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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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Türkiye, 영어: Turkey, Turkiye)는 서아시아의 아나톨리아 반도에 위치한 국가이다. 원래 국명을 터키(Turkey)로 부르다가 2022년 6월 24일부터 튀르키예로 공식 변경되었다. 튀르키예의 수도는 앙카라이며, 가장 큰 도시는 이스탄불이다. 튀르키예는 이스탄불의 동쪽은 서아시아에 속하지만, 이스탄불의 서쪽 영토가 유럽에 속하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동유럽 또는 남유럽에 속하는 국가로 분류되기도 한다. 튀르키예는 튀르크족에 속하며,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여러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중국의 신장위구르자치구(=동튀르키스탄), 몽골 등과 함께 '범 튀르크계 민족'에 속한다.
1923년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 600년 이상 지속된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건설하면서 근대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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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튀르키예는 서아시아의 아나톨리아와 유럽 남동부 발칸반도의 동트라키아에 걸친 국가이다. 동쪽으로 이란·아르메니아·조지아(그루지야), 남쪽으로 이라크·시리아, 북서쪽으로 불가리아·그리스와 국경을 접하고, 북쪽으로 흑해, 남쪽으로 지중해, 서쪽으로 에게해(海)·마르마라해에 면한다. 소아시아(아나톨리아) 반도 전부와 보스포루스해협·다르다넬스해협·마르마라해를 사이에 두고 유럽의 발칸반도, 동(東)트라키아 지방에 걸쳐 있다. GDP 18위, 국방비 순위는 16위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관문으로 역사적으로 동방과 서방의 문화를 연결하는 교차로 역할을 해왔지만, 동과 서의 관문이라는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외세의 침략이 많았다. 오늘날 튀르키예인들의 선조격인 셀주크 튀르크족이 이곳에 들어온 것은 11세기경이었다. 13세기 후반부터는 오스만 왕조가 지역을 통일해 남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1923년 오스만 왕국이 무너지고 튀르키예공화국으로 재탄생했다. 사이프러스 문제로 그리스와 사이가 좋지 못하며, 동남부 지역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쿠르드족을 차별하면서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으로 외교, 안보에 있어서 서방 진영에 속해 있다.
튀르키예는 UN의 창립 회원국이고, NATO의 일원이자 IMF, 세계은행의 멤버이자 OECD, OSCE, BSEC, OIC, G20의 가입국이다. 또한 튀르키예는 1950년에 유럽 평의회에 참여하였고, 1963년에는 EEC에도 일부나마 참여하였으며 1995년에는 EU 관세동맹에도 참가하였다. 2005년부터는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2019년 3월 13일, 유럽 의회는 다만 튀르키예의 가입 협상을 중지하기로 의결하였으나,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고 있다. 튀르키예의 경제적, 외교적 힘은 지역 강국의 위상을 가져다 주었고, 여러 국제기구는 튀르키예를 신흥개발국으로 분류하고 있다. 튀르키예는 세속적, 단일 의회 공화국이며 2017년의 국민투표로 대통령제를 도입하였다. 현재의 행정부는 정의개발당의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끌고 있으며, 그는 현재 케말주의와 언론의 자유와 같은 세속적 가치들을 약화시키고 있으며 이슬람교의 영향력을 국내외로 넓히려 하고 있다. 공용어는 튀르키예어, 국교를 명시하지는 않고 있으나, 튀르키예 국민들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를 신봉한다.
국가 상징[편집]
국호[편집]
국호인 튀르키예(Türkiye)는 오스만어 튀르키예(تركیه / türkiye)가 어원이며 '튀르크인의 땅'을 뜻한다. 튀르키예인은 튀르클레르(Türkler), 튀르키예어는 튀르크체(Türkçe)라 한다. 튀르크라는 이름은 민족의 이름으로, 본래는 '용감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튀르크는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하층민을 주로 일컫는 말이었지만 돌궐 시절부터 사용했던 고유어 표현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터키(Turkey)라는 영어식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터키라는 이름은 '튀르크인의 땅'이라는 뜻의 중세 라틴어 투르키아(Turchia·Turquia)에서 비롯된 중세 프랑스어 튀르키(Turquie)를 받아들여 형성된 것이다. 이 튀르키라는 말이 영어로 들어온 후 철자가 Turkye를 거쳐 Turkey로 바뀌었고 동시에 발음 변화를 거쳐 /ˈtɜː(ɹ)ki/(터키)라는 말이 되었다.
한자 가차로는 토이기(土耳其), 토이고(土耳古) 등이 있다. 전자는 터키, 후자는 튀르크에서 유래한 명칭. 한국에서도 1970년대까지 터키 대신 토이기라는 이름을 쓴 바 있으며, 앙카라의 한국 공원 비문에도 남아있다. 중국어에서는 투얼치(土耳其) 등을 쓰며, 일본어에서는 포르투갈어 투르쿠(turco)에서 유래한 토루코(トルコ)를 쓴다.
- 2022년 국호 외국어 표기 변경
튀르키예인들은 영어로 '터키'라고 부르는 명칭을 좋아하지 않는다. 튀르키예인들도 영어 단어로 'Turkey'가 '칠면조'라는 뜻임을 알고 있고, 속어로는 '겁쟁이'라는 뜻으로 쓰인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작 '터키'의 유래가 된 '튀르크'는 튀르키예어로 '용감한 민족'이라는 정반대의 뜻이다. 또한 실제 칠면조도 겁쟁이가 아니라 사나운 성격이다.
2020년에 터키 수출업 총회(TİM)에서 'Turkiye'라는 표기를 표준화하기 위해 'Made in Turkiye'를 사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은 2022년 연초부터 자국의 영어 명칭을 'Turkey'에서 'Türkiye'로 변경하였고, 이에 따라 이 나라 정부기관들이나 이 나라산 물품들에서 'Türkiye'를 보게 되었다. 이어서 2022년 5월 31일 UN에 국호의 영어 표기를 움라우트 ü가 들어간 Türkiye로 정정해 달라는 내용의 요청을 보냈다. 6월 2일 UN은 이를 수용하여 공식 문서에서 국호를 'Türkiye'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일부에서는 "국호를 바꾸었다"고 오해하나, 사실 튀르키예어 국호는 그대로 두고 공식 영어 표기를 수정한 것이며 영어 단어 'Turkey'와 해당 어휘에서 유래한 인접 어휘를 모두 변경한 것도 아니고 'Republic of Türkiye'라는 명칭만 정정한 것으로 종래 '튀르키예의' 또는 '튀르키예인'으로 쓰이던 형용사 'Turkish' 등을 바꾸지는 않았다. 대외 명칭을 현지어식으로 바꾼 것이지 튀르키예어로는 원래부터 자국을 튀르키예라고 했다. 한국의 경우로 비유하면 본래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이라고 되어 있던 것을 '대한민국·Daehanminguk'이나 '대한민국·Republic of Daehan'으로 변경한 식이다.
UN에서 표기가 정정된 이후 대한민국 외교부는 "한국어 국호의 변경 요청이 있을 경우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후 6월 3일 튀르키예 정부가 외교 채널을 통해 한국 정부에 국명 표기를 변경해줄 것을 요구했으며, 외교부의 요청에 따라 6월 17일 국립국어원이 심의소위원회를 열고 기존의 '터키' 대신 '튀르키예'를 국호 표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이는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반영되었다. 6월 24일에는 외교부에서도 표기를 튀르키예로 바꾸었다. 이에 '주 터키 대한민국 대사관' 역시 '주튀르키예공화국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변경되었다. 외교부 홈페이지의 '국가/지역정보' 페이지도 튀르키예로 변경되었다. 사실 영어 표기가 Turkey에서 Türkiye로 바뀌었다고 '터키'라는 한국어 표기까지 튀르키예로 바꿀 의무나 필요성은 없긴 하다. 어떤 언어든 간에, 국가의 명칭 표기는 실제 그 국가에서 자칭하는 것과 다른 경우가 많다. 한국어의 경우 해당 국가와 교류를 튼 시점을 기준으로 호칭이 정해졌기 때문에 한자어 음차, 원어명과 영어명 표기가 뒤섞여 있다. 미국을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아메리카'(약칭 U.S.A.)라고 부르지 않으며, 일본을 '니혼(Nihon)'이라 부르지 않고, 중국을 '중궈(Zhōngguó)'라고 부르지 않듯이, 원래 자국어에서 정착된 명칭으로 부르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지아나 벨라루스의 사례처럼 한국 정부에서 타국의 공식 명칭 개정 요청이 있을 때, 이를 거절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편 현지어 표현을 중시하는 북한에서는 일찍이 문화어로 뛰르끼예라 불러 왔다.
국호의 명칭을 바꾸는 것은 인식과 비용, 시간 면에서 매우 어려운 일인데 결국에는 이렇게 국호를 대대적으로 변경을 요청하고 바꾸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실제로 세계 각국의 호응도 미적지근한데, 2022년 9월 오종진 한국외국어대학교 터키아제르바이잔어과 교수는 각국 전문가들과 이야기해본 결과, 튀르키예로 국명을 바꿔서 불러주는 나라는 튀르키예 자신들과 친터키 국가인 아제르바이잔을 제외하면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국호 변경이 에르도안의 민족주의 강화라는 정치적 목적이 깔려 있다는 점, 영어권 외 국가에서는 부정적인 의미가 없어 바꿀 필요를 못 느낀다는 점을 이유로 제시했다. 그와중에 2023년 1월 미국무부에서도 Türkiye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국기[편집]
튀르키예의 국기는 빨간 바탕에 흰 초승달과 별로 이루어져 있고, 아이일디즈 (튀르키예어: Ay Yıldız 월성기)라 부르며, 비율은 2:3이다. 초승달과 별은 이슬람교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의 군대가 비잔티움(현 이스탄불)의 성벽 밑을 뚫고 침입하려 했을 때 초승달 빛으로 이를 발견하여 나라를 구하였다는 전설을 그리고 있다. 그 밖에 1398년의 코소보 전투가 끝난 후 피바다 속에 나타난 신비로운 달과 별을 가리킨다는 등 여러 설이 있다. 기의 기본 형태는 술탄 셀림 3세가 지배하던 1793년경에 나타났고, 1844년에 별이 추가되었다. 이는 오스만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사용하였다.
현재의 국기 형태는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고, 터키 공화국이 건국된 이래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1936년 6월 5일 추인한 것이다.
국장[편집]
튀르키예는 현재 공식적인 국장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여권 표지에는 튀르키예의 국기에 그려져 있는 초승달과 별을 튀르키예를 상징하는 문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튀르키예 외교부, 튀르키예의 재외공관에서는 빨간색 타원 안에 하얀색 초승달과 별이 그려져 있으며 초승달 별 위에는 튀르키예의 공식 명칭인 "튀르키예 공화국"("Türkiye Cumhuriyeti")이 튀르키예어로 쓰여져 있는 형태의 디자인을 한 국장을 사용하고 있다.
1925년에는 튀르키예 국가교육부가 국장 공모전을 실시했다. 공모전에서 당선된 화가인 나므크 이스마일(Namık İsmail)이 디자인한 국장에는 돌궐을 지배했던 괴크뵈뤼족(Gökbörü) 신화에 등장하는 늑대인 아세나(Asena)가 그려져 있었다. 그렇지만 이 문장은 튀르키예의 국장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국가[편집]
튀르키예의 국가는 독립행진곡이다. 북키프로스의 국가이기도 하다.
메흐메트 아키프 에르소이(Mehmet Âkif Ersoy) 작사, 오스만 제키 윈괴르(Osman Zeki Üngör) 작곡했으며 1921년 튀르키예 대국민의회에서 만장일치 찬성으로 정식채택되었다. 1930년에는 곡이 수정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가사는 메흐메트 아키프 에르소이의 시에서 비롯되었으며, 본래 Kahraman ordumuza (영웅적인 우리 군대에게) 라는 부제가 붙어있었던 10연의 시 중 첫 두 연만을 부른다. 문자개혁 이전이라 오스만 제국 시절의 튀르키예어와 문자로 쓰여졌으며, 이 또한 하술한다.
지리[편집]
국토는 대체로 가로와 세로가 대략 3:1의 직사각형 모양이라고 볼 수 있다. 튀르키예 여행 가이드북에서는 거진 직사각형 모양이라고 소개한다. 한편 수도 앙카라는 약간 서북쪽으로 치우쳐지긴 했으나, 직사각형의 무게중심에 가깝다.
튀르키예는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는 나라이다. 아시아 쪽 튀르키예 영토(주로 아나톨리아로 구성)는 국토의 97%를 차지하며,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해, 다르다넬스 해협(흑해와 지중해를 이어준다.)을 끼고 있는 유럽 쪽 튀르키예 영토는 국토의 3%에 불과하다.
튀르키예의 영토는 길이로는 1,600 km, 폭 800 km에 이르며, 대체로 직사각형 모양이다. 호수를 포함한 튀르키예의 육지 면적은 783,562 제곱킬로미터이며, 아시아 대륙에 속하는 영토는 755,688 제곱킬로미터이고, 유럽 대륙에 속한 영토는 23,764 제곱킬로미터이다. 튀르키예는 세계에서 37번째로 넓은 나라이며, 프랑스 본토와 영국 영토를 합친 것과 맞먹는다. 이 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있는데, 서쪽에는 에게해, 북쪽에는 흑해, 남쪽에는 지중해가 있다. 또 북서쪽으로는 마르마라해가 있다.
