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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펠젠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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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drn221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7월 16일 (목) 20:02 판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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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펠젠스타인(Lee Felsenstein)

리 펠젠스타인(Lee Felsenstein, 1945년 4월 27일 ~)은 개인용 컴퓨터 개발에 중심적 역할을 한 미국 컴퓨터 엔지니어로 프로세서 기술, 페니 휘슬 모뎀, 인텔 8080 기반 솔(SOL) 컴퓨터를 설계했다. 영숫자 비디오 디스플레이 디자인인 프로세서 기술 VDM-1 비디오 디스플레이 모듈 보드는 널리 복사되어 개인용 컴퓨터의 표준 디스플레이 아키텍처의 기초가 되었다. 홈브루 컴퓨터 클럽의 최초 멤버중 한 사람이자 최초의 대량 생산 휴대용 컴퓨터 인 오스본 1의 디자이너였다.

생애

리 펠젠스타인은 1945년에 미국 필라델피아의 유대계 공산주의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전자공학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보일 정도로 관심이 많았으며, 테크 스퀘어 9층의 엘리트 해커에 낄 자격이 충분할 만큼 똑똑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특별한 성장 배경 덕분에 그린블라트, 고스퍼와 같은 유형의 해커와는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가정생활은 불행했으며, 공산주의자인 부모로 인해 정치적인 관심이 높았다. 펠젠슈타인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중앙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UCB) 전자공학과에 입학해서는 교내 정치 활동에 관여했다. 리 펠젠스타인은 10대 당시 자유발언 운동에도 참여하였고 지하신문 편집자로도 활약했다. 결국 정부에 대해 적대적인 정치 활동을 기소를 당해 1964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서 열린 스프룰 홀 농성(Sproul Hall Sit)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펠젠슈타인은 이를 대표적인 지하신문 중 하나인 버클리 바브에 기고했다. 그 후, 암펙스에서 하급 엔지니어로 일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중퇴하였다가 몇 년 후에 전기 공학 및 컴퓨터 공학 학위를 받고 버클리 대학을 졸업했다. 1973년에는 에프레임 립킨, 마크 스즈파코프스키 등과 함께 커뮤니티 메모리 공동체를 개발했다. 이들의 꿈은 컴퓨터를 대중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즉, 컴퓨터를 대기업이나 정부와 군대가 대중들을 장학하는 것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컴퓨터를 사용해 즐기고, 탐구하고, 창조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이었다.

실제로, 리 펠젠스타인을 비롯한 메모리 공동체 멤버들은 레오폴드 레코드 가게에 컴퓨터 사용법을 알려주는 포스터와 함께, 모델33 텔레타이프를 설치했다. 시험 첫날부터 많은 시민이 단말기를 시험해 보고, 시스템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해보려고 시도했다. 모델33 텔레타이프 단말기가 레오폴드 가게에 설치된 최초의 5일 동안 1,434분 동안 사용되면서 151개의 새로운 항목이 입력되었다. 사람들은 컴퓨터를 통해 체스 상대자와 학습 파트너 등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레스토랑과 레코드 앨범에 대한 정보 등등 갖가지 서비스가 제공되었다. 하지만, 공동체가 진척됨에 따라 사용자들이 포스터에 써 놓지도 않은 새로운 응용까지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는 접근하기 쉬운 장소에 컴퓨터를 설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사회적 변혁을 촉진하고 첨단기술이 제공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접할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주는 것이었다. 또한, 리 펠젠스타인은 개인용 컴퓨터 개발을 목적으로 한 컴퓨터 지식 공유 네트워크인 홈브루 컴퓨터 클럽(Homebrew Computer Club)을 이끌었다. 이 모임에서 그는 공개 포럼의 혼란을 통제하기 위해 칠판 포인터를 사용하여 회의를 주관했다. 이 홈브루 컴퓨터클럽은 개인용 컴퓨터 시대를 여는데 정치적 기술적으로 많은 공헌을 했다.

