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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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나(Verona)는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주 아디제강 유역에 위치해 있는 도시이다. 인구는 약 26만 명으로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이탈리아 북동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1]
개요[편집]
베로나는 이탈리아 북부 내륙 평야에 있는 도시이다. 브레네르 고개를 넘는 도로, 철도가 통과하며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 상업의 중심지로서 발달하였다. 12∼13세기에는 롱고바르드(롬바르디아)의 지배하에 번영하였으며 13∼14세기에는 겔프당과 기벨린당 사이의 투쟁이 있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년~1616년)의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 베로나의 두 신사,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이야기 배경이 되었다. 15∼16세기에는 조콘도, 산미켈리, 비토리오, 피사노, 파올로, 베로네세 등에 의해 회화(繪畵)의 중심이 되었다. 오늘날은 중요한 곡물시장이며 기계, 제지, 인쇄 등의 공업 중심지이기도 하다. 베로나는 지정학적으로 가르다호 부근 아디제강의 환상선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큰 중요성을 띄게 되었다. 한편 강 부근에 인접해 있다는 점 때문에 홍수를 수차례 겪는 도시이기도 했는데, 1956년 홍수 위험이 있을 때마다 아디제강에서 가르다호로 약 500m³의 물을 내보내는 모리-토르볼레 터널이 건설되면서, 홍수의 위험은 줄어들게 되었다. 로마 시대의 건조물로는 원형극장과 아디제강의 다리 등이 남아 있다. 베로나의 중심에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내려오는 건물이 매우 많다. 산티 나자로 에 첼소 교회, 산타 마리아 교회, 산 조르조 교회, 산 토마소 교회, 산 베르나르디노 교회, 산 에우페미아 교회가 있다. 카노사, 폼페이, 베빌락쿠아, 포르타 팔리오의 문, 포르타 누오바, 포르타 산 제노, 그 외에도 주교의 저택, 주스티 정원과 저택이 있다. 19세기 오스트리아 시대의 유명한 건물들로는 카스텔 산 피에트로와 카세르마 산타 마르타가 있다. 관광 명소로는 줄리엣의 집, 포르타 레오니, 포르타 보르사리, 시뇨리 광장 등이 있다.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태어난 곳이나, 그는 일생의 대부분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보내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궁정악장까지 올랐다. 베로나는 매년 여름에 열리는 오페라 축제로도 유명하다. C.E. 30년경에 지어진 로마 시대 원형경기장(arena di Verona)에서 베르디를 비롯한 유명 작곡가들의 오페라가 공연되는데, 거대한 석조 원형 경기장에서 연주되는 오페라 아이다는 특히 장관이다. 2000년 11월 이 도시는 도시 구조와 건축물 때문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도시는 2026년 동계 올림픽 폐막식을 개최할 예정이다.[2]
기후[편집]
베로나는 북부 이탈리아 내륙 평원 특유의 습한 아열대 기후로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고 습하다. 상대 습도는 연중 높은 편이며, 특히 겨울철에는 주로 해질 무렵부터 늦은 아침까지 안개가 끼는 현상이 최근 들어 점점 더 잦아지고 있다.[3]
역사[편집]
초기 주민들은 베로나 지역 산비탈의 요새화된 마을 카스텔리에리(Castellieri)에 살았다. 베로나라는 명칭은 ‘루트 베르(root wehr, 방어벽)’와 관련이 있으므로, 강가의 요새 지역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일찍이 기원전 6세기나 5세기에 이곳에는 고대의 교통로가 교차하였다. 이 교통로의 한쪽은 중요한 에트루리아 인의 주거지가 있는 아드리아 해 쪽으로 이어지고, 또 한쪽은 강을 따라 발포리첼라(Valpolicella) 포도밭과 아래쪽의 트렌티노(Trentino) 방향으로 나 있었으며, 세 번째 방향은 가르다와 브레시아의 번창한 시살피네 영토와 연결된 클라우디아 아우구스타(Claudia Augusta) 도로이다.
기원전 148~기원전 147년 무렵에 비아 포스투미아가 건설되어 서쪽으로는 제노바와 롬바르드(파비아, 피아첸자, 크레모나), 그리고 동쪽으로는 오데르조와 아퀼레이아로 가는 길이 열렸다. 로마의 정착촌 건설은 공화정 시대 말,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시작되었다. 포스투미아(Postumia) 거리의 자취를 따라 데쿠마누스 막시무스와 동쪽에서 도시로 들어가는 카르도 막시무스(cardo maximus)가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이 도시는 그리드 플랜(grid plan, 격자 계획)으로 건설되었으며, 포르타 레오니와 포르타 로바라는 2개의 문이 달린 방어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벽과 문들 중에는 고고학적 유적만 남아 있는 것도 있다. 베로나가 기원전 49년에 건설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글귀가 발견되었다.
