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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12일 (목) 17:32 판
모스 부호란 짧은 발신 전류와 긴 발신 전류를 적절히 조합하여 알파벳과 숫자를 표기한 것으로 기본적인 형태는 국제적으로 비슷하다. 미국의 발명가 새뮤얼 핀리 브리즈 모스가 고안하였으며, 1844년 최초로 미국의 볼티모어와 워싱턴DC 사이 전신 연락에 사용되었다.[1]
목차
개요
새뮤얼 핀리 브리즈 모스가 고안하여 1844년에 완성한 전신 기호로, 짧은 발신 전류와 긴 발신 전류만을 가지고 전신부호를 구성하여 문장을 구성하여 전송 할 수있게 하였다. 통신기술이 발달한 지금에도 가장 기초적인 비상통신수단으로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지금까지 라틴 문자(유럽 대륙이나 베트남어 등의 diacritic 포함), 한글, 한자, 주음부호, 가타카나, 현재 키릴 문자, 그리스 문자, 히브리 문자, 아랍 문자, 페르시아 문자, 태국 문자로 이루어진 모스 부호 체계가 있다.[2]
주요인물
새뮤얼 모스
1800년대에 미국에서 화가로 활동하던 새뮤얼 모스는 1837년 모스 전신기를 발명한 데 이어 독자적 알파벳 기호도 완성했다. 이후 이 기호를 개량해 만든 게 바로 모스 부호이다. 그는 평소 통신에 관심이 많았는데 1932년 어느 날, 유럽에서 배를타고 돌아오던 중 우연히 미국 과학자 찰스 잭슨이 사람들에게 전자석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을 듣게된다. 그 일을 계기로 모스는 전자석을 활용, 전신기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기계에 문외한이었던 그는 기계공 출신 베일과 함께 연구를 진행하고 결국 모스 전신기 개발에 성공했다. 모스 전신기는 전자석을 활용, 전류 길이를 변화시키며 파형 신호를 종이에 그려내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이후 알프레드 베일은 초기 모스 전신기를 보완, 연필이 아닌 철심을 달아 종이에 구멍을 뚫을 수 있게 했다. 또 복잡했던 기존 코드를 점과 선으로 단순화해 신호 해석 속도를 높였다.[3] 사실 그당시에 이미 전신기는 존재했다. 단지 알파벳 A부터 Z까지 26개에 달하는 문자를 보내는 데에는 효율성이 턱없이 부족했기에 모스는 ‘자신의 전신기를 만들며 어떻게 하면 더욱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까?’라는 고민을 늘 해왔고 결국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된다. 바로 점과 줄을 사용하면서 신호를 보낼 때 짧게 누르는 것과 길게 누르는 것을 조합해 보다 효율적인 메시지 전송이 가능하다는걸 깨달았다. 이는 사람들에게 모스 부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1844년 워싱턴과 볼티모어 사이에 64km의 전선이 연결되고, 이를 통해 ‘(What hath God wrought) 신은 무엇을 만드셨는가’라는 전문을 보내면서 모스는 전기 통신의 시대를 열게된다.[4]
역사
새뮤얼 모스가 모스 부호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맞지만, 독창적 아이디어는 아니었고, 사실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가로챈 것이었다. 전신을 실제로 발명한 사람은 물리학자이자 프린스턴 대학의 조지프 헨리 교수로 1831년에 발명했다. 그는 ‘전선을 통한 암호화된 전기 자극으로 의사 소통을 한다’ 라는, 전신의 기초적 개념을 고안했고 장치 실용화에 필요한 필수적 구조를 다 설계했다. 그러나 그는 무슨 이유에ㅔ서인지 특허를 신청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 대신 우리가 아는 모스가 그것을 가로채 자신의 이름으로 특허를 받았다. 모스는 헨리의 논문 대부분을 표절했으며 여의치 않을 때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헨리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헨리는 수년 동안 그를 격려하고 도왔지만 훗날 모스가 전신으로 엄청난 부자가 되고 명예를 쌓은 이후에는 자신의 멘토에게 진 빚을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2]
한국에서 모스 부호 개발 및 역사
