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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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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비우(우크라이나어: Львів [lʲʋiu̯], 폴란드어: Lwów, 러시아어: Львов)는 우크라이나 서부의 도시이고 르비우주주도이다. 리비우라고도 부른다. 르비우는 우크라이나 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폴란드 국경으로부터 70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2022년 기준 인구는 717,273명이며 우크라이나에서 7번째로 큰 도시이자 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르비우는 13세기에 설립된 이후 도시의 주인이 여러 번 바뀐 굴곡진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도시 명칭도 리보프, 르부프, 렘베르크 등으로 바뀌었다. 루테니아인들에 의해 세워진 도시지만 폴란드의 지배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그 영향이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르비우는 키이우와 더불어 오랫동안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의 중심지로 기능했기 때문에 많은 우크라이나인이 자신들의 정신적, 문화적 수도로 여긴 곳이었으며, 지금도 르비우는 우크라이나인의 주요 문화 중심지이다.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났지만 구시가는 기적적으로 보존되었고 여러 문화융합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기에 그 역사성을 인정한 유네스코는 1998년 120 헥타르에 이르는 구시가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개요[편집]

역사[편집]

3.1. 초기, 루테니아 왕국의 지배 (1256~1349)[편집] 6세기 경부터 이 지역에 마을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1256년 루테니아의 왕이었던 갈리치아의 다닐이 이 지역에 도시를 세우면서 르비우의 도시로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도시의 이름은 다닐의 장자였던 레프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1261년 르비우는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룬다이가 이끄는 몽골군의 침입을 받아 파괴되고 말았다. 1270년 다닐의 후계자 레프는 도시를 재건했고 르비우를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루테니아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당대 우크라이나 지역에 도시가 얼마 없던 데다 얼마 전까지 최대의 도시였던 키예프(키이우)가 1240년 바투 칸이 이끄는 몽골군의 침입으로 사실상 사라지면서 르비우는 일대 최대의 도시이자 무역 중심지로서 기능했고 독일인, 아르메니아인 등을 포함한 수많은 상인들의 터전이 되었다. 또, 당시 기근을 겪던 크라쿠프에서 피신해 온 폴란드인이 대거 르비우에 자리잡으면서 인구도 크게 늘었다.

1323년 루테니아 류리크 왕조의 대가 끊기자 이 지역은 피아스트 왕조의 일원이던 마조프셰의 볼레스와프 예르지 2세에게 주어졌다.[10] 그가 암살당하자 당시 폴란드 왕이던 카지미에시 3세가 이 지역의 권리는 볼레스와프의 사촌인 자신에게 있음을 주장했지만 현지 귀족들은 드미트로 데드코(Dmytro Dedko)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뽑았다. 분개한 카지미에시 3세는 갈리치아를 침공했지만 데드코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1349년 데드코가 죽고 나서야 카지미에시 3세는 르비우(르부프)를 포함한 갈리치아 전역을 얻었다.

렘베르크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구성국인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1866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한 뒤 심각한 민족주의의 위협에 시달리자, 제국의 다른 피지배민족들의 땅과 더불어 갈리치아에도 1867년부터 광범위한 자치가 허락되었다. 독일화는 중단되었고 폴란드어가 다시 도시의 주된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언론에 대한 검열도 취소되었다. 이와 함께 도시는 아름답게 가꾸어졌다.

1914년 9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를 몰아붙이던 러시아는 렘베르크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듬해 6월 오스트리아는 도시를 탈환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붕괴가 확실해지자 1918년 11월 1일, 현지의 우크라이나인들이 독립하여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만들었고 렘베르크를 이 나라의 수도로 삼았다. 1919년 1월 22일에는 우크라이나 중부를 통치하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즐루키 협정(Акт Злуки)을 체결하여 서로 합병했다.

1920년 4월 21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폴란드 공화국 정부와 바르샤바 조약을 체결, 동부 갈리치아를 폴란드령으로 인정하고 그 댓가로 폴란드의 군사원조를 받았다. 이후, 르부프는 동부 갈리치아와 함께 다시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고 르부프 주의 주도가 되었다.

