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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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독일어: Österreich 외스터라이히, Austria)는 중앙유럽 알프스산맥에 있는 내륙국이다. 정식 명칭은 오스트리아 공화국(독일어: Republik Österreich 레푸블리크 외스터라이히)이다. 수도는 최대 도시인 빈이다.
1156년 바벤베르크가문의 공국으로 건국된 후 13세기 말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1867년 형성된 오스트리아ㆍ헝가리 제국을 이끌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왕가와 제국이 해체되고 공화국이 되었다. 1938년 독일에 합병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1945년 연합국의 점령을 거쳐 1955년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가지고 독립주권을 회복하였다.
개요[편집]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남동쪽, 정확하게는 독일 바이에른주의 동남쪽에 위치한 나라로 중부유럽에 있는 국가이자 서유럽에도 속해 있다고 볼 수 있는 국가다. 8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서북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독일,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스위스, 리히텐슈타인과 이웃하고 있다. 국토면적은 83,879㎢로, 국토가 알프스 산맥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숲의 국가이며 덕분에 낙농업과 겨울스포츠가 성하다. 인구는 2021년 기준 약 9,043,072명이다.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프란츠 슈베르트를 비롯한 우리가 아는 수많은 모든 고전음악가들의 주 활동 무대였던 음악의 나라이자, 현대 언어철학의 이정표를 세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현대물리학의 격전장이었던 비엔나 써클과 논술에도 출제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유명한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 아르누보의 주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근대건축의 선구자 오토 바그너, 미술사에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에른스트 곰브리치, 정신의학과 심리학의 한 갈래인 정신분석학의 거장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알프레드 아들러, 20세기 최고의 지휘자 가운데 한 명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경제학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보디빌딩계 전설이라고 불리는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고향이다. 또, 흔히 독일인으로 생각하는 나치의 최고지도자였던 아돌프 히틀러의 고국이다. 대한민국의 초대 퍼스트레이디 프란치스카 도너 리도 오스트리아인이다. 2019년 기준 노벨상 수상자는 22명으로 세계 10위를 기록했으며 독일어권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빈 대학교는 20여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민족과 언어에서 독일과 동질적이어서 통일이 담론으로 떠오르거나 실제로 합치기도 했는데,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다시 갈라졌고, 분리된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66년 이전까지는 독일과 역사를 공유하며 슬로베니아,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이탈리아, 등 웬만한 유럽국가들의 역사에도 걸치고 있어 매우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국가이다.
서양사에서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던 19세기말 ~ 20세기 시작기에는 문명사적으로 가장 활기찬 곳이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패배로 인해 제국에서 소국으로 몰락하면서부터 점차 암울해지기 시작하고, 1934년부터는 히틀러 동조 세력에 휘둘리다가 1938년 병합되어 나치 독일의 일원이 되기에 이른다.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패배하여 4개 승전국에 의해 분할점령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후 해방되어 베를린과 함께 냉전의 최전방이었다가, 유럽연합이 동구권으로 확대되면서 동유럽과 만나는 중유럽의 관문으로 경제특수를 누리게 되었다.
타 유럽 국가들을 떨게 만들고 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제국으로서의 옛 영광을 생각한다면 현대의 오스트리아는 상대적으로 세계의 중심권에서 벗어나 있기에 다소 초라해 보일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철강과 기계공업 위주의 탄탄한 산업기반을 바탕으로 한 높은 국민소득과 충분한 복지예산을 갖춘 살기 좋은 최상위 선진국임에는 틀림없다. 현재 EU에 가입한 것 외에는 영세 중립국을 표방하고 있으며 수도 빈의 유엔기구 도시(UNO City)에 국제 원자력 기구 (IAEA), 유엔 마약 범죄 사무소 (UNODC) 등이 본부를 두고 있어 국제회의와 분쟁조정의 무대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국가 상징[편집]
국호[편집]
오스트리아에서는 자국을 독일어로 '동쪽의 국가'를 뜻하는 외스터라이히(Österreich)라 부른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오스트리아(Austria)는, 과거 명칭인 오스타리히(Ostarrîchi)를 당대 공용어인 라틴어로 옮겼을 때 아우스트리아로 표기되었고 이를 영어로 읽은 것이 넘어온 것이다. 한자로는 음차하여 오지리(墺地利)라 쓰는데, 이런 표현은 현재는 잘 쓰이지 않는다. 북한은 1999년 경까지 공식적으로 문서나 신문과 방송 모두에서 '오지리'라고 불렀다. 다만 첫 글자 오(墺)자는 지금도 신문 기사 제목에서 사용한다.
동쪽의 국가라는 명칭은 976년 신성 로마 제국 시절에 제국(Kaiserreich)의 최동단 변경백으로써 행정구역이 설치된 것에서 유래했다. 라틴어 원래 명칭을 해석하면 '국가 동부 변경백주' 라는 대단히 사무적인 뜻이 된다. 즉 원래는 '동쪽의 국가'가 아니라 '나라의 동쪽'이란 뜻이었다.
명칭이 비슷한 호주(오스트레일리아)는 오세아니아의 영어권 국가고 오스트리아는 유럽 중부의 독일어권 국가다. 이 두 나라는 로마자 표기 자체가 서로 유사해 영어권에서도 흔히 혼동된다. 두 나라 이름 모두 라틴어 기원인데, 사실 원래라면 각각 동쪽과 남쪽을 뜻하는 접두어가 붙어 혼동될 일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외스터라이히를 라틴어로 동쪽을 뜻하는 오리엔스(oriens)라고 하지 않고 아우스트리아라고 표기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이는 고대 독일어의 동쪽을 나타내는 오스트(ost)와 라틴어의 남쪽을 나타내는 아우스테르(auster)가 같은 인도유럽어 어원을 공유하였기 때문에 게르만에서 오래 전부터 이 둘이 혼동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프랑크 왕국이 분할 상속되었을 때 동쪽의 땅을 아우스트라시아라고 부른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외스터라이히를 번역할 때 '동쪽'을 염두에 두고 오스트리아로 번역했지만, 결과적으론 '남쪽의 땅'을 의미하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이름이 유사해졌다. 하필 오스트레일리아 역시 '미지의 남방대륙'이란 개념에서 따와서 라틴어의 남쪽을 가리키는 단어에서 이름을 따왔기 때문이다. 한국은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두 국가를 헷갈려하는 사람이 많아서 오스트리아에 캥거루 없음(No kangaroos in Austria)이라고 쓰여진 것까지 나오고, 티셔츠나 머그컵 등으로 기념품도 나올 정도다.
두 국가의 주한 대사관이 모두 한 건물에 있다. 종로구 교보빌딩에 있는데 주한 오스트레일리아 대사관이 19층,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관이 21층에 있다.
국기[편집]
오스트리아의 국기(國旗)는 위로부터 빨강·하양·빨강이 배치된 가로형 국기로써, 현재의 패턴은 프리드리히 2세 공작(公爵)이 1230년에 제정한 것이라고 한다. 배경은 1191년 레오폴트 5세 공작이 십자군 전쟁 당시 프톨레마이스 전투에서 적군의 피를 뒤집어서 갑옷 위에 걸친 흰 겉옷이 허리띠 부분을 제외하고 빨갛게 물들었다는 고사(故事)에서 유래한다. 유엔 건물이나 정부 기관에서는 국기 중앙에 검은색 독수리 문장이 삽입된 기를 사용한다. 가로세로 비율은 2:3이다.
1700년부터 1918년까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를 국기로 사용하였다. 위로부터 검정·노랑이 배치된 가로형 국기였는데, 해군은 이 기를 계양하지 않고 현재 국기의 패턴 가운데에 왕관을 씌운 문장을 삽입한 기를 고집하였다. 해군의 기는 1786년에 제정되었고, 1915년에는 헝가리의 문장이 추가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고 현 국기 패턴이 국기로 다시 채용되었다. 1934년에 제정된 정부 깃발은 중앙에 삽입된 문장이 지금과는 달랐다. 1938년에 나치 독일에 합병되면서 국기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에 국기가 부활하였다.
국장[편집]
오스트리아의 국장은 1919년에 처음 제정되었다. 현재의 국장은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시대에 사용된 국장을 수정한 것으로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이 수립된 1945년에 제정되었다. 오스트리아의 국장은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발행하는 대내외적인 공문서에 사용된다.
금색 발톱과 부리를 가진 검은색 독수리의 머리 위에는 세 개의 성곽 모양을 한 금색 왕관이 씌워져 있다. 왼쪽 발톱에는 낫을, 오른쪽 발톱에는 망치를 잡고 있으며 발톱 양쪽에는 끊어진 쇠사슬이 묶고 있다. 독수리 문양 가운데에는 오스트리아의 국기 문양의 방패가 그려져 있다.
독수리는 오스트리아의 주권을, 왕관은 오스트리아의 중산층을 상징한다. 낫은 농업, 망치는 공업을 상징하며 끊어진 쇠사슬은 나치 독일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한다.
국가[편집]
국가는 1946년에 지정된 산의 나라, 강의 나라(Land der Berge, Land am Strome)다.
지리[편집]
오스트리아는 국토의 3분의 2가 알프스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는 산악 국가이다. 전체 면적은 83,879㎢로 스위스의 두 배 정도의 크기이다. 국토 면적의 약 2%가 호수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은 높은 산악 지형을 이루고, 헝가리와 접경 지역인 남동쪽은 평원과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서부의 린츠에서 동부의 빈을 경계로 도나우강이 흐르며, 강의 북쪽으로는 독일과 접한다. 빈 북동부에는 해발고도 200~400m 높이의 낮은 구릉지가 있다.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산맥은 도나우강의 지류인 인강(Inn), 무르강(Mur), 드라바강(Drava)이 만든 골짜기에 의해 각각 북알프스, 중앙알프스, 남알프스로 구분된다. 북알프스와 남알프스는 주로 석회암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앙알프스는 화강암·편마암·운모편암 등의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알프스와 남알프스의 석회암 알프스는 험준한 데다 암벽이 노출되어 험한 산릉(山陵)을 이루고 있다. 약 2,700~2,900m 정도까지는 눈이 쌓여있으며, 그보다 높은 곳은 두꺼운 빙하를 이룬다. 해발 3500m 이상의 고봉이 35개가 있는데, 최고봉은 호에타우에른산맥의 높이 3,798m의 그로스글로크너산(Großglockner)이다. 알프스 산중에는 U자곡·현곡·빙퇴석·양배암 등 빙하가 만든 다양한 침식지형을 볼 수 있다.
기후 및 식생[편집]
오스트리아의 서쪽은 해양성기후로 서풍이 불어 온난하고 강수량이 동부에 비해 풍부하다. 반면 동쪽은 대륙성기후의 영향을 받아 북서풍 혹은 북풍이 강하게 불며, 적은 강수량을 보인다. 겨울에 사하라사막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으로 인해 푄 현상이 발생하여 급격한 날씨 변화를 일으키기도 하며, 이로 인해 남부 알프스에 눈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겨울철 차갑고 건조한 대륙성기후는 해양성기후로 인해 내린 눈을 녹지 않도록 하여 스키 등 겨울스포츠 활동에 적절한 환경을 제공한다. 여름은 따뜻한 편이다.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산지에는 해발고도 1,000m 이하에서 너도밤나무와 같은 활엽수림을 볼 수 있다. 침엽수로는 가문비나무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해발고도 1,350m까지 소나무과의 수목이 자란다. 삼림한계는 설선 아래 약 750m 가량으로 7월 기온 10.6°선과 거의 일치한다.
