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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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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장보고(張保臯)는 신라의 무장으로 청해진을 설치하여 당나라와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하였다.

개요[편집]

  • 장보고의 원래 이름은 '궁복(弓福)'으로 전해지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궁파(弓巴)'라고 기록되어 있다. 장(張)이라는 성과 보고(保臯)라는 이름은 당나라로 건너간 뒤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등 일본의 문헌에는 이름의 한자 표기가 '長寶高' 혹은 '張寳高'로 되어 있다. 친구인 정년(鄭年)과 함께 일찍이 당나라 서주(徐州)로 건너가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을 지냈으며, 장보고와 정년은 용맹하고 씩씩해 말을 타고 창을 쓰는 데 이들을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한편, 일본의 《쇼쿠니혼코우키(續日本後紀)》에는 842년 정월에 신라사람 이소정(李少貞) 등이 일본으로 건너와서 장보고가 죽고 그의 부장인 이창진(李昌珍)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염장이 병사들을 이끌고 이를 토벌했다는 사실을 전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장보고가 죽은 연대를 문성왕 8년(846년)의 일로 기록하고 있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과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장보고가 죽은 연대를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1]
  • 장보고는 남북국시대 청해진을 설치하여 당나라와 신라, 일본 간 해상무역을 주도한 상인. 장보고(張寶高)라고도 한다. 본명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로, '활보', 즉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체가 변변하지 못한 평민 출신으로 여겨진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중국 당나라에 건너가 대성(大姓)인 장씨(張氏)를 모방해 지은 것이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났고 물에 익숙하였다. 청년기에 친구 정년(鄭年)과 함께 당나라에 건너가 생활하다가, 서주(徐州) 무령군(武寧軍)에 복무해 장교가 되었다. 당시 당나라는 각지에 절도사(節度使)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장보고는 그러한 지방군벌의 속성과 그들의 군대양성 방법을 익혔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의 동해안 지역에는, 남으로는 양자강 하구 주변에서 북으로는 산동성(山東省)등주(登州)까지 많은 신라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연안 운송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도 있었고, 양주(揚州) · 소주(蘇州) · 명주(明州) 등지에서 아라비아 · 페르시아 상인과 교역하는 한편, 중국과 신라 · 일본을 내왕하며 국제무역에 종사하던 자들도 많았다. 해안지역 출신으로 바다에 익숙했던 장보고는 이러한 해상무역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더불어 이해하게 되었다. 838년(희강왕 3) 수도에서 다시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터져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였다. 이 정변을 틈타 장보고는 군대를 경주에 보내 반격하며 김우징 일파를 강력히 지원하였다. 그 뒤 청해진과 중앙정부 사이에는 대립과 반목이 심화되었다. 그러자 중앙정부에서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閻長)을 보내 그를 암살시켰다. 장보고가 죽은 뒤 그의 아들과 부장 이창진(李昌珍)에 의해 청해진 세력은 얼마간 유지되었다. 일본에 무역선과 회역사를 보내어 교역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장보고는 불의에 피살되었으나, 그는 8세기 후반 이후 신라인의 해상활동의 한 정점이 되었다. 또한 신라 말기 각지에서 등장하는 호족세력의 선구적 존재이기도 하였다.[2]
  • 장보고는 신라(新羅)의 무장(武將)이자 해상(解上) 호족(豪族)이다. 장보고의 계통과 출신에 대해서는 기록이 알려져 있지 않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그의 본명을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2]라고 적고 있다. 그의 이름은 활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일찍부터 친구 정년과 함께 당나라의 서주(徐州)로 건너가 그곳에서 승마와 창술에 특출난 재주를 보이며 군인으로서 출사해 무령군중소장(武寧軍中小將)의 직책을 받게 되었다. 흥덕왕 3년(828년) 초에 신라로 돌아온 그는 왕에게 신라인들이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리고 있는 참상을 전하며, 군사 거점을 세워 이를 금지시켜 줄 것을 청했다. 마침내 승인을 얻어 1만여 명의 군대를 확보한 그는 완도에 청해진을 세우고 대사(大使)가 되었다. 그의 활약으로 827년~835년 이후로 해상에서 신라 노예를 매매하는 일이 사라졌다고 《신당서》 및 《삼국사기》는 평가하고 있다.[3]
  • 장보고는 9세기 전반에 활동한 신라의 군인이자 상인이며 지방 세력가이다. 골품제(骨品制)라는 신라 신분제의 벽에 막혀 뜻을 펼칠 수 없었던 그는 당(唐)으로 건너가 군인이 되었다가, 신라에 귀국한 후 지금의 전남 완도(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한다. 그리고 동아시아 해상 교통로를 장악하여 국제 교역을 주도하면서 많은 부와 힘을 축적하여 큰 해상 세력을 형성했다. 신라 후기 왕위계승 분쟁에도 참여하여 신무왕(神武王, 재위 839~839)을 즉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나, 당시 특권층인 진골귀족 중심의 신라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결국 암살을 당해 최후를 맞이했다. 장보고는 신무왕의 제의를 받아들여 군대를 일으켜 민애왕을 제거하고 신무왕을 즉위시킨다. 낮은 신분이어서 자신의 능력을 신라에서 제대로 펼칠 수 없었던 장보고가, 왕실의 외척이 되어 핵심 지배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문성왕은 장보고의 딸을 둘째 왕비로 맞이하려 하였으나, 너무 커진 장보고 세력에 위협을 느낀 중앙 진골귀족들이 일제히 반대하여 장보고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신라 중앙과 장보고 세력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어 갔다. 장보고는 무력으로 신라를 뒤엎으려고 하였다. 846년(문성왕 8) 봄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장보고의 세력은 매우 강성하여 신라에서 그를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때 염장(閻長)이라는 사람이 계략을 써서 장보고를 암살하고 만다. 인재를 아끼는 점이 장보고의 약점이라 보고, 거짓으로 귀의하는 척하며 방심한 그를 죽인 것이다. 청해진의 몰락과 함께 장보고의 꿈도 사라진 것이다. 장보고는 신라 말 지방 세력들에게 영감과 자극을 주었고, 그의 꿈은 신라 말 고대 골품제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중세 사회를 연 지방 호족 세력들에게 이어진다.