튀르키예의 유럽 영토인 동트라키아는 그리스와 불가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아시아 쪽 영토인 아나톨리아(소아시아)는 중앙에 고원 지대와 좁은 해안 평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사이로 북쪽에는 쾨로을루산맥과 도우산맥(폰토스산맥)이, 남쪽에는 토로스산맥(타우루스산맥)이 뻗어 있다. 동부 튀르키예는 산악 지형이 더욱 발달되어 있으며,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아라스강 등 여러 강의 수원지이고, 반호와 튀르키예 최고봉 아라라트산(높이 5,165m)이 있다.
생각 외로 위도가 높다. 최대 도시 이스탄불은 북위 41°선이 통과하며, 수도 앙카라는 북위 40°선 바로 아래에 있다. 또한 가지안텝 지진이 났던 곳도 튀르키예 남동부 지방이지만, 위도상으로는 대한민국 수도권 남부와 같다.
튀르키예 초룸 도의 이스킬립(İskilip)이라는 마을은 지구상의 모든 육지의 기하학적 무게중심에 해당한다. 정확히는 지구를 완전한 구로 가정하고 육지의 두께가 모두 같다고 가정했을 때의 무게중심.
튀르키예는 7개의 인구 조사용 지역으로 나뉘는데 마르마라 지역, 에게해 지역, 흑해 지역, 중앙아나톨리아 지역, 동아나톨리아 지역, 동남아나톨리아 지역, 지중해 지역이 바로 그것이다. 흑해 해안을 따라 길게 이어진 북부 아나톨리아의 울퉁불퉁한 지형은 길고 좁은 띠 모양이다. 이 지역은 튀르키예 총 면적의 1/6을 이룬다. 일반적으로 아나톨리아 내륙 고원은 동쪽으로 갈수록 점점 지형이 험해진다.
지질과 지진[편집]
지질학상으로 아나톨리아판 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 아나톨리아판은 크게보면 유라시아판의 일부를 이룬다. 하지만 유라시아판 이외에도 아라비아판, 아프리카판 등과 접하고있고, 알프스-히말라야 지진대의 길목에 있어 지진이 매우 잦은 편이다.
튀르키예의 다양한 경관은 복잡한 지각 운동의 산물로, 오랜 세월동안 이 땅을 형성하였으며 상당히 잦은 지진과 이따금 일어나는 화산 분출은 지금도 일어나는 지각 운동의 좋은 증거이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은 오늘날의 흑해를 형성한 튀르키예의 단층선 때문에 생겨났다. 국토 북쪽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북아나톨리아 단층 때문에 규모 7 이상의 1939년 에르진잔 지진, 1944년 볼루-게레데 지진, 1999년 이즈미트 지진 등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튀르키예 동부에는 성층 화산인 아라라트산이 있다.
기후[편집]
지중해와 접하고 있는 튀르키예의 해안 지방은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를 보여 여름에는 고온 건조하고 겨울에는 한랭 습윤하고 온화한 기후를 보인다. 건조한 내륙 지역은 기후가 훨씬 혹독하다. 해안과 가까운 산맥 때문에 튀르키예 내륙은 계절차가 대단히 큰 대륙성 기후가 나타난다. 고원의 겨울은 특히나 춥다. 동부의 산악 지방에서는 기온이 영하 30도에서 40도까지 내려가기도 하며, 연중 120일간 지표에 눈이 남기도 한다. 서부의 겨울 기온은 평균 영하 1도이다.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기온은 보통 낮에 30도 이상이다. 연중 강수량은 평균 400mm로, 고도에 따라 차이가 있다. 가장 건조한 지역은 코니아 평야와 말라티아 평야로, 이 곳의 연중 강우량은 대개 300mm 이하이다. 가장 습윤한 달은 5월이며, 가장 건조한 달은 7월과 8월이다.
역사[편집]
고대[편집]
오늘날의 튀르키예가 위치한 아나톨리아(Anatolia) 반도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인간의 집단 거주지 중 하나이다. 신석기 시대부터 이곳에는 인도-유럽어족 일파인 아나톨리아인들이 살았다.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남부에서는 BC 7500년에서 BC 5700년 사이에 번성했던 차탈회워크(Çatalhöyük) 집단 거주지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 유적에서는 사람들이 곡물로 빵을 만들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또한 남동부의 괴베클리 테베(Göbekli Tepe)에서는 BC 10,000년경으로 추정되는 종교시설물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영국의 스톤헨지보다 7,0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이후 이 지역에는 하티인(Hattians)과 후리인(Hurrians)들이 들어와 살았다. 이들은 인도유럽인들이 아니었는데, BC 2,000~BC 1,700년 사이에 들어와 제국을 건설한 히타이트인들에 의해 흡수되었다. BC 1,200년 경에는 히타이트 제국이 같은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프뤼기아(Phrýgĭa)인들에게 밀려 사라지게 되었다. 이 시기는 에게해 연안에 위치한 히타이트 제국의 속국이었던 트로이와 그리스 연합군 간의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 트로이가 멸망한 때로, 이후 에게해 연안에는 많은 그리스 식민도시들이 건설되었다. 아나톨리아에는 리디아왕국이 들어섰다가 BC 6~ BC 5세기 경 페르시아 제국에 정복 당하였다. BC 499년에는 이들 그리스 식민도시들이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키면서 페르시아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페르시아 제국은 BC 33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정복되어 헬레니즘 시대로 접어들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아나톨리아 반도는 여러 왕국으로 분할되었다가, BC 1세기 중반 로마공화국에 점령되었다. 로마에 정복 당한 이후 아나톨리아에는 헬레니즘 문화와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유럽 문화로의 편입이 이루어졌다.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대제는 324년 수도를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에게해 연안의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콘스탄티노플'로 개칭하면서 ‘새로운 로마’라고 칭했다. 378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화 함에 따라 아나톨리아 반도 역시 기독교 세계가 되었다. 395년에는 로마제국이 서로마와 동로마로 분리되면서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동로마제국 시기[편집]
동로마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기반으로 성장하는 사이,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쪽 지역에서는 또 다른 거대한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5세기에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초래한 훈족(흉노족)의 일파인 돌궐족(튀르크족)으로 오늘날 튀르키예 민족의 조상이다. 7세기 초중반 당나라의 공격을 받고 셀주크 족장을 따라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쪽 흑해 연안과 페르시아 북부 지역에 머물게 되었다. 당시까지 페르시아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사산조 페르시아는 로마제국과의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신흥세력인 이슬람 세력과의 경쟁에서 밀려 이슬람제국(650~1037년)이 들어섰다. 튀르크족은 이 지역에 정주하며 살면서 점차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1037년 셀주크족은 튀르크족들을 규합해 왕국을 건설하고 1055년에는 바그다드를 공격해 이슬람 세계를 통일했다. 1063년에는 현재의 이란 및 이라크를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과 아나톨리아 반도의 반을 차지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어 1071년에는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해 황제를 포로로 잡고, 아나톨리아 반도 전체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셀주크 왕조는 유럽의 십자군 공격을 잘 막아냈으나, 12세기 말에는 제국에서 힘을 기른 튀르크계 맹주들에 의해 점차 국력이 쇠락해 현재의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그마저도 13세기에는 몽골의 침입으로 제국 전체가 약탈 당하며 멸망하였다.
이슬람 왕조 시기[편집]
셀주크 제국 내에서 힘을 기른 같은 튀르크계인 오스만튀르크는 몽고인들을 몰아내고 1297년 제국을 건설한 후 아나톨리아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이들은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까지 함락하면서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북아프리카에서 발칸반도를 포함한 동남부 유럽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하지만 16세기 중반 이후부터 쇠퇴하기 시작해 18세기부터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로부터 도전을 받았으며, 19세기 초에는 민족주의 열풍으로 발칸반도로부터 차례로 그리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이 독립하여 나가면서 국력이 점차 약해졌다. 1908년에는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으로 근대화가 시작되었으나, 혁명을 통해 집권한 엔베르 파샤 장군의 급진적 튀르크 민족주의 정책으로 인해 제국 내 이민족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민족주의는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은 그동안 밀레트(Millet)라는 제도를 통해서 세금을 바치는 이민족들에게 행정과 사법 등 자치권을 부여해 왔다. 따라서 그리스인, 루마니아인, 불가리아인, 아르메니아인들은 정교회 밀레트를 구성해 자체적으로 공동체를 통제했고, 유대인들은 유대 밀레트 내에서 자치권을 행사해 왔다. 하지만 1821년 그리스가 독립하면서부터 제국 내 이민족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커지기 시작했고, 이는 대대적인 이민족 청소로 이어졌다. 1894년과 1915년에 이루어진 아르메니아인 학살이 대표적이다. 1915년에만 약 800,000명에서 1,500,000명 정도가 학살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최후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전까지만 해도 제1차 세계대전의 양대 진영이었던 독일 및 영국과 어떤 적대적 관계도 만들지 않고 있었다. 특히 흑해 지역으로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군사적 지원을 해 줄 수 있는 영국과는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또한 군사고문단을 통해 독일과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1914년 8월 엔베르 파샤 장군의 주도로 독일과 비밀리에 동맹을 체결하고 동맹국에 합류하며 전쟁에 참여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오스만 제국은 1918년 10월 18일 승전국과 무드로스(Mudros)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정전협정의 결과 오스만 제국의 군대는 해산하였으며 철도, 항만, 천연자원 역시 연합국 측에 넘어갔다. 1920년 8월 연합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분할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조약문에 따르면 이즈미르와 동트라키아는 그리스에 할양될 예정이었다. 나머지 아나톨리아 반도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의해 분할되어 지배받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 역시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갔으며 에게해에서 흑해로 통하는 해협은 비무장지대로 연합국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북동부는 아르메니아에 할당될 예정이었다. 오스만 제국에게는 아나톨리아 반도 북부 흑해와 면한 일부 지역만 허용되었다.
튀르키예공화국 수립[편집]
세브르 조약의 이행은 그리스가 더 많은 영토 확장을 노리고 오스만 제국을 도발해 전쟁을 일으키고 튀르크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무산되었다. 자국의 영토가 외국의 지배 하에 놓이자 갈리폴리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전쟁 영웅 무스타파 케말 파샤(Mustafa Kemal Pasha)는 튀르키예민족운동(Türkiye National Movement)을 설립하고 앙카라에 임시정부를 세웠다. 그는 국민군을 조직해 튀르키예 독립을 선포하며 전쟁을 시작했다. 그는 1922년 8월 30일 사카리아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9월 18일까지 프랑스 및 아르메니아 군을 튀르키예 영토에서 몰아냈다. 이어 11월에는 술탄제도를 폐지하여 공식적으로 600여 년 이상을 이어온 오스만 제국을 종식시켰다. 임시정부는 연합국과 1923년 7월 24일 세브르 조약을 대체하는 로잔조약(Treaty of Lausanne)을 체결하고 국제적으로 튀르키예의 주권을 인정받았다. 이 조약으로 튀르키예는 아나톨리아 반도를 확보하고 다르다넬스와 보스포루스해협에 대한 국제관리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와 인구 교환을 통해 튀르키예에 거주하는 그리스인 100만 명이 그리스로 이주하고 그리스에 거주하는 튀르키예인 38만 명이 그리스를 떠나 튀르키예로 이주하게 되었다. 10월 29일에는 공식적으로 튀르키예공화국을 선포하였다.
튀르키예공화국 선포와 함께 무스타파 케말은 공화인민당(Republican People"s Party)을 창당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24년 새로운 공화국 헌법이 제정됨에 따라 칼리프 제도를 폐지하고 의회를 입법기관으로 하는 국민국가가 탄생했다. 무스타파 케말은 1928년 헌법 개정을 통해서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조항마저 폐지하고 일부다처제, 베일 착용 등 이슬람 전통 역시 폐지하며 튀르키예의 근대화를 위한 일련의 개혁정책을 통해서 튀르키예를 세속주의 국가로 만들었다. 1931년에는 공화국의 지도 원리로 공화·국가·민주·산업 국유·세속·개혁이라는 6개 원칙을 채택하고 1934년에는 여성의 참정권까지 인정하는 등 튀르키예를 근대국가로 변화시켰다. 한편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통해 철강, 섬유, 화학산업을 발전시켜 국가 주도의 자본주의 경제를 공고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변국가와 조약을 통해 국제적 지위를 회복하는 등 외교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튀르키예 의회는 그에게 '튀르키예인의 아버지'라는 의미를 가진 '아타튀르크(Atatürk)'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튀르키예는 중립을 지켰다. 하지만 전쟁 막바지인 1945년 2월 연합국 측에 가담하면서 승전국이 되었고 국제연합(UN)도 가입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튀르키예는 정당 결성의 자유를 허용해 공화인민당 1당 독재를 끝내고 다당제 국가가 되었다. 1946년 창당한 민주당(Democratic Party)은 1950년 선거에서 승리해 투자를 유치하고 국영산업의 민영화 및 농업의 근대화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과 언론 탄압 등에 대한 불만으로 1960년 군사 혁명이 발생해 민주정부가 붕괴되었다. 군인들이 장악한 국가통합위원회(Committee of National Unity)는 1961년 국민투표를 통해 신헌법을 공표했다. 새로운 헌법에 따라 튀르키예는 형식적으로 다당제를 기반으로 하는 양원제의 의회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의회는 쿠데타 지휘자인 카말 귀르셀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으나, 총선에서 과반을 획득한 정당이 없었기 때문에 공화인민당과 연정을 구성했다. 1965년에는 1950년대 민주당의 후신인 공정당이 총선에서 승리해 정부를 이끌었으나, 좌파의 반정부 활동으로 정국이 혼란해지자 1971년 군부는 내각 사퇴를 요구하는 압력을 가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1973년과 1977 총선에서는 공화인민당이 승리해 정권을 잡았으나 좌우 양진영의 대립으로 전국이 혼란해지고 종교 갈등과 쿠르드 독립운동 등 민족분규의 빈발로 정치적인 위기가 심각해지면서 1978년 12월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에 육군참모총장 케난 에브렌(Kenan Evren)이 주도하는 군부세력은 1980년 공화국 역사상 세 번째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군부세력은 정당을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한 후 국가안전위원회(National Security Council)와 자문의회(Advisory Assembly)로 구성된 제헌의회를 구성해 1982년 헌법을 개정했다. 개정된 헌법에 따라 튀르키예는 단원제의 의회를 두고 정국의 안정을 위해 10%의 봉쇄조항을 두어 정당들이 난립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1982년 11월 에브렌은 7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에브렌 대통령과 군부는 민족민주당을 지지했지만 1983년 선거에서 외잘(Turgut zal)이 이끄는 야당인 모국당(Motherland Party)이 승리해 민주정부를 구성했다. 외잘 정부는 정치테러를 단속하고 경제개혁을 단행하는 등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1989년 대통령 선거에서 외잘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1991년 총선에서 야당인 정도당(True Path Party)이 승리해 정권을 넘겨주었다.