역사[편집]
오스트리아 성립[편집]
오스트리아 지역은 과거에는 켈트족이 살던 땅으로 켈트족이 세운 노리쿰 왕국이 있었다. 노리쿰 왕국은 기원전 1세기 말에 고대 로마에게 점령되었으며 그 자리에 노리쿰 속주가 세워졌다.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게르만 바바리족(Bavarii)이 오스트리아에 정착했으며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게르만족의 이동과 훈족의 등장으로 로마는 오스트리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이후 동고트 왕국과 랑고바르드 왕국이 차례대로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다. 이어서 아바르 칸국이 오스트리아 지역의 패권을 잡았으며 이 시기를 전후로 슬라브족이 유입되었다. 슬라브족은 아바르 칸국에 저항하여 사모 왕국을 세우기도 했으나 국가를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다.
프랑크 왕국은 오스트리아 지역을 동방 유목민들과의 완충 지대로 삼아 변경주를 설치하고 바이에른 공국에게 관리를 받기 시작한다. 이후 독일 왕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으면서 오스트리아 지역은 주변에 등장한 헝가리 대공국을 상대하는 역할을 해왔다.
바벤베르크 가문의 통치[편집]
962년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교황의 대관을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신성로마제국이 성립되었다. 이때 바이에른의 공작 하인리히 2세는 황제와 대립하는 세력이었다. 마침내 하인리히 2세를 굴복시킨 오토 2세 황제는 976년 바이에른 공국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바이에른 공국의 남쪽과 동쪽을 각각 케른텐 공국,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으로 분리시켰다. 이 두 개의 국가는 현재의 오스트리아를 구성하는 지역이었다.
이 중 빈(Wien)을 둘러싸고 있는 '오스트리아 변경백국'(Markgrafschaft Österreich)에서 오스트리아라는 명칭이 나왔다. 당시 이 지역은 과거 고지대 독일어로 Ostarrîchi라고 불렸으며 여기서 현재 독일어로 오스트리아를 지칭하는 Österreich가 유래했다. 현재 오스트리아의 국기인 적백적 문양은 합스부르크 시대 이전에 오스트리아를 통치했던 바벤베르크 가문의 문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이 만들어졌을 때 황제 오토 2세는 바벤베르크 가문(Die Babenberger)의 레오폴트 1세를 오스트리아 변경백으로 임명했고 오스트리아를 통치했다. 바벤베르크 가문은 레오폴트 4세와 하인리히 2세의 시대인 1139년부터 1177년까지 바이에른 공국의 공작을 겸임하기도 했다.
1156년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가 Privilegium Minus을 통해 오스트리아를 변경백국에서 공국(Herzogtum Österreich)으로 승격시켰다. 그동안 바이에른 공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과 동등한 공국이 되면서 바이에른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1180년 신성로마제국은 케른텐 공국의 동쪽 지역을 분리하여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형성했다. 1192년 바벤베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가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공작을 겸임하면서 슈타이어마르크 공국과 오스트리아는 사실상 통합되었다.
1243년 프리드리히 2세가 헝가리 왕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바벤베르크 가문은 대를 이어가지 못하고 끝을 맺게 되고 오스트리아 공국은 공작 직위가 비게 된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시작[편집]
오스트리아가 공위시대(Interregnum, 1243 ~ 1278)를 맞은 시기는 신성 로마 제국의 대공위시대(1254 ~ 1273)와 시기가 겹치는데, 신성 로마 제국의 혼란과 함께 오스트리아도 혼란에 빠졌다. 이때 여러 유력 가문들이 오스트리아의 지배권을 획득하려고 시도했는데 바덴(1248~1251)의 체링겐 가문에 이어 중부 유럽의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 프르셰미슬 왕조 보헤미아 왕국의 오타카르 2세가 오스트리아를 장악했다.(1251 ~ 1278)
한편 신성로마제국의 대공위시대는 1273년 스위스 일대를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백작 루돌프 4세가 독일왕 루돌프 1세로 선출되면서 종결되었다. 도나우강 유역으로 확장을 원했던 루돌프 1세는 1278년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오타카르 2세를 전사시키고 그가 차지했던 오스트리아 공국과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회수하여 맏아들 알브레히트에게 주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오스트리아를 차지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291년 스위스가 반란을 일으켜 결국 1315년 떨어져 나가게 되고 이때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를 가문의 본토로 여기게 되었다.
1335년 케른텐 공국과 크라인 변경백국이 합스부르크 가문에 병합되었다.
1356년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가 금인칙서를 공포하며 그동안 관례적으로 이어오던 선제후를 7명으로 명문화하여 고정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나 7인의 선제후에 포함되지 못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의 공작 루돌프 4세는 장인인 황제 카를 4세에게 불만을 품고 1156년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가 오스트리아를 변경백국에서 공국으로 승격시킬 때 내린 문서(Privilegium Minus)를 위조하여 Privilegium Mainus를 작성한 후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의 오스트리아의 특권적인 지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카를 4세는 이것을 위조로 판정하여 루돌프 4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140년 바이에른 공국에서 독립했던 티롤 후백국이 상속 문제로 혼란을 겪자 루돌프 4세는 1363년 티롤 후백국의 백작 부인 마르가레테에게 접촉하여 티롤 후백국에 대한 상속권을 얻어냈다. 1364년 루돌프 4세는 크라인 변경백국을 크라인 공국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1369년 마침내 티롤 후백국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 병합되었다. 이렇게 합스부르크 가는 잘츠부르크 주를 제외한 현재 오스트리아를 구성하는 모든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잘츠부르크는 교회에 소속된 영지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성립과 합스부르크 제국[편집]
1438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알브레히트 2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왕에 오르고 이어서 1452년 프리드리히 3세가 대관을 받아 정식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마침내 다시 신성 로마 제국 제위에 오르게 된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게 된다.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황제에 오른 프리드리히 3세는 100년전 선조 루돌프 4세가 위조한 Privilegium Mainus을 승인했다. 이것에 따라 오스트리아 공국은 1453년 오스트리아 대공국(Erzherzogtum Österreich)으로 승격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인구는 2,000,000명 정도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반이 되기 충분한 인구였다. 오스트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유일한 대공국이 되어 선제후국을 포함한 다른 공국들과는 격이 다른 특권적인 위상을 부여받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였고 이미 인구 수만 명을 보유했던 빈도 인구 이 시기에 위상이 엄청나게 상승하게 된다.
막시밀리안 1세 황제 시절 합스부르크 가문은 과감한 결혼 정책 덕분에 유럽 각지에서 엄청난 영토를 상속받아 일거에 유럽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1477년 부르고뉴 공국의 샤를 공이 스위스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부르고뉴 공국은 그의 유일한 자녀인 딸 마리 드 부르고뉴에게 상속되었다. 마리는 프랑스 왕국의 압박으로부터 부르고뉴 공국을 지키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안과 결혼하였다. 그녀의 영지인 부르고뉴 공국 본토와 저지대 지방을 아들 필리프가 물려받으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왔다.
막시밀리안 1세와 마리 드 부르고뉴의 아들 필리프는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가톨릭 공동왕(이사벨 1세 여왕과 페르난도 2세 국왕)의 계승자 후아나 왕녀와 결혼시켰다. 이렇게 합스부르크 왕조는 스페인을 획득했다. 필리프의 맏아들 카를은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의 사망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고 합스부르크 영지를 모두 지배하면서 카를 5세(스페인 왕으로는 카를로스 1세)가 되어 스페인에서 오스트리아에 이르는 제국의 수장으로 등극하였다.
자신과 아들의 결혼을 통해 막대한 영토를 획득했던 막시밀리안 1세는 노년에 손자이자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를 보헤미아 왕국과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의 안나 공주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1526년 야기에우워 왕조의 러요시 2세가 모하치 전투에서 후사없이 전사하면서 이미 1521년에 형 카를 5세로부터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물려받았던 페르디난트 1세는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왕으로 선출되었고, 페르디난트 1세가 획득한 영토는 동유럽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엄청나게 증가시켰다. 역사적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이라 부르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토는 중부 유럽에서 광활한 크기를 자랑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엄청난 영토를 확보해 나간 오스트리아는 수천만명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했다. 이들 동유럽 영토들은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배하고 해체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결혼 정책과 상속을 통해 이어받은 영토로 성립된 제국이었기 때문에 동군연합 상태로 여러 지역이 한 군주에 의해서 통치되는 것일 뿐, 내부적으로는 통합되어 있지 않았다. 다른 국가와 달리 합스부르크 제국이 강력한 통일 세력을 이루지 못하고 느슨한 연합 체제로 이어진 것은 독일인(오스트리아인)이 제국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페인, 부르고뉴, 저지대 국가는 곧 오스트리아와는 무관한 영토가 되었는데, 부르고뉴 공국의 본토는 카를 5세가 프랑스에게 넘겨 주었고, 스페인, 네덜란드는 카를 5세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상속시켜 스페인 합스부르크로 분가했다.
이후 16세기와 17세기의 종교 개혁, 30년 전쟁, 제2차 빈 공방전과 대 튀르크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거친 오스트리아는 4국 동맹 전쟁(1718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5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1737년) 등을 수행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특히 대 튀르크 전쟁에서 맹활약한 사부아 공자 외젠의 활약에 힘입어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16세기에 쉴레이만 1세에게 빼앗긴 오스만 헝가리와 에르데이 공국을 수복하여 헝가리 왕국의 영토를 회복하였고 인구 수천만명을 보유한 국가로 성장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였던 빈도 이 시기부터 인구가 엄청나게 증가해서 1683년에는 110,000명, 1804년에는 230,000명이 될 정도였다.
그러던 중 카를 6세가 1740년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계승자로 선언하고 사망하자 가문의 여러 인물들이 서로 계승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기회를 노린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가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침공을 개시하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시작되었고 슐레지엔을 상실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복수를 위한 준비에 들어가자 프리드리히 2세는 선제 공격을 감행하여 1756년에 7년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마리아 테레지아는 수백년간의 적대 감정을 버리고 루이 15세의 프랑스, 러시아 제국을 끌어들여서 포위 전선을 구축했다.
이때 이 동맹국들의 지도자들이 여성들이라,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2세는 '세 자매의 패티코트 동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프로이센의 패배로 끝날 만한 상황이었으나 프리드리히 2세의 필사적이었던 기동 덕분에 시간을 6년이나 끄는데 성공했고 러시아에서 옐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고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 출신의 표트르 3세가 제위를 계승하여 전쟁을 중단했다. 때문에 전쟁에 지쳐 있던 다른 동맹국들도 철수해 버렸고, 마리아 테레지아도 어쩔 수 없이 슐레지엔을 포기했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30여년에 걸쳐 프로이센을 본딴 개혁을 시작하며 내정에 힘썼고 동유럽으로 진출하여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인 몰다비아 공국 서북부를 빼앗아 부코비나 공국으로 명명하였으며, 세 차례에 걸친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과 크라쿠프 대공국을 손에 넣었다.
