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타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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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타이시(조지아어: ქუთაისი, 영어: Kutaisi)는 조지아 이메레티 지역에 위치한 도시이다. 인구는 약 14만 명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적으로 거주된 도시 중 하나로, 트빌리시와 바투미에 이어 조지아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전에는 그루지야 SSR 제2의 공업 도시였고, 자동차 공장 등이 유명했다.[1]
개요[편집]
쿠타이시는 트빌리시에서 서쪽으로 221km(137마일) 떨어진 리오니강변에 위치해 있으며 이메레티의 수도이다. 트빌리시와의 사이에 철도, 항공로가 통해 있다. 신흥공업도시로서 덤프트럭, 트랙터, 광산용 설비, 전기기기 등 공장과 교육, 농업 등의 전문학교 및 역사박물관이 있다. 기원전부터 알려진 도시이며 고대 그리스의 콜키스 왕국(혹은 콜히다 왕국), 기원전 6세기 ~ 기원전 2세기)의 수도였다. 고고학적인 증거가 쿠타이시가 콜키스 왕국의 수도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975년부터 1122년까지 조지아 왕국의 수도였고, 15세기 이후는 이메레티 왕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1810년에는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었다. 2012년 5월 26일 조지아 의회의사당이 트빌리시에서 쿠타이시로 이전했다. 2012년 10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쿠타이시는 조지아 정부의 분권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조지아 의회의 소재지였다. 마을에서 내려다보는 언덕에 있는 바그라티 대성당(11세기에 완성)이나, 근교의 겔라티 수도원이 유명하고, 2개 전부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다.[2]
지리 및 기후[편집]
쿠타이시는 리오니강 양쪽에 위치해 있으며, 해발 125~300m(410~984피트)에 자리하고 있다. 동쪽과 북동쪽으로는 북이메레티 구릉지대, 북쪽으로는 삼구랄리 산맥, 서쪽과 남쪽으로는 콜키스 평야에 접해 있다. 쿠타이시는 북동쪽과 북서쪽으로 낙엽수림에 둘러싸여 있다. 도시 외곽의 저지대는 주로 농업 지대이다. 도심에는 많은 정원이 있으며, 거리에는 높은 나무들이 줄지어 있다. 봄이 되면 인근 산의 눈이 녹기 시작하면서 도시 중앙의 리오니강의 물소리가 멀리까지 들린다.
쿠타이시는 습윤 아열대 기후(Cfa)를 가지고 있으며, 가을과 겨울철에는 콜키스 평야의 특징인 뚜렷한 해안, 몬순 흐름이 나타난다. 여름은 대체로 덥고, 겨울은 습하고 시원하다. 도시의 연평균 기온은 14.8°C(58.6°F)이다. 1월은 평균 기온이 5.4°C(41.7°F)로 가장 추운 달이며, 8월은 평균 기온이 24.7°C(76.5°F)로 가장 더운 달이다. 기록된 최저 기온은 -17.0°C(1.4°F)이며, 최고 기온은 2000년 7월 30일에 기록된 43.1°C(109.6°F)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약 1,500mm(59.06인치)이다. 비는 연중 어느 계절에나 내릴 수 있다. 겨울에는 종종 30cm(12인치) 이상의 무거운 눈이 내리지만, 눈 덮임은 보통 일주일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눈이 쌓이는 날은 연간 약 15.5일 정도이다. 여름에는 인근 산에서 내려오는 강한 동풍이 자주 발생한다.[3]
역사[편집]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도시는 기원전 6세기에서 5세기 동안 콜키스의 수도로 기능했다. 그리스 서사시 아르고나우티카에서 제이슨과 아르고호의 모험을 다룬 작가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는 쿠타이시를 그들의 최종 목적지이자 왕 아이에테스의 거처로 여겼다고 한다.
이후 쿠타이시는 라지카 왕국의 수도였으나, 잠시 동안 아랍인들에게 점령되었다. 736년에 아랍의 서부 조지아 침공은 아브하즈인들이 라지카와 이베리아 동맹군과 함께 격퇴했다. 786년경, 레온 2세는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얻고 수도를 쿠타이시로 옮겨 라지카와 아바스기아를 왕조 연합을 통해 통합했다. 이는 11세기에 조지아 왕국의 통합으로 이어졌다.
1008년부터 1122년까지 쿠타이시는 조지아 연합 왕국의 수도였으며, 15세기부터 1810년까지는 이메레티 왕국의 수도였다. 1508년, 이 도시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2세의 아들 셀림 1세에 의해 정복되었다.
17세기 동안 이메레티의 왕들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러시아 제국에 많은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오스만과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아 모든 요청을 무시했다. 1768년, 예카테리나 대제의 통치 기간에야 비로소 고틀리프 하인리히 토틀레벤 장군의 군대가 조지아의 헤라클리우스 2세 왕의 군대에 합류하여, 러시아의 도움으로 오스만이 점령한 남부 조지아 땅을 재정복하려 했다. 토틀레벤은 1770년 8월 6일 이메레티의 솔로몬 1세 왕이 그의 수도 쿠타이시를 되찾는 것을 도왔다.
러시아-터키 전쟁은 1810년에 러시아 제국이 이메레티 왕국을 합병하면서 끝났다. 도시는 쿠타이시 우예즈드와 서부 조지아 대부분을 포함하는 더 큰 쿠타이시 주의 행정 수도였다.
