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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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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르만
케르만 위치

케르만(영어: Kerman, 페르시아어: کرمان)은 이란도시로, 케르만주주도이며 큰 평원에 위치한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남쪽으로 1,076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인구는 82만 명으로 이란에서 10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1]

개요[편집]

케르만은 이란 남동부, 해발고도 1,900m의 내륙고원 산간 분지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과 서쪽에 카비르 사막과 루트 사막이 위치한다. 테헤란, 예즈드, 케르만, 밤, 자히단과 철도로 연결되, 이란 동부 지역에 이르는 자동차 도로와 대상로의 요지이다. 케르만주에서 가장 크고 발전된 도시로 이란 남동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이다. 또한 면적으로 볼 때 이란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이다. 도시는 240년 사산왕조페르시아의 아르다시르왕이 발루치스탄 방면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 건설한 군사기지에서 비롯되나, 도시로서의 발전은 10세기 이후부터였다. 11세기 이후의 사원이 남아 있지만, 시가지의 대부분은 1794년의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예로부터 동서교통의 요지로서 발달하여 사산 왕조, 셀주크 왕조, 몽골, 파슈툰족 등의 지배를 받아 지방통치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으나 약탈, 파괴가 되풀이되었다. 카펫 생산지로 잘 알려졌으며, 부근에서는 목화가 재배가 이루어지고, 매장량 3억 톤으로 추정되는 구리 광산이 소재한다. 구리 제품은 전통공예품으로 유명하다. 시내 서쪽에 케르만 국제공항이 위치한다. 케르만은 오랜 역사와 강력한 문화유산으로 유명하다. 도시에는 역사적인 모스크와 사원이 많이 있다. 케르만은 이란 역사 동안 여러 차례 이란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주요 수원은 세계에서 가장 깊은 우물 카나트 우물이다. 연강수량 140mm 내외의 건조기후를 보인다. 조로아스터교에 전념하는 유일한 이란 인류학 박물관은 케르만의 불의 사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로아스터교의 고대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케르만의 조로아스터교 협회 도서관과 함께 박물관을 개관한다는 아이디어는 1983년에 협회장인 파르비즈 바카슈리와 전임 도서관장인 메흐란 게이비가 케르만의 조로아스터교 공동체의 문화 유산 유물을 수집하면서 시작되었다.[2]

지리 및 기후[편집]

케르만은 이란 중남부 루트 사막의 높은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도시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케르만은 또한 사헵 알 자만 산을 따라 위치해 있다. 도시는 해발 1755m로 이란 지방 수도 중 3위다. 겨울은 커먼에게 매우 추운 밤을 가져다 준다. 남쪽과 남동쪽의 산인 주프탄 주파르와 플리바르는 일년 내내 눈이 내린다.

케르만은 추운 사막 기후(BWK, Köppen 기후 분류에 따르면)를 가지고 있으며, 여름은 덥고 겨울은 시원하다. 일년 내내 강수량이 적다. 시의 많은 지역들은 일년 내 케르만의 날씨 패턴에 다양성을 가져다 주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도시의 북부는 건조한 사막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시의 남부의 고원은 보다 온화한 기후를 누리고 있다. 케르만시는 온화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연평균 강수량은 142mm이다.[3]

역사[편집]

케르만은 본래 사산 제국의 창건자 아르다시르 1세가 발루치스탄 방면 유목민족들의 습격을 대비하여 세운 베흐-아르다시르 (바르다시르) 요새에서 비롯되었다. 사산 제국은 바르다시르에 현재의 케르만 주와 비슷한 면적을 관할하는 총독부를 설치하였다. 644년, 이슬람 제국 (라쉬둔 왕조) 군대가 사산 조의 마지막 총독을 전사 시키고 일대를 정복하였다. 그럼에도 도시는 고립된 위치 덕에 조로아스터교와 이슬람 소수 종파인 카와리지파의 은신처로 이용되었다. 다만 후자는 698년, 우마이야 왕조에 의해 축출되었다. 이후 인도(신드) 원정의 거점으로서 아랍인들이 이주해 왔고, 725년경 시민의 대부분은 무슬림이었다. 그무렵부터 도시는 모직물 산업이 발달하였다.

