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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마케도니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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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위치

중앙마케도니아주(그리스어: Περιφέρεια Κεντρικής Μακεδονίας)는 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주이다.[1][2]

개요[편집]

중앙마케도니아주의 면적은 18,810.52㎢이며 인구는 1,792,069명(2021년)이다. 주도는 테살로니키이다. 그리스 북부의 거점도시 테살로니키가 있어서 수도권에 해당하는 아티키주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주이다. 북쪽으로는 북마케도니아 공화국불가리아에 접한다. 남동쪽에 위치한 할키디키 반도는 특유의 모양 때문에 '3개의 손가락'으로 비유되곤 하며, 그중 오른쪽 손가락은 아토스 산 수도원 자치주에 해당한다. 세레스현, 테살로니키현, 이마티아현, 킬키스현, 펠라현, 피에리아현, 할키디키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광[편집]

테살로니키는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관광지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매거진은 2013년에 테살로니키를 톱 관광지 리스트에 올렸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2014년에 FDI(외국인직접투자) 매거진에 인적 자본과 라이프스타일을 위한 미래의 유럽 도시를 선정했는데, 중규모 도시 리스트에 테살로니키를 포함했다. 도심 시가지가 아름다워 거리 사진가들한테 인기가 높다.

로마 유적 중에 테라스가 둘이고 2층 주랑을 갖춘 포럼이 유명하다. 포럼은 건축 용어로는 광장과 인근 건물을 아우르는 건축물을 가리킨다. 이 포럼에는 목욕탕 2곳과 작은 극장이 있다. 극장에서는 검투도 벌어졌다. 포럼은 로마 이전에도 조성되었다가 로마 시대인 2세기에 확장되었다. 포럼과 극장은 6세기에도 활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테살로니키 포럼은 1960년대에 우연히 발굴되었다.

4세기 초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의 궁전도 주요 유적이다. 궁전의 팔각형 부분은 왕좌가 있는 알현실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양한 모자이크가 남아 있다. 이 궁전은 11세기까지도 황제의 거처로 쓰였을 것이라고 일부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궁전 근처에 있는 갈레리우스 황제의 개선문은 사산조 페르시아를 상대로 거둔 승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개선문과 연결된 건축물이 갈레리우스 황제의 영묘로 지어진 것으로도 추정되는 로툰다(지붕이 둥근 원형건물)이다. 직경이 24.5m인 로툰다는 벽의 두께가 6m에 달하고 그 덕분에 여러 차례의 지진에도 손상이 되지 않았다. 갈레리우스 황제 서거 후 로툰다는 수십 년 동안 비어 있었다. 테오도시우스1세는 4세기 말에 로툰다를 기독교 교회로 개조하도록 했다. 당시 장식된 아름다운 모자이크의 일부가 남아 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분열되었던 로마를 통일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황제이다.

초기 기독교 건축을 대표하는 유적이 성데메트리우스 교회다. 성데메트리우스 교회는 이 성인 순교자를 기리기 위해 4세기에 지어졌고 7세기에 증축되었으며 그리스에서 가장 큰 바실리카다. 이 교회는 1917년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이와 함께 5세기에 건축된 아케이로포이에토스 교회, 7세기의 성소피아 교회 등 다수의 기독교 건물을 볼 수 있다. 동로마 제국의 성벽과 13세기 목욕탕 유적도 있다. 오스만 제국의 유적으로는 15세기에 성벽의 일부로 지어진 화이트 타워가 있으며 이는 이 도시의 상징이 되었다. 이와 함께 15세기 건축된 함자베이 자미를 비롯해 다수의 모스크가 있다. 이밖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기마상이 이 도시의 기원을 떠올리게 한다. 이 기마상은 1973년에 세워졌다.

문화 · 상업 축제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매년 11월에 테살로니키 영화제가 열리고 5월에는 국제 도서전, 9월에는 테살로니키 인터내셔널 페어가 개최된다.

이 도시 음식은 남부 그리스에 비해 오스만 지배를 더 오래 받은 영향으로 동양적이다. 예컨대 향신료가 요리에서 중요하게 쓰인다. 냉커피의 일종인 프라페(Frappé) 커피가 이 도시에서 만들어져 그리스 전역과 사이프러스에 전파되었다. 프라페는 '차갑게 식혀진'을 뜻하는 프랑스어 형용사다. 프라페 커피는 칵테일 셰이커 같은 용기에 인스턴트 커피와 설탕과 물을 넣고 섞은 뒤 길쭉한 유리컵에 따르고 물, 얼음 조각을 넣어 만든다. 취향에 따라 우유를 추가한다. 빨대가 꽂혀져 제공된다. 부가차 페이스트리도 이 지역에서 만들어져 그리스 전역과 발칸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주요도시[편집]

테살로니키[편집]

테살로니키는 아테네에 이어 그리스에서 둘째로 큰 도시이다. 그리스의 공동 수도라고도 불리는데, 동로마(비잔티움)제국 시대에 제2의 도시로 수도 비잔티움과 함께 수도의 지위를 누린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축제와 행사가 활발하게 열려 그리스의 문화 수도로도 여겨진다. 테살로니키는 현재 중앙마케도니아주의 주도다.

