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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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술(아람어: ܢܝܢܘܐ, 니네와)은 이라크 북부에 있는 도시이다. 니네와주의 주도이다. 이라크에서 바그다드 다음으로 두번째로 큰 도시이다. 고대 니네베 유적(遺跡)과 석유 생산으로 알려진 도시이다. 바그다드에 북서쪽으로 396키로 떨어진 지점에 있다. 도시는 티그리스 강변에 있고 다섯 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큰 강과 넓은 평야가 있어 곡식이나 과일이 풍성하게 자라며, 석유도 많이 매장되어 있다. 또한 옛날부터 모술은 대리석 생산으로 유명했다.
개요[편집]
역사[편집]
고대[편집]
639년경 우트바 이븐 파르카드 앗-술라미가 이끄는 이슬람 제국군이 니네베 및 멥실라를 점령했다. 기존의 니네베는 버려지고 있었기에 멥실라가 아랍어로 '이어줌'이란 뜻인 모술로 개칭되어 자지라 지역의 중심 도시 중 하나로 부상했다. 이슬람 지배 하에서 아시리아 정체성은 약화되었다. 9세기 후반, 압바스 왕조의 쇠퇴를 틈타 이샤크 빈 쿤다즈와 그의 아들 무함마드가 모술에서 자립했으나 893년 칼리파 알 무타디드가 수복했다.
10세기 들어 모술은 압바스 칼리파 하의 총독에서 세습 왕정으로 전환한 함단 왕조의 수도가 되어 번영했다. 968년 모술을 방문한 이븐 하우칼은 주로 쿠르드인이 거주하는 아름다운 도시라 기록하였다. 978년, 모술은 부와이 왕조의 아두드 앗 다울라에게 정복되었다. 다만 980년대 쿠르드계 마르완 왕조의 창건자 바드 빈 두스타크가 일대를 위협하자 부이 조는 현지인 사이에서 신망이 높은 함단 가문을 모술에 봉하여 대적하게 하였다.
함단 왕공 알 후세인과 이브라힘 형제가 도착한 직후 봉기가 일어나 부이 조의 총독이 축출되었고, 이렇게 복원된 함단 조는 주요 지지 세력이던 바누 우카일에게 지즈레와 누사이빈 등을 하사하였다. (989년) 이듬해 바드는 재차 모술로 남하했으나, 발라드 전투에서 수적으로 열세인 바누 우카일 군에게 패하여 전사하였다. 뒤이어 알 후세인과 이브라힘은 디야르바크르로 역공세에 나섰는데, 패배하고 전자는 사로잡혔다. 이브라힘은 아들 알리와 함께 누사이빈으로 피신했는데 우카일 부족장 무함마드 이븐 알 무사입에게 피살되었고, 후자는 모술을 장악하여 우카일 왕조를 세웠다.
991년, 부와이 왕조의 장군 자파르 알 핫자즈가 우카일 군을 격파하였다. 이듬해 체결된 휴전에서 우카일 왕조는 부와이 왕조에 복속했고, 영토 대부분을 유지했으나 모술은 넘겨야 했다. 996년에 우카일 왕조는 다시 모술을 장악하였다.
1127년 장기 왕조가 세워지고 모술을 수도로 정하면서 번영하였다. 1165년 모술을 방문한 유대 여행가 투델라의 벤자민은 7천의 유대인이 살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1182년, 살라흐 앗 딘은 모술을 포위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1183년 알레포를 정복한 그는 1185년 말, 재차 모술로 진군했으나 에미르 마수드 휘하 군민의 강력한 저항에 병 겹쳐 하란으로 철수했다. 이듬해 3월, 압바스 칼리파의 중재 하에 모술의 장기 왕조는 명목상 주군이 된 아이유브 왕조에게 필요시 군대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세기 이상 이어지던 장기 왕조는 1234년 용병대장 바드르 앗 딘 룰루가 찬탈하여 멸망했다.
10세기 들어 철과 철제 도구 및 용기들을 생산하던 모술은 13세기 들어 은으로 마감된 고급 동제 용기의 생산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본래 12세기, 은 부족에 직면한 호라산의 장인들에게서 시작한 기법은 12세기 중반 헤라트에서 발전한 후 모술로 유입되었다. 특히 1220년대 호라산 난민들을 수용하며 모술의 금속업은 급성장하였다. 모술의 은도금 유기는 그 화려한 장식 덕에 중세 이슬람 시기 동제 용기 중 가장 미학적이다고 평가되며, 당대에도 고가 명품으로 취급되었다.
12세기에는 특권층의 전유물이다 13세기 들어 상대적으로 대량 생산이 시작된 후에도 여전히 귀했고, 카샨의 도자기처럼 독보적인 특산물로 명성이 높았다. 모술의 금속장이들은 이슬람권에서 유일하게 사제 관계와 계약 관계를 기록으로 남긴 공동체였다. 제자들은 소형의 용기를 제작하여 스승의 평가를 받아야 했다. 이러한 모술의 은 도금 동제 용기들은 아미르 룰루가 다른 군주들과의 외교에 있어 의전 혹은 선물로 자주 활용할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다.