오스트리아 제국[편집]
나폴레옹 전쟁 중이었던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를 자칭하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가 무색해지자 황제인 프란츠 2세는 기존의 동군 연합 상태에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들을 통합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을 세우고 스스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로 선언했다. 그러나 얼마 뒤인 1806년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다가 패배해서 신성 로마 제국은 완전히 해체되었고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제1제국과 동맹국들에게 영토를 할양해야했다. 1809년에 오스트리아는 복수를 위해 다시 참전했다가 또 다시 영토를 빼앗겼다.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빈 회의에서 전쟁 중 손실한 월경지에 대한 대가로 이탈리아 북부와 달마티아를 차지하였다.
한편 오랫동안 대주교가 다스려 온 잘츠부르크는 다른 주교령들처럼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오스트리아에 합병되었다. 잘츠부르크 대주교령이 1803년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자 통치자인 콜로레도 대주교[9]가 지배권을 포기하고 빈으로 도피했다. 오스트리아는 잘츠부르크를 선제후령으로 만들고 친척인 토스카나 대공국에게 하사했으나, 이후 나폴레옹 전쟁의 혼란기 속에 오스트리아 제국(1805년), 바이에른 공국(1809년)을 거쳐 빈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빈 회의 이후 50여년 동안 독일 연방의 주도권을 놓고 통일 독일의 구축과 자국 내의 오스트로슬라브주의, 헝가리 독립 운동, 이탈리아 반도의 카르보나리 당과 같은 사상들을 모두 억누르며 1848년 혁명에도 제국 유지에 성공했다. 그러나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 프랑스 제2제국-사르데냐 왕국 연합군에게 패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고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 왕국에게 패배하면서 독일 내 영향력과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세력이 축소되었다. 전통적으로 우방이던 가톨릭 국가 바이에른 왕국 또한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어 오스트리아의 독일 팽창은 저지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편집]
전쟁에서 패배한 후 헝가리 왕국에서 독립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헝가리 분리파에게 이중 제국을 제안한다. 양쪽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여 이중 제국을 세우기 위한 협상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형성되었다.
오스트리아 정부와 헝가리 분리파 사이의 협상은 대타협이라 불린다. 이렇게 변화한 시기인 1867년 오스트리아 지역의 인구는 4,500,000명으로 전체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08년에 보스니아를 합병하였는데, 이러한 행동은 세르비아 왕국의 격렬한 반발을 가져왔다.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여기에 세르비아의 후원자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동맹국 독일 제국이 가담하고, 독일의 침공으로 프랑스 제3공화국와 벨기에, 벨기에의 독립을 보장한 영국이 참여하며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전쟁이 끝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오스트리아[편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없어지고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거쳐 1919년 10월 21일,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영토는 크게 축소되었고 인구는 1919년 기준으로 6,800,000명에 불과했다. 위 지도의 붉은 선 안쪽이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로 통합되는 것을 막고 있었던 것은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과 많은 영토를 포기할 수가 없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부담과 독일 통일을 주도하려던 프로이센이었다. 그래서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제국과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고, 바이마르 공화국과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모두 독일 민족(독일어권)의 공화국이 되어 버린 전간기에 독일-오스트리아 통일론이 강하게 부상했다. 오스트리아 의회에서 의결되기도 했지만 독일이 강해지는 것을 우려한 협상국에 의해서 저지되었다.
그래서 나치 독일이 민족 통합의 기치를 내세우며 오스트리아 내에 나치당 세력을 구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안에서 이미 이탈리아의 후원을 받으며 권력을 구축한 파시즘 정권(엥겔베르트 돌푸스 수상)은 오스트리아 나치당을 탄압했다.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1934년 돌푸스를 암살하였고, 뒤이어 집권한 쿠르트 슈슈니크는 나치당에 대한 제한을 풀었다. 이 기회로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더욱 세력을 확장하였고, 독일과의 합병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938년 3월, 결국 독일군은 국경을 넘어왔고, 히틀러는 공식적으로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와 함께 독일-오스트리아의 합병(안슐루스)을 선언한다. 이런 행각은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의 관계를 냉각시켰고,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 국경에 집결했으나, 결국 외교적인 협상 끝에 이탈리아의 양해를 얻고 무마된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로서 제2차 세계 대전에 다시 참전해 패배한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독일과 같이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4개국이 분할 점령해서 군정 통치를 했다. 다시는 독일과 통일하지 않고, 영구 중립국으로 남는다는 조건으로 1955년 독립했다. 오스트리아의 인구는 1955년에 6,900,000명으로 거의 변화가 없었고 더 이상 많은 성장을 하지 않았다.
현대 오스트리아[편집]
전쟁에서 패배한 직후,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비슷하게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이 4개국으로 분할 통치되어 연합국 점령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국력의 차이가 있으며 오스트리아가 중립국을 선포한 점 등을 고려하여, 연합국은 점차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유화적으로 대우하기 시작했다. 보수당과 공산주의자, 사회민주당으로 구성되어 소련과 스탈린의 지지를 받고 있던 당시 오스트리아 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구권에서도 인정을 받았으나, 카를 레너 수상이 스탈린의 꼭두각시일 수도 있다는 의심은 여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처럼 아예 국가를 반으로 갈라 새로운 서구식 정부를 세우자는 의견은 나오지 않았는데, 이는 연합국 측에서 기본적으로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침공당해서 강제로 전쟁에 참여한 국가'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5년 5월 15일에 오스트리아는 마침내 연합국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립을 획득해 내었고, 그해 연합국 군대가 모두 철수하고 난 10월 26일에 오스트리아 의회에서는 ‘영구 중립국’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이 날은 아직도 오스트리아의 국가기념일로 남아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오스트리아를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워진 공화국과 구분하여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이라고 부른다. 다만 기본적으로는 1920년과 1929년의 헌법에 기반하고 있으며, 1945년에 다시 한 번 개헌을 했다. 이 시기 이후로 오스트리아 정치는 2개의 정당이 돌아가면서 정권을 잡고 있는데, 하나가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고 나머지 하나가 오스트리아 국민당이다. 1945년 이래 단일 정권이 등장한 적은 1966-1970년의 국민당 정부, 1970-1983년의 사회민주당 정권, 이 2번 밖에 없었다. 나머지 시기의 경우에는 주로 대연정을 맺거나 다른 군소정당들과 연정을 맺어 정부를 구성하였다.
오스트리아는 1994년의 국민투표를 거쳐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받아 1995년 1월 1일에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양대 정당인 오스트리아 국민당과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은 오스트리아의 군비 증강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중도좌파 정당인 사회민주당은 현행 체계 유지를 원하는 반면, 중도우파 정당인 군비 증강을 통해 유럽의 군사 정책에 더 적극적으로 임하기를 원한다. 현재 오스트리아는 유럽 연합을 통하여 평화유지 임무를 하고 있으며, NATO에도 참여하고 있다. 2011년에 리히텐슈타인이 셍겐 조약에 가입함에 따라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모든 국가들과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편집]
오스트리아는 9개의 연방주(Bundesländer)로 구성된 연방국가이다. 오스트리아의 헌법은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하나의 단일한 문서가 아니라 몇 가지 법률이 헌법적 지위를 가진다. 가장 중요한 법은 '연방헌법(Austrian Federal Constitutional Law, 독일어: Bundes-Verfassungsgesetz: B-VG)'이다. 연방헌법은 1920년에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의 헌법으로 제정되었으나 1932년 정권을 잡은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1934년 '5월헌법(May Constitution)'을 통해 권위주의적 오스트리아 연방국(Bundesstaat Österreich)을 탄생시켰다. 포르투갈의 '신체제(이스타두 노부, Estado Novo)'와 같은 권위주의 국가 형성을 목표로 한 5월헌법은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면서 무력화되었다. 독일이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5월 1일, 오스트리아는 독립국임을 선포하면서 1920년 헌법을 회복시켰다. 연방헌법은 오스트리아가 양원제 의회를 가진 연방공화국임을 선포하였다. 이밖에 연방 수준에서 적용되는 다양한 헌법들, 예를 들면 '연방헌법적 법률들(Bundesverfassungsgesetze: BVG)'과 헌법으로 지정된 법령 및 조약들 역시 연방헌법적 지위를 가진다. 연방헌법은 국가의 구조뿐만 아니라 입법·사법·행정부의 역할과 권한을 밝히고 있다.
헌법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양원제로 운영되는 의원내각제 국가이지만, 국민에 의해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내각의 임명과 불신임권을 주어 이원집정부제 정부 형태를 가진다. 헌법에 따라 국가 원수는 연방대통령(Bundespräsident)이다.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연방대통령은 6년 임기로 2회까지 연임이 가능하고, 독일의 대통령에 비해서 권한이 강한 편이다. 대표적으로 총리 및 장관의 임명 및 해임, 의회의 해산, 주의회의 해산, 국군통수권, 법률안 거부, 사면, 긴급명령 등과 같은 통상적인 국가원수로서의 권한을 가진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연방대통령은 이러한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하지 않고 의회 및 총리와 긴밀하게 협의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토마스 클레스틸 연방대통령은 볼프강 쉬셀(Wolfgang Schüssel) 총리와 갈등을 겪으면서 내각 구성에 반대하고, 총리의 행정권을 견제하는 등 대통령의 고유 권한을 행사한 적도 있다. 2021년 대통령은 2017년 선출된 알렉산더 판데어벨렌(Alexander Van der Bellen)이다.
정부[편집]
헌법에 따라 오스트리아 연방정부의 수장은 연방총리이다. 형식적으로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내각의 일원이지만, 실제적으로는 행정부를 이끄는 내각의 수반으로 오스트리아 정치의 중심적 인물이다. 총리에 대한 임명권이 대통령에게 있어 대통령은 자의적으로 총리를 임명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의회와 협의를 거쳐 원내의 제1정당의 당수나 당이 내세우는 사람을 총리로 지명한다. 총리의 임기는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고 의회의 인준 동의를 받을 필요도 없다. 총리로 임명된 자는 내각을 구성할 장관 명단을 대통령에게 제출하고 통상적으로 대통령은 이들을 장관으로 임명한다.
2021년 기준, 오스트리아의 총리는 2020년 1월 임명된 제바스티안 쿠르츠(Sebastian Kurz, 1986.8.27.~)이다. 그는 우파인 오스트리아 국민당(Österreichische Volkspartei: ÖVP) 대표로, 2017년 총선에서 승리한 후 전 세계 최연소 정상이 되었다. 하지만 연정을 구성한 극우 성향의 자유당(Freiheitliche Partei Österreichs: FPÖ) 출신의 부총리가 스캔들(Ibiza scandal)에 연루되어 사임하자 쿠르츠는 자유당과의 연정을 해체하고 자유당 출신의 장관들을 모두 해임하였다. 이에 자유당이 의회에서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켜 사임하였으나, 2020년 1월 선거에서 승리하여 다시 총리에 임명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의회민주주의 국가이고, 실제 권력이 정부의 수반인 총리에게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결정에서 총리는 자의적으로 정책을 결정하지 않고 대통령의 자문을 받아 결정한다. 내각의 장관들 역시 총리에게 직접 보고하지 않는다. 의회가 해산될 경우, 총리는 대통령에게 사임서를 제출하고 대통령은 과도내각을 구성하여 새로운 선거 이후에 총리를 다시 임명한다. 의회는 불신임 투표로 대통령에게 총리의 해임을 요구할 수 있다. 의회가 총리에 대해 불신임안을 통과시켜 실제 총리가 해임된 것은 2019년 쿠르츠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이 유일하다.