장보고의 생애[편집]

  • 장보고는 <삼국유사>에 서남해안의 한 섬에서 태어났다는 점이 기술되어 있다. 분명한 것은 아주 미천한 신분이었다는 것이다. 골품제가 나라의 근간이었던 통일신라 시대에 태어난 장보고는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장보고가 살았던 시대에는 당나라 출신의 해적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해안가의 섬에서 자란 장보고는 어려서부터 신라인들을 노예로 잡아가고, 학살하는 해적들의 패악질을 직접 목격하며 장군의 꿈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골품제가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신라에서 장군이 되기에는 요원한 일, 장보고는 장군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당나라로 떠났다.
  • 당나라에서 돌아온 뒤에 828년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에게 당나라의 해적이 신라인을 노략하여 노비로 사고파는 행위가 빈번히 벌어지고 있다고 보고하고 오늘날의 완도와 그 부속섬인 장도(將島) 일대의 청해(淸海)에 진영을 설치할 것을 청했다. 왕이 허락하자 1만 명의 병사로 장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대사(大使)로서 병사들을 지휘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서남부 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와 교관선(交關船)을 보내고, 일본에는 회역사(廻易使)을 보내며 당나라와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하였다. 836년 흥덕왕이 죽은 뒤에 신라에서는 왕의 사촌인 김균정(金均貞)과 조카인 김제륭(金悌隆)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는데, 결국 김균정이 살해되고 김제륭이 희강왕(僖康王, 재위 836~838)으로 즉위했다. 그러자 김균정의 아들인 김우징(金祐徵, 뒷날의 신무왕)은 청해진으로 와서 장보고에게 의탁했다. 838년 상대등 김명(金明)이 희강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민애왕, 재위 838~839), 김양(金陽) 등이 병사를 모아 청해진으로 김우징을 찾아와 군사를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839년 장보고는 김우징, 김양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왕으로 추대했다. 이 공으로 장보고는 신무왕(神武王, 재위 839)에게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임명되었으나, 신무왕은 왕위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죽고 그의 아들인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이 왕위에 올랐다. 문성왕이 즉위한 뒤 장보고는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임명되었다.
  • 845년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둘째 왕비로 보내려 했으나 중앙의 귀족들이 섬사람(海島人)의 딸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장보고는 청해진에 웅거하여 왕에게 반기를 들었으며, 846년(문성왕 8) 문성왕은 염장(閻長)을 자객으로 보내 장보고를 살해하였다. 그리고 851년(문성왕 13)에는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이주시켰다. 《삼국유사》에는 신무왕이 자신을 도와주면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장보고에게 약속했고, 이를 어기자 장보고가 왕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해상왕이 된 장보고의 이름은 당나라와 일본에까지 퍼졌다. 국제적인 명성을 가지고 신라 최대의 군사를 보유한 장보고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신라의 귀족들은 장보고의 옛 부하를 회유해 그를 암살했다. 한때 중국과 일본, 한반도의 앞바다를 호령하던 영웅의 비참한 최후였다. 장보고의 이름을 지우려 노력한 신라에서는 청해진을 폐쇄했고, 주민들도 강제 이주시켰다. 그렇게 역사 속에서 잊혀져 있던 청해진 유적은 세월의 풍화에 잠들어 있다가 1959년 태풍으로 그 모습이 다시 드러났다. 장보고가 세운 동아시아 해상무역 기지인 청해진은 지금의 완도에 설치되었다. 장보고의 풍운의 꿈이 서린 곳이기에 완도에는 그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장보고에 대한 평가[편집]