1990년대 튀르키예는 내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1992년 3월 소수민족인 쿠르드족이 독립을 요구하면서 봉기하자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를 냈다. 한편 정부의 정책이 친이슬람 정책으로 기울자 세속주의를 표방하는 군부는 1997년 에르바칸(Necmettin Erbakan) 총리에게 사임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부는 친이슬람적인 복지당(Welfare Party)를 해산시키고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등 주요 인사들을 정부에서 추방했다. 해산된 복지당 인사들은 다시 미덕당(Virtue party)을 창당해 1999년 선거에서 약진했지만 2001년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다시 해체되었다. 해체된 미덕당 인사들은 에르도안을 중심으로 정의개발당(AKP)을 창당해 2002년 선거에서 승리하고 에르도안은 총리가 되었다. 에르도안은 대학에서 여성들의 스카프 착용을 허용하는 등 친이슬람 정책을 펼치면서 인기를 얻어 2014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16년 정부의 친이슬람 정책에 항의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6시간 만에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진압되었다.
정치[편집]
헌법[편집]
오늘날 튀르키예 헌정질서는 1982년 제정된 헌법을 기초로 하고 있다. 튀르키예 헌법은 1923년 10월 공화국 설립 이후 수차례 변경되었다. 1924년 4월 20일 비준된 헌법은 1960년 군사 쿠데타로 인해 이듬해 새로운 헌법으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이 헌법은 1980년 또 다른 군사 쿠데타로 인해 1982년 헌법으로 교체되었다. 1982년 헌법은 이후 스무 차례 가까운 수정을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중 1987년에는 활동이 금지된 정당 지도자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법을 철폐하기 위해, 2007년에는 기존까지 의회에서 선출되었던 대통령을 직접보통선거로 선출하기 위하여 국민투표를 거쳐 개정이 이루어졌다. 2010년에는 튀르키예의 유럽연합(EU) 가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헌법에 수많은 비민주적 요소들을 개정하였고, 2017년에는 의원내각제를 대통령제로 바꾸고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였다.
튀르키예 헌법은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1982년 헌법이 소수 인종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튀르키예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소수 인종은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뿐이다. 전체 인구의 10~20%를 차지하는 쿠르드인의 경우 기본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모든 학교에서 튀르키예어 이외 다른 언어는 제 1언어로 교육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한편 튀르키예 헌법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형법은 국가와 정부에 대한 비난은 허용하고 있지 않다. 또한 국가안보, 군사, 외교 문제 등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군사기구인 국가안전위원회(National Security Council)에 과도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대통령이 장악하고 있는 국가안전위원회는 그 권한을 통해 언제든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다.
정부[편집]
튀르키예는 2018년까지 총리가 행정의 책임을 지는 의원내각제 국가였다. 2007년 헌법 개정을 통해 국민들이 대통령을 선출하기는 했지만 대통령은 형식적인 국가원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2017년 헌법 개정을 통하여 1923년 이후 유지되었던 의원내각제를 폐지하고 대통령 중심제로 변경하였다. 총리직을 폐지한 새로운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국가의 수장인 동시에 정부의 수장이다. 따라서 대통령은 내각 장관들을 임명하고 직접 지휘한다. 대통령은 40세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서 국민에 의해 직접 선출되며 임기는 5년이다. 1회에 한해 재선이 가능하지만 의회의 결정에 따라서 2회 이상 선출될 수 있다. 튀르키예 대통령은 제왕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우선 대통령은 정당에 소속될 수 있어 정치적 중립의 의무가 없다. 대통령은 국가 반역을 이유로 탄핵 당하지 않는 이상 자신의 행위와 명령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튀르키예 대통령은 입법, 사법, 행정부에 대해서 각각 아래와 같은 권한을 가진다.
- 국가원수로서의 권한: 조약의 비준과 선포, 대사 임면, 외국대사 신임장 접수
- 입법부에 대한 권한: 의회의 소집, 법률안 선포 및 재심 회부, 법률 폐지 요청, 헌법 개정에 관한 국민투표 회부, 국회의원 선거 요청
- 행정부에 대한 권한: 의회에 예산안 제출, 부통령과 장관 임면, 고위공무원 임면, 비상사태 선포, 주요 공무원 임면, 국가감독위원회(State Supervisory Council) 위원 임면 및 주재
- 사법부에 대한 권한: 사면권, 헌법재판관 임면(15인 중 12인), 행정재판관 임면(1/4 임면), 고등법원장 임면, 판검사위원회 위원 임면(13인 중 4인)
- 군대 통수권에 대한 권한: 군대의 총사령관, 국가안보이사회 소집 및 주재
대통령이 주재하는 튀르키예 행정부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부통령 및 16명의 각 부처 장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8년 이전까지 26개의 부처가 있어 26명의 장관이 있었지만 부처를 통합해 현재는 16개 부처로 축소되었다. 장관이 만약 의회 의원들 중에서 임명되면 의원직을 사임해야 한다.
의회와 정당[편집]
단원제의 튀르키예 의회는 30세 이상의 튀르키예 국민 중 5년 임기로 선출되는 600명의 의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원들은 87개 지역구에서 정당에서 제출하는 리스트에 따라서 동트(D’Hondt) 방식의 비례대표로 선출된다. 하나의 행정구는 하나의 선거 지역구를 구성하지만, 이스탄불과 수도인 앙카라는 각각 세 개의 지역구로 나뉘어 있고 이즈미르와 부르사는 각각 두 개의 지역구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지역구는 인구비례에 따라 1명에서 최대 35명까지 의원을 배출한다.
튀르키예에는 20여 개의 주요 정당과 20여 개의 소수정당을 합해 총 40여 개의 정당이 활동하고 있다. 이외에도 헌법재판소에 의해 활동이 금지된 10여 개의 정당들도 존재한다. 튀르키예 의회에서 교섭단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20명 이상의 의원을 보유해야 한다. 따라서 정의개발당과 민족운동당, 공화인민당, 좋은당, 인민민주당 등 총 5개 정당이 교섭단체를 구성하고 있다. 상임위원회는 총 18개로 이루어져 있다.
정의개발당(Justice and Development Party: AK Parti)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에 의해 2001년 창당된 보수정당이다. 오스만 제국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친서방적 정당을 내세우며 튀르키예의 유럽연합(EU) 가입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경제 자유주의를 통해 시장경제체제, 기업의 민영화 정책 등을 실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창당 이후 지속적으로 집권세력이 되면서 2001년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10여 년 동안 7.5%에 이르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는 데 기여했다. 2018년 의회 선거에서는 중도우파 연합체인 인민연합을 이끌며 전체 600석 중 291석을 획득해 제 1당이 되었다.
정의개발당은 튀르키예의 고질적 문제인 군대의 정치 개입을 근절시키기 위해 군대를 민간이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에서 개혁을 주도하고 있다. 정의개발당은 대학과 사회에서 종교적이고 보수적인 의복을 금지하는 정책을 철폐함으로써 튀르키예 헌법이 정당들에게 금지하고 있는 이슬람주의를 추구한다고 비난받고 있다. 겉으로는 세속주의를 주장하지만 속으로 이슬람주의를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의개발당은 망명 중인 이슬람주의 학자인 귈렌(Fethullah Gülen)이 이끄는 귈렌운동(Gülen Movement)의 지지를 받고 있다. 정의개발당은 튀르키예가 이슬람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정당은 이를 부인하면서 세속주의 정당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정당은 권위주의적 정책을 추진한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실제로 2000년대에 트위터나 유튜브를 차단하기도 하였고, 학생들에게 오스만 제국의 역사에 관한 비디오를 시청하게 하며 정치 지도자들을 구속하기도 했다. 정의개발당은 전국 및 지방선거에서 해안지방과 대도시 및 쿠르드인이 집단 거주하고 있는 동남부 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당원은 2019년 현재 약 1,00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공화인민당(Republican People's Party: CHP)은 1919년 튀르키예 건국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 그리스 침략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조직으로 설립되었다가 1923년 9월 9일 정식 정당으로 창당했다. 튀르키예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정당 중 하나로 세속주의 등 케말 아타튀르크가 남긴 유산을 계승하고 있다. 중도좌파 정당으로 친유럽주의를 내세우며 사회민주주의를 이데올로기로 하고 있다. 2018년 의회 선거에서는 전체 600석 중 138석을 차지해 튀르키예의 제 2당으로 국가연합 진영의 야당들을 이끌고 있다.
공화인민당은 1923년부터 1945년까지 단일정당 체제를 유지한 튀르키예의 집권세력이었다. 다당제로 바뀐 이후 1946년, 1961년, 1973년, 1977년 집권에 성공했지만, 1980년 쿠데타 이후 당이 해산되고 여러 정당으로 분리되었고 소규모 정당으로 유지되었다. 1992년 재창당되었으나 1995년과 1999년 선거에서 참패했다. 특히 1999년 선거에서는 단 1명의 의원도 의회에 진출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2002년 선거에서 제 2당으로 성장해 2020년 현재까지 야당으로 남아있다. 공화인민당은 중산층, 학생, 화이트칼라 노동자, 학자, 노동조합 및 좌파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주로 소득수준이 높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부와 남부 해안지대에서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인민민주당(People’s Democratic Party: HDP)은 2012년에 창당되어 민주사회주의와 급진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좌파 정당이다. 2018년 선거에서 선거연합에 가입하지 않고 참가해 11.70%를 획득해 67명을 의회에 진출시켜 제 3당이 되었다. 참여민주주의, 페미니즘, 소수자 인권, 평등주의 등을 이데올로기로 하고 있다. 특히 소수민족인 쿠르드계 정당인 민주지역당(Democratic Region Party: DBP)과는 형제정당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2013~2015년에는 튀르키예 정부와 쿠르드 노동자당(Kurdistan Worker’s Party: PKK) 사이에 평화협상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중도우파 정당들은 인민민주당이 튀르키예, 미국, 유럽연합 등이 테러리스트 조직으로 인정하는 PKK와 협상을 벌인다는 이유로 비난하기도 하였다. 인민민주당은 의장은 남성이, 부의장은 여성이 담당하고 있다. 주로 아나톨리아 반도 동남부의 쿠르드족 밀집지역에서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민족운동당(Nationalist Movement Party: MHP)은 1969년에 창당된 극우정당으로 극우민족주의를 이데올로기로 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극단 폭력 세력과 연계되어 네오파시스트 정당으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1990년대 이후 인종적 민족주의에서 문화적 민족주의와 보수주의로 이동하였다. 또한 세속주의에서 친이슬람주의 노선으로 이동했다. 민족운동당은 극우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쿠르드 민족주의 정당인 민주지역당과 형제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인민민주당에 대한 적대감이 크다. 2018년 선거에서 정의개발당과 인민연합 선거연대를 구성해 11.10%의 득표율로 49석의 의석을 확보했다.
국방[편집]
냉전시기 튀르키예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어 구소련 공산주의를 억제하는 최전선이었고 그리스 등 주변국과의 분쟁 때문에 군비증강을 서둘렀다. 1952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한 이후에는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원조를 받아 군을 현대화했다.
2019년 기준 튀르키예군은 355,000명의 정규군(약 15만 명의 내무부 소속의 치안군(Gendarmerie)과 해안경비대 제외)과 378,000여 명의 예비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위비로는 GDP의 2.7%인 204억 달러를 지출해 세계 16위에 해당한다. 튀르키예군은 집단안보동맹인 NATO와 서유럽동맹(WEU)에 소속되어 있고, NATO에서는 두 번째로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 튀르키예 영토 내에는 NATO의 통제를 받는 90여 기의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다.
