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콜라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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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콜라이우 또는 미콜라이브(우크라이나어: Миколаїв, 러시아어: Николаев-니콜라예프, 영어: Mykolayiv)는 우크라이나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미콜라이우주(우크라이나어: Миколаївська область)의 주도이며 면적은 260km², 인구는 47만 명이다. 남부크강과 인훌강이 합류하는 지점과 접하며 흑해 연안에서 6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오랫동안 러시아식 이름인 니콜라예프(Nikolaev)로 불렸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에는 미콜라이우 전투가 벌어졌다.[1]
개요[편집]
미콜라이우는 흑해 북안 남부크강 하류 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미콜라이우는 1787~1792년 러시아-투르크 전쟁 때 러시아 제국이 설립한 도시 중 하나다. 남부크강과 인훌강이 만나는 하구에 조선소와 함께 1789년 건립되었다. 도시명은 뱃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진 성니콜라스(St. Nicholas)의 이름을 따서 니콜라예프라고 명명됐다. 미콜라이브는 1862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유일한 군사항이었다. 1820년대부터 항해선과 증기선이 건조(建造)되기 시작했고, 1853년에는 흑해 최초의 철선이 이곳에서 건조됐다. 크림 전쟁(Crimean War:1853~1856년)동안, 그리고 1870~1900년에 흑해 함대의 지휘부가 미콜라이브에 위치해 있었다. 19세기 후반 미콜라이브는 러시아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항구가 되었고, 중요한 산업 중심지 및 철도 분기점으로 발전했다. 1917년부터 1920년, 우크라이나의 독립투쟁기에 미콜라이브의 지배자가 자주 바뀌면서 산업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전후 재건된 미콜라이브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다시 한번 폐허가 되었지만, 또다시 복구되었다. 미콜라이브는 중요한 산업 중심지다. 조선업을 근간으로 기계 제조업, 식품 가공업, 경공업, 건자재 제조업이 발전돼 있다. 250여 개 기업 중 가장 규모가 큰 곳은 대형 해군함을 건조할 수 있는 흑해조선소를 포함한 3개의 조선소와 철강 콘크리트공장, 면 방직단지 등이다.[2]
지리 및 기후[편집]
미콜라이브는 남(南)부흐강이 인훌강과 만나는 하구를 따라 흑해로부터 65km 떨어진 우크라이나 스텝 지대에 위치한다. 인훌강과 남부흐강은 미콜라이브의 북동쪽에서 합류하기 직전까지 물길 방향을 여러 번 크게 바꾸면서 길고 좁은 반도 모양의 지형을 여러 개 만든다. 미콜라이브의 주요 지역들은 남부흐강이 그렇게 방향을 180도 바꾸며 만들어낸 반도 모양의 땅에 자리 잡고 있다. 미콜라이브가 위치한 스텝 지대는 우크라이나 남부의 주요 곡물 생산지이기도 하다. 가장 가까운 산은 300km 남쪽의 크림반도 끝머리에 있다. 북쪽에 산악 장벽이 없다는 것은 겨울에 북극의 매서운 강풍이 어떤 지형에도 걸리지 않고 미콜라이브까지 불어올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미콜라이브는 겨울에 온화하고 여름에 더운 편으로, 적당한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미콜라이브의 연평균 기온은 10℃이다. 1월 평균 기온은 –3.1℃, 7월 평균 기온은 22.3℃이다. 미콜라이브는 연평균 강수량이 472mm로, 10월 강수량이 가장 적고 7월 강수량이 가장 많다. 매년 겨울 눈에 덮이지만, 적설량은 적은 편이다. 평균 상대습도는 연중 73%로, 8월(60%)에 가장 건조하고, 12월(86%)에 가장 습하다.[3]
역사[편집]
미콜라이브의 역사는 항상 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2018년 고고학자들은 미콜라이브 지역 인근에서 고대 그리스의 배를 발견했다. 이 배는 북(北)흑해 지역이 그리스의 지배를 받던 BC 5세기경에 건조된 것으로, 북흑해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배 중 하나로 추정된다. 이는 미콜라이브 지역에 고대 정착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1789년 이 지역에 도시가 건립된 것도 조선소와 함께였다.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 지역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해 노보로시야(Novorossiya) 현(縣; Guberniya, 러시아 제국의 행정구역 단위)을 만들었는데, 예카테리나 2세(Catherine Ⅱ; Екатерина Ⅱ)의 연인이자 군인이던 그리고리 포툠킨(Grigory Potemkin; Григорий Потёмкин)이 노보로시야현의 총독으로 부임해 만든 도시 중 마지막 도시가 미콜라이브다. 인훌강 하구에 조선소가 먼저 세워졌다. 투르크 세력과의 전쟁에서 해군 함정들을 수리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포툠킨은 러시아 정교회 달력으로 성니콜라스의 축제일인 1788년 12월 6일 흑해 연안에 있는 오스만제국의 요새 도시 오차키프(Ochakiv)를 함락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 조선소 이름을 '니콜라예프'라고 명했고, 이것이 도시명이 되었다.
