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
궁예(弓裔)는 후고구려를 건국한 왕(재위 901∼918)이다. 관제를 정비하고, 강원·경기·황해를 점령, 남서해 해상권도 장악했다.
개요[편집]
- 궁예는 전제군주로서 횡포가 심하였다. 성은 김. 몰락한 진골귀족의 후예로,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 또는 제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아마도 정권다툼에서 희생되어 지방으로 몰려난 것으로 여겨진다. 어려서 세달사(世達寺:興敎寺)의 승려(僧號는 善宗)가 되어 선종(善宗)이라 불렸다. 이와 같이 폭군으로 전락한 궁예는, 결국 그의 부하인 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 등이 왕건을 추대하자 도망가다 평강(平康)에서 백성에게 피살되었다.[1]
- 궁예는 신라 시대 왕가 서족(王家 庶族) 출신의 승려이자 태봉의 군주이다. 그는 신라 헌안왕 또는 경문왕과 후궁 사이에 태어난 서자(庶子)였다. 그의 본래 속세 성은 김(金)씨, 본관은 경주(慶州),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선종(善宗)이다. 918년 왕건에게 축출되었으므로 시호는 없다. 신라 왕실의 서자로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뒤 유모가 피신시켜 죽음을 모면했고 이후 세달사로 피신하여 승려가 됐다.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자립하여 사병을 모으고 장군이 되었다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했다. 뒤에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변경했으나 스스로를 미륵으로 자처하면서 신정적 전제 왕권을 강력히 추진해 호족들, 궁예의 태봉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 불교 세력, 유학자들과 갈등하던 중 918년 시중 왕건과 그를 추대한 태봉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 왕건을 강력히 지지한 옛 고구려계의 패서 지역 호족들과 왕건을 지지한 유학자들에게 축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궁예의 죽음으로 태봉은 멸망한다.[2]
- 궁예는 후삼국시대의 군웅이다. 태봉의 건국 군주이며 한국사 유일의 승려 군주이다. 궁예가 신라 임금의 아들인 왕자로 태어났다는 설도 있으며 통일신라의 일개 떠돌이 승려에 지나지 않았지만 자신의 무력적 소양과 인심을 끌어들이는 능력만을 바탕으로 점차 세력을 불려 당시 한반도 1/3을 평정하는 등 엄청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말년에 편집성 성격장애로 추측되는 정신질환으로 가혹한 폭정을 휘두르고 망상, 환각, 의심 등의 행동 이상을 거듭하는 무자비한 폭군으로 전락해 결국 측근이었던 왕건의 역성혁명으로 축출되어 최후를 맞았으며 궁예의 죽음으로 태봉은 멸망한다. 궁예가 꽤 능력있는 지도자이자 임금이었던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객관적으로 따지고 보면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나라를 건국했다는 업적은 한국사에서도 몇 안 되는 인물만이 이룩한 업적이며 후삼국시대 이후로 새 왕조 국가가 건국되는 과정은 모두 혁명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능력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현대의 한국사학자들 대부분은 궁예가 독자적으로 지은 불교 경전은 궁예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한 '사이비 경전'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종교학자들은 궁예가 치성광여래 신앙, 법상종의 미륵 신앙, 도교 사상의 영향을 복합적으로 받았던 인물이었으리라고 보고 있다. 형미와 같은 선사를 한때나마 중용했던 것을 보면 선종에도 관심을 가졌을 여지가 있다. 철원군에서는 군부(郡父) 대접을 받고 있다. 현대의 철원군 지역이 태봉의 수도가 되면서 이후 태봉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3]
- 궁예는 남북국 시대 강원도 철원 지역을 거점으로 태봉을 건국한 왕. 후고구려를 건국하여 후삼국 시대를 열었던 인물로, 당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을 정도로 맹위를 떨쳤으나, 말년에 미륵불을 자칭하면서 신정적(神政的) 전제주의를 펼친 결과 민심을 잃고 폐위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궁예(弓裔)의 성은 김(金)씨이고 아버지는 신라 제47대 헌안왕 또는 제48대 경문왕이다. 나라에 해가 될 아이라는 불길한 예언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죽을 위기에 놓였으나 유모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왕명을 받은 사자가 궁예를 누대 밖으로 집어던지자 유모가 숨어 있다가 몰래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유모의 손가락에 찔려 한쪽 눈을 잃었다고 한다. 현전하는 궁예의 가계 기록은 설화에 가깝지만, 『삼국사기』 편찬자인 김부식(金富軾)을 비롯한 현대의 연구자들은 이러한 설화를 토대로 궁예가 신라 왕실에 대하여 보인 강한 적개심을 설명하고 있다. 