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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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잔(프랑스어: Lausanne, 이탈리아어: Losanna)은 스위스의 도시로 보주(Vaud)의 주도이다. 레만호 유역에 위치하며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에 속한다. 로잔의 인구는 약 140,000명으로 바젤, 제네바, 취리히에 이어 스위스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며, 전체 밀집 지역에는 약 420,000명의 주민이 있다. 로마 제국 시절 라우소니움이라는 이름으로 건설된 오래된 도시로서, 세계적인 관광도시이다. 문화 중심지이며 국제회의가 자주 개최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1]
개요[편집]
로잔은 레만호의 북쪽 호안, 쥐라산맥의 남쪽 사면(해발고도 약 380m)에 위치하며, 제네바와 더불어 프랑스어권 스위스의 중심지이다. 제네바에서 북동쪽으로 62km 떨어져 있다. 로잔의 면적은 41.38K㎡이며 이 면적 중 6.22k㎡ (15.0%)가 농업 목적으로 사용되는 반면 16.06k㎡ (38.8%)는 삼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머지 토지 중 19.00k㎡ (45.9%)가 정착(건물 또는 도로), 0.08k㎡ (0.2%)가 강 또는 호수이고 0.01k㎡ (0.0%)는 불모지이다. 일반적으로 제네바 호수 지역으로 불리는 로잔-제네바의 대도시 지역(브베-몽트뢰, 이베르동레뱅, 발레 및 외국 지역 포함)은 130만 명이 넘는 인구가 거주했으며 스위스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로잔은 포도밭으로 덮인 비탈에 둘러싸인 세 개의 언덕 위에 있으며, 제네바호수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인근 라보의 포도원 테라스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로잔에는 스위스 유산으로 등재된 건물이나 유적지 46곳이 있다, 특히 올드시티와 베르낭-데수스 지역은 전체가 스위스 국가 유산 목록에 등재되어 있다. 종교 건물로는 13세기에 지어진 초기 고딕 양식의 로잔 대성당, 생 프랑수아 개혁교회, 생 로랑 개혁교회, 플로리몬트가에 있는 유대교회당 등이 있다. 1674년 건축된 시청, 현재 스위스 최고 사법 기관인 연방대법원, 생 메르성(城) 등도 유서 깊은 건물로 꼽힌다. 15세기 로잔 주교가 건설한 생 메르성은 현재 보주의 주청사 사용되고 있다.[2]
로잔에는 특히 많은 박물관들이 있는데 과거 로잔 주교의 거주지였던 로잔 역사박물관과 아르 브뤼트 컬렉션을 전시하는 볼리외성(城), 에르미타쥬재단 박물관, 엘리제 사진미술관과 비디 지역에 있는 로마 박물관 등이 있다. 1993년 6월 개관한 올림픽박물관도 빼놓을 수 없다. 올림픽 창설자인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의 개인 소장품은 물론 1896년 아테네에서 열린 제1회 경기부터 오늘날까지 올림픽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방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로잔은 각종 국제회의가 개최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로잔을 중심으로 하는 레만호 북안 지역은 경사지를 이용한 포도 재배가 활발하여 이것을 원료로 하는 백포도주가 유명하다. 도시는 28개의 역이 있는 지하철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공업으로는 정밀기계, 금속, 피혁, 인쇄, 식품가공업 등이 성하다. 국제 스포츠의 중심지로 1994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로 부터 ‘올림픽 도시’로 인정받았다. IOC 본부와 스포츠중재재판소, 55개 국제스포츠협회가 있다. T. S.엘리엇,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 시인 셸리, 바이런 등 창조적인 예술가들이 로잔에서 활동했다.[3]
지리[편집]
로잔 주변 지역의 가장 중요한 지리적 특징은 제네바 호수(프랑스어로는 레만호)이다. 로잔은 스위스 고원의 남쪽 경사면에 지어졌으며, 우시(Ouchy)의 호숫가와 르 몽-슈흐-로잔 및 에발린제(Épalinges)와 접하는 북쪽 가장자리 사이에 약 500m의 고도 차이가 있다. 로잔은 호수와 스위스 및 사보이 알프스의 극적인 파노라마를 자랑한다. 일반적으로 남쪽으로 기울어진 배치 외에도 도시의 중심은 19세기부터 흘러온 오래된 강인 플롱강이 있는 곳이다. 이전의 강은 일반적으로 현재 루 첸트랄레(Rue Centrale)의 경로를 따라 구시가지 남쪽의 도시 중앙을 가로지르는 협곡을 형성하며, 여러 개의 다리가 저지대를 가로지르며 이웃 지역을 연결한다. 고도 차이가 상당하기 때문에 방문객들은 어느 고도면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메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나가려는 도로의 수십 미터 아래 또는 위쪽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플롱이라는 이름은 협곡에 위치한 지하철 역 이름에도 사용된다.