총리는 내각의 수반으로 내각 회의를 주재하지만 장관들에게 지시를 내릴 권한은 없다. 이것은 ‘프리머스 인터 파레스(Primus inter pares)’라는 것으로 총리는 내각의 장관들과 동등하지만 선임장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헌법에 따르면 총리의 권한은 대통령이나 의회의 결정을 인증하고, 이러한 결정들이 시민들에게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총리는 의회에서 통과된 법안을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대통령이 제출한 법안에 간서명하며, 법률을 공표하는 등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대통령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경우 총리는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지만, 이것이 3개월 이상 유지되면 대통령의 권한은 3인의 의회 의장에게 넘겨진다.
정당[편집]
오스트리아의 주요 정당으로는 국민당(ÖVP), 자유당(FPÖ), 사민당(SPÖ), 대안녹색당(GRÜNE)이 있으며, 이외에 기타 정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당은 보수 우파 정당인 국민당(ÖVP)으로, 1945년에 결성되었다. 국민당의 전신은 1809년 결성되어 1934년 해체된 오스트리아기독교사회당(Christlichsoziale Partei, CS)이다. 유럽의 가톨릭 보수정당과 유사한 이데올로기를 가지는 국민당은 1970년부터 1985년까지를 제외하면 제1당 혹은 제2당으로 오스트리아 정부를 구성하였다. 하지만 대통령선거에서는 1986년부터 1998년까지만 대통령이 배출되었다.
자유당(FPÖ)은 국민당과 함께 우파를 대변하지만 더 보수적인 극우정당이다. 1956년 창당되어 독일과의 합병을 통한 대독일주의를 주장하고 있고 친 나치스 성향을 보인다. 자유당은 1999년 10월 국민의회 선거에서 제2정당이 됨으로써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정계에 충격을 주었다. 1983년에도 사민당(SPÖ)과의 연정에 참여하였지만 당시 지지율은 5%에 불과해 12명의 하원의원만을 배출했을 뿐이다. 자유당은 1989년부터 카린시아(Carinthia)주(州) 선거에서부터 돌풍을 일으켜 당수인 외르크 하이더(1950년~2008년)가 주지사에 당선되면서부터 전국적인 정당으로 성장하였고, 자유주의 노선에서 탈피해 반(反)이민정책과 유럽회의주의를 내세운 포퓰리즘 정당으로 탈바꿈하였다. 1990년 16.6%를 시작으로 1999년에는 26.9%의 지지를 받아 전체 183명의 하원 의석 중 52석을 획득했다. 선거 결과 국민당과 자유당의 연정이 불가피해졌고 하이더는 총리에 임명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극우정당의 연정 참여에 우려를 표명하고 오스트리아에 대한 제재를 언급하면서 하이더가 총리뿐만 아니라 당수직을 내려놓은 이후에야 연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2002년 선거에서도 국민당과 연정에 참여하였고, 2017년 선거에서도 26%를 획득하여 제3당으로 국민당과 연정을 구성하였다. 2019년 자유당 소속의 부총리가 부정부패 문제로 사임하고 내각이 총사퇴한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는 16.2%의 지지 획득에 그쳐 야당으로 전락하였다.
사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Österreichs: SPÖ)은 오스트리아의 중도좌파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정당이다. 1888년 설립된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Arbeiterpartei: SDAP)의 전통을 이어받아 1945년에 재창당되었다. 1945년부터 1991년까지 사회당 이름으로 활동하다 1991년 현재의 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주로 노동조합, 중소기업인, 소농, 지식인 계층의 지지를 받는 사민당은 마르크스주의를 버리고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추구하고 있다. 사민당은 1945년 이후 줄곧 국민당과 연정을 구성하다가 1966년 연정이 깨진 이후 1970년부터 1983년 선거 이전까지 단독정부를 구성하였다. 이후 2006년부터 2017년까지 다시 국민당과 연정을 구성하였고, 2017년 선거에서 제2당이 되었지만 국민당과 연정에 실패해 야당으로 전락했다. 2019년에도 녹색당에 밀려 현재 야당으로 남아있다.
대안녹색당(Die Grünen – Die Grüne Alternative: GRÜNE)은 좌파정당이지만 계획경제나 계급문제를 중시하는 사회당이나 공산당과는 달리 환경이나 사회정의와 같은 사회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둔다. 연방 수준보다는 주 수준에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데, 특히 30세 이하의 청년층이 많은 빈 지역에서 지지가 강하다. 2000년 이후 10% 정도의 지지를 받았지만 2017년에는 내부 갈등으로 의회에 진출하지 못했다. 자유당 출신 부총리의 부정부패의 여파로 치러진 2019년 선거에서는 13.9%의 지지로 26석을 얻어 2000년 처음으로 국민당의 연정 파트너가 되었다. 2016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녹색당 출신의 벨렌(Alexander Van der Bellen)이 연방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밖에 자유주의적 성향의 신오스트리아당(NEO)과 자유연대(Liberales Forum)가 연합한 신오스트리아와 자유포럼(Das Neue Österreich und Liberales Forum: NEOs)은 2019년 선거에서 15석을 얻어 선전했다. 2010년대 이후 탄생한 이 정당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국민당과 녹색당 사이의 중도정당으로 민주주의, 법치, 환경을 강조한다.
의회와 선거[편집]
오스트리아는 상원과 하원의 양원제 의회를 가지지만 하원이 우월하다. 하원인 국민의회(Nationalrat)는 임기 4년의 183명의 의원으로 구성되고, 의원은 선거를 통해 100% 비례대표 방식으로 선출된다. 하원의원 선출을 위해 9개의 연방주(Bundesländer)는 지역선거구(regional electoral district)를 구성한다. 한편 9개의 주(州)는 다시 43개의 지방선거구(local electoral district)로 세분화된다.
- 의회 구성
상원에 해당하는 연방의회(Bundesrat)는 주의회(Landtage)에서 파견되는 61명의 상원의원으로 구성된다. 의장은 각 주의회의 다수정당들이 선출하는데, 임기는 6개월이다. 9개 주는 인구비례에 따라 최소 3명에서 최대 12명까지를 상원의원으로 파견하고, 각 주에서 제1야당은 최소 1명의 상원의원 파견을 보장받는다. 연방의회는 국민의회에서 통과된 법안을 심의하고 거부할 수 있지만, 이 연방 법안이 국민의회에서 과반수이상으로 다시 통과되면 가결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연방의회의 거부권은 제한적이다. 하지만 연방을 구성하는 각 주들의 권한을 제한하는 법안, 연방의회의 권한에 관련된 법안, 주들의 권한에 관련된 조약 등과 관련된 법안에서는 반드시 연방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하원에 해당하는 국민의회는 100%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선출되기 때문에 선거 때마다 과반수이상을 획득하는 정당이 탄생하기 쉽지 않다. 1945년 이후 하나의 정당이 단독정부를 구성한 사례는 1966년 국민당의 경우와 1970년에서 1983년까지 사회민주당(당시에는 사회당)이 50%를 약간 넘는 득표를 통해 단독정부를 구성한 것이 전부이다. 그 밖의 기간에는 좌우 동거내각, 중도좌파, 중도우파 연정 등을 통해 정부를 구성해 왔다.
- 선거
각 정당은 지역선거구와 지방선거구에 출마할 후보 명부와 전국 수준의 후보 명부를 각각 주 선거관리위원회와 연방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다. 입후보자는 각기 다른 지역에 복수 출마할 수 없지만, 지방·지역·연방 선거구에는 동시에 복수로 출마할 수 있다. 각 선거구당 의석수는 인구비례에 따라 정해진다. 16세 이상의 시민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으며, 유권자는 선호 정당과 선호 후보에게 각각 투표하게 된다. 득표 계산은 43개 지방선거구에서부터 시작된다. 선호 후보 투표를 통해 우선적으로 당선되기 위해서는 지방, 주(州), 전국에서 각각 정당 득표수의 10%, 9%, 7%를 획득해야 한다. 따라서 투표 결과 정당에 할당된 의석수에서 선호 후보 투표를 가장 많이 획득한 순서로 당선된다. 의석의 배정은 지방, 주, 전국 순으로 이루어지며 각 정당이 획득한 비율에 따라 정해진다.
2019년 치러진 하원의원 선거에서 총 5개 정당이 의석 확보에 성공하였으며, 제1당은 국민당(ÖVP)이 차지하였다. 제2당은 사회민주당(SPÖ)이 차지하였고, 자유당(FPÖ)과 대안녹색당(GRÜNE), 신오스트리아와 자유포럼(Das Neue Österreich und Liberales Forum: NEOs)이 뒤를 이었다. 2021년 기준, 하원의장은 국민당 소속의 볼프강 소보트카(Wolfgang Sobotka, 1956.1.5.~)가 맡고 있다. 연방헌법에 따라 하원의장은 권력서열에서 대통령 다음으로 제2위를 차지한다.
행정구역[편집]
오스트리아를 구성하는 9개의 주(Bundesländer)는 다시 94개의 군(Bezirke)과 자치헌장을 가지고 군과 같은 권한을 갖는 15개의 자치시(Statutarstädte)로 이루어져 있다. 각 군은 다시 지방행정의 최소단위인 '게마인데(Gemeinden)'로 나뉜다. 2019년 1월 기준, 오스트리아에는 2,096개의 게마인데가 있다. 자치시는 군의 권한을 가진 게마인데라고 할 수 있는데, 2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도시가 연방정부의 동의를 얻어 구성될 수 있다.
오스트리아 지방자치의 특이점은 주정부와 주의회의 수장이 동일하다는 점이다. 즉, 선거를 통해 승리한 다수당 의원 중 1인이 주의회의 의장과 주지사를 동시에 맡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주(州)의 운영에서 의회에 강력한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정부는 입법권, 재정권, 행정권, 자치조직권을 가진다.
사법[편집]
오스트리아의 법무행정은 전적으로 연방정부의 권한이다. 따라서 주(州)정부는 법무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법부는 형사사건과 민사사건을 다루는 일반법원(ordentliche Gerichte)과 공법법원(Gerichte öffentlichten Rechts)으로 구분된다. 공법법원에는 헌법재판소(Verfassungsgerichtshof)와 행정법원(Verwaltungsgerichte)이 있다. 판사는 대학졸업 후 4년간 훈련을 거쳐 임명되며, 판사의 교육과 임명은 연방정부가 책임한다.
