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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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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영어 : Persians)는 서아시아 지역 중 과거 페르시아제국의 영토에 있었던 이란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개요[편집]

페르시아, 페르시아인이라는 어휘 역시 한 마디로 쉽게 잘라 말할 수 없다. 고대 페르시아인이라는 단어 파르시는 사산 왕조의 주민들을 의미하지만 중세에는 (중앙아시아의 주민들이 소그드어, 박트리아어, 호라즘어 등등 토착어 대신 페르시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된 것을 계기로) 페르시아인이라는 단어는 이란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일대의 이란어군 계열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을 전반적으로 지칭하는 어휘로 확장되기도 했다. 동아시아와 한 번 비교해보자. 이를테면 한족, 중국인 같은 단어는 중국어를 쓰는 특정 민족을 지칭하지만 페르시아인이라는 단어는 정의가 간단하지 않다. 북쪽으로는 만리장성, 서쪽으로는 티베트 고원과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으로는 열대우림 정글과 동쪽으로는 황해에 막힌 중국과 다르게 역사상 페르시아의 여러 왕국들은 국경이 건조한 평원 지대로 사실상 열린 마당이나 다름 없었다. 동쪽에서는 맨날 유목민들이 쳐들어왔고 서쪽에서는 마케도니아 제국, 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왔다. 문제는 이란 입장에서 중국의 중원에 해당되는 이란 고원 지대는 건조지대에다 고원이라서 생산성이 높지 않았고, 그 때문에 페르시아의 여러 왕국들은 절대 중국처럼 장성 쌓고 방어만 하면 안 되었다는 점이다. 이란의 왕국들은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이라크 지방, 동쪽의 인더스 강 유역으로 확장하기 위해서 외국과 맨날 싸워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란인, 페르시아인들의 정의 및 거주지역은 시대에 따라 그리고 분류 기준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변환되어 왔다.[1]

역사[편집]

선사[편집]

이란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 유적은 카샤푸르드나 간즈 파르 등 이란 북부 지방에서 주로 발견되며, 이에 비추어 추정해볼 때 최소 구석기 초창기부터 인류가 이란 지방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란에서는 최소 구석기 중기부터 네안데르탈인들의 유적들도 발견되고 있으며, 이후 기원전 1만 년과 기원전 7000년 전부터 초기 농경 사회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문명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이후 수사 지방을 중심으로 기원전 4395년에서 기원전 3490년 경 사이에 도시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고, 기원전 4000년 경부터는 본격적인 고대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하고 거대한 도시들이 들어섰다. 청동기 시대에 이르자 이란 지방에는 엘람, 자얀데루드, 지로프트 등 다양한 고대 문명들이 들어섰으며, 이들 중 가장 세력이 컸던 엘람 문명은 주로 메소포타미아 근방에서 번영을 누렸으며 이란계 제국들이 들어서기 전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22] 이후 엘람에서는 인근의 수메르 문명의 영향을 받아 기원전 3000년 경에 쓰기와 쐐기문자 등이 도입되었고, 이를 통하여 활발한 사회 발전과 경제적 진흥이 일어날 수 있었다.[23] 기원전 2000년 경 초반에는 아시리아인들이 이란 서부 지방에 정착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고대[편집]

기원전 2000년경에는 마침내 고대 이란인들이 유라시아 스텝을 거쳐서 현재의 이란 지방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원주민들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고 협력을 하기도 하며 점차 이란 지방의 주도권을 잡아나갔고, 나중에는 이 고대 이란인들이 갈래가 나뉘어 메디아인, 페르시아인, 파르티아인 등이 발흥하게 된다. 기원전 1000년에서 700년에 이란 지방은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중심으로 한 아시리아 제국에 의하여 통일되었다. 이후 메디아 왕국의 3대 국왕이었던 키악사레스를 중심으로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들이 바빌로니아 왕국과 힘을 합쳐 연합을 맺었고, 인근의 스키타이인 등과도 힘을 합쳐 아시리아 제국을 침공하였다. 이후 혼란스러운 아시리아 제국 내에서 내전마저 터지며 제국의 힘은 갈수록 약해졌고, 이때 수많은 민족들이 약 300여 년만에 아시리아로부터 독립하여 자체적인 왕국들을 세워나갔다. 기원전 728년 경에는 메디아인들이 데이오세스 왕 하에 통합되었으며, 메디아 제국을 세워 기원전 612년 경에는 현재 이란 전역과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까지 통치하는 거대한 제국을 이루기도 했다.