오늘날 튀르키예 군대는 1920년 5월 3일 튀르키예의 국부인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는 1930년 장교는 정치활동에 참여할 수 없다는 군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튀르키예에서 군부는 법 제도권 밖에서 지속적으로 정치에 개입해 '그림자 정부(deep state)'라는 신조어를 만들었을 정도로 튀르키예 정치를 움직이는 숨은 세력이다. 군부의 정치개입은 1960년 군사 쿠데타를 주도한 국가통합위원회(National Unity Committee)가 군대의 정치 개입을 합법화하는 내부 규정을 만든 이후 더욱 자주 일어나고 있다. 군대는 1971년, 1980년, 1983년에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했고, 1997년과 2007년에는 쿠데타에 해당하는 노골적 정치 개입으로 집권세력을 바꾸려 시도했다. 군부의 정치개입은 케말 아타튀르크가 제시한 튀르키예의 세속화(secularization)를 명분으로 하고 있다. 즉, 정치세력이 이슬람화 경향이 보이면 개입해 세속국가를 유지하도록 한다는 주장으로 국부인 케말 아타튀르크의 유지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세속주의를 지지하는 국민들 역시 이슬람화를 경계하는 군부의 개입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군부의 정치 개입은 실제로는 반군부 움직임을 보이는 세력과의 권력 다툼일 뿐이라는 견해도 상당하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이 높은 경제성장률을 달성하며 지지를 받으면서 군부의 정치개입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2007년 군부의 개입 시도 당시 에르도안의 주문에 의해 시민들이 나서서 정치 개입을 무력화하기도 했다.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은 2008년 에르게네콘(Ergenekon)이라는 반정부 쿠데타 모의단체에 대한 수사를 통해 군부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였다.
한편 2017년 헌법 개정으로 제왕적 대통령제로 바뀌면서 대통령의 군대 통솔에 대한 힘이 강해졌다. 예컨대 대통령이 국가안보 기구인 국가안전위원회(National Security Council)의 의장을 맡으면서 군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였다. 하지만 에르도안 정부는 국내에서 노골적으로 이슬람 전통을 되살리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튀르키예의 세속화를 강조하는 군부의 개입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있는 상태이다. 튀르키예 군부는 그리스 등과의 지속적인 갈등과 쿠르드족 등 소수민족 문제를 겪고 있는 튀르키예에서 계속해서 강력한 세력으로 남아있다.
튀르키예 군대는 징병제로서 21세 이상의 남자는 병역의 의무를 가지만, 복무기간은 학력에 따라 6개월에서 12개월까지 차별을 두고 있다. 예를 들어 대졸자는 일반 사병으로 입대할 경우 복무 기간이 6개월이지만, 3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은 장교로 입대할 경우 12개월이다. 대졸자 이외의 사병은 12개월 동안 복무한다. 학생(대학생,석박사 과정생 등)은 희망하면 33세까지 소집이 유예된다. 3년 이상 해외에서 근무할 경우 1만 튀르키예 리라(2020년 기준 약 170만원)를 납부하면 1개월간 신병교육을 받은 후 병역이 면제된다. 최근에는 노후화된 무기 현대화를 위해 15,000리라(약 260만원)를 내면 병역을 면제해 주는 제도를 한시적으로 실시한 적도 있다. 한편 성소수자, 양심적 병역 거부나 대체복무 등은 인정되지 않는다.
튀르키예군의 통수권은 국가원수인 대통령에게 있으며, 지휘체계는 '대통령-국방부장관-합참의장-각 군 사령관'으로 연결되는 통합군 체제이다. 내무부 소속의 치안군(Gendarmerie)과 해안경비대(Cost Guard)는 전시에 각각 육군과 해군 사령관 예하로 편성된다. 이 외에 특수부대인 머룬베레(Maroon Beret: 밤색 베레모)는 각 군에 소속되지 않는 합참의장 직속 부대로 불순분자 체포나 암살 등과 같은 비밀임무를 수행한다. 군 전략기구로는 연 1회 개최되는 외교·안보 관련 최고 정책심의기구인 국가안전위원회(NSC)와 연 2회(8, 12월) 개최되는 군사 관련 최고정책 심의기구인 최고군사평의회(SMC)가 있다.
튀르키예 육군은 1920년 임시정부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병력은 2018년 기준 약 260,000명 정도이다. 제1군 사령부는 이스탄불에 두고 있으며 4개 군단 병력으로 가장 중요한 지휘 사령부이다. 1개의 기계화 사단, 7개의 보병단, 3개의 전투여단, 1개의 기갑여단, 2개의 보병여단 및 5개의 해안 방위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2군 사령부는 말라티아에 있으며 3개 군단 병력으로 구성된다. 제2군 사령부의 편성은 1개의 전투사단, 3개의 기갑사단, 3개의 보병사단, 1개의 특전단, 2개의 공수여단으로 되어 있다. 제3군 사령부는 에르진잔에 두고 있는데 3개 군단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3군 사령부의 편성은 4개의 보병사단, 3개의 전투여단, 2개의 기갑여단, 4개의 보병여단으로 되어 있으며, 해외 주둔군 또한 제3군 사령부 소속이다. 에게군 사령부는 이즈미르에 주둔해 있는데, 2개의 보병사단과 1개의 보병여단으로 편성되어 있다.
해군은 현역 48,600명 정도로 16척의 호위함, 8척의 초계함, 13척의 잠수함, 29척의 상륙함 등을 포함해 총 259,000톤에 이르는 함정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51대의 헬리콥터를 보유하고 있다. 해군본부는 수도인 앙카라에 두고 있고, 이즈미르 해군기지사령부는 남부지역과 에게해 방위를 맡고 있으며, 이스탄불 기지 사령부는 북부지역과 보스포러스 해협 경계와 방위를 책임지고 있다. 또한 이스켄데룬, 메르신 등에도 해군 기지 사령부를 두어 지중해 지역을 책임지고 있다.
공군은 현역 60,000명의 병력과 1,055대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다. 세계 9위 수준의 튀르키예 공군의 주력 기종은 F-16, F-4, F-5이고 7대의 공중급유기 및 4대의 조기경보기를 보유하고 있다. 전투기 현대화 정책의 일환으로 튀르키예는 F-35(JSF) 도입을 희망하고 있으나 튀르키예가 러시아산 지대공 미사일 S-400을 도입하면서 미국은 2019년 4월 F-35 수출금지법을 통과시켰다.
외교[편집]
냉전이 종식된 이후 북대서양조약기구 최전방 회원국으로서의 전략적 가치는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있으나, 발칸·코카서스·중앙아시아·중동지역과 유럽의 교차점에 위치한 튀르키예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여전히 크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튀르키예공화국 외교정책의 기본 노선은 이슬람을 바탕으로 한 오스만 제국의 외교정책을 버리고 서방(유럽)으로 접근하는 것이었다. 즉, 케말 아타튀르크 외교정책의 핵심은 이슬람을 극복하는 세속주의와 서구의 발전모델을 따르는 근대화를 통해 튀르키예를 중세적 이슬람 세계가 아닌 현대적 서구 세계의 공화국을 만드는 데 있었다. 독립전쟁 당시 튀르키예는 무기와 재정적 지원을 해 준 소련과 가까워져 1925년에는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프랑스와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자격으로 옛 오스만 영토에서 영향력을 가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들 국가와도 관계가 형성되었다. 19세기부터 긴밀한 관계였던 독일은 경제적 압박을 가하면서 튀르키예에 접근했다. 튀르키예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초기에 중립을 선언하면서 고립주의를 선택했지만 전쟁 막바지에는 연합국 측에 가담해 전쟁에 참여했다. 냉전과 함께 튀르키예의 전략적 가치가 급격하게 상승함에 따라 튀르키예의 외교정책 또한 냉전의 영향을 받았다. 러시아 흑해함대의 주둔지인 흑해에서 지중해로 관통하는 다다넬스-보스포러스해협(Straits of the Dardanelles and the Bosphorus)을 가진 튀르키예의 전략적 중요성이 서구 국가들을 튀르키예에 접근하게 한 것이다. 튀르키예는 1945년 국제연합(UN)에 가입하고 1947년 미국이 제안한 마셜 플랜을 받아들였으며, 1950년 6·25전쟁에 파병하고 1952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한 이후 군사기지를 제공하면서 서구 진영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서구(유럽)의 일원되기'를 통해 튀르키예는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서방 국가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튀르키예는 반소련, 반공산주의 정책을 통해 서방 국가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1955년에는 소련의 중동지역으로의 세력 확장을 억제하기 위해 미국이 실제적으로 주도한 바그다드 조약(METO)에 참여하였다. 여기에 파키스탄, 이란, 영국이 가입해 중동지역의 대 소련 집단안전보장체제가 수립되었다. 1958년 7월에는 이라크혁명 후 이라크가 조약에서 탈퇴하자 본부를 앙카라로 옮겨 중앙조약기구(CENTO)로 재발족시켰다. 튀르키예의 외교는 이와 같은 반소·반공 군사기구에 의하여 서방측에 밀착하였으며, 경제개발을 위한 원조도 전면적으로 서방측에 의존하였다. 튀르키예의 이러한 친서방 정책은 서구 기독교 세계와 대립각을 형성하던 이슬람 세계의 반감을 샀다. 1963년 말 일어난 키프로스 분쟁을 계기로 미국과의 관계는 소원해졌으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으로 튀르키예가 전략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자 미국과 서방은 경제 원조를 계속하였다. 서구와의 긴밀한 관계를 토대로 튀르키예는 유럽경제공동체(EC) 가입을 신청하기도 하였다.
냉전이 종식된 후에도 튀르키예는 한동안 서방 지향적 외교정책을 펼쳤다. 1991년 초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당시 자국을 통과하는 이라크의 석유 파이프라인을 봉쇄하고 미군에게 기지를 제공하면서 대규모 병력을 이라크 국경지대에 배치하였다. 이슬람 세계의 불만을 고조시키면서도 서방세계의 이익에 동참하였다. 이러한 외교정책의 배경에는 NATO의 최전방 회원국으로서 자국의 전략적 가치가 점차 감소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1987년 신청한 유럽연합(EU) 가입에 대한 희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슬람 세계인 이라크를 적으로 돌리는 정책에 반대하는 국내 이슬람 세력은 케말 아타튀르크의 유산인 세속주의적 친서방적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와 전통적 우방국인 독일의 반대로 유럽연합 가입도 요원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튀르키예 외교정책은 점차 오스만 제국 시절의 이슬람주의로 무장한 범튀르크주의(Pan-Turkism)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하지만 튀르키예가 여전히 유럽국가임을 강조하면서 케말주의에 입각한 서방 국가들과 관계의 역시 끈을 놓지 않으려 하고 있다.
범튀르크주의는 흑해와 카스피해를 잇는 지역에 위치한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카프카즈 국가들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접근을 통해 시도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즈스탄 국가들에게는 차관과 원조 등을 통한 경제적 관계뿐만 아니라 각종 인적 교류 등을 통한 정체성 공유 외교도 펼치고 있다. 2006년에는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유전에서 조지아를 거쳐 아나톨리아 반도 남부의 제이한까지 잇는 BTC 파이프라인(Baku–Tbilisi–Ceyhan pipeline)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책 뒤에는 튀르크 민족 국가 공동체의 리더가 되겠다는 야심이 숨어있다. 또한 이 지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제어하면서 서방세계에 자신들의 가치를 보여주려는 의도도 들어있다.
튀르키예 외교정책의 범튀르크주의는 이슬람이라는 정체성을 무기로 더욱 확장되어 이슬람 세계에서 주도적 국가가 되어 오스만 제국 시절의 영화를 회복하려는 목표 역시 가지고 있다. 국내에서 겉으로는 세속주의를 내세우면서도 교육과 사회 각 분야에서 이슬람적 전통을 되살리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이는 튀르키예가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달성한 이슬람 국가라는 이미지를 만들어주는 데 기여했다.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많은 이슬람 국가 대중들이 에르도안을 연호한 것은 중동지역에 대한 튀르키예 외교정책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튀르키예 외교정책 노선은 주요 국가들과의 쌍무적 관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미국과의 관계는 1990년대 초반을 기점을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다. 비록 튀르키예가 NATO 회원국으로서 미국의 주도권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양국의 국가이익을 두고 미국과의 쌍무적 관계는 급속하게 냉각되고 있다. 미국은 튀르키예의 이슬람화와 중동지역에서의 영향력 확대 역시 우려하고 있다. 양국 간 관계에서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쿠르드족 문제이다. 미국은 IS와의 전쟁에 쿠르드족들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튀르키예는 자국 내에 사는 엄청난 숫자의 쿠르드족들이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에 거주하는 쿠르드족들과 연합해 독립국가 건설에 나서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따라서 튀르키예는 시리아와 이라크에 거주하는 쿠르드족 거점을 공격하기를 반복하면서 미국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최근에는 튀르키예가 러시아산 지대공 미사일인 S-400을 도입하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더욱 불편해졌다.