이 도시는 곧 중요성이 커지고 부유해져 원형 경기장과 로마의 극장, 돌로 만든 다리 폰테 피에트라(Ponte Pietra)를 포함한 여러 공공 건물들이 건설되었다. 최근의 발굴 작업에 의해 장식된 대리석 포장도로와 수준 높은 건축물, 기념품 등 상당수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서기 256년에 북쪽 이방인들과의 충돌이 거세지면서 갈리에누스 황제가 원형 경기장을 포함하여 공화국의 방어벽을 더 멀리까지 짓기로 결정하였다. 이 도시는 여러 번에 침략에 저항하였으나 다른 도시들은 파괴되었다. 로마시대 말(476년), 베로나가 동고트의 두 번째 이탈리아 왕국 도시가 되면서 테오도리코 1세가 이곳을 본거지로 삼았다.
567년까지 고트족, 774년까지 롬바르드, 1000년 무렵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몇 세기 동안, 베로나는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유명한 건축물을 많이 건설하였다. 권위자들 가운데, 라테리오 주교(벨기에 출신)를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는데, 그는 이 도시의 도해를 마련하였으나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의 도해에도 도시 배치는 로마의 그리드 플랜(grid plan, 격자 계획)을 따랐다. 북부 이탈리아의 독립 자치체였던 당시 베로나는 연속되는 전쟁과 분쟁으로 인해 요새를 다시 지어야만 했다. 스칼리제르 가문(1259~1387)이 시뇨리아로 들어와 도시의 발전에 유리해졌는데, 도시는 이미 확대되어 북서부의 베네치아 영토까지 소유하게 되었다.
스칼라 가문의 캉그란데 1세(재위 1311~29년)는 도시의 성벽을 더 확장하고, 장기간의 포위에도 저항할 수 있도록 도시 방어를 재편성하기로 결정하였다. 방어력이 튼튼해진 베로나는 뒤이어 베네치아 시대와 오스트리아 시대에도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 결정은 도시계획에도 영향을 미쳐 건설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대규모 성당과 행정 건물들이 들어섰다. 1387년에는 밀라노의 잔갈레아초 비스콘티(Giangaleazzo Visconti)가 잠시 베로나를 정복하여, 도시의 남부에 요새뿐만 아니라 새로운 성벽을 건설하였다.
1405년부터 1797년까지 베로나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부유하고 활기찬 지역이었다. 16세기 초에 있었던 충돌을 제외하면 평화로운 시기였다. 베네치아인들은 베로나의 군대를 건축가 미켈레 산미첼리(Michele Sanmicheli, 1484~1559)에게 맡겨 중세의 요새를 강화하도록 하였다. 그는 다각형의 요새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한 것 외에도 건축사에서 의미가 깊은 3개의 문(포르타 누오바, 포르타 팔리오, 포르타 산제노)을 만들었다. 이 문들은 공동체의 성벽과 더 남쪽으로 스칼리제르 가문의 성벽 사이에 있는 지역의 도시 발전을 원활하게 하였다.
베네치아인들은 군사적인 이유로 이 한계 너머까지 도시를 확대하지 못하게 하였고, 그 금지령은 오스트리아 제국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그 때문에 모든 개발이 성벽 안에서만 이루어져 통일성이 있었던 것이다. 베네치아 시대에 이 도시는 특히 경제적 자율성이 높았으며, 이는 행정과 문화에도 반영되었다. 부유한 가문의 명성 높은 대저택들이 많은 것은 물론 종교 건물과 공공건물이 아주 많은 것이 이 시대의 특징이다.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던 시기(1814~1866)에 베로나는 군사적 역할을 강화하였다. 라데츠키 장군과 그의 장교 건축가인 프란츠 본 숄이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 카스텔베키오의 중세 시대 다리 옆의 무기고를 비롯하여 대규모 군사시설을 도시 안에 건설하였다.
1866년에 오스트리아 인들이 이 도시를 이탈리아 왕국에게 넘겨주었을 때, 인구가 65,000명이었으나 산업은 거의 없었다. 이로써 도시는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되었으며, 1882년 엄청난 홍수로 더욱 악화되었다. 강이 약 8m까지 차올라 범람하여, 수많은 건물과 제분소, 제재소가 홍수에 휩쓸려 내려갔다. 2개의 주요 다리가 파괴되었으나, 오래된 다리는 강물의 힘을 견뎌 냈다. 이때부터 도시 개발에 변화가 생겼다. 도시의 군사적 역할은 끝이 나고, 개발은 성벽 밖으로까지 확대되어 새로운 지역이 건설되었다.
또한 산업 발전이 시작되어 1927년에는 인구가 15만 명으로 증가하였고, 도시 계획을 위한 최초의 설계 경기가 1931년~1932년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전쟁에 휩쓸린 이 도시는 모든 다리를 포함하여, 건물의 약 40%가 파괴되었다. 이후 오랜 기간 재건과 복구가 이어졌는데, 베로나의 건축 총감독인 피에로 가졸라(Piero Gazzola, 1908~1979)와 국제기념물유적협회(ICOMOS)의 창립 회장, 베네치아 헌장의 발기인과 주요 저자 중의 한 사람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재건 시기를 거쳐 1958년에 베로나 최초의 도시 종합 계획이 승인되고, 1975년에 개정되었다.[4]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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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서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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