쿠타이시는 1991년 4월 9일 조지아 독립 이전에 주요 산업 중심지였다. 독립 후 국가의 경제 붕괴가 뒤따랐고, 그 결과 많은 쿠타이시 주민들이 해외에서 일해야 했다. 나머지 인구는 소규모 무역에 종사하고 있다.
2011년, 조지아 대통령 미헤일 사카슈빌리는 의회를 쿠타이시로 이전하는 헌법 개정안에 서명했다. 2012년 5월 26일, 사카슈빌리는 쿠타이시에서 새로운 의회 건물을 개관했다. 이는 권력을 분산시키고 압하지야에 더 가까운 정치적 통제를 이동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지만, 의회를 소외시키고 새 건물 위치에 있던 소련 전쟁 기념비를 철거한 것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 이후 조지아의 꿈 정부는 2019년 1월부터 의회를 다시 트빌리시로 옮기는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켰다.[4]
바그라티 대성당[편집]
도미션 대성당, 또는 쿠타이시 대성당, 일반적으로 바그라티 대성당(조지아어: ბაგრატი; ბაგრატის ტაძარი 또는 바그라티스 타드자리)는 조지아의 이메레티주, 쿠타이시에 있는 11세기 주교좌 성당이다. 그 대성당에는 중세 조지아 건축 역사에서 걸작들이 흩어져 있고, 현재는 버려진 상태이다. 쿠타이시 도심의 경관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독특한 명소인 그 대성당은 우키메리오니 언덕의 꼭대기에 있다. 바그라트 3세 왕의 통치 기간 동안이었던 11세기 초반에 건축된 그 대성당은 왕의 이름에 기인해서 "바그라티" 대성당, 예를 들어, 바그라트의 대성당으로 칭하게 되었다. 북쪽 벽에 있는 비문은 "토로니콘 223", 예를 들어, 1003년에 바닥에 뉘인 모습을 드러냈다. 그 곳은 1692년에 이메레티 왕국을 침범한 오스만 병력들의 폭증으로 황폐화되었다. 그 사변은 현재 그 성당의 상태인 큐폴라과 천장의 붕괴를 초래했다.
1952년에 고고학적 연구 뿐만 아니라, 보존과 복원 작업도 시작되어 아직도 진행 중에 있다. 바그라티 대성당은 겔라티 수도원과 함께 유네스코에 의해 단일 실체로 세계 문화 유산 목록에 포함되었다. 2001년에, 그 대성당은 조지아 정교회에 반환 되었다. 그 대성당은 현재 전례 봉사가 제한되어 있지만 많은 성지 순례자들과 관광객들을 매료시킨다. 그 성당은 또한 종종 쿠타이시시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며, 주요 관광 명소 가운데 한 곳으로 유명하다. 2010년 7월에 유네스코는 바그라티 대성당을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에 등록했다. 그리고 복원을 그만 둘 것을 요구했다. 2012년 5월에는 복원이 유네스코의 지침과는 반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확인됐다. 유네스코는 2017년에 바그라티 대성당을 세계유산 목록에서 제외시켰다.[5]
겔라티 수도원[편집]
겔라티 수도원(Gelati Monastery)은 조지아 서부의 이메레티의 쿠타이시 근교에 있는 수도원 단지이다. 그 곳에는 조지아의 왕 건설자 다비트에 의해 설립된 수녀원의 성모 마리아 성당과 성 게오르게와 성 니콜라스의 13세기의 교회들이 있다. 겔라티 수도원은 오랜시간 조지아의 문화와 지성의 주요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그 곳에는 가장 저명한 조지아인 과학자들과 신학자들, 철학자들이 교수로 있는 아카데미가 있으며, 많은 교수들이 이전에 국외 정교회의 여러 수도원들이나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만간 아카데미에서 활동해 왔다. 과학자들 중에는 이오아네 페트리치나 아르센 이칼톨레이와 같이 저명한 학자들이 있다.
겔라티 아카데미서 펼쳐지는 광범위한 활동과 작품들 덕분에, 사람들은 그 곳은 "신헬라스" 그리고 "제2의 아토스"라고 부른다. 겔라티 수도원에는 굉장히 많은 수의 12~17세기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벽화들과 필사본들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카쿨리 3폭화는 1859년에 도난당하기 전까지 안치되어 있었다.
칼레티에는 조지아의 훌륭한 왕 가운데 한 명인 건설자 다비드(조지아어로 읽으면 다비트 사그마셰네벨리)의 능이 있다. 그의 묘소 가까이에는 1139년에 데메트레 1세 왕이 전리품으로 획득한 간자 출입문이 있다. 1994년, 갈라티 수도원은 국제 연합 교육 과학 문화 기구(UNESCO)에 의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 유산은 장기간의 방치가 야기시킨 손상에 대하여 주의를 요하기 위해서 2008년 세계 기념물 기금에 의해 2008년 절멸 위기에 처한 세계 기념물 감시 목록의 100위 안에 선정되었다.[6]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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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쿠타이시〉, 《위키백과》
- 〈바그라티 대성당〉, 《위키백과》
- 〈겔라티 수도원〉, 《위키백과》
- "Kutaisi", Wikipedia
- 〈쿠타이시〉, 《요다위키》
- 〈쿠타이시(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서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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