9세기 무렵 아바스 왕조의 중앙집권이 약화되자 현 케르만주 일대는 자치를 누렸다. 10세기 경부터 바르다시르는 현 지명인 케르만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932년, 사만 왕조의 장군이었던 소그디아나 출신의 무함마드 이븐 일야스는 내분에서 패배하자 남하하여 명목상으로 아바스 왕조의 영토이던 케르만 주를 점령, 독립하였다. 일야스 왕조는 2대 37년간 유지되었으나 결국 부와이 왕조에게 멸망하였다.

케르만을 정복한 부와이 왕조의 샤한샤 아두드는 983년에 사망하였다. 이후 그의 세 아들이 연이어 케르만을 다스렸다. 장남 샤라프와 차남 삼삼이 모두 요절하자 막내 바하 앗 다울라가 제국을 이어받았는데, 그는 1012년에 사망하였다. 이후 바하의 장남 술탄 앗 다울라가 이라크와 파르스를, 차남 카왐 앗 다울라가 케르만을 지배하였다. 카왐은 가즈니 제국의 도움으로 파르스를 침공했으나 격퇴당하였고 이로써 부와이 왕조는 분열되었다. 1024년, 술탄 앗 다울라가 사망하였고 아들 아부 칼리자르가 파르스를 상속받았다. 이후 파르스와 케르만 간의 내전이 벌어졌는데, 1028년 카왐이 독살당하며 케르만은 아부 칼리자르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1048년, 아부 칼리자르가 사망하자 이라크와 파르스의 영토는 그의 아들들 사이에 분할되었고, 케르만은 차그릴 베이의 아들 카부르트가 이끄는 셀주크 제국군에게 정복되었다.

부왕 차그리과 형 알프 아르슬란의 치세 동안 케르만을 다스린 카부르트는 1053년 오만을 점령하는 등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리고 1072년, 조카 말리크 샤가 즉위하자 이듬해 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비록 튀르크 장수들 대부분은 카부르트를 지지했지만 말리크 샤의 유능한 재상 니잠 알 물크는 아르투크 왕조 등 비투르크 군대를 동원하여 그해 5월 16일, 하마단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추격전 끝에 카부르트는 사로잡혔고 니잠의 주장대로 그와 반란에 가담한 그의 네 아들은 처형되었다. 다만 반란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카부르트의 세 아들들은 사면되어 케르만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케르만 셀주크의 기원이 되었다.

카부르트의 장손인 이란 샤가 1101년 아사신(이스마일파 암살단)에게 살해되자 막내 케르만 샤의 후손들이 아미르 직위를 이어나갔다. 12세기 들어 셀주크 제국은 와해되었고 케르만 셀주크는 사실상 독립하였다. 비록 1154년 오만을 상실하긴 했지만 1159년 무함마드 2세 사후 붕괴해버린 셀주크 제국과 달리 실권을 유지하였다. 당시 케르만은 향신료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였고 학문의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아흐마드 산자르의 시대부터 호라산을 유린한 오우즈 부족은 호라즘 제국과 카라키타이의 압박에 밀려나 1179년부터 케르만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180년 대규모로 남하한 오우즈 족은 네르마쉬르에 정착하고 케르만 셀주크의 투란 샤(케르만 샤의 증손)에게 충성을 서약하였는데 1184년 투란 샤가 암살되며 정국은 안개 속으로 빠져들었다.

1153년 산자르가 사망한 후로 호라산의 사라크를 장악한 오우즈 족장 말리크 디나르는 1179년, 호라즘-카라키타이 연합군이 침공해 오자 니샤푸르를 장악한 토간 샤에게 의탁하였다. 토간 샤는 일시적으로 사라크를 수복하였으나 1181년 재차 상실하였고 오히려 투스까지 빼앗겼다. 1185년 토간 샤가 사망하고 아들 산자르 샤가 즉위하였는데, 그는 말리크 디나르를 축출하였다. 이에 말리크 디나르는 동족 오우즈 족이 이미 진출해 있던 케르만으로 향하였다. 여담으로 1187년 호라즘 제국은 결국 니샤푸르를 정복하였고 산자르 샤는 애꾸가 되었다. 당시 케르만 셀주크는 투란 샤의 암살 이후 그의 조카 무함마드 샤가 즉위한 상태였다.

