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
다카(벵골어: ঢাকা 다카, ˈɖʱaka)는 방글라데시의 수도이자, 최대의 도시이다. 방글라데시 중앙부에 위치한다. 방글라데시의 상업·공업의 중심지이고, 황마·면 가공이나 식품 가공 등의 제조업이 발달해 있다.
개요[편집]
- 행정 단위: 수도
- 면적: 360 km2
- 인구: 700만명 (2008년)
- 지역번호: 02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www.dhakacity.org/
역사[편집]
7세기부터 현재 다카가 있는 지역이 시가지 되기 시작하였으며 8세기에는 불교 국가 카마루빠 영역이어서 팔라 왕조가 통치하였고 9세기에는 힌두교의 세나 왕조가 이 지역을관할하였다. 12세기가 되어, 여신 다케시와리를 모시는 사원이 발랄 세나에 의해 건립되면서, 이에 연관되어 도시는 "다카"라고 불리게 되었다. 당시 다카 주변은 벵갈라(Bengalla)라고 했으며, 시내에는 작은시(Lakshmi Bazar, Shankhari Bazar, Tanti Bazar, Patuatuli, Kumartuli, Bania Nagar, Goal Nagar)가 일부 섰다. 세나 왕조 이후에 다카는 델리 술탄 왕조을 보냈던 투르크인과 파슈툰 족의 통치가 하였지만 1608년에 무굴 제국이 현지를 지배했다. 이 시기에 많은 모스크와 요새 그리고 대학들이 설립되었으며, 이슬람교도들은 세금을 면제받았다. 이러한 조치는 도시 주변에서 이슬람교도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시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때가 되어서야 다카가 요새나, 타운보다는 시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무굴 제국의 벵골주의 주도가 되었던 다카에서는 도시 개발과 인구가 증가되기 시작하였다. 행정 책임을 담당한 초대 주지사 이슬람 칸은 황제 자한기르를 따서 도시 이름을 자한기르 나가르("자한기르의 도시'라는 뜻)라고 지었다. 샤이스타 칸 장군 시절 도시는 19 × 13km의 시역에 약 100만명의 인구를 지닌 도시로 발전했다.
영국의 통치[편집]
1765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수입을 징수할 권리(디와니 라이트, Diwani right)을 얻었으며, 1793년에는 벵골의 귀족(나와브, Nawab)은 벵갈과 비하르, 오디샤 지방에 대한 모든 이권을 포기할 것을 강요받았으며, 영국은 이 지역을 지배할 행정권도 손에 넣었다. 이 기간 동안 콜카타의 인구가 증가한 것으로 대조적으로, 이 지역 도시에서 인구 유출이 일어나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상당한 발전과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1874년에는 현대적인 도시 급수 체계가 도입되었고, 전력 공급도 1878년에 시작되었다. 한편, 다카 주둔지가 도시 근교에 설치되어 영국과 벵골 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20세기[편집]
1905년의 벵골 분할령이 발표되었고 다카는 신설된 동 벵골과 아삼의 수도로 선포되었지만, 이 법령은 1911년에 철회되었다.1947년, 인도가 분리 독립하면서, 다카는 동파키스탄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인도 분할은 주민 간의 대립을 치열하게 만들었고, 힌두교도 대부분이 인도로 이주하였고, 반대로 이슬람교도들의 유입이 늘었다. 다카는 지방 행정부였기 때문에 정치적 시위나 폭력 행위가 빈발하게 일어났다. 또한 파키스탄의 공용어를 우르두어로만 통일하자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벵골어 운동이 터져 나왔다. 이 운동은 파키스탄 경찰이 평화 시위를 벌이고 있던 학생들 다수를 사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이 사건을 기념한 것이 사히드 마나르로 사건이 일어난 2월 21일에는 국제 모국어의 날이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다카는 정치 활동의 온상으로 남았으며, 벵골인에 의한 자치를 요구하는 운동이 점차 힘을 얻었다.
