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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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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스
홈스 위치

홈스(아랍어: حمص, 영어: Homs)는 시리아 서부의 도시홈스주주도이다. 인구는 66만 명으로 시리아에서 다마스쿠스, 알레포 다음으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홈스는 내륙 지방에 있는 도시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를 연결하는 중심 도시로서 고대 로마 시대에는 에메사(Emesa)로 알려져 있었다.[1]

개요[편집]

홈스는 시라아 중서부, 오론테스강 동쪽 둑을 따라 위치하고 있다. 해발고도는 450m이고 다마스커스에서 160km 떨어져 있고 알레포에서는 190km 떨어져 있다. 십자군 시대의 라 카멜레(la Chamelle)라고 불었으며 오늘날 홈스는 시리아의 주요 산업 중심지 중 하나이다. 4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깊은 도시이며, 십자군 전쟁기에는 서유럽 성채 건축의 진수라 불리는 크락 데 슈발리에가 도시 인근에 방어용으로 지어지기도 하였다. 3세기의 로마 황제인 세베루스의 황후 율리아 돔나와 이후 황제가 되는 엘레가발루스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홈스는 고대 오리엔트 지방의 태양신 숭배 신앙의 중심지로서 '검은 돌들의 어머니' (أم الحجارة السود)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무슬림에게는 7세기의 명장인 이븐 알 왈리드의 도시로 불린다. 성 엘리아누스 성당과 알 누리 모스크의 공존이 돋보였던 도시였으나 시리아 내전 중에 일어난 홈스 공방전으로 시가지가 심하게 파괴되었다. 무자비한 폭격과 함께 수천 명의 시민들이 희생되었고 결국 2015년 12월, UN의 중재 하에 시내의 반군과 그 가족들은 홈스를 빠져나갔다. 2016년 통계에 의하면 20만으로 줄었다고 한다. 2018년부터 대대적인 재건과 함께 영향을 받은 도시 일부로의 재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도시에는 역사적인 모스크와 교회가 다수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인 크라크 데 체발리에스 성과 가깝다.[2]

지리 및 기후[편집]

홈스주는 시리아에서 가장 크다. 수도 홈스는 특히 비옥한 지역의 오론테스강 동쪽 둑을 따라 위치한 시리아 중서부에 위치해 있다. 도시는 서쪽에 위치한 해안산맥의 남쪽 외곽 지역과 홈스 갭을 내려다보는 레바논 산 사이에 있다. 갭 때문에 홈스 주변 지역은 북쪽과 남쪽의 내륙 지역보다 훨씬 더 많은 강우량과 돌풍을 받는다. 홈스의 동쪽에는 시리아 사막이 있다. 로마에서 유래한 거대한 댐에 의해 봉쇄된 홈스 호수는 남서쪽으로 알레포에서 남쪽으로 125km, 하마에서 남쪽으로 34km 떨어져 있으며 수도 다마스쿠스와 알레포 사이의 도로 중간 지점에 있다. 오론테스강은 도시를 두 개의 주요 구역으로 나눈다. 동쪽은 평지에 도시 중심과 주요 이웃들이 있고, 서쪽은 보다 최근의 현대식 교외인 알-웨어가 있다. 도시의 면적은 4,800헥타르이다.

홈스는 더운 여름 지중해성 기후를 가지고 있다. 홈스의 위치는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부드러운 영향과 바람을 확실하게 받는다. 그 결과, 이 도시는 근처의 하마보다 훨씬 온화한 기후를 가지고 있고, 평균 강수량은 360mm가 아닌 460mm로 더 높지만 바람도 더 강하다.[3]

역사[편집]

도시 중심부의 시타델(내성) 발굴 결과 기원전 2300년경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구약 성경에는 조바흐 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람세스 2세의 이집트 제국과 무와탈리 2세의 히타이트 제국이 대결한 카데시 전투가 홈스 인근의 오론테스 강가에서 일어났다.

