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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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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티안의 파탓루앙
비엔티안 위치

비엔티안(프랑스어: Vientiane) 또는 위앙짠(라오어: ວຽງຈັນ)은 메콩강에 접한 라오스수도이자 최대도시이다. 도시는 1953년부터 라오스의 수도였으며, 프랑스 통치시기에도 행정수도 기능을 수행하였다. 인구는 약 95만 명이고 라오스의 정치와 경제 중심지이다.[1]

개요[편집]

비엔티안은 라오스 중부지역, 산악지대가 대부분인 라오스 땅에서 커다란 평원에 자리 잡고 있다. 바다가 없는 대신 메콩강 도시를 휘감아 지나간다. 남쪽으로는 메콩강을 사이에 두고 태국 북동부의 농카이주(Nong Khai Province)와 맞붙어 위치한다. 라오어로 '비앙(vieng)'은 도시를 의미하며, '티안(tiane)'은 달을 가리킨다. 즉 비엔티안은 '달의 도시'라는 뜻이다. 비엔티안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인이 라오스 현지 발음을 프랑스식으로 표기한 것인데, 현대에 들어와 그것을 영어식으로 읽다 보니 생겨난 이름이다. 라오스 국기에는 비엔티안을 상징하는 달이 새겨져 있다. 외국 사람들은 라오스의 수도를 비엔티안이라고 하지만 정작 라오스 사람들은 위양짠(Wiang-chan)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비엔티안은 남쪽에 위치한 메콩강의 영향으로 도시면적의 약 47%가 강, 늪지, 범람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로 인하여 양질의 농수산물이 생산되고 있다. 비엔티안 내에 있는 대표적인 호수로는 농타(Nongtha) 호수가 있으며, 비엔티안 인근에는 남훙(Nam Houm) 저수지와 남수앙(Nam Souang) 저수지를 포함한 총 7개의 저수지가 있다. 비엔티안에는 라오스의 상징인 왓 탓 루앙(That Luang)이 있다. 위대한 불탑이라는 뜻을 가진 탓루앙은 16세기 중엽 세타티랏(Setthathirath, 재위 1548~1571) 왕에 의해 건축 되었으나 많은 전쟁으로 인해 손실 되었다가 1935년 복원되었다. 탓루앙은 부처님 사리를 모신 라오스 최고의 사원으로서, 매년 축제가 열리는 불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비엔티안 축제 중 가장 성대한 행사는 11월에 개최되는 '분 탓루앙(Boun That Luang)' 인데, 이 시기 비엔티안에 위치한 탓 루앙 광장에는 단 한 번의 새벽 공양을 위해 전국에서 수십만 인파가 모여든다. 탓 루앙 축제 하루 전 '왓 씨 므앙(Wat Si Muang)' 사원에서 탓 루앙까지 가장 행렬 행사가 열리게 되고 라오스 사람들은 전통 의상을 입고 꽃과 제물을 들고 행사에 참여하게 된다. 비엔티안의 또 다른 상징은 팟투사이(Patouxay)이다. 팟투사이는 '승리의 문'이라는 뜻이며,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식민지였던 프랑스의 개선문과 동일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2]

지리 및 기후[편집]

비엔티안은 메콩강의 중류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강 건너편에는 태국이 있는 독특한 지형적 위치다. 비엔티안 일대의 메콩강은 곡류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비엔티안의 시가지는 서쪽에서 흘러오는 메콩강이 남쪽으로 곡류하는 북동쪽 공격사면에 위치한다. 따라서 비엔티안 시가지 대부분은 지형적으로 메콩강의 범람원으로 분류될 수 있다. 충적평야에 위치한 비엔티안의 속성상 주변에 큰 산은 많지 않지만, 주변에는 다양한 산지와 구릉지가 산재해 있으며 대부분이 생물종 서식처 보존의 목적으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비엔티안의 서쪽에는 푸파낭 산 국립 생물다양성 보존 지역이 있으며 해발고도가 최고 698m에 달하는 저산지가 북서-남동 방향으로 위치하고 남쪽은 메콩강과 접한다. 북쪽 푸카오쿠아이(Phou Khao Khouay) 산 국립 생물다양성 보존지역은 정상부가 2,000m에 달하는 산악지대로 산악지대와 메콩강이 만나면서 펼쳐지는 협곡 등의 다양한 지형 경관으로 유명하며 북서쪽에는 수력발전용 댐인 남응댐(Nam Ngum Dam)과 저수지가 분포한다.