테살로니키는 에게해의 북서쪽에 있는 테르마이크만에 자리잡고 있는 항구도시다. 아테네와의 거리는 520km다. 테살로니키의 동남쪽은 코르티아티스 산이 감싼다. 서쪽으로는 바르다르(악시오스)강의 삼각주와 접한다. 지중해성 기후로 온난하며 여름에 건조하고 겨울 강수량이 여름보다 더 많다. 연평균 기온은 15.3℃이고 가장 더운 7월은 평균 25.9℃, 가장 추운 1월은 평균 5.3℃다. 7월의 최고기온 평균은 31.9℃, 1월의 최저기온 평균은 1.4℃다. 연간 강수량은 422mm이며, 12월에 평균 49mm로 가장 많이 내리고 8월에는 18mm로 가장 적게 내린다.

테살로니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여동생의 이름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매제, 즉 테살로니키의 남편인 카산드로스 왕이 BC 316년에 이 도시를 건설하고 자신의 아내 이름을 붙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타계 후 왕자와 왕세자를 제거하고 BC 317년에 왕좌에 올랐다. 테살로니키는 마케도니아 왕국이 BC 168년에 멸망한 이후에도 로마 제국의 주요 대도시로 번성했다.

AD 50년 경에 초기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두 번째 선교 여행에서 이 도시의 유대교 교회당을 방문해 기독교 신앙의 씨앗을 뿌렸다. 이후 사도 바울은 이곳의 첫 교회에 편지 두 통을 보냈다. 이 편지는 신약성서에 포함되었고, 데살로니카 전서와 데살로니카 후서라고 불린다.

동로마 제국 시대에도 서로마와 동로마, 아시아를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지로 부유한 도시였다. 동로마 제국은 7세기부터 10세기까지 유럽, 아랍, 슬라브, 불가리아 등에 시달렸지만 테살로니키는 계속 번성했다. 동로마 제국 때 이 도시의 인구는15만명에 달했다. 1423년 이후 베네치아의 통치를 받았다.

1430년에 오스만 제국으로 넘어갔다. 이후 1912년까지 5세기 가까운 시기에도 다문화 대도시라는 특성을 유지했다. 종교-문화는 큰 변화를 겪어, 대다수 기독교나 가톨릭 시설이 모스크로 바뀌었다. 모스크가 새로 지어졌고 종교 학교가 들어섰으며 실내 시장과 목욕탕이 도시 생활의 중심 시설이 되었다. 이 시대 기독교 교회는 장방형 건물로 낮은 박공 지붕에 주랑이 있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다. 1500년에 스페인으로부터 유대인 난민이 이주해오면서 테살로니키의 다종교-다문화 특성이 더 풍부해졌다. 이 시기에 제조업과 해운업도 발달했고 사업의 주도권은 그리스인이 장악했다. 무역에서는 유대인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스만 제국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라고도 불렸고, 현재의 터키로 이어졌다.

터키를 몰아내기 위해 발칸반도의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몬테네그로가 발칸동맹을 결성하고 1912년에 제1차 발칸전쟁을 일으켰다. 패전한 터키는 유럽의 영토를 모두 잃었다. 터키로부터 빼앗은 영토 분배를 놓고 발칸동맹 사이에 갈등이 격화됐고 결국1913년에 제2차 발칸전쟁이 발발했다. 세르비아와 그리스 등의 동맹은 불가리아를 상대로 승리해 마케도니아를 넘겨받았다. 이에 따라 테살로니키는 그리스에 속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연합군 파견 부대가 이곳에 기지를 조성했다.

대화재가 1917년에 도시를 삼켰다. 8월 18일 한 부엌에서 번진 화마가 32시간에 걸쳐 중심가의 대부분을 파괴했다. 인구 27만여명 중에 집을 잃은 인구가 4분의 1 가까운 7만2000명이나 되었고, 그중 약 5만명이 유대인이었다. 경제도 막대한 타격을 입어 실업자가 70%에 달했다. 시 당국은 도시를 서둘러 복구하는 대신 영국의 토머스 모슨 등 건축가로 하여금 유럽풍의 도시계획을 수립하게 한 뒤 그에 따라 도시를 재건했다.

