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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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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옥

허황옥(許黃玉)은 허황후(許皇后)라고도 하며, 김해 김씨(金海金氏)와 김해 허씨(金海 許氏)의 시조모이다.

개요[편집]

  • 허황옥은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왕후로, 허황후 또는 보주태후라고도 하며 슈리라트나(Princess Suriratna), 심바발람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아요디아의 공주로, 48년에 오빠 장유화상 및 수행원들과 배를 타고 가락국에 와서 왕후가 되었다. 거등왕을 비롯해 아들 10명을 낳았다. 그녀는 10명의 아들 중 2명에게 허씨 성을 쓰게 해달라고 수로왕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맏아들 거등(居登)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허황후의 뜻을 살려 허씨(許氏)로 사성(賜姓)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歸依)하여 하동칠불(河東七佛)로 성불(成佛)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후 어머니의 성을 따라 허씨 성을 사용하던 두 왕자로부터 한국의 허씨 성이 유래되어 김해 허씨로 이어지고 있다. 10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두었다. 이 중 남편인 수로왕에게 청하여 2명의 아들은 자신의 성을 따라 허씨(許氏) 성을 쓰게끔 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수로왕의 동의를 얻으니 2명의 아들은 허씨 성을 쓰게 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등장하지 않으나 1명의 딸이 더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가야의 불교 전래에 기여했다고 한다. 불교의 승려였던 친정 오빠 장유화상은 금관가야 지역에 장유암(長游庵)이란 사찰을 짓고 불상을 모셨으며 이후 가야지역에 불교가 전래되었라고 한다. 다만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장유암(長游庵) 경내에는 장유화상사리탑이 현존하고 있다. 장유화상의 사리탑은 1983년 7월 20일 경남도 문화재자료 31호로 등재되었다.[1]
  • 허황옥은 삼국시대 금관가야의 제1대 수로왕의 왕비이다. 허황후(許皇后)라고도 하며, 김해 김씨(金海金氏)·김해 허씨(金海許氏)의 시조모이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駕洛國記>에 따르면 본래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인데 부왕(父王)과 왕후가 꿈에 상제(上帝)의 명을 받아 공주를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이 되게 하였다. 공주는 많은 종자(從者)들을 데리고 김해 남쪽 해안에 이르렀다. 이에 수로왕은 유천간(留天干)·신귀간(神鬼干) 등 많은 신하들을 보내어 맞이하여 왕후로 삼았다 한다. 왕후는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으며 188년에 죽으니 나이 157세였다고 한다. 구지봉(龜旨峰)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는 바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龜山洞)의 고분이 허왕후의 능이라고 전하여 오고 있다. 그녀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것은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 윤색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설화는 남방아시아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시호는 보주태후(普州太后)이다.[2]
  • 허황옥은 '허황후', '허왕후'라고도 불리며 한국의 성씨 중 하나인 허씨의 시조이다.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나오지 않으며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만 등장하는 인물로 《삼국유사》에서는 고향이 인도 아유타야라고 기록했다. 금관국의 수로왕과 혼인해 아들 10명을 두었는데 2명에게 허씨 성을 주어 허씨 성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첫 두 아들은 김해 허씨가 되었고 여기서 더 갈라져 나머지 본관들이 생긴 식. 허씨 성을 물려받은 두 아들과 태자 거등왕을 제외한 아들 7명은 모두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경상남도 김해시에 수로왕비릉이 현존하며 김해시는 이러한 이유로 인도의 아요디아 시와 자매 결연을 맺었다. 아요디아 시가 위치한 우타르프라데시 주에서도 김해시가 속한 경상남도에 자매 결연 및 교류 협력을 제안한 적이 있다. 다만 후술되어있듯 그 실체에 관해선 여러 설들이 제기된다. 여담으로 인도 현지에서는 "슈리라트나(Suriratna), 심바발람"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으로 보인다. [3]

허황옥의 생애[편집]

  • 허황후(許皇后)라고도 하며,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시조모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허황옥은 본래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인데 부왕(父王)과 왕후가 꿈에 상제(上帝)의 명을 받아 공주를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이 되게 하였다. 공주는 많은 종자(從者)를 거느리고 김해 남쪽 해안에 이르렀다. 이에 수로왕은 유천간(留天干), 신귀간(神鬼干) 등 많은 신하들을 보내어 맞으며, 황후로 삼았다고 전한다. 황후는 태자 거등(居登)을 낳았으며, 188년에 죽으니 나이 157세였다고 한다.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龜山洞)의 고분이 허황후의 능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허황옥이 먼 곳에서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별로 없으나,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 이야기가 덧붙여졌다고 보아 본래의 시조설화가 윤색되었다는 견해가 많다.