기원전 550년에는 캄비세스 1세의 아들이었던 키루스 대제가 메디아 제국을 정복하였고, 스스로 아케메네스 왕조를 세워 인근의 도시 국가들마저 무릎 꿇리며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이후 키루스는 리디아, 바빌론, 이집트를 정복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동쪽으로는 발칸과 동유럽으로, 서쪽으로는 인더스강 유역까지 뻗어 나가면서 거대한 대제국을 세웠다. 기원전 539년에는 페르시아 군대가 오피스에서 바빌로니아 군대를 꺾고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정복하는 데에 성공하면서 약 400여 년간 지속된 메소포타미아의 주도권을 빼앗아왔고, 이후 바빌론에 입성한 키루스 대제가 스스로를 메소포타미아의 지도자로 천명하고 문화의 계승, 융합을 선언하면서 이후 이란, 즉 페르시아의 문화는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아케메네스 제국의 최대 판도는 현대 이란 전역,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 터키, 흑해 해안가 대부분, 그리스 북동부, 불가리아 남부, 북마케도니아,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등을 모두 차지하면서 고대 세계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자랑하였으며, 심지어 고대 이집트까지 장악하고 그 손길을 리비아와 쿠웨이트, 북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와 오만까지 뻗치면서 가히 중동 세계의 최고 맹주로 군림하면서 당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제국을 세우기도 하였다. 기원전 480년 경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인구는 약 5,000만 명 정도였으며, 그 절정기에는 전세계 인구의 44%를 자신의 신민으로 거느리는 압도적인 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 기록은 그 이후에도 깨지지 않았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바빌론에 갇혀있던 유대인들을 풀어주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도 '왕의 길'과 같은 거대 도로나 선진적인 우편제도를 운용하였고 공식 언어를 제정하여 전국의 언어를 하나로 통일하려 하기도 했다. 당시 아케메네스 제국은 중앙집권적, 관료적인 통치 체제를 황제를 정점으로 매우 효율적인 형태로 운용하였으며, 거대한 상비군을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일부 제도는 후대의 제국들보다도 발전된 면을 보일 정도로 당시로서는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아케메네스 제국은 서부 국경에서 그리스인들과 점차 분쟁을 겪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기원전 500년경에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터지게 된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아케메네스 제국은 결국 발칸 지역과 동유럽 지역의 지배권을 포기하면서 서쪽으로 후퇴하고야 말았다. 기원전 334년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케메네스 제국을 침공하였고,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다리우스 2세가 이수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제국도 마침내 멸망하고야 만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이란 지방도 그리스계 정복자들이 세운 헬레니즘 국가 계열의 셀레우코스 제국의 통치하에 놓였다. 그러나 기원전 200년 경에는 그리스인들을 몰아내고 이란 계열의 파르티아 제국이 힘을 기르며 그 국력을 신장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서방의 로마 제국과 끊임없이 마찰을 겪으며 몇 백년에 달하는 갈등 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파르티아 제국은 봉건적 군주제를 통하여 약 500여 년 동안 존속하였으며, 224년 경에는 사산 제국이 파르티아 제국을 승계하여 새롭게 들어섰다. 사산 제국은 이후 로마 제국과 그 뒤를 이은 비잔티움 제국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면서 서방 세계와 신경전을 벌였으며, 이 두 국가는 약 400여 년 동안 전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두국가들로 확고히 자리하게 된다.

