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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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나주(Regione Toscana)는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주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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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토스카나주의 면적은 22,990km²이며 인구는 3,729,641명(2018년)이다. 북서쪽으로는 리구리아주, 북쪽으로는 에밀리아-로마냐주, 북동쪽에는 마르케주, 동쪽에는 움브리아주, 남동쪽에는 라치오주와 맞대고 있다. 주도는 피렌체다. "토스카나(Toscana)"라는 지명은 고대 로마 시대 이전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에트루리아인들의 이름으로부터 왔다.
현대의 표준 이탈리아어도 수도인 로마가 아닌 이 지역의 방언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는 토스카나에 속하는 피렌체 출신인 단테 알리기에리의 영향이 크다. 단테가 토스카나 방언을 기반으로 한 이탈리아어로 문학 작품을 집필하면서 이것이 현대 이탈리아어로 점차 자리잡게 된 것. 또한 토스카나 지역, 특히 피렌체는 원래 퇴역군인 정착용 신도시로서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중 라틴속어가 잘 보존되었다. 나폴리와 타란토, 팔레르모를 비롯한 남부는 원래 그리스인들이 개척한 식민도시였으며 베네토, 롬바르디아 등 북부는 주민 대부분이 갈리아인이었고 로마는 라틴어의 총본산임에도 교양으로 그리스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영향이 컸던 점도있다.
와인으로도 매우 유명한 지역이다. 와인으로 유명한 키안티 지방이 이곳에 있으며, 몬테 풀치아노, 몬탈치노 등 유명 와인 산지가 몰려있고, 그 외에 슈퍼투스칸 으로 불리는 와인들로도 유명하다.
토스카나주는 자연환경, 역사, 예술적 유산, 고급 문화에 대한 영향력으로 유명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발상지로 여겨지고 미술사와 과학사에 영향력을 미친 여러 유명인들의 고향이며, 우피치 미술관과 피티궁 같은 잘 알려진 박물관들이 있다. 토스카나주는 포도주들을 생산하며, 이중에는 키안티,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차노, 모렐리노 디 스칸사노, 브루넬로 기 몬탈치노 등이 포함된다. 강한 언어적이고 문화적인 정체성을 지닌, 토스카나는 "나라 속 나라"라고 때로는 여겨진다.
토스카나주에는 피렌체의 역사적 중심지(1982년), 피사의 대성당 광장(1987년), 산지미냐노의 역사 중심지(1990년), 시에나 역사 중심지(1995년), 피엔자 역사 중심지(1996년), 발 도르시아의 역사 중심지(2004년), 메디치 빌라를 포함한 7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이곳은 120개가 넘는 자연보호구역이 있어 매년 수백만 명 이상의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2][3]
자연환경[편집]
토스카나주는 리구리아해에서 티레니아해 서쪽 해안선까지 이어지며, 평야가 거의 없고 구릉지가 많다. 전체 면적 중 언덕이 65%, 아펜니노 산맥이 25%, 아르노 계곡 주변 평야가 8%다. 가장 큰 섬은 엘바섬이다.
토스카나주는 리구리아해와 티레니아해 쪽인 서쪽 해안가가 있으며, 해안가 중에 있는 토스카나 제도에서 엘바섬이 가장 크다. 토스카나주는 대략 22,993 제곱킬로미터 (8,878 mi2) 정도 크기이다. 커다란 산맥에 둘러쌓이고 가로막혀, 약간 (그러나 비옥한)의 평야를 지닌 토스카나주는 농업 용도로 사용되는 구릉지대가 두드러진다. 구릉 지대는 토스카나주 전체의 3분에 2 (66.5%)에 가까운 15,292 제곱킬로미터 (5,904 mi2)를 차지하고 있으며, 산악 지대 (아펜니노 산맥의 가장 높은 지역)도 25% 또는 5,770 제곱킬로미터 (2,230 mi2)를 차지한다. 평야는 전체 영역의 —1,930 제곱킬로미터 (750 mi2)— 규모이며, 대부분이 아르노강 계곡 일대에 있다. 주도인 피렌체, 엠폴리, 피사를 포함한 토스카나주 대도시들의 대부분은 아르노강 기슭에 있다.
기후는 겨울과 여름 사이 기온변화가 크며, 해안지역은 온화하고, 내륙은 습하고 비가 자주오며, 토스카나주에 동결-융해 주기라는 토양 조성 활동을 하게 해주었는데, 이 점은 이 지역이 한 때 고대 로마의 핵심 곡창 지대로서 역할을 했었던 점을 설명한다. 연평균 기온은 15℃, 강우량은 597mm이다.
