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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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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위치
수미주 위치

수미주(우크라이나어: Сумська область)는 우크라이나 북동부에 위치한 주이다.[1][2]

개요[편집]

수미주의 면적은 23,834㎢이며 인구는 1,053,402명(2021년)이며 주도는 수미이다. 북동쪽으로는 러시아 브랸스크주, 동쪽으로는 러시아 쿠르스크주, 남서쪽으로는 폴타바주, 남쪽으로는 하르키우주, 서쪽으로는 체르니히우주와 접한다.

주민의 대부분은 우크라이나인이다. 지리적으로 드니프로강 동쪽에 위치해 있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의 비중이 높다보니 주의 공식 언어는 우크라이나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러시아어를 알고 있지만, 우크라이나어의 비중이 높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수미 전투가 발생했다. 당시 수미 주의 일부가 러시아군의 통제를 받았었으나 2022년 4월, 러시아군이 키이우주, 체르니히우주, 수미주에서 철수하면서 현재 수미주는 우크라이나 측이 완전히 통제하는 중이다.

키이우와 모스크바를 잇는 간선도로가 북부지방을 가로지른다.

자연환경[편집]

중앙러시아 고원의 남서쪽에 펼쳐져 있으며, 최고점은 해발고도 225m이다. 북부에 있는 테스나 분지는 광활한 습지와 혼합림을 이루고, 세임강(江) 남쪽의 스텝지대는 비옥한 농경지를 이룬다. [3]

산업[편집]

주요 농산물은 밀·콩·사탕무·대마·해바라기·감자 등이며, 소·돼지·산양 등의 가축사육과 양잠도 행해진다. 토탄(土炭)·석유·인광(燐鑛)·돌소금의 채굴이 성하고, 화학·섬유·피혁·식품·전기·목재가공 등의 공업이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수미[편집]

수미는 우크라이나 북부에 있는 수미주의 주도이다. 17세기 키이브 인근에서 온 카자크군과 농민들이 세웠으며, 이후에도 요새화된 도시로 카자크 연대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18세기 초 스웨덴과의 북방 대전 중에는 러시아제국의 차르가 이끄는 총사령부가 주둔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우크라이나 북부의 산업 · 문화 중심지로 기계설비와 화학공업, 식품 가공업 등이 발달했다.

수미의 건립 역사는 흐멜니츠키(Khmelnytsky) 봉기(1647~1654년)와 관련이 깊다. 폴란드의 통치에 항거해 카자크군과 현지 농민들이 일으킨 이 봉기 와중에 키이브(Kyiv)주 스타비슈(Stavyshche) 지역에 있던 빌라체르크바(Bila Tserkva) 연대의 연대장 헤라심 콘드라티예프(Herasym Kondratiev)가 프솔과 숨카 강둑으로 카자크군과 농민들을 이끌고 와서 세운 도시가 수미다. 건립 연도는 1652년, 또는 1655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설화에 따르면 이곳에 도착한 카자크 이주민들은 동전이 가득 든 세 개의 사냥용 가방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 가방들의 이미지는 도시의 문장(紋章)이 되었다.

새 정착지는 곧 요새화되었다. 1656~1658년 모스크바 차르국(Tsardom of Muscovy)에서 파견된 지방장관인 아르세네프(Arsenev)는 타타르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이곳을 마을과 요새가 결합한 형태의 도시로 만들었다. 1658년 콘드라티예프가 이끄는 카자크의 수미 연대가 결성됐고, 수미는 그 중심지가 되었다. 콘드라티예프 가문은 1765년 수미의 카자크 공동체가 붕괴될 때까지 대(代)를 이어 이 도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670년대 수미는 요새와 장인(匠人) 마을이 결합한 형태로 확장되었다. 이후 수미는 지금의 우크라이나 북동부 지역과 러시아 일부 지역을 지칭하는 슬로보다 우크라이나(Sloboda Ukraine)의 가장 큰 요새가 되었다. 1680년대에는 수미 일대에 비(非)군사적 기능의 교외 지역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7세기 말 수미는 모스크바 차르국이 크림한국(Crimean Khanate)과 벌인 전쟁(1687 · 1689년)에서 러시아군의 집결지 역할을 했다. 이어 스웨덴과의 북방 대전 중에는 1708년 12월 말부터 1709년 2월 초까지 표트르 1세(Peter I)가 이끄는 러시아군의 총사령부가 수미에 주둔했다.

이어진 평화 속에 1710년대부터 수미는 산업과 무역을 발전시켰다. 수미는 우크라이나의 푸티블(Putyvl)과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잇는 교역로상의 도시로 번창했다. 매년 2개의 대형 박람회가 20~30일간 개최되었다.

도시의 인구도 1660년의 2,700명에서 1732년 7,700명, 1773년에는 9,845명으로 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도시 측량 작업과 함께 여러 가지 건설 계획이 추진되었다.

수미는 1732~1743년 슬로보다 우크라이나 지역에 있던 카자크 연대들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러시아제국의 통치하에서도 반(半)자치권을 누려왔던 카자크 공동체는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붕괴되었다. 1765년 수미 연대도 러시아제국의 정규군으로 흡수 · 재편되었다.

19세기 후반 수미의 산업 기반은 빠르게 확대됐다. 1869년 설탕 정제공장이 건설되면서 수미는 설탕 산업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다. 설탕 사업으로 수미의 산업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 이반 하리토넨코(Kharrytonenko; 우크라이나어 Иван Харитоненко)는 많은 자선사업으로도 수미에 공헌했다.