유럽연합 가입은 1950년대 이후 튀르키예 외교정책의 핵심적 목표였다. 튀르키예는 1950년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에 가입했고,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EEC) 형성 직후부터 회원국 가입을 신청해 1963년 준회원국 자격을 취득했다. 하지만 1974년 튀르키예의 북사이프러스 침략과 80년대 튀르키예 국내정치의 불안정으로 정회원국 신청은 1987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리스와 독일 등의 반대로 회원국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1996년 관세동맹에만 가입할 수 있었다. 유럽 군사동맹인 서유럽동맹(Western European Union)에는 1992년에 가입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튀르키예의 정회원국 가입 신청은 튀르키예 정부의 쿠르드족 등 소수민족에 대한 인권탄압과 법치의 부재 등 유럽연합 가입을 위한 전제조건인 코펜하겐 가입기준(Copenhagen criteria)을 충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북사이프러스 지배 역시 가입에 결정적 장애가 되고 있다. 최근에는 권위주의적 정책과 신오토만주의를 추구하는 에르도안 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계속해서 가입이 거부되고 있다.
유럽연합 회원국 중 가장 민감한 관계에 있는 국가는 그리스이다. 그리스와는 에게해의 영해, 대륙붕 구획 설정 문제, 북사이프러스 점령, 상대방 국가 거주 자국 소수민족 문제 등으로 상호 간 불신과 대립 관계를 유지해 왔다. 특히 1999년 2월 쿠르드 노동자당(PKK) 지도자 압둘라 오칼란(Abdullah Ocalan) 체포 이후 그리스 정부의 오칼란 비호 문제를 둘러싸고 최악의 상태에 있다가 1999년 8~9월 양국의 대지진 발생 당시 상호 지원을 계기로 호전의 실마리를 찾기 시작하였다. 이후 양국 정부는 수차례에 걸쳐 관계 개선을 위한 회담을 개최하였으며, 2000년 1월 그리스 외무장관의 튀르키예 방문, 2월 튀르키예 외무장관의 그리스 답방 등으로 분쟁과 대결로 얼룩져 온 양국 관계 개선의 전기를 마련하였으나, 이후 마찰이 계속되고 있다.
대한관계[편집]
튀르키예는 한국과 일찍부터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 왔다. 1949년 8월 14일 대한민국을 승인했으며 이듬해 한국전에는 2만 2,000여 명을 파병해 741명이 전사하고 163명이 실종됐다. 이 때문에 튀르키예는 한국을 혈맹 우방국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튀르키예군은 1966년 잔여 병력이 한국을 떠날 때까지 16년 동안 주둔했다. 튀르키예는 한국과 1957년 3월 정식으로 수교하고 1972년 한국에 공관을 설치하였다. 한국은 1957년 3월 튀르키예에 공관을 설치하였다. 2017년 기준으로 튀르키예에는 2,300여 명의 교민이 거주하고 있다.
튀르키예와 한국의 쌍무 관계는 1970년대 이후 빠르게 발전했다. 1972년 사증 면제협정을 시작으로 1974년 문화협정, 1977년 12월 통상진흥 및 경제협력 협정, 1979년 항공 협정, 1986년 이중과세방지 협정, 1994년 투자보장 협정, 1997년 섬유협정, 1999년 원자력협력 협정을 체결하였다. 1982년 12월에는 케난 에브렌 대통령이, 1986년에는 외잘 총리가, 1991년에는 아크불루트 총리가 방한했다. 2018년 5월에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국빈 방한했다. 우리나라 정치인으로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4월 튀르키예를 국빈 방문했다.
역사적 경험과 국민 정서, 언어, 관습 등이 한국과 유사해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는 튀르키예는 특히 한국의 경제발전 이후 한국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1982년 에브렌 대통령은 한국의 경제발전이 튀르키예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튀르키예는 한국과 경기를 하면서 상호 유대감이 더욱 깊어졌다. 튀르키예는 2001년 6월 북한과도 수교하였으나, 국제 무대에서 줄곧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2019년 기준 튀르키예는 한국의 17번째 교역 상대국이었다. 튀르키예와 한국은 1990년 이후 교역 규모가 연평균 15%가 넘는 꾸준한 증가 추세를 보였으나 2000년대 들어서 튀르키예의 경제불황과 한국의 외환 위기 영향으로 상호 교역이 급감했다. 2019년 튀르키예는 한국에 약 12억 달러를 수출하고 53억 달러를 수입해 41억 달러의 교역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튀르키예는 한국에 농산물, 철강, 수산물, 섬유제품 등을 수출하고, 한국으로부터 자동차부품, 철강판, 디스플레이, 합성수지, 석유화학 연료, 건설중장비 등을 수입하고 있다. 튀르키예 수입품의 80% 이상은 중간재 및 부품소재로 튀르키예의 산업발전과 제3국으로의 수출에 기여하고 있다.
한국의 대 튀르키예 투자는 2000년 이후 본격화되었으며, 2019년 2억 1백만 달러로 제조업과 건설업을 중심으로 약 170개 기업이 진출해 있다. 튀르키예는 한국에 2018년과 2019년 각각 약 500만 달러를 투자했다.
행정구역[편집]
총 7개의 지방(bölge, 뵐게)으로 구분되나, bölge는 행정구역이 아니며, 최상위 행정구역은 81개의 도(il, 주라고도 한다)이다. 공화국 건국 이후 튀르키예의 행정구역 제도는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프랑스의 레지옹(région) - 데파르트망(département)의 관계와 같다. 차이점이 있다면 프랑스의 레지옹은 실체가 있는 행정구역이지만, 튀르키예의 bölge는 행정구역이 아닌, 한국에서 호남, 영남으로 구분하는 것과 같은 지역 구분 단위이다. 또한 il은 최상위 행정구역이지만 지방자치권이 없으며 정부에서 책임자를 임명한다. 한국 외교부와 언론에서는 이 il을 '주'라고 번역한다. 도, 주라는 번역이 둘 다 싫다면 그냥 튀르키예어 원어 발음대로 일로 적어도 무방할 것이다.
각 도는 군(ilçe·일체), 시(şehir·셰히르), 광역시(büyükşehir·뷔윅셰히르), 면(kale·칼레), 리(köy·쾨이), 동(mahalle·마할레), 대로(cadde·잣데), 골목(sokak·소칵)등으로 세분화된다. 대부분의 도는 도청 소재지(belediye·벨레디예)의 위치에서 그 이름을 따온다. 또한 몇 개의 도를 묶어 구분하는 지방(bölge·뵐게)의 개념이 있다. 크게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한 '마르마라해 지방(Marmara Bölgesi)', 트라브존·종굴다크·시노프 등을 중심으로 한 '흑해 지방(Karadeniz Bölgesi)', 이즈미르를 중심으로 한 '에게해 지방(Ege Bölgesi)', 안탈리아·메르신 등 지중해 연안 도시들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 지방(Akdeniz Bölgesi)', 에르주룸·반·디야르바크르 등을 중심으로 한 '동부 아나돌루 지방(Doğu Anadolu Bölgesi)', 가지안테프·샨르우르파 등을 중심으로 한 '남동 아나돌루 지방(Güneydoğu Anadolu Bölgesi)', 앙카라·콘야를 중심으로 한 '내부 아나돌루 지방(İç Anadolu Bölgesi)'으로 구분한다. 튀르키예의 81개 도 중 가운데 가장 큰 도는 내륙 지방의 콘야이며, 두번째로 가장 큰 도는 시바스, 가장 작은 도는 이스탄불 근처의 얄로바이다. 거의 50배 면적 차이를 보인다. 콘야도와 시바스도의 면적을 합치면 대충 대한민국 사이즈가 나온다.
경제[편집]
터키는 명목 GDP 세계 20위, PPP 기준 세계 11위의 중상위 소득 경제를 갖춘 신흥경제국이다. IMF 추정 에 따르면 터키의 구매력평가 기준 1인당 GDP는 2023년에 40,883 달러이며 2019년 기준 터키 빈곤층은 약 11.7%이다. 2019년 터키의 실업률은 에 13.6%였다. 또한 세계 은행에 따르면 터키의 중산층 인구는 1993년에서 2010년 사이에 인구의 18%에서 41%로 증가했다.
2021년 9월 터키 중앙은행의 외화보유고는 749억 달러(전월 대비 8.1% 증가), 금 보유고는 385억 달러(전월 대비 5.1% 감소), 예비 자산은 1,213억 달러이다. 2021년 10월 터키은행에 있는 시민과 거주자의 외화 예금은 2,340억 달러로 전체 예금의 약 절반에 해당된다.
튀르키예 경제는 1980-90년대 한국과 비슷하게 지하자원, 에너지와 부품소재, 기계류는 수입에 의존하고 저렴한 노동력으로 이를 가공해 완제품을 생산, 수출하는 구조이다. 따라서 수출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에너지 수입이 늘어나 구조적으로 무역적자가 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무역적자는 당연히 경상수지 적자로 이어지고, 지속적인 경상수지 적자의 축적으로 대외불균형이 심화되면 결국 경제의 기초체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외부적인 요인으로 외환위기에 털릴 수 있다. 한국은 이를 극복한 반면 튀르키예는 아직 극복하지 못한 것이 다르다.
튀르키예판 삼성그룹인 코치(KOÇ)그룹이 유명하다. 에너지, 자동차, 내구재, 금융뿐 아니라 관광, 식료품, 소매, IT 등 사실상 튀르키예의 전 산업에 걸쳐있으며 터키 국내총생산(GDP)의 9%, 수출의 11%를 차지한다. 삼성이 CJ그룹, 신세계그룹 등으로 분리된 것을 감안하면 국내에서의 경제적 위상은 오히려 삼성보다 높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소득세 납부 상위 10명의 절반 가까이가 코치그룹 관계자일 정도이다. 가전, 자동차 등 주력 산업분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곳도 이 회사의 계열사들. 이를테면 전자제품 광고로 지겹게 볼 수 있는 아르첼릭(Arçelik)이 이 기업의 계열 회사이다. 이 회사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코치 홀딩(Koç Holding)은 포춘지 선정 글로벌 500대 기업에서 423위로 튀르키예 기업 중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되었다.
일단 눈에 보이는 상황은 전형적인 중진국 경제로 브라질,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신흥국과 비견이 될만한 세계에서 몇 안되는 국가 중 하나다. 현재 고용률이 45%로, 세계에서 제일 낮은 44%의 남아공과 같은 클라스. 사실 두 국가의 1인당 국민소득도 2019년 기준 9042달러, 6000달러로 비슷하다.
화폐가치는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매년 추락하는 중이다. 1966년 1달러에 9리라였는데 2002년에 와서는 126만 리라가 돼 버렸다. 2005년 신 터키 리라를 도입하여 지폐에서 0 여섯 개를 지우는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는 등 강경수를 두었으나, 2012년 와서는 1.814신 리라, 즉 181만 4000 구 리라에, 2013년 12월에는 2.1 신 리라(즉 210만 구 리라) 가까이 오르기도 했으니 환상적으로 화폐가 절하되었다. 매년 경악할 만한 무역적자를 보여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고평가된 유로를 쓰는 그리스보다도 무역적자 비율이 훨씬 큰 무서운 나라. 이 때문에 1970년대까지는 한국보다는 훨씬 잘 살았지만 여러 번 외채위기로 훅 가기도 하면서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한국보다 뒤처졌다.
2013년에 신흥경제국 중에서 통화가치가 폭락할 가능성이 높은 세계 5대 취약통화의 하나로 꼽히더니, 2023년 현재 1달러당 18.8리라로 2013년 이후 10년 사이에 환율이 850% 올랐다. 원/달러 환율이 10년 뒤에 9000원대가 된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끔찍한 일일 것이다. 이는 5대 취약통화 국가 중에서도 가장 많이 폭락한 것으로, 튀르키예 경제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튀르키예는 베네수엘라 같은 막장이 아닌 나름 정상적으로 경제가 돌아가던 나라이다.
2010년대에 튀르키예의 높은 경제 성장률은 대부분 건설이나 부동산 개발 덕분이고, 제조업 등 만성 무역적자를 해소하는데 필요한 산업은 발전하지 못했다. 또한 에너지 등의 해외 의존도가 높아서 무역적자 감소나 환율 안정화에 대한 전망도 그다지 밝지 않다. 또 외화로 차입해 리라화로 튀르키예 국내에서 사업을 하던 기업들이 과도한 인플레로 외화 채무를 갚지 못해 부도가 크게 늘고 있다. 게다가 튀르키예 GDP의 20%나 차지하는 관광사업이 2020년부터 코로나 사태로 직격탄을 맞아 외환 수지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런 높은 인플레를 잡고 환율을 유지하려면 중앙은행 기준금리 등 은행 이자율을 올려서 통화 팽창을 억제해야 하는데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에 반대하는 중앙은행 총재를 3차례나 바꾸며 이자를 만악의 근원으로 보는 이슬람 교리에 따라 이자율을 낮게 유지하고 이슬람식 금융비중을 높였다. 또 러시아 방공미사일 도입문제와 그리스와의 영해분쟁으로 에르도안 정부와 미국 및 유럽과의 관계가 악화되며 터키에 대한 외국인 투자 등도 줄어들고 자금을 회수하고 있어서 큰 규모의 외환수지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에르도안은 2021년 160억 달러나 드는 튀르키예 이스탄불 운하 사업을 시작했다. 한 마디로 현재 튀르키예 경제의 최대 악재는 현 대통령 에르도안으로 그가 물러나기 전에는 경제회복은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럼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튀르키예의 경제성장률은 2010년 이후 꾸준히 안정적으로 3~4%대를 기록해 왔다. 다른 국가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평균연령에 분가를 하지 않거나 늦게 하는 대가족문화 덕분에 국민들이 노후 걱정이나 기타 사회적 불안감을 버티기 용이하다는 것도 다른 국가에 대비되는 강점으로 평가받는다.
