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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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라(아랍어: البصرة)는 이라크 남부의 중심으로 바스라주의 주도이며 이라크 제3의 도시이다.
바스라는 이라크의 유일한 초거대 항구도시로서 특히 석유 관련 운송에 중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수심이 얕아 심해로의 접근은 불가능하여, 그 경우는 걸프 해역에 직접 접한 움카스르 항구에서 처리한다. 중세 시기 번영할 때에는 복잡하게 놓인 운하 때문에 동방의 베네치아라 불리기도 했으나 현재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오염된 상태이다.
개요[편집]
- 행정 단위: 이라크 바스라주의 주도
- 면적: 181km²
- 인구: 3,250,000명 (2010년)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s://basra.gov.iq/ar/
역사[편집]
고대[편집]
바스라는 수메르의 고대 도시들과 가까이 위치하지만 메소포타미아 문명 시절에는 바다 아래에 존재하던 땅이었다. 이후 수면이 낮아지며 그 자리에 땅이 생기게 되었고 중동 지역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된다.
636년에 이슬람 제국의 군사 주둔지 (암사르) 및 경비 초소로 건설되었다. 당시 기존 페르시아 도시인 바헤슈타바드 아르다시르의 폐허 위에 주둔지를 건립한 이는 남자 중 7번째로 무슬림이 된 우트바 빈 가즈완이었다. 다만 본격적인 도시가 된 것은 639년, 칼리파 우마르가 5개 구역으로 분할된 원형 도시를 세우면서였다. 바스라의 첫 총독 아부 무사 알 아슈아리는 이곳을 토대로 639-42년 후제스탄 정복을 수행했고, 이후 타와즈를 기반으로 더 내륙에서 싸우던 우스만 이븐 아비 알 아스를 도왔다.
650년, 칼리파 우스만은 압둘라 빈 아미르를 바스라 총독에 봉했고 동남부 군대 전체의 지휘권을 주었다. 압둘라는 650년, 사산 제국군의 마지막 저항을 분쇄하며 이란을 석권하였다. 알리는 그를 해임하고 우스만 빈 하니프, 압둘라 빈 압바스를 연이어 총독으로 봉했지만 제1차 무슬림 내전를 거쳐 결국 우마이야 왕조령이 되었다. 우마이야 시기 바스라 총독은 이라크 ~ 호라산의 군대를 통솔하며 시리아의 칼리파를 보좌하는 제국의 2인자 역할을 했다.
페르시아만에 가깝고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및 동쪽의 국경에 접근이 쉬운 바스라는 점차 주요한 도시로 성장했다. 정치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으로써 이슬람 정복 당시 페르시아 전역의 본부와도 같은 곳이었고, 바스라 총독은 이라크에서 호라산에 이르는 이슬람 제국의 동쪽 절반을 다스리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바스라는 8세기부터 9세기까지 문화의 중심이었고, 종교와 문예가 발달하였다.
9세기 말엽 흑인 노예 봉기인 잔즈 반란과 10세기 카르마트의 습격을 겪으며 경제적인 쇠퇴와 함께 토양의 염분화 조절이 실패하자 930년경 기존 도시를 버리고 현재의 위치에 새 도시를 세웠다. 옛 도시는 현대 주바이르 내에 유적으로 남아있고, 새 도시에는 1123년 성벽이 둘러졌다. 1258년 몽골제국 침공기에는 바그다드의 선례를 보고 바로 항복하여 그와 같은 파괴와 학살을 당하지 않았다. 따라서 1411년 ~ 1432년까지 잘라이르 왕조의 수도이기도 하였다.
1534년, 바스라는 오스만 제국에 항복하고 1538년 바스라주가 설립되었다. 17세기 초, 바스라의 인구는 약 5만 명에 이르렀다.
근대[편집]
1775년에서 1779년까지 잔드 왕조가 바스라를 잠시 점령했다. 19세기 행정구역 개편 후 바스라는 바그다드로 편입되었고 1884년 현지 시아파들의 압력이 높아지자 오스만 제국은 바그다드주 남반부를 분리해 바스라주 설립하고 바르사를 주도로 정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4년 영국과 오스만 제국이 이곳에서 싸웠고, 전후 영국군은 바스라를 장악하고 바스라의 항구를 개선하여 페르시아만의 가장 중요한 현대적 항구 중 하나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바스라의 항구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연합군이 소련으로 보급품을 운송하는 핵심 통로 중 하나였다.
현대[편집]
전쟁 후 바스라의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다. 1964년 바스라 대학이 설립되었고, 그후 의과대학를 설립다.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바스라는 전선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번 포격을 당했다. 이란은 1982년과 1984년, 1987년 세 차례 바스라 공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바스라에서는 1991년과 1999년 각각 사담 후세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 당국의 진압으로 사상자가 속출했는데, 2003년 사담 후세인이 재판에 넘겨져 처형됐을 때 법원은 바스라 반란에 대한 진압을 범죄 중 하나로 인정하였다.
2003년 4월 이라크 전쟁 동안 바스라는 영국군에 점령되었고 영국은 2007년까지 바스라에서 군사 통제를 실시했다. 이라크는 2008년 바스라 인근에서 또 한 차례 대규모 군사행동을 벌여 메흐디군 등 무장조직을 축출했다. 2012년 바스라에서는 시아파 순례자들을 겨냥한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해 53명이 숨졌다.
지리[편집]
페르시아만에서 55km 떨어져 있고 샤트 알 아랍 수로에 접해 있다. 이 지역은 과거 수메르 문명이 위치했던 곳과 가까운 곳이며 에덴동산의 위치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초기 이슬람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이다.
기후는 매우 덥고 건조하기 때문에 여름이 되면 섭씨 50도가 넘는 더위를 발생한 적이 있고 1921년 7월 8일에 섭씨 58도를 기록한 적이 있다.
자원[편집]
이라크는 세계 4위의 원유 매장량을 가진 나라인데, 대부분이 바스라 근처에 묻혀있다. 바스라 지역 유전 예상 지역의 80%는 아직 탐사가 안된 상태이며 인근에 유정이 많다. 현재 키르쿠크, 모술과 함께 바스라와 나시리야가 주 유전지대이다. 쿠르디스탄에 위치하고 튀르키예와 국경 분쟁을 겪는 키르쿠크나 모술과 다르게 바스라는 안정된 남부에 위치해 생산에 차질도 없다.
풍요로운 곡창지대로 주로 밀, 보리, 쌀, 옥수수, 귀리 등이 산출되고 있으며 가축도 생산되고 있다. 곡식 외의 농작물의 경우 오아시스에서 나는 고품질의 대추야자로도 유명하다.
경제[편집]
석유가 주요 산업이며 이라크 최대의 유전중 몇 개가 이 근처에 있고 대부분의 석유 수출분이 이 도시의 알 바스라 석유 터미널에서 출항한다. 직접적인 원유 산업뿐만 아니라 관련 석유화학 산업도 있어서 폴리에틸렌이나 PVC 같은 석유 화학 제품을 생산하기도 한다.
석유 덕분에 운송 및 물류 산업도 발달했다. 바스라는 이라크의 6개 항구 모두에 대한 근거지인데, 이들 항구 중 움 카스르(Umm Qasr)가 가장 크다.
석유의 주산지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전쟁으로 인하여 파괴된 기반시설 복구 부진 등 정부의 무능이 장기화 됨에 따라, 2018년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산유국임에도 석유값이 비싸 에너지가 모자라는 상황은 베네수엘라와 비슷하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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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아라비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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