역사[편집]
아펜니노 및 빌라노반 이전과 빌라노반 문화[편집]
청동기 시대 중기와 후기 때, 토스카나의 에트루리아 이전 역사는 초창기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일치한다. 토스카나 지역 기원전 제2천 년기 (대략 기원전 1400–1150년)에 에게해의 미노아와 미케네 문명과 교역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아펜니노 문화라고 불리는 문화권 사람들이 거주했었으며, 청동기 시대가 끝날 무렵에는 중앙 유럽의 언필드 문화권에 일부인 원시 빌라노반 문화 (대략 기원전 1100-900년)이라 불리는 문화권 사람들이 살았다. 철기 시대가 시작할 무렵에, 이 문명 다음으로, 에트루리아 문명의 가장 초기 시기라고 여겨지는, 빌라노반 문화 (대략 기원전 900–700년)가 토스카나와 군장 국가들의 지배를 받던 나머지 에트루리아 지역을 장악했다. 도시 국가들이 "동방화"가 발생하기 이전인 후기 빌라노반 시대에 발전했다.
에트루리아 문명[편집]
에트루리아인 (라틴어: Tusci)들은 이 지역에 운송 시설을 세우고, 농업과 광업을 수행하며, 활발한 예술작품들을 생산할만큼 충분히 거대한 최초의 주요 문명을 만들어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선사시대에 에트루리아라는 지역에서 살았다. 에트루리아 문명은 기원전 10세기부터 아르노강과 테베레강 사이에 지역들을 채워나가며 성장했고, 기원전 6, 7세기에 절정에 다달았으며, 결국에는 기원전 1세기 무렵에 로마인들에게 굴복한다. 동시대 그리스인들의 것과 관습과 풍습에서 뚜렷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리스 문화, 그 뒤로는 로마 문화가 에트루리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에트루리아의 멸망에 대한 이유 중 하나는 로마인들로 인한 에트루리아 상류층들의 로마 문화 동화 등, 주변 문화권들을 향한 동화 급증이었다.
로마 시대[편집]
에트루리아를 흡수 (북쪽, 북동쪽, 동쪽, 남쪽으로는 조금)하자마자, 로마는 루카, 피사, 시에나, 피렌체 등을 세웠고, 토스카나 지역에 새로운 기술과 발전들을 전수했으며, 안정을 보장했다. 이 발전들에는 도로 연장, 송수로와 하수관 도입, 공공 및 사적 목적 건물 건설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많은 건축물들음 날씨로 인한 풍화 작용으로 파괴되었다. 로마 공화정과 그 이후의 로마 제국의 서방에 있는 로마 문명이 5세기에 붕괴했고, 토스카나 지역은 동유럽과 중앙 아시아에서 로마 제국을 거쳐 이주한 고트족 (동쪽에서는 동고트족 서쪽에서는 서고트족) 같은 야만인들의 지배에 잠시 놓이기도 했으나, 그 뒤 유스티니아누스 재위 시절 동로마 제국 (시간이 흘러서는 비잔티움 제국)에게 재정복된다. 572년 이후 몇 년 뒤에, 롬바르드족들이 이곳에 도달했고 루카를 자신들의 투시아 수도로 삼았다.
중세 시대[편집]
로마와 프랑스 사이 프란치제나 가도를 떠나 순례하는 순례자들은 중세 시대 동안 토스카나주에 부와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여행객들이 필요로 하는 음식과 쉼터는 교회와 여관 주변 지역 사회 성장을 촉발 시켰다. 12세기와 13세기 중부 이탈리아와 북부 이탈리아에서 교황령 또는 신성 로마 제국을 지지하는 세력들인 구엘프와 기벨린 간에 분쟁은 토스카나인들을 분열시켰다. 두 세력은 아레초, 피렌체, 루카, 피사, 시에나 등 몇몇 토스카나의 강력하고 부유한 중세 코무네들을 생기게 했다. 이 코무네 간의 세력 균형은 피사에겐 항구, 시에나에게는 은행업, 루카에겐 은행업과 비단 산업 등 이들이 지닌 자산으로 지켜졌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기 무렵에는, 피렌체가 토스카나의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피렌체를 지배하는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커가는 부와 힘의에서 이익을 취했다. 메디치 가문 출신 중 로렌초 데 메디치가 가장 유명한 메디치 가문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영향력에 대한 유산은 피렌체 미술품과 건축물들에 거대하게 표현되어 오늘날까지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유명한 후손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1533년 프랑스의 왕자 앙리 (이후 앙리 2세)와 혼인했다.
