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헌
조헌(趙憲)은 조선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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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 조헌은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 등 승병과 합세해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뛰어난 학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본관 백천(白川). 자 여식(汝式). 호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시호 문열(文烈).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하생. 1567년(명종 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정주교수(定州敎授)가 되고, 1572년(선조 5) 정자(正字)로 왕이 절에 향(香)을 하사하는 것을 반대하여 삭직된 뒤 곧 저작(著作)에 기용되고, 1574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호조와 예조의 좌랑·감찰을 거쳐 통진현감(通津縣監)으로 남형(濫刑)한다는 탄핵을 받고 부평(富平)에 유배되었다. 1581년 공조좌랑에 등용되어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종묘서령(宗廟署令)을 거쳐 1582년 보은현감(報恩縣監)으로 나갔다. 1586년 공주제독관이 되어 동인이 이이·성혼을 추죄(追罪)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고향에 내려가 임지를 이탈한 죄로 파직당하였다. 1589년 동인을 공박하다가 길주에 귀양가고, 그해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이 일어나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 명을 모아 영규(靈圭) 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錦山)으로 향했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대부분 해산되고, 700명의 의병으로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이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1754년(영조 30) 영의정에 추증,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금산의 성곡서원(聖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중봉집》이 있고, 저서에 《동환봉사》등이 있다.[1]
- 조헌은 조헌(1544년 6월 28일~1592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유학자이자 경세사상가, 의병장이다. 조선의 공조좌랑 등을 지냈다. 1567년(명종 22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역임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금산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 일본군을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바로 증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1604년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으며, 증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증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고종 때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후율(後栗), 도원(陶原), 시호는 문렬(文烈). 본관은 배천(白川). 성혼의 문인이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당색으로는 서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의 고경명, 김천일, 영남의 곽재우, 정인홍과 함께, 호서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은 보은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였으나 순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의 시기로 홍성 지방에 옮겨가서 또 의병 천여 명을 모집했다. 이때 왜군은 청주에서 진을 치고 있어 관군이 여러 번 패하였는데, 승장(僧將) 영규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여 충청도 공략의 본거지를 탈환하는 등 전과를 세웠다. 왕명으로 증 가선대부(贈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에 추증되었다.[2]
- 조헌은 조선 전기에, 공조좌랑, 전라도도사, 보은현감 등을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벌인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문신 · 학자 · 의병장이다.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경기도 김포 출생. 조황(趙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세우(趙世佑)이고, 아버지는 조응지(趙應祉)이다. 어머니는 차순달(車順達)의 딸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 10) 12세 때 김황(金滉)에게 시서(詩書)를 배웠는데, 집이 몹시 가난해서 추운 겨울에 옷과 신발이 다 해어졌어도 눈바람을 무릅쓰고 멀리 떨어진 글방 가는 것을 하루도 쉬지 않았으며, 밭에 나가 농사일을 도울 때나 땔감을 베어 부모의 방에 불을 땔 때에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한다. 1565년 성균관에 입학했으며,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8년(선조 1)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정주목·파주목·홍주목의 교수를 역임하면서 사풍(士風)을 바로잡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이우(李瑀)·김경백(金敬伯)·전승업(全承業) 등과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영규의 승군과 합진해서,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8월 18일 전투를 벌인 끝에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후세에 이를 숭모하여 금산전투라 일컬었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83년(고종 20) 문묘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의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1971년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3]
