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불
카불(페르시아어: کابل 카볼, 파슈토어: کابل 카벌, 다리어: کابل 카벌, 영어: Kabul)은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이다. 카불은 아프가니스탄 동쪽의 카불주에 있으며 카불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카불은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어 세계에서 75번째로 큰 대도시이다. 카불은 힌두쿠시산맥 사이의 좁은 계곡을 따라 자리잡고 있으며 해발 1,790 m에 위치하고 있다. 2021년 탈레반 공세로 인해 전 지역 여행이 금지되었다.
목차
개요[편집]
- 행정 단위: 아프가니스탄 수도
- 면적: 1,023 km²
- 인구: 4,635,000명 (2015년)
- 지역어: 페르시아어, 파슈토어
역사[편집]
고대[편집]
카불이 처음 세워진 시기는 명확치 않지만, 기원전 1500년 - 기원전 1200년 사이 작성된 힌두교의 경전 리그베다와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아베스타에서는 카불 강 강변에 세워진 도시 "쿠바"를 언급하고 있다. 리그베다에서는 쿠바를 산맥에 세워진 낙원과 같은 이상적 도시로 찬양한다.
카불은 한 때 메디아의 영토였으며 기원전 549년 아케메네스 제국의 키루스 2세에 의해 정복되었다. 이 당시 카불은 조로아스터교의 중심지였으며 불교와 힌두교도 전파되었다. 다리우스 1세의 묘비에서 카불은 아케메네스 제국의 29 지방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아케메네스 제국을 무너뜨리자 카불 역시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복속되었으며 그의 사후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기원전 305년 셀레우코스 제국은 영토를 인더스 강 유역까지 확장하였고 마우리아 왕조와 국경이 맞닿게 되었다. 두 국가는 동맹을 맺은 것으로 여겨진다.
마우리아 시기에 이르러 카불은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번창하였다. 곡물 수확이 늘어남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였고, 사람들은 공예, 보석 세공, 목공과 같은 일에 종사하였다.
기원전 2세기 초 카불은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영토가 되었고 기원전 2세기 중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분열되면서 인도-그리스 왕국의 땅이 되었다. 이 무렵 카불에서는 불교가 널리 퍼졌다. 밀린다왕문경(나선비구경)은 인도-그리스 왕국의 메난드로스 1세와 불교 승려 나가세나 사이의 문답을 기록한 것이다. 당나라의 승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카불에 있던 나라 카피시국(迦畢試國)에 불교 사원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현장은 카피시국이 주위가 천리로 북쪽으로 설산이 있으며 곡식과 과일이 풍성하며 각지의 문물이 모인다고 기록하였다.
기원전 1세기 중반 인도-스키타이가 이 일대를 지배하였고 기원 후 쿠샨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기원후 230년 무렵 사산 제국이 쿠샨 제국을 무찌르고 카불 영역을 차지하였다. 사산 제국 시기 카불은 팔라비 문자로 "카풀"이라 기록되었다. 페르시아어에서 카(ka)는 왕을 폴(pol)은 다리를 뜻한다. 카풀은 카폴에서 온 것으로 카불 강에 왕이 놓은 다리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이후로도 많은 왕조들이 명멸하며 카불을 지배하였고, 810년에서 815년 사이에는 토번이 카불에 성벽을 쌓았다. 이 성벽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이슬람의 전파와 몽골의 침입[편집]
642년 당시 독립국이었던 카불에 이슬람 원정대가 당도하였다. 이슬람은 몇 차례의 패전에도 계속하여 카불을 공격하였고 결국 이슬람화에 성공하였다. 600년대 후반 자란즈의 아브두르 라흐만 빈 사마나는 카불의 주민 1만 2천명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이들이 도시를 버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야쿠브 이븐 알라이스 알사파르가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이슬람 국가 사파르 왕조를 세울 때까지도 카불에서 무슬림은 소수였다. 이후 몇 세기 동안 사만 제국, 가즈나 제국, 고르 왕조, 화레즘 샤 왕조, 카를루크 왕조, 할지 술탄국 등의 이슬람 국가를 거치면서 카불은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었다.