헬레니즘 ~ 로마 시대에 홈스는 에메사로 불렸다. 도시의 기원에 대해서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창건자 셀레우코스 1세가 설립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확실한 것은 그곳에 토착 왕조가 들어섰고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의 시리아 정복을 도우며 로마의 동맹국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기원전 1세기부터 에메사를 다스리던 셈계(아랍/아람인) 왕조는 군주임과 동시에 태양신 엘 가발(엘라가발)을 모시는 제사장이었다. 이러한 정교일치 체제는 300여 년간 이어졌다. 그 시조격인 아지즈는 본래 베두인 족장이었는데 시리아로 이주, 오론테스 강가에 정착하였다. 그는 쇠퇴해 가던 셀레우코스 왕조에 개입하여 필리포스 1세가 데메트리오스 3세를 꺾고 즉위하게 도와주었고 그 후계자인 필리포스 2세의 대관식을 주관하는 등 세력을 과시하였다. 아지즈의 아들 삼프시케라무스 1세는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협조하여 국왕으로 인정받았고, 로마의 요청대로 셀레우코스 조의 안티오코스 13세를 죽였다.

람블리쿠스 2세가 35년간 안정적으로 통치한 후 그의 아들 삼프시케라무스 2세(14 ~ 42년) 29년간 재위하며 에메사의 번영을 이끌었다. 그는 콤마게네 왕국의 공주 로타파와 결혼하였으며 에메사 일대 한정이긴 하지만 삼프시케라무스 2세는 대왕 (Regis Magni)으로 추앙되었다. 그의 치세인 32년에 에메사는 헬리오폴리스 (바알벡)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재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아지즈(42 ~ 54년)는 52년 경 할례를 받는 조건으로 헤롯 왕국의 공주 드루실라와 결혼한 일화가 있다. 하지만 드루실라는 곧 로마의 유대 총독 안토니우스와 사랑에 빠져 이혼한 후 그와 결혼해버렸다. 아지즈는 자녀 없이 사망하였고 동생 소하이무스(54 ~ 73년)이 계승하였다.

에메사 황가 이후 로마 제국은 238년의 여섯 황제의 해와 연속으로 암살된 두 황제들 또 고트족과 싸우다 전사한 데키우스를 거치며 쇠퇴하였다. 데키우스를 이은 트레보니아누스는 253년 사산 제국의 샤푸르 1세가 시리아를 침공했음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같은 해에 게르만 족이 재차 남하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게르만 족을 격퇴한 아이밀리아누스가 봉기하여 그를 죽이고 즉위하였다. 하지만 그역시 반역자 처단을 외치며 봉기한 라인 군단의 발레리아누스에게 패하여 죽었다. 세 황제의 해 (253년)를 거치며 로마의 국방력은 더욱 악화되었고 254년, 샤푸르 1세는 재차 시리아를 침공하였다. 이때 235년부터 에메사의 총독을 맡았던 에메사 왕가의 후예 우라니우스 안토니누스가 이란군을 격퇴하고 황제를 칭하기도 하였다.

634년 9월, 다마스쿠스가 함락되며 시리아에 대한 이슬람 제국의 공세가 본격화 되었다. 635년, 라쉬둔 왕조의 총사령관 아부 우바이다는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를 시리아 중부로 파견하였다. 이에 에메사와 킨나스린의 주민들은 공물을 바치며 아랍 측과 1년의 휴전에 합의하였다. 다만 동로마 지원군이 도달한다면 휴전은 무효화 된다는 조건 하에서였다. 에메사는 1만 디나르와 100벌의 예복을 제공하였다. 휴전이 성립되자 에메사의 성문은 개방되었고 무슬림들이 시내의 시장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에메사의 동로마 지도부에게 휴전은 수비 태세를 강화할 시간 벌이용에 불과하였다.

