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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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사드(세르비아어: Novi Sad / Нови Сад, 헝가리어: Újvidék )는 세르비아 북부 보이보디나 자치주에 있는 도시이다. 인구는 약 40만 명이고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주도이자 남바치카구의 행정 중심지이며, 세르비아에서 수도 베오그라드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도시 이름은 세르비아어로 "새로운 정원"을 뜻한다.[1]
개요[편집]
노비사드는 베오그라드 북쪽 30km 지점의 다뉴브강 유역에 면한다. 17세기에 건설되었으며 원래는 다뉴브강 연안의 어촌에 불과했다.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경계 지점에 있어 군사적으로 중요해지면서 발전하였다. 19세기 오스만 제국 치하의 세르비아인들이 다뉴브강을 넘어 이곳으로 정착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세르비아인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에는 독일어로 노이자츠(독일어: Neusatz)라고 했다. 다양한 공업이 이루어지는 공업 도시이며, 다뉴브강 연안의 중요한 도시이다. 발칸반도와 중앙유럽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다. 주민은 75%가 세르비아인, 5%가 헝가리인이며, 기타 여러 소수 민족이 있다. 세르비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행정, 경제, 문화, 과학, 여행의 중심지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61년에서 1971년 사이에 보이보디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지에서 인구가 유입됨에 따라 도시의 인구가 역대 가장 크게 증가했다. 노비사드는 다뉴브 강변에 위치해 있어 운하망이 발달해 있으며, 도로망과 철도망이 유럽의 동과 서, 남과 북을 잇는 중심에 위치해 있어 교통의 요지이다. 주요 산업은 농업기계의 제조를 비롯하여, 조선, 식품, 직물 등의 공업이 성하며, 시 주변에서는 곡물, 포도, 야채 등이 재배된다. 노비사드의 가장 큰 교육기관은 1960년 설립된 노비사드대학교로, 철학, 법학, 교육, 약학 등 14개 학부와 3개의 연구소를 보유하고 있다. 노비사드에는 유대교 사원, 정교회, 가톨릭 성당 등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17개의 사원과 17세기의 페트로바라딘 요새(Petrovaradin Fortress), 구시가지, 노비사드 시 박물관, 보이보디나 박물관, 보이보디나 현대예술 박물관 등 많은 박물관들이 있으며 다양한 도시 축제들이 열린다. 다뉴브 강변에서 수영을 할 수 있는 슈트란드(Štrand) 강변과 도심 곳곳에 조성되어 있는 공원에서 휴양을 즐길 수 있다. 노비사드에서는 유럽에서 가장 큰 음악축제인 EXIT를 비롯해서 많은 문화, 스포츠행사가 열린다.[2]
지리 및 기후[편집]
노비사드는 다뉴브강이 굽이쳐 돌아가는 지역에 위치한다. 노비사드의 주된 부분은 다뉴브강 서쪽 지역인 바치카에 있고 다뉴브강 동쪽 지역인 스렘 지역의 페트로바라딘과 스렘스카카메니차에는 거주하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다. 다뉴브강의 서쪽 지역은 판노비아평원 맨 남쪽의 고도가 낮은 지역인데 반해 다뉴브강의 동쪽 지역에는 프루슈카고라산이 있다.
노비사드는 해양성기후 지역으로 습한 대륙성기후 지역과 인접해 있는데 1월 평균 기온이 0.2°C이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가을은 봄보다 길다. 겨울은 아주 춥지는 않고 영하 이하인 날이 평균 22일이며 눈 오는 날은 평균 25일이다. 1월이 가장 추운데 평균 -3.1°C이다. 봄은 보통 짧고 비가 많이 오며 여름은 갑자기 찾아온다. 노비사드에서 가장 추웠던 것은 1963년 1월 24일의 -30.7°C였고 가장 더웠던 것은 2007년 7월 24일의 41.6°C였다.[3]
역사[편집]
노비사드에 인간이 거주한 것은 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5000년 시기의 거주지와 무덤이 노비사드 서쪽 도로 건설 공사 도중 발굴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다뉴브강 동쪽 지역에서도 옛 사람들의 거주지가 확인되었다. 노비사드에는 고대에 켈트족이 살았는데 기원전 1세기에 로마인들이 정복했고 로마 통치 시기에 거대한 요새가 만들어졌다.