법원은 지방법원, 주(州)법원, 주고등법원, 대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방법원은 94개로 이루어진 지방행정구역에 1~2개씩 설립되어 있다. 주법원은 9개의 주에 총 18개가 설립되어 있고, 주고등법원은 그라츠·인스부르크·린츠·빈에 각각 설치되어 있다. 지방법원에서 이루어진 판결의 재심은 주법원에서 이루어지고, 주법원에서 이루어진 판결의 재심은 주고등법원에서 이루어진다. 법원에서 민사사건과 형사사건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심의된다. 한편 수도인 빈에는 상업분쟁 해결을 위한 법원(Handelsgericht)과 고용 및 사회적 지원과 관련된 분쟁을 위한 법원(Arbeits- und Sozialgericht)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군사[편집]
오스트리아 군대는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만 18세 이상의 모든 남성들은 의무적으로 군대에 징집되어 6개월 간 복무해야 한다. 그리고 제대한 이후에도 8년간 국민 예비역으로 여전히 군역을 지고 있다. 이외에도 16세에 다다른 모든 남성과 여성들은 군대에 자원해서 입대할 수도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도 법적으로 허가되어 있으며, 이 경우에는 9개월 간 정부 공공기관에서 행정 업무를 대신 본다. 1998년 이래부터는 여성들도 직업군인으로 군대에 자원해서 가는 것이 허가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사면이 육지로 둘러싸여 있고 해안가가 아예 없어서, 현재 오스트리아군은 육군(Landstreitkräfte)과 공군(Luftstreitkräfte)만 존재하고 해군은 없다. 그 외에도 국제부대도 있으며 특수부대도 따로 존재한다. 2012년 기준으로 오스트리아의 국방비 지출은 대략 GDP의 0.8% 정도이며, 현재 군대의 총인원은 26,000여 명 정도이며 이들 중 12,000여 명이 징병된 군인들이다. 오스트리아 대통령이 명목상으로 군 최고통수권자이나, 실질적인 국방 업무는 2020년 5월 기준으로 클라우디아 태너 국방부장관이 감독하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냉전이 점차 종식되고 철의 장막이 걷어지면서, 점차 헝가리나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동구권 국가들과 국경을 마주보고 대치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군대를 점차 감축해왔으며, 현재는 거의 불법 이민자들을 차단하는 용도로만 군대를 운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마저도 2008년에 헝가리와 슬로바키아가 솅겐 조약에 가입하면서 거의 임무를 수행할 필요가 사라졌으며, 이 때문에 군대의 수는 갈수록 감축되고 있다. 따라서 군대의 투입 범위도 굉장히 제한적이며, 오직 국가적 재난 사태 등 정말 위급한 경우에 경찰력을 총동원해도 도저히 수습이 되지 않을 경우에만 군대가 주로 투입된다.
오스트리아는 가장 대표적인 영구 중립국으로, 주로 UN 주도의 평화유지 임무에 군대를 잘 파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오스트리아 재난구호군(AFDRU)는 오로지 자원봉사자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수탐지견 전문가들 등 특수종사자들도 있다. 현재에는 주로 보스니아나 코소보 등의 분쟁지역들에 오스트리아군이 대거 파견되어 있다.
외교[편집]
오스트리아 외교정책의 토대는 1955년 5월 체결된 '오스트리아 국가조약(Österreichischer Staatsvertrag)' 혹은 '오스트리아 독립조약'과 10월 연방의회에서 채택된 '영세중립국에 관한 헌법'이다. 오스트리아 국가조약은 점령의 해제와 주권의 회복 대신 독일과의 합병을 금지하고 나치즘 및 군국주의의 부활을 금지하고 기본적 인권을 존중하도록 규정하였다. 한편 1955년 법률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영세중립을 지키고 어떠한 군사동맹에도 가입하지 않으며, 또 영토 내에 외국 기지를 설치토록 허용하지 않을 것"을 규정했다. 이후 12월 국제연합(UN)에 가입할 수 있었고, 1956년에는 중립정책과 모순되지 않는 범위에서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에 참가하였다. 영세중립국이기 때문에 1949년 창설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는 가입하지 않고 있다. 냉전기간 동안 오스트리아는 중립을 이용해 공산권 국가들과 접촉하면서 서방세계와 공산권 국가들간의 다리 역할을 수행하였다. 중립국으로서 군사적으로 갈등의 소지가 있는 국제기구들, 예를 들어 국제원자력기구(IAEA), 유럽안보협력기구(Organization for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OSCE) 사무국, 탄도미사일 확산 방지 헤이그 행동규범(Hague Code of Conduct against Ballistic Missile Proliferation: HCoC) 사무국 등을 유치하였다. 또한 공산권에서 자신들에 대항하는 국가연합체로 인식된 유럽자유무역연합에도 가입하지 않다가 1989년 회원국 신청을 하고 1995년에 가서야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이상과 같은 오스트리아의 중립성은 냉전의 종결 이후 재검토되고 있다. 1991년에는 국제연합(UN)이 승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라크에 대한 UN의 제재를 위한 항공기의 오스트리아 영공통과를 받아들였고, 1995년에는 유럽연합(EU)에 가입하면서 유럽연합 공동외교안보정책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95년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평화 파트너십(NATO’s Partnership for Peace)에 가입하고 보스니아 평화유지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오스트리아는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중립 정책의 수정 의사를 여러 번 표명해왔다. 1996년 국민당은 오스트리아의 NATO 가입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고, 2001년 중립정책의 수정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반면, 사민당과 자유당은 중립을 오스트리아 외교정책의 초석으로 간주하고 있다. 여론 또한 중립주의에 호의적인 편이다. 한편, 1999년 국민당이 친(親)나치스 극우정당인 자유당과의 연정을 고려하자 유럽과 미국은 이것이 ‘오스트리아 국가조약’ 위반임을 천명하면서 오스트리아에 제재를 가하기도 했다.
중립국 오스트리아의 국제관계에서 안보문제는 EU의 공동외교안보정책이나 유럽안보협력기구 내에서 해결하고 있다. 대신 오스트리아는 국제무대에서 다자주의를 지지하고 있으며, 외교정책의 중심은 EU 회원국과의 정치, 경제적 관계 유지에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 영토로 귀속된 남티롤 문제도 유럽과의 관계 강화라는 차원에서 해결되었다. 주민의 90% 이상이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계 주민인 남티롤 문제로 1966년 이탈리아와 긴장관계가 형성되고 유혈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2년 두 나라 사이의 조약을 통해 남티롤에 광범한 자치권을 부여하면서 1992년 공식적으로 분쟁을 종료하였다.
오스트리아 외교정책에서 주목할 점은 이스라엘과의 소원한 관계이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자행한 홀로코스트에 대해 사과하고 역사적 책임을 계속해서 지고 있는데 반해, 오스트리아는 이에 대해 무책임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1979년 사민당 집권 시절 오스트리아 정부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신임하면서 친아랍정책을 펼치기도 하면서 이스라엘과 멀어졌다.
- 대한관계
한국과 오스트리아는 1963년 5월 22일에 공식적으로 수교하였는데, 이에 앞서 1892년 6월 23일 조·오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된 바 있어 양측간 교류역사는 100년이 넘는다. 한국과 오스트리아는 1971년 10월에 무역협정, 1979년 3월, 사증면제협정 그리고 1991년 3월, 투자보장협정을 체결하였다. 오스트리아는 1974년 12월 17일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오스트리아 측에서는 주한대사가 북한 대사를 겸하며, 북한은 오스트리아에 대사관을 유지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양측에서는 정부 고위인사의 상호방문이 빈번한데, 한국 측에서는 2004년 10월 이해찬 국무총리와 2018년 5월 이낙연 국무총리 그리고 외교부 장관을 위시하여 10여 명의 주요 부처 장관이 오스트리아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아직 국가원수의 오스트리아 공식방문은 없다. 반면에 오스트리아에서는 볼프강 쉬셀(Wolfgang Schüssel) 총리가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정상회의 참석차 방한하였고, 2019년 2월에는 제바스티안 쿠르츠(Sebastian Kurz, 1986.8.27.~) 총리가 공식 방한하였다. 이외에도 오스트리아 측에서는 외교·경제·법무 등 주요 부처 장관 10여 명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한국과 오스트리아는 모두 수출지향적인 경제교류로 양측간 무역이 활발하다. 2020년 기준 한국은 오스트리아에 10억 1,100만 달러의 수출 그리고 같은 기간 16억 2,700만 달러의 수입을 기록하였다. 한국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수출 품목은 자동차, 기계, TV와 휴대폰을 비롯한 전자전기, 컴퓨터 등이다, 반면에 오스트리아의 대한 수출 품목은 승용차, 자동차부품, 의약품 등이다. 한국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투자는 LG전자, 삼성SDI 등 대기업의 현지공장 운영으로 2020년 누적신고 기준으로 16억 달러에 달한다. 동 기간 오스트리아의 대한투자는 2억 6,300백만 달러로 규모가 훨씬 적고 주로 기계장비 제조업에 집중되어 있다.
경제[편집]
오스트리아는 역사적으로 서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세계대전 이후 피폐해진 경제가 유럽 부흥 계획에 힘입어 1980년대까지 급속히 발전하였다. 오스트리아는 1인당 GDP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차지하는 국가들 중 하나이다. 고도로 산업화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시장경제원리를 중심으로 한 대표적 자본주의적 국가들 중 하나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의 주 산업들은 대부분이 국영산업이었으나, 90년대 이래로 산업 사유화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거의 타 유럽 국가들과 비등한 수준으로 민간사업자들의 비중이 커졌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또한 노동계가 특히 강력한 편으로, 정치계와 재계에도 그 목소리가 강력하다. 워낙 많은 양의 문화유산들을 보유하고 있기에 국제 관광으로도 많은 수입을 벌어 들이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역사적으로 독일과 최대 경제 교역국 관계를 맺어왔으며, 이 때문에 심지어 현재까지도 독일 경제상황에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러나 유럽 연합에 가입한 이후부터는 점차 타 유럽 국가 경제권들에도 묶이게 되면서 독일과의 경제 의존도도 어느 정도 감소하게 되었다. 또한 EU 가입으로 인하여 유럽 경제권에 완전히 편입되면서 해외 투자가 굉장히 증가하였고, 2006년 기준으로는 성장률이 3.3%에 이르기도 했다. 현재는 유럽과 완전히 시장이 통합되어 전체 수입품들의 최소 67%가 타 유럽 국가들로부터 들어오고 있다.
오스트리아도 2008년 금융위기를 피해갈 수는 없었는데, 이 때문에 수많은 금융회사들이 무너지고 경제도 상당히 악화되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하이포 알페-아드리아 은행이 파산하여 2009년 12월에 정부 구제를 받고 겨우 기사회생한 적도 있는데, 2014년까지도 이 구제를 제대로 상환하지 못하여 총리가 직접 우려를 표한 적도 있다.
오스트리아 1인당 GDP는 49,900 달러로 세계에서 24번째로 부유한 나라이며(CIA기준), 이는 유럽 국가 중 14번째로 높은 것이다.
유럽 NUTS 지역구분에 따르면 수도 빈은 유럽내 5번째로 1인당 GDP가 높은 도시이다.
산업[편집]
오스트리아는 서유럽 주요 국가와 유사하게 서비스산업 비중이 높아 국내총생산(GDP) 대비 서비스 비중은 70%, 제조업 29% 그리고 농업이 약 1%를 점한다. 고용인력의 경우 서비스 71.5%, 제조업 25%, 농업 3.5% 수준으로 농업 부문은 GDP 비중 대비 고용인력이 많다.
중소기업 위주의 경제구조이며 여러 부문에서 높은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대기업이 주도하는 철강, 금속, 기계, 엔지니어링, 화학, 석유정제산업은 오스트리아의 핵심 제조업으로 고용인력도 많고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높다. 이외에 운송장비, 전기, 전자, 보석가공, 도자기, 유리공예, 식음료산업 등도 발달하였다. 건설, 금융, 관광, 운송과 물류 등의 서비스 부분도 높은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건설 산업의 경우 턴키방식의 발전소 건설과 첨단빌딩 운용과 같은 부가가치가 높은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수도인 빈은 관광산업의 중심지이며 금융서비스와 동유럽 진출을 위한 법률·노무 등의 비즈니스 컨설팅 산업이 활발하다.
