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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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즈니(러시아어: Гро́зный, 체첸어: Соьлжа-ГӀала 쇨자갈라, 문화어: 그로즈느이)는 러시아의 북캅카스연방관구에 속하는 체첸공화국의 수도이다. 그로즈니는 남서부 북캅카스산맥의 북쪽 기슭에 있다. 바쿠 북서쪽 약 480km 지점 테레크강(江)의 지류인 순자강에 면하며, 로스토프에서 바쿠에 이르는 철도변에 위치한다.
개요[편집]
- 행정 단위: 러시아 체첸공화국 수도
- 면적: 324.16km²
- 인구: 324,602 명(2021년)
- 지역어: 러시아어, 체첸어
- 시장: Khas-Magomed Kadyrov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s://grozmer.ru/
역사[편집]
러시아어로 그로즈니는 공포를 뜻한다. 이렇게 살벌한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는 1818년, 이 지역을 평정하려던 러시아군 사령관 예르몰로프가 이곳에 요새를 건설하면서 공포 정치를 통해 산민들을 굴복시키려고 일부러 이렇게 지었던게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1850년대에 석유가 발견되고 1893년 철도가 놓이면서 크게 발전했다. 영국 기업들은 1893년부터 석유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 엔지니어 알프레드 스튜어트(Alfred Stuart)는 1893년 바쿠 지역 외곽 코카서스 지역에서 가장 큰 유전을 시추하여 그로즈니 최초의 유정을 완성했다. 1900년 이전에는 11개 회사가 116개의 유정을 시추했다. 이는 산업 및 석유화학 생산의 급속한 발전을 촉진했다. 도시 자체에서 석유를 시추하는 것 외에도 이 도시는 러시아 유전 네트워크의 지리적 중심지가 되었다. 1914년 초 당시 최대 석유 회사인 Royal Dutch Shell이 도시에 설립되어 그로즈니를 코카서스 최대 산업 중심지 중 하나로 만들었다. 러시아 제국 시대에 이 도시는 테렉 주의 그로즈넨스키 오크 루그 의 행정 수도였다 .
러시아 혁명 후 소비에트 산악공화국이 세워졌다가 1922년 체첸 자치주의 주도가 되었는데, 이 무렵까진 주민 다수가 카자크계 러시아인이었다. 1934년 이웃 인구시 자치주와 합쳐져 체첸-인구시 자치주로 편제되었고, 2년 뒤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나치에 대한 부역 혐의로 1944년 모든 체첸인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었고, 러시아인이 인구의 대부분인 그로즈니 주가 되었다. 1957년에야 체첸인의 복귀가 허가되고 자치공화국도 복구되었다.
소련 이 붕괴된 후 그로즈니는 조하르 두다예프 (Dzhokhar Dudayev) 가 이끄는 분리주의 정부 의 소재지가 되었다 . 일부에 따르면 남아 있는 러시아인과 체첸인이 아닌 주민 중 다수가 도망치거나 무장세력 에 의해 추방 되었으며, 이는 새로운 당국으로부터 괴롭힘과 차별을 가중시켰다고 한다 .
제1차 체첸 전쟁 동안 러시아군은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를 포위한 뒤 1주일 간 폭격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1994년 12월 31일 시도된 러시아군의 그로즈니 진입은 체첸 반군의 격렬한 반항으로 실패하였고 러시아 측은 1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며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계속되는 공습과 시가전으로 양측은 궤멸적인 피해를 냈으며, 러시아군은 언론에서 체첸이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사용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1월 19일 결국 러시아군은 체첸 대통령궁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체첸 게릴라 부대는 1996년 3월 그로즈니 공격과 같은 게릴라 전술과 습격을 통해 러시아군을 괴롭히고 사기를 저하시켰으며, 이는 러시아군 철수에 대한 정치적, 대중적 압력을 가중시켰습니다. 전투는 최종 휴전 으로 끝났고 그로즈니는 다시 한번 체첸 분리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전쟁으로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Grozny)가 폐허가 된 것은 물론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들이 사망했으며, 여기에 반군 측의 테러가 이어지면서 러시아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 같은 양상은 1995년 4월 말 두다예프 대통령이 러시아군 미사일에 폭사하고 젤렘한 얀다르비예프 대통령 체제가 들어서면서 반전의 계기를 맞았다. 특히 당시 알렉산데르 레베드 전 국가안보위 서기가 수차례 그로즈니를 방문, 어려운 평화협상의 물꼬를 텄다. 무엇보다 체첸의 독립 의지를 꺾지 못한 러시아는 결국 1996년 8월 평화협상을 맺게 되지만, 체첸의 분리독립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채 체첸의 국가적 지위에 대한 논의를 향후 5년간 동결했다.
평화 조약 이후 새롭게 구성된 체첸 정부는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었다. 이 와중에 1999년 8월 7일, 샤밀 바사예프가 이끄는 와하비즘 이슬람교 원리주의 무장세력 1,000명을 이끌고 다게스탄 공화국 국경을 침범해 일부 마을을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또 동시에 모스크바 아파트가 폭파되는 테러사건이 발생해 백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되었다. 9월 23일 러시아 정부는 체첸에 대한 전면 공습을 개시해 1차 체첸 전쟁의 종식 이후 최초로 체첸의 수도인 그로즈니의 TV 송신센터, 공항, 병원, 정유시설을 파괴하였다. 러시아군은 다게스탄 내 반군 소멸에 주력하던 중 모스크바 아파트 연쇄 폭탄 테러로 300여 명이 사망하면서 테러 배후로 체첸 반군을 지목하여 전면적인 공습 결정을 내리면서 평화조약은 무효로 돌아가게 되었다. 러시아는 체첸 반군이 민족주의적인 세력과 이슬람 원리주의적인 세력으로 나뉘었음을 알고, 민족주의 세력을 앞세워 친러시아계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체첸 반군 조직 또한 두 파로 분할되었다. 러시아군은 친러 성향의 체첸군의 도움을 받아 산악 지대를 점령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2차 체첸 전쟁은 러시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후 체첸의 연방 정부 대표는 그로즈니에 기반을 두고 2003년부터 도시는 처음부터 다시 재건되었습니다. 2005년에 철도 연결이 복원되었고, 그로즈니 공항은 2007년에 다시 문을 열었으며 2009년 그로즈니 시는 전쟁으로 상처받은 도시를 변화시키고 수천 명에게 새로운 집을 제공한 공로로 UN 인간 정착 프로그램 의 영예를 얻었다.
지리[편집]
남서부 북캅카스산맥의 북쪽 기슭에 있다. 바쿠 북서쪽 약 480km 지점 테레크강(江)의 지류인 순자강에 면하며, 로스토프에서 바쿠에 이르는 철도변에 위치한다.
그로즈니는 여름이 덥고 겨울이 추운 습한 대륙성 기후 ( Köppen Dfa )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제[편집]
주요 산업은 석유정제·석유화학·보링용 기계·정유 플랜트 건설 등의 공업, 포도주와 브랜디의 양조업, 근교에서 재배되는 농산물을 원료로 하는 통조림 공업 등이 발전하였다. 특히 이곳은 석유산업 관련 연구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그로즈니 유전은 19세기 말 대규모 석유탐사로 채굴에 성공한 유전이다. 구(舊)유전·신(新)유전·말고백 유전 등으로 구분되며, 1930∼1950년대에도 잇달아 석유탐사에 성공하여 새로운 유전들이 개발되었다. 돈바스 지방으로 송유관이 연결되어 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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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캅카스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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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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