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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여만국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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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는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1602년에 이지조(李之澡)와 함께 중국에서 제작해 목판으로 찍어낸 세계 지도이다. 리치 지도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기존의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어느 정도 타파하게 해 주었다.

조선에선 숙종 34년(1708년) 관상감에서 모사하여 곤여도와 건상도가 8폭 병풍으로 제작되었는데, 초고본은 보물 제849호로 지정되어 서울대학교박물관이 소장중이며, 어람본은 광주(現 남양주) 봉선사에서 보관 중 1951년 화재로 유실되었고 2012년 실학박물관 주도로 남아있던 흑백사진을 복원되었다.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개요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곤여만국전도 8폭 병풍
봉선사 어람본 곤여만국전도 흑백사진.
1602년 북경판 곤여만국(교토대학도서관소장).
1708년 8월에 그린 회화식의 '곤여만국전도'는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보물 제849호).

곤여만국전도는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는 1602년(선조 35)에 이탈리아인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북경에서 제작한 것을 1708년(숙종 34) 조선에서 모사한 세계지도이다. 채색 필사본으로, 세로는 172㎝이고, 가로는 531㎝이다.

지도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 묵와랍니가(오세아니아+남극)를 나타내고 있고, 각지의 민족과 산물에 대해 지리지의 방식으로 서술하였다. 한국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한국은 간단하게 처리하고 역사적인 설명을 첨가하였다. 그러나 일본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그려졌고 동해의 일본 쪽을 일본해, 태평양 쪽은 소동양이라고 표기하였다. 또 타원형의 세계지도 바깥에는 남반구북반구의 모습, 아리스토 천체 구조론에 의한 구중천설, 일월식도, 천지의도 등이 그려져 있다.

"아시아" "일본 해" "적도" 등 유럽의 말이 중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이 지도는 조선에서도 필사된 뒤 목판인쇄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숙종 34년(1708) 관상감에서 제작한 〈곤여도병풍〉이다. 관상감에서는 이때 천문도와 함께 그려 〈건상도〉라 하여 짝을 이루었는데, 경기도 봉선사에 보관되어 있던 것이 한국전쟁 때 없어졌다가 최근 일본에서 발견되었다.

내용

이 지도는 전체 8폭 병풍으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6폭은 오르텔리우스 도법으로 그린 근대적 기법의 서양식 세계지도로서 경위도선이 그려져 있다. 제1폭에는 원도의 제작자인 마테오 리치(Ricci,M., 利瑪竇)가 1602년(선조 35)에 쓴 서문과 제8폭에는 지도를 모사하여 올릴 때 최석정(崔錫鼎)·이국화(李國華)·유우창(柳遇昌) 등이 1708년(숙종 34)에 쓴 서문이 있다.

그러나 다른 「곤여만국전도」에 없는 동물·배 등 각종 그림이 지도의 사방 여백과 지도 안 바다 등에 그려져 있어 이 지도를 '회입(繪入) 「곤여만국전도」'로 불린다. 그림이 그려진 회입 「곤여만국전도」는 중국 북경역사박물관(北京歷史博物館)에도 소장되어 있다.

한편 경기도 남양주시 봉선사(奉先寺)에도 있었으나, 6·25 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1년에 이 지도와 유사하며 조선에서 작성된 회입 「곤여만국전도」가 일본에도 있음이 보고되었으나 양식이 다른 지도로 밝혀졌다.「곤여만국전도」에 표현된 대륙의 윤곽을 보면, 오스트레일리아와 남극이 분리되지 않았으며 남북 아메리카도 상당히 부정확한 상태이다. 그러나 이 지도는 당시 중국·한국을 비롯한 동양의 지식인에게 서양의 지리학과 지도의 제작 수준, 서양 세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시각적으로 널리 알려주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그 외에 지도의 여백에는 적도·북반구·남반구 등의 그림과 해설 등 지구, 천문에 관한 지식들이 설명되어 있다.

제작과정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는 1552년 이탈리아 동부의 마체레타(Macerata)에서 태어나 열여섯 살 때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수회에 입회했다. 그 뒤 로마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던 중 독일의 수학자 클라비우스(Chritopher Clavius) 신부로부터 기하학을 비롯해 천문학, 지리학 등을 배웠다. 훗날 중국 선교에 긴요한 밑거름이 된 지도지구의, 해시계, 자명종 등의 제작법도 이때 터득했다.

