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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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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송시열(宋時烈)은 조선 후기 문신 겸 학자이며 주자학의 대가이다.

개요[편집]

송시열은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 일원론적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에도 밝았다. 저서에 《송자대전(宋子大全)》 《우암집(尤庵集)》 《송서습유(宋書拾遺)》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정서분류(程書分類)》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심경석의(心經釋義)》 《사계선생행장(沙溪先生行狀)》 등이 있다.[1]

송시열의 생애[편집]

송시열(1607년 12월 30일~ 1689년 7월 19일)은 조선의 문신 겸 성리학자였다. 본관 은진(恩津).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 문정(文正). 아명 성뢰(聖賚). 1633년(인조 1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掌令)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1650년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김자점이 청나라에 조선이 북벌을 계획하고 있다고 밀고함으로써 북벌계획의 인물로 지목받아 청의 압력으로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1657년(효종 8) 효종에게 정유봉사(丁酉封事) 상소를 올려 그의 북벌정책을 비판하였고 이로 인해 효종의 양보를 이끌어 내었다. 1658년(효종 9) 찬선에 등용되고, 이조판서로 임명되어, 효종의 명을 받아 북벌계획을 담당하였으나 이는 명목상 추진하였을 뿐 실질적인 북벌정책에는 반대했다. 이듬해 효종이 급서하자 북벌계획은 곧바로 중지되었다. 그 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기년설(朞年說: 만 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68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1672년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하였다.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이듬해 덕원(德源)으로 유배,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장소가 옮겨졌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胃)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장파의 노론(老論)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그 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송시열에 대한 평가[편집]

송시열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정치적 공과와 사상적 위상에 대한 평가는 노론과 소론 · 남인 사이에서 벌어진 정쟁의 주요한 주제로 부각되었다. 각 붕당은 자신들의 성리학적 정통성을 입증하려는 의도 아래 송시열에 대한 포폄(褒貶)을 가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한 뒤 송시열의 관작이 복구되고, 수원 매곡서원(梅谷書院), 정읍 고암서원(考巖書院), 충주 누암서원(樓巖書院), 덕원 용진서원(龍津書院) 등 그를 제향한 서원들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1695년(숙종 21)에는 특명에 의하여 시장(諡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화양서원(華陽書院)의 건립과 사액이 이루어졌다.

1696년(숙종 22) 도봉서원(道峯書院)에 조광조와 함께 병향(並享)되었다. 그리고 1704년(숙종 30) 대보단 설립으로 송시열이 제기한 조선중화주의가 국가이념으로 확립된 뒤, 1716년(숙종 42) 숙종은 이른바 병신처분(丙申處分)을 통해 윤선거 · 윤증 부자의 관작을 추탈함으로써 노소 분기 이후 송시열과 노론의 정당성을 천명하였다.

숙종에 이어 즉위한 영조는 1749년(영조 25) 대보단을 증수하고 만력제와 더불어 홍무제와 숭정제를 추향(追享)하였으며, 병자호란 120주년이 되던 1756년(영조 32) 송시열을 문묘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정조는 세손 시절 주희와 송시열의 주요 저술을 함께 수록한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을 편찬하여, 주희의 정통적 계승자로서 송시열의 도통적 위상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즉위 직후 송시열을 종묘의 효종 묘정에 배향하고 화양서원에 치제(致祭) 하는 한편, 1785년(정조 9) 효종의 영릉이 있는 여주에 송시열 사당의 건립을 명하고 대로사(大老祠)라 사액하였다.