그리스가 터키와의 전쟁(1919~1922)에서 패배한 뒤 오스만 제국이 나뉘면서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주민 교환이 이루어졌다. 이전 오스만 제국의 소아시아와 동 트라키에 거주하던 그리스인 16여만명이 테살로니키로 왔다. 반대로 이 도시의 무슬림 약 20만명이 터키로 이주했다. 이에 따라 인구 구성에서 그리스인이 지배적이게 되었다. 유대인은 14세기 이후 처음으로 소수 집단으로 축소되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이탈리아로부터 공습을 받았고, 1941년에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다. 나치는 유대인 거주자들을 철로 옆 게토에 수용했다가 1943년에 아우슈비츠 및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로 추방했다. 추방된 유대인 약 4만5000명 중 4%만 살아남았다. 전후 테살로니키는 새로운 기반시설이 갖춰지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재건되었다.[3]

베리아[편집]

리아는 그리스 북부의 중앙마케도니아주 이마티아현의 현청 소재지이다. 역사가 깊은 그리스에서도 오래된 도시이다. 필리포스 2세의 무덤을 포함한 베리아 인근의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로마제국 시기에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도 전도했고, 이 지역 주민들은 초기 기독교도가 되었다. 오늘날 베리아는 중부 마케도니아의 상업 중심지이다. 그리스 제2도시 테살로니키에서 서쪽으로 73km 떨어졌고, 아테네 북쪽 511km 거리에 있다. 베리아는 테살로니키-에데사 철도를 통해 테살로니키, 아테네, 알렉산드루폴리와 연결된다. 도로는 에그나티아 오도스(자동차도로)를 통해 유럽횡단도로 E90과 이어진다. E90을 타면 유럽 서쪽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출발해 동쪽으로 터키-이라크 국경까지 갈 수 있다. 베리아에서 가까운 공항은 88km 떨어진 테살로니키국제공항이다.

겨울 강수량이 여름보다 많고, 눈은 연간 한두 차례 내린다. 1월 일중 최저기온 평균은 0.6도이고 7월 일중 최고기온 평균은 31.3도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친 필리포스 2세의 무덤이 베리아 도심에서 남동쪽으로 12km 거리에 있다. 필리포스 2세의 무덤을 포함한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로마제국 시기에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도 전도했고, 이 지역 주민들은 초기 기독교도가 되었다. 동로마(비잔티움)제국과 오스만제국 시대에도 베리아는 그리스의 문화-교육 중심지 지위를 유지했다. 오늘날 베리아는 중부 마케도니아의 상업 중심지이다.

베리아는 역사 깊은 그리스에서도 오래된 도시이다. 베리아에 대한 현존하는 최고(最古) 기록은 역사가 투키티데스의 BC 432년 저술이다. 베리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친인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차지한 뒤 주요 도시로 삼았다. 마케도니아는 베리아를 수도 펠라에 이은 제2 도시로 키웠다.

로마제국 시대에 사도 바울은 AD 50~51년(또는54~55)년 이곳에 들러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은 “베뢰아(베리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테살로니키) 사람들보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어서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바울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라고 기록했다. 이어 12절은 “그래서 그들 가운데 많은 유대 사람들이 믿게 됐고 적지 않은 그리스 귀부인들과 많은 그리스 남자들도 믿게 됐습니다”라고 전했다.

베리아는 동로마제국 때에도 성장하고 번창했다. 7세기에 슬라브족 드로고비타이가 이 도시의 저지대를 약탈했다. 9세기 말에는 불가리아 제국에 의해 지배되었다. 제4차 십자군 원정(1213~1221) 이후 베리아는 테살로니키의 왕이었던 몬테라토의 보니파치오가 차지했다. 1206년에는 불가리아의 칼로얀 왕이 이곳을 점령해 1207년 사망할 때까지 지배했다. 14세기에 이 지역은 통치자가 거듭해서 바뀌는 혼란기를 거쳤다.

오스만제국은 1430년 무렵 이곳을 점령했다. 오스만제국 시기에 베리아는 살로니카 산주크의 행정 중심지였다. 산주크는 오스만 행정구역의 명칭이다.