사산 제국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국토를 대부분 수복할 정도로 그 힘이 강성하였는데, 크테시폰을 수도로 하였으며 인근의 로마 제국과 서유럽, 아프리카와 저 멀리 있는 중국과 인도까지에게도 큰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이 시기가 이란 문화와 국력의 최절정기로 여겨지며, 실제로 이때 가장 예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전세계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러나 사산 제국은 거의 존속 기간 내내 로마와 전쟁을 벌였는데, 이로 인하여 약 거의 700여 년 동안 아나톨리아, 캅카서스,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지역에서 전쟁을 끊임없이 벌어야만 했다. 이는 사산 제국의 국력을 끊임없이 갉아먹었고, 이로 인하여 후대에 아랍의 무슬림 정복자들이 등장하였을 때에 이에 대한 방비를 취약하게 만들었다.

중세[편집]

로마-페르시아 전쟁이 끝없이 길어지고, 특히 602년과 628년에 대대적으로 충돌하며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모두 국력을 크게 소모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국력이 크게 약해진 사산조 페르시아는 7세기경 새롭게 쳐들어온 아랍인 무슬림들의 침입을 막을 방법이 없었고, 결국 점차 라쉬둔칼리파조에, 라쉬둔칼리파조 이후에는 우마이야 칼리파조, 결국에는 아바스 칼리파조에 복속당하기 시작한다. 이후 점진적인 이슬람화가 사회 전반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당시 조로아스터교 중심이었던 페르시아 사회가 점차 이슬람 중심 사회로 변모하였다. 이때 조로아스터교의 배화신전과 도서관들이 불에 탔으며, 이슬람교인들을 제외한 타종교인들에게 특별세가 부과되었다.

750년에는 아바스 칼리파조가 우마이야 칼리파조를 몰아내었다. 이 시기 페르시아인들은 이미 아랍의 이슬람 문화에 상당수 동화가 진행된 상태였고, 이후 이슬람교로 개종한 페르시아인들은 아랍과 페르시아의 엘리트 지배계층으로 떠오른다. 점차 여러 인종들과 민족들이 섞이면서, 페르시아 지역은 코스모폴리탄으로 떠올랐고 아랍인들의 지배적 특권이나 우월성은 갈수록 떨어져만 갔다. 점차 페르시아인들과 튀르크인들이 아랍인들이 독점하고 있던 정치 요직들과 부를 빼앗아 갔고, 아랍 귀족들은 점차 이방인들과 피가 섞여나가면서 아랍으로서의 정체성도 희미해졌다. 전통적인 아랍 귀족 세력들의 권력이 약화 되면서, 관료제를 중심으로 한 페르시아계, 튀르크계 관료들이 부상하기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이들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오히려 아바스 칼리파조의 힘이 약화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아바스 칼리파조는 약 200여 년 동안 페르시아 지방을 지배하였는데, 이때 타히르토후국, 사파르토후국, 사만 토후국, 부이드토후국과 같이 반쯤은 독립적인 이란계 왕조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아바스 칼리파조의 힘이 점차 약해지는 틈을 타 바그다드의 칼리프로부터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고 거의 독립국과 비슷한 자치권을 누리기도 했다. 이시기페르시아에서는 찬란한 문학, 철학, 수학, 약학, 천문학, 예술 등 수많은 학문들의 꽃이 피어났으며, ‘이슬람 황금기’라고 불릴 정도로 당시 이슬람 문화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슬람의 황금기는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10세기와 11세기까지 지속 되었으며, 이시기 페르시아는 세계 과학의 중심지이자 개척지이기도 했다. 이렇게 문화적으로 대대적인 진흥이 일어나자, 페르시아 내부에서 다시금 페르시아 민족주의가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이후 페르시아인들 사이에서는 아랍 정복자들에 대한 반감이 떠오르면서 점차 이들을 몰아내고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강해졌는데, 이로 인하여 페르시아 민족주의 계열 시인들이 페르시아어로 시를 쓰고 발표하기도 했다.