1816년 3월 흑해 함대 사령관이자 미콜라이브 군정 장관으로 부임한 알렉세이 그레이그 제독은 1833년 그 자리를 떠날 때까지 미콜라이브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항만 시설이 건설되고, 신용협동조합이 설립되었다. 해상무역량이 늘었고, 대로와 인도가 새로 만들어지는 등 도로가 정비됐다. 1820년 그레이그 제독은 미콜라이브에 해양천문 관측소를 세웠다. 1826년에는 러시아 해군 역사상 처음으로 미콜라이브에 러시아 해군 본부를 설치하였다. 러시아 제국의 흑해 해군 본부는 크림반도 남단의 세바스토폴(Sevastopol)로 옮겨지기 전까지 100년 이상 미콜라이브에 있었다. 크림 전쟁 동안 미콜라이브는 러시아의 주요 후방 기지였다. 이 도시에서 만들어진 사업체들은 대부분 군산복합체였다. 그래서 미콜라이브는 수십 년 동안 외국인 방문객들에게 문을 닫았다.
1860년부터 1871년까지 미콜라이브의 군정 장관이었던 보그단 폰 글라제나프는 외국 선박들의 입항과 외국인들의 거주를 장려했다. 이에 따라, 미콜라이브에는 외국 영사관들이 들어섰고, 도시는 상업 항구로 변모했다. 19세기 후반 미콜라이브 항구는 외국과의 교역 면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와 오데사에 이어 러시아 제국 3위가 됐다. 미콜라이브는 19세기에 러시아 제국의 주요 유대인 중심지였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유대인들이 드니프로강 동쪽에 거주하는 것을 대부분 금지했다. 드니프로강 서쪽 지역에 있던 미콜라이브는 유대인들이 합법적으로 허용된 도시였다. 1918년 미콜라이브는 외국군에 처음으로 점령되는 일을 겪었다. 1920년에 소비에트 정권이 설립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미콜라이브는 1941년 8월 16일 독일군에 점령되었다. 9월에 독일군은 3만 5,000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그들 중 다수는 유대인이었다. 1944년 3월 28일 미콜라이브는 해방되었다. 전후 미콜라이브는 흑해조선소를 비롯한 3개의 대형 조선소를 가진 구소련의 조선업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 대통령의 친(親)러시아 정책에 대한 항의시위로 시작된 2014년의 유로마이단(Euromaidan) 사태 때 미콜라이브에서도 반(反)야누코비치 시위가 격렬히 벌어졌다. 4월 7일 일부 친러파 세력이 지방행정청사를 인수하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4]
경제[편집]
오늘날 미콜라이브는 구소련에 이어 우크라이나에서도 조선업의 중심지 중 하나이자 주요 하항(河港)이다. 미콜라이브는 주민의 60%가 조선업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있을 만큼 직접적인 선박 제조는 물론, 관련 과학기술과 교육역량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1980년대 후반까지 많은 소련 해군 비밀 프로젝트로 인해 외국인 방문객들에게 폐쇄돼 있기도 했다. 구소련 때 건조가 시작돼 현재 러시아 해군의 유일한 항공모함인 쿠즈네초프(Kuznetzov; 러시아어 Кузнецов)호를 비롯해, 잠수함이 아닌 대부분의 군함이 미콜라이브에서 건조되었다. 이 도시의 또 다른 대기업 중 하나는 알루미나 공장이다. 이곳에서는 알루미늄 원료인 알루미나를 생산한다. 미콜라이브는 이러한 중공업 외에도 식품 가공업이 발달해 있다. 주스 제조회사인 산도라(Sandora), 유제품 제조회사 락탈리스(Laktalis-Mykolaiv), 주조(酒造)회사인 얀타르(Yantar) 등이 미콜라이브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편집]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중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남부방면 공세 과정에서 미콜라이우 시와 인근 미콜라이우주 지역에서 전투가 진행되었다. 미콜라이우는 헤르손 북서부의 드니프로강과 남부크강 하류 지역에 위치한 도시이며 미콜라이우를 포함한 미콜라이우주는 러시아의 헤르손 점령 지역과 우크라이나의 오데사 사이에 있다. 또한 오데사로 나아가기 위한 핵심 거점이자 미콜라이우주의 주도이며 50만 명이 거주하는 대도시이기도 하다. 러시아군 입장에서는 이곳을 점령해야만 우크라이나 남동부 지역의 핵심 거점 중 하나인 오데사로 나아갈 수 있으며 우크라이나 해군의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기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고가치의 거점이다. 2022년 3월 18일 미콜라이우의 우크라이나 군기지가 러시아군의 공습을 받아 수십명이 사망했다. 2주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미콜라이우로 진군하던 러시아군 세력이 결국 우크라이나군에게 밀려 헤르손 주로 후퇴했다. 미콜라이우에서의 승리로 우크라이나군은 본격적으로 헤르손 재탈환 작전을 시작했다. 해당 전투는 일단락됐으나 간헐적인 공방은 이어지고 있으며 3월 29일 오전 9시 즈음 미콜라이우주 청사가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크게 파괴되었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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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미콜라이우〉, 《위키백과》
- ↑ 〈미콜라이우(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미콜라이브(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 ↑ 〈마이콜리브〉, 《요다위키》
- ↑ 〈미콜라이우 전투〉,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 〈미콜라이우〉, 《위키백과》
- 〈미콜라이우 전투〉, 《나무위키》
- 〈마이콜리브〉, 《요다위키》
- 〈미콜라이우(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미콜라이브(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