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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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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위치

신드주(우르두어: سندھ صوبہ, Sindh Province)는 파키스탄에 위치해 있는 주이다.[1][2]

개요[편집]

신드주의 면적은 140,914㎢이며 인구는 4,788만 명(2022년)이다. 파키스탄의 네 개의 주 중에 하나로, 주 면적으로는 3번째로 크고 인구로는 펀잡주 다음으로 많다. 북서쪽으로는 발루치스탄주, 북쪽으로는 펀잡주, 동쪽으로는 인도구자랏주라자스탄주에 접하고 있다. 남쪽에는 아라비아해가 있다. 주도는 카라치이다.

카라치를 비롯하여 하이데라바드·시카르푸르·수쿠르 등의 도시가 있다. 우르두어와 신드어를 사용한다. 인더스 강 하류에 위치하며 파키스탄 동남부 지역에 속한다. 지명은 인더스 강인도 아대륙 현지 발음인 신두에서 유래된 것이다.

베나지르 부토 일가의 정치적 고향이다. 부토가의 정당인 파키스탄 인민당(PPP)은 신드주의 의석 중 90% 이상을 차지하던 적도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2021년 지금도 PPP가 신드주 의석의 88%를 차지하고 있다.

신드는 때때로 '밥-울 이슬람(Bab-ul Islam, 이슬람의 관문)'으로 불리는데, 왜냐하면 신드 지역이 인도 아대륙에서 이슬람의 지배를 받은 첫 번째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신드는 1947년 영국령 인도 분할 이후, 이 지역으로 이주한 인도 내의 무슬림 다민족 공동체인 무하지르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힌두교도와 무슬림 모두에게 신드 정체성 중 하나를 구성하는, 수피즘의 강한 영향을 받은 독특한 문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신드는 인더스 문명이 개창한 이래로 대단히 융성했던 청동기 시대의 역사로 유명하며,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중 모헨조다로와 마클리 무덤군이 위치해 있다.

파키스탄에서 펀잡주 다음으로 경제력이 강한 지역이다. 종교적으로는 수피 이슬람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유독 강세이다.

이름에서 짐작할수 있듯 파키스탄 내에서는 힌두교의 비중이 꽤 높은 편이다. 물론 10% 정도지만 인도파키스탄이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분리독립하는 와중에 신드주 대부분 지역이 파키스탄에 편입되었고, 인도 공화국에서는 신드주 동부 일부 지역은 따로 행정 역으로 유지하지 않고 구자라트주에 통폐합시켰다.[3]

자연환경[편집]

신드주는 대부분이 건조한 충적평야인데, 중부는 농업지대로 쌀을 비롯하여 보리·목화·식물유를 산출한다. 인더스강이 자주 유로를 바꾸면서 홍수를 일으켰으나, 강줄기가 이동한 자리는 현재 관개용으로 이용된다.

역사[편집]

고대[편집]

신드주와 주변 지역에는 인더스 문명의 유적들이 위치해 있다. 그곳에는 번영했던 문명의 흔적, 그리고 황폐화된 도시와 무너진 건축물들의 잔재가 남아 있는데, 그 중 가장 주목할만한 유적지는 모헨조다로이다. BC 2,500년경에 지어진 이 곳은 고대 인더스 문명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정착지 중 하나로, 표준화된 벽돌로 지어진 건축물과 교차로, 그리고 수준 높은 하수도 시설과 대중목욕탕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 도시는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크레타, 카랄-수페와 함께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초기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인더스 문명이 급격히 쇠퇴한 기원전 20세기 무렵에 모헨조다로도 같이 쇠퇴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기원전 19세기경에 도시는 버려지게 되었다. 이후 1920년대에 유적지가 발견되었으며, 198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오늘날 모헨조다로 유적지는 침식 현상과 부적절하고 무분별한 복원 작업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기원전 3,000년 무렵에 발생한 이 지역의 점진적인 기후 건조화는 오히려 도시화의 초기 자극제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건조화 현상은 인더스 문명의 종말을 야기했으며, 이 지역의 인구를 부양하던 물 공급을 줄임으로써 경작지를 황폐화시켰다.

