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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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탈리아(튀르키예어: Antalya)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튀르키예의 도시로 안탈리아주의 주도이다. 인구는 약 220만 명이며 인구 기준으로 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부르사 다음으로 튀르키예 제5의 도시이자 튀르키예 최대의 휴양도시이다.[1]
개요[편집]
안탈리아는 동지중해와 맞닿는 튀르키예의 남해안을 대표하는 도시로, 튀르키예에선 '여행 수도'로 불릴 정도로 관광객이 많다. 따라서 영국, 독일, 러시아, 벨기에, 세르비아가 안탈리아에 영사관을 두고 있다. 러시아인들이 매우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스탄불에서 남쪽으로 약 479km 떨어져 있다. 기원전 150년경 페르가몬 왕국의 국왕 아탈로스 2세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당시에는 아탈레이아(Attaleia)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로마~동로마 시절 오랫동안 소아시아 남해안 지역을 담당하는 해군기지였고, 동시에 동지중해를 대표하는 국제 무역항으로 번영하였다. 그러다 13세기 초엽 룸 셀주크 술탄 케이쿠바트 1세가 점령한 후 튀르크화되었다. 교육 시설로는 튀르키예의 명문대 중 하나인 아크데니즈 대학교가 있다. 교통 시설로 시내에 3개의 트램 노선이 있고, 동쪽 외곽에는 3개의 터미널을 지닌 안탈리아 국제공항이 있다. 안탈리아는 여러 제국이 점령하면서 다양한 유적들이 풍부하게 남았다. 시내에는 하드리아누스 문, 안탈리아 고고학 박물관, 칼레이치 구도심, 뒤덴 폭포 등의 볼거리가 있다. 도시 자체 뿐만 아니라 인근 페르게, 아스펜도스, 시데 유적 등도 인기 관광지이다. 기후가 온화하여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지중해성 기후를 지니고 있다. 2015년 G20 정상회의와 2016년 엑스포를 개최하였다. 2019년에는 기록적인 1,36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았다.[2]
기후[편집]
안탈리아는 더운 여름 지중해성 기후(쾨펜 : Csa) 또는 건조한 여름 습한 아열대성 기후 (트레와르타 : Cf 또는 '젖은 Cs')를 가지고 있다. 더운 건조한 여름과 온화하고 비가 오는 겨울을 경험한다. 비가 내리는 기간이 흔하고 겨울에는 종종 많지만 안탈리아는 매우 햇볕이 잘 들고 일 년에 약 3,000시간의 일조량을 자랑한다. 거의 매년 겨울에 밤에 서리가 내리지만 눈은 매우 드문 현상이다. 기록된 최고 기온은 2017년 7월 1일의 45.4°C였지만 나중에 이 기록은 삭제되었고 2000년 7월 6일에 45°C로 다시 돌아갔다. 최저 기록은 1950년 2월 5일의 -4.6°C이다. 기록된 눈 깊이는 1993년 1월의 5cm이다. 평균 해수 온도는 겨울에는 16°C에서 여름에는 27°C 사이이다.[3]
역사[편집]
고대[편집]
기원전 260년경 페르가몬 왕국이 일대를 장악할 무렵 작은 항구가 있었다. 기원전 150년경 페르가몬의 전성기를 이어간 아탈로스 2세가 본격적으로 도시를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아탈리아(Ἀττάλεια)라 명명하였다. 당시 비티니아로부터 전쟁 배상금의 일환으로 20척의 함대를 인도받았던 아탈로스 2세는 강력한 해군을 건설하고자 하였고, 그 거점으로 아탈리아를 선정하였다. 아탈리아는 이후 위세를 떨치게 되는 페르가몬 해군의 기지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기원전 133년 아탈로스 2세의 조카이자 후계자 아탈로스 3세가 왕국을 로마에 넘긴 후 아탈리아는 로마 제국령 팜필리아 세쿤다 속주에 편성되었다.