흑사병이 1348년 토스카나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흑사병은 토스카나 인구의 70%를 앗아갔다. 멀리사 스넬 (Melissa Snell)에 의하면, "피렌체는 질병 발생 여섯 달에 인구 3분에 1을 잃었고, 1년 째에는 인구의 45%에서 75%를 잃었다."라고 한다. 1630년에 피렌체와 토스카나는 다시 한번 페스트의 공격을 받았다.
르네상스 시대[편집]
토스카나, 그중 피렌체는 특히 르네상스 발상지로 여겨진다. "토스카나"가 15세기에 비록 정치학적 실체성이라기보다는 언어적, 문화적, 지리학적 개념으로서 남게 되었지만, 피렌체는 1384년에 아레초 합병, 1405년 피사 매입 및 피사의 저항 진압 (1406년) 등을 통해 토스카나에서 영토를 늘렸다. 리보르노가 1421년에 피렌체에게 매입되어 항구가 돠었다.
핵심 도시 피렌체를 중심으로 하는, 피렌체 공화국은 1434년부터 점차 군주제가 돼가는 메디치 가문의 지배를 받았다. 코시모, 통풍 걸린 피에로, 로렌초, 불운한 피에로 등 초창기에는 공화국의 형태가 유지되었고 메디치 가문은 작위는 물론, 보통 공식적인 직위조차도 피렌체를 다스렸다. 이 초창기 메디치 가문 지배자들이 피렌체 르네상스를 관장했다. 처음에는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그뒤에는 피에로 소데리니가 공화국을 접수한, 1494년부터 1512년까지, 메디치 가문은 망명 생활을 하기도 했다.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이 로마로 가서 교황 레오 10세가 되기 전, 1512년에 스페인군과 함께 피렌체를 다시 차지했다. 피렌체는 1527년까지 교황 대리들의 지배를 받다가 시민들이 다시 공화정을 선포하였고, 신성 로마 제국군과 스페인군의 포위 공격을 받은 후린 1530년에 다시 교황령에게 함락당한다. 이때 교황 클레멘스 7세와 카를 5세는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최초의 피렌체 공식 세속 지배자로 임명시켰다.
시에나는 1555년까지 토스카나에 합병되지 않았고, 15세기 동안에 자긴들 고유의 보수적 특징과 함께, 문화적인 '시에나 르네상스'를 누렸다. 루카는 자신들의 의지로 토스카나 대공국의 일부가 된 1847년까지 독립적인 공화국을 유지했다. 피옴비노와 다른 전략상 중요 마을들도 스페인 지배하에 있던 작은 프레시디국을 구성했다.
근대에서 현대 시대[편집]
16세기에 메디치 가문은 시에나 공화국을 합병했고, 토스카나 대공국을 세웠다. 메디차 가문은 잔 가스토네의 죽음으로, 1737년에 단절되었고, 토스카나는 로트링겐 공작 및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프란체스코)에게 넘어갔고, 프란츠는 토스카나를 자신의 아들이 통치하게 둔다. 로레나 (로트링겐) 가문은 프랑스 제국에게 나라의 대부분이 합병당한 나폴레옹 시대를 제외한 1860년까지 토스카나를 다스렸다.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이후에 일어난 독립 혁명이 최후의 토스카나 대공을 몰아냈고, 국민 투표를 걸쳐, 토스카나는 신생 이탈리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1864년에서 1870년까지 피렌체은 이탈리아 왕국의 두 번째 수도가 되었다.
베니토 무솔리니치하에서, 토스카나는 디노 페로네 캄파니 (피렌체), 코스탄초 및 갈레아초 차노 (리보르노) 같은 지역 파시스트 지도자들의 통치하에 놓였다. 무솔리니 몰락과 1943년 9월 8일 휴전 접정으로, 토스카나는 나치의 지배를 받는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1944년 여름 영국-미국 연합군에게 토스카나 전체의 대부분이 점령된다.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이 무너지고, 이탈리아 왕국에서 오늘날의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바뀐 뒤에 토스카나는 다시 한번 이탈리아의 문화 중심지로 번성했다. 1975년 자치가 실시된 후, 토스카나는 중도좌파 정부가 계속 집권하고 있다.