비엔티안은 열대 계절풍기후 또는 열대 사바나기후(Aw)에 해당하는 기후를 가지고 있으며, 라오스를 대표하는 기후를 가진다. 5월부터 10월까지를 우기로, 11월부터 4월까지를 건기로 볼 수 있으며 강수량은 연 1,677mm로 우기에 대부분이 집중된다. 가장 추운 달인 1월의 평균기온은 22.4℃로 온난하며, 대체로 15℃ 이상의 기온을 보이지만 기상이변이 있을 때는 그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가장 더운 달인 4월의 평균기온은 27℃로 35℃ 이상으로 기온이 상승하기도 한다.[3]

역사[편집]

1354년 화응(Fa Ngum)이 란상(Lan Xang) 왕국을 건국했을 때  비엔티안은 수도가 되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행정 도시가 되었다. 비엔티안은 1560년 라오스 최초의 통일왕국으로 알려진 란쌍 왕국의 세타티랏(Setthathirath, 재위 1548~1571) 왕이 오늘날 미얀마의 퉁구 왕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현재의 라오스 북부 루앙 프라방에서 비엔티안으로 천도하면서 라오스의 수도가 되었다. 오늘날 라오스의 상징이 된 왓 탓 루앙(That Luang)도 그 당시 건축된 것이다. 비엔티안은 한때 융성을 누리기도 하였으나, 1827년 비엔티안의 짜오 아누웡(Chao Anouvong, 재위 1805~1829) 왕이 자신들을 무시하는 시암(Siam, 오늘날의 태국)에 대해 앙심을 품고 전쟁을 일으켰으나, 결국 막강한 시암 군대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왕과 왕족은 시암으로 끌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비엔티안은 도시 전체가 전소되다시피 했다.

1893년 프랑스-시암 전쟁(Guerre franco-siamois)의 결과로 같은 해 10월 프랑스-시암 조약이 체결되어 비엔티안을 포함한 현재의 라오스 영토의 대부분 영역이 프랑스 보호령으로 귀속되었고, 비엔티안은 행정수도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프랑스 통치 기간 동안 베트남인들은 라오스로 이주하도록 장려되었고, 1943년 비엔티안 인구의 53%가 베트남인이 되었다. 프랑스는 대규모 베트남 인구를 비엔티안 평원, 사반나 켓 지역, 볼라벤 고원 등 3개 주요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지만 일본의 인도차이나 침공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마틴 스튜어트 폭스에 따르면, 이 계획이 실행되었더라면, 라오스인들은 그들의 나라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비엔티안은 거의 저항 없이 함락되었고 사코 마사노리(Sako Masanori) 의 지휘 하에 일본군이 점령했다. 1945년 3월 9일 프랑스 낙하산병이 도착하여 1945년 4월 24일에 도시를 재점령했다.

비엔티안은 1953년에 새로 독립한 라오스의 수도가 되었다. 라오스 정부와 파테 라오스 사이에 라오스 내전이 발발하면서 비엔티안은 불안정해졌다. 1960년 8월, 콩레는 수도를 점령하고 수바나 푸마가 총리가 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12월 중순, 푸미 노사반은 수도를 점령하고 푸마 정부를 전복시키고 번옴을 총리로 임명했다. 1975년 중반, 파테 라오 군대는 도시로 이동했고 미국인들은 수도를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1975년 8월 23일, 50명의 파테 라오스 여성들이 도시를 상징적으로 해방시켰다. 1975년 12월 2일 라오스 공산당이 비엔티안을 점령하고 라오스 왕국을 물리치고 라오스 내전을 종식시킨 라오스 인민민주공화국으로 개명했다. 독립 후에 라오스의 수도로서 성장하였으며, 1989년 기존의 비엔티안주(khoèng, 쾡)에서 유일한 행정단위인 특별시(nakhon luang, 나콘루앙)로 분리, 신설되었다.[4]