리치는 1582년 중국 선교를 위해 마카오에 도착했다. 당시 명나라는 14대 만력제(萬曆帝)의 시대로 쇄국정책으로 인해 외국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국어를 익히며 때를 기다리던 리치는 이듬해 조경지부(肇慶知府) 왕반(王泮)의 호의로 동료 루지에리(M. Ruggieri)와 함께 불교식 승려로 위장하고 중국 땅을 밟았다.

좀처럼 중국인들의 호감을 사지 못하던 차에 왕반으로부터 세계지도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때다 싶은 리치는 중국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모든 지명을 한자로 표기한 세계지도를 만들었다. 이 지도가 1584년 중국에서 처음 제작한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이다. 이 지도가 좋은 반응을 얻자 그는 중국인들과의 교류와 선교활동에 지도를 적극 이용하게 된다.

1598년 난징에 정착하게 된 리치는 이름도 중국식으로 이마두(利瑪竇)라 바꾸고 유학자 행세를 하며 철저한 적응주의로 중국을 파고들었다. 1600년에 그는 난징 이부(吏部)의 고관인 오좌해(吳左海)의 요청으로 전에 제작했던 지도를 확대해 난징판 신해여지전도를 제작한다. 이때 그동안 익힌 중국어 실력을 발휘해 초판에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고 조선을 추가해 넣었다.

이 산해여지전도 제2판이 널리 알려지자 중국인들 사이에 그의 존재가 부상하게 되고 베이징에 들어갈 수 있는 소개장까지 받게 된다. 1601년 그는 그토록 염원하던 베이징에 도착해 황제에게 자명종과 프리즘, 양금, 천주상 등 서양의 진귀품을 진상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리치는 자명종 수리와 천문·역학에 관한 일로 베이징에 거주할 수 있는 황제의 재가를 받게 된다.

그로부터 리치는 중국의 학자들과 널리 교분을 쌓게 되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공부(工部)의 관리인 이지조(李之藻)다. 이지조는 리치가 제작한 세계지도를 면밀히 분석하고 그의 지도제작법이 옳다는 결론을 내린 뒤 새로운 세계지도 제작을 요청했다. 리치가 편찬하고 이지조가 판각(板刻)해 1602년에 완성한 지도가 바로 곤여만국전도이다. 이 지도는 산해여지전도보다 내용이 풍부할뿐더러 목판으로 제작해 대량 보급이 가능해졌다.

대서양·지중해, 지구·적도·경도·위도 등 지리 용어 리치가 고안

이 지도는 6폭으로 제작되어 전체 크기가 가로 414cm, 세로 179cm다. 지도 편찬에는 1570년 오르텔리우스(Ortelius)가 제작한 <세계의 무대>와 1595년 발간된 메르카토르 지도첩 등을 사용했지만, 동아시아 부분은 중국에서 수집한 중국과 조선지도, 일본 나가사키의 선교사로부터 제공받은 일본지도 등을 참조했다.

지도의 경위선은 아피아누스 도법(Apian projection)에서 유래된 의원통도법으로 전개된 것으로, 직선인 중앙 경선을 중심으로 모든 경선은 10°의 등간격으로 타원호를 이루며, 위선 역시 10°의 등간격의 직선을 이룬다. 그러나 측량되지 않은 지형의 모습은 정확성이 결여돼 보이지만 당시의 시도로서는 획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 남북아메리카 대륙은 그런대로 형태를 갖추고 있으나, 지도의 하단부는 미지의 남방대륙 메가라니카(Megaranika) 대륙이 가득 메우고 있다.

지도에는 지명 외에도 각종 설명주기와 간기, 발문 등이 잔뜩 기록되어 있는데, 전부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이같이 외국 지명과 지리, 천문 등 모든 용어를 리치가 한자로 번역했는데, 이 가운데 현재까지 관용적으로 쓰고 있는 대서양(大西洋)과 지중해(地中海) 등의 지명과 지구(地球), 적도(赤道), 경도(經度), 위도(緯度) 등의 지리 용어도 리치가 고안해 낸 것이다.

