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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폴리 (레바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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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폴리
트리폴리 위치

트리폴리(아랍어: طرابلس, 영어: Tripoli)는 지중해 동부 연안에 위치한 레바논도시로, 북부주주도이며 광역 인구는 약 50만 명으로 레바논에서 베이루트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항구도시이기도 하다. 아랍어로는 타라불루스(Tarābulus)라고 하며, 정식 지명은 타라불루스아슈샴(Tarābulus ash-Shām)이며 동쪽의 타라불루스라는 뜻으로, 같은 이름의 리비아의 수도와 구별하기 위한 명칭이다.[1]

개요[편집]

트리폴리는 동지중해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레바논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북쪽으로 8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BC 700년경부터 그리스의 도시 트리폴리로 알려졌다. 고대 아시리아 제국에 정복당한 기록이 있을정도로 유서 깊은 도시이다. 이후 페니키아인들이 무역도시를 세웠고 로마 제국과 이슬람 제국를 거쳐 발전해오다 십자군 전쟁 당시 트리폴리 백국이 세워젔으며 오랫동안 십자군의 근거지 역할을 하였다. 이후 맘루크 왕조가 이 도시를 정복, 대대적으로 파괴하면서 도시가 초토화되었으나 곧 재건되어 다시 번영하였고 그후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항구도시로 크게 발전하였다. 1910년 영국이 점령한 뒤 1941년 레바논의 영토가 되었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는 레바논이지만 거주민의 대다수는 수니파 무슬림이다. 아부알리강 양안에 펼쳐지는 시가지와 알미나항을 중심으로 하는 2개의 지역으로 나뉜다. 서남아시아 유전지대의 석유적출항이며, 이라크 키르쿠크로부터 뻗은 송유관의 종점이다. 주요산업은 정유, 비누제조 및 잎담배, 과일재배와 어업 등이다. 고대도시의 흔적은 없고 현재의 시가지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시대의 유산이다.[2]

명칭[편집]

인지도 면에서 리비아트리폴리에 비해 뒤쳐지지만, 그 역사성만은 압도한다. 한편 두 도시들은 영어 및 한국어로 모두 트리폴리(Tripoli), 아랍어로도 둘 다 타라불루스(طرابلس)로 표기된다. 따라서 구별을 위해 레바논의 도시는 현대 표준 아랍어로 타라불루스아샴(طرابلس الشام), 즉 레반트의 트리폴리로도 지칭된다. 그외에 현지인들은 알파이하(الفيحاء)로도 지칭하는데, 아랍어로 발향(發香)의 뜻을 지닌다. 한때 주변의 광대한 오렌지 농장으로 둘러쌓였던 도시에 오렌지 꽃이 개화할 무렵이 되면 시가지가 그 향으로 가득하였던 것에서 기원한 별명이라고 전해진다.

기후[편집]

트리폴리는 온화한 습한 겨울과 매우 건조하고 더운 여름을 가진 더운 여름 지중해성 기후( Csa )를 가지고 있다. 서유럽에서 온 따뜻한 지중해 해류로 인해 일년 내내 기온이 온화하다. 따라서 레바논 내륙과 비교했을 때 겨울에는 약 10°C 더 따뜻하고 여름에는 약 7°C 더 시원하다. 눈은 10년에 한 번 정도 내리는 극히 드문 현상이지만 우박은 흔하고 겨울에는 비교적 규칙적으로 발생한다. 강수량은 겨울철에 집중되고 여름은 일반적으로 매우 건조하다.[3]

역사[편집]

도시의 남쪽 교외인 아부 할카 일대에서는 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3만년 전의 임시 거처 유구가 발견되었다.

기원전 1400년 경부터 주거지가 형성되었으며, 비슷한 시기 고대 이집트의 아마르나 서신에서 '데르블리'라는 명칭으로 기록되며 역사에 등장하였다. 그외에 아흘리아 혹은 와흘리아로도 지칭되었으며, 기원전 9세기 아시리아 국왕 아슈르나시팔 2세가 침공했을 당시 도시는 '마할라타' 혹은 마이자 등으로 불렸다. 페니키아 인들이 상업 거점으로 삼은 후에는 아타르로 불렸으며, 아케메네스 제국(페르시아)의 지배 하에 페니키아 지방의 주요 도시들 중 하나로 성장하였다. 그무렵 트리폴리는 페니키아 북부의 주요 항구이자 상업의 중심이었고, 해상 무역과 함께 시리아 내륙 간의 대상 무역을 수반하며 후일 근대까지 이어지는 도시의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고전기 트리폴리 도시 주변부에는 현 레바논-시리아 해안 일대의 페니키아 도시들 중 티레, 시돈, 아라두스(아르와드 섬) 출신 주민들이 이주하여 각자의 자치적인 행정 구역을 이루었다. 헬레니즘 기에 그리스 인들은 이렇게 3개의 구별되는 구역을 갖춘 것에 기인하여 도시를 '3개의 도시'라는 의미의 Τρίπολις (트리폴리스)로 지칭했는데 트리폴리 지명의 어원이 되었다. 디아도코이 전쟁기에 가자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셀레우코스 연합군에 패배한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이곳으로 후퇴한 바 있다. 그후 셀레우코스 왕조 시대에 그 해군의 조선소가 설치된 트리폴리는 기원전 112년 자체적인 화폐를 주조할 권리를 부여받았고, 기원전 105년에는 자치 도시가 되었다. 높은 수준의 자치를 누리던 도시는 기원전 1세기 로마 제국령이 되어 다른 페니키아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업과 삼나무 목재 거래에 종사하였다.