한글 모스 부호를 개발한 사람은 김학우로, 함경북도 경흥 출신으로 외국어에 능통했고 1884년부터 1886년까지는 기기국위원과 전환국위원 등을 지냈다. 그러다 1884년에 일본에서 부산-나가사키 간 해저 전선을 개통시킨 것을 보고 고종에게 전신 가설을 건의하여 이를 받아들인 고종의 명령으로 전신 기술을 배우러 일본에 갔다. 그는 매일같이 전신 본국을 찾아가 연구하여 전신부호를 개발하였으며 이 당시에 한글 전신부호를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김학우가 만든 한글 전신부호는 1888년 조선전보총국이 설립되면서 <전보장정>에서 한글 전신부호의 모체로 채택되었고 이후 이 부호에‘ㅔ’와‘ㅐ’만 더 첨가하여 사용하게 되었다.[2]
형식
- 선의 길이는 점의 3배[5]
- 한 자를 형성하는 선과 점 사이의 간격은 1점과 같을 것[5]
- 문자와 문자의 간격은 3점과 같을 것[5]
- 어(語)와 어의 간격은 7점과 같을 것(국문의 경우 자(字)와 자 사이는 5점의 간격을 둔다)[5]
활용
사용사례
1965년 7월 베트남 작전 수행 중 포로가 돼 7년7개월 간 하노이 힐튼 으로 불리던 북베트남 수도 하노이의 미군 포로수용소에서 수용생활을 했다. 그는 66년 북베트남 정권이 미군의 잔학상을 알리려고 꾸민 TV 기자회견에 출연해 전쟁 포로에 대한 고문을 폭로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눈을 깜빡거리는 방법으로 모스부호로 고문(TORTURE)이란 단어를 표현했다. 베트남전 미군 포로에 대한 학대를 처음 증언한 사례였다. 뉴욕타임스는 포로로 지내면서 덴튼은 매일 밤 얻어 맞았고 끊임 없이 고문을 당하는가 하면 굶주림을 강요당했다. 4년 동안 독방에 감금됐고, 때로는 관 모양 상자에 갇히기도 했다고 전했다. 73년 석방된 그는 77년까지 미군 합동참모대학장을 지내고 소장으로 예편했다. 76년 포로 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한 책 지옥의 향연을 펴냈다. 미 NBC방송은 79년 이를 드라마로 만들기도 했다. 80년에는 전쟁 영웅 이미지를 등에 업고 국가안보를 강조하며 앨라배마주 연방 상원의원이 됐다. 112년 만에 앨라배마에서 공화당 출신으론 처음이었으며, 해군 장성 출신의 첫 연방상원 입성이기도 했다. 86년 재선에 실패한 뒤 덴튼 재단을 통해 빈곤국 지원 등 활동을 벌여왔다.[6]
시청각장애인 소통 가능하게 만든 앱
시청각장애인이 스마트폰에 모스부호를 터치하면 텍스트와 음성으로 바뀐다. 마찬가지로 비장애인이 텍스트나 음성을 입력하면 모스부호 진동으로 변환돼 시청각장애인의 스마트폰으로 전달된다. 시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앱)‘삼성 굿 바이브’의 원리다. 이는 모스부호와 스마트폰의 햅틱 기능을 결합해 간단한 스크린 터치만으로 시청각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의사소통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앱이다. 삼성전자 서남아총괄과 제일기획이 지난 4월부터 공동 개발에 들어가 8월 말 공식 출시했다. 2019년 9월 23일 제일기획에 따르면 이 앱이 인도를 중심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또 앱의 보급 확대를 목적으로 최근 제작, 공개한 디지털 동영상 ‘케어링 포 임파서블’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시청각장애인 소녀의 가족이 굿 바이브 앱을 통해 소통하고 유대감을 회복한다는 내용의 이 영상은 유튜브 공개 13일 만에 조회 수 1억 건을 돌파했다. 동영상에는 ‘대단한 시도이며 경의를 표한다’, ‘인류애를 다룬 내 생애 최고의 영상’ 등 6000개 이상의 칭찬 댓글이 이어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굿 바이브 앱을 더 많은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공익단체 ‘센스 인터내셔널’과 함께 인도의 아메다바드, 델리, 방갈로르 등에서 100여명의 시청각장애인, 교사를 대상으로 사용법 교육을 진행했다. 또 앱이 설치된 스마트폰을 제공하는 등 사업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아울러 지금은 갤럭시 스토어에서만 이 앱을 내려받을 수 있지만 다음달 초부터 구글 플레이스토어를 통해서도 이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국내에서도 영어 버전을 내려받아 사용할 수 있으며 삼성전자와 제일기획은 한글 버전도 개발 중에 있다.[7]
바코드와 QR코드