- 조헌은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이이와 성혼의 문인이다. 정치적으로는 정철과 함께 서인 측 강경파로 분류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의병장, 행동하는 선비로 길이 남게 된다. 임진왜란 전에는 이이를 열렬히 숭배하는 서인 강경파이자 전투적인 성질로 유명했고 이이의 제자였다가 스승 이이를 비판하고 동인으로 전향한 정여립을 비난했다. 다만 조헌은 이이를 강력히 숭배했던 것과는 별개로 학문적으로는 성혼의 학맥에 가깝고 실제로 그가 가장 처음 학문을 배운 사람도 성혼이다. 관직에 있다가 자기 의견이 안 받아들여진다 싶으면 물러나면서도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 정치 현안에 대한 상소를 올리는 등 독한 면모를 지니고 있어서 선조 22년 12월, 조헌이 유배에서 방면되자마자 상소를 올리자 선조는 "인심의 패역(悖逆)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1592년 그가 우려했던 것처럼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며 조선군은 일본군을 감당하지 못했는데 자신의 경고가 현실이 된 상황에서 조헌은 이제 의병으로 전쟁터에 뛰어들 결심을 했다. 1592년 5월 조헌은 옥천에서 병력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으며 문인 이우, 김경, 전승업 등의 도움으로 16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는 데 성공하고 7월 초부터 본격적인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금산 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아들인 조극관과 영규의 800명의 승군을 비롯한 전 의병들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4]
조헌의 의병활동[편집]
- 1592년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6월에 의병을 일으켰다. 문인인 이우(李瑀), 김경백(金敬伯), 전승업(全承業) 등과 각지에 의병참여를 호소하였고 이에 응하여 사람들이 모였다. 지방관들의 방해가 있자, 자신을 따르는 전참봉 이광륜(李光輪), 선비 장덕개(張德盖), 신난수(申蘭秀), 고격우(高擎宇), 노응탁(盧應晫) 등과 다시 의병을 모집했고 모여든 사람이 1,600명에 이르렀다. 7월 5일 웅진에서 군사들과 국난극복과 진격을 맹세했다. 이후 의병을 이끌고 회덕(懷德)으로 진군했다. 앞서 호남의병장 고경명(高敬命)과 금강 중류인 형강(荊江)을 건너 일본군을 무찌르기로 약속하였으나 고경명은 1차 금산성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고경명은 의병 6~7천을 데리고 북상하다가 일본군이 호남을 침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선 이를 막기로 하였다. 일본군은 금산성에 진을 치고 있었다. 고경명이 방어사 곽영과 금산성 밖에 진을 쳤다. 전투가 시작되어 성을 공격하였는데, 적이 관군의 진이 약한 것을 알고 공격했고, 선봉장이 도망치면서 전열이 무너졌다. 고경명 등이 의병장들이 모두 전사했다. 이 소식을 듣고 조헌은 고경명을 위한 추도시를 지었다.
- 일본군이 청주를 점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조헌은 승장 영규(靈圭)의 군대와 연합하여 1592년 8월 1일 청주성을 탈환했다. 그리고 전투결과를 전승업과 아들 완도(完堵)를 시켜 당시 선조가 머물던 의주의 행재소에 보고하였다. 1592년 8월 15일 조정에서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토벌하는 것을 가상히 여겨 조헌을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의 벼슬을 내렸다. 이후 조헌은 관군의 방해로 흩어지고 남은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8월 16일 영규의 군대와 함께 청주를 떠나 금산으로 전진했다. 이때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은 18일 자로 약속된 금산성 공격 날짜를 미루자고 하였으나 조헌은 이에 따르지 않고 금산으로 진격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일본군은 후속부대가 없다는 것을 알고 교대로 공격해왔고, 조헌의 700의병은 수에서 밀려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이것을 2차 금산성 전투라고 부른다. 1592년 10월에 조정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를 증직하였다. 조헌과 김제갑, 남정유, 승장 영규를 증직하였다. 1593년 11월에 광해군이 아들 완도를 불러 포상하고 황신(黃愼) 등을 보내 치제하였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83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1971년에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문집으로 〈중봉집〉이 있다.
보은 후율사[편집]
- 보은 후율사(報恩 後栗祠)는 충청북도 보은군 수한면 차정리에 있는 사당이다.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수리티재 아래에 있는 중봉 조헌(趙憲)의 사당으로 그가 율곡 이이의 후진이어서 후율사라고 하였다. 1832년(순조 32) 보은상원회(報恩象院會) 송흠요(宋欽寮) 등 28명의 발의로 옥천, 회인, 청주 등지 사림의 협조를 얻어 음력 9월 18일 터를 닦고 10월 4일 상량하여 창건하였다. 1870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헐렸으나 1894년(고종 31) 선비들이 옛터에 단을 모으고 해마다 조두례(祖豆禮)를 올렸다. 그 뒤 1928년 중건하여 조헌과 함께 순절한 의사 20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봄·가을로 제향을 올린다. 규모는 대지 약 1,000㎡, 건평 45㎡, 교서각 5㎡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이며 고설삼문(高設三門)이 있다. 옆에는 1839년(헌종 5) 세운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집인 교서각이 있고 그 안에 교서비가 세워져 있다.