보로즈바(Vorozhba)-메레파(Merefa) 철도 노선이 건설되면서 1877년 1월 수미 시내에 기차역이 들어섰다. 이는 수미의 기계제조와 금속공업의 발전을 촉진했다. 1891년에 기계제조공장이 세워졌고 1896년에는 설탕기계공장이 세워졌다.

식료품과 금속제품의 무역도 크게 확대되었다. 수미의 인구는 1850년 1만 300명에서 1897년 2만 7,600명, 1913년 5만 400명으로 늘었다.

1905~1907년의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 1917년 10월의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내전 등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은 수미에도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에 와서야 도시는 안정을 되찾았다. 1923~1924년 금속공장과 기계공장이 설립되었다. 1926년 4만 4,000명(우크라이나인 80.7%, 러시아인 11.8%, 유대인 5.5%)이던 수미의 인구는 1939년 6만 3,900명으로 급증했다. 1939년에는 신생 수미주의 주도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수미도 1941년 10월 10일부터 1943년 9월 2일까지 독일군에 점령되었다. 전후 도시는 빠르게 재건되었다. 1950년대에 들어서며 산업은 급성장했다. 가구 공장과 철근 콘크리트 공장, 전자 현미경 공장 등이 가동되었다. 인구는 1959년 9만 8,000명에서 1970년에는 15만 9,000명에 달했다.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소련 체제하에서 바뀌었던 수미를 또다시 변모시켰다. 1918년 파괴됐던 하리토넨코의 동상이 복원되었고, 도심부도 옛 모습을 되찾았다.

수미는 중앙 러시아 고지대에 속하는 우크라이나의 북동부 지역, 프솔강 강둑에 자리하고 있다. 역사적 지명으로는 슬로보다 우크라이나 지역에 속한다.

수미는 비교적 가깝게 위치한 하르키프와 비슷한 날씨를 보인다. 습한 대륙성 기후로, 겨울에는 춥고 눈이 많이 오는 편이고, 여름엔 덥다.

겨울인 1월 평균 기온은 –6.9℃, 여름인 7월 평균 기온은 20.3℃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513mm로, 6월과 7월이 가장 많다.[4]

드니프로강[편집]

드니프로 강은 러시아 서부의 발다이 구릉지대에 내린 눈이 녹아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를 거쳐 흑해로 흘러드는 길이 2290 km짜리 강(국제하천)이다.

유역은 비옥한 초르노젬(흑토) 지대로 농업 생산이 풍부하고, 북유럽흑해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해서 고대에는 많은 국가들이 번영했다. 스키타이 시절에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인들이 찾아와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팔고 밀을 사갔으며, 바이킹들은 다우가바 강과 이 강을 연결한 무역로를 타고 내려와서는 동로마 제국과 무역을 했고, 키예프 공국 시절에는 흑해와 연계한 수운 무역으로 강변 여러 도시들이 번영을 누렸다. 현대 와서도 강의 중심도시 키이우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은 소련 3대 도시였다.

하지만 인근 주민들에게는 이 비옥함이 축복만은 아니었으니, 이 지역의 높은 식량생산량과 인구 부양력을 노리고 주변국 세력들이 온갖 수탈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강 남부 크림반도와 동부에 근거지를 둔 몽골-투르크계 유목민들의 약탈과 노예사냥은 18세기 말까지 천 년 가까이 이어졌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주들과 러시아 제국에서는 주민들을 농노화한 뒤 생산된 잉여 곡물을 서유럽으로 수출하였다.[3] 심지어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 시절에도 소련 정부가 도시노동자들에 대한 식량 공급 안정화를 위해 이 지역에 집단농장을 세우고 밀 수탈을 일삼는 바람에 1932-33년 대기근이 들어 수백만 명이 굶어죽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이 지역의 비옥한 평야와 강 동부 도네츠크 지역의 거대한 노천 광산들을 노리고 쳐들어오면서 독일군과 소련군의 격전지가 되었다. 평야가 펼쳐져서 별다른 지형 장애물이 없는 우크라이나에서 드니프로강은 몇 안 되는 중요한 방어선이기도 했다. 이런 요소들이 맞물려서 격전지가 됐고 이 과정에서 또 주민 수백만 명이 독일군에게 살해당했다.

유로마이단 이전에는 드니프로 강을 경계로 서부는 친서방 정당의 지지세가 강했고, 동부는 친러 성향의 정당들의 지지세가 강했기 때문에 정치적 경계선이 나눠진데다가 거기에 더해서 서부는 우크라이나 정교회 및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동부는 러시아 정교회 우세지역이기까지 했기 때문에 심리적인 경계선이라는 말이 나왔다. 강 서쪽인 남부 부자크와 오데사가 예외로 전통적으로 친러성향의 정당이 우세한 지역이기에 100% 들어맞는건 아니지만 당대에는 그랬다. 이러한 경계선은 2022년까지 부분적으로 이어지다가 2022년 러시아 침공 이후로는 동부지역도 반러성향이 강해지면서 완전히 깨지기는 했다.

1950-70년대 소련 정부에서 드니프로강에 대규모 댐들을 건설하면서 유역을 따라 커다란 저수지들이 있다. 상류로부터 키이우호(922 km²), 카니우호(675 km²), 크레멘추크호(2252 km²), 카미얀시케호(567 km²), 드니프로호(410 km²), 카호우카호(2150km²) 순이다.[5]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수미주〉, 《위키백과》
  2. 수미주〉, 《나무위키》
  3. 두산백과 : 수미주〉, 《네이버 지식백과》
  4.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수미〉, 《네이버 지식백과》
  5. 드니프로강〉,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국가
동유럽 도시
동유럽 지리
동유럽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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