7세기간 이어진 로마 지배기 중에 트리폴리에는 경기장과 체육관 등 공공 건물들이 지어졌고, 270년에서 286년까지 그 동전 주조소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다만 551년 베이루트 지진으로 인한 해일로 도시가 파괴되며 로마 시대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637년 말엽 트리폴리는 이슬람 제국에 점령되었고, 기존 페니키아 체제에서 벗어나 준드 디마슈크 (다마스쿠스 군구)에 편입되었다. 아랍인들의 유입과 함께 도시는 지중해를 통틀어 중요한 무역 거점으로 부상하였다. 우마이야 왕조기에 트리폴리는 그 수도인 다마스쿠스의 외항이었고, 이스칸다리야에 이른 제국의 두번째 군항이었다. 10세기 중반부터 도시는 파티마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1047년 트리폴리를 방문한 여행가 나시르이 호스로는 인구를 약 2만으로 추산하였고, 전부 쉬아 무슬림이라 기록하였다. 그에 의하면 파티마 '술탄'은 도시에서 대군을 일으켜 동로마 등 외세의 침공에 대비하고자 했다고 한다.

1099년 1월 십자군은 폐허로 변한 마라트 알 누만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남하하였다. 그들은 히슨 알 아크라드(미래의 크락 데 슈발리에)에 이르러 3주간 머물렀다. 그 무렵, 십자군의 군사력을 경계하던 잘랄 알 물크는 그들과 동맹을 맺을 계획으로 그 지도자 레몽 드 생 질에게 사절을 보내어 대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일단의 십자군이 트리폴리에 입성했는데, 도시와 그 일대의 부유함에 감탄한 그들은 돌아온 후 레몽에게 인근 도시들 중 하나를 공격해 협박에 나설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공격을 결심한 레몽은 잘랄 알 물크의 선물에도 2월 15일 '트리폴리의 관문' 아르카를 포위하였다. 트리폴리에 속한 다른 도시 타르투스가 손쉽게 점령된 것과 달리 아르카의 수비대는 3달간 맹렬히 저항하였다. 결국 5월 13일 레몽은 주변의 설득에 포위를 풀고 남하하였고, 트리폴리 주변을 느리게 지나갔다. 겁을 먹은 잘랄 알 물크는 3백명의 기독교도 포로 석방과 함께 말 15필 및 1만 5천 베잔트의 조공을 바쳤고 식량과 길잡이까지 제공하였다. 이에 만족한 레몽은 도시에 별 해를 가하지 않고 갈길을 재촉하였다.

1103년 레몽은 제노바 함대와 함께 트리폴리를 공격했지만 실패하자 비블로스로 시선을 돌려 이듬해 4월 점령하였다. 이렇게 남북으로 트리폴리를 고립시킨 레몽은 도시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였다. 이에 반격에 나선 수비대는 1104년 9월 몽스 페랑두스 성채를 공격하였고 도중 발생한 화재에 중상을 입은 레몽은 이듬해 2월 사망하였다. 다만 하란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한 후, 트리폴리를 구원하기로 했던 하란의 영주 소크만도 비슷한 시기 사망하며 십자군의 봉쇄는 이어졌다. 레몽의 사후 그의 차남 알퐁스가 백작위를 계승하였는데, 당시 겨우 1살이었기에 본국 프랑스에 머물렀다. 따라서 그의 사촌 기욤 (알 세르다니)이 섭정하였는데, 1108년 본국인 툴루즈 백작국을 상속받았던 레몽의 장남 베르트랑 (이븐 생 질)이 그를 계모에게 매각하고 레반트로 향하였다. 한편 그해 4월, 계속된 포위에 절망한 파크르 앗 딘은 사촌 아불 마나킵에게 섭정을 맡기곤 5백여 기병 및 많은 예물을 동봉한 채 원군을 구하기 위한 기나긴 여정에 나섰다. 몽스 페레그리누스의 기욤은 성내 사기 저하를 기대하며 그들의 통과를 방해하지 않았다.