청주 조헌 전장기적비[편집]
- 청주 조헌 전장기적비(淸州 趙憲 戰場記蹟碑)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에 있는 조선시대 석비이다. 1984년 12월 31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청주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조헌(趙憲:1544~1592)의 청주성 탈환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종전 후인 숙종(肅宗) 36년(1710) 그의 문인들이 현재의 서문동에 세웠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중앙공원 내로 이전하였다. 비는 화강석으로 만든 높이 230㎝, 나비 84㎝ 크기이다. 비석에는 '문렬공중봉조선생전장기적비 숭정기원후93년 경인립(文烈公重峰趙先生戰場紀蹟碑 崇禎紀元後八十三年 庚寅立)'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김진규(金鎭圭)가 글을 짓고 이수당이 글씨를 썼다.
조헌사당[편집]
- 조헌사당(趙憲祠堂)은 충청남도 금산군 복수면에 있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조헌을 모신 사당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을 모신 사당이다. 조헌사당 또는 표충사(表忠祠)라 한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1649년(인조 27)에 건립된 이 사당은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집으로 낮은 돌담으로 둘러쳐져 있다. 소재지는 충청남도 금산군 수심대길 30이다. 원래 사당에 조헌의 유품 1괄(6종 7점)을 보관하고 있었으나 1976년 금산 칠백의총에 기념관이 건립되면서 유품들은 모두 그곳으로 옮겨졌다. 칠백의총은 임진왜란 때 제2차 금산전투에서 분투하다 장렬히 전사한 조헌과 조헌이 이끌던 700의병의 유골을 모아 만든 무덤으로,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있다.
옥천 조헌 신도비[편집]
- 옥천 조헌 신도비(沃川 趙憲 神道碑)는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에 있는 조선 중기 조헌의 석비이다. 1996년 1월 5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옥천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도농리 되재마을에 있는 조선시대 문신이자 의병장인 중봉 조헌의 묘에서 동남쪽 100m 거리에 있는 신도비이다. 1656년(효종 7) 건립되었으며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글씨를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비의 머리에 전자로 쓴 제액)을 썼다. 비문에는 조헌의 생애와 마지막 격전지였던 금산싸움에 관하여 자세하게 적혀 있다. 비의 규모는 비석 높이 175㎝, 폭 100㎝, 두께 32㎝이며 긴 사각형의 기초석(높이 1.5m, 폭 1.2m, 두께 1.2m) 위에 세워져 있다. 이수를 갖춘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신도비 형태이며, 1980년 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2평 규모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된 비각을 세웠다.
조헌 선생 유허 추모비[편집]
- 조헌 선생 유허 추모비(趙憲 先生 遺墟 追慕碑)는 경기도 김포시 감정동에 있는 조선 시대 의병장인 조헌(1544∼1592)의 추모비. 1979년 9월 3일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인 조헌(趙憲)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추모비로 현재 우저서원(牛渚書院) 내에 있다. 조헌은 1567년(명종 22)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고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후학 양성과 학문에 정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청주성을 수복하고 금산전투에서 열심히 싸웠으나 의병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1648년(인조 26) 그가 살던 집터에 비를 세워 공적을 추모하였다. 비는 비몸과 받침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몸은 앞면에 조헌 선생의 행적을 적어 놓았고 윗부분은 모서리를 둥글게 하였다. 받침돌은 사각형이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이정구(李廷龜)이고 글씨는 김현성(金玄成)이 썼다.
옥천 조헌 묘소[편집]
- 옥천 조헌 묘소(沃川 趙憲 墓所)는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인 중봉 조헌(趙憲:1544∼1592)의 묘이다.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묘역은 330㎡(100평) 정도이고 상석(床石), 문인석, 망주석(望柱石)이 갖추어져 있다. 묘비는 봉분 앞에 2개가 서 있는데, 하나는 송시열(宋時烈)이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면서 조헌의 공적을 기록하여 세운 것이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조헌〉, 《위키백과》
- 〈조헌〉, 《나무위키》
- 〈조헌(趙憲,1544~1592)〉, 《두산백과》
- 〈조헌 (趙憲)〉,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마루, 〈중봉 조헌 선생의 유적을 찾아서 : 옥천 후율당〉, 《네이버블로그》, 2024-02-18
- 향수 옥천, 〈중봉 조헌선생 성지에서 그의 흔적을 만나다!〉, 《네이버블로그》, 2023-10-26
- 정은혜 기자, 〈의병장 '조헌'의 삶과 업적... 6월의 역사인물 ‘조헌’〉, 《뉴스인뉴스》, 2021-05-26
- 월간 옥이네, 〈의병장 조헌의 새로운 면모를 찾아〉, 《네이버블로그》, 2020-11-18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