- 지역별 주요 산업
오스트리아는 유럽에서도 영토가 작은 국가이지만 전국에 걸쳐 산업이 균등하게 분포되어 있다. 북부에는 철강·금속·화학·기계 산업이 발달하였다. 서부의 잘츠부르크와 포랄베르그(Vorarlberg)는 전자·목재·제지·섬유·의류산업, 남부 카린시아(Carinthia)는 목재·펄프 그리고 동남부의 스트리아(Styria)는 자동차와 기타 제조업 등 각 지역마다 산업이 특화되어 있다. 포보스지(Forbes) 선정 세계 500대 기업에 들어가는 에너지 기업인 OMV, 전력공급기업인 베르본드(Verbund AG), 통신서비스기업 텔레콤 오스트리아(Telecom Austria), 금융기업 에르스테 그룹(Erste Group)과 라이프아이젠(Raiffeisen Bank international, RBI) 등이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대기업이다. 이외에 크리스탈 식기와 공예품 기업 스와로브스키(Swarovski), 게임과 도박기업 노보매틱(Novomatic), 에너지 음료기업 레드불(Red Bull) 역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오스트리아 기업이다.
- 농업
농업 부문은 2019년 전체 GDP 대비 1.1%에 불과하지만, 고용인력의 3.5%를 점하여 노동시장 운영에 있어 주요한 부문이다. 오스트리아는 영토가 작고 산지가 많아 농업은 북서부 평야지대에서 소규모로 이루어지고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으로 경쟁력이 뒤처져 있다. 그러나 1995년 유럽연합 가입 이후 유럽연합이 실행하는 공동농업정책을 통한 보조금 지급이 이루어지면서 고부가가치 작물 재배 위주로 농업이 유지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GDP에서 농업은 3% 미만이지만 밀, 보리 등의 곡물, 우유와 육류 등을 포함해 국내소비 농작물의 약 80% 정도를 자급한다. 오스트리아는 고부가가치 작물에 주력하여 국내생산 작물의 약 20~25%는 유기농 농산물이다. 이에 따라 유기농 농산물 생산 비중은 유럽연합 회원국 중에서 가장 높고 유럽에서는 리히텐슈타인에 이어 두 번째에 위치한다. 그러나 농업과 관련 산업은 유럽연합 가입 이후에도 여전히 노동력이 부족하여 중·동부 유럽에서 온 단기 체류 노동자들이 많이 종사한다.
- 관광업
또한 유럽의 대표적인 관광국가로 방문객 수는 세계 15위권 이내에 위치한다. 관광은 서비스 산업의 핵심으로 GDP의 약 9~10%를 점하며, 서비스부문 고용자의 15% 이상이 관광업에 종사한다. 오스트리아는 매년 3,0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며, 이중 약 절반은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등 인근 서유럽 국가의 관광객이다. 2000년대 들어 대표적인 겨울 스키리조트인 알베르그(Arlberg)와 키츠뷜(Kitzbühel) 등에는 점차 동유럽 관광객이 증가하고 있다. 빈과 잘츠부르크는 연중 관광객이 많이 찾는 대표적인 관광도시이다.
무역[편집]
오스트리아는 적은 인구와 경제 규모로 대외무역에 크게 의존하는 경제구조이다. 2019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무역규모는 108%에 달한다. 강소기업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 기반이 탄탄한 국가이면서도 서비스 수출이 전체 수출의 약 40%를 점할 정도로 서비스산업도 높은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유럽연합 27개국과 국경 없이 시장이 통합되어 있고, 노르웨이ㆍ아이슬란드ㆍ리히텐슈타인 등 3개국이 결성한 유럽경제지역(EEA)의 회원국이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스위스 및 러시아를 포함한 일부 동유럽 국가를 제외하면 유럽 주요 국가들과 관세 없는 자유무역을 실행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주요 수출 품목은 자동차, 트램을 비롯한 여러 운송장비와 부품, 기계, 의약제, 의료장비, 음향장비를 비롯한 전자장비와 부품, 광학장비와 계측기, 미네랄워터 등 대부분 높은 기술력을 요구하는 제조업 상품에 집중되어 있다. 주요 수입 품목은 자동차, 전자장비, 철강. 기계, 운송장비, 석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원이다.
오스트리아는 1990년대 초, 중·동부유럽의 공산주의의 붕괴로 동유럽과의 교역이 증가하였고, 1995년 유럽연합 가입 이후에는 독일을 포함한 역내 회원국과의 교역이 약 70% 정도를 점한다. 국가별 주요 수출국은 독일, 이탈리아, 미국, 스위스, 프랑스, 체코, 헝가리, 폴란드, 영국, 러시아 등으로 유럽 이외의 주요 수출국은 미국, 중국, 일본 등이다. 오스트리아의 주요 수입국은 독일, 이탈리아, 미국, 스위스, 프랑스, 체코, 헝가리, 폴란드, 영국, 러시아 등이다.
독일은 역사적으로 오스트리아의 가장 큰 무역 상대국으로 2019년 수출은 약 29% 그리고 수입은 약 35%로 전체교역의 약 3분의 1을 독일에 의존한다. 독일과의 교역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동일한 경제권으로 현재에도 조업 분야에서 독일과 가치사슬이 광범위하게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가입 이후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인건비가 저렴한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 중·동부유럽 회원국에서의 현지생산 증가로 교역량이 증가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중국과의 교역이 갈수록 증가하는데 특히 수입 규모가 날로 커지고 있다.
에너지와 환경[편집]
2018년 기준, 오스트리아의 에너지 소비는 화석연료 사용 비중이 58% 정도이며, 나머지는 신재생에너지와 전력이다. 화석연료는 대부분 수입에 의존한다. 오스트리아는 2000년대 이후 신재생에너지 사용 비중을 확대해 왔다. 그러나 비용과 기술적 문제로 진척이 느려 석탄과 석유 소비를 일부 대체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1990년부터 지열을 에너지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기술개발에 주력하여 주택 난방의 약 50%는 지열을 활용하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산지가 많은 지형적 조건으로 전력생산의 60~70% 정도는 수력발전으로 충당한다. 이외에 풍력과 태양광이 약 10% 정도를 점하며, 화석연료 비중은 20% 초반으로 전력 부문에서는 친환경 에너지 사용 비중이 높다. 오스트리아는 1972년 도나우강이 위치한 쯔웬텐도르프(Zwentendorf)에 최초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978년 원전가동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50.5%의 근소한 차이로 반대 의견이 나와 의회에서 원전가동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쯔웬텐도르프 원전은 완공 후 가동이 금지되어 실험용으로만 사용하였다. 2005년 오스트리아 에너지 기업인 EVN Group이 쯔웬텐도르프 원전을 인수하여 영화촬영 및 타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2018년 오스트리아 정부는 유럽연합의 탄소중립 정책에 따라 '임무 2030(Mission 2030)'으로 명명한 기후변화와 에너지정책을 수립하여 2050년까지 완전한 탄소중립을 달성하기로 하였다. 이후 2020년에는 계획을 앞당겨 204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0%로 정하고 관련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본 계획에 따라 2030년까지 전력생산을 위한 에너지는 100% 신재생에너지로 대체하며, 2040년 이후 탄소배출에 대한 과세를 부과키로 하였다. 정부에서는 탄소배출이 많은 빌딩과 운송부문에서 규제강화와 친환경 기술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특별히 탄소배출 규모가 적은 친환경 열차 이용을 장려하기 위해 운송시스템의 가격조정 조치도 실행할 계획이다.
운송교통[편집]
오스트리아의 운송망은 도로, 철도, 항공 및 내륙수로로 구성된다. 대중교통은 수도인 빈에 지하철(U-Bhan), 트램, 버스가 운행하며, 이외의 도시는 트램과 버스가 주요 교통수단이다. 오스트리아는 내륙국가로 해상운송망이 없어 수출입 화물은 이탈리아 동북부의 트리에스테 항구(port of Trieste)를 이용한다. 도로 연장은 약 20만km에 달하며 이중 약 1,700km는 고속도로(Autobahn)이다. 고속도로는 A1~A25로 명명되어 총 25개 구간이 있다. A1은 1967년 최초로 건설된 고속도로로 수도인 빈에서 서부의 린츠를 거쳐 잘츠부르크까지 총연장 293km에 달한다. 린츠에서 북부의 작은 도시 뮐피어르텔(Mühlviertel)을 연결하는 A7 고속도로를 연장한 A26 고속도로가 건설 예정이다. 오스트리아는 1812년 오스트리아ㆍ헝가리 제국 시절부터 산업용 철도를 부설하여 중부유럽에서 독일과 함께 철도망이 가장 잘 구축된 국가이다. 철도의 총연장은 2005년 약 5,700km를 정점으로, 경쟁력 없는 노선을 폐쇄하여 2018년 이후 약 5,000km로 감소하였다. 철도는 1923년에 설립된 국영기업인 오스트리아 연방철도(ÖBB)에서 운영하는데, 2005년 여객·화물·철도망 관리를 전담하는 자회사로 분사하였다. 1998년 유럽연합의 정책에 따라 철도시장을 완전히 자유화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오스트리아 연방철도가 여객운송의 약 90%를 점하고, 나머지는 주로 독일계 철도기업이 독일과 헝가리 등 인근 국가와 연계된 노선을 운영한다.
오스트리아는 50여 개가 넘는 크고 작은 공항이 있다. 수도인 빈에서 동남부로 18km 떨어진 빈국제공항은 오스트리아항공과 저가항공사인 위즈에어(Wizz Air) 및 라이언에어(Ryanair)의 허브공항으로, 오스트리아의 관문이자 중부유럽의 대표적인 국제공항이다. 이외에 잘츠부르크 공항, 인스부르크 공항, 그라츠 공항 및 소규모 공항인 린츠 공항과 클라겐푸르트 공항이 있다.
인문사회[편집]
인구[편집]
오스트리아 통계기관의 연구에 따르면 오스트리아의 인구는 2020년 기준으로 약 900만 명 정도이다. 이 중 수도인 빈에 190만 명 정도가 살고 있으며, 교외 지역까지 합치면 약 260만 명에 이른다. 이 때문에 전체 인구의 4분의 1 가까이가 수도권에 모여 살고 있어 상당히 수도 근교에 인구 밀집도가 높다. 또한 빈 지역은 삶의 질이 높고 부유층이 많이 모여살기로 유명하다.
최대 도시는 당연히 수도인 빈이고, 크기로만 따지면 제2의 도시는 그라츠로 약 291,007명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그 뒤를 206,604명의 린츠, 155,031명의 잘츠부르크, 131,989명의 인스부르크, 101,303명의 클라겐푸르트가 잇고 있다.[32] 나머지 도시들은 모두 인구가 10만 명에 미치지 못한다. 유로스태트에 의하면 2018년 기준으로 오스트리아에는 총 169만 명의 외국인들이 있다고 하며, 이는 전체 인구의 19.2%에 달하며 상당히 높은 수치라고 한다. 이들 중 928,700여 명이 유럽 바깥 대륙에서 태어났으며 762,000여 명이 유럽 내에서 본적을 두고 있다. 또한 483,100여 명에 달하는 외국 출생 이민자들도 수용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민족은 당연히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독일계 출신 백인들이다. 그 외에도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수가 많은 민족들 중 하나에 투르크족이 있다. 대략 35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으며, 2003년 기준으로만 13,000여 명의 투르크인들이 국내에 입국했으며 같은 해에 2,000여 명 정도만이 오스트리아를 떠나며 거의 순유입이 이루어졌다. 이 외에도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보스니아인, 마케도니아인, 슬로베니아인 등이 많아 전체 인구의 5.1% 정도를 차지한다.