서기 1세기 중엽 사도 바울과 바르나바스가 전도 기행 중에 방문한 후 아탈리아에는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130년에는 5현제 중 하나인 하드리아누스가 순행 도중 방문하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3개의 아치를 지닌 화려한 성문이 세워졌다. 팍스 로마나 이후 페르게와 아스펜도스 등이 쇠퇴한 것에 반해 아탈리아는 여전히 중요성을 유지하였다. 동로마 제국기에도 시가지가 성벽 밖으로 확장되고, 여러 성당들이 세워지는 등 번영하였다. 654년 이슬람 제국이 해전에 있어 첫 승을 거둔 돛대 해전이 아탈리아 서남쪽 해안에서 벌어졌다. 아탈리아는 사라센 (아랍) 해적들의 공격을 받았고, 그에 맞서기 위해 카리아와 팜필리아 일대에 조성된 키비레오톤 테마의 치소가 되었다.
중세[편집]
10-12세기 동로마 중흥기에 아탈리아는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아랍인 등이 왕래하는 국제 무역항으로 번영을 이어갔다. 십자군 전쟁기에도 2차 십자군의 루이 7세와 3차 십자군의 리처드 1세가 아탈리아를 거쳐 레반트로 향하였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후 도시는 일시적으로 튀르크 인들에 복속했으나, 1차 십자군 후 동로마 지배가 회복되었다. 다만 이후로도 아탈리아는 제국의 주요부에서 고립되어 육상 교통이 단절되고 해상으로만 콘스탄티노폴리스 등과 연락할 수 있는 상태였다. 아탈리아를 경유한 십자군 측 기록에 의하면 튀르크 인들이 도시 인근까지 이르러 주민들은 경작을 할 수 없었고, 해상 교역을 통해 물자를 수입했다고 한다.
한편 1176년 미리오케팔론 전투 후 영토 확장에 나선 룸 셀주크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1180년, 아탈리아 북쪽 150km 지점의 보르굴루 (현 으스파르타의 울르보를루)를 점령하고 1182년 아탈리아를 포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1186년 보르굴루에 분봉된 왕자 기야세틴 케이휘스렙은 아탈리아 점령을 목표로 삼고 준비하였다. 3차 십자군 후 1192년 케이휘스렙은 술탄에 올랐지만 (케이휘스레브 1세) 곧 내전에서 패하였고, 후임 술탄 쉴레이만샤 2세는 킬리키아 및 조지아와의 대결에 치중하여 아탈리아는 무사할 수 있었다. 1204년 4차 십자군으로 동로마 제국이 일시 붕괴한 후, 한 세기 가량 룸 셀주크의 영토에 둘러쌓여 있던 아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계 관료 알데브란도스가 자립하였다.
1243년 쾨세다으 전투에서 몽골 제국에 대패한 술탄 케이휘스레브 2세는, 이듬해 안탈리아의 내륙부 성벽을 보강하여 수비를 강화하였다. 항구 동안의 시타델은 서북쪽의 현 칼레이치 구역으로 옮겨졌다. 13세기 중엽 안탈리아는 온화한 기후와 함께, 몽골에게서 안전한 곳으로 여겨져 룸 술탄들이 동계 수도로 선호하였다. 13세기 후반 룸 셀주크의 쇠퇴기에도 안탈리아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 및 키프로스와 서유럽 등지로의 교역이 활성화되며 동지중해 무역의 주요 거점 중 한 곳으로 번영하였다. 시내에는 그리스인, 튀르크인, 유대인, 프랑크인 등이 각자의 구역에서 거주하였고 상대적인 안정 덕에 각지에서 이주민들이 유입되어 인구가 증가하였다. 당시 안탈리아는 아나톨리아 해안에서 튀르크인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
13세기 말엽 룸 셀주크의 붕괴 후 아나톨리아 각지에는 튀르크멘 베이국들이 들어섰다. 한세기 이전 보르굴루 정복 후 일대를 영지로 받은 하미트 베이의 손자인 펠레큇틴 뒨다르 베이는 에레을리를 중심으로 자립하였고, 1301년 안탈리아의 총독이 타지역 순시를 위해 성을 비운 틈에 도시를 접수한 후 동생 유누스를 총독으로 봉하였다. 1316년 뒨다르 베이는 술탄을 칭하였는데 (하미드 베이국), 1320년 콘야를 점령한 일 칸국의 룸 총독 티무르타슈가 1324년 에레을리로 진격해오자 안탈리아로 피신하였다. 한편 그해 초엽 유누스 베이의 사후 총독위를 계승한 아들 마흐무트 베이는 백부를 몽골 측에 넘겨버렸고, 뒨다르 베이는 처형되었다.