1974년 6월 26일 오전 8시를 조금 지난 시각, 미국 오하이오주 트로이에 있는 마시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기계음이 울려퍼졌다. 마트 직원 셰론 부캐넌이 ‘리글리스 주시 프루트 껌’ 10개들이 한 팩에 붙어있는 검은 줄무늬 스티커를 계산대 스캐너에 통과시킨 순간이었다. 한해 전 미국 슈퍼마켓 특별위원회가 표준 바코드인 세계상품코드를 식료품업계 표준으로 승인한지 약 1년만에 드디어 매장에서 실제로 사용이 이뤄진 것이었다. 버나드 실버와 조지프 우드랜드가 바코드 개발을 시작한지 26년, 특허권을 얻은지 22년만이었다. 마시 슈퍼마켓에 울려 퍼진 삑 소리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바코드의 실용화를 알리는 것이었던 동시에 유통업의 대혁명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마시 슈퍼마켓이 첫 바코드 실용화 점포로 선정된 데에는 스캐너와 계산기를 생산하는 내셔널 캐시 레지스터사가 오하이오주에 있었던 데다가, 저울 등을 생산하는 호바트 코퍼레이션의 본사가 트로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슈퍼마켓 운영에 필수적인 기술을 제공하는 두 회사의 협력 덕분에 마시 슈퍼마켓이 바코드 1호점이 된 것이다. 그리고 클라이드 도슨이란 이름의 직원이 테스트용으로 집어든 껌은 전 세계 표준 바코드 1호 상품이란 기록을 세우게 됐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 있다 하나는 마스크이고, 두 번째는 QR코드이다. 식당이나 커피숍, 관공서나 극장에 들어갈 때 등 하루에도 몇 번씩 휴대전화 화면의 QR코드를 감지기에 대고 삑 소리가 나야 입장허가를 받는 일이 일상이 됐다. QR은 신속대응이란 뜻을 가진 퀵 리스폰스의 약칭으로, 1994년 일본 덴소사가 처음 개발한 2차원 바코드이다. 줄무늬로 된 바코드와 달리 QR코드는 사각형 안에 방대한 정보를 담을 수있다는 게 최대 장점이다. 바코드가 가로 방향으로 밖에 정보를 담을 수 없었던 것에 비해, 세로와 가로 2차원으로 정보를 담을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QR코드의 어머니 격인 바코드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게 됐을까. 194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드렉셀대 대학원 전자엔지니어링학과에 다니던 버나드 실버는 지역 식품점 사장이 판매되는 제품을 빨리 계산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는 말을 우연히 들었다. 그는 친구 노먼 조지프 우드랜드와 함께 연구를 시작했다. 바코드가 줄무늬로 이뤄진데 대해선, 우드랜드가 모스 부호를 상품계산에 이용할 방법을 찾던 중 바닷가 모래사장에 앉아 손가락으로 줄을 긋는 장난을 하다가 영감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8]
각주
- ↑ 〈모스부호〉, 《위키백과》
- ↑ 2.0 2.1 2.2 〈모스 부호〉, 《나무위키》
- ↑ 〈모스 부호, 현대 통신 기술의 신호탄 쏘다〉, 《삼성 뉴스룸》, 2016-11-01
- ↑ 전기신문, 〈전기 통신의 시대를 열다‘사무엘 모스’〉, 《네이버 포스트》, 2018-07-11
- ↑ 5.0 5.1 5.2 5.3 E kok,〈모스부호 알아두기〉, 《네이버 블로그》, 2013-03-26
- ↑ 강승민 기자, 〈눈짓 모스부호로 고문 폭로 베트남전 미 포로〉, 《중앙일보》, 2014-04-01
- ↑ 윤태석 기자, 〈모스부호 원리로 시청각장애인 소통 가능하게 만든 앱 인기〉, 《한국일보》, 2019-09-12
- ↑ 푸른여우, 〈내가 몰랐던 역사 12-바코드는 어떻게 유통혁명을 일으켰나〉, 《티스토리》, 2021-06-07
참고자료
- 〈모스부호〉, 《위키백과》
- 〈모스 부호〉, 《나무위키》
- 〈모스 부호, 현대 통신 기술의 신호탄 쏘다〉, 《삼성 뉴스룸》, 2016-11-01
- 전기신문, 〈전기 통신의 시대를 열다‘사무엘 모스’〉, 《네이버 포스트》, 2018-07-11
- 강승민 기자, 〈눈짓 모스부호로 고문 폭로 베트남전 미 포로〉, 《중앙일보》, 2014-04-01
- 윤태석 기자, 〈모스부호 원리로 시청각장애인 소통 가능하게 만든 앱 인기〉, 《한국일보》, 2019-09-12
- 푸른여우, 〈내가 몰랐던 역사 12-바코드는 어떻게 유통혁명을 일으켰나〉, 《티스토리》, 2021-06-07
- E kok, 〈모스부호 알아두기〉, 《네이버 블로그》, 2013-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