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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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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 시청
하노버 위치

하노버(독일어: Hannover)는 독일 북부, 라이네강(die Leine) 중류에 위치한 니더작센주의 주도이다. 하노버는 하노버-브라운슈바이크-괴팅겐-볼프수부르크 광역도시권에서 제일 크고 독일 전체에서는 13번째로 큰 도시이다. 독일 북부 지역에서는 함부르크브레멘에 이어 세 번째로 크다.[1]

개요[편집]

하노버는 라이네강과 이메강이 합쳐지는 지점에 있다. 북부 독일 저지(低地)의 기름진 평야에 있으며 니더작센주의 행정,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중세에는 한자동맹에 속하였으며 그 뒤 선제후령(選帝侯領), 이어서 하노버 왕국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각종 공업이 성하여 교외에는 고무, 화학, 자동차, 기계 등 공장이 있다. 시가지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심한 타격을 입었으나 전후에 부흥하였고 중심부의 구시청사, 마르크트 교회도 옛 모양대로 재건되었다. 남쪽에는 1901∼1913년에 건립된 장대한 신(新)시청사가 있으며 시가지 북서부에는 1831년에 창립된 공과대학, 동부에는 1778년 창립된 수의과대학이 있다. 남쪽 교외에는 광대한 박람회장이 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있었던 라이프치히 공업박람회에 대신하여 1947년 이래 해마다 대규모 공업박람회가 개최된다. 북쪽 교외에는 미텔란트 운하가 통한다. 시내에는 도처에 광대한 녹지대가 조성되어 있어 '초록 대도시'로 불린다. 하노버는 독일을 동서(베를린-루르 지역인 뒤셀도르프쾰른)와 남북(함부르크-프랑크푸르트, 슈투트가르트, 뮌헨)으로 잇는 도로철도가 지나가는 거점 도시이고 독일에서 9번째로 큰 공항이 있다. 매년 3월 세계 최대 정보통신산업박람회인 세빗(CeBIT) 전시회가 열린다. 근대 유럽에서 유행한 신와저리의 건축물이 하노버에도 있다. 또한 하노버는 동물원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하노버에는 도시의 중요성에 걸맞은 규모의 하노버 대학(Universität Hannover)이 있으며 왕궁으로 쓰이던 건물을 대학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주변에 과거 인공적으로 조성된 아름다운 공원들이 많다.[2]

역사[편집]

하노버 선제후국[편집]

하노버는 중세 시기 라인강 중류 남측에 세워졌다. 하노버라는 이름은 높은 강둑을 뜻하는 Honovere에서 온 것이다. 하노버는 작은 어촌에서 시작하여 13세기 무렵 규모가 큰 도시로 성장하였다. 하노버의 성장은 라인강을 이용한 무역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한자 동맹의 활동과 함께 하노버는 독일 북서부의 하르츠 산맥에서부터 한자 동맹의 중심 도시였던 브레멘에 이르기까지 독일 전역의 무역로를 연계하는 거점으로서 성장하였다. 14세기 도시에 3개의 성문을 갖춘 성곽과 함께 성당이 세워졌다. 독일의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하노버는 하르츠산맥 북부의 철과 은의 운송 거점이 되었다.

1636년 칼렌베르크 공국의 군주이자 브라운슈바이크의 영주였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게오르크가 그의 궁정을 하노버로 옮겼다. 그는 1692년 선제후가 되었고 그의 영지 역시 브라운슈바이크 선제후국으로 격상되었다. 하노버에 궁정이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하노버 선제후국으로 알려졌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게오르크는 하노버 왕가의 시조이다. 1714년 그의 손자 조지 1세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왕이 되어 하노버 선제후국과 동군연합을 이루게 된다.