환율이나 무역적자가 튀르키예 경제의 발목을 잡을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으나 물가상승률도 한 차례 잡아본 바가 있고, 무역 적자를 해결한 경험도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경제성장 잠재력이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수십 년간 이어온,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높은 수준의 물가 상승에도 불구하고 튀르키예인들이 국내에서 체감하는 물가상승폭은 별로 높지 않았다. 2018년 경제 위기가 도래하기 전의 튀르키예는 높은 물가상승폭만큼 소득도 꾸준히 증가했으며, 환율 한번 요동치면 당장 생필품부터 가격이 무자비하게 상승하는 한국과 달리 튀르키예는 인플레이션이 지속되어도 먹거리와 경공업제품을 비롯한 생필품 가격 상승은 한정되어 있었다. 가령 2011년 기준으로 고등학교 졸업자인 건축가의 월급 평균이 1490리라(세전)였는데, 이정도면 한국 돈으로 환산할 경우 510원 기준 76만원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집값이 저렴했고 생필품 경비도 더 적게 들어간다. 한국 돈으로 환산해보면 2016년 1월 기준으로 우유 1리터에 800원, 양파 5 kg에 2000원, 감자 5 kg에 2000원, 닭 한 마리가 1500-2500원, 구이용 쇠고기 1 kg에 6000원 꼴이다.
물론 생활이 안정적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국 내에서의 상대적인 기준에 불과하다. OECD/임금과 세금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튀르키예의 전체 연 평균임금은 약 4만 9007리라로 847만 원에 불과하다. 동일 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평균임금은 4975만 원으로 튀르키예의 임금수준은 한국의 6분의 1에 가까운 수준이다. 가계소득을 기준으로 해도 마찬가지다. 소득 자체가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나니 모든 물품의 물가가 6분의 1 토막이 아닌 이상 큰 의미가 없다.
가계 소비에서 식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살펴보면 더 명백하다. 튀르키예 가계의 소비에서 식료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22%다. 이것은 한국의 저소득층과 거의 똑같은 수준이다. 대부분 선진국에서는 10% 내외에 불과하다. 식품은 소득이 얼마든 소비하는 양은 대충 비슷하기 때문에 전체 소비에서 식품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음은 그만큼 소득이 낮다는 의미이고, 또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다른 재화나 서비스(문화라든지 자동차라든지)를 구입할 수 없기 때문에 생활수준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얘기다. 참고.
현재는 급격한 리라화 폭락의 영향으로 그동안 안정적이었던 식료품이나 공업제품 등 모든 영역의 물가가 요동치고 있다. 튀르키예가 북한처럼 자력갱생을 외치는 나라도 아니고, 이렇게 갑자기 환율이 요동치면 외국 소비재와 관련이 없는 물건이라도 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튀르키예 전통 페스트리 요리인 뵈렉도 4년 사이에 가격이 10배 가까이 올랐고, 비단 요리뿐 아니라 가공하지 않은 식자재인 감자, 양파 등의 가격도 최소 5배 이상은 상승했다.
또 다른 큰 문제는 튀르키예의 최저임금 노동자 비율이 전체 임금 근로자의 60%를 넘는다는 것이다. 한국처럼 연차가 쌓이고 경력이 쌓인다고 돈을 더 받는 것이 아니라, 30-40대가 되어도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이 허다하다. 2010년대 중반부터 경제가 망가지기 시작한 이후로 기업들이 임금 인상에 굉장히 인색해졌기 때문에 정부에서 최저임금 인상을 통해 강제적으로 임금을 끌어올리는 것이고, 그만큼 최저임금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임금 인상에 인색한 건 튀르키예 정부도 마찬가지라, 최저임금이 월 2825리라이던 2021년에 월 4300리라였던 교사 초봉이 2022년에 동결됐다. 최저임금보다 높다는 이유로. 결국 부모가 최저임금 막일을 뛰며 살아가는 많은 튀르키예 가정에서는 집세와 각종 공과금을 제하고 남는 돈 1000리라 정도로 한 달동안 가족들이 먹고 살아야 하는데, 미국의 빈민층처럼 대형마트에서 하루 삼시세끼 정크푸드를 먹으며 연명해도 생활비가 부족해 은행 대출로 돌려막기를 하거나 친척들에게 손을 벌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튀르키예의 최저임금(세전 기준) 추이는 2020년 2943리라 → 2021년 3577리라 → 2022년 1월 4250리라 → 2022년 7월 6471리라 → 2023년 10000리라로, 가파르게 상승 중이다.
최근 1~2년간 정신나간 물가상승률을 뒷받침하는 정신나간 급격한 임금상승으로 인해 대량해고가 이루어졌고, 최저임금 이상을 받는 노동자의 경우 임금 인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거나 오히려 동결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결국 가뜩이나 OECD 최하위권인 고용률은 더 낮아지고 최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2020년 40%에서 2022년 62.54%로 심각한 수준으로 늘어났다.
최저임금 인상과 더불어 물가 상승을 부추기는 문제중 하나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선심성 정책 남발에 있는데, 물가를 잡는다고 큰소리를 치면서 정작 주택 구매자들에게 2백만 리라를 연이율 0.99%로 대출해 준다거나 기준금리를 터무니없이 낮은 수준으로 유지해 대출금리가 39%인데 물가상승률이 78%에 달해 너도나도 대출을 받아 생활비를 마련하거나 고가 사치품들을 사도록 놔두는 등 물가상승을 부추기는 일만 하고 있다. 가계부채를 감당할 수 없어 대출금리를 끌어내렸지만 물가상승률이 상상을 초월할 수준까지 도달하며 결국 경제와 지지율에 모두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튀르키예는 억만장자가 43명이나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는 세계 7위에 해당한다. 국가 경제 규모에 비하면 꽤 많다고 할 수 있는데, 거꾸로 생각해 보면 부의 불평등이 심하다는 얘기도 될 수 있다.
위에 말한 대로 물가 문제가 심각한데 2019년 이후로는 꾸준하게 물가가 상승하여 임금 인상을 아무리 해봤자 물가상승률이 더 높다. 시장경제는 무너지고 있고 실물경기는 파탄나기 일보직전이며 튀르키예 정부는 이를 어거지로 떠받치고 있다. 특히 튀르키예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밀과 오이, 토마토, 양파, 감자 등 야채들은 정부가 가격을 관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또한 가파르게 가격이 상승중이며, 유제품과 육류, 공산품은 매 월마다 가격이 인상될 정도로 가격상승이 살인적이다.
코로나 사태로 정부가 사람들이 모이는 식당과 카페들이 무기한 영업정지에 들어갔으며, 영업이 가능한 식당들은 손님은 받지 못하고 오직 배달만 가능하다. 허나 배달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에 많은 상점들이 아예 문을 닫거나 영업중지, 가게를 내놓는 사태가 벌어졌다. 또한 주 외화 공급처였던 관광산업에 큰 타격이 가해지고 무역액이 폭락함으로 인해 리라화 가치가 덩달아 폭락하면서 안 그래도 위태위태하던 튀르키예 경제에 호흡기를 떼어 버렸다.
2020년에 도래할 외채 만기가 1720억 달러이나, 코로나 사태로 경제에 극심한 타격을 입었고, 외환보유고도 OECD 국가들 중 가장 적기 때문에 사실상 튀르키예의 선택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거나 디폴트를 선언하는 것 둘 중 하나이다. 다만 에르도안이 IMF에 갈 일은 없을거라 못박으면서 사실상 디폴트를 선언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코로나 사태와 외환위기의 여파를 동시에 맞고 IMF 2020년 4월 자 2020년 예상 GDP 성장률이 -6.1%로 발표되었다. 2017년 한국을 추월했던 GDP(PPP)가 한국한테 다시 밀리게 된 것은 덤. 하지만 20년 10월 구매력 평가에서는 다시 한국을 제치고 13위에 올랐다.
11월 19일에 튀르키예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15%로 인상하면서# 2020년 11월 말에는 달러당 8.5리라까지 치솟던 환율을 7.9리라 수준으로 붙잡아 두는 데 성공하였고 외환보유고도 어느 정도 회복해 급한 불은 껐다. 12월 25일에는 튀르키예 중앙은행에서 기준금리를 2% 더 인상하였고, 2021년 2월에 이르러 달러당 리라 환율이 7.16리라까지 떨어졌다.
또한 IMF에 따르면 2020년 튀르키예는 경제성장률이 1.8%를 기록하면서 기존 예측치보다 매우 선방하였으며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치를 기록했고, 2021년에도 6%대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2020년 한 해 터키 리라가 기록적인 가치 하락을 보여 달러로 바꾸어 계산시에는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값을 가진다.
2021년에는 경제성장률이 9% 넘게 찍으면서 일단 명목상 경제는 회복되는듯 싶었다. 하지만 저금리 정책으로 물가는 고공행진하여 실질 임금 인상률은 마이너스를 찍었다.
2022년 1분기에는 더욱 상황이 악화돼서 전년 대비 물가상승률이 61.14%로 발표되었다. 민간 연구기관에서는 142.63%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상황이 정말 심각한 것이, 요 몇 년 새 물가가 저렴해 여행지로 각광을 받던 튀르키예가 현재 한국의 70-80% 수준까지 물가가 상승했다. 문제는 튀르키예 노동자들의 중위소득이 한국의 1/7 수준이라는 것이다.
2022년 8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대비 80% 상승되었다. 2022년 전세계 물가 폭등과 2022년 식량·에너지 위기 등으로 세계 각국에서 환율을 올리는 기준 금리 인상을 채택할때, 에르도안이 금리를 낮추면서 발생한 일이다.
그래도 명목 경제성장률은 매우 높게 나왔다. 외국인 기준에서 튀르키예 물가가 엄청나게 싸지고, 러시아인들이 유럽여행이 어려워자 튀르키예로 몰리며 관광업이 엄청난 호조를 보여 외환수입이 급증하고 민간에서 물가상승에 대해 물건 사재기로 대응하여 소비성향이 높아져서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민경제가 좋다는 것은 전혀 아니고, 외화를 만질수있냐 없냐에 따라 빈부격차가 크게 늘었다는 뜻인지라 현지에서는 서민들 희생시켜서 수출업자와 관광업자, 외국인들 좋은일만 시켰다는 평이다.
농업[편집]
농업이 튀르키예의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4%, 국가 수출의 83%에 달할 정도로 비중이 높다. 경지면적만 해도 국토 전체의 50%나 된다. 축산업도 비중이 높아 전체 농업 생산량의 25%를 차지한다. 인구 밀도가 낮지 않은 나라들 중에 몇 안 되는, 식량의 자급자족을 넘어서서 넉넉하게 수출이 가능한 나라. 고대부터 풍요롭기로 소문난 땅인만큼 풍부하고 다양하고 질까지 높은 농산물들을 대량으로 수출하고 있다.
다만 튀르키예의 농업도 문제가 있는것이 대규모의 기업농이 아닌 소규모로 경작하며 수확하는 소농 중심에 농업기술과 관개시설이 낙후되어 있어 농업 생산성이 낮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수출용 농산물 생산의 선호도가 높아 물부족에 시달리는 나라답지 않게 사탕무처럼 물을 대량으로 필요로 하는 작물 비중이 높다는 것도 문제.
게다가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이주하는 이농현상과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어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20%에 불과하다.
자동차[편집]
세계의 여러 유명 브랜드들이 튀르키예에 생산 거점을 두고 있다. 비교적 저렴한 임금과 유럽 시장으로의 접근성 덕분인 듯. 2012년 기준으로 약 100만대가 튀르키예에서 생산됐으며, 이 중 70만여대가 수출됐다. 2017년에는 169만 5731대로 정점을 찍었으며 2019년 기준 연간 약 146만대의 자동차 생산이 이루어지며 현재 포드, 현대자동차, 토요타, 르노 등 외국계 회사를 포함하여 14개의 자동차 회사와 1,100여 개의 부품 공급업체가 있다. 2021년에는 127만6140대의 자동차를 생산하여 세계 13위 자동차 생산국이 되었다. TEMSA , Otokar 및 BMC 와 같은 터키 자동차 회사는 세계 최대의 밴, 버스 및 트럭 제조업체 중 하나이다.
Togg(Turkey's Automobile Joint Venture Group Inc.)는 터키 최초의 전기 자동차 회사로 2018년에 설립되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19년 12월 27일(현지시간)에 코자엘리 도의 게브제 시에서 열린 튀르키예산 자동차 공개 행사에 참석해 60년간 간직해 온 꿈이 이뤄지는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튀르키예도 자국산 자동차 생산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전자제품[편집]
자동차와 함께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산업 분야. 특히 백색 가전을 위주로 발전했다. 2011년 연간생산량이 유럽 및 인근 지역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고. LG나 삼성 등 한국 기업이 현지 기업과 합작 형태로 진출해 있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별 인지도가 없지만 베코(BEKO) 등 튀르키예의 백색 가전 업체들의 제품은 슬로베니아산 가전 제품과 함께 영국 등 일부 유럽 국가 가전 제품시장에서 품목에 따라 20%에 달하는 시장 점유율을 보이는 등 중저가 가전제품 제조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다.
