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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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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위치
키이우주 위치

키이우주(우크라이나어: Київська область)는 우크라이나 북부에 위치한 주이다.[1][2]

개요[편집]

키이우주의 면적은 28,118㎢이며 인구는 1,775,000명(2022년)이다. 주도는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이우이다. 키이우시 전체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경기도의 느낌 정도로 이해하면 쉽다.

서쪽으로는 지토미르주, 북쪽으로는 벨라루스 호멜주, 북동쪽으로는 체르니히우주, 동쪽으로는 폴타바주, 남쪽으로는 체르카시주, 남서쪽으로는 빈니차주와 접한다.

비시호로드 지구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와 프리피야트가 있으며, 키이우시로부터는 110km 떨어져 있다. 1986년 4월 26일 이 곳에 있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교통[편집]

키이우 줄랴니 국제공항[편집]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 시내의 줄랴니 지구에 있으며 도심에서 남서쪽으로 약 8km 거리에 위치한다. 보리스필 국제공항과 함께 키이우를 거점으로 하는 두 공항 중 하나이다. 1924년 군용 공항으로 개항했으며,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 후에 첫 국제선 노선이 취항하였다. 2012년 5월 신국제선 터미널인 터미널A를 개관하였다.

여객터미널은 국내선 터미널인 터미널D와 국제선 전용 터미널인 터미널A로 나뉘어 2동이다. 활주로는 2,310m×45m 크기로 총 1개소를 운영한다. 취항 항공사로는 윈드로즈항공(Windrose Airlines)·아틀라스제트(Atlasjet)·부엘링항공(Vueling Airlines)·모터시크에어라인스(Motor Sich Airlines)·몰도바항공(Air Moldova)·벨라비아(Belavia)·위즈항공(Wizz Air)·플라이두바이(FlyDubai) 등 총 15개사가 있다.

국제선은 폴란드 카토비체(Katowice), 헝가리 부다페스트(Budapest), 이탈리아 트레비소(Treviso)·나폴리(Napoli)·베르가모(Bergamo), 독일 멤밍엔(Memmingen)·쾰른(Köln)·도르트문트(Dortmund)·뤼베크(Lübeck), 키프로스 라르나카(Larnaca), 스페인 발렌시아(Valencia)·히로나(Girona)·바르셀로나(Barcelona), 영국 런던(London), 몬테네그로 티밧(Tivat), 아르메니아 예레반(Yerevan), 그리스 아테네(Athens), 러시아 모스크바(Moskva), 폴란드 바르샤바(Warszawa), 조지아 트빌리시(Tbilisi)·바투미(Batumi)·쿠타이시(Kutaisi), 아랍에미리트 두바이(Dubaï)의 총 23개 도시로의 노선이 있다. 국내선은 자포리자(Zaporizhzhia)·우주호로트(Uzhhorod)·드니프로아비아(Dniproavia)·오데사(Odessa)·르비우(Lviv)의 총 5개 도시로의 직항 노선을 운항한다. 대중교통시설로 키이우-볼린스키(Kyiv-Volynskyi)역이 공항 터미널과 약 0.5km 거리로 가까우며 공항에의 도로 교통편으로는 남쪽으로 T1027 도로가 인접한다.[3]

주요도시[편집]

키이우[편집]

키이우는 우크라이나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 드니프로(Dnipro)강이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동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다. 교역과 교통중심지로 중세 동슬라브 문명 발달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현대에 와서도 첨단기술산업이 발달해 있고 고등교육기관과 역사적 명소들이 많아 동유럽의 산업 · 과학 · 교육 ·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키이우는 우크라이나의 수도이자 특별시이면서 24개 주(州)를 포함한 27개 광역 행정구역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행정 체계가 이중적이다. 시민들이 선거로 선출하는 시의회 의장이 키이우 시장(市長)이고, 시정을 담당하는 시 행정국장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키이우는 키이우주(州)의 행정적 중심지로서, 주정부와 주의회도 키이우 시내에 있다. 그러나, 키이우는 수도이자 특별시로서 자체적 시정에 의해 운영되기 때문에 주정부나 주의회의 관할 밖에 있다. 키이우는 드니프로강 양안(兩岸)에 자리 잡고 있다. 길이 약 2,200km로 유럽에서 네 번째로 긴 강인 드니프로강은 러시아의 스몰렌스크(Smolensk) 인근에서 시작, 벨로루스와 우크라이나를 지나 흑해로 이어진다.