이후 영국의 군주는 윌리엄 4세에 이르기까지 하노버 선제후를 겸하였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자 살리카 법의 규정때문에 여성이 선거후의 지위를 이을 수 없었다. 그러나 빅토리아의 부군이었던 작센공 앨버트는 니더작센 지역의 영주 지위를 유지하였다. 영국과 하노버 왕국은 1714년부터 1837년까지 동군연합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816년에서 1837년까지 하노버 왕국을 실제 통치한 군주는 부왕 캠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공이었다. 7년 전쟁 기간이었던 1757년 프랑스와 하노버 왕국 사이에 하스텐벡 전투가 일어났다.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군은 하노버를 함락시켰다.

하노버 왕국[편집]

1803년 7월 5일 아르틀렌부르크 협정에 의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3만여 프랑스군이 하노버로 진군하였고 하노버의 군대는 해산되었다. 당시 하노버 선제후국의 선제후이던 조지 3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많은 수의 군인들이 영국으로 이민하여 독일 근위군단을 구성하였다. 이후 독일 근위군단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와 싸운 유일한 독일 군대가 되었다. 이들은 후일 워털루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814년 빈 회의는 하노버 선제후국의 재건을 결의하였고 하노버 선제후국은 하노버 왕국으로 승격되어 부활한다. 하노버는 다시 하노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하노버 왕국의 영토는 라인강 동안까지 확장되었다. 1837년 윌리엄 4세의 뒤를 이어 빅토리아가 영국의 여왕으로 즉위하자 살리카 법에 의해 하노버 왕국의 군주 지위는 윌리엄 4세의 동생이었던 아우구스트에게 이양되었다. 1866년 하노버 왕국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와중에 프로이센에 합병되었다.

프로이센은 하노버를 공업 중심도시로 육성하였다. 그 결과 하노버는 독일의 산업화 기간인 그륀데르사이트 동안 산업 중심지가 되었다. 1871년 87,600여 명에 불과하던 하노버의 인구는 1912년 313,400여 명으로 늘어났다. 1872년 철도마차가 운행되기 시작하였고 1893년에는 노면 전차가 운행되었다. 1887년 에밀 베를리너의 축음기 발명 사기 사건이 있었다.

나치 독일[편집]

1937년 국가위원회 위원이었던 하노버 시장이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에 가입하였다. 이후 나치 독일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에 대한 인종 탄압이 있었다. 1938년 10월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484명이 폴란드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폴란드는 입국을 거부하였고 이들은 난민이 되어 폴란드 적십자에 수용되었다가 유럽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추방된 유대인 가운데에는 헤르셀 그린스펀도 있었다. 헤르셀 그린스펀은 하노버에서 추방당한 뒤 파리로 가 독일 외교관이었던 에른스트 폼 라스를 암살하게 된다. 폼 라스가 암살되자 나치는 보복을 명분으로 수정의 밤 사건을 일으켜 전국의 유대인에 대해 린치를 가한다. 이 사건의 여파로 하노버의 시나고그가 파괴되었다.

1941년 나치 독일은 유대인을 게토로 격리하였다. 하노버의 유대인 2,400명이 리가로 추방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1938년 하노버에는 4,800여명의 유대인이 있었으나 1945년 4월 10일 미군이 진군하였을 때 남아있는 유대인의 수는 1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하노버 오페라 광장에 유대인 박해 추모비가 있다.

제2차 세계 대전[편집]

하노버는 생산 중심지이자 교통 요지였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기간 동안 석유 작전과 같은 전략폭격의 주요 목표였다. 전쟁 기간중 88회의 폭격이 있었고 이로 인해 도시의 90%가 파괴되었으며 6천여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전쟁 후 하노버는 영국의 신탁통치 지역이 되었다. 1946년 일시적으로 하나의 주로 독립했다가 니더작센주에 흡수되어 주도가 되었다. 현재 하노버시의 시장은 평화를 위한 시장 회의의 부의장이다. 이 단체는 2020년까지 모든 핵무기를 없애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3]

교통[편집]

하노버는 철도노선과 자동차 도로(Autobahnen)의 주요 교차점으로, 동서(베를린-루르 지역/뒤셀도르프/콜린) 및 남북 방향(함부르크-프랑크푸르트/슈투트가르트/무니치)으로 유럽의 주요 도로들과 연결된다. 도시 북쪽에 랑엔하겐에 있는 하노버공항은 독일에서 규모로 9번째이다.