특히 튀르키예에서 가장 알아주는 가전 브랜드를 꼽는다면 보쉬(BOSCH) - 아르첼릭 - 베코 순이다. 물론 베스텔이라는 튀르키예산 가전 브랜드가 있지만 튀르키예 내에서도 베스텔은 내구성이 좋지 않아 튀르키예인들도 기피한다. 참고로 LG나 삼성은 튀르키예에서는 하이엔드 브랜드이고 고가이기 때문에 튀르키예인들은 구매가 쉽지 않다.
반도체 소자를 생산하는 FAB이 있다. 한국이나 대만처럼 나노미터 단위 선폭의 최첨단 기술은 아니고 주로 군사.우주 항공. 통신장비에 장착하기 위해서 생산한다고 한다. 삼성과 똑같은 시기(1983년) 반도체 사업을 시작했다.
섬유[편집]
튀르키예 이스탄불 섬유의류 수출조합(ITKIB)의 2013년 상반기 결산 보고서에 의하면, 튀르키예 섬유산업은 글로벌 마켓에서의 중국 시장의 급부상으로 인하여 큰 타격을 받은 산업이나, 여전히 튀르키예 GDP의 10%, 산업생산의 20%, 수출의 25%, 제조업 인력공급의 20%를 채용하는 등 터키의 주요한 산업으로 밝히고 있다.
발달된 패션 감각과 방직기술을 바탕으로 관련 기업 약 2만여 곳에 숙련근로자 40만 명 이상으로 직접고용된 인원이 많은 등 국가경제의 기여도가 높다. 튀르키예의 직물 분야는 고객 주문형 생산이 가능할 정도의 기술력과 납기 능력을 갖추고 있어 세계 시장에서도 바이어들의 문의가 지속적으로 들어오고 있는 편이다. 또한 EU 선진국들의 생산공정, 현대식 제조장비, 숙련된 노동력, 제품의 품질 등 기준에 부합시키면서 튀르키예 상품의 브랜드를 보증한다.
관광[편집]
관광 부문은 지난 20년 동안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튀르키예 경제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2008년에 튀르키예를 방문한 사람은 30,929,192명으로, 튀르키예 재정 수입에 미화 219억 달러를 기여하였다. 2013년에는 전년대비 5.9% 상승한 37,800,000 여 명이 튀르키예에 방문했고, 이 수치는 전세계에서 6번째로 관광객이 많이 방문한 나라였다. 튀르키예는 관광 수익으로 약 279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하지만 2016년에 터진 IS, PKK의 테러와 쿠데타로 벌어지는 내부 사정이 악화됨에 따라 관광업도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나 2017년 기점으로 반등에 성공하여 3700만 명 이상, 2018년에는 4600만 명, 2019년에는 5100만 명이 튀르키예를 방문하였다. 2013년의 목표를 훨씬 뛰어 넘었다. 그중 독일인은 무려 500만 명, 러시아인은 700만 명이 방문했을 정도로 독일과 러시아인들의 사랑을 받는 관광지가 바로 튀르키예이다.
무역[편집]
튀르키예는 2019년 기준 수출 1,744억 달러, 수입 2,246억 달러를 기록해 약 500억 달러의 무역수지 적자를 보였다. 주요 수출 대상국은 독일, 영국, 이탈리아, 이라크, 미국, 스페인, 프랑스 등으로 1995년 관세동맹을 체결한 이후 주요 무역 대상국으로 등장한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주요 수입 대상국은 러시아, 중국, 독일, 미국, 이탈리아, 영국 등이다.
튀르키예의 주요 수출품은 운송장비, 기계류, 철강제품, 의류 및 텍스타일, 전자제품 등이 주종을 이루며, 주요 수입품은 원유 및 가스, 기계류, 화학제품, 운송장비 등이 있다.
에너지자원[편집]
튀르키예는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다. 흑해 연안에는 석탄이 풍부해 약 5억 2000만 톤의 매장량을 가지고 있다. 동부와 서부에는 고품질의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다. 석탄과 철광석은 튀르키예의 철강산업 발전에 기여해 카라부크(Karabuk)에 국영 카라부크 제철공장과 미국 자본의 출자에 의한 에렐리(Ereğli) 제철공장이 있다. 크롬, 망간, 아연, 마그네슘 역시 매장량이 풍부하다. 최근 동부의 시리아와 접한 국경 근처에서는 유전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필요한 양의 50% 정도밖에 충족시키지 못해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등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다.
수량도 비교적 풍부해 2017년까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그리고 남동부의 하천 유역에 19개의 수력발전소와 22개의 댐을 단계적으로 건설하여 ‘동남부 지역 균형 발전 국책사업(GAP)’을 추진했다. 수력발전을 통한 전력 생산은 2018년 대비 2019년에 약 48.9% 증가했으나 전체 전력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7년 34%에서 2019년 29%로 점차 감소하고 있다. 최근에는 신재생에너지를 통한 전력 생산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교통과 통신[편집]
튀르키예의 철도건설은 1856년 시작되었으며 술탄시대에는 철도의 건설·경영이 모두 외국자본에 의해 운영되었으나 공화국 성립 후 모두 국유화되었다(1924). 총연장 8,000km의 이스탄불∼아다파자리 간 철도는 전철화(電化) 계획이 추진되었고, 튀르키예국영철도(Turkish State Railways)가 운영하는 철도는 2018년 기준 총 연장길이 12,740km에 달한다. 이 중 전철화된 구간은 약 5,467km 정도이다.
튀르키예는 23개의 국제공항을 포함해 99개의 공항을 가지고 있다. 기존까지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국제공항이 튀르키예의 메인 공항으로 연간 이용객이 3,200만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2019년 4월 이스탄불 북서쪽 약 35km 지점에 이스탄불공항(Istanbul Airport)이 건설되었으며, 신공항은 연간 수용인원이 9,000만 명에 이른다.
통신시장은 2004년 이후 자유화되기 시작되었다. 통신산업은 교통통신부 장관의 통제 아래 방송통신위원회(BTK)의 통제를 받고 있다. 튀르키예는 2019년 기준 약 1,120만 회선의 유선전화와 7,900만 회선의 무선전화를 가지고 있다. 무선전화는 인구 100명당 96.84명으로 세계 20위권에 위치해 있다. 튀르키예 최대의 통신사는 튀르크텔레콤(Türk Telekom)으로 1994년 국영기업으로 설립되어 2005년 민영화되었다. 인터넷 사용자는 2018년 기준 약 5,77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71% 정도가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다.
인문사회[편집]
인구[편집]
인구는 8,500만으로 유럽 기준이든 중동 기준이든 상당한 인구 대국이다. 튀르키예 공화국 독립 이후 처음 치러진 1927년 인구조사에선 인구 1,364만 명으로 이웃한 그리스(1928년 620만)의 두 배 정도였으나, 이후 80년대까지 연간 2% 이상의 높은 인구성장률을 기록하면서 80년대에는 5,000만 명을 넘어섰고 2010년대 후반에는 독일을 넘어서며 유럽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가 되었다. 큰 나라인 만큼 각 도마다 인구 편차나 생활 수준 차이가 심한데, 가장 인구가 많은 도는 이스탄불로 13,255,685명 인구에 인구 밀도 2,551명/km²의 압박을 보이는 반면 가장 인구가 적은 도인 튀르키예 동북부의 바이부르트는 74,412명 인구에 20명/km²의 인구 밀도를 보인다.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도는 앞서 말한 이스탄불이며, 보통 해안가 쪽이 내륙보다 인구 밀도가 높은 편이다. 인구 밀도가 가장 낮은 도는 역시 동부 지방인 툰젤리(Tunceli)로 면적은 7,774km²로 충청북도보다 조금 큰 크기인데 인구가 76,699명에 불과해 인구밀도가 가장 낮다. 전반적으로 튀르키예의 인구 밀도는 대한민국보다 많이 낮은 편인데, 한국보다 8배 넓고, 인구는 한국보다 1.5~1.6배 많기 때문이다.
주민[편집]
튀르키예 헌법은 "시민권을 통해서 튀르키예 영토 내에 거주하는 사람"을 튀르키예인으로 정의한다. 튀르키예 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 전체 인구는 약 84,680,273명으로 나타난다. 인종별 인구 구성은 2016년 기준 튀르크족 70~75%, 쿠르드족 19%, 기타 민족 7~12% 정도로 구성되어 있다. 소수민족인 쿠르드족은 주로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남부 지역에 거주하며, 그리스인이나 유대인, 아르메니아인들은 주로 이스탄불에 거주한다. 튀르키예의 2018년 인구 성장률은 연 1.47%로 세계 평균보다 약간 높게 나타났다. 연령별 구성 비율을 보면 15세 이하가 23.1%, 15세~64세가 67.8%, 65세 이상이 9.1%로 청년층 인구 비율이 높고 노인 비율이 매우 낮게 나타나 선진국의 연령별 인구 구성 비율과 차이를 보인다.
언어[편집]
튀르키예어는 튀르키예의 유일한 공용어이다. 튀르키예어는 튀르크어군에 속하며 튀르크 어군의 방언 차이가 적은 관계로 다수의 튀르크어군에 속하는 다른 언어들과의 차이가 적은 편이며 특히 아제르바이잔어와 사이가 가깝다. 튀르키예어는 2004년 전 세계적으로 약 8천만 명이 사용하고 있으며, 1928년부터 로마 문자로 표기되고 있다. 과거에 존재했던 오스만 튀르키예어는 1928년 이후 사멸되었고, 동남부 지역의 아랍계 주민을 제외하고는 아랍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튀르키예 국민의 언어 분포에 대해서도 신뢰할만한 자료가 없는데, 이유는 마찬가지로 튀르키예의 인구 조사에서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영 방송국인 튀르키예 라디오 및 텔레비전 회사(TRT)에서는 지방 언어와 아랍어, 보스니아어, 체르케스어, 쿠르드어 방언으로 된 프로그램을 일 주일에 몇 시간 정도 방영하고 있다. 쿠르드족이 밀집해 있는 동부 및 동남부 지역에선 쿠르드어가 일상어로 사용된다.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 이후 쿠르드어 말살 정책이 실시되어 쿠르드어 교육 및 서적 출판이 금지되었으나, 2005년부터 독소 조항이 삭제되어 현재 서너 종의 쿠르드어 교재가 시판되고 있다. 2009년 초에 쿠르드어로만 방영되는 TV 채널인 TRT 6이 개국하였다. 그 외에도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영어는 대도시의 호텔과 관광지 등지에서 사용되며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루마니아어, 불가리아어, 이디시어, 히브리어 등도 소수 사용한다.
사회[편집]
튀르키예인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양식은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지리적 위치로 말미암아 유럽과 아시아에 영향을 주고 받아 왔다. 강한 민족의식, 견고한 위계질서 그리고 개인이나 국가의 명예, 및 무사기질을 중시하는 튀르키예인의 특성은 이슬람의 전통적 윤리와 융합되어 서구화된 일부 계층을 제외하고는 계층간 윤리관의 차이가 그다지 심하지는 않다. 튀르키예인의 윤리는 코란에 기초하고 있는데, 사고와 행위가 숙명론적 가치관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튀르키예 인구의 약 99%가 이슬람교도(수니파)로 민중에 대한 이슬람교의 영향이 매우 크다. 공화국 성립 후 종교적 인습은 차례로 폐지되었으며, 공화국 헌법에서 국교(國敎)로 제정되었던 이슬람교 역시 뒤에 해당 자구(字句)가 삭제되었고 1961년에는 헌법상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어 다른 이슬람권 국가들에 비해 종교적 색채가 덜하다.
튀르키예인의 손님 접대는 매우 예를 갖추어 이루어지기 때문에, 나쁜 소식이나 문제를 들추는 것은 다른 기회에 하는 것이 좋고 개인적인 질문은 피해야 한다. 튀르키예인을 방문할 경우 사탕이나 과일, 꽃을 선물로 준비하는 것도 좋다. 친구를 만나거나 상대방을 처음 대할 경우 먼저 악수를 청하고 "메르하바(Merhaba : 안녕하세요)"나 "나슬스느즈(Nasilsiniz : 건강 어떠세요)"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답례로서 인사를 받은 사람은 "이이임, 테쉐퀴르에데림 (Iyiyim, Teshekurederim : 감사합니다, 건강합니다)라고 대답한다. 대부분의 튀르키예인은 집안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기 때문에 초대를 받았을 경우, 손님은 이와 마찬가지로 문쪽에 신을 벗어 놓고 슬리퍼를 신으면 된다.
튀르키예의 기본적 사회단위는 가족으로서 대부분은 부부 및 미혼의 자녀로 이루어진 핵가족이며, 어떤 경우 결혼한 자식과 그 가족도 함께 살고 있다. 튀르키예에서는 주로 경제적 이유 때문에 혼자서 사는 경우는 드물며, 1927년 스위스 민법을 받아들임으로써 1930년에 일부다처제가 폐지되고, 1934년에는 여성에게 이혼의 권리를 부여하였으며 민사혼(民事婚)이 도입되었다. 지난 30년간에 걸친 튀르키예 사회의 급속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농촌에서의 전통적인 가족관계는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농촌의 전통적인 사회구조는 가부장제의 대가족으로서 농촌사회를 지탱시키는 기본이 되고 있는데, 모든 가족 구성원은 가장의 절대적 권위에 복종해야 하며, 가족과 분리되어서 행동할 수 없다. 농촌 지역에서의 가족의 존재는 소규모 기업이라고 할 정도로 모든 노동력의 제공이 가족 구성원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친족과 가족의 유대관계를 매우 중요시하는 의식은 농촌 뿐 아니라 도시에 있어서도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서 튀르키예인 생활의 핵심적 위치가 되고 있다. 튀르키예에서는 가족과 친족으로부터 물려받은 유형, 무형의 재산 및 관계를 어느 누구도 소홀히 여길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가족 및 친족의 존재를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하는 소규모 집합체로 여기고 가장의 권위를 존중한다.