리치의 서문은 지도 중앙 하단 중앙 경선 왼쪽에 있고, 바로 오른쪽은 진민지(陣民志)의 발문이고, 그 아래는 양경순(楊景淳)의 발문이다. 이지조의 발문은 태평양 가운데 있고, 남태평양에는 오중명(吳中明)의 발문이 있다. 그 아래 주기는 총론횡도리본이다. 기광종(祁光宗)의 발문은 인도양에 있고, 그 밑의 주기는 태양출입적도위도의 도수표이다.

우측 제목 밑에는 총론으로 우주론과 지구 구체설을 설명하고, 위 그림은 해와 달, 오행성 등의 운행을 설명하는 구중천도(九重天圖)이고, 아래 그림은 지구의 24절기 변화를 나타낸 천지의도(天地義圖)다. 좌측의 설명주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 구조론에 근거하는 구중천설(九重天說)이고, 위 지도는 북반구도이고 그 우측의 작은 그림은 일월식도(日月蝕圖)이다. 아래 지도는 남반구도이고 그 우측의 작은 그림은 절기도(節氣圖)이다.

판본

베이징 제1판, 곤여만국전도

마테오 리치가 1602년에 베이징에서 이지조(李之藻)의 요청으로 제작하였다. 각각의 크기가 1.79×0.69미터인 여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지도는 현재 바티칸에 1부, 그리고 일본에 2부가 남아 있다.[출처 필요]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이광정(李光庭)과 권희(權憘)가 지도가 제작된 다음 해(1603년) 곤여만국전도를 구해 가지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나와 있다. 그러나 이때 가지고 온 지도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헌상판(獻上版) 곤여만국전도

황제가 베이징 제1판을 보고 12부를 비단에 인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지조가 목판을 가지고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 있었고, 각공이 몰래 만들었던 목판은 홍수 때에 크게 파손되었다. 그리하여 마테오 리치는 1608년에 파손된 목판을 보충하여 12부를 인쇄, 황제에게 헌상하였다.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현재 서울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곤여만국전도〉는 마테오 리치의 지도를 바탕으로 1708년(숙종 34년)에 왕명에 따라 관상감의 주관 하에 화가 김진여(金振汝)가 8쪽으로 구성하여 그린 것이다. 1985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849호로 지정되었다. 병풍 첫째 폭과 여덟째 폭에는 원래의 곤여만국전도에 있던 마테오 리치의 서문과, 왕명으로〈곤여만국전도〉 제작하게 된 경위를 적은 최석정의 서문이 이어진다. 2폭에서 6폭에 걸쳐 세계지도가 타원형으로 그려져 있고, 그 여백에는 구중천, 천지의, 북반구, 남반구 등 당시의 서양 천문지식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기괴한 모습의 동물과 탐험선 등이 그려져 있다.

특징

서양 지리학과 지리적 중화관의 타협

중국인은 수천 년 전부터 혈연적, 지리적, 문화적으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 지도에 표현된 세계의 모습은 분명 중국 중심의 세계관과는 모순됐다. 그래서 마테오 리치로서는 중국 대륙을 중앙에 그림으로써 중국인이 가진 지리적 중화관과의 충돌을 피했다.

현존하는 지도 중 처음으로 일본해(日本海)라고 표기된 지도

동해의 명칭은 〈곤여만국전도〉에서 일본해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명칭은 일본 근해라는 의미가 강하다는 분석도 있다.

새로운 회화적 표현

〈곤여만국전도〉에는 기존의 한국 고지도에서 볼 수 없던 특이한 수파묘가 표현되어 있다. 두 겹의 곡선들이 구불구불한 띠를 이루며 물결치면서 다른 곡선 띠들과 어우러져 마치 석쇠 비슷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또한 이 지도의 바다에는 항해 중인 선박이나 헤엄치며 떠다니는 바다 동물들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보존현황

현재 전 세계적으로 곤여만국전도의 판본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로마 바티칸박물관, 미국 미네소타대학, 일본의 미야기현립도서관(宮城縣立圖書館)과 교토대학도서관(京都大學圖書館) 소장본뿐이다. 우리나라에는 1603년(선조 36년)에 곤여만국전도가 들어왔으나 행방을 알 수 없고, 1708년(숙종 34년) 어명으로 화가 김진여(金振汝)가 그린 8폭 병풍으로 된 회화식 곤여만국전도가 서울대학교박물관에 남아 있다.

동영상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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