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츠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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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츠와프(폴란드어: Wrocław, 독일어: Breslau, 문화어: 브로쯔와브)는 폴란드의 남서부 실레시아 지방에 있는 돌니실롱스크주의 주도이다. 오데르강(Odra)이 도시의 중앙을 관통하여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흐른다. 인구는 약 67만 명으로 폴란드 제4의 도시이다. 브로츠와프는 폴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 중 하나이며 큰 대학과 국제 학교, 성당 섬, 수많은 역사적 기념물 및 다채로운 시장 광장이 있다. 광장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이다.[1]
개요[편집]
브로츠와프는 폴란드 남서부에 있는 도시로 역사적으로 실레시아 지방의 중심 도시였다. 브로츠와프는 수데텐산맥에서 남쪽으로 약 40km, 발트해에서는 북쪽으로 약 350km 떨어져 있다. 10세기에 블라디슬라프 1세에 의해 하(下)슐레지엔의 중심으로서 건설되었다가 나중에 폴란드령이 되었으며 12세기부터 학술, 예술 및 상업의 중심으로서 번영하였다. 14세기부터는 보헤미아의 땅이 되었으며 1742년 이곳에서 체결된 평화조약으로 프로이센령이 되면서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1945년부터 다시 폴란드령으로 돌아갔다. 1702년 창립한 대학을 비롯하여 박물관, 음악극장 등이 있다. 브로츠와프는 폴란드 서부의 공업 중심지답게 버스, 열차, 가전, 화학, 전자, 제약 산업이 두루 발달했다. 브로츠와프 산업단지를 중심으로 첨단 소프트웨어 산업도 활발하다. 지멘스, 보쉬, 월풀, 노키아, 볼보, 휴렛패커드, IBM, 구글 등 많은 다국적 기업들이 거점으로 삼고 있다. 한국 LG그룹의 LG전자, LG화학, LG디스플레이 등이 진출해 가전제품과 전기차 배터리 등을 생산하고 있다. LG화학의 전기차 배터리 공장은 유럽 최대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브로츠와프시는 2010년 LG그룹을 위해 도로를 건설해 주고 ‘LG로(路)’라는 이름을 붙였다. 버스, 철도망이 브로츠와프와 폴란드, 유럽 각국을 연결해주고 있으며 국제공항(코페르니쿠스 공항)이 있다. 시내에 255km의 자전거길이 깔려 있고 2000여 대의 공유 자전거가 곳곳에 비치돼 있다. 주요 관광 명소는 도시 전체에 흩어져있는 작은 난쟁이 상으로, 2019년 기준으로 약 300개의 난쟁이가 있다. 브로츠와프의 시청은 또한 유명한 랜드마크이다. 그것은 13세기와 16세기 사이에 지어졌다.[2][3]
지리 및 기후[편집]
브로츠와프는 오데르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수데텐산맥에서 남쪽으로 약 40km, 발트해에서는 북쪽으로 약 350km 떨어져 있다. 습윤 대륙성 기후로 폴란드에서 가장 따뜻한 도시 중 하나이다. 기온은 연평균 9.04℃, 가장 추운 1월은 평균 영하 0.7℃, 더운 7월은 평균 18.9℃이다. 강수량은 연 534mm이다. 브로츠와프는 보헤미아 · 오스트리아 · 프러시아의 전통에 영향을 받은 건축물들이 한데 섞인, 유럽에서도 독특한 복합 문화유산의 도시이다. 브로츠와프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이자 원래 섬이었던 오스트루프 툼스키(성당의 섬)는 10세기 중반에 지어진 대성당을 비롯, 수많은 성당 · 교회가 밀집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1911~1913년 독일 건축가 막스 베르크가 설계한 ‘100주년 홀’은 세계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건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2006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역사[편집]
브로츠와프는 고대부터 필수 장신구 재료인 호박(琥珀)을 나르던 ‘호박의 길’과 ‘왕의 길’의 두 무역로가 교차하는 교통요지로 유명했다. 중세 이래 폴란드 왕국,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합스부르크 군주국, 프로이센 제국, 독일 등이 지배권을 다투며 뺏고 빼앗기던 도시였다. 브로츠와프라는 명칭은 10세기 초 이 지역을 다스리던 보헤미아 공작이자 체코 왕족 브라티스와프 1세(재위 915~921)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985년 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1세가 이곳을 포함한 실레지아 지방을 정복함으로써 최초로 폴란드화가 시작되었다.
보헤미아 공국은 1038년 브로츠와프를 다시 점령했고, 1054년에는 폴란드 왕국이 이를 되찾는 등 엎치락뒤치락했다. 1241년 몽골군의 제1차 폴란드 침공이 진행될 때는 주민들이 전략적으로 도시를 모두 불태우고 떠나버리기도 했다.
13세기 중엽부터 독일계 이주자가 증가하기 시작해 브로츠와프의 독일어 이름인 ‘브레슬라우(Breslau)’가 문헌에 최초로 등장한다. 서기 985년 이후 350년간 주로 폴란드 왕국이 지배권을 행사했던 브로츠와프는 헨리 6세 공작의 죽음을 계기로 1335년 신성로마제국의 일부인 보헤미아 왕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어 1469~1490년에는 헝가리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1526년에 브로츠와프의 지배권은 다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에 넘어갔다. 16세기 내내 유럽을 뒤흔든 종교개혁 열풍에서 브로츠와프도 벗어나지 못했다. 시민 다수는 개신교를 받아들였으나, 17세기 들어 보헤미아 왕을 겸한 신성로마제국의 페르디난드 2세 황제는 가톨릭교도로 개신교를 억누르는 정책을 폈다. 이에 보헤미아, 오스트리아의 개신교 귀족들이 반발해 중세 최후의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이 시작됐다.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등이 전쟁에 개입하고 페스트가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30년 전쟁 동안 브로츠와프 시민 4만 명 중 1만 8,000여 명이 페스트로 사망했다.