13세기 몽골 제국이 침입하였다. 전투 중에 징기스 칸의 손자가 전사하자 몽골군은 바미얀 인근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여 보복하고 카불을 파괴하였다. 많은 아프간족이 몽골의 침입을 피해 남쪽 델리 술탄국으로 이주하였다. 한편 아프간족과 몽골인 사이의 혼혈도 이루어졌는데 하자라족은 스스로가 몽골의 후예라고 여긴다. 몽골계 국가인 차가타이 칸국에 이어 일 칸국이 카불 지역을 지배하였으나 1335년 일 칸국의 해체와 함께 카르트 왕조가 독립하였다.
티무르 제국과 무굴 제국[편집]
1380년에서 1383년 사이 티무르 제국은 카르트 왕조를 멸망시키고 카불 지역을 지배하였다. 14세기 카불은 티무르 제국의 교역 중심지였다. 1504년 바부르는 카불을 함락하고 자신의 본거지로 삼았고 이는 후일 무굴 제국으로 발전하였다.
두라니 제국[편집]
아프샤르 왕조의 나디르 샤는 1747년 자신의 신하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 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연합군 4천명을 이끈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두라니 제국을 건국하였다. 그의 아들 티무르 샤 두라니는 1776년 제국의 수도를 칸다하르에서 카불로 옮겼다. 18세기 카불을 방문한 첫 유럽인 조지 포스터는 카불에 대해 "남아시아에서 가장 청결한 도시"라는 평을 남겼다.
1826년 도스트 모하마드 칸이 스스로의 왕국을 선언하면서 내분이 발생하였다. 당시 두라니 제국의 군주 샤 슈자흐 두라니는 망명하였다가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인도 제국의 도움을 받아 복위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났다. 1841년 봉기가 일어나 영국인들이 살해되고 카불이 함락되었다. 1842년 영국은 다시 카불을 점령하였고 이 과정에서 두라니 제국은 해체되었다. 도스트 모하마드 칸이 영국과 협조를 약속하고 바라크자이 왕조를 열어 아프가니스탄 에미리트를 건국하였다. 1879년 도스트 모하마드 칸의 뒤를 이은 셰르 알리 칸은 영국의 간섭을 거부하고 국교를 단절하였고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군은 카불을 점령하였고 셰르 알리 칸은 러시아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북쪽으로 몽진하다가 마자르이샤리프에서 사망하였다. 왕위는 셰르 알리 칸의 아들 모하마드 야쿠브 칸이 계승하였고 1879년 5월 26일 양국 사이에 간다마크 조약이 채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아프가니스탄 에미리트는 멸망을 피했으나 영국의 간섭을 받아들여야 하였다.
20세기[편집]
20세기에 들어 하비불라흐 칸은 카불의 근대화를 추진하여 전기와 전화가 가설되었고 우정국이 설치되었으며 1903년에는 최초의 근대 고등학교인 하비비아 고등학교가 세워졌다.
1919년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승리한 아마눌라흐 칸은 카불에서 자주 독립을 선언했다. 아마눌라흐 칸은 카불에서 6 km 떨어진 곳에 새 수도를 건설하고 다룰라만으로 이름지었다. 1920년대에 다룰라만 궁은 아프가니스탄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1929년 하비불라흐 칼라카니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차지했으나 9개월만에 무함마드 나디르 샤에 의해 처형되었다. 나디르 샤 역시 1933년 학교 기념식 도중에 암살되었고 당시 19세였던 그의 아들 무함마드 자히르 샤가 왕위를 이었다. 아마눌라흐 칸과 달리 자히르 샤는 새 수도에 관심이 없었고 카불을 수도로 삼았다. 자히르 샤는 1973년 아프가니스탄 쿠데타로 왕정이 붕괴될 때까지 통치하였다. 쿠데타를 일으킨 무함마드 다우드은 공화국을 선언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잦은 정변과 외세의 개입으로 오랫동안 참화를 겪게 되었다.
