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시
목포시(木浦市)는 대한민국 전라남도 서남부 무안반도 남단에 있는 시이다. 영산강 하구에 위치하여 남쪽은 영산강을 경계로 영암군 삼호읍과 마주하고, 북쪽과 동쪽은 무안군 삼향읍에 둘러싸여 있으며, 서쪽으로 황해를 통해 신안군의 여러 섬들과 물길로 연결된다. 1897년에 개항하였고, 일제강점기부터 목포항과 호남선의 목포역을 중심으로 도시가 번성하였다.
목차
개요
- 행정 단위: 대한민국 전라남도 도시
- 면적: 51.58km²
- 인구: 224,044명(2020년)
- 시청 소재지: 경기도 광명시 시청로 20
- 시장: 김종식(더불어민주당)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s://www.mokpo.go.kr/?main=true
지도
지명 유래
목포(木浦)라는 이름은 《조선왕조실록》의 태조실록과 《고려사》에 처음으로 문헌상 등장한다. 이 때문에 목포라는 지명은 적어도 고려 때부터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명의 유래에 관해서는 '목(木)'자 때문에 '나무'가 많은 포구라는 뜻이었을 것이라는 추측과 서해로부터 영산강을 타고 육지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포구라는 뜻으로 한자를 차자해 목포라고 썼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역사
일찍이 삼한 중 마한에 속해 있었으며 삼국 시대에는 백제의 물아혜(勿阿兮)군, 남북국시대 신라때에는 무주(武州)에 속했다. 고려 시대 946년에는 물량군(勿良郡)으로 개칭하였고, 995년에는 해양도 나주목 무안현에 속하였다. 목포 앞바다는 곡창지대이자 중국과도 멀지 않은 거리여서 고대부터 영산강 물줄기를 거슬러 나주에 이르는 교역로로 각광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고려 시대에 본격적으로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하는데 정확히는 왕건이 궁예 밑에 있던 태봉 시기의 일이다. 궁예세력에 참가하고 있었던 해양세력의 왕건은 견훤의 후백제를 밑에서 치고 올라가기 위해 나주를 점령하고자 목포에 도착해 나주 지역을 복속했다고 한다. 이때 장화왕후를 만나 혼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포와 나주 지역은 후삼국시대 재통일 과정에서 왕건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조선시대
이후 조선 시대에 들어 목포진이 설치됐다. 세종21년 1439년에는 목포 수군 만호진을 별개로 설치하여 인근 연안의 12개 도서를 관리하게 했다. 현재의 만호동은 진 일대를 기리고자 붙인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승리한 후 군선 재정비와 군량미 확보를 위해 목포와 고하도 앞에 수군진을 설치하여 108일 머무르기도 했다.
1895년 나주목과 무안현에서 독립하여 목포진 또는 목포영이라 하였고 군사 행정업무를 담당하였다. 만호청에는 외국인들이 주류하였다.
대한제국
목포가 개항한 것은 1897년 10월 1일로서 인천보다는 15년 뒤진 것이었지만 부산과 인천을 뺀다면 가장 이른 것이었으므로 상당히 빨랐다. 이는 지리적 요인 때문으로 목포는 후쿠오카나 나가사키에서 보면 중국 대륙을 두고 가운데 있었고 곡창지대인 호남의 물산을 집결, 유통하기 위해 일본은 목포 개항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개항이 되자 일본인들의 거류지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한편 자치기관이 설치됐다. 일본인들의 거류지는 항구가 바로 앞에 있는 현재의 유달동 일대였으며 국권침탈 전에는 일본 영사관이 유달동 인근에 있었다. 이 건물은 목포 문화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개항장에서 상행위를 할 수는 있었으나 내륙까지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목포 근처의 영산포를 시작해 논밭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 정부가 매겼던 세도 낮았던데다 일본의 논밭 가격의 십분지 일이었기에 땅 매입을 위해 주력했다. 강압에 의해 개항되면서 곡창지대인 호남쌀이 집결되는 곳으로서 쌀을 일본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목포 개항 이후 국내 쌀값은 여섯 냥 하던 것이 1898년에는 14냥으로 뛰었다.
1898년~1903년에는 목포 부두 노동자들이 자본가에 대항하여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사건의 발단은 일본인이 고용한 조선 부두노동자들이 점심을 물로 채우고 저녁 늦게까지 작업을 해야 하는데 제대로 된 월급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05년 이후에는 유곽이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확장되면서 그 세력이 더욱 커져 1914년 지금의 금화동 지역으로 옮겨갔다. 이곳을 사쿠라마치(桜町)라고 불렀다. 금화동은 현재 여객선터미널 뒤편에 있는 수산업협동조합 일대로서 유달동과 근접하며 일본인 집단 거주지라 벚나무가 어우러져 있었다.
1910년 국권침탈(경술국치) 후 무안부에서 목포부로 개칭되어 19면을 관할하게 됐다.
일제강점기
목포 개항 이후 완도를 통해 이어지던 뱃길에 항상 목포가 끼게 되었고 목포-제주 사이를 정기적으로 항해하는 기선이 생겨났다. 1921년 설립된 순항선조합의 선박을 비롯해 인천, 부산, 여수를 오가던 배들은 목포를 중간 기착지로 삼아 항해를 이어나갔다.