십자군 시대에 트리폴리는 번영하는 항구 도시였고, 특히 4천 개의 베틀을 지닌 비단 직조의 중심이었다. 그외에 레몬, 오렌지, 사탕수수 등이 거래되었다. 180년간 이어진 프랑크 지배에 도시의 주요 언어는 오크어였고 주민 구성도 라틴, 그리스, 아르메니아, 마론파,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과 아랍 무슬림, 유대인 등 민족과 종교가 다양하였다. 십자군 시대 도시의 주요한 변화는 시가지가 몽스 페렝두스 일대 내륙 시가지의 성장이었다. 시타델에는 기존 쉬아 성지를 흡수한 '순교자의 산의 성묘 교회'가 세워져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그외에 성타븨 '성 마리아 교회'와 카르멜 교회 등이 세워졌다.

1170년 시리아 대지진 당시 트리폴리의 성벽 역시 붕괴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한편 누르 앗 딘과 이집트를 두고 경쟁하던 아모리는 동로마 측에 지원을 청하기 위해 1171년 3월 트리폴리를 출항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였다. 1174년 누르 앗 딘이 사망하자 레몽 3세는 석방되었는데, 같은해 아모리 역시 사망하자 레몽은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이 되었다. 1177년에는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가 트리폴리에 당도, 현지 십자군과 홈스 및 하마를 공격하나 별 소득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누르 앗 딘의 사후 시리아를 접수한 살라흐 앗 딘이 반격에 나서나 보두앵 4세의 반격으로 패한 것이 바로 몽지스가르 전투였다. 1180년 반격에 나선 살라흐 앗 딘은 타르투스를 공격하였고, 이에 레몽은 그와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그는 강경파에 밀렸고, 그 결과 1187년 벌어진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은 대패하였다. 대부분의 십자군 도시들이 점령되었고 안티오크, 타르투스, 트리폴리, 티레 정도가 유지되었다.

1281년, 몽골군과의 2차 홈스 전투를 앞두고 술탄 칼라운은 보에몽과 10년의 휴전을 맺었다. 이듬해 1월 비블로스의 영주 기 2세는 트리폴리에 잠입해 템플기사단 지부에서 반란을 꾀하였으나 사전 협의와 달리 그들의 호응이 없었다. 기 2세는 거사를 포기하고 구호기사단 지부로 피신하나 곧 보에몽에 의해 건물의 성탑에 포위되었고, 몇시간의 대치 후 목숨 보장 대가로 항복하였다. 그러나 보에몽 7세는 약속을 어기고 일당을 도시에서 서남쪽으로 10km 떨어진 네핀에 감금해 굶겨 죽이는 잔인함을 보였다. 그후 비블로스는 백작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한편 홈스 전투 당시 몽골군에 합류한 구호기사단에 복수를 천명한 칼라운은 1285년 5월 기사단의 트리폴리 본부인 마르가트(마르캅) 성채를 점령하였다. 수비대는 타르투스를 거쳐 트리폴리로 후퇴하였다. 이로써 북쪽의 라타키아는 고립되었고, 1287년 3월 칼라운은 그곳은 본래 안티오크 령이었음으로 트리폴리와의 휴전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도시를 점령하였다

오스만 시대에 들어 트리폴리는 초반에는 다마스쿠스 에얄레트 (도)에 속한 산작이었고, 레바논 산지의 바누 아사프가 트리폴리 산작의 행정을 맡았다. 1521년 잠깐 에얄레트가 되었던 시기를 거쳐 1579년 공식적으로 다마스쿠스와 알레포 에얄레트의 일부가 합쳐져 타르투스에서 비블로스에 이르는 해안과 내륙의 홈스와 하마까지 포함하는 트리폴리 에얄레트(에얄레티 트라블루스 샴)이 성립되었다. 도시는 1612년까지 알레포의 외항으로 여겨졌고, 시리아 내륙 무역과 부근 산지의 과세에 수익을 얻었다.

17-18세기 트리폴리는 프랑스 상인들이 많이 머물렀고, 무역 권리를 놓고 유럽 각국 간의 경쟁이 일기도 하였다. 다만 배후 도시인 알레포의 쇠퇴와 함께 1864년 행정 개편 시에 트리폴리는 베이루트 빌라예트 하의 산작으로 강등되었다. 1918년 도시는 영국군에게 장악되었다.[4][5]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트리폴리 (레바논)〉, 《위키백과》
  2. 트리폴리(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Tripoli, Lebanon", Wikipedia
  4. 트리폴리(레바논)〉, 《나무위키》
  5. 트리폴리, 레바논〉, 《요다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서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아라비아 국가
페르시아 국가와 지역
아나톨리아 국가
레반트 국가
남캅카스 국가
아라비아 도시
페르시아 도시
아나톨리아 도시
레반트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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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시아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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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시아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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