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
카이로(영어: Cairo, 아랍어: القاهرة al-Qāhirah)는 이집트와 아랍 연맹의 수도이며, 나일강의 물줄기가 여러 지류로 갈라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아프리카 대륙과 중동 지역 최대의 도시이다. 서기 642년에 건설된 도시이다.
도심은 나일강 양안과, 중간의 섬인 게지라, 로다 섬에 펼쳐져 있다. 강 오른쪽에서 도시가 출발했으며, 시내는 구 시가지와 유럽식 신시가지로 나뉜다. 구 시가지는 카이로의 대표적인 모스크인 알아즈하르 모스크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다. 카이로는 '1000개의 미나렛(첨탑)을 가진 도시'라고 불리는데, 알아즈하르 모스크 인근에는 중-근세에 수없이 많은 모스크들이 들어섰다. 십자군 전쟁 당시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이 세운 카이로 성(영어로는 citadel, 아랍어 발음은 Qalaa)의 성곽과 그 안에 자리잡은 거대한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는 지금도 카이로를 찾은 관광객들의 눈길을 끄는 이슬람 시대 카이로의 최대 건축물이다.
유럽식 신시가지는 이집트 최후의 왕조인 무함마드 알리가 연 왕조(1805∼1952) 때 건설됐다. 무함마드 알리의 손자인 이스마일 헤디위(영어 khedive: 오스만 제국이 속국인 이집트 통치자에 하사한 칭호)가 집권 1863년-1879년에 면화 수출로 벌어들인 막대한 돈을 들여 건설했다. 구 시가지와 나일강 사이에 자리잡은 유럽식 신시가지는 범람 때는 나일강물이 드나들던 소택지였다. 신 시가지의 중심이 오늘날 '타흐리르 광장'인데, 이 광장은 가말 낫세르의 1952년 군사쿠데타 이후 이름이 바뀌기 전까지는 광장을 만든 사람의 이름을 딴 '이스마일리아 광장'이었다.
개요[편집]
- 행정 단위: 이집트 수도
- 면적: 606 km²
- 인구: 9,500,000명
- 지역어: 아랍어
- 정부 공식 홈페이지:https://www.kmcgov.in/KMCPortal/jsp/KMCPortalHome1.jsp
역사[편집]
로마제국 시대의 고대 이집트 카이로 지역은 나일강 삼각주에 속하는 습지에 지나지 않았고, 소규모 취락이 흩어져 있는 미개한 지역이었다. 취락지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슬람 제국 침공 이전 시대의 유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나일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서쪽의 기자 테라스는 기자의 피라미드가 만들어져 있지만, 그 기자도 고대 왕국 시대의 종언과 함께 피라미드에 대한 믿음도 퇴색되어 새로운 왕국 시대에는 폐허가 된 적도 있었다.
642년 아라비아 반도에서 건너와 이집트를 점령한 아무르 이븐 알 아스가 군대의 주둔지 푸스탓(Fustat)을 건설한 게 카이로의 출발점이다. 아무르 장군은 당시까지의 이집트 중심 도시인 지중해변 알렉산드리아 대신, 나일강을 따라 내륙으로 약간 들어간 현재의 카이로 남쪽에 푸스탓을 건설했다. 푸스탓 지역에는 점령자 아무르 장군이 세운 아무르 사원이 아직도 남아 있다. 아무르 사원은 당시 푸스탓의 중심지였다.
870년 이슬람제국의 이집트 총독이던 아흐마드 이븐 툴른은 바그다드(오늘날의 이라크) 칼리프와 다마스쿠스(오늘날의 시리아) 칼리프들이 서로 나뉘어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반(半) 독립적인 왕조를 세우고 푸스탓에서 북동쪽으로 접한 지역에 신도시 카타이를 세웠다. 그러나 카타이 시대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이로부터 100년 뒤인 969년 파티마 왕조의 무이즈 칼리프가 이집트를 정복해 카타이 바로 옆에 왕성이자 신 도시 '알 카히라(승리자)'를 건설했다. '알 카히라'란 이름은 오늘날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다.