소련 점령기[편집]
1978년 친소련 성향의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이 주도하는 사우르 혁명이 일어났다. 이로서 아프가니스탄은 냉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1978년 4월 28일 카불에서 다우드 대통령과 그의 가족이 살해당하였다. 새롭게 정권을 잡은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의 누르 무하마드 타라키는 사회 개혁을 시도하였다. 소련의 사례에 따라 사기업을 국유화하였고 교육 역시 러시아어를 가르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한편 서방의 지원을 받는 무자헤딘은 이슬람 수호를 기치로 반정부 무장세력을 모았다.
1979년 2월 미국 대사 아돌프 더브스가 납치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의 군대가 납치범을 공격하자 납치범들은 더브스를 살해하였다. 한편 그해 9월에는 대통령 타라키가 암살되었다. 불안한 정국 속에 12월 24일 소련은 카불을 점령하였다. 이후 1989년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아프가니스탄은 친소련 정부군과 무자헤딘 사이의 내전에 휘말렸다. 1988년 당시 제작된 영화 람보 3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자헤딘을 지원하는 내용을 소재로 하고 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동안 카불에는 소련군의 지휘부가 들어섰다.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은 게릴라전으로 소련군에 맞섰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노동자의 40%가 여성으로 채워졌다. 아프카니스탄 전역에서 전쟁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비교적 안전한 카불로 모여들었다. 카불의 인구는 1978년 50만 명에서 1988년 1백 50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탈레반 정권[편집]
1989년 소련의 철군 뒤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모하마드 나지불라 정권과 무자헤딘 사이의 내전으로 환원되었다. 미국의 중앙정보국은 무자헤딘을 계속하여 지원하여 나지불라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13년간 이어진 내전 끝에 1992년 무자헤딘은 카불을 점령하였고 나지불라는 실각하였다. 나지불라는 UN 관할의 건물로 피신하였다.
1996년 탈레반은 카불을 점령하고 탈레반 정권을 수립하였다. 4년 동안 카불에서 은신하였던 나지불라는 1996년 탈레반 정권에게 체포되어 공개 처형되었다. 탈레반은 이슬람의 가르침을 배우는 학생을 뜻하는 말로 무자헤딘을 비롯한 각종 반정부군의 연합체였다. 긴 내전 중에 카불은 곳곳이 포격과 로켓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탈레반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입각하여 극단적인 정책을 펼쳤다. 모든 여성은 교육을 받을 수 없으며 부르카를 착용하여야 했고, 우상 숭배를 금한다는 이유로 바미얀 석불을 파괴하였다.
21세기[편집]
탈레반 정권은 극단적 이슬람 근본주의 정책으로 점차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과 적대적 관계에 놓였다. 2001년 9월 11일9·11 테러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였고 오사마 빈 라덴의 제거를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났다. 2001년 11월 북부 동맹은 카불을 점령하였고 정권을 잃은 탈레반은 다시 이전의 게릴라전으로 복귀하였다. 2018년 7월 미국은 전쟁 종식을 위해 비밀리에 탈레반과 접촉하였다고 한다. 2021년 8월 15일, 탈레반에게 카불이 함락되어 탈레반 통치하에 들어서게 되었다.
지리[편집]
카불은 탈레반의 동부의 해발 고도 1,791 m에 위치하고 있다. 힌두쿠시 산맥에서 발원한 카불 강을 중심으로 좁은 계곡 사이에 자리잡고 있어 산악으로 둘러쌓인 분지를 형성한다. 구 도심의 고대 성벽은 곧바로 세르 다르와자 산과 이어진다. 그 뒤로는 슈하다이 살리힌 묘지가 있다. 카불 동쪽의 발라 히사르는 옛 아프가니스탄 에미리트 당시까지 쓰였던 요새이자 궁전이다. 도시 면적은 1,023 Km²이다.
기후[편집]
카불은 한랭 스텝 기후에 속하며 퀘펜 분류 BSk이다. 고도가 높아 다른 남서아시아 지역에 비해 온도가 낮다. 여름에도 습도가 낮고 가을 동안에는 오후에 따듯하고 저녁엔 조금 쌀쌀한 편이다. 겨울엔 매서운 한파가 닥친다. 일년간 가장 습한 때는 봄이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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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편집]
- 〈카불〉, 《위키백과》
같이 보기[편집]
남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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