하노버 중앙역은 독일의 고속철도인 ICE의 거점 도시로 하노버-뷔르츠부르크 노선의 출발점이고 중단거리 철도인 하노버 S-Bahn의 거점으로 많은 국내외 도시를 연결한다. 촘촘한 버스와 전차(트램) 네트워크로 대중교통 체제를 구축하고 있는데 독특한 디자인의 TW 6000, TW 2000 전차가 눈길을 끌고 있다. 고속도로망은 A2와 A7이 하노버에서 교차한다.[4]

경제[편집]

하노버는 매년 60회 이상의 국내 및 국제 박람회를 개최할 정도로 산업박람회의 도시로 유명하다. 이 중 매년 3월 45만m²의 대규모 전시장에서 개최되는 세빗 전시회는 정보통신산업 분야에서 세계 최대 규모이다. 하노버에는 다양한 기업들이 활동하고 있다. 하노버-스퇴켄 지역에 있는 폭스바겐사는 상용차 공장을 가동하면서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다. 콕스바겐은 타이어 및 자동차부품회사인 콘티넨탈사와 함께 화력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다. 오디오 회사인 젠하이저와 TUI 행사가 이곳에 본사를 두고 있다. 세계적인 재보험사인 하노버 리를 비롯해 탈랑크스, 콘코르디아(Concordia) 등 많은 보험회사들이 이곳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경관[편집]

하노버에서 제일 먼저 꼽히는 볼거리 중 하나는 헤렌하우젠 왕실 정원이다. 하노버 왕가가 남긴 정원들로 대 정원, 베르크가르텐, 게오르겐가르텐, 벨펜가르텐 등 4개의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정원은 유럽 내에서도 손꼽히는 바로크 양식의 정원으로 유럽에서 가장 높은 분수가 있다. 역사적인 건물인 정원 극장도 있어 뮤지컬 등이 공연된다.

역사박물관은 중세기부터 최근 전시회에 이르기까지 하노버의 역사를 담고 있는데 특히 1834년까지 영국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시기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가장 많은 4,000명의 회원을 거느린 케스트너게젤샤프트미술관은 고전 현대주의부터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케스트너박물관은 5,000개의 창문이 나있는 건물인데 고대 문화, 고대 이집트, 고시대 동전 등 4개 분야에서 6000년에 걸친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다. 니더작센 주립박물관은 11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유럽 미술품을 보여주는 갤러리를 비롯해 자연사관, 민속관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베르크가르텐은 대규모 수목원으로 발전했고 게오르겐가르텐과 벨펜가르텐은 영국식 정원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노버의 노이에스 라트하우스(시청 신청사)는 빌헬름 2세 독일 황제 시절 마치 성처럼 웅장하게 건축됐다. 전망대가 있는 97.7m의 시청 돔은 포물선 방향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 다른 곳과 다르다. 독일 내에서 알아주는 하노버 동물원은 잠베지, 고릴라 산, 정글 궁전 등 여러 테마 구역을 갖추고 있으며 독일에서는 첫 열대 수족관인 해양생물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구도심 지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는 14세기에 지어진 성 게오르기 앤드 야코비 마르크트키르헤 교회(Marktkirche St. Georgii et Jacobi)와 구 시청건물이 있다. 구도심 가장자리에 라이네 궁전과 아에기디엔 교회 잔해 등이 있어 전쟁과 폭력의 상흔을 상징하고 있다. 구도심 근처 칼레베르크 노이슈타트에는 바실리카 마이너 성당과 성 요한 루터 교회가 있다.[5]

지도[편집]

서유럽 국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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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하노버〉, 《위키백과》
  2. 하노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하노버〉, 《요다위키》
  4. 하노버(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5. 하노버〉,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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