리 펠젠스타인은 1976년 비디오 디스플레이 모듈을 장착한 타이프라이터처럼 생긴 인텔 8080을 내장한 새로운 형태의 컴퓨터를 발표했다. 이 컴퓨터는 솔로몬의 지혜를 담는다는 의미에서 솔(SOL) 컴퓨터라고 명명했다. 펠젠슈타인은 홈브루 컴퓨터 클럽이 설립된 직후에 신생 프로세서 테크놀로지 사에 디자인 컨설턴트로 입사했다. 그는 인텔 8800 마이크로컴퓨터의 비디오 디스플레이 모듈 및 VDM-1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터미널 시스템을 개발했다. 텔레비전에 부착된 VDM-1 회로판은 많은 취미 활동가들이 사용하는 유리 텔레타이프 터미널보다 훨씬 저렴했다. 이후, 펠젠슈타인은 홈브루 회원 고든 프렌치(Gordon French), 밥 마시(Bob Marsh)와 함께 케이스와 키보드로 완판된 최고의 마이크로컴퓨터 중 하나인 솔-20 컴퓨터를 개발했다. 1980년에는 아담 오스본과 함께 오스본 컴퓨터 코퍼레이션(Osborn Computer Corporation)을 설립했다. 또한, 1981년에 발표된 최초의 휴대용 컴퓨터인 오스본(Osborne 1)의 디자인 개발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 오스본 컴퓨터는 2,000달러 이하의 가격으로 모니터, 입출력 포트 등을 모두 갖춘 최초의 휴대용 컴퓨터였다. 리 펠젠스타인은 솔 컴퓨터와 오스본1으로 번 막대한 자금을 메모리 공동체 재건에 쏟아부었다. 가정용 컴퓨터가 급속히 보급되면서, 메모리 공동체 정신, 공동 단말기 자체도 쓸모없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리 펠젠스타인은 컴퓨터는 대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메모리 공동체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리 펠젠스타인은 중앙 집중화된 시대와 컴퓨터 산업의 반해커적 통제를 없애버리고 컴퓨터와 해커들의 생각을 외면하는 세상을 변혁하려 애썼다. 그 후, 1994년에 프론티어 재단으로부터 전자 프론티어의 개척자로 선정되었고, 1998년에는 역사적 정보의 온라인 저장소로 프리 스피치 운동기록 보관소를 설립했다. 2003년에는 샌프란시스코의 자이재단과 함께 일 하면서 개발도상국의 외딴 마을에 설치할 수 있는 오픈소스 통신과 컴퓨터 시스템을 설계했다. 이 시스템은 페달발전에 의존하기 때문에 뉴욕 타임스 매거진에 의해 페달 동력 인터넷이라고 불렸다. 라오스에서 첫 번째 시스템을 설치하는 것은 성공적이지 못했으나, 그 디자인은 미국의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테스트 되어 인도에서 계속 개발되고 있다. 2003년, 리 펠젠스타인은 이 작품으로 기술 혁신 박물관의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2007년에는 이이타임스(EE Times) 매거진으로부터 창의적 우수성으로 편집자 선택 상을 받았다. 또한, 2016년 4월 16일에 컴퓨터 역사박물관의 연구원이 되었다.[1][2][3]

"여러분은 컴퓨터 안에 신이 있다고 생각하면 컴퓨터를 만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컴퓨터 안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 안에 신을 만들어 넣게 되는 것입니다." - 리 펠젠스타인[1]

약력

  • 1964년 : 공학 협동조합 연구 프로그램에 합류
  • 1967년 ~ 1971년 : 암펙스(Ampex) 주니어 엔지니어
  • 1972년 :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UCB) 전기 공학 및 컴퓨터 과학 학사 학위 취득
  • 1973년 : 커뮤니티 메모리(CM) 공동체 개발
  • 1975년 : 홈브루 컴퓨터 클럽(Homebrew Computer Club) 설립
  • 1976년 : 솔(SOL) 컴퓨터 개발
  • 1980년 : 오스본 컴퓨터(Osborne Computer) 설립
  • 1981년 : 휴대용 컴퓨터 오스본1(Osborne1)의 디자인 담당
  • 1994년 : 전자 프론티어 제단(EFF)에서 "전자 프론티어의 선구자"로 지명
  • 1998년 : 자유로운 연설 운동 기록 보관소(Free Speech Movement Archives)를 설립
  • 2003년 : 더 페달 파워드 인터넷(the Pedal-Powered Internet) 개발
  • 2003년 : 기술 혁신 박물관 (The Tech Museum of Innovation) 수상자로 선정
  • 2007년 : 이이타임스(EE Times) 매거진 편집자 선정 상을 수상
  • 2016년 : 컴퓨터 역사박물관(Computer History Museum) 연구원