10세기에는 중앙아시아로부터 수많은 튀르크계 민족들이 이란 고원 지방으로 이주해왔다. 아바스 칼리파조는 이들을 노예전사 계급이었던 맘루크들로 활용하였고, 이로 인하여 군대에서 페르시아인들과 아랍인들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시간이 흐르자 점차 군사력을 독점하게 된 맘루크들의 힘이 강력해졌고, 999년 경에는 맘루크계 국왕이 다스리는 가즈나 제국이 들어서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셀주크 제국과 화레즘 제국과 같이 튀르계 제국들이 연이어 등장하였다. 셀주크인들로 인하여 아나톨리아에서는 룸 술탄국이 등장하기도 하였으며, 이들 또한 페르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튀르크인들은 페르시아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 장려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튀르크-페르시아 문화가 발흥하게 된다.

1219년부터 1221년까지, 화레즘 제국의 시기에 페르시아는 몽골 제국의 칭기즈 칸의 대대적인 습격을 받았으며, 이로 인하여 전국토가 황폐화되고 국가가 멸망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 시기에 대략 1,000만 명에서 1,500만 명에 달하는, 전 국민의 4분의 3이 사망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죽어나갔으며, 이로 인하여 몇몇 역사학자들은 이란이 20세기 중반까지도 인구를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1256년에는 칭기즈 칸의 손자였던 훌라구 칸이 페르시아 지방에서 일 칸국을 건국하였다. 1370년에는 또다른 정복자였던 티무르가 훌라구 칸의 전례를 따라 또다시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티무르 제국을 세워 약 156년 간을 지속하였다. 1370년에는 티무르가 이스파한에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하였고, 이때 약 7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을 대학살하였다. 일 칸국과 티무르 제국 모두 페르시아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후기로 갈수록 거의 페르시아인과 자신을 동일시할 정도로 완전히 흡수동화된 모습을 보였다.

근대[편집]

사파비 왕조[편집]

1500년 초에는 아라다빌의 이스마일 1세가 사파비 왕조를 세웠으며, 수도는 타브리즈에 두었다. 이스마일 1세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시작하여 점차 이란 전역으로 영토를 확장해나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광대한 지역에 영향력을 끼치며 이란 일대를 호령하는 강대국으로 발돋음하였다. 당시 페르시아 사회는 이슬람교의 수니파가 주도하고 있었으나, 이스마일 1세는 이를 뒤집고 시아파를 내세우며 강제적으로 교파를 바꾸도록 강요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대대적인 변혁이 일어났으며 결과적으로는 전국민적으로 시아파 신도들이 더 많아지는 현상이 나타났고, 이 영향으로 이란은 현대까지도 주요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시아파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한편 사파비 왕조는 서쪽에 접경하고 있는 강대국이었던 오스만 제국과 끊임없는 마찰을 겪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사파비 왕조는 아바스 1세의 재위기인 1500년대 후반부터 160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맞았으며, 이때 국력은 오스만 제국을 넘어섰으며 유라시아 서부 지역 최강대국으로 군림하면서 과학, 예술 등을 선도하는 국가로 떠올랐다.[42] 이 시기에 코카서스 인종이 점차 대규모로 이란 사회에 본격적으로 동화되기 시작하였으며, 나중에는 아예 사회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향후 이란의 역사에 지대한 힘을 끼치고는 했다. 어찌 되었든 사파비 왕조는 1600년대 초반에 그 국력의 정점을 찍었고, 1600년대 중반을 걸쳐 후반에 이르자 국력의 하락세가 눈에 띄게 심각해졌으며 1700년대 초에는 이전의 영광을 거의 되찾지 못하였다. 이 시기 사파비 왕조 내에서는 내전이 끊임없이 발발했으며,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 등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가 내우외환의 상태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결국 사파비 왕조는 1722년에 파슈툰 반란군들이 수도 이스파한을 점령하고 샤의 군대를 꺾으면서 멸망하고야 만다.

