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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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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사 그랜드 모스크
부르사 성 정문
Igrandi 다리

부르사(튀르키예어: Bursa)는 아나톨리아 북서부 마르마라지역에 있는 튀르키예의 대도시이다. 튀르키예내에서 네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자, 가장 산업화가 이뤄진 대도시권 도시중 한 곳이며, 부르사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부르사(오스만 튀르크어: بورسا)는 1335년에서 1363년사이 오스만제국의 첫 주요 도시이자 두번째 수도였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페르시아어로 "신의 선물"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명칭인 휘다벤디가르(튀르키예어: Hüdavendigar, 오스만 튀르크어: خداوندگار)라고 일컬어지었고, 좀더 현대적인 별칭은 부르사의 도심 곳곳에 있는 공원들과 정원들과 더불어 도시 주변의 넓고 다양한 숲들을 나타내는 예실 부르사(튀르키예어: Yeşil Bursa, "초록색 부르사")이다. 고대에는 미시아의 올림포스산이라고 불렸던 울루산이 우뚝 서있으며, 스키 리조트로 유명하다. 초기 오스만 왕조의 술탄들의 마우솔레움들이 부르사에 있고 부르사의 주요 랜드마크에는 오스만제국 시대에 지어진 여러 대규모 건축물들이 있다. 또한 스파와 고고학 박물관을 포함한 몇몇 박물관들도 있다.

투르키예의 그림자극의 등장인물인 카라괴즈와 하지바트는 부르사에서 살고 죽은 역사적 인물들을 배경으로 하였다. 부르사는 또한 이스켄데르 케밥, 이곳의 밤을 절여 만든 마롱 글라세, 복숭아, 로쿰 등의 튀르키예 요리로도 알려져있다. 부르사는 울루산 대학교가 있으며, 부르사 거주민들은 튀르키예에서 가장 높은 교육 수준을 가진 지역 중 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이즈니크(니카이아), 무다니아, 제이틴바으 등의 옛 도시들이 부르사주에 있다.

개요[편집]

  • 행정 단위: 튀르키예 부르사주 주도
  • 면적: 1,036km²
  • 인구: 4,587,55 명(2013년)
  • 지역어: 튀르키예어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s://www.bursa.bel.tr/

역사[편집]

부르사의 현재 위치 인근 가장 오래된 인류의 정착지는 대략 기원전 5200년 전에 세워진 을르프나르 회위위(튀르키예어: Ilıpınar Höyüğü)이다. 부르사는 마케도니아필리포스 5세가 기원전 202년에 비티니아의 왕 프루시아스 1세에게 준 고대 그리스인들의 도시 키오스에서 생겨났다. 프루시아스는 키오스를 재건하고 프루사(고대 그리스어: Προῦσα)로 도시명을 바꿨다. 128년 간의 비티니아의 지배가 끝난, 기원전 74년에 마지막 비티니아의 왕 니코메데스 4세가 로마에 나라 전체를 유증으로 넘겼다. 초기 로마 유물들이 20세기 초 부르사 인근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여성의 은제 화장 기구로 이뤄졌으며, 현재는 대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1326년에 오스만제국이 비잔티움제국 영토였던 부르사를 차지했고, 그 이후에 부르사는 초기 오스만제국의 첫 주요 중심도시가 되었다. 이에 따라, 부르사는 14세기 내내 상당한 규모의 도시 성장을 하였다. 오스만 제국이 동트라키아에디르네(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정복하고, 1363년에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삼았지만, 부르사는 오스만 제국의 정신적 상업적 중요성을 유지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1세는 부르사에 1390년과 1395년 사이 바예지드 퀼리예시(바예지드 1세 종교 시설)와 1396년에서 1400년 사이에 부르사 울루 자미를 세웠다. 1402년에 바예지드가 티무르의 군대에게 앙카라 전투에서 패한 후, 티무르의 손자인 무함마드 술탄 미르자가 부르사를 약탈하고 불태웠다. 이 사건에도 불구하고, 부르사는 메메트 2세가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킬 때까지 오스난의 가장 중요한 행정 및 상업 중심지로 남았다. 1487년 부르사의 인구는 45,000명이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 동안에, 부르사는 왕실용 비단 물품의 원천이었다. 이 지역 비단 생산품을 제외하고, 이란, 때로는 중국의 비가공 비단을 수입했으며, 17세기까지 오스만 왕실을 위핸 카프탄, 배게, 자수, 및 다른 비단 물품들의 주요 생산 중심지이었다. 1923년에 터키 공화국이 건국됨에 따라, 부르사는 터키의 가장 산업화된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부르사의 경제 발전은 인구 증가에 따라 이뤄졌고 부르사는 튀르키예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곳이 되었다.