주요 활동

페니 휘슬 모뎀

페니 휘슬 모뎀(Pennywhistle modem)은 1973년에, 리 펠젠스타인이 설계 구축한 초기 음향 커플러 모뎀으로 1976년 상용화되어 판매되었고, 당시 컴퓨터를 취미생활로 즐기던 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초기 모뎀 중 하나였다. 리 펠젠스타인은 기존보다 더 나은 버전을 설계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두 가지 주요 개선점을 발견했는데, 이는 비용이 현저히 덜 들고 보다 신뢰할 수 있는 설계를 끌어냈다. 첫 번째 방법은 유용하지만, 알려진 선의 데이터 통신에 순수하게 사용되는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가변 보드 속도의 개념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설계의 핵심을 입증할 다른 개선사항은 들어오는 신호 자체를 기준 톤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엠펙스에서 일하는 동안 리 펠젠스타인은 신호가 데이터 비트 전송 사이에서 항상 원(one) 톤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새로운 디자인은 이러한 신호를 찾아 지역 위상 잠금 루프(PL)를 다시 동기화하는 데 사용했다. 시스템은 PLL에 의해 발생하는 원 전압을 콘덴서에 저장하고 임계 전압을 고정 오프셋으로 설정했다. 콘덴서는 천천히 재충전되어 다음 원 전압으로 재설정된다. 이러한 개선은 모뎀이 표류의 근원이 로컬이든 원격이든 관계없이 기준 톤의 변화를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국소적인 튜닝형 발진기의 필요성을 없애 시스템 가격을 낮췄다. 대부분 어쿠스틱 커플러 모뎀과 마찬가지로 페니 휘슬은 1980년대 초반부터 헤이스 스마트모뎀과 유사한 모델로 대체되었다.[4]

S-100 버스

S-100

1974년에 설계된 초기 컴퓨터 버스이다. S-100 버스는 마이크로컴퓨터 산업의 첫 산업 표준 확장 버스였다. S-100 버스는 병렬로 연결된 100핀 인쇄회로기판 엣지 커넥터의 패시브 백플레인이다. 이러한 커넥터에 연결된 중앙처리장치(CPU), 메모리 또는 I/O 인터페이스의 기능을 제공하는 5 × 10인치 크기의 회로 카드와 인텔 8080 마이크로프로세서가 S-100 버스에서 호스팅 된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였기 때문에 버스 신호 정의는 8080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스템의 정의에 근접하게 따른다. S-100 버스의 100개 노선은 전원, 데이터, 주소, 시계 및 제어의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러한 S-100 마이크로컴퓨터는 취미용 장난감에서 소기업용 워크스테이션에 이르기까지 게이머트를 운영했으며 IBM PC가 등장할 때까지 초기 가정용 컴퓨터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5]

