, 일부 지방에선 아예 본격적인 정치적 분리주의로까지 퍼지는 스페인과는 달리 포르투갈은 남북간 경제적 격차에 따른 미묘한 갈등 의식 빼곤 지역갈등이나 독자의식이 그렇게 강하진 않다.
애초에 나라가 작고 어느 지방에 뭐가 발달했는지도 뻔한지라 옛날부터 포르투갈 내에선 출신지가 어디든간에 공부하고 싶으면 코임브라, 정치하고 싶으면 리스본, 장사하고 싶으면 포르투로 가야하는 건 마찬가지여서 포르투갈 자국 내 통합은 스페인과는 비교 자체를 거부하고, 오히려 프랑스나 잉글랜드처럼 유럽 전체 기준으로 봐도 일찍 이루어진 편에 속한다. 당장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 이건 뭐 어디서 튀어 나왔는지 알지도 모를 바스크어 같은 독자 민족어를 제외하고 카스티야어 안에서만 봐도 사투리간 차이가 크고, 안달루시아란 한 지역 안에서만 해도 세비야 일대 저 안달루시아와 말라가 일대 고 안달루시아간 방언 차이가 큰 스페인과는 대조적으로 포르투갈 안에서는 지역간 방언도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포르투갈은 작은 나라지만 적어도 자국 안에선 상당히 일찍부터 안정적으로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는 점은 지금까지도 통합된 국민 국가 정체성 형성이 요원해 보이고 나라 안에선 지역간 차이가 일상적으로 크게 체감할 수 있는 스페인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문학[편집]
포르투갈은 문학에 있어서도 선도적인 위치에 서 있다. 특히 18세기 폼발의 대학개혁 이후 만들어진 왕립 과학아카데미가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20세기에는 포르투갈 최고의 시인으로 불리는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가 문예 부흥을 이끌었다. 1998년에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포르투갈어권 최초로 주제 사라마구가 선정되기도 했다. 《눈먼 자들의 도시(Ensaio sobre a Cegueira)》로 유명한 사라마구는 1947년 첫 소설인 《죄의 나라(Terra do Pecado)》를 발표하였고, 1982년에는 《발다사르와 블리문다(Memorial do Convento)》를 발표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한편 아말리아 호드리게스는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민요인 파두의 여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음악[편집]
음악으로는 파두가 있다. 가장 잘 알려진 포르투갈 음악은 16세기의 선원들의 갈망을 노래한 우수와 향수가 깊이 서린 파두(fado)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리스본에서 듣는 파두는 상업화되어 있고 비싼 곳에서 공연되고 있다. 아멜리아 호드리그스(Amélia Rodrigues)는 최고의 파도 여가수로 포르투갈 레코드 가게 어디서나 음반을 살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안타깝게도 포르투갈의 젊은 층은 우울하기 그지없는 파두 대신 팝이나 헤비메탈, 재즈 등을 들어 젊은 층으로 갈수록 파두를 듣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래도 파두의 인기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지 포르투갈어 음악 자체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포르투갈과 인구과 비슷한 체코, 헝가리, 벨기에, 스위스 등만 봐도 자국어 음악 대신 영미팝이 도배되는 것이 현실이지만 포르투갈은 전세계에서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내수시장이 상당해서 인구 1000만 밖에 안되는 소국이지만 다양한 장르의 포르투갈어 음악을 발매하고 있으며, 같은 포르투갈어권인 브라질, 앙골라 등 음악도 상당히 인기가 많은 편. 근데 파두의 국가여서 그런지 포르투갈어 대중음악 조차도 대체적으로 잔잔한 발라드 장르가 좀 많은 것 같다.
요리[편집]
포르투갈 요리 역시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생소한 편이다. 바다를 접하고 있는 지역이 많은 만큼 해산물 요리가 발달되어 있으며, 현지인에게 포르투갈에서 먹어봐야 할 것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흔히 사르디냐(sardinha 정어리), 바칼랴우(bacalhau 대구, 특히 염장한 것을 주로 의미하며, 생대구는 fresco를 뒤에 덧붙인다.) 그리고 파스텔 드나타(pastel de nata 에그타르트)가 언급된다. 이중 에그타르트는 한국과 다르게 밖은 바삭하면서 안이 촉촉하고 달다. 고기찜 요리인 코지두 아 포르투게자(Cozido à portuguesa)도 대중적인 요리에 속한다.