키이우가 처음 건설된 드니프로강 서안(西岸) 지역은 우안(右岸) 우크라이나(Right-bank UKraine)로 불리는 우크라이나 고지대의 일부로, 숲이 우거진 많은 언덕과 협곡 및 지류들로 형성돼 있다. 키이우가 드니프로강 동안(東岸)까지 확장된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좌안(左岸)으로도 불리는 동안 지역은 저지대이기 때문에 모래로 매립하고 둑을 쌓아 강물이 넘치는 것을 막고 있다.

키이우는 북쪽으로는 데스나(Desna)강의 하구와 키이우 저수지, 남쪽으로는 카니브(Kaniv) 저수지와도 접해 있다. 키이우 내에는 이러한 강과 지류, 저수지, 인공연못 등이 400여 개나 있어 아름다운 경관과 물놀이 기회를 제공한다. 키이우를 지나는 드니프로강과 데스나강에는 배들도 운항하는데, 저수지의 수위조절에 따라 운항이 통제되며 겨울에는 강물이 얼어붙을 때가 많다.

키이우는 전반적으로 따뜻하고 습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가장 따뜻한 6~8월의 평균 기온은 13.8~24.8℃이고, 겨울인 12월과 1~2월의 평균 기온은 –4.6~1.1℃이다.

키이우의 가장 유명한 역사적 건축물은 소피아 대성당(Софія Київська)과 키이우 동굴수도원(Києво-Печерська лавра)이다. 11세기 초에 세워진 두 건축물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또한, 마린스키궁(Маріїнський палац)과 미카엘 대성당(Михайлівський золотоверхий монастир), 성 안드레아 성당(Андріївська церква), 성 블라디미르 성당(Собор святого Володимира), 그리고 황금문(Золоті ворота) 등도 주목할 만한 건축물로 꼽힌다.

현대적 건축물로는 드니프로강 우안(右岸)에 있는 제2차 세계대전 우크라이나 역사박물관(National Museum of the History of Ukraine in the Second World War)에 서 있는 조국의 어머니 기념비(Батьківщина-Мати)가 가장 유명하다. 1981년 공개된 이 티타늄 조각상은 칼과 방패를 든 여성을 형상화한 것으로, 본체의 높이만 62m이고 받침대를 포함하면 높이 102m, 무게 560t에 이른다.

이러한 명소들은 키이우의 다양한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 찾아갈 수 있다. 키이우에는 지하철 · 버스 · 택시는 물론, 트롤리버스(무궤도전차)와 트램(노면전차), 그리고 케이블카도 여러 노선이 운행 중이다. 또한, 도심 외곽을 도는 순환철도도 있다. 키이우는 우크라이나에서 기업 활동이 가장 활발한 경제적 중심지로, 2018년 기준으로 264,766개의 사업체가 등록돼 있다. 국영 석유가스기업인 나프토가즈 우크라이나와 이동통신업체인 키이우스타 등 우크라이나 최대 기업들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일부 산업이나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고 경제적 기반이 크고 다양해서 실업률도 비교적 낮은 편이다. 우크라이나의 전국 평균 실업률이 2018년 8.8%였는데, 키이우는 평균 6.2%였다. 부동산도 키이우 경제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아파트 평균가격이 우크라이나 전역은 물론, 동유럽에서도 가장 높다.

역사적인 도시인 만큼 관광산업도 빼놓을 수 없다. 우크라이나가 2005년 유럽연합(EU) 회원국과 스위스에 무비자 제도를 도입한 뒤 외국인 관광객이 더 늘고 있다.[4]

빌라체르크바[편집]

빌라체르크바는 우크라이나 중부의 키이브주(州)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행정적으로는 빌라체르크바군의 행정 중심지이다. 우크라이나의 수도이자 특별시인 키이브에서 남서쪽으로 약 87km 떨어져 있으며, 로스강 유역의 드니프로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서유럽풍의 올렉산드리야 수목원 등 이 도시를 대표하는 여러 개의 기념비적 건축물은 18세기 말부터 이 도시를 소유했던 폴란드의 브라니츠키 가문이 지은 것이다.