기후[편집]
로잔은 연간 평균 119.7일의 비 또는 눈이 내리며 평균 강수량은 1,153mm이다. 가장 습한 달은 5월로 이 기간 동안 로잔에는 평균 117mm의 비가 내린다. 5월의 평균 강수량은 12.1일이다. 연중 가장 건조한 달은 2월로 8.8일 동안 평균 강수량이 67mm이다. 지난 20년(1997-2016) 동안 평균 최저 온도가 –7.0C이다.
역사[편집]
로잔의 역사는 로마인들이 지금의 비디와 우시 지역 호수 근처에 군 숙영지를 만들고 라우산나라고 부른 게 그 시작이다. 기원 후 2세기까지 라우소니움으로 불리다가 400년대에는 루산나, 990년대에는 로산나로 불렸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로잔 주민은 적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기 쉬운 구릉 지대를 찾아 현재의 중심부로 이동했다. 574년 아벤티쿰(지금의 아방쉬)의 주교인 성 마리우스가 주교좌를 로잔으로 옮긴 이후 로잔은 주교와 사보이 가문의 백작에 의해 통치되었다.
1536년부터 1798년까지 약 260년간 로잔은 베른의 지배를 받게 된다.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된 이후 1536년 베른 정부는 로잔 성당에서 종교 논쟁을 벌였다. 피에르 비레와 기욤 파렐 그리고 장 칼뱅 등 소수의 종교개혁가들과 174명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들이 논쟁을 벌였다. 베른은 로잔 논쟁에서 개신교가 이겼다고 판단하여 미사를 금지하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이 법령으로 로잔은 종교개혁 진영이 되었고, 성당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1685년 개신교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던 낭트 칙령이 취소되자 로잔은 프랑스 위그노파의 은신처가 되었다. 1729년 앙트완 쿠르와 벤자민 뒤플랑이 세운 신학대학에서 프랑스로 보낼 목사들을 교육시켜 1750년까지 90여 명의 목사가 선교 활동을 위해 프랑스로 들어갔다. 이후 400여 명의 목사가 프랑스에 투입됐다. 1787년 공식적인 박해가 끝나고, 1808년 프랑스 남부 몽토방에 개신교 대학이 설립되면서 로잔의 신학대학은 문을 닫았다. 1798년 로잔이 속한 보주의 주민들은 베른의 총독을 몰아내고 레만 공화국을 선포했다. 보주의 민족주의자들은 이 지역을 해방시키기 위해 프랑스의 개입을 요구했고 프랑스 혁명군이 이 과정에서 스위스 전역을 점령하고 헬베티아 공화국을 수립했다. 나폴레옹 1세 치하에서 보주는 레만주로 불렸다. 로잔은 1803년 보주의 주도가 되면서 스위스연방에 가입했다.
1923년 로잔에서는 중요한 조약이 체결됐다. ‘로잔조약’이라 불리는 이 조약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연합국가들과 터키 간에 맺어진 조약이다. 터키는 이 조약으로 영토와 주권을 보장 받았다. 1932년에는 1차 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의 전쟁 배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로잔 회의가 열렸다. 18개국이 참여한 국제회의였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 많은 수의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포르투갈인들이 로잔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주로 레넨의 공업지구에 정착했다.