건축[편집]
포르투갈에는 다양한 건축 양식이 혼재해 있다. 로마시대의 건축물로는 남부도시 에보라(Évora)에 위치한 에보라 신전이 잘 보존되어 남아있고, 서고트 시대의 건축물로 북부도시 라메구(Lamego)에 있는 성 페드루 드 발 발스마웅(São Pedro de Balsemão) 성당과 북서부 도시 브라가(Braga)에 있은 성 푸르투오주 드 몽텔리우스(São Frutuoso de Montélios) 교회가 남아있다. 포르투갈 중부 지역에는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코임브라 구 대성당(Sé Velha de Coimbra)과 고딕 양식의 바딸랴 수도원(Mosteiro da Batalha)이 보존되어 있다.
포르투갈의 대항해 시대의 대표적 건축양식인 마누엘 양식(Manueline)의 건출물로는 리스본의 제로니모스 수도원(Mosteiro dos Jerónimos) 등이 대표적이다. 융성했던 18세기 포르투갈을 상징하는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도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외에 리스본에 위치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성 벤투궁전(São Bento Palace) 및 아주다 궁전(Palácio da Ajuda) 등이 있다. 이밖에 아줄레주라 불리는 타일, 보석 세공, 가구, 도자기 등 장식예술 역시 발달해 있다.
영화[편집]
최고령 영화 감독으로 유명했던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를 비롯해 1960년대 포르투갈 뉴웨이브 시네마가 유명했다. 1990년대부터는 페드로 코스타라는 감독이 등장해 주목받고 있기도 하고, 히타 아세베두 고메스, 미겔 고미쉬, 테레사 빌라베르데 등의 현대 감독들이 주목받고 있다.
인구가 작아서인지 산업 자체는 큰 편은 아니라고 한다. 포르투갈 현지 영화인들에 따르면 주로 예술 영화 위주로 돌아간다고 한다.
축구[편집]
여타 유럽 국가들처럼 포르투갈 역시 축구가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로 자리잡고 있다. 덕분에 인구가 1,000만 수준이지만 축구 경기장 규모는 3~6만석 수준으로 엄청난 수준을 자랑한다. 이러한 인프라를 갖춘 자국 리그인 포르투갈 프리메이라 리가는 유럽 리그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리그로 리그의 대표적인 팀 벤피카와 FC 포르투는 챔피언스 리그 우승 경험이 있는 유럽의 명문팀들이며, 2010-11 시즌에는 모처럼 유로파 리그에 4강에 3팀이나 진출했고, 덕분에 결승전에서 포르투갈 팀끼리 맞붙게 되기도 했었다. 2011-12 시즌에는 벤피카가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에서 맨유를 제치며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해 8강까지, 스포르팅이 유로파리그 4강까지 진출했으며 2012-13 시즌에는 포르투가 챔피언스리그 16강, 벤피카가 유로파리그에서 준우승하며 여전히 무시못할 위력을 보여줬다.
이러한 탄탄한 자국 리그를 바탕으로 자국 축구 국가대표팀 또한 유럽의 강호 중 하나로 통한다. 과거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득점왕이자 1965년 발롱도르 수상자인 전설적인 선수 에우제비우와 함께 전성기를 맞은 바 있으며, 이후 30년 가까이 동안은 한동안 쉬어가다가 21세기 들어서는 루이스 피구를 위시한 황금 세대의 등장으로 다시 세계적인 전력을 갖춘 팀으로 발돋움하게 됐다. 이후 현재는 당연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10년 넘게 주장 완장을 차고 팀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실력과는 대조적으로 우승 운은 지독하게 없었던 팀이었다. 그랬던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이 마침내 2016년, UEFA 유로 2016에서 우승하며 사상 첫 메이저대회 트로피를 따냈다. 페페와 데쿠의 사례와 같이 과거 식민지였던 브라질에서 뛰어난 실력의 이중국적의 선수를 귀화시키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문서 참조.