2017년 기준으로 오스트리아의 합계출산율은 여성 1명당 1.52명 정도이다. 인구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기준인 2.1명보다는 못미치는 수준이며, 1873년의 4.83명에는 한참 뒤떨어지는 수준이다. 2015년 기준으로 전체 출생아들의 42.1%가 미혼모들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 오스트리아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노령화가 진행된 나라들 중 하나로, 평균 나이가 44.2세에 이른다. 2016년 기준으로 기대 수명은 81.5세로, 남성은 78.9세, 여성은 84.3세이다. 오스트리아는 2080년 기준으로 약 1,000만 명 수준으로 인구가 증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언어[편집]
가장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는 오스트리아 독일어로, 교육, 출판, 공공시설, 웹사이트 등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스트리아 독일어를 사용한다. 오스트리아 독일어는 거의 대부분이 독일어와 비슷하지만, 어휘나 문법이 약간 다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등 독일어권 국가들은 독일에서 사용하는 독일어를 표준 독일어로 지정하고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탈리아, 벨기에, 덴마크 등지에서도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다만 오스트리아 독일어는 타 독일어 방언들에 비해서는 약간 독특한 면이 있어서, 다른 독일어권 국가들과 바로 소통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다. 오스트리아 인구의 88.6%가 독일어나 그 방언을 사용하며, 이중에는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는 독일인 2.5%도 포함한다. 오스트리아 독일어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는 언어는 튀르키예어 2.8%, 세르비아어 2.21%, 크로아티아어 1.63%, 영어 0.73%, 헝가리어 0.51%, 보스니아어 0.43% 등이 있다.
오스트리아 연방주들 중 하나인 카린시아와 스티리아 등 오스티라아 극동부 지방에는 슬라브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다. 특히 이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에 헝가리의 영향을 지대하게 많이 받았기 때문에, 헝가리어와 크로아티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동구권 국가들에서 온 국제이민 노동자들과 그들의 후손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피하여 도망쳐온 난민들과 그 후손들로 구성된 비오스트리아 출생 국적자들도 상당히 많은 수이며, 1994년부터는 집시족들도 공식적인 소수민족으로 인정을 받았다.
2001년 연구결과에 의하면 오스트리아에는 약 710,926명의 외국인들이 살고 있다고 전했고, 이들 중 283,334명이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넘어온 사람들이라고 전했다. 오스트리아에서 2번째로 많이 쓰이는 언어는 터키어로, 대략 20만 명에서 30만 명 정도가 사용하며 주로 주변의 쿠르드족이나 튀르키예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사용한다. 3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언어는 독일어로, 약 124,392명 정도가 독일어를 사용한다. 주로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의 티롤 주, 루마니아, 소련 등에서 넘어온 독일계 이민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편이다.
종교[편집]
2001년 기준으로 오스트리아 전체 인구의 74% 정도가 가톨릭을 믿었다. 또한 인구의 5% 정도가 개신교를 믿었다. 오스트리아의 기독교인들, 즉 천주교 신자들과 개신교인들 모두가 수입의 1% 정도를 반드시 교회에 상납해야 하며, 이를 ‘교회기부금(Kirchenbeitrag)’이라고 부른다. 20세기 후반부터 점차 기독교 신자수가 줄어들고 있는데, 2018년에 새롭게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전체 오스트리아 인구의 56,9% 밖에 되지 않는 5,050,000여 명 정도만이 가톨릭 신자라고 하였다. 2015년 기준으로 일요일 예배에 참석률은 605,828명으로, 전체 인구의 7% 밖에 되지 않았다. 루터교 교회도 2001년과 2016년 사이에 무려 74,421명에 달하는 신도들이 이탈하였다고 전한다.
2001년 조사결과에 의하면 전체 인구의 12% 정도가 종교가 없다고 밝혔으며, 2015년에는 이 비율이 20% 정도로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한편 기독교도,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 중에서는 터키나 보스니아, 코소보에서 이민을 온 무슬림 신자들이 많으며, 특히 2016년에는 70만 명을 기록하며 무려 15년 만에 2배 가까운 성장세를 보이며 오스트리아 내에서 가장 많은 증가세를 기록하였다. 또한 18만 명 정도가 세르비아에서 이민을 온 정교회 신자들이며, 21,000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을 믿으며 8,100여 명 정도가 유대교를 믿는다.
교육[편집]
오스트리아의 교육은 무상 공교육 시스템으로, 교육제도는 독일과 유사하게 편성되어 있다. 학교는 공립과 사립이 함께 있으나 교육제도 전반에 걸쳐 국가가 관리하며, 공립학교의 경우 등록금과 교과서 등이 무료이다.
오스트리아의 교육은 초등과정(Volksschule) 4년, 8~10년의 중등과정(Hautschule, Gymnasium Unterstufe)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등과정은 다시 하급 중등과정과 상급 중등과정으로 구분된다. 하급 중등과정은 인문계에 해당하는 4년 과정의 '김나지움(Gymnasium, 혹은 Allgemeinbildende Höhere Schule: AHS)'과 실업계에 해당하는 5년 과정의 'Hauptschule(HS)'으로 구분된다. 하급 중등과정까지는 의무교육으로, 인문계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과정을 교육하고, 실업계 과정에서는 기술교육이 이루어진다. 과정의 선택은 초등과정에서 학생들의 성적과 의견을 바탕으로 정해진다. 상급 중등과정은 하급 중등과정에서의 성적에 따라 다시 대학입학을 위한 '김나지움(AHS)', 취업을 목표로 하는 'BMS(Berufsbildende Mittlere Schule)', 학문과 직업교육을 병행하는 'BHS(Berufsbildende Höhere Schule)' 과정으로 진학한다. 따라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하급 중등과정의 김나지움과 상급 중등과정의 김나지움 등 총 9년의 AHS 과정을 이수하고 마투라(Matura, Reifeprüfung)라고 부르는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치러야 한다.
오스트리아 대학은 공립대학인 연방대학교(Universitäten), 사립대학교(Privatuniversitäten), 응용과학 대학교(Fachhochschulen) 등 세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은 설립법에 따른 차이이지 수준의 차이는 아니다. 오스트리아에는 약 50여 개의 대학교가 존재하는데, 특히 1365년 설립되어 독일어권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빈 대학교(1365)를 위시해 그라츠대학교(1585), 인스브루크대학교(1677), 잘츠부르크대학교 등이 유명하다.
사회보장제도[편집]
오스트리아는 세계적인 수준의 사회보장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1920년대에 일찍이 노동관계법을 제정하여 주 40시간 노동시간 준수, 유급 휴가, 청소년과 여성을 위한 노동시간의 배려 등을 규정하였고, 1956년 1월 발효된 '사회보장법'으로 기본적인 사회보장제도를 규정하고 1972년 법제화된 연방 보건환경보호부가 담당하고 있다. 모든 국민이 건강 재해 실업 연금의 혜택을 받으며 장애인과 전쟁 희생자를 위한 배려, 아동 양육을 위한 가족 수당 지급, 연금생활자를 위한 숙소 제공, 긴급아동보호소와 보건 위생센터, 및 온천요양소를 설치하여 국가가 지원한다.
하지만, 이러한 높은 수준의 사회보장을 위해 국민들이 지불해야 하는 세금은 매우 높다. 유럽연합(EU) 국가 중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네덜란드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많은 세금을 거두는데, 소득 수준에 따라 최대 50%까지의 세금을 낸다. 하지만 저소득자의 경우 세금을 전혀 내지 않고도 동일한 사회보장을 받을 수 있다. 고소득층이 낸 세금은 복지와 건강, 주택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많이 투자되며 그 다음으로는 일반적인 공중행정과 교육, 과학연구, 문화보급 등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투자된다.
언론과 방송[편집]
오스트리아의 언론 시장은 텔레비전, 라디오, 온라인 방송서비스를 제공하는 국영방송국인 ORF와 오스트리아 최대 신문사인 크로넨 차이퉁(Kronenzeitung)과 쿠리어(Kurier)를 발행하는 미디어그룹인 미디어프린트(Mediaprint)가 장악하고 있다. 미디어프린트는 오스트리아 신문 시장의 3분의 1을 장악하고 있다. 신문 시장의 또 다른 출판 공룡기업인 스티리아(Styria) 그룹은 일간신문인 클라이네 차이퉁(Kleine Zeitung)과 디프레세(Die Presse), 주간지인 디퓌르헤(Die Furche) 발행하고 있다. 크로넨 차이퉁과 클라이네 차이퉁은 각각 오스트리아 신문 시장의 1,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주요 신문으로는 주류 언론인 데르 슈탄다드(Der Standard)와 프레세(Die Presse)가 있고, 자극적인 소재를 취재 보도하는황색언론(yellow journalism)인 크로넨 차이퉁(Kronen Zeitung), 외스터라이히(Österreich) 등이 경쟁사이며, 황색언론 신문들이 판매 부수에서 훨씬 앞서고 있다. 이데올로기적으로는 타블로이드가 주로 포퓰리즘이나 극우 혹은 중도우파 진영에 서 있다. 이들 신문으로는 크로넨 차이퉁, 클라이네 차이퉁, 외스터라이히, 호이테(Heute) 등이 있다. 이밖에 우익 계열의 매체로는 운첸주리어트(Unzensiriert), 추어차이트(Zur Zeit), 지역 일간지인 보헨블릭(Wochenblick) 등도 있다. 반면 통상적 신문의 형태를 가지는 데르 슈탄다르는 중도좌파 계열이고, 온라인 잡지 콘트라스트(Kontrast)는 사회민주당 계열을 표방한다. 중도 계열의 신문으로는 기독교 자유주의 이념을 따르는 온건한 클라이네 차이퉁, 중도우파 계열의 디 프레세, 중도좌파 계얄의 쿠리어 등이 있다.
오스트리아는 1996년까지 국가가 독점적으로 방송국을 운영했다. 1996년에 첫 민영방송국인 ATV가 탄생하였고, 현재 방송시장에서도 오스트리아 국영방송(Österreichischer Rundfunk: ORF)이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ORF는 전국적으로 6개의 TV 채널을 운영하고, 4개 채널의 라디오 방송을 송출하고 있다. 민영방송국으로는 ATV, Puls4 및 ServusTV 등이 있다. 이밖에 위성을 통해 송출하는 다수의 독일 방송을 시청할 수 있다. 라디오 방송으로는 민영방송인 Kronehit 등이 유명하다.
문화[편집]
문학[편집]
오스트리아 문학은 독일어로 쓰여진 문학으로, 넓게는 역사적으로 오스트리아 영토에서 쓰여진 모든 작품을 의미하지만, 좁게는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고 오스트리아제국이 건설된 이후에 쓰여진 문학작품을 의미한다. 오스트리아 문학은 독일문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19세기 중엽부터 독일문학이 다양화되며 오스트리아문학도 독자적인 경향을 보였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프란츠 그릴파르처, 요한 네스트로이,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아르투어 슈니츨러, 슈테판 츠바이크, 프란츠 카프카 등이 있다. 20세기 말부터 희곡 문학이 발전하여 페터 한트케와 볼프강 바우어(Wolfgang Bauer)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음악[편집]
빈과 잘츠부르크는 오스트리아 음악의 중심지이다. 수도 빈은 16세기부터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하기 시작해 18~19세기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원으로 클래식 음악의 수도가 되었다. 17~18세기 바로크 시대에는 헝가리와 슬라브음악이 오스트리아 음악에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오스트리아의 음악가로는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프란츠 슈베르트, 요한 스트라우스 등 이며, 당시 독일 출신인 베토벤이나 요하네스 브람스 등도 빈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지휘자 중 한 사람으로 추대받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도 20세기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음악가이다. 이외에도 빈소년합창단, 빈필하모니관현악단, 빈국립오페라단은 세계적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한편,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와 카라얀의 고향으로 매년 여름, 음악 축제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다.