청동기~철기 시대, 즉 인도에서 베다 시기 및 십육대국 시기가 시작될 무렵, 신드 지역에는 '신두-사우브라(Sindhu-Sauvīra)'라는 고대 인도-아리아계 왕국이 인더스 강 유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의 남쪽 국경은 인도양이었고, 북쪽 국경은 물탄 인근의 파냐브였다. 신두-사우브라 왕국의 수도는 로루카(Roruka) 또는 브타브하야(Vītabhaya), 내지는 브트바야(Vītībhaya)로 명명되었는데, 이는 중세 시대의 신드 도시 아로르(Aror)와 오늘날의 로리(Rhori) 즈음으로 추정된다.

BC 535년경,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제는 인도 방면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고, 이 초기 원정에서 아프가니스탄~인더스 강 서안의 대부분 지역이 그에 의해 합병되었다. 그가 죽은 이후 원정은 잠시 중단되었지만, 다리우스 대제 시기에 재시작되어 제국의 동쪽 경계는 이전에 점령했던 지역을 넘어 더욱 팽창하기 시작했다. BC 518년경 페르시아 군대는 펀자브 일대에 이르렀으며, 원정이 마무리 될 무렵에는 오늘날 파키스탄에 해당하는 인더스 강 유역이 완전히 장악되었고, 이후 아케메네스 제국의 속주(힌두쉬, 고대 페르시아어: 𐏃𐎡𐎯𐎢𐏁)로 편입되었다. 학자들은 힌두쉬 속주가 인더스 분지와 강 중류(오늘날 신드 전역과 펀자브 남부)에 위치해있었다고 추정한다. 이후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에 따르면, 힌두쉬 속주는 아케메네스 제국 전체 세수의 32%를 담당했는데, 이를 보아 당시 신드 지역이 대단히 풍요로웠음을 알 수 있다.

BC 33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헬레스폰토스를 건너 페르시아로 침입했고, 몇 차례의 승리 끝에 마침내 페르시아 전역을 정복하고 헬레니즘 제국을 세웠다. 페르시아 정복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인도 방면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여 신드 일부 지역을 합병하고 자신 휘하의 장군 페이톤을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신드의 파탈라라는 해안도시에 항구를 건설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디아도코이 시대가 열렸고, 헬레니즘 제국의 광대한 동방 영토는 셀레우코스 제국이 장악했다. 그러나 곧 북인도에서 마우리아 제국이 발흥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에 맞섰다. 마우리아 제국의 창시자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와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이후 맺어진 평화 조약에서 셀레우코스 1세는 인더스 강 서안~박트리아 일부 영토를 양도하고 결혼 동맹을 제안했는데, 찬드라굽타는 이를 수용하고 셀레우코스에게 500마리의 전투코끼리를 선물로 주었다.

마우리아 제국의 통치는 약 1세기 동안 지속되었으나, BC 180년 경에 마우리아 제국이 무너진 이후 이 지역은 인도-그리스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다시 인도-그리스인들이 패퇴한 이후에는 인도-스키타이 왕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후 인도-파르티아 왕국과 쿠샨 제국이 차례대로 이 지역에 들어섰고, 최종적으로 갠지스 강 일대에서 부상한 굽타 제국이 신드 지역을 점령했다. 한편 페르시아의 사산 제국 황제들은 그들의 비문에서 힌드라고 알려진 신드 지역의 지배권을 주장했다.

AD 6세기경, 후나족의 북인도 침입으로 굽타 지배가 붕괴되면서 북인도에는 수많은 토착 지역 왕조가 나타났는데, 신드 지역에는 레이 왕조가 들어서 약 144년 동안 신드 지역을 통치했다. 그들의 수도는 아로르였다. 이후 브라만 왕조가 그 뒤를 이었다. 이들의 실재 여부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는 브라만 왕조의 역사서인 『차흐나마』를 근거로 한다.