에메사는 동로마 제국의 대아랍 사령부가 위치했던 중요한 도시였고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지원군을 파견하였다. 에메사 총독 하르비스는 곧 다가올 겨울이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아랍 군대를 약화시킬 것을 믿고 협정을 위반하기로 한 것이다. 한편, 에메사 대신 시리아 중북부를 공략하던 아랍인들은 샤이자르를 항복시킬 즈음 이 소식을 들었다. 할리드를 선두로 한 군대가 협정을 어긴 에메사를 포위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동로마 수비군이 성밖을 나와 맞섰지만 할리드에게 패배하고 성안으로 후퇴하였다. 원형 성벽에 해자가 둘러진 에메사는 당시 시리아 도시들 중 가장 견고한 요새였다.

칼리파 우마르는 시리아를 남북으로 나누어 남부는 다마스쿠스, 북부는 에메사 (홈스)를 중심으로 분할하였다. (준드 힘스) 이때 5백여명의 사바하 (무함마드의 동료)를 중심으로 아랍인들이 유입되며 홈스는 7세기경 시리아에서 무슬림 비율이 가장 많은 도시였다. 그럼에도 홈스 중심부에 위치한 성 요한 성당의 절반이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마스지드 (모스크)로 개조된 것을 제외하면 시내의 교회들은 변화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 665년, 4대 칼리파 알리의 즉위와 함께 1차 피트나 (무슬림 내전)가 벌어졌다. 이때 홈스 시민들은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 1세 대신 정통성을 지닌 알리를 지지하였는데, 661년 알리가 암살되며 무아위야가 승리하였다. 그는 홈스가 중심인 준드 힘스를 분할하여 시리아 북부를 알레포를 중심으로 한 준드 킨나스린으로 독립시킴으로써 응징하였다. 이때부터 시리아는 3개의 지방으로 분류되게 되었다.

홈스는 우마이야 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알리를 지지하는 시아파의 거점으로 남았다. 특히 알리의 지문이 남아있다고 여겨지는 설교단은 성유물로 여겨졌다. 한편, 우마이야 왕조 말엽 벌어진 3차 피트나 당시 홈스 주민들은 바누 카이스에 맞서 바누 칼브가 속한 예메니, 그리고 그 예메니를 선호한 왈리드 2세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그가 살해되고 야지드 3세가 집권하자 홈스 시민들은 무아위야 1세의 증손자 아부 무함마드를 칼리파로 옹립하였으나 정부군에 패하였다. 왈리드 2세 사후 744년에 야지드 3세가 요절하고 그의 후계자인 이브라힘이 양위하며 마침내 마르완 2세가 집권하였다. 제국 복원을 꾀한 마르완 2세는 745년 말, 우선적으로 홈스를 포위하였다. 포위는 무려 10개월이나 지속되었고 그 틈에 이라크 북부에선 앗 다하크가 카와리지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마침내 746년 여름, 홈스는 함락되었다. 다만 3년도 못가 도시는 아바스 왕조령이 되었다.

891년 무슬림 지리학자 알 유쿠비에 의하면 홈스는 큰 강 옆에 위치하여 주민들의 식수 걱정이 없다고 하였다. 10세기 초엽 아랍 지리학자 알 마수디는 홈스의 거주민들이 그 아름다움으로 유명하였다고 기록하였다. 985년 알 무카다시는 홈스가 시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나 '큰 불행'을 겪었고 파괴의 위협을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함단 왕조는 960년대 동로마 제국의 공격을 받아 약화되었다. 그러자 함단 조의 튀르크계 장군이던 아프타킨이 북부 시리아를 침공하여 홈스를 근거지로 삼았다. 975년, 동로마의 중흥을 이끈 요안니스 1세는 파티마 제국군을 격파하고 남하하여 340년만에 홈스에 로마군이 주둔하였다. 이때 일시적으로 모스크들이 성당으로 개조되었고 학살과 약탈이 이어졌다. 이후로 파티마 제국의 속국인 미르다스 왕조의 지배를 받던 홈스는 1090년, 아크 산쿠르 알 하지브가 이끄는 셀주크 제국군에게 점령되었다.