1742년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 왕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을 틈타 브로츠와프를 비롯한 실레지아 지역 대부분을 합병했다. 실레지아(독일어 슐레지엔)를 놓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벌인 ‘실레지아 전쟁’은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면서 프로이센이 슐레지엔 지역을 공식적으로 확보했다.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브로츠와프는 나폴레옹 황제의 지원으로 남서 독일 16개국이 결성한 라인동맹의 지배하에 있었다. 라인동맹에 속하면서 다른 독일 도시들과의 교역이 증가했고, 리넨(아마 섬유)과 면, 금속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811년에는 몇몇 대학의 이전 · 통합을 통해 실레지아 프레데릭 윌리엄 대학(현재의 브로츠와프 대학)이 세워져 과학과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됐다. 1871년 독일 통일 당시 브로츠와프(브레슬라우)는 독일 제국에서 6번째로 큰 도시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열린 파리 강화회의와 베르사유 조약 덕분에 폴란드는 123년 만에 독립을 이루었다. 그러나 브로츠와프는 폴란드에 귀속되지 않고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로 편입되어 프러시아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브로츠와프는 독일제국 시절 좌파 자유주의의 거점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1932년 선거에서 나치당은 브로츠와프에서 44%의 득표율을 올렸다. 이는 독일 전체 도시 중 세 번째로 높은 지지율이었다.
1933년 나치 제3제국이 처음 만든 유대인 강제수용소 중 하나인 KZ 뒤르고이 수용소가 브로츠와프 남부에 설치됐다. 브로츠와프는 제2차 세계대전 종반까지는 큰 전투나 연합군의 집중폭격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다. 그 때문에 폭격당한 다른 독일 도시에서 많은 독일인들이 이주해 왔다. 1944년에는 3만 명 이상의 폴란드인들이 바르샤바 봉기로 폐허가 된 바르샤바를 떠나 브로츠와프에 들어왔다.
소련군은 1945년 2월부터 3개월 간 브로츠와프를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다. 이 전투로 도시의 절반이 파괴되었고 민간인만 약 4만 명이 사망했다. 1945년 7월 포츠담회담 결과 폴란드는 동쪽 영토를 소련에 내주는 대신 하실레지아 등 서쪽의 독일 영토 일부를 확보하게 되었다. 브로츠와프는 다시 폴란드 영토가 되었다.
폴란드는 이후 44년간 소련의 위성국가로 존속했다. 브로츠와프는 폴란드 민주화 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레흐 바웬사의 자유노조연대에 호응하는 반공산주의 지하조직 ‘투쟁연대(Fighting Solidarity)’와 ‘오렌지 대안운동(Orange Alternative)’이 1982년 브로츠와프에서 탄생해 1989년 민주화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오렌지 대안운동은 시내 벽에 쓰인 반체제 구호를 경찰이 페인트로 지워버린 자국 위에 다시 덧칠해 그린 난쟁이(dwarf) 그림으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1989년 폴란드 민주화 이후 브로츠와프는 폴란드 중공업과 첨단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다.[4]
경관[편집]
브로츠와프는 14곳의 박물관과 44곳의 공원을 보유하고 있다. 유럽 각국의 전통이 녹아든 복합문화 특성 덕분에 2016년 ‘유럽 문화수도’로 선정되었다. 또한 유수한 교육도시로서 30개 대학이 있고 대학생 인구만 13만 5,000명이다. 브로츠와프는 보헤미아 · 오스트리아 · 프러시아의 전통에 영향을 받은 건축물들이 한데 섞인, 유럽에서도 독특한 복합 문화유산의 도시이다. 브로츠와프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이자 원래 섬이었던 오스트루프 툼스키(성당의 섬)는 10세기 중반에 지어진 대성당을 비롯, 수많은 성당 · 교회가 밀집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1911~1913년 독일 건축가 막스 베르크가 설계한 ‘100주년 홀’은 세계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건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2006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1702년 설립된 브로츠와프대학교는 그동안 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가 1881년 발표한 ‘대학축전 서곡’은 자신이 브로츠와프대학(당시는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만든 곡이었다.
브로츠와프는 ‘난쟁이 도시’로도 잘 알려져 있다. 도시의 상징인 난쟁이 캐릭터는 공산 치하이던 1980년대 지하 저항조직 ‘오렌지 대안운동’이 경찰을 조롱하기 위해 그린 난쟁이 그림에서 비롯됐다. 폴란드가 민주화된 이후인 2001년 저항 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난쟁이 그림이 아닌 난쟁이 동상이 세워졌다.
이후 2005년부터는 시내 곳곳에 20~30cm 크기의 조그만 난쟁이 동상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동상의 주제도 여러 직업 시민의 모습이나 일상 활동 등으로 다양해졌다. 현재 약 400개의 동상이 있으며, 관광객들은 전용 지도나 휴대전화 앱을 통해 ‘난쟁이 찾기’를 즐기고 있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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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브로츠와프〉, 《위키백과》
- ↑ 〈브로츠와프〉, 《나무위키》
- ↑ 〈브로츠와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브로츠와프〉, 《요다위키》
- ↑ 〈브로츠와프(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 〈브로츠와프〉, 《위키백과》
- 〈브로츠와프〉, 《나무위키》
- 〈브로츠와프〉, 《요다위키》
- 〈브로츠와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브로츠와프(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