서기 5세기에 훈족이 쳐들어와 요새가 파괴되었다. 5세기 말 비잔틴인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성인 피터의 이름을 따서 페트리콘(Petrikon), 또는 페트리코브(Petrikov)라고 불렀다. 세베리안, 오보트리트, 세르비아 등 슬라브족이 이 지역에 정착한 것은 6세기와 7세기 무렵이다.
중세에 이 지역은 오스트로고트, 게피드, 아바르, 프랑크, 서슬라브족, 비잔틴,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헝가리인들이 지배했다. 11세기와 12세기 사이에는 중세 헝가리왕국의 일부에 속했다.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이 지역에는 슬라브족과 헝가리인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오스만제국의 침략에 따라서 헝가리인들은 이 지역에서 물러났다. 1526년부터 1687년 사이에 이 지역은 오스만제국이 통치했는데 거주하는 주민들은 세르비아인들이었다.
17세기 말 로마가톨릭을 신봉하는 합스부르크 통치자들이 다뉴브강 동쪽 지역인 페트로바라딘에서 정교 신자들이 거주하지 못하게 하자 세르비아인들은 다뉴브강 서쪽 지역에 그들의 거주지를 건설하게 됐다. 그리고 그곳을 ‘세르비아 도시’라 불렀고 1748년에 오늘날의 이름인 ‘노비사드’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갖게 되었다.
18세기와 19세기 동안 노비사드는 세르비아인들이 사는 가장 큰 도시였다. 당시에 세르비아인들은 나라를 갖지 못했고 노비사드는 문화적, 정치적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세르비아의 아테네’로 불리게 됐다. 19세기 중엽에 주민의 절반 이상이 정교를 믿는 이들이었고 그다음이 가톨릭, 신교도들이었다.
1848~1849년 혁명기에 노비사드는 오스트리아제국 안에 있는 세르비아 독립지구인 세르비아 보이보디나의 일부였다. 1849년 헝가리 수비대는 노비사드를 철저히 파괴하였고 이에 따라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1867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강화에 따라 노비사드는 헝가리왕국에 속하게 됐고 노비사드는 급격히 헝가리화됐다. 세르비아인의 비중이 줄어들고 헝가리인들이 늘어났다.
1918년 11월 25일 보이보디나 지역과 세르비아왕국의 통합이 선언됐다. 1918년 12월 1일부터 노비사드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1929년에 노비사드는 다뉴브바노비나 지역의 수도가 됐다. 1941년에 유고슬라비아는 추축국의 침공을 받아 분할되었고 노비사드를 포함한 북쪽 지역은 헝가리에 병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노비사드 시민 약 5,000명이 죽었다. 1942년 1월 21일부터 23일까지 사흘 동안만 1,246명의 노비사드 시민이 헝가리 경찰에 의해 피살됐는데 그중 800명이 유대인이었다. 1944년 10월 23일 추축국에 맞서 싸운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이 노비사드에 들어와 1년 3개월 동안 새 정권에 반대하는 수천 명의 세르비아인과 독일인, 헝가리인들을 죽였다.
1945년 이래 노비사드는 세르비아공화국의 한 지역인 보이보디나의 수도였다. 노비사드는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었고 1990년대에 유고슬라비아가 여러 나라로 쪼개지던 때에는 인구가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1992년 이후로 노비사드는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에 속했다.
1999년 코소보전쟁 때 나토군의 공습을 받아 다뉴브강의 세 다리인 제젤리교, 바라딘교, 자유교가 사라졌고 통신, 상수도, 전기 등의 시설도 파괴되었다. 2003년에 구유고슬라비아공화국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연합으로 바뀌었고 2006년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완전히 분리되면서 노비사드는 세르비아공화국에 남게 되었다.[4]
경제[편집]
노비사드는 세르비아에서 가장 비옥한 농업 지역인 보이보디나의 경제적 중심지이다. 1981년에 노비사드의 1인당 국민소득은 유고슬라비아 평균의 172%였다. 1990년대에는 유고슬라비아에 가해진 수출입 금지 조치에 큰 영향을 받아 전기 케이블산업, 금속공업, 공구산업, 화학공업 등이 크게 쇠퇴했다. 오늘날 남아 있는 경쟁력 있는 산업 시설은 정유소와 열 발전소다.