알 카히라는 파티마 왕조 시절에는 궁전과 사원(알아즈하르 모스크)이 있었고, 일반인은 거주가 허용되지 않은 왕성이었다. 파티마 왕조는 예루살렘을 기독교도들로부터 되찾은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에 의해 망했고, 살라딘은 1171년 이집트의 통치자가 된 뒤 알 카히라를 일반 시민에 개방했다. 직사각형 모양으로된 성벽 도시인 알 카히라는 이후 여러 지구(하라)로 구획됐고, 하라에는 모스크와 시장(수크), 공중목욕장(하맘) 같은 생활공간들이 들어선다. 살라딘이 연 아이유브 왕조(1171년-1250년)에 이어 등장한 마믈룩 왕조시대(1171-1517년)를 거치며 카이로는 당대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했다.
1517년 오스만 제국 셀림 1세의 정복으로 이집트는 속주가 됐고, 카이로도 영광의 빛이 바래게 된다. 18세기 후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으로 이집트와 카이로가 유럽에 다시 알려지게 된다. 19세기 무하마드 알리 왕조 아래에서 근대 도시 카이로가 정비돼 오늘날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됐다. 오늘날의 카이로는 파타마 왕조가 세운 왕성이 있던 지역인 '올드 카이로'를 비롯해, 피라미드가 있는 도시 서쪽의 기자, 헬리오폴리스 등으로 확대된 대도시다. 도시 남쪽의 마아디는 영국인들이 보호통치 시절에 건설한 신도시인데, 이곳에는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
카이로는 중동과 아프리카, 유럽을 잇는 요지에 있어 오래전부터 북아프리카를 대표하는 국제 도시로 기능해왔다. 이집트는 물론, 북아프리카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다. 지금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두바이에 밀려 중동 경제의 중심에서 조금 밀려났으나 중동의 맹주 역할을 해온 이집트의 수도로서 카이로가 가진 위상은 무시 못한다.
도시는 전형적인 개발도상국의 대도시로서, 20~30년씩 된 낡은 차들이 뿜어대는 매연 때문에 숨쉬기 힘들 정도로 공기가 오염돼 있다. 수천년을 버텨온 파라오 람세스 2세의 거석상이 환경오염 때문에 훼손될 지경이 되어 도심의 람세스 역사 앞 광장에서 2005년 다른 곳으로 옮겨졌을 정도다. 1960~70년대 이스라엘과의 전쟁 이후에 아직까지도 복구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경제도 미국 원조에 의존하는 등 성장이 지지부진해 도시 외관은 매우 낡고 허름하다.
주택난과 교통체증, 인프라 부족, 학교 부족 등 도시 생활 기반이 열악하고 때로는 식료품 같은 생필품 품귀 현상도 일어난다. 1990년대 이래 몇 차례 무슬림 급진주의자의 테러 공격을 받은 바 있고, 2005년부터 2011년까지는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이따금씩 일어나기도 했다.
지리[편집]
이집트의 수도. 현지어로는 '알 까히라'(Al-Qāhirah)다. 아프리카 대륙 깊숙한 곳에서 발원한 나일강이 북쪽으로 흘러 지중해 변의 나일 삼각주와 만나는 지점 직전에 위치해 있다. 도시 한복판을 나일강이 관통한다. 면적 83km2, 인구 약 1700만 명. 1922년 이집트가 영국의 보호령으로부터 독립했을 때만 해도 인구가 60만 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후 급격히 늘었고, 지금도 팽창이 계속되고 있다.
기후[편집]
연평균 강수량 25mm의 사막 기후로, 연간 한두차례 적은 양의 비가 내리는 정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구가 생활할 수 있는 것은 나일강의 혜택 때문이다. 7월 평균기온 27.7℃, 1월 평균기온은 12.7℃다. 사막 기후라고는 하지만 위도가 높은 편이고 건조하기 때문에 아라비아반도의 사막이나 이집트 남부 아스완 같은 지역에 비하면 견디지 못할 정도의 더위는 아니다. 오히려 따뜻하고 쾌적한 편이어서 유럽 관광객들이 많이 찾을 정도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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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편집]
- 〈카이로〉, 《위키백과》
같이 보기[편집]
북아프리카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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