아프샤르 왕조[편집]

1729년에는 코라산의 장군이었던 나디르 샤가 파슈툰 반란 세력들을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이후 이란이 혼란스러운 동안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빼앗아갔던 코카서스 지방들을 일부 수복하는 데에도 성공하면서 이란을 재통일하고 카자르 왕조를 개창하였다. 나디르 샤의 재위기에 이란은 사산 제국 이래 최대 영토를 정복하면서 코카서스 지방 전역에 이란의 헤게모니를 이룩하였으며, 서부와 중부 아시아를 통틀어 당대 최강의 제국들 중 하나라는 명성을 누리기도 했다.

나디르 샤는 1730년대 후반에는 인도를 침공하였으며, 델리를 약탈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디르 샤의 이러한 군사적 업적도 반란을 일으킨 레지그인들을 정벌하기 위해 출병한 코카서스 북부 원정 이후 그 빛이 바래기 시작하였고, 결국 나다르 샤가 암살당하면서 이란 전역에서는 권력을 잡기 위한 내전이 펼쳐지며 극도의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750년에 카림 칸이 내전을 진압하고 이란을 다시 통일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이후 카림 칸은 잔드 왕조를 세우면서 다시 이란에 평화를 되찾아왔다.

잔드 왕조[편집]

카자르 왕조 이후 들어선 잔드 왕조의 영토는 이전 이란 제국들에 비하면 상당히 빈약한 편이었다. 코카서스 지방의 대부분은 거의 사실상의 자치권을 얻어내어 이란 본토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있었으며, 이란 샤의 명령을 듣지 않으며 스스로 칸을 선출하고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다. 다만 모든 봉신들과 토지는 명목상으로는 잔드 왕조에게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하였다. 1779년에 카림 칸이 사망하자 또다시 내전이 터졌고, 1794년에 아가 모하마드 칸이 등장하여 카자르 왕조를 세우면서 혼란이 일단락된다.

카자르 왕조[편집]

1795년에 조지아인들이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이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카자르 왕조는 대군을 파병하여 티빌리시를 점령하고 러시아 세력을 코카서스 전역에서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면서 코카서스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하였다.

이후 1800년대 초중반에 발발한 2차례의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이란은 코카서스 지방의 영토 상당수를 잃어버리고 만다. 이 때 이란은 몇 백년 동안 이란 고유의 영토라고 여겨졌던 트란스코카서스와 다제스탄 지방을 잃어버렸으며, 러시아 제국에게 여러 이권들마저 넘겨주어야만 하였다. 이렇게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여파로, 이란은 현재의 다제스탄,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렸으며, 이후 코카서스 지방에 일부 남아있던 영토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제국에게 점령당하면서 코카서스에 대한 영향력을 거의 잃어버렸다.

이란이 점차 무너지고 러시아가 코카서스 지방으로 밀려들어옴에 따라, 코카서스 북부에 살고 있던 무슬림들은 어쩔 수 없이 이란 지방으로 도피해왔다. 1870년대 초에는 이란 전역에서 대대적인 기근이 일어났고, 이로 인하여 인구의 20%에서 25%가량에 이르는 150만 명이 기아로 사망하기도 했다. 1872년과 1905년 사이에, 카자르 왕조의 국왕들은 점차 서구 열강의 협박에 못이겨 그들에게 이권을 내줄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하여 1905년에는 입헌 혁명이 일어났다. 1906년에는 첫 이란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처음으로 국회도 열렸다. 당시 헌법에는 이란 내에서 기독교, 유대교, 조로아스터교만을 허가된 소수종교로 규정하였으며, 이같은 내용은 심지어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한편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들과 개혁을 주도하는 세력들 간의 반발은 갈수록 극심해졌으며, 이로 인하여 결국 1909년에는 테헤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며 당시 국왕이었던 모함마드 알리 샤가 강제로 퇴위하게 된다. 직후 러시아는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1911년에 이란 북부를 점거하였으며, 수 년동안 강제로 점령하며 돌려주지 않았다. 이는 오히려 외세와 무능한 카자르 왕조에 대한 공분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대대적인 민중 시위가 일어났다.