베리아는 제1차 발칸전쟁 때인 1912년에 그리스로 통합되었다. 그리스군이 터키로부터 이 도시를 되찾은 10월 16일은 베리아시의 경축 휴일로 지정되었다. 이후 1913년 아테네 조약에 따라 공식적으로 아테네의 일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이 이곳을 점령했고, 베리아의 시민들은 나치에 맞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였다. 나치 점령기에 유대인 공동체는 거의 절멸되었다. 베리아는 1980년대와 1990년대 비옥한 평원에서 재배한 농산물을 유럽과 미국, 아시아로 수출하면서 발전했다.[4]

킬키스[편집]

킬키스는 그리스 중앙마케도니아주 킬키스현에 속한 도시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업도시로 변신했다. 그리스 최대 비철 금속회사인 ALUMIL이 이곳에서 공장을 가동한다. 중세 이후 불가리아에 이어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불가리아인이 많이 살았지만 이들은 1913년 제2차 발칸전쟁 이후 추방되었다. 킬키스 현청이 이곳에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업도시로 변신했다. 그리스 최대 비철금속회사인 ALUMIL이 이곳에서 공장을 가동한다.

킬키스는 A1 자동차 도로와 폴리카스트로 분기점을 통해 연결된다. 65번 국도가 도시를 돌아 지나가는데, 이 도로는 남쪽으로는 에그나티아 도로 및 25번 고속도로와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그리스불가리아 국경의 도이라노스 통관사무소 등으로 연결된다.

버스는 아테네, 테살로니카 등 여러 도시를 오가는 노선이 매일 운행된다. 철도는 테살로니키-알렉산드루폴리 노선에 연결된다. 가까운 공항은 남쪽으로 66km 떨어진 테살로니키공항이다.

킬키스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은 청동기시대의 것이다. 기원전 4세경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2세가 이곳을 방문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시 크레스토니아라고 불린 이곳의 사람들은 필리포스 2세에게 그가 전에 맛보지 못한 올리브 열매를 진상했다.

로마가 기원전 148년에 이곳을 차지했지만, 이후 고트, 훈, 아바르, 슬라브 등 이민족이 거듭 이곳을 침략했다. 이 과정에서 이민족의 일부는 이곳에 정착했다. 중세에 이곳의 종주권은 동로마(비잔티움)제국에 이어 불가리아제국으로 넘어갔다.

130년에 킬키스가 포함된 테살로니키와 마케도니아는 오스만(오토만)제국의 땅이 되었다. 지배자는 오스만이었지만 거주자는 80% 이상이 불가리아인이었다. 19세기 중반 집계에 따르면 킬키스 주민 5,500명 중 4,500명이 불가리아인이었고 500명은 그리스인, 500명은 터키인이었다.

1893~1908년 킬키스의 불가리아인들은 대내마케도니아혁명기구(IMRO)를 조직해 마케도니아를 터키로부터 수복하기 위해 게릴라전을 벌였다. 그리스인들은 마케도니아투쟁이라는 활동을 통해 무장투쟁을 포함해 정치 · 사회 · 문화 활동을 펼쳤다.

불가리아와 그리스 등 발칸동맹은 제1차 발칸전쟁(1912)을 통해 터키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킬키스는 불가리아로 넘겨졌다. 터키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불가리아가 많이 차지했다. 여기서 다툼이 비롯되었고 그리스 동맹은 불가리아를 상대로 제2차 발칸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그리스는 이때 불가리아로부터 킬키스를 탈환했다.

킬키스는 제2차 발칸전쟁의 격전지였다. 6월 19이부터 21일까지 사흘간 치러진 전투에서 그리스군 8652명과 불가리아군 7000명이 전사했다. 그리스는 이 전투를 기려 이후 군함 중 하나에 킬키스라는 이름을 부여하기도 했다.

킬키스는 전화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전후 이곳에 거주하던 불가리아인 1만3000명 거의 전원이 불가리아로 추방되었다.

새로 조성된 도시에는 불가리아와 오스만 등으로부터 쫓겨난 그리스인들이 정착했다. 불가리아의 스트루미카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서 이곳은 잠시 네아 스트롬니차(새 스트루미카)라고 불렸다.

이후에도 국경을 넘어온 그리스인들이 이곳에 다수 정착했다. 1919~1922년에 러시아에 속한 남부 코카서스와 마케도니아, 남부 러시아와 조지아에 거주하던 그리스인들이 이주해왔다. 1922년 그리스-터키 인구교환 조치에 따라 1928년까지 1,679가족의 6,433명이 킬키스로 옮겨왔다.

킬키스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에 먼저 점령되었다가 이후엔 일부 지역이 불가리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불가리아는 독일의 양해 아래 킬키스의 일부 등 그리스 지역을 점령했다.[5]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중앙마케도니아주〉, 《위키백과》
  2. 중앙마케도니아〉, 《나무위키》
  3. 유럽지명사전 : 그리스 테살로니키〉, 《네이버 지식백과》
  4. 유럽지명사전 : 그리스 베리아〉, 《네이버 지식백과》
  5. 유럽지명사전 : 그리스 킬키스〉,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남유럽 같이 보기[편집]

동남유럽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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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유럽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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