중세[편집]

예언자 무함마드가 죽은 후, 동방으로의 아랍 팽창은 페르시아를 넘어 인더스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신드와 이슬람의 조우는 라시둔 칼리파국 시대 무슬림의 침입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636년, 2대 칼리파 우마르가 바레인 총독 우트만 이븐 아부 알-아스가 이끄는 해군 원정대를 파견했는데, 9세기의 이슬람 역사가 알발라후리는 이들이 파견되었다는 점은 기록했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차흐나마』는 이들의 공격이 실패했으며, 현지 총독이 습격한 무리의 우두머리를 죽였다고 기록했다. 이 습격은 후에 우마이야 선박에 대한 아라비아해 해적들의 공격을 촉발시켰다. 발라후리는 이후 우스만 시기까지 신드에 대한 공격이 재개되지 않았다고 또한 덧붙였다.

649년경, 마크란(Makran, 이란 동남부)을 점령한 알 하킴 이븐 자발라 알 압디는 제 4대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추종자, 즉 시아파였다. 이 무렵 신드의 많은 자티들은 시아파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몇몇은 심지어 1차 피트나에 참가하여 알리를 위해 싸우다가 사망하기도 했다.

712년, 우마이야 왕조의 장군인 무함마드 빈 카심은 브라만 왕조를 멸망시키고 신드 지역을 이슬람 지배 영토에 추가시켰다. 이것은 인도 아대륙에서의 이슬람 정복을 알리는 첫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지역에서는 토착 종교가 우세했는데, 그 중심지인 아로르를 기점으로 남부에서는 불교, 북부에서는 힌두교가 각각 지배적이었다.

중동에 근거지를 둔 이슬람 칼리파국의 지배는 8세기경 들어선 압바스 왕조 시기까지 이어졌으나, 압바스 왕조의 지배력이 9세기에 들어 크게 약화되면서 점차 자치 공국들이 할거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랍계 합바리 부족이 두각을 나타냈고, 마침내 854년 압바스 칼리파 알 무타와킬은 합바리 부족의 수장 우마르 이븐 압둘 아지즈 알 합바리를 신드 총독으로 봉했다.(합바리 왕조)

이후 압바스 왕조가 튀르크계 군인들의 정권 탈취와 내분으로 완전한 무질서 상태에 돌입하자, 861년 무렵 합바리 통치 하의 신드는 반독립 제후국 상태로 변모했다. 다만 그들은 명목상으로는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파에게 계속 충성을 맹세했다. 합바리 왕조는 1026년까지 신드 지역을 통치했다.

1026년, 튀르크계 가즈나 왕조의 술탄 마흐무드가 인도 방면으로 침입했는데, 그의 공격을 받은 지역 가운데 신드도 있었다. 마흐무드는 합바리 왕조의 수도였던 만수라를 파괴하고, 신드를 제국의 영토로 합병하여 아랍의 신드 통치를 종식시켰다. 12세기의 아랍 학자 아븐 알 아티르와 14세기의 아랍 역사가 이븐 칼둔은 합바리 왕조의 몰락을 가즈니의 술탄 마흐무드에게 돌렸다.

11세기 초, 가즈나 왕조가 셀주크 제국에게 패배하고 쇠퇴한 이후 인도 북서부 지역에는 일종의 권력 공백이 생겨났다. 1026년경 신드 지역에서는 시아파 이슬람계 수므라 왕조가 성립되었고, 곧 지역 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들은 14세기까지 그 지역을 지배했다.