부르사는 전통적인 관광지였고, 오스만 제국이 유럽 영토를 상실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동안에 발칸반도에서 아나톨리아로 이주한 다양한 민족 배경을 지닌 난민들의 중심지였다. 가장 최근 발칸반도 터키인들의 이주는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대략 150,000명의 불가리아계 터키인들을 터키로 추방시킨 1940년대에 발생해서 1990년대까지 이뤄졌다. 이 150,000명의 불가리아계 터키인 난민들 가운데 3분의 1(1/3)은 부르사에 정착했다.

지리[편집]

부르사는 마르마라 지역 남부에 있는 울루산의 북서쪽 비탈에 자리잡았다. 남쪽에는 마르마라해와 얄로바, 북동쪽으로는 이즈미트사카리아, 동쪽에는 빌레지크, 남쪽에는 퀴타히아, 발리케시르가 맞닿고 있다.

부르사는 지중해성 기후로 건조하고 뜨거운 여름 온대 기후(Csa)를 띤다. 6월부터 9월까지는 뜨겁고 건조한 여름이 지속된다. 겨울은 춥고 습하며, 또한 대부분의 강수가 동반된다. 1주일이나 2주일 동안 지속되는 눈이 내리기도 한다.

경제[편집]

부르사는 터키의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이다. 피아트, 르노, 카르산 같은 모터 비클 제조사 공장들뿐만 아니라 보쉬, 마코, 발레오, 존슨 컨트롤스, 델피 같은 자동차 부품 제조사 공장들도 수십 년 간 부르사에서 가동하고 있다. 직물과, 식품 산업도 똑같이 강세이며, 코카콜라, 펩시 콜라 및 다른 음료 브랜드와 더불어 신선 식품과 통조림 식품 산업들도 부르사의 조직화된 산업단지에 자리잡고 있다.

아래는 부르사주에 있는 10대 산업 기업들이다.

자동차 산업을 제외하고, 부르사는 상당한 규모의 유제품(튀르키예어: Sütaş), 가공 식품( 튀르키예어: Tat), 음료(튀르키예어: Uludağ)를 생산하기도 한다.

부르사는 전통적으로 비단길 무역이 활발하던 비잔티움과 오스만 제국 시기에 비단 무역의 가장 큰 중심지로 유명하였다. 부르사는 여전히 튀르키예에서 주요한 직물 중심지이며, 부르사 국제 직물 무역 센터(튀르키예어: Bursa Uluslararası Tekstil ve Ticaret Merkezi, 또는 BUTTIM)가 위치한 곳이다. 비옥한 토양과 농업으로도 유명하며, 최근 몇 십 년 간 산업화로 인해 농업 활동은 감소했다.

부르사는 관광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튀르키예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키 리조트 중 한 곳이 부르사 바로 옆에 있는 울루산에 있다. 부르사의 스파는 로마 제국 시대 이래로 치료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호텔이 운영하는 스파 이외에도 울루산 대학교에도 온천수를 사용하는 물리 치료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교통[편집]

부르사는 지하철(부르사라이), 노면전차, 도심 내 대중 교통을 위한 버스 운영을 하고 있으며, 택시 또한 이용 가능하다. 부르사의 예니셰히라 공항은 도심에서 32km 떨어져 있다. 부르사 시민들은 외국으로 나갈시에는 이스탄불과 부르사의 근접성 때문에 이스탄불 공항과 사비하 괵첸 국제공항 같은 이스탄불의 공항들을 선호하기도 한다. 이스탄불과 부르사 간에는 매일 다양한 버스와 페리선들이 있다.