무자파르 왕조 시대인 1349년, 케르만에는 자미 마스지드(금요일 모스크)가 세워졌다. 그러던 1387년, 케르만은 티무르 제국에게 정복되었고 이후 흑양 왕조, 백양 왕조를 거쳐 16세기 초부터 사파비 제국령이 되었다. 1596년, 케르만은 반란을 일으켰는데 아바스 1세에 의해 진압되었고, 그의 친구인 쿠르드족 출신의 간즈 알리 칸이 총독이 되었다. 이때부터 케르만에는 키질바시가 주둔하게 되었다. 건축에 조예가 깊었던 간즈 알리 칸은 케르만 중심부에 1598년의 카라반사라이를 중심으로 하맘(목욕탕), 바자르, 광장, 조폐소, 저수시설 등을 세웠다. 이는 현재까지도 케르만 도심의 중심부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도들의 집이 파괴되었고 이슬람 성직자들의 탄압도 심해졌다. 따라서 그들은 아바스 1세에게 탄원하였다. 이에 친히 케르만까지 행차한 아바스 1세는 조사 끝에 청원을 받아들여 조로아스터교도들에 대한 보호 칙령을 반포하였다.

비록 문책을 당하였지만 간즈 알리 칸은 1611년 발루치스탄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1616년에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참가하여 조지아 원정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1622년, 무굴 제국으로부터 칸다하르를 정복한 아바스 1세는 간즈 알리 칸에게 그곳을 맡겼다. 1624년, 그가 사망하자 아들 알리 마르단 칸이 칸다하르를 계승하였고 케르만은 타마스프 콜리 칸에게 넘겨졌다. 여담으로 알리 마르단 칸은 1638년 칸다하르를 무굴 제국에 넘기고 항복하였고 이후 펀자브 총독을 역임하는 등 천수를 누렸다. 한편, 간잘리 복합단지는 1631년 하맘을 마지막으로 완성되어 현재에 이른다. 이후 1660년대 들어 케르만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상관이 세워졌고 특산물인 카펫이 영국과 독일 등지로 수출되었다.

18세기 들어 아프샤르 왕조를 거쳐 케르만은 1758년 잔드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그리고 1793년, 도시는 잔드 왕조의 마지막 군주 로트프 알리 칸의 마지막 거점이 되었다. 카자르 왕조 군을 격퇴하고 케르만에 피신한 로트프 알리 칸은 6개월간의 격렬한 공성전 끝에 이듬해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케르만 시민들은 끝까지 알리 칸을 도와 저항하였는데, 그 대가로 카자르 조의 아가 무함마드 칸은 9일간 도시를 약탈하게 하였다. 그동안 시민들 중 2만여명의 성인 남성이 눈알을 뽑힌 후 살해되었고 그 눈알 덩이를 전시했으며 여자와 어린이는 노예가 되었다. 젊은 미남 국왕인 로트프 알리 칸은 붙잡혀 고문당하고 죽었다. 로트프 알리 칸의 어린 아들은 거세되었고 왕비는 강간당하고 공주들은 성노예로 끌려갔다. 특히 가장 격렬히 저항했던 조로아스터교 공동체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카자르 왕조 내내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케르만은 1801년 총독으로 부임한 이브라힘 칸에 의해 재건되었지만 현대에 들어서야 과거의 인구를 회복할 수 있었다. 현재의 도시 케르만은 19세기에 옛 도시의 북서쪽으로 재건되었지만,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이전 크기로 되돌아왔다.

2003년 이란 일류신 Il-76 추락 사고가 나기도 하였고 2005년에 대지진을 겪었다. 2024년 1월 3일, 가셈 솔레이마니 추도식 도중 연속으로 폭발물이 터지는 테러 공격으로 구조대원 3인을 포함, 103명이 사망했다.[4][5]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케르만〉, 《위키백과》
  2. 케르만(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Kerman", Wikipedia
  4. 케르만〉, 《나무위키》
  5. 케르만〉, 《요다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서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아라비아 국가
페르시아 국가와 지역
아나톨리아 국가
레반트 국가
남캅카스 국가
아라비아 도시
페르시아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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