1262년 몽골제국은 모술을 포위, 9개월 간의 공성전 끝에 함락한 후 파괴하였다. 모술의 번영을 견인하던 금속업 역시 1250년대부터 장인들이 대거 다마스쿠스릏 거쳐 카이로로 이주하며 쇠퇴했다. 대신에 후세인 빈 무함마드를 필두로 3대째 이어진 모술 장인 가문이 맘루크 왕조 하의 시리아와 이집트를 새로운 금속업의 중심지로 부상시켰다. 14세기 초에는 라술 왕조 하의 예멘, 일 칸국 하의 파르스 및 서부 이란에도 모술의 은도금 유기 기법이 전수되었다.다만 모술의 금속업 역시 축소된 형태로 유지되었다. 14세기 일 칸국과 잘라이르 왕조 시기 모술은 점차 도시 규모를 회북했고, 바그다드와 달리 티무르의 파괴를 피하여 과거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모술은 15세기 백양 왕조를 거쳐 1508년 이스마일 1세가 점령하여 사파비 왕조령이 되었다. 1515년 셀림 1세의 일시 점령에 이어 1538년 쉴레이만 1세의 오스만 제국군이 점령하였고, 바그다드 및 바스라와 함께 이라크의 3대 거점이 되었다. 오스만 시기 모술은 7개의 성문과 거대한 성탑을 지닌 요새도시이자 명성 높은 마리스탄 (병원), 실내 시장 (카이사리야)를 갖추고 직물을 특산물로 하는 무역 도시로 발전하였다.
1622년, 이라크를 재정복한 아바스 1세는 카셈 술탄 아프샤르를 총독으로 봉했다. 1638년, 바그다드를 수복한 무라트 4세는 기존에 리와 (군)의 치소이던 모술을 독자적인 윌라야 (도)의 치소로 전환시켰다. 17-19세기 동안 모술은 평화와 높은 자치를 누리며 기존 아랍 색채를 유지했다.
18세기 들어 오스만 제국은 유럽 전선에 몰두하며 아랍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점차 잃어 갔다. 바그다드의 조지아계 맘루크 정권과 알레포의 아젬 가문처럼 모술에서는 잘릴리 가문이 호족으로 득세했다. 잘랄리 시기 모술은 유럽과 인도 및 이란을 잇는 교역 도시로써 번영하며 13세기 바드르 앗딘 룰루 시기의 영광을 회복했다. 잘랄리 총독들은 권세 과시 및 정당성 확보를 위해 학교, 모스크, 상점, 칸 (카라반사라이), 함맘 (공중목욕탕) 등의 건설 사업으로 도시의 인프라를 확대했다.
19세기 들어 중앙 집권화에 나선 오스만 제국은 1834년 현지인들의 총독 선출권을 박탈하여 잘릴리 및 우마리 가문 등 현지 호족들의 영향력을 꺾었다. 이후 바이락타르 메흐메트 파샤를 시작으로 (세력화를 막기 위해) 4년 전후의 짧은 임기의 비모술 출신의 총독들이 부임했고, 세율이나 행정 조직 등이 다른 제국 도시들과 통일되었다.
근대[편집]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통일 아랍국가로서 이라크가 영국의 보호 하에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고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튀르키예 공화국과 국경을 정할때, 모술을 포함한 북부 이라크 지역의 다수 민족이 튀르크멘 및 노가이 타타르 등 튀르크계 부족들과 쿠르드인임을 들어 민족자결주의원칙에 따라 튀르키예에 속한다는 사실을 확인받았으나, 영국 측에서는 이 지역에서 채굴되기 시작한 석유에 욕심을 들이고 있었고, 튀르키예측에서도 튀르크 민족국가를 형성하는데에 이 지역이 혼란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미적지근하게 나서면서 결국 1923년 로잔 조약 당시 튀르키예 측에서 영유권을 포기했다.
현대[편집]
1920년대 키르쿠크 등에서 석유가 발견된 후, 모술에는 이라크 북부의 석유를 튀르키예 및 시리아로 보내는 송유관과 타르를 정제하는 키우아라 공장이 들어섰다. 1967년에는 모술 대학교가 설립되었고, 70년대 이라크 군부를 모술 출신들이 주도할 정도로 교육열이 높았다.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 모술은 일부 폭격을 맞았지만 큰 피해는 없었다. 다만 1991년 쿠르드 봉기 후 비행 금지구역으로 설정되었고, 미국과 영국 공군의 감시 하에 놓였다. 사담 후세인 시기의 아랍화 정책에도 모술은 여전히 아랍, 아시리아, 쿠르드, 아르메니아, 튀르크멘, 야지디, 체르케스인 및 소수의 유대인 등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는 도시로 남았다.
2014년 6월 10일에 IS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그들이 지배하는 지역 가운데서는 가장 큰 도시였다. 2017년 7월 9일에 이라크군이 모술을 탈환이후 현재 이라크 정부군의 통제 아래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고 있다. 잔존 부비트랩들이 속속들이 제거되고 모술 내 교회가 다시 예배를 시작하고 시민들이 길거리에서 다시 마음껏 노래를 부르는 등 예전의 모습을 점차 되찾고 있다.
지리[편집]
모술은 중동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해발 223m에 위치해 있다. 모술의 남서쪽에는 시리아 사막이 있고 동쪽에는 자그로스 산맥이 있다.
기후는 다른 이라크 지역과 마찬가지로 건조기후이다. 주변은 대부분 사막이지만, 자그로스(Zagros)산맥의 영향을 받아 연평균 강수량은 400mm로 이라크 남부에 비해 많다. 여름은 건조하고 기온이 50℃까지 올라가는 극서지(極暑地)이며, 겨울은 영하로 내려가 연교차가 매우 크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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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아라비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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