산업[편집]
토스카나의 산업 부문은 풍부한 지하자원을 고려하여, 광산업이 주도한다. 직물, 화학/제약, 금속공업, 철강, 유리, 도자기 제조업, 의류와 출판 부문도 주목할 만하다. 피렌체현 북서쪽에서능 가죽과 신발, 피스토이아에는 온실 농업, 프라토에는 도자기와 직물 산업, 폰테데라에는 스쿠터와 오토바이, 카시나에서는 목제 가구 생산을 위한 목제 가공 등 제조업을 특성화한 소규모 지역들이 내륙지역에서 보여진다. 중공업 (광산업, 철강업, 기계 공업)은 해안 지역 (리보르노, 피사)를 따라 집중되었고, 이 지역들은 중요 화학 산업지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리석 (카라라)과 제지업 (루카)도 주목할 만하다.
농업[편집]
토스카나의 심토는 철광석, 구리, 수은, 갈탄 광산, 그리고 그 유명한 라르데렐로의 소피오니 (분기공), 베르실리아의 막대한 대리석 광산 등, 상대적으로 지하자원이 풍부하다. 그럼에도 토스카나의 농업 비율은 매번 떨어지고 있지만, 농업은 여전히 토스카나의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 토스카나 내륙에서 곡물, 감자, 올리브, 포도 등이 자란다. 한때 늪이었던 습지는 현재 채소, 쌀, 담배, 비트, 해바라기를 생산한다.
관광[편집]
토스카나는 이탈리아에서 전통적으로 인기있는 관광지이며,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은 피렌체, 피사, 몬테카티니테르메, 카스틸리오네델라페스카이아, 그로세토가 있다. 추가적으로, 키안티 지역, 베르실리아, 발도르차 역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며 여행객들에게 특히 인기있는 곳들이다.
토스카나 지역 관광객들의 40%에 해당하는 해안가 관광을 다루는 카스틸리오네델라페스카이아의 바다는 이탈리아 비정부 환경단체 레감비엔테가 선정한 이탈리아 최고의 바다로 매번 후보에 올랐다. 카스틸리오네는 2015년에 발행한 랭킹에서 역시도 1위에 올랐다. 또한 2015년 기준 관광객 대략 130만명으로, 토스카나에서 가장 많이 찾은 해안 관광지이며, 국내 전체로도 네 번째이다. 다른 인기있는 해안 관광지에는 그로세토 (카스틸리오네 다음으로 인기), 오르베텔로 (세 번째), 몬테아르젠타리오, 비아레조, 엘바, 이솔라델질리오가 있다.
경공업[편집]
패션과 직물 산업은 피렌체 경제의 기둥이다. 15세기에, 피렌체인들은 양모와 비단같이 값비싼 직물들을 다뤘다. 오늘날 유럽의 대단한 패션 디자이너들은 토스카나, 그중에 특히 피렌체의 직물 산업을 이용한다.
이탈리아는 유럽 내에서 직물 산업이 가장 강세인 나라 중 하나이며, 대략 유럽 전체 생산량의 4분에 1에 해당하고, 거래액은 250억 유로가 넘는다. 중국과 일본 다음으로 세 번째 많은 공급국가이며, 이탈리아 패션 산업이 이탈리아 해외 수익의 60%를 발생시킨다.
문화[편집]
토스카나주는 르네상스 예술과 건축이 집약되어 있는 곳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이탈리아 회화의 아버지 치마부에, 조토를 포함한 다양한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활동했다.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그 중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소장하고 있는 우피치 미술관이 유명하다.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에는 피렌체, 시에나, 피사, 루카 등 4개의 주요 화파가 있었다. 피렌체 화파는 14세기에 전개된 자연주의 영향을 받은 예술가들을 일컫는다. 화가로는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등이 있다. 시에나 화파는 13~15세기에 번성하였고, 후기 고딕예술 장식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에 집중했다. 피렌체 화파는 합리적이고 극적 감동을 주는 조형성에 집중한 반면, 시에나 화파는 신비스럽고 부드러운 면을 강조했다. 두초 디 부오닌세냐가 시에나 화파의 대표적 인물이며, 작품 '루첼라이의 성모'가 우피치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토스카나주는 고대와 현대의 풍부한 음악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지아코모 푸치니, 피에트로 마스카니 등 많은 작곡가와 음악가를 배출했다. 현대 음악 표기법을 발명한 귀도 다레초도 이곳에서 활동했다.
13세기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문학이 번성했다. 유명한 문인으로는 피렌체 출신 단테 알리기에리가 있다. '신생'・'신곡'・'농경시'・'향연' 등의 작품이 유명하며 피렌체 산타크로체성당 앞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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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토스카나주〉, 《위키백과》
- 〈유럽지명사전 :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네이버 지식백과》
- 〈토스카나〉, 《나무위키》
같이 보기[편집]
서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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