1970년 대형 태풍 볼라 사이클론이 다카와 주변 지역을 덮쳐 약 50만명이 사망했다. 시 절반 지역이 수몰되었고, 수백만 명이 수재 피해를 당했다. 중앙 정부의 민족 차별적이고 불충분한 구호 지원은 민중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1971년 3월 7일에는 벵골인 정치가 무지부르 라흐만이 스후와루디 광장에서 민족주의의 집회가 열렸다. 집회에는 약 100만명이 결집했고, 이것이 3월 26일에 행해진 방글라데시 독립 선언으로 이어졌다. 이에 대해 파키스탄군은 ‘탐조등 전략’을 감행하여 수천 명을 체포하였고, 고문과 살해를 저질렀다.전란은 9개월에 걸친 유혈 전투로 발전하였으며, 12월 16일에 파키스탄군이 항복하면서 방글라데시 독립하고 다카를 수도로 정하였다. 농촌 지역에서 이주 노동자를 받아들이는 형태로 급속하게 인구를 늘렸고 도시가 대규모로 확장되었다. 이에 따라 상업 및 산업도 발전하고 인프라 정비에도 착수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취득이 붐이 일어나 시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우트라 지구, 모하마드푸르 지구, 바리다라, 미르푸르, 그리고 모티지힐 등의 지역이 개발되었다.
지리[편집]
다카는 방글라데시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며, 갠지스 강, 브라마푸트라 강, 메구나 강이 구성하는 갠지스 델타의 거의 중앙 하류에 해당되는 브리곤가 강의 동쪽 해안에 위치한다. 지질은 충적세에서 플리오세 시대에 퇴적된 층이며, 해발 2-12m 정도로 낮은 편에 속한다. 열대 식물과 습윤한 기후와 함께 우기에 집중되는 강우 및 사이클론에 의해 종종 홍수 피해를 입기도 한다.
시는 8 개 주요 지역(타나) : 랄 바그, 다카 코트왈리, 스트라푸르, 람나, 모티즈힐, 팔탄, 단몬디, 모하마드푸르, 테지가온으로 나뉜다. 16 지구는 굴산, 미르푸르, 팔리비, 샤 알리, 투라그, 사부지바그, 칸톤먼트, 데므라, 하자리바그, 삼푸르, 밧다, 카푸룰, 캄란기르차, 킬가온, 우타라로 나뉜다.
기후[편집]
다카는 기온이 높고, 강우가 잦은 다습한 열대성 기후이며, 쾨펜의 기후 구분으로는 사바나 기후에 해당한다. 도시에는 몬순이 통과하며, 연평균 기온은 25℃, 월평균 기온은 1월에 18℃, 8월에 29℃가 된다.[23] 연간 강수량 1,854mm로 그 중 80%는 5월부터 9월의 사이에 기록된다. 교통 정체나 산업 폐기물 등의 영향으로 대기나 수질의 오염이 진행되어, 이것들은 건강이나 거주 환경 등에 악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주변의 누마자와지나 습지 등은 고층 빌딩 등 부동산 개발에 의해서 파괴에 직면하고 있어, 이러한 자연의 생식지가 파괴되는 현상은 환경오염과 함께, 생물의 생존 다양성을 현저하게 위협하고 있다.
행정 구역[편집]
8개 주요 지역(타나):
- 랄 바그
- 다카 코트왈리
- 스트라푸르
- 람나
- 모티즈힐
- 팔탄
- 단몬디
- 모하마드푸르
- 테지가온
16 지구:
- 굴산
- 미르푸르
- 팔리비
- 샤 알리
- :* 투라그
- 사부지바그
- 칸톤먼트
- 데므라
- 하자리바그
- 삼푸르
- 밧다
- 카푸룰
- 캄란기르차
- 킬가온
- 우타라
인구[편집]
다카시 당국이 관할하는 지역에서는 인구는 약 700만명이다. 광역시 지역까지를 대상으로하면 2008년 현재 인구는 1,280 만명이 된다.인구 성장률은 4.2%로 아시아에서도 높은 수치를 나타내는 도시 중 하나이다. 이것은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된 인구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증가분의 60%를 차지했다.
도시에는 방글라데시의 모든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구시가에는 "다카이아"라는 오랫동안 그곳에 살았던 집단이 있으며, 특유의 습관과 방언을 유지하고 있다. 1만 5천에서 2만 명 정도의 규모로 로힝야족, 산탈리족, 가로족, 차크마족, 멘디족 사람들이 도시에 살고 있다.
종교[편집]
다카는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큰 도시이고 벵골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1947년에 인도에서 빠져 나왔고, 소수의 비하르족 무슬림들이 거주하고 있다. 다카의 종교는 이슬람교가 지배적이며, 수니파가 주류를 차지한다. 그러나 소수의 시아파와 아흐 마디야 사람들도 증가 경향에 있다. 힌두교도는 두 번째로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으며, 불교나 기독교는 소수이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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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남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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