허황옥신화[편집]

  •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허황옥은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이다. 본국에 있을 때 부모의 꿈에 상제(上帝)가 나타나 '가락국 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보내 등극케 하였으니 이 사람이야말로 성스러운 사람이다. 새로 나라를 다스리는데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공주를 보내어 짝을 삼게 하라.'라는 명이 내려 공주는 가락국으로 갔다. 이때 가락국에서는 신하들이 수로왕에게 배필이 없는 것을 걱정하였다. 이에 왕은 배필을 정하는 것이 하늘의 명이라며 유천간, 신귀간과 같은 구간(九干)에게 망산도에 가서 공주를 맞아 오게 하였다. 당시 공주는 열여섯 살이었고, 20여 명의 종자와 각종 패물을 가지고 수로왕에게 왔다. 김수로왕이 친히 밖으로 나가 공주를 맞이하여 궁궐로 돌아왔다. 그런데 허 황후가 가락국으로 갈 때 파도가 심하여 부왕은 풍랑을 잠재우는 신통력을 가진 석탑을 싣고 가게 하였다. 이 탑이 파사석탑(婆娑石塔)이다. 파사석탑은 닭의 볏에서 나오는 피를 바르면 흡수하는 성질이 있어서 경상남도 김해 지방의 돌과는 구별된다.
  • 허황옥이 가락국에 올 때 오라버니가 함께 왔는데 이름이 장유화상이다. 경남 김해의 장유면은 그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설화에는 김수로왕과 허황옥 사이에 일곱 아들과 두 딸이 있었다고 하며, 일곱 아들이 장유화상을 따라 수도하여 성불하였다는 설화가 칠불암 배경 설화로 전한다. 두 딸 가운데 하나는 탈해왕과 결혼하였고, 또 한 명은 바다 건너 왜의 여왕이 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장자가 김수로왕의 뒤를 이어 거등왕(居登王)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둘째 아들은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김해 허씨가 되었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가 서로 혼인을 꺼리는 풍속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허황옥의 도래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에 근거하여 공주의 도래 경로를 추적하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아유타국이 멸망한 후 그 왕족이 이동하여 허국(許國)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보주(普州)라는 곳에 머물렀으므로, 성씨를 허씨라 부르고 왕후의 시호를 보주태후라 지었음을 알려 준다.
  • 허황옥신화는 한국 문화사에서 불교의 유입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왜냐하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 때가 372년(소수림 2)인데, 『삼국유사』에는 허 황후가 불교 국가인 아유타에서 들어온 해가 A.D. 48년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 황후와 장유화상을 기리기 위해 지은 장유사가 있었다는 기록과 설화가 있고, 허황후와 함께 온 장유화상이 수도하면서 일곱 왕자를 성불시켰다는 <칠불암연기설화> 또한 있다. 허황후 도래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다면, 이 신화는 한국 불교 전래의 역사를 약 300년가량 앞당기는 의의를 갖는다.

김수로왕[편집]

  • 김수로왕은 가락국(駕洛國)의 초대 국왕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김해 김씨 족보》에는 태조(太祖)로 서술되었으며, 기록상으로는 알 6개에서 태어난 가야의 왕들과 같이 키가 9척이었다. 중국 후한시대 초기인 서기 42년에 가야를 건국했다. 이후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출신으로 추정되는 허황옥과 결혼했으며,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 중 아들 둘은 허씨 성을 받고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는데 서기 199년까지 살았다고 한다. 아들은 금관국의 제2대 거등왕이었다. 가야 건국 신화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양쪽에서 모두 등장한다. 흔히 《삼국유사》에 수록된 <구지가>와 얽힌 6개의 알 신화로 유명하다. 서기 42년 김해 구지봉에 사람들이 모여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자 하늘에서 알 6개가 내려왔고, 알들 중 가장 먼저 깨어난 이가 김수로였으며, 나머지 알 5개에서 태어난 아이가 각자 나머지 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다른 출생 신화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최치원이 썼다는 《석이정전》을 인용했다고 하며 서술한 정견모주 전설이 있다. 여기서 김수로는 이비가지의 아들로 이진아시와 형제였고, 이름이 뇌질청예(惱室靑裔)였다. 전자는 김해 금관국 중심, 후자는 후기 가야 체제에서 강국으로 떠오른 고령 대가야 중심적인 신화인 듯하다. 수로왕이 즉위한 지 1년이 지나 도읍을 정했는데 임시 궁궐 남쪽에 위치한 신답평(新畓平)을 둘러보더니 자리가 좋다면서 공사를 명령했다. 43년 3월 10일 궁궐 외곽의 성벽 공사가 종료되고, 44년 궁궐이 완성되자 그곳에서 정무를 보았다고 한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허황옥〉, 《위키백과》
  2. 허황옥 (許黃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허황옥〉,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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