가즈나 왕조와 구르 왕조는 수므라 왕조와 함께 11~12세기 초에 걸쳐 신드 일부 지역(아마도 북부)을 계속 통치했다. 정확한 위치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수므라 왕조는 아마도 인더스 강 하구(남부)에 근거지를 두고 통치했을 것이다. 13세기 구르 왕조가 호라즘 제국에게 멸망한 이후 들어선 델리 술탄국(노예 왕조) 또한 신드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그 방법은 이전의 두 왕조보다는 다소 간접적이었다. 당시 수므라 왕조의 왕이었던 시뭇딘 차미사르가 델리 술탄 일투트미쉬에게 항복했는데, 그는 그 보답으로 술탄국의 봉신으로서 계속 신드를 통치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1335년, 삼마라 불리는 부족 공동체가 수므라 왕조를 전복시키고 삼마 왕조를 설립했고, 마지막 수므라 통치자는 델리 술탄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의 보호 아래 구자라트로 망명했다. 무함마드 빈 투글라크는 1351년 신드로의 원정을 떠났다가 죽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이 지역에서의 수므라 왕조 통치를 회복시키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삼마 왕조는 델리 술탄국의 지배 아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의 후계자 피루즈 샤 투글루크는 1365년과 1367년 2차례에 걸쳐 신드를 공격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갔다. 다만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삼마 왕조를 일시적으로 제국의 영향권 아래 넣을 수는 있었다. 이후 델리 술탄국이 티무르의 침입으로 무너지자 삼마 왕조는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삼마 왕조는 인도-이슬람 건축 양식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고, 웅장하고 화려한 수많은 건축 문화유산들을 남겼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마클리 무덤군으로, 약 10평방 킬로미터 크기의 왕족들을 위한 네크로폴리스이다.

15세기 후반, 튀르크계 아르군 부족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신드로 이동하여 삼마 왕조를 전복시키고 아르군 왕조를 설립했다.

근대[편집]

16세기 후반, 신드는 무굴 황제 아크바르에 의해 정복되어 무굴 제국의 수바로 편입되었다. 이전의 삼마 왕조와 아르군 왕조의 수도로 기능했던 타타는 무굴 수바 시기에도 여전히 수도 역할을 계속했다. 1707년 아우랑제브가 사망하면서 무굴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한 이후, 신드에서의 무굴 통치는 타타를 거점으로 남부에서 18세기 초까지 계속되었으나, 북부에서는 신드 토착 부족들을 중심으로 반독립적인 칼호라 왕조가 성립되어 18세기 중후반까지 통치하였다.

1783년, 발루치스탄 토착 부족들(발루치인) 중 하나였던 탈푸르족이 신드로 이동하여 칼호라 왕조를 패배시키고 탈푸르 왕조를 세웠다. 이후 탈푸르 왕조는 하이데라바드, 카이르푸르, 미르푸스 하스, 탄도 무함마드 칸을 지배하는 4개 분파로 나뉘어졌다. 지배 기간 동안 그들은 두라니 제국에게 종속되어 있었고, 두라니 제국의 샤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다.

1843년, 탈푸르 왕조는 미아나 전투와 두보 전투에서 영국에게 패배했고, 신드 지역은 영국령 인도의 영국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신드 북부의 탈푸르 카이르푸르 분파는 인도 번왕국으로써 영국 통치 기간 동안 어느 정도의 주권을 유지했다.

1947년, 영국이 인도에서 철수한 이후 파키스탄 자치령이 건국되었는데, 신드 지역에서 통치권을 유지하고 있던 탈푸르 왕조는 이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1955년에 탈푸르 신드는 완전히 서파키스탄으로 합병되었다.

영국령 인도 치하 신드[편집]

영국은 1843년 신드를 정복했다. 찰스 제임스 네이피어 장군은 라틴어로 'Peccavi'(나는 죄를 지었다)라는 한 마디의 전보를 통해 인도 총독에게 승리를 보고했다고 한다. 이를 영어로 풀이하면 'I have sinned'인데, 이는 죄를 저질렀음을 뜻하는 Sin과 Sindh(신드)의 발음이 유사한 것을 이용한 일종의 언어 유희였다. 즉, 실제로 그는 'I have Sindh(신드 지역을 얻었다)'라고 보고한 것이다.