송시열은 주자학(朱子學)만의 최고의 학문으로 유일시 하였으며 예학을 중시했다. 그의 사상은 송익필, 김장생, 김집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다. 스승 김집의 뜻에 따라 대동법을 반대하였고 주자에 대한 절대적 신임이 지나쳐 그와 다른 사상이나 경전의 해석을 경계하였고 주자와 다른 사상은 사문난적으로 내몰았다. 이황(李滉)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政敵)이 많았고 스승 김집이 죽고 나자 서인의 영수가 되었으며 그의 문하에서 서인들이 추종하였다. 당시 중앙정치는 서인들의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의 왕권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아들인 효종 또한 서인들의 득세로 왕권이 취약했다. 따라서 왕권보다 강력한 집단 세력을 형성한 서인의 의해 정국이 주도되었다. 이로 인해 서인의 영수로 군림하였던 송시열의 인지도와 영향력은 인조, 효종, 현종, 숙종을 거치면서 점차 높아졌고 관직에 출사 않고 지방에 머물면서도 정국의 주도하는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문묘(文廟)·효종묘(孝宗廟)를 비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華陽書院), 여주의 대로사(大老祠), 수원의 매곡서원(梅谷書院)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고 조선 중기 가장 영향력이 높았던 정치가, 학자로 평가된다.

송자고택[편집]

송자고택은 대전광역시 동구 소제동에 있는 송시열이 살았던 조선시대 가옥이다. 1995년 5월 27일 대전광역시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송자고택은 우암 송시열이 1653년(효종 4)에 현재의 위치인 이곳에 직접 건축한 후 55세가 되는 1661년(현종 2)까지 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유서 깊은 고택이다. 원래는 이 부근 일대에 소재방죽과 기국정이 함께 있었다고 전하나 방죽은 후에 매몰되었고 기국정은 현재 남간정사 경내로 이전되어 보존되고 있다.

송자고택의 구조는 낮은 기단 위에 8각 네모뿔 또는 덤벙주초석 등 여러 종류의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는데 기둥부에는 간결한 양봉이 결구되어 있다. 가구는 앞뒤 평주 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 양편에 낮은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고 있는 5량집으로서 종량 위에는 제형대공을 세워 종도리와 함께 지붕의 하중을 받고 있다. 대전광역시 동구에는 송자고택 외에도 송시열을 기리는 우암사적공원이 있다.

송우암 신도비 및 묘소[편집]

송우암 신도비 및 묘소는 조선 중기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의 신도비와 묘소이다.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에 있는 조선 시대의 비석과 묘소는 조선 중기의 주자학을 신봉하며 정치 붕당인 노론(老論)의 영수(領袖)였던 송시열의 신도비와 묘소이다. 원래 묘소는 수원(水原) 무봉산(舞峰山:215m)에 있었으나, 1697년(숙종 23)에 지금의 장소로 이장하였다. 신도비는 1779년(정조 3) 청천리 묘소 아래에 세운 것으로 높이 2.5m이며 비문은 정조의 어필로 알려져 있다. 신도비를 보존하는 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기와로 지어졌다.

청주 송시열 부조묘[편집]

청주 송시열 부조묘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화동에 있는 사당으로 송시열(宋時烈)의 불천위(不遷位)를 모시고 있다. 불천위란 큰 공훈이 있다고 국가가 인정하여 4대 봉사(奉祀)가 지나도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서 영구히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이고, 불천위를 모시는 사당을 부조묘(不祧廟 )라고 한다. 원래의 사당은 없어지고, 현재는 증손 송영달(宋永達)의 집 안에 있다. 사당 안에는 송시열의 신위와 송시열이 73세 때 그린 영정 진본이 봉안되어 있다.

영동 송시열 유허비[편집]

영동 송시열 유허비는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원촌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석이다. 1977년 12월 7일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자 노론(老論)의 영수였던 우암(尤庵) 송시열의 유허비이다. 송시열이 이곳에 서재를 짓고 강학(講學)하였으며, 유허비는 1875년(고종 12) 후손과 유림들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원촌리 일대 한천팔경(寒泉八景)의 하나인 월류봉(月留峰)의 깎아지른 듯한 괴암과 송천 물굽이를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곳에 있으며, 규모는 높이 2m, 너비 70㎝, 두께 20㎝이다. 약 6.5㎡의 목조와가로 된 비각(碑閣) 내에 보호되어 있으며, 비문(碑文)에는 '우암 송선생 유허비(尤庵宋先生遺墟碑)'라고 씌어 있다. 송시열은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政敵)이 많았으나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묘(文廟)·효종묘(孝宗廟)를 비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華陽書院), 여주의 대로사(大老祠), 수원의 매곡서원(梅谷書院) 등 전국 각지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송시열(宋時烈,1607~1689)〉,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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