1914년에는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대전-목포간 철로가 개설되었다. 그해 4월 1일 목포부를 분해하여, 도시 지역인 부내면만 목포부로 남기고, 부내면을 제외한 목포부의 나머지 면과 지도군 전역, 진도군 도초면·안창면·기좌면, 완도군 팔금면이 무안군으로 개편되었다. 이미 목포항의 기능을 곡물 수탈로 설정한 일제는 1920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을 설치했고 이 건물은 지금까지 남아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다.
철도, 조선, 수산가공업이 본격화되면서 조선인들은 각지에서 몰려들어 일거리를 찾았다. 일본인 거주지역에 가깝게 자리를 잡기 위해 작은 움막 따위를 지어 좁디 좁은 골목을 만들어 지냈다고 한다. 그 자리는 옛 공동묘지로서 조선총독부가 허가하면서 겨우 거주가 허락된 곳이었다. 각종 시설이 들어서는 한편 목포극장이 생겨났다. 서울을 비롯해 대도시에서 내국인이 소유하고 있던 극장은 서울의 단성사와 광주의 광주극장, 목포극장 세 곳뿐이었다.
1932년에는 무안군 일부 지역 편입으로 면적이 늘어나는 한편 인구 6만의 6대 도시로 성장했다. 당시 목포항에 모이던 물품은 一黑(김) , 三白(면화, 쌀, 소금)의 집산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전북에 쌀의 군산이 있다면 전남에는 면의 목포가 있다고 했는데, 1930년대 초 목면공장의 수가 20여 곳에 이르렀던 조선 제일의 목면 수출항이었다. 이 목면은 일본 간사이의 한신 지역으로 주로 팔려나갔다.
대한민국
1949년 목포부에서 목포시가 된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목포시는 계속적으로 면적이 늘어났다. 이는 1963년 무안군 지역 흡수와 간척에 따른 결과였다. 1973년, 1987년 무안군 삼향 일대 행정편입 및 1999년 하당신도심 2단계 매립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면적이 46.02km2에서 46.91km2로 늘어났으며 북항 근처의 바다 매립, 삼학도 인근과 충무동 신항 매립으로 면적이 47.92km2까지 늘어나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목포의 명소인 삼학도는 1940년도에 목포 앞바다에 있던 삼학도를 연륙하면서 68년부터 73년까지 추진된 간척공사로 육지로 변했다. 삼학도는 크게 대·중·소삼학도로 구분되며 2000년부터 복원사업을 실시했다. 시민단체의 졸속 행정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아 난항이 컸던 사업이었다. 그러나 2006년 공사 6년 만에 소삼학도를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 물길을 두고 다리를 통해 건너갈 수 있도록 3개의 섬으로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소삼학도와 중삼학도 사이가 5개의 다리로 연결돼 2007년 3월 1일부터 개방된 상태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목포지역에서도 수많은 학생운동이 일어났으며 2호광장에서 목포역까지 긴 대열을 이루며 시위가 진행되었다. 당시 목포역은 학생운동의 본산으로 궐기대회와 대책 마련에 나선 시민들이 모이던 장이었다.
목포의 성장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은 일제 강점기 호남선이 개통되고 항구로서 기능을 복합적으로 갖게 된 데 있었다. 호남선의 종착역으로서 오늘날까지 기능하고 있으며 2004년 4월 1일 KTX 개통 및 2015년 4월 2일 호남고속철도 1단계가 개통되어 서울과 목포가 2시간대로 가까워졌다. 또한 삼학도 복원 사업과 더불어 남항의 발전이 가속화되고 있으며 관광중점인 북항과 물류 전담인 신외항을 축으로 하여 항만 운영이 이뤄지고 있다.
21세기에 들어 목포의 매력으로 떠오른 부분은 목포 신항·무안 국제공항 건설 등 사회기반시설에 관한 투자촉진과 대불국가산업단지 조성으로 산업기반 시설이 확충되고, 전라남도청의 이전에 따른 남악신도시개발에 따른 영향으로 서남해안 시대의 중추 도시로 떠오를 수 있을 것 으로 보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의 발전으로 인해 상해, 홍콩 등 중국 동남권과의 연계발전 가능성이 주목되는 도시로 부각되고 있다.