15-16세기 오스만 제국은 황자들을 지방 총독 (산작베이)로 보내 경험을 쌓게 하였다. 그중 바예지트 2세는 차남 코르쿠트를 1491년 사루한 (마니사)에 이어 1502년 테케 산작에 봉하였다. 마니사에 비해 수도에서 먼 안탈리아에 봉해진 것에 불만을 품은 코르쿠트는 1509년 이전 영지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맘루크 왕조로 망명했다가 사면을 받아 영지로 귀환하였다. 다만 1511년 후계자 위를 두고 내전이 터지자 코르쿠트는 재차 마니사로 향하였으나, 지지를 받지 못하자 동생 셀림의 설득으로 안탈리아로 돌아가 내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셀림 1세는 즉위 후 코르쿠트를 의심하여 그를 추대한다는 가짜 편지로 마음을 떠본 후 코르쿠트가 동조한다고 여기자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근현대[편집]
18-19세기 무렵 아나톨리아 지방에서는 데레 베이라 불리는 지주 가문이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고, 안탈리아도 예외는 아니어서 옛 페르게에서 발원한 테케오을루 가문이 실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던 1812년 마흐무트 2세가 탄지마트의 일환으로 그들을 복속시켰으나, 20세기 초까지 테케오을루 가문은 오스만 총독들과 향촌 권력을 두고 경쟁하였다. 이는 1825년까지 안탈리아에 상관을 두고 있던 레반트 회사의 기록에 남아있다. 1865년 탄지마트 개혁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행정구역 개편에 있어 테케 산작은 콘야 빌라예트에 편성되었다.
20세기 들어 다른 아나톨리아 서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안탈리아에는 캅카스와 발칸 출신의 무슬림 피난민들이 정착하여 인구가 증가하여 1920년 기준 3만에 달하였다. 1923년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 시까지 그리스계 주민은 전체의 1/3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외에 아르메니아 및 유대인 공동체도 있었으나 그 흔적은 파괴되어 찾아볼 수 없다. 세계 1차 대전에 뛰어든 오스만 제국은 1918년 10월, 무드로스 조약을 맺으며 항복하였다. 한편 1차 대전의 승전국임에도 보상이 적다고 여긴 이탈리아 왕국은 1919년 3월 28일, 안탈리아를 점령하며 아나톨리아 남해안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양국의 분쟁은 1920년 세브르 조약을 통해 그리스가 서부를 얻고 이탈리아가 서남해안 및 도데카니사 제도를 얻기로 하며 일단락되었다.
공화국 수립 후로도 한동안 중소 도시로 머물던 안탈리아는 1950년대 이촌향도로 인해 인구가 늘었고, 60년대부터 도시화에 착수하였다. 특히 1969년과 1974년 여행 특별지구로 선정되면서 안탈리아는 본격적으로 휴양 도시로 개발되었고, 항만과 공항의 현대화 및 정비가 이루어졌다. 1987년에는 디바 달리다가 마지막 공연을 한 곳으로도 알려졌다.
1990년대 안탈리아에는 대규모 인구가 유입되었고, 동시에 난개발도 이루어지며 자연 훼손 문제가 대두되었다. 인구 증가에 따라 안탈리아는 1993년 광역시로 지정되었다. 21세기 들어서 안탈리아는 관광도시로의 입지를 넘어 국제적인 대도시로 변모 중이며, 2015년 G20 정상회담과 2016년 엑스포를 개최하였다. 1964년에 시작된 안탈리아 영화제는 2005년 국제 영화제가 되어 아스펜도스에서 개최되었다.[4]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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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안탈리아〉, 《위키백과》
- "Antalya", Wikipedia
- 〈안탈리아〉, 《요다위키》
- 〈안탈리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서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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