궁예는 경주를 멸도(滅都), 즉 멸망할 도성이라 칭하고 부석사(浮石寺)의 신라 왕 초상을 칼로 내리치는 등 유독 신라에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전한다. 『삼국사기』에는 왕위에서 쫓겨난 궁예가 산으로 도망쳐 방황하다가 부양(斧壤) 백성들에게 살해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과는 별개로 강원도에는 궁예의 죽음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과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에 걸쳐 있는 명성산(鳴聲山)에서 궁예가 살해당하였다는 것이다. 명성산은 우리말로 울음산인데, 궁예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여 크게 통곡한 곳이라는 의미에서 산의 이름을 울음산으로 지었다고 한다.[4]
궁예의 생애[편집]
- 궁예는 10대 시절 자신의 출신을 알고 세달사(世達寺)로 출가하여 스스로 선종(善宗)이라는 법호를 사용하였다. 진성여왕 대를 전후하여 신라 전역이 반란으로 혼란스러워지자 따로 무리를 모아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891년 죽주(竹州)의 기훤(箕萱)에게 의탁하였다. 그러나 기훤으로부터 멸시를 받자 얼마 후 북원의 양길(梁吉)[또는 양길(良吉)]에게 귀부하였고, 양길의 명령으로 북원 인근과 명주·주천 등 강원도의 거점을 공략하였다. 894년 양길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의 무리를 거느리게 된 궁예는 명주에 입성한 뒤 주변의 추대에 힘입어 장군을 자칭하였다. 신라가 쇠약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891년(진성여왕 5) 죽주(竹州:현 안성)의 산적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다가 892년에 북원(北原)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었다. 그 후 양길의 부하를 거느리고 강원·경기·황해 일대를 공략하여 많은 군사를 모으는 데 성공하자, 군도(群盜)를 배경으로 세력기반을 굳혔다. 또한 평산(平山)의 호족이던 박지윤(朴遲胤)의 귀부(歸附)와 해상무역에서 우위를 점하던 왕건가(王建家)의 협조로 군사력과 경제력을 얻게 되였다.
- 궁예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898년(효공왕 2) 양길을 타도하고 송악(松岳:현 개성)을 근거로 자립하여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하고, 다시 901년에 후고구려를 건국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개칭하고, 도읍을 철원(鐵圓)으로 옮기고 연호를 무태(武泰)에서 성책(聖冊)으로 고쳤다. 911년에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개칭하면서 연호도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으며, 914년에 다시 연호를 정개(政開)라 개칭하였다. 궁예는 국사를 총리하는 광평성(廣評省)을 비롯하여 병부(兵部) 등 10부와 9관 등의 관제를 정비하여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또한 강원·경기·황해의 대부분과 평안·충청 일부를 점령하고, 왕건(王建)과 제휴하여 진도(珍島)·나주(羅州)를 점령하여 남서해의 해상권도 장악하였다.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 일컫게 하고, 투항한 신라인을 모조리 죽이는 등 전제군주로서 횡포가 심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미륵신앙을 이용하였는데, 자신은 미륵불(彌勒佛), 두 아들은 보살(菩薩:靑光菩薩·神光菩薩)이라고 칭하였다. 915년에는 부인 강(康)씨와 두 아들을 살해한 후, 반궁예 세력에 대한 정치적 숙청이 이루어졌으며, 백성을 괴롭히는 등 호탕방일(豪蕩放逸)한 생활을 하였다.
궁예의 평가[편집]
- 《삼국사기》와 《고려사》는 대부분 궁예를 축출한 왕건 세력에 의해 편찬된 텍스트를 저본 자료로 삼은 것이며, 왕조 시대의 전형적인 흥망사관에 입각해 왕건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고 그 쿠데타로 인해 추방된 궁예가 얼마나 잔인하고 난폭했으며 의심을 많이 품었고 폭정을 일삼았다는 것만을 강조하는 면이 크나 고려사 홍유 열전과 고려사 세가 934년의 왕건의 조서 기록들에 따르면 말년에 가서야 폭군이 되었다고 말해주는 기록들도 있어서 그가 황제가 된 이후 시종일관 잔인하고 난폭하고 의심이 많다라는 이야기를 부정하는 이야기들도 있으므로 실제로는 재위 말년에 가서야 궁예가 비로서 폭군이 되었다는 것에 힌트를 주는 면도 있다. 궁예가 폭군으로 불리게 된 것은 고려왕조 측의 조작들이 당연히 있었겠지만, 그가 전제 왕권을 구축하기 위한 과정에서 너무나 무리하고 과격한 수들을 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궁예〉, 《위키백과》
- 〈궁예〉, 《나무위키》
- 〈궁예/생애〉, 《나무위키》
- 〈궁예(弓裔)〉, 《두산백과》
- 〈궁예〉, 《향토문화전자대전》
- 〈궁예 설화(弓裔 說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현동민 기자, 〈(오늘의 역사) '승려에서 왕까지' 궁예가 사망하다〉, 《인천투데이》, 2024-07-31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