빌라체르크바는 키이브의 대공(Grand prince of Kyiv)이던 야로슬라브 현제(Yaroslav the Wise)가 유목민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1032년 ‘유리예프(Yuriev)’라는 이름으로 세운 요새 마을에서 시작됐다. 그의 기독교식 이름이 유리(Yuri)였다.

많은 유목민의 침략을 막아내던 이 요새 마을은 1240년 몽골의 침공 때 불타며 황폐해졌다. 그러나 1세기 만에 마을은 재건되기 시작했다.

야로슬라브 현제가 1050년 이곳에 지었던 거대한 성당의 폐허가 울창한 숲 한가운데 이정표처럼 남아 있었다. ‘하얀 교회’라는 뜻의 빌라체르크바는 여기에서 나왔다. 이 새로운 도시명은 1311년의 역사 관련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1360년대에 빌라체르크바는 다른 키이브 지역과 함께 리투아니아 대공국(Grand Duchy of Lithuania)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1569년 루블린 연합(Union of Lublin)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Polish–Lithuanian Commonwealth)이 만들어진 후에는 폴란드 왕실의 사유지가 됐다. 슬라브계 왕족 코스티안틴 바실 오스트로즈키(Kostiantyn Vasyl Ostrozky)에게 하사된 빌라체르크바는 이후 폴란드의 귀족들과 우크라이나 카자크의 수장(首長; Hetman) 등으로 잇따라 주인이 바뀌었다.

리투아니아와 이후의 폴란드 통치하에서 빌라체르크바는 지방의 중요한 행정 중심지였다. 또한, 타타르의 공격에 대한 중요한 방어 기지로도 여겨졌다. 그 결과 이곳 주민들은 폴란드의 국왕들로부터 세금과 노역을 면제받기도 했다.

1550년대에 빌라체르크바에는 요새화된 성이 세워졌다. 1589년에는 마그데부르크 도시법(Magdeburg law)에 따른 자치권을 승인받았다.

1712년 빌라체르크바는 다시 폴란드 왕실의 사유지가 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마지막 폴란드 왕이었던 스타니슬라프 아우구스투스 2세(Stanisław II Augustus)는 1774년 이 도시를 최고 군사령관(대(大)헤트만(Hetman))이던 프란치셰크 크사베리 브라니츠키(Franciszek Ksawery Branicki)에게 하사했다. 그때부터 1917년의 러시아 혁명 때까지 빌라체르크바는 브라니츠키가(家)의 소유였다.

브라니츠키 가문은 이 도시의 문화와 산업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브라니츠키가 1793~1799년 서유럽풍의 조경으로 건설한 올렉산드리야 수목원(Arboretum Oleksandriya)은 우크라이나에서 두 번째로 큰 수목원이자 수종 연구의 중심지이다. 그밖에도 브라니츠키 가문은 로스강 강변의 겨울궁전과 여름 궁전을 비롯해 성당과 교회 등 여러 개의 기념비적 건축물을 세우는 데 재정적 지원을 했다.

빌라체르크바는 1793년 폴란드 제2차 분할의 결과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었다. 1861년 이후 러시아의 차르 당국은 이 도시의 로마 가톨릭 교회들을 정교회 교회로 바꾸었다. 소련 치하에서 빌라체르크바는 기계 제조와 건설업을 중심으로 거대한 산업도시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1년 7월 16일 빌라체르크바는 독일군에 점령돼 유대인 대학살의 현장이 됐다. 독일군은 1944년 1월 4일 퇴각했다.

1946년경 빌라체르크바는 완전히 재건되었다. 1970년대에는 교통 · 통신 및 여러 공공 서비스가 향상되었다. 오늘날 빌라체르크바는 농기계 · 전기콘덴서 · 타이어 · 신발 · 의류 · 가구 · 강화콘크리트 등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도시이다. 1991년 12월 1일에 시행된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에서는 빌라체르크바 유권자의 92.3%가 우크라이나의 독립에 찬성했다.[5]

보리스필[편집]

보리스필은 우크라이나 북부에 있는 키이브주(州)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도시다. 우크라이나의 수도이자 주도인 키이브에서 남동쪽으로 35km 떨어져 있다. 보리스필군(郡)의 행정 중심지이지만, 시정은 별도의 시의회를 통해 운영되는 키이브주 직할도시다.