지리
전라남도의 남서단 무안반도 남서쪽에 자리하며 1004개의 섬으로 이뤄진 신안군을 바로 앞에 두고 있다. 북동쪽으로는 무안군, 남쪽으로는 영암군을 바라본다. 영암군을 사이에 두고 영산강이 흘러가며 지금은 하굿둑이 설치되어 있다. 구도심 중심부에는 해발 228m인 유달산, 동쪽에는 입암산(121m),북쪽에는 양을산(156m)·대박산(156m)·지적봉(189m) 등으로 둘러 있고 남쪽은 영산강 하구에 면해 있다. 목포의 최고 자랑 중 하나인 유달산은 노령산맥의 끝자리에 해당하며 남도의 개골산이라는 별칭을 지닌 기암괴석의 산으로 1351년 고려 충정왕 3년에 봉수대가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군량미가 쌓여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는 일명 노적봉이 있으며, 영산강· 삼학도와 함께 이곳 사람들의 시정(詩情)을 돋우는 아름다운 경관을 갖추고 있다. 도심지의 중심에 산이 있다보니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언덕지대가 나타나기도 한다. 영산강 하구 주변에는 13개의 섬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경치를 펼칠 뿐 아니라 해일이 생긴다 해도 자연 방파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하여 목포를 천혜의 양항으로 기능하게 하였고 이는 목포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현재 목포의 지리는 대부분 간척에 의한 매립지로 이루어졌다. 삼학도를 비롯해 하당신도시, 북항 일대는 갯벌을 모두 개간한 것이며 인근 영암지역도 많은 매립지가 형성되었다. 과거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현재의 목포역 앞에 개울이 흘러 바닷물이 도시 내부로까지 흘러들어왔다고 한다. 시가지 주변의 영산강 하구에는 연변·북항·대반동·백련동·갓바위해안 등의 간석지가 있다. 이들 간석지는 육상으로부터의 계속적인 퇴적과 바닷물의 유입횟수가 줄면서 정착하게 된 염생식물 덕분에 퇴적물의 집적과 간척이 용이해져 농경지·주택지·공장부지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밖에도 고하도, 눌도, 달리도 등 6개의 유인도와 7개의 무인도를 포함하고 있다.
총 면적 50.08km2이며 일반대지가 21.7%, 전답이 24.5%, 임야가 25.7%, 기타 28.1%를 차지한다.
한편, 집중 호우로 큰 홍수가 났을 때에는 바닷물이 영산포까지 침범하였으나 영산강하굿둑 설치 후 영산포지역 피해는 해소된 반면, 목포권역의 수위가 높아져 피해를 늘렸다. 특히 2004년 7월 4일에 시작된 7호 태풍 민들레는 목포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오늘날까지 영산강하굿둑 개선사업에는 정부와 학자 및 시민단체들 사이에서는 많은 논란이 끊이지 않은 상태이다. 2010년부터 영산강 하구둑 배수갑문 확장 공사가 진행 중이다.
기후
목포기상대가 1904년 3월 주요 5곳과 함께 설치된 이후 3월 25일 목포에서 국내 최초로 기상관측을 실시했다. 1904년 3월 25일의 날씨는 구름이 낀 가운데 최저 3.4도, 최고기온은 8.4도였다고 한다.
2006년 기준 강수가 1년중 121일, 흐림이 98일로 강수일이 많은 편이다. 맑은 날은 66일에 해당하지만 최근 대한민국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목포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일조량이 높은 곳으로 인근 신안군과 함께 새로운 태양광발전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황사의 경우 평균 10일로서 서울, 인천의 11일과 비슷한 편이다.
목포는 온난 습윤 기후(쾨펜의 기후 구분 Cfa)에 속한다. 하계에는 해양성, 동계에는 대륙동안형으로 두 기후가 중첩되어 나타나기에 기상 관측에 있어 의의가 높은 지역에 해당한다. 눈이 내리는 날은 년간 37일, 영하인 날은 60일이며 겨울철에는 돌풍이나 기습적인 눈보라가 자주 발생한다. 이는 대륙성고기압 확장시 대한민국 서해안으로 기류가 타고 내려와 바로 만나는 지역에 목포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4년 7월 4일에 시작된 7호 태풍 민들레로 시작된 집중호우는 목포에 시간 당 64mm라는 100년 만의 기록적인 호우로 큰 피해를 입혔다.
시의 위치상 중국발 미세먼지가 통과하는 황해를 바로 만나는 지점에 있다. 이에 시는 각 동 주민센터를 중심으로 6개의 주요 미세먼지 측정 및 전파체계를 확립했다.
행정 구역
목포시는 23개의 행정동과 64개의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시 생활권은 원도심과 하당신도심, 그리고 남악신도시으로 나뉜다. 세부적으론 원도심이 북항지구와 용해지구가 목포역 근처의 구도심과 나뉘고, 하당지역은 버스터미널이 있는 석현지구와 백년대로를 중심인 하당지구로 나뉜다. 그리고 남악지역은 검찰청과 법원이 있는 옥암지구와 도청과 교육청, 경찰청이 있는 남악지구로 나뉜다. 다만 남악지구는 행정구역상 무안군에 속한다.
- 구도심권:
- 용당1동(光明1洞)
- 용당2동(光明2洞)
- 연동(光明3洞)
- 산정동
- 대성동
- 목원동
- 동명동
- 삼학동
- 만호동
- 유달동
- 죽교동
- 이로동
- 북항·용해도심권
- 북항동
- 용해동
- 연산동
- 원산동
- 하당도심권
- 상동
- 하당동
- 신흥동
- 삼향동
- 옥암동
- 부흥동
- 남악도심권
- 부주동
참고자료
- 〈목포시〉, 《위키백과》
같이 보기
- 넘겨주기 틀:한국 행정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