1118년 트리폴리 포위 당시 다마스쿠스 (부리 왕조) 군대가 구원을 시도했다가 패한 후 홈스로 도주하였다. 십자군이 추격해왔으나 요새화된 홈스를 공격하기보다 샤이자르 등의 마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1265년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는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사원을 세웠다. 다만 당시의 모습은 1912년의 보수 공사로 인해 다소 달라졌다.

1516년 홈스는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고 15세기의 혼란에서 벗어나 농경과 목축, 그리고 모직물 산업이 중흥기를 맞을 수 있었다. 알레포의 양 & 염소를 다마스쿠스의 소 & 낙타와 교환이 이루어지던 홈스의 가축 시장 역시 매우 유명했다. 또한 도시에서 생산된 비단은 이스탄불의 상류층에 의해 소비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유럽 정책에 집중하며 시리아 지역은 서서히 쇠퇴하였다. 17세기 무렵 도시를 방문한 프랑스인 여행가는 성벽의 견고하모가 시장의 아름다움이 유지되었다고 기록하였지만 1785년 방문한 여행가는 과거의 명성에 비해 현재는 '처참한' 상태이며 넓지만 폐가가 많고 다마스쿠스에 의존하는 상태라고 기록하였다.

18세기 말엽 오스만 당국이 반란을 우려하여 성문을 허물어버리자 홈스는 15세기 때처럼 베두인의 약탈에 시달려야 했다. 따라서 19세기 초반 어려운 시절을 보내던 홈스는 1832년 자립한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시리아를 등한시 여겼고 분노한 시민들이 봉기하였는데, 근대화된 이집트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때 유서깊은 시타델이 파괴되었다. 다만 1860년대 홈스를 회복한 오스만 제국은 시리아의 중요성을 깨달았는지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1870년대 유럽의 직물 산업이 침체에 빠지자 홈스의 면화가 산업이 발전하였다. 홈스 내외로 5천여 개의 직물 공장이 가동하는 것을 본 영국 영사는 '시리아의 맨체스터'라는 말을 남겼다.

19세기 말엽의 경제 부흥을 계기로 시리아의 중심 도시로 재부상한 홈스는 1차대전 이후 수립된 프랑스의 위임통치 하에 놓였다. 1925년 가을, 드루즈 교도들을 중심으로 반프랑스 봉기가 시리아를 휩쓸었을 때에 홈스도 그에 동참하였다. 반란은 진압되었고 프랑스는 1932년 다마스쿠스의 군사 학교를 홈스로 옮겨 도시에 대한 장악을 공고히 하였다. 동시에 키르쿠크에서 트리폴리로 이어지는 송유관이 과거 대상들의 행렬을 연상시키며 홈스를 지나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 당국은 홈스 군사 학교에 소수인 알라위 파를 기용하여 다수인 수니 무슬림을 감시하게 하였다. 아사드 정권을 세운 하페즈 알 아사드 역시 그 출신이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때에 이스라엘 공군이 홈스의 정유소를 폭격하기도 하였다.

2011년 5월부터 홈스는 시리아 정부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식량과 의약품, 연료 등이 차단되며 고통의 도시가 되었다. 무자비한 폭격과 함께 수천명의 시민들이 희생되었고 결국 2015년 12월, UN의 중재 하에 시내의 반군과 그 가족들은 홈스를 빠져나갔다. 현재 복구 공사가 진행중이다.

2023년 10월 5일, 홈스 육군사관학교에서의 드론 공격으로 인해 장교 졸업자 및 행사 참석자 100여명이 사망하고 약 300명이 부상을 입었다.[4]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홈스〉, 《위키백과》
  2. 홈스〉, 《나무위키》
  3. "Homs", Wikipedia
  4. 홈스〉, 《요다위키》

참고자료[편집]

  • 홈스〉, 《위키백과》
  • 홈스〉, 《나무위키》
  • "Homs", Wikipedia
  • 홈스〉, 《요다위키》

같이 보기[편집]

서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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