이탈리아 못지 않게 명감독 배출을 잘 한다. 대표적으로 주제 무리뉴, 레오나르두 자르딤,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페르난두 산투스, 파울루 소자, 카를로스 케이로스, 누누 산투, 마르코 실바, 파울루 벤투 등이 있다.
이 외에도 포르투갈 축구는 한국과도 인연이 있는데 이 나라 출신의 또 다른 전설적인 축구인인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기도 했었으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세 번째 월드컵 16강 진출을 이끈 파울루 벤투 감독 또한 이 나라 사람이다. 그리고 현 한국 대표팀 주장인 손흥민의 소속팀인 토트넘의 감독 주제 무리뉴와 그의 후임 감독인 누누 산투, 손흥민 못지 않은 대표팀 에이스 황의조의 전 소속팀 FC 지롱댕 드 보르도의 감독 파울루 소자, 한국의 대형 센터백인 김민재가 뛰었던 페네르바흐체 SK의 감독인 비토르 페레이라, 과거 그 무리뉴 사단 코치이자 2019년~2020년까지 전북 현대 모터스를 이끌었던 주제 모라이스, 과거 FC 서울을 1년간 맡아 K리그1을 우승시킨 바 있는 넬루 빙가다 모두 포르투갈인이다.
한국 대표팀과는 2002년 한일 월드컵 D조와 2022년 카타르 월드컵 H조에서 각각 맞붙었고, 두번 다 한국이 이겼다. 2002년에는 포르투갈이 미국에도 져서 16강에 진출하지 못했으나 2022년에는 포르투갈과 대한민국이 16강에 진출했다.
포르투갈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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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 〈포르투갈〉, 《나무위키》
- "A Portuguesa", 《나무위키》
- 〈포르투갈/경제〉, 《나무위키》
- 〈포르투갈〉, 《위키백과》
- 〈포르투갈의 국장〉, 《위키백과》
- "Portugal", Wikipedia
- 〈포르투갈-Portugal〉, 《요다위키》
- 〈포르투갈〉, 《두산백과》
- 〈포르투갈/역사〉, 《나무위키》
- 〈포르투갈의 기원과 초창기〉, 《두산백과》
- 〈포르투갈의 항로 개척과 해외 진출〉, 《두산백과》
- 〈열강의 포르투갈 침공과 재건〉, 《두산백과》
- 〈포르투갈 공화국의 탄생과 독재 정권 출현〉, 《두산백과》
-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과 이후〉, 《두산백과》
- 〈포르투갈/행정 구역〉, 《나무위키》
- 〈포르투갈의 대한관계〉, 《두산백과》
- 〈포르투갈의 입법〉, 《두산백과》
- 〈포르투갈의 정부〉, 《두산백과》
- 〈포르투갈의 의회와 정당〉, 《두산백과》
- 〈포르투갈의 행정〉, 《두산백과》
- 〈포르투갈의 사법부〉, 《두산백과》
- 〈포르투갈의 국방〉, 《두산백과》
- 〈포르투갈의 인구〉, 《위키백과》
- 〈포르투갈의 교육〉, 《두산백과》
- 〈포르투갈의 민족 구성〉, 《두산백과》
- 〈포르투갈의 경제〉, 《두산백과》
- 〈포르투갈의 농업〉, 《두산백과》
- 〈포르투갈의 공업〉, 《두산백과》
- 〈포르투갈의 서비스업〉, 《두산백과》
- 〈포르투갈의 교통〉, 《두산백과》
- 〈포르투갈의 무역〉, 《두산백과》
- 〈포르투갈/문화〉, 《나무위키》
- 〈포르투갈의 건축〉, 《두산백과》
- 〈포르투갈의 문학〉, 《두산백과》
같이 보기[편집]
- 리스본
- 스페인
- 남유럽
- 서유럽
- 지중해
- 대서양
- 브라질
- 포르투갈어
- 마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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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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