노비사드 경제는 2001년 이후 크게 회복되기 시작했는데 공업 중심 경제에서 제3의 분야로 옮아갔다. 국영기업의 사유화가 진행되어 사기업이 전체 기업의 95%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고 중소기업이 노비사드의 경제 발전의 주축을 이루었다. 제1은행, 보이보잔스카은행, 농업은행의 본사가 노비사드에 있으며 세르비아에서 세 번째로 큰 보험회사인 DDOR 노비사드도 노비사드에 있다. 그밖에 메이저 정유, 가스 회사와 밀을 거래하는 곡물 시장이 노비사드에 있다.
교통[편집]
노비사드에는 민간 공항이 없고 베오그라드 니콜라테슬라공항까지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다. 주된 대중교통 수단은 버스인데 JGSP 노비사드가 운영한다. 21개 시내 노선과 29개 교외 노선이 있다. 버스터미널은 자유거리의 북쪽 끝에 있는데 노비사드역과 인접해 있다. 원래 노비사드에는 트램이 있었는데 1958년에 선로가 철거되었다. 다뉴브강 위로 다리가 네 개 있다. 리버티교는 스렘스카카메니차와 시내를 연결하고 바라딘교와 제젤리교는 페트로바라딘과 시내를 연결하며 2000년에 지어진 도로-기차교는 주로 기차와 대형트럭이 이용한다. 노비사드항은 시 외곽에 있는데 세르비아에서 가장 큰 화물항이다.
관광[편집]
세르비아 국립극장은 남슬라브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으로 1861년 노비사드에 지어졌다. 노비사드는 오늘날 베오그라드에 이어 세르비아에서 두 번째로 큰 문화 중심지다. 많은 문화 행사와 음악 콘서트가 노비사드에서 열린다. 2000년 이후로 노비사드에서는 유럽에서 가장 큰 여름 음악축제인 EXIT 축제가 열린다.
세르비아 패션위크라 불리는 행사는 미술인, 음악인, 실내장식가, 멀티미디어 전문가, 건축가들의 작품을 전시한다. 세르비아 국립극장 외에 노비사드극장, 청년극장, 노비사드문화센터 등이 있다.
노비사드에는 많은 공립과 사립의 박물관, 미술관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1847년에 세워진 보이보디나 박물관으로 고대 이래의 세르비아 문화와 보이보디나 역사를 보여주는 소장품을 갖고 있다. 다뉴브강 동쪽 페트로바라딘 요새에 있는 노비사드박물관은 옛 요새의 역사를 보여주는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마티차스릅스카 갤러리는 노비사드에서 가장 큰 전시 공간이다.
2000년 이후로 노비사드를 찾는 관광객이 매년 꾸준히 증가했다. 7월에 열리는 EXIT 음악축제에는 유럽 전역에서 온 젊은이들로 도시가 붐빈다. 2017년에는 60개국에서 20만 명이 축제에 와서 35개 콘서트를 지켜보았다.
매년 5월 노비사드는 농업쇼가 펼쳐지는데 2005년에는 60만 명이 찾아왔다. 도심 한복판 바라딘교 근처의 관광객 선착장에는 다뉴브강을 따라 유럽을 여행하는 크루즈선이 기항한다. 노비사드에서 가장 잘 알려진 명소는 다뉴브강 동쪽의 페트로바라딘 요새다. 시내 중심가에는 기념물, 박물관, 카페, 상점 등이 밀집해 있다. 시내에서 약 20km 떨어진 남쪽에 프루슈카산 국립공원이 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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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노비사드〉, 《위키백과》
- "Novi Sad", Wikipedia
- 〈노비사드〉, 《요다위키》
- 〈노비사드(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동남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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