튀르키예에 있어서 가옥의 형태와 구조는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곳은 북부 산악지대와 흑해 연안이며, 건축자재로는 주로 목재를 많이 사용한다.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통적 가옥은 직사각형 구조로 되어 있으며 대부분이 단층 및 이층집으로서, 지붕이 납작하고 벽이나 담은 흙, 벽돌, 돌을 사용하여 지었다. 빈농은 대체로 온가족이 한방에서 기거하고 있는 반면, 부농은 1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대화할 수 있는 커다란 사랑방을 소유한다. 넓은 방은 가장(家長)이 사용하며, 대부분 응접실이 하나씩 갖추어져 있고 이곳에서는 주로 남자 손님들을 접대한다. 응접실에는 디반(Divan)이라는 길고 낮은 의자가 있으며, 농촌에서도 식탁과 의자의 사용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1925년에 전통적인 복장의 상징인 터반과 원통형 모자인 페즈(Fez)의 착용을 금지하였으며, 최근에는 양복의 착용이 보편화되고 있다. 또한 도시인들은 중절모를 애용하고 있으며 농부들은 앞챙이 달린 모자나 실로 짠 모자를 쓰고 있다. 농촌에서는 남녀 모두 농사 짓기에 편리한 복장을 하고 주로 불룩하고 축 늘어진 바지를 입으며 남성들에 비해 여성들이 이러한 복장을 더 많이 하고 있다. 베일(Veil)로 얼굴을 가리는 여성들의 전통적 모습은 이제는 찾기 힘들어졌으며, 상징적으로 스카프를 머리에 쓰고 스카프의 끝을 입 주위에 동여 매고 있다. 대도시의 서구화된 직장 여성들은 양장을 즐겨하고 있으며 최신 유행에 따라 자유롭게 복장을 선택하고 있다.
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등 튀르키예의 대도시들은 세계의 다른 대도시와 크게 다를 바 없으며, 주로 정치, 경제, 사회적 힘이 집중되어 있다. 수도인 앙카라보다 이스탄불이 최대 규모의 도시를 자랑한다. 도시에서 동양적인 풍경이라고 하면 이슬람 사원의 첨탑 정도이다. 대도시에는 법 체계, 행정 및 경제 조직, 군사조직, 통신 연락망 등 국가발전 계획을 입안하는 고위 엘리트 집단과 함께, 지식인, 샐러리맨, 상인들을 포함한 중간계층, 공장의 비숙련공, 일시직 고용인 등과 같은 저임금 노동자들이 공존하고 있다. 유능한 사업가와 전문가들이 더 많은 기회를 얻고자 도심지역으로 몰리고 있기 때문에 도시는 재능과 인력의 주요 원천이 되지만 계층간의 갈등 및 인구의 과잉 유입에 따른 주택 부족, 도시의 기형적 발전 등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많다. 산업화에 따라 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인구가 공업 발전에 따라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2005년 현재 노동인구 중 농업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34%로 줄어들었다. 임금수준은 낮으나 1963년 제정된 노동조합법에 따라 노동조합의 결성이 인정되고부터 단체협약에 의한 임금상승이 현저해졌다.
튀르키예 사회보장제도는 모든 근로자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사회보험을 기초로 한다. 연금보험, 건강보험, 산재보험, 실업보험으로 구성된 사회보험은 급여를 기준으로 책정된 보험료를 통해 서비스가 제공된다. 모든 고용된 직원은 월 급여의 15%를 내고 회사는 직원 급여의 22.5%를 납부해야 한다.
종교[편집]
터키는 공식적인 국가 종교가 없는 세속적인 국가다. 터키 헌법은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보장한다. 입소스(Ipsos)가 2016년 22개국 성인 1만7,18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터키에서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종교로 전체 인구의 82%를 차지했으며 종교적으로 비계열화된 사람들이 인구의 13%를 차지했으며 기독교인은 2%에 불과했다. Konda가 실시한 종교 여론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9.7%가 '완전히 헌신적'이고, 52%가 '종교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한다', 34.3%가 '종교적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 3.2%가 '불신자/무종교적'이라고 답변했다. 2020년 Gezici Araştırma가 12개 주에서 1,062명을 인터뷰한 또 다른 여론 조사에서는 터키 Z세대 의 28.5%가 무종교라고 밝혔다. World Values Survey 의 조사에 따르면 2017년 98.0%는 무슬림으로, 1.2%는 무종교, 0.8%는 기타로 확인되었다.
매스미디어[편집]
튀르키예에는 2019년 현재 약 260여 개의 TV 채널, 1,000여 개의 라디오 방송국이 있고 6,800개의 일간지와 잡지가 발행되고 있는데, 이 중 약 35% 정도가 전국 미디어 매체이다. 라디오 방송은 1927년에 시작되었으며, 1963년 튀르키예 라디오-텔레비전 공사(Turkish Radio and Television Corporation: TRT)가 설립되어 1968년부터 텔레비전 방송을 송출하기 시작했다. 컬러텔레비전 방송은 1982년 처음 실시되었다. 국영방송사인 TRT가 1989년까지 방송시장을 독점하였으나, 이후 민영방송인 Star TV가 방송을 시작했고 1990년부터는 수많은 지역 텔레비전 및 라디오 방송국이 생겨났다. TRT는 현재 11개의 전국적 TV 채널을 가지고 있고, 지역 및 유럽에서 방송하는 채널도 운영하고 있다.
문화[편집]
튀르키예는 오우즈 튀르크, 아나톨리아인, 오스만 제국 그리고 탄지마트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서구 문화와 전통이 혼합되어 다양한 문화를 창출하였다. 원래 이러한 문화 혼합은 튀르키예인들이 고대부터 중앙아시아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여러 민족들과 접촉하면서 생겨났다. 튀르키예는 종교적인 구 오스만 제국에서 강력한 정교 분리 정책을 견지한 근대 국가로 변모하였으며, 예술 표현의 방식 역시 다양해졌다. 공화정 초기에 튀르키예 정부는 박물관, 극장, 오페라 공연장, 건축 등 순수 예술에 많은 자원을 투자하였다. 다양한 역사적 요소는 튀르키예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중요하다. 튀르키예 문화는 "근대" 서구식 국가가 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통 종교와 역사적 가치를 지키고 있다.
튀르키예 음악과 문학은 이러한 다양한 문화 혼합의 좋은 사례인데,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 세계 및 유럽 세계와 상호 작용하면서 오늘날 튀르키예의 음악과 문학에 튀르키예, 이슬람, 유럽이 섞였기 때문이다. 튀르키예 문학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대개 페르시아 문학과 아랍 문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오스만 말기에 중 특히 탄지마트 이후에는 튀르키예 민속 문화와 유럽 문예 전통이 점차 강해졌다. 가령 문화적 영향의 혼합은 "문화의 충돌과 뒤섞임의 새로운 상징"이라는 형태로 극화하여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무크의 책과 같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하얀 성》(1985), 《제브뎃씨와 아들들》(1982), 《흑서》 (1990), 《새로운 인생》(1994), 《내 이름은 빨강》 (1998), 《눈》 (2002), 《이스탄불-추억과 도시》(2003) 등의 작품들이 있다.
터키 미술은 서구적 의미로는 19세기 중반부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첫 회화 강습은 1793년 현재의 이스탄불공과대학(당시 제국 군사 공학교)에서 예정되어 있었는데, 대부분이 기술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졌다.19세기 후반에는 특히 오스만 함디 비(Osman Hamdi Bey , 1842~1910)와 함께 서구적 의미의 인간상이 터키화에서 확립되었다. 당대의 인상주의는 나중에 할릴 파샤(Halil Pasha, c.1857–1939)와 함께 나타났다. 19세기의 다른 중요한 터키 화가로는 페리크 이브라힘 파자(Ferik İbrahim Paşa, 1815–1891), 오스만 누리 파자(Osman Nuri Paşa, 1839–1906), 제커 아흐메트 파자(Şeker Ahmet Paşa, 1841–1907), 호카 알리 리자(Hoca Ali Riza, 1864–1939) 등이 있다.
튀르키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건축 요소 역시 수백 년 간 이 지역에 영향을 끼친 여러 전통의 독특한 혼합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비잔티움 건축과 후대의 오스만 건축의 수많은 건축물들이 튀르키예 도처에 남아있으며, 여기에 지역과 이슬람 전통을 볼 수 있다. 시난은 오스만 건축의 위대한 고전기 건축가로 널리 평가받는다. 18세기부터 튀르키예 건축은 점차 서양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게 되어, 특히 이스탄불에서는 돌마바흐체 궁전이나 츠라안 궁전과 같은 건축물들이 수많은 현대식 마천루와 함께 하나의 도시 경관을 이루어 상이한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
튀르키예 요리는 중국요리, 프랑스요리와 함께 세계 3대 요리로 꼽힐 정도로 튀르키예는 미식의 나라이다. 가장 유명한 튀르키예 요리는 케밥으로 약 300여 가지의 케밥이 존재한다. 차곡차곡 원통형으로 끼워 익혀 겉에서부터 조금씩 잘라 빵에 넣은 되네르케밥(Donerkebap)이 가장 유명하다. 튀르키예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케밥은 발륵 에크멕(Balik Ekmek)이라고 부르는 고등어 튀김과 야채를 넣은 고등어 케밥이다.
튀르키예산 유제품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데, 쫀득한 질감이 특징인 튀르키예식 아이스크림 돈두르마와 튀르키예인들이 식사 때마다 즐겨 마시는 요구르트 아이란 등이 꼭 맛보아야 할 튀르키예 음식이다. 유럽에 커피를 전해준 튀르키예의 커피는 커피가루와 설탕을 함께 넣고 끓여 걸러내지 않고 가루를 침전시켜 마시는 것이 특징적이다. 침전물을 보면서 점을 치는 풍습도 전해 내려온다.
튀르키예인들은 스포츠 애호가이며 레슬링은 튀르키예의 전통 스포츠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레슬링 이외에 배우, 축구, 농구 등이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지중해성 기후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해수욕장이 발달해 있기도 하다.
튀르키예에서 가장 유명한 축제는 매년 4월에 열리는 메시르 마주누(Mesir Macunu) 축제이다.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된 이 축제는 튀르키예 서부의 에게해에서 가까운 마니사(Manisa)라는 도시에서 열린다. 마니사에서는 16세기 위대한 술탄 쉴레이만(Süleyman)의 어머니가 메시르 마주누라는 향신료로 만든 조청과 같은 음식을 먹고 병이 완치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또 4월에는 이스탄불에서 시의 상징인 튤립축제가 열린다.
6월이나 7월 마지막 주에는 튀르키예 북서쪽 에디르네에서 크르크프나르 오일레슬링 축제(Kırkpınar oil wrestling festival)가 열린다. 65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이 축제는 온 몸에 오일을 바르고 승부가 날 때까지 싸우는 튀르키예의 전통 스포츠인 레슬링 축제이다. 한편 7월 중순에는 카파토키아(Cappadocia)에서 열기구 축제도 개최된다. 카파토키아는 열기구 관광명소로 축제기간 이외에도 상시 열기구 탑승이 가능하다.
갤러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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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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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지역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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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주변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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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 〈튀르키예〉, 《위키백과》
- 〈튀르키예〉, 《나무위키》
- 〈독립행진곡〉, 《나무위키》
- 〈튀르키예/경제〉, 《나무위키》
- 〈터키-Turkey〉, 《요다위키》
- 〈튀르키예의 국기〉, 《위키백과》
- 〈튀르키예의 국장〉, 《위키백과》
- "Turkey", Wikipedia
- 〈튀르키예〉, 《두산백과》
- 〈튀르키예/역사〉, 《나무위키》
- 〈튀르키예의 고대〉, 《두산백과》
- 〈튀르키예의 동로마제국 시기〉, 《두산백과》
- 〈튀르키예의 이슬람 왕조 시기〉, 《두산백과》
- 〈튀르키예공화국 수립〉, 《두산백과》
- 〈튀르키예의 산업〉, 《두산백과》
- 〈튀르키예의 에너지자원〉, 《두산백과》
- 〈튀르키예의 교통과 통신〉, 《두산백과》
- 〈튀르키예의 무역〉, 《두산백과》
- 〈튀르키예의 문화〉, 《두산백과》
- 〈튀르키예의 음식〉, 《두산백과》
- 〈튀르키예의 축제〉, 《두산백과》
- 〈튀르키예의 주민〉, 《두산백과》
- 〈튀르키예의 사회〉, 《두산백과》
- 〈튀르키예의 교육〉, 《두산백과》
- 〈튀르키예의 매스미디어〉, 《두산백과》
- 노민호 기자, 〈오늘부터 '터키→튀르키예' 공식 표기 변경〉, 《뉴스1》, 2022-06-24
같이 보기[편집]
아나톨리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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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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