영국인들은 신드를 통치하면서 2가지 목표를 수립했는데, 하나는 영국 지배권의 강화이고, 나머지 하나는 신드를 영국 시장의 제품 및 원자재의 수입 원천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영국은 신드를 합병한 지 몇년 후 이를 봄베이 주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주도였던 봄베이(오늘날 뭄바이)와 신드 사이의 거리는 매우 멀었고, 때문에 지역 격차가 커지면서 신드인들의 불만이 증가하였다. 때때로 신드를 펀자브 지방에 합병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이는 영국인들간의 의견 불일치와 신드의 무슬림과 힌두교도 모두가 반대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신드인들 사이에 봄베이 주와 분리되자는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1913년 열린 인도국민회의 총회에서, 한 신드 출신 힌두교도는 신드가 독특한 문화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봄베이 주에서 신드를 분리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신드에서 지배적인 힌두교 상업 계급이 영국령 인도 치하에서 무역항으로 번영을 누리던 봄베이와 경쟁하는 것에 큰 위협을 느낀 것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또한 토착 무슬림 엘리트들과 신흥 무슬림 중산층들은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보호책으로써 봄베이 주로부터의 분리를 요구했다. 반면 신드의 하층 힌두교도들은 봄베이로부터의 분리에 크게 반대했다.

비록 신드는 인도의 다른 지역들 보다 훨씬 깨끗한 공동체적 화합의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무슬림과 힌두교도들이 모두 참여한 수피즘을 바탕으로 종교적 혼합주의, 공동체적 관용의 문화가 존재했지만, 이 시기에 몇몇 무슬림들은 힌두교적 상업 차별 요소인 와데라(waderas), 그리고 바니아(banias)를 도입하여 힌두인들을 매우 탄압했다. 경제적으로 착취당한 무슬림 또한 이에 합류하여 신드의 힌두교도 농민들을 탄압하기도 했다.

한편, 1920년대에 신드의 정치 흐름은 카라치에서 킬라파트 운동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특징지어졌다. 신드에서 살아가고 있던 수피즘 성인의 후손들 대부분이 오스만 칼리파의 수호를 선전하는 이 운동에 가담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지원을 해주었다. 곧 신드는 킬라파트 운동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다.

마침내 1936년, 신드는 봄베이 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러나 이후 열린 신드의 첫 지방 선거는 종교&문화의 이질성 및 경제적 불평등과 결합한 사회적 문제들이 정치와 연관됨으로써 큰 실패로 끝났다. 영국의 정책으로 인해 수십년 동안 신드의 많은 경작지가 무슬림들로부터 힌두교도들에게로 이전되었고, 힌두교도들의 성지 인근에 세워진 모스크를 두고 서로 싸우기도 했다. 신드 무슬림 연맹은 이러한 상황을 악용하여 모스크를 무슬림들에게 돌려달라고 선동했다. 결국 무슬림 연맹 회원 1천 명이 투옥되었다.

이후 영국은 무슬림들에게 모스크를 돌려주었다. 봄베이 주에서 신드가 분리되면서 발언에 힘이 실렸던 무슬림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힘을 키우게 되었고, 많은 신드의 이슬람주의자들이 파키스탄 운동을 지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는 무함마드 알리 진나가 있었다. 비록 저명한 신드 무슬림 민족주의자였던 굴람 무타자 사예드(Ghulam Murtaza Syed)가 1940년 중반에 진나와의 관계 악화로 전인도 무슬림 연맹을 탈퇴하기는 했지만, 대다수의 신드 무슬림들은 압도적으로 파키스탄의 건국을 지지했다. 마침내 1946년, 무슬림 연맹원들은 그들이 염원하던 파키스탄의 건국을 두 눈으로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산업[편집]

신드의 경제는 파키스탄에서 펀잡주 다음으로 크다. 주의 수도 카라치는 파키스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자 주요 금융 중심지이다. 신드주에 있는 항구들은 파키스탄 산업 분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 중 카심과 카라치 등이 가장 규모도 크고 사람들로 많이 붐빈다. 한편 신드의 나머지 지역들은 농업 기반 경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파키스탄의 다른 지역들을 위한 과일, 소비재 및 채소를 생산한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신드주〉, 《위키백과》
  2. 신드〉, 《나무위키》
  3. 두산백과 : 신드주〉,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남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남아시아 국가
인도 도시
남아시아 도시
남아시아 지리
남아시아 문화
남아시아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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