과학[편집]
보통 오스트리아는 예술이나 문화 쪽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수많은 저명 과학자들이 탄생한 과학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가장 대표적으로 19세기를 풍미한 물리학자들인 루드비히 볼츠만, 에른스트 마흐, 프란츠 헤스, 크리스티안 도플러 등이 있다. 20세기의 경우에는 리제 마이트너, 에르윈 슈뢰딩거, 볼프강 파울리 등이 등장하였으며, 양자역학 발전의 중심지로서 1920년대와 30년대 내내 유럽 과학의 핵심 지위를 유지하였다. 현시대에서 가장 유명한 오스트리아 출신 과학자는 광양자 전송을 성공시킨 안톤 젤링거 등이 있다.
오스트리아는 물리학 뿐만 아니라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들 중 하나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카를 포퍼 등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또한 생물학자인 그레고리 멘델과 콘라드 로렌츠, 수학자인 쿠르트 괴델, 그 외에도 페르디난드 포르셰와 지크프리트 마르쿠스 등도 오스트리아 출생이다.
오스트리아는 약학과 생물학, 심리학에도 조예가 깊은 국가이다. 심지어 중세에도 파라셀수스 등 유명한 생물학자들이 있었으며, 19세기 빈 의학대학에서 테오로트 빌로트, 클레멘스 폰 피르케 등의 학자들이 이름을 널리 알렸다. 또한 시그문트 프로이트 등 심리학의 대가의 출생지이며, 개인심리학의 창립자인 알프레드 아들러, 심리학자인 빅토르 프랑클, 한스 아르페르거, 파울 바츨라빅 등도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오스트리아 경제대학도 유럽 내부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대학들 중 하나로, 가장 대표적으로 카를 멩거, 조지프 슘페터,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루트비히 폰 미제스 등의 경제학자들이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또 다른 오스트리아 출신의 학자들 중에서는 피터 드러커, 사회학자 폴 펠릭스, 과학자 구스타브 노살 등이 있다.
예술[편집]
유명 오스트리아 화가로는 페르디난트 게오르그 발트뮐러, 루돌프 폰 알트, 한스 마카르트,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오스카르 코코슈카, 칼 몰,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 등이 있고 사진가로는 매그넘 최초의 여성 작가인 잉게 모라스, 에른스트 하스 등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지배 가문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자신들의 명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일부러 예술계와 문학계에 막대한 지원을 해주었고, 이덕분에 오스트리아는 유럽 전역에서도 알아주는 문학의 중심지로 떠오를 수 있었다. 유명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문학가들 중에서는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 아르투어 슈니츨러, 슈테판 츠바이크, 토마스 베른하르트, 로베르트 무질, 시인 게오르크 트라클, 프란츠 베르펠, 프란츠 그릴파르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카를 크라우스 등이 있다. 유명한 현대 극작가와 소설가로는 노벨 수상자이기도 한 엘프리데 옐리네크, 관객모독의 페터 한트케, 다니엘 켈만이 있다.
축제[편집]
오스트리아는 '음악의 나라'라는 별칭에 맞게 음악과 관련된 축제와 페스티벌이 전국 각지에서 개최된다.
빈에 있는 도나우섬에서 6월 말에 열리는 도나우인셀페스트는 유럽에서 가장 큰 음악축제 중 하나이다. 록과 재즈 등 현대음악 공연이 축제장 곳곳에서 펼쳐지고, 축제장 주변에는 다양한 물품을 파는 장이 열려 해마다 3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역시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음악축제이다. 해마다 7~8월에 개최되며 일류 오케스트라, 지휘자, 연주자, 성악가, 배우들이 모여 연극, 오페라, 관현악, 실내악 공연을 펼친다. 축제의 주관은 잘츠부르크 태생인 모차르트를 연구하는 재단이며, 유럽의 3대 음악 축제로 불릴 만큼 매년 25만 명 이상이 방문하며 규모가 상당하다.
브레겐츠라는 도시의 호수가에서는 매년 7~8월에 브레겐츠 페스티벌이 개최된다. 오페라 페스티벌로, 호수 위에 무대를 만들어 한 달 동안 오페라를 공연을 하는데, 매년 단 하나의 오페라만을 공연한다. 인스브루크에서도 매년 한여름에 오페라 공연과 콘서트 등을 볼 수 있는 음악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도나우 강변에 위치한 린츠에서도 음악 축제인 '클랑볼케(Klangwolke) 페스티벌'이 개최되어 수준높은 오케스트라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식문화[편집]
다민족국가였던 오스트리아의 역사적 경험은 식문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오스트리아의 음식은 기본적으로 독일 요리를 기본으로 이탈리아 및 헝가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인 오스트리아 요리는 슈니첼이다. 송아지 넓적다리를 얇게 썰어 빵가루를 입혀 튀긴 요리로, 우리나라의 돈가스와 비슷하다. 고기에 레몬을 뿌려 익힌 감자와 함께 먹는데, 최근에는 돼지고기나 닭고기 등으로도 대체하여 조리하기도 한다. 타펠스피츠라는 쇠고기 요리도 주메뉴로 많이 먹는 요리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의 수육과 비슷한데, 얇게 저민 쇠고기를 특별한 양념 없이 익힌 후 야채와 함께 먹는다. 쇠고기나 소시지에 각종 야채를 듬뿍 넣어 끓인 후 빵을 찍어먹는 굴라시는 오스트리아에서도 즐기는 대표적인 헝가리 음식이다.
디저트로는 자허토르테라고 하는 후식을 많이 먹는다. 살구잼을 넣어 만든 케익에 초콜릿을 입힌 것으로, 1815년 빈회의에서 클레멘스 메테르니히가 유럽 정상들에게 대접하였던 후식이다. 오스트리아의 전통 커피로는 커피에 크림을 얹은 아인슈페너(Einspänner)가 있다.
스포츠[편집]
오스트리아는 알프스 산맥과 바로 접하고 있고, 이 때문에 알파인 스키가 국민적으로 굉장히 대중적이다. 또한 관련 스키 산업도 타 국가들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발달해 있는 편이다. 그 외에도 스노우보드, 스키점프 등 설산 관련 스포츠도 매우 대중적이다. 스키 스포츠가 매우 발달해 있는 덕분에 프란츠 클라머, 헤르만 마이어, 토니 세일러, 벤자민 라이크, 마리에 쉴트 등 여러 세계적인 스키 선수들을 배출해내기도 하였다. 또한 스키 점프 선수들인 아르민 코글러, 안드레아스 펠더, 에른스트 베토리, 토마스 모르겐슈테른 등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2012년에는 인스부르크에서 첫 유소년 동계올림픽이 열리기도 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유명한 팀 경기는 축구로, 주로 오스트리아 축구연맹에서 주관하고 있다. 또한 1934년 FIFA 월드컵에서 4위, 1954년 FIFA 월드컵에서 3위, 1978년 FIFA 월드컵에서 7위를 차지하는 등 역사적으로도 유럽의 축구 강국이기도 하다. 그러나 국제적으로는 그다지 최근 좋은 성적을 보이고 있지 않다. 오스트리아는 스위스와 함께 2008년 유럽 축구 챔피언십을 공동 유치하였으며, 국내 스포츠 리그에는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가 있다. 유명한 팀들 중에서는 FK 오스트리아 빈, 레드불 잘츠부르크, 스텀 그라츠 등의 팀들이 있다.
오스트리아는 축구 외에도 하키도 있으며, 야구 분데스리가도 따로 있다. 승마도 유명하며, 빈 경마학교도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다. 유명한 포뮬라 원 드라이버로는 니키 라우다 등이 있으며, 이 사람은 F1 챔피언십에서 3번이나 우승을 한 바가 있다. 현재는 페라리와 멕라렌에서 동시에 뛴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여러 유명한 포뮬라 원 선수들이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관광[편집]
오스트리아는 알프스산맥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산과 호수 등의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음악 및 역사적 도시 등 풍부한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다. 관광객들은 여름에는 휴양 목적으로 산과 호수를 많이 찾으며, 해마다 여름에 열리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등 전국 각지에서 개최되는 음악 축제를 찾기도 한다. 겨울에는 인스브루크 등에 산재한 스키장이 주요 관광지 역할을 한다.
대표적인 관광도시는 빈과 잘츠부르크이다. 빈은 성슈테판 대성당(Sankt Stephansdom)과 쇤브룬궁전으로 유명하다.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과 고딕 건축 양식이 결합된 성 슈테판 대성당은 원래 교구성당이었지만 1722년 수도성당으로 승격하였다. 지붕이 특히 유명한데, 다양한 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궁전이었던 쇤브룬 궁전은 2,000여 개가 넘는 방을 가진 거대한 궁전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성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궁전의 내부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수집한 동서양의 회화와 각종 장신구들로 장식되어 있다. 약 1.7㎞에 달하는 바로크 양식의 정원은 왕궁의 웅장함을 더하고 있다.
'소금(Salz)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 잘츠부르크는 1803년이 되어서야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되었지만, 소금 무역으로 번영하였던 옛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해발고도 120m의 언덕 위에 자리한 호헨잘츠부르크성은 1077년 게브하르트 대주교가 서임권 투쟁에서 독일의 황제파와 전쟁을 하기 위해 세운 성이다. 도시 전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경관으로 유명하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되었던 미라벨 궁전과 모차르트 생가 그리고 잘츠부르크 대성당 등도 대표적인 잘츠부르크의 관광지이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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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 〈오스트리아〉, 《나무위키》
- 〈오스트리아/경제〉, 《나무위키》
- 〈오스트리아Austria〉, 《요다위키》
- 〈오스트리아〉, 《두산백과》
- 〈오스트리아의 지형〉, 《두산백과》
- 〈오스트리아의 기후 및 식생〉, 《두산백과》
- 〈오스트리아〉, 《위키백과》
- 〈오스트리아의 국장〉, 《위키백과》
- 〈오스트리아의 국기〉, 《위키백과》
- "Austria", wikipedia
- 〈오스트리아/역사〉, 《나무위키》
- 〈오스트리아의 역사〉, 《위키백과》
- 〈오스트리아의 산업〉, 《두산백과》
- 〈오스트리아의 에너지와 환경〉, 《두산백과》
- 〈오스트리아의 운송교통〉, 《두산백과》
- 〈오스트리아의 무역〉, 《두산백과》
- 〈오스트리아의 정치〉, 《두산백과》
- 〈오스트리아의 정부〉, 《두산백과》
- 〈오스트리아의 정당〉, 《두산백과》
- 〈오스트리아의 의회와 선거〉, 《두산백과》
- 〈오스트리아의 지방행정〉, 《두산백과명》
- 〈오스트리아의 사법〉, 《두산백과》
- 〈오스트리아의 군사〉, 《두산백과》
- 〈오스트리아의 대한관계〉, 《두산백과》
- 〈오스트리아의 외교〉, 《두산백과》
같이 보기[편집]
서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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