8.8 km길이의 부르사 울루 곤돌라(튀르키예어: Teleferik)가 부르사와 1,870 m높이의 울루산에 있는 스키 리조트들을 연결한다.

부르사의 유일한 기차역은 1930년에 개통된 발리케시르-퀴타히아선에 있는 하르만즈크역이다.

부르사에서 시민들이 집장에서 집까지 대중 교통으로 통근을 하는 데 걸리는 평균 시간은 평일당 62분이다. 대중 교통 이용객의 12%는 매일 두 시간 이상을 통근에 더 쓴다. 정거장이나 역에서 대중 교통을 기다리는 평균 시간은 18분으로, 이용객의 31%는 매일 평균적으로 20분을 더 쓴다. 평균적으로 대중 교통을 이용하여 통근하는 평균 거리는 편도로 8.1 km (5.0 mi)이고, 17%는 편도로 12 km (7.5 mi)가 넘는다.

교육[편집]

부르사는 두 개의 공립 대학교와 1개의 사립 대학교가 있다. 1975년 괴뤼클레에 세워진 울루산 대학교는 부르사에서 가장 오래된 고등 교육 기관이다. 처음에는 부르사 대학교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가 1982년에 울루산 대학교로 개명했다.[22] 학생 수는 47,000명으로, 튀르키예에서 큰 편에 속한다. 부르사 공과 대학교는 부르사의 두 번째 공립 대학교이며, 2010년에 세워졌고, 2011–2012 학년에 학기가 시작되었다.

부르사 최초의 사립 대학교는 부르사 오르항가지 대학교였으며, 2012–2013 학년에 학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오르항가지 대학교는 2016년 7월 터키 군부의 쿠데타가 실패한 후에 터키 정부로 인해 폐교되었다. 이스탄불 무역 대학교가 2013년 부르사에서 졸업 과정을 운영했다.

관광[편집]

울루 자미 (그랜드 모스크)[편집]

부르사에서 가장 큰 모스크인 울루 자미는 초기 오스만 건축의 랜드마크로서 셀주크 건축의 많은 요소를 통합하였다. 바예지드 1세 술탄의 지시에 따라 건립된 이 사원은 1396년부터 1400년까지 건축가 알리 네카르가 설계하고 건설했다. 직사각형 모양을 띤 큰 건물에는 총 20개의 돔이 5개마다 4줄씩 배치되어 있으며, 12개의 기둥이 지탱하고 있다.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승리한 바예지드 1세 술탄이 약속한 20개의 분리된 모스크를 대신해서 20개의 돔이 건립되었는데 모스크에는 2개의 미나레트가 있다.

모스크를 장식하고 있는 벽에는 그 시대에 활동한 유명한 이슬람 캘리그래피 예술가들이 만든 192개의 기념비적인 서예 작품이 남아 있다. 또한 예배자들이 기도하기 전에 우두를 거행하는 분수대(샤디르반)이 있다. 샤디르반 위에 있는 돔은 하늘빛에 의해 덮혀 아래에 부드럽고 조용한 빛을 만들어 내므로 큰 건물의 조명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넓은 가로 공간과 어두운 조명을 띤 내부 구조는 평화롭고 사색적인 느낌을 주도록 설계되어 있다. 여러 개의 돔과 기둥에 의해 형성된 공간의 세분화는 사적이고 친밀한 감정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분위기는 쉴레이만 1세의 수석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후기 오스만 모스크와 대조된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불)가 정복된 이후에 건립된 모스크는 아야 소피아에 장식되어 있던 6세기 비잔티움 바실리카에 영향을 받았는데 알라가 갖고 있는 신적인 힘, 오스만 제국의 술탄, 오스만 제국 정부의 보다 압도적인 권력을 전달하기 위해 수직적인 강조점을 만들기 위해서 높이가 점점 더 높아졌고 중앙 돔은 보다 큰 면적을 갖게 되었다.

기타 관광지[편집]

지도[편집]

튀르키예 지역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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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아나톨리아 같이 보기[편집]

아나톨리아 국가
아나톨리아 도시
아나톨리아 지리
아나톨리아 문화
아나톨리아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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