경제[편집]

비엔티안은 라오스 국가 경제의 핵심지역으로서 상대적으로 타 지역에 비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비엔티안의 경제 구조는 2차산업이 44.7%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3차산업이 35.6%, 1차산업이 19.6%를 차지한다. 주요 산업은 제조업과 서비스업이지만, 메콩강의 영향으로 면적의 약 47%가 강, 습지 등으로 되어 있어 농수산물도 풍부한 편이다.

한편 냉전 종식과 함께 인도차이나반도의 평화의 상징이 된 '우정의 다리'(Friend’s bridge)는 라오스가 경제적으로 태국에 더욱 의존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제1 라오스-태국 우정의 다리'(First Lao-Thai Friendship Bridge)는 라오스 비엔티안과 태국 농카이(Nongkhai)를 연결하는 1,170m의 다리로, 라오스를 외부로 연결한 최초의 기념비적 다리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지원으로 건설되어 1994년 4월 8일 개통되었다. 우정의 다리가 완공됨에 따라 비엔티안에서 차로 불과 30분만 가면 태국 국경을 넘을 수 있게 되었다. 비엔티안에서 구할 수 있는 대부분의 공산품은 태국 제품이며, 이 물품들은 비엔티안을 거쳐 각 지방으로 운반된다. 라오스에게 태국이 최대 교역국인 이유도 수도 비엔티안이 태국 국경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상품뿐 아니라 태국의 문화도 쉽게 유입되어, 태국에서 만든 각종 문화 상품이 라오스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태국의 화폐 바트(Bat)는 라오스의 킵(Kip) 만큼 사용이 자유롭다.

파탓루앙[편집]

파탓루앙(Pha That Luang)은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에 위치한 황금색 부처의 사리탑으로, 라오스에서 가장 신성시한다. ‘위대한 불탑’이라는 의미를 가진 파탓루앙은 16세기 셋타티랏(Setthathirat)왕 시대에 건축된 부처의 사리탑으로 도심으로부터 4km거리의 타논탓루앙(Thanon That Luang)의 끝, 13세기 초에 세워진 크메르사원 안에 위치한다. 탑이 세워진 후 주변에 4개의 사원이 세워졌으나 현재는 북쪽의 왓탓루앙너아(Wat That Luang Neua)와 남쪽의 왓탓루앙따이(Wat That Luang Tai) 만이 남아 있다. 왓탓루앙너아에는 라오스 불교의 종정이 살고 있다. 높은 담과 작은 창문을 가진 사원이 45m 높이의 탑을 둘러싸고 있으며 사원의 입구에는 탑을 건축한 셋타티랏왕의 동상이 있다. 탑의 바닥은 신도들이 올라갈 수 있도록 설계되었는데 각 층을 돌아가면서 통로가 있다. 각 층은 계단으로 연결되었고, 부처의 가르침을 기호화한 것들이 층마다 다른 건축양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파탓루앙은 19세기 태국의 침략으로 파괴되었으나 1935년 복원되었다. 탑에는 부처의 유발과 가슴뼈가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 건물의 건축양식은 라오스 전통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불교도와 라오스 독립에 상징적인 의미가 담긴, 라오스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 기념물로 여겨진다.[5]

지도[편집]

동남아시아 국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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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비엔티안〉, 《위키백과》
  2. 비엔티안(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Vientiane", Wikipedia
  4. 비엔티안〉, 《요다위키》
  5. 비엔티안의 파탓루앙(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남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동남아시아 국가
동남아시아 도시
동남아시아 지리
동남아시아 바다
동남아시아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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