솔-20 제작

솔-20

단말기 컴퓨터로 불리는 솔-20(SOL-20)은 최초의 일체형 개인형 컴퓨터이다. 솔-20은 키보드와 텔레비전 출력 기능이 내장된 최초의 완전 조립형 마이크로컴퓨터로서 훗날 출시되는 가정용 컴퓨터로 알려지게 된다. 이 디자인은 인텔 8080 기반의 마더보드, VDM-1 그래픽 카드, 키보드를 구동하는 3P+S I/O 카드, 프로그램 저장을 위한 카세트 데크 연결 회로가 결합한 것이다. 기계 뒤쪽에 있는 5개의 S-100 버스 슬롯을 통해 추가 확장이 가능했다. 초보적인 운영체제를 갖춘 스왑 가능한 (ROM)도 포함했다. 디자인은 파퓰러 일렉트로닉스의 편집장인 레 솔로몬(Les Solomon)이 제안했다. 그는 프로세서 테크놀로지의 밥 마쉬에게 알테어 8800과 함께 사용할 스마트 단말기를 설계할 수 있는지 물었다. 마쉬와 작업 공간을 공유한 리 펠젠스타인은 이전에 이런 터미널을 설계한 적이 있지만, 결코 건설하지 않았다. 현대 전자제품을 사용한 디자인을 재고하면서, 그들은 롬에 단말 프로그램이 있는 완전한 컴퓨터를 만드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라는 생각했다. 펠젠슈타인은 상자에 '솔로몬의 지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솔'이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솔은 1976년 7월에 호 퍼플 일렉트로닉스의 표지에 고품질 지능형 단말기로 등장했는데 처음에는 세 가지 버전으로 제공되었다. 키트 형태의 솔-PC 마더보드, 확장 슬롯이 없는 솔-10, 5개의 슬롯이 있는 솔-20이다. 1976년 8월에는 아틀란틱 시티에서 열린 퍼스널 컴퓨팅 쇼에 솔-20이 나갔고, 그 쇼는 성공적이었으며, 주문 잔고를 작성하는 데 1년이 걸렸다. 시스템들은 그해 말에 출하되기 시작했고 가장 기본적인 완전 조립 형태로 1,495달러에 팔린 확장형 솔-20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 회사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시스템 도면을 무료로 제공했다. 솔-20은 1979년까지 생산에 머물렀으며, 그때까지 약 12,000대의 기계가 판매되었다. 그 무렵, 애플투(Apple II), 코모도어 PET, TRS-80 등 '1977 삼위일체'가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일련의 실패한 신제품 소개가 프로세서 테크놀로지를 파산으로 몰고 갔다. 리 펠젠슈타인은 후에 휴대용 포맷으로 동일한 기본 디자인을 사용하여 성공적인 오스본 1 컴퓨터를 개발했다.[6]

홈브루 컴퓨터 클럽

홈브루 컴퓨터 클럽(Homebrew Computer Club)은 1975년 ~ 1977년에 만난 실리콘밸리에 있는 초기 컴퓨터 취미 생활자 클럽이다. 애플사의 창립자들을 포함하는, 몇몇 매우 높은 수준의 프로필을 지닌 해커들과 IT 기업가들이 클럽의 회원으로 나타났다. 리 펠젠스타인은 컴퓨터를 이용한 자유로운 네트워크 건설에 필요한 개인용 컴퓨터 개발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홈브루 컴퓨터 클럽을 이끌었다. 홈브루라는 말은 '집에서 만든' 또는 '자작의'라는 뜻이 담겨 있다. 1970년대는 반체제 운동과 히피 문화 속에서 컴퓨터 문화 역시 정치 사회적 특성을 강하게 보였다. 홈브루 컴퓨터 클럽의 진행은 75년부터 77년까지 리 펠젠스타인의 정치적 영향을 받았으나 구성원들은 엔지니어링 측면이 강한 그룹이었다. 이들은 모두 컴퓨터의 제작을 열심히 연구했으며 홈브루 컴퓨터 클럽의 회원들로부터 23개의 컴퓨터 회사가 탄생했다. 이들 중에는 지금의 닥터 돕스 저널(Dr. Dobb's Journal)과 같은 잡지사나 홈브루 컴퓨터 클럽의 회원이었던 스티브 잡스와 워즈니악의 애플 같은 회사도 포함된다. 오스본 컴퓨터나 크로멤코 같은 회사도 있었다. 리 펠젠스타인도 프로세서 테크놀로지사를 통해 자신이 설계한 SOL 컴퓨터를 판매했다. 당시 대부분의 마이크로컴퓨터 회사들은 폭발적인 판매 증가를 경험했다. 이로 인해 하드웨어 해커들은 대부분 부유해졌으나 상업적인 성공보다는 해커로서의 방식에 충실했다. 얼마 후, 폭발적인 성장이 끝난 후에 이들은 하나둘씩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홈브루 컴퓨터 클럽과 동시대의 초기 모임이었던 피플즈 컴퓨터의 창간호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컴퓨터는 대부분 민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중에게 해를 끼치는 데 쓰인다.
민중을 해방하는 게 아니라 민중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 모든 것을 변화시킬 때가 왔다. 우리는 필요하다."[7]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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