1939년, 소련과 폴란드의 전쟁으로 르부프는 소련에 점령 당하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후 의 결과로 동부 갈리치아 지방이 소련의 영토가 되어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쳐지면서, 르비우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와 함께 우크라이나 독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전후 르비우는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강압적인 러시아화가 진행되었으나 스탈린 사후 이 정책은 완화되었고 르비우는 서부 우크라이나의 문화중심지로 다시 기능하게 되었다. 1950~60년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도시에 수많은 공장과 발전소가 세워짐에 따라 도시의 인구는 다시 크게 늘었다. 이 중 르비우 자동차 공장도 있었는데, 무려 30,0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며 소련에 공급되는 대부분의 버스를 생산했다. 공업화는 도시에 경제력을 부여하긴 했지만 도시의 서구적인 색채를 일부 지워냈다. 1980년대 말 소련이 개혁개방정책을 시행할 때, 르비우는 소련으로부터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요구하는 우크라이나 국민운동(Народний Рух України, Ру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르비우의 인구 대다수를 우크라이나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1991년 소련 해체 후, 르비우는 독립 우크라이나의 도시로서 약 600년 만에 다시 우크라이나인의 품으로 돌아왔다. 도시는 여전히 우크라이나의 주요 문화중심지로서 우크라이나인의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의 영향을 받은 서구적인 도심지를 가지고 있다. 1998년 유네스코는 동유럽과 서유럽의 문화가 조화롭게 융화되었다는 점, 이 도시가 역사적으로 많은 민족들의 문화적 중심이 되었다는 점을 인정해 르비우 구시가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발발하면서 르비우도 러시아군의 공습을 받아 전쟁터로 변하였다. 그래도 이 지역은 비교적 후방이라 예비군 및 의용군 모집 등의 임무가 수행되고 있으며, 2023년에도 다른 지역에 비하면 폭격지로 적어졌으나, 7월 6일. 러시아군이 대규모 미사일 폭격을 감행하여 40여명 이상 사망, 부상과 함께 르비우 구시가지 내 완충지역의 역사적 건물이 일부 파괴되었다.

지리[편집]

폴란드 국경 에서 동쪽으로 약 70km, 동부 카르 파티아 산맥에서 북쪽으로 160km 떨어진 로즈토키아 고지대 가장자리에 있으며 평균 해발 296미터이다.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409m인 Vysokyi Zamok이다. 이 성에서는 독특한 녹색 돔 교회와 복잡한 건축물이 있는 유서 깊은 도심의 멋진 전망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기후는 습한 대륙성기후로 겨울은 춥고 여름은 따뜻하다. 1월 평균 기온은 -3 °C이고 7월 평균 기온은 18 °C이다. 연평균 강우량은 745mm이며 여름에 최대 강수량이다.

행정구역[편집]

문화[편집]

우크라이나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 중 하나입니다. 예술, 문학, 음악, 연극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도시의 문화적 풍부함을 보여주는 증거는 수많은 극장, 콘서트 홀, 창작 조합, 그리고 수많은 예술 활동(연간 100개 이상의 축제, 60개 박물관, 10개 극장)입니다.

리비프의 역사 중심지는 1998년부터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세계문화유산 목록 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역사적인 교회, 건물 및 유물은 13세기부터 20세기 초(폴란드와 오스트리아-헝가리 통치)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최근 몇 세기 동안 리비프는 다른 우크라이나 도시를 파괴한 침략과 전쟁을 면했습니다 . 그 건축물은 다양한 유럽 스타일과 시대를 반영합니다. 1527년과 1556년의 화재 이후 리비프는 고딕 양식의 건물 대부분을 잃었지만 르네상스 , 바로크 및 고전 양식 의 건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 비엔나 분리파 , 아르누보 , 아르데코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

건물에는 특히 수백 년 된 대형 문에 많은 석조 조각품과 조각품이 있습니다. 도시 중앙에는 오래된 교회의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일부 3~5층 건물에는 다양한 수리 상태의 숨겨진 내부 안뜰과 동굴이 있습니다. 일부 묘지는 흥미롭습니다. 예를 들어 폴란드 엘리트가 수세기 동안 묻혀 있던 Lychakivskiy 묘지가 있습니다. 중앙 지역을 벗어나면 소련 시대의 고층 블록이 지배하면서 건축 양식이 급격하게 변합니다 . 도시 중심부에는 소련 시대가 주로 현대적인 스타일의 국가 기념물과 조각품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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