로잔은 많은 유럽 예술가들의 출생지이자 피난처 역할을 했다. 샤를 페르디낭 라뮈, 뱅자맹 콩스탕 등의 작가가 로잔에서 태어났고, T. S. 엘리엇,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 셸리, 바이런과 같은 창조적인 예술가들이 로잔에서 활동했다. [4]
교통[편집]
로잔은 지역, 국내 및 국제 대중교통의 광범위한 네트워크로 연결된다. 스위스 연방 철도의 국내 및 국제 여객 열차는 RER 보 통근 철도 시스템의 허브이기도 한 로잔역에서 출발하며, 시내의 메트로가 정차한다. 메트로와 지역 버스는 로잔 지역 운수(TL)에서 운영하며 많은 노선이 무궤도 전차를 사용한다. 추가 통근열차는 로잔 - 플롱역에서 로잔-베르세선(LEB)으로 운행된다. 제네바 호수를 가로지르는 선박은 레만호 종합 항운(CGN)이 제공한다.
로잔 메트로는 2008년 10월에 개통한 M2 라인과 함께 스위스에서 최초로 고무 타이어 시스템을 갖춘 지하철이다. 철도 차량은 파리 메트로 14호선에 사용된 것보다 짧은 버전이다. 트램의 재도입과 같이 시스템의 추가 확장이 계획되어 있다.
로잔은 서쪽(제네바 – 취리히 축)에서 A1 고속도로와 연결되어 있고 북쪽과 동쪽에서 A9 고속도로(이탈리아 및 프랑스로의 환승용)에 연결되어 있다. 이 두 고속도로 사이의 교차로가 도시의 북서쪽에 있다. 로잔 공항은 블레체레테(Blécherette)에 있으며 보잉 737 시뮬레이터도 있다. 또한 제네바 국제공항까지 기차로 1시간에 4회씩 운행하며, 42분이 소요된다.[5]
로잔 조약[편집]
로잔 조약(Treaty of Lausanne)은 1923년에 터키 공화국이 수립된 후에 스위스 로잔에서 터키와 연합국이 세브르 조약에 대한 제약을 없애기 위해서 다시 체결한 조약이다. 튀르키예, 프랑스, 영국, 그리스 왕국, 이탈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되었다. 1920년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오스만 제국이 협상국과 체결한 세브르 조약을 파기하며 현재 튀르키예 영토 대부분을 확보하게 된 조약으로, 이를 이룩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튀르키예 대국민의회가 튀르크 민족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튀르키예 근현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조약이라 할 수 있다. 터키는 이로써 1894년 당시 소유했던 영토인 이즈미르, 콘스탄티노플, 동트라키아 등을 회복하였다. 1920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메드 6세가 연합국과 체결한 세브르 조약에서 동쪽 트라키아 및 이즈미르 지역을 획득한 그리스는 한층 더 영토를 확장하기를 원하였다. 그 결과, 소아시아를 침공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터키 전쟁이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터키군은 그리스군을 격퇴하고, 이즈미르를 무력으로 탈환하였다. 아르메니아의 평정, 소련과의 평화조약, 프랑스와의 휴전 조약과 케말에 의해 터키가 안정화된 것을 본 연합국은 세브르 조약을 대체할 새로운 강화 조약을 맺기로 결정한다. 이를 위해 스위스의 로잔 지역에서 7개월간 회의를 거친다. 이후 터키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그리스,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사이에 조약이 조인된다. 이 조약은 터키 공화국이 주권 국가로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 조약으로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이 이루어졌다. 이 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서방에서는 세브르 조약을 파기한 튀르키예 정부에 대한 반감이 강해져서 한 동안은 튀르키예와 어떤 외교 관계도 수립하지 않았고 그래서 튀르키예는 똑같이 국제 왕따 신세였던 소련과 가까워지게 되었다.[6]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로잔〉, 《위키백과》
- 〈로잔 조약〉, 《위키백과》
- 〈로잔〉, 《나무위키》
- 〈로잔〉, 《요다위키》
- 〈로잔(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로잔(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