이란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선언하였으며,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대영제국 모두 이란 서부를 강제적으로 점령하면서 전투를 벌였으며, 1921년이 돼서야 겨우 군대를 물렸다. 이 시기에 최소 2백만 명에 달하는 이란인들이 전투에 직간접적으로 휘말려 사망하였으며, 공장들과 도시들이 파괴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기도 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은 이란 내 기독교인들에 대한 대대적 학살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며, 1917년 경에는 전쟁으로 인한 대기근이 들면서 사회는 점점 혼란스러워져만 갔다. 오스만 제국 군대는 아르메니아 정교회, 아시리아 정교회 신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을 보호하려 한 무슬림들마저 학살하면서 대대적인 학살을 일으켰고, 특히 코이, 마쿠, 살마스, 우르미아 지방에서 대대적인 살인극이 자행되었다.

카자르 왕조 시기의 이란은 거의 내내 정세가 불안정하였으며,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은 극도로 약했으며 이 상태가 거의 몇 백년 동안 지속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이러한 빈약한 행정력으로 인하여 이란은 세계 대전 동안 주권조차도 제대로 지킬 수 없었고, 이로 인하여 1921년에 영국이 배후에서 주도한 쿠데타가 일어나고 레자 샤가 팔라비 왕조를 개창하면서 결국 카자르 왕조도 멸망하고야 만다. 레자 샤는 이란의 총리에 직위한 이후, 1925년에 국왕직에 올랐다.

팔라비 왕조[편집]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41년 6월, 나치 독일은 독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기습적으로 침공하였다. 소련은 7월과 8월 사이에 즉시 연합국 세력과 동맹을 맺어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 들어갔으며, 연합국 세력의 주축이었던 영국은 이란 정부에게 이란 내에 거주하는 모든 독일인들을 추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레자 샤는 이를 주권 간섭으로 보고 독일인 추방을 거부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1941년 8월 25일에 영국과 소련이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두 강대국에 맞서 싸울 국력이 부족했던 레자 샤는 즉시 항복하였으며, 연합국은 이란의 항복으로 인하여 소련으로 향하는 공급선을 유지하고 페르시아 만의 유전을 확보하며 독일군이 터키를 통하여 소련 국경 내로 진군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다. 레자 샤는 침공이 벌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1년 9월 16일에 퇴위하였고, 당시 21세의 젊은 왕세자였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에게 왕위를 승계하였다.

이후 2차 세계대전기 내내 이란은 영국과 미국, 소련 등 연합국들의 전진기지로 사용되며 연합국에게 막대한 양의 자금과 자원을 제공하였으며, 또한 12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 난민들을 수용함과 동시에 폴란드 해방군들의 본거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53] 1943년에는 스탈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등 연합국의 3개국 정상들이 모여 테헤란 회담을 열기도 하였으며, 이 회담에서 전후 이란의 독립을 확고히하고 이란 국경을 확정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을 때 즈음에도 소련 군대는 이란을 떠나기를 거부하였고, 이란 북서부 지역에 2개의 위성국을 세웠으니 이 것이 바로 아제르바이잔 인민공화국과 마하바드 공화국이다. 이로 인하여 이란과 소련 간의 갈등이 첨예해졌으며, 소련에게 유전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1946년 5월에야 소련군이 모두 이란 영토에서 퇴각하였다. 참고로 두 위성국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졌으며, 유전 할양은 후에 취소되었다.[2]

페르시아 지도[편집]

페르시아 국가 지도[편집]

페르시아 지형 지도[편집]

페르시아 주변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이란/역사〉, 《나무위키》
  2. 이란〉,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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