보리스필은 키이브주에서 가장 오래된 정착지 중 하나다. 고대 슬라브족의 기원과 설화 등을 담은 ‘기본 연대기’에는 오늘날의 보리스필 남동부를 흐르는 알타강과 인근 정착지들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기록은 키이브 루스의 보리스 왕자가 아버지인 블라디미르 1세 사후 발발한 형제들 간의 전쟁(1015~1019년) 때 알타강 유역에서 살해된 사건과 관련된 것이다. 보리스 왕자는 나중에 러시아 정교회에서 최초로 성인에 추대된 인물 중 한 명으로, 보리스필이라는 도시명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리스필은 또한 ‘래치’라는 이름의 요새화된 정착지로 1154년까지의 연대기에 여러 번 언급돼 있다. 알타강의 두 지류 사이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늪이 많고 나무가 우거져 있었다고 묘사되었다.

키이브 루스시대의 보리스필은 키이브 공국과 페레야슬라프 공국의 경계지대에 있는 요새화된 정착지로 말을 갈아타는 역참이자 외교사절이나 전령, 왕족 등이 머무는 중간 경유지였다. 13세기 몽골-타타르의 침공으로 보리스필 지역의 정착지는 파괴됐다. 이후 이 지역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통치를 받았다.

보리스필 정착지는 이후 왕실의 재무를 담당했던 솔탄 알비예비치의 소유가 됐다. 그는 1508년 이 정착지를 키이브의 성 니콜라스 수도원에 팔았다. 이 정착지에 보리스필이라는 오늘날의 도시명이 붙여진 것은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1569년 루블린 연합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연방이 만들어지면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남부 지역은 폴란드령이 됐다. 1590년에는 연방의회의 결정에 따라 보리스필은 용병으로 등록된 카자크의 지도자이던 우즈테크 초노비츠키에게 하사됐다. 이 무렵 이 정착지는 도시화됐다.

1596년 폴란드의 왕 시기스문드 3세는 보리스필을 왕실의 영지로 만들었다. 이때 보리스필의 구시가지가 형성됐다. 그해 말 보리스필은 마그데부르크 도시법에 따른 자치권을 부여받으며 자체 문장(紋章)을 갖게 되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우크라이나에는 카자크와 농민의 봉기가 잇따랐다. 반란 진압의 공으로 폴란드 당국은 보리스필을 스타니스와프 조우키엡스키에게 주었고, 1623년부터 1648년 흐멜니츠키 봉기가 일어날 때까지 보리스필은 조우키엡스키 가문의 재산이었다.

17세기 말 보리스필은 제법 큰 마을이 됐다. 페레야슬라프와 키이브는 보리스필의 두 개의 ‘문’과 같았다. 공예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에 살았다. 18세기 보리스필은 지역의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키이브-폴타바를 잇는 교역로가 이곳을 지난다는 지리적 이점이 도시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1802년 보리스필은 행정구역 체계상 폴란드 폴타바주 페레야슬라프군의 행정 중심지가 됐다.

1920년 러시아-폴란드 전쟁 결과 보리스필에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됐다. 1933년에는 대기근으로 공식 집계로만 주민 5,739명이 사망했다. 그중 266명은 1세 미만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보리스필은 독일군에 점령됐다. 나치 점령기 동안 보리스필 비행장은 포로수용소로 사용됐다.

1956년 보리스필은 공식적으로 도시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1965년 세계 최대의 국제공항 중 하나가 된 신(新)보리스필 공항이 첫 승객을 맞이했다. 1970년대 보리스필은 집중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가스관 건설업자들의 정착이 증가하고, 공항 직원들이 주로 거주하는 새로운 주거지가 나타났다.

오늘날 이 도시는 우크라이나의 주요 공항이자 가장 큰 여객용 공항인 보리스필 국제공항의 본거지다. 2015년 2월 우크라이나의 최고 입법기관인 베르호브나 라다는 보리스필의 도시 건립 1,000주년을 국가적 차원에서 기념했다.[6]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키이우주〉, 《위키백과》
  2. 키이우주〉, 《나무위키》
  3. 두산백과 : 키이우 줄랴니 국제공항〉, 《네이버 지식백과》
  4.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키이우〉, 《네이버 지식백과》
  5.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빌라체르크바〉, 《네이버 지식백과》
  6.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보리스필〉,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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