  • 장보고와 정년이 원래 지기였고, 당에서 무령군중소장이 된 사실을 소개한 《삼국사기》 장보고열전의 저본은 중국 당나라 두목(杜牧)이 지은 장보고전, 즉 《신당서》권220 신라전이다. 장보고가 먼저 신라로 돌아가 높은 관위(청해진대사)를 얻은 뒤, 반대로 관직에서 물러나 한미하게 지내던 정년이 장보고를 믿고 그를 찾아갔을 때에 정년을 예를 갖추어 환대한 것, 환영 연회를 벌이던 도중에 국왕이 살해당하고 수도가 혼란에 빠진 소식이 전해지자 장보고가 기꺼이 정년에게 군사 5천을 내어 주어 '자네가 아니면, 이 화란을 진압할 수 없다.'며 반란을 토벌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게 했으며, 이 공으로 장보고는 재상에 등용되고 정년이 청해진대사를 이어받은 사실 등을 적고 있다.
  • 장보고와 정년의 교제를 안녹산의 난 때의 곽분양(郭汾陽, 곽자의) ㆍ 이임회(李臨淮, 이광필)의 교제에 빗대어 인의(仁義)의 사람이라 칭찬한 것을 전하면서, 《신당서》열전을 편찬한 송기(宋祁)의 평으로 국난의 시기에 의(義)를 품고 국가의 우환을 먼저 생각한 사람으로서 진(晉)의 기해(祁奚)와 당의 곽분양, 그리고 장보고를 거론하고 "어찌 동쪽에는 뛰어난 인물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칭하고 있다. 김유신전의 말미에서도 김유신의 공적을 뛰어나다고 칭찬하면서도 고구려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무용을 함께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후대 조선조의 안정복에게까지 이어졌다.

적산법화원[편집]

  •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은 820년대 장보고가 산둥반도 적산에 세운 사찰이다. 통일신라 시대 때 당(唐)나라의 산둥반도(山東半島)와 장쑤성(江蘇省) 등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는 신라인의 집단거주지인 신라방(新羅坊)이 있었으며 이곳에 세운 사찰을 신라원(新羅院)이라 하였다. 많은 신라인 촌락 중에서 산동반도 동쪽 끝에 위치한 적산촌(赤山村)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이라는 사찰이 있었다. 적산법화원에 대한 기록은 일본 천태종(天台宗)의 승려 엔닌(圓仁)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자주 보인다. 엔닌은 당 문종(文宗) 개성(開成) 4년(839) 적산촌에 이르러 적산법화원을 보고 관련 정보를 기록하였다. 이에 따르면 적산법화원은 장보고(張保皐)가 세운 사찰이며, 오랫동안 장전(莊田)을 소유하여 1년에 500석(石)의 쌀을 수확하였고, 여름에는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겨울에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강론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비구승(比丘僧) 15명, 사미(沙彌) 9명, 비구니(比丘尼) 3명, 노파 2명 등 30여 명이 상주하였으며, 재당신라인으로 추정되는 장영(張詠), 임대사(林大使), 왕훈(王訓) 등이 사찰을 관리한다고 기록하였다.
  • 적산법화원의 설립 시점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전하지 않는다.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설은 820년대 초에 창건되었다는 주장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의 천장(天長) 원년(824) 장대사(張大使)가 일본에 체류하던 승려 신혜(信惠)를 배에 태워 당으로 데려왔다는 기록이 근거이다. 장대사를 장보고로 이해하고, 신혜는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에서 승려 생활을 하였을 것이며, 820년 무렵 장보고가 무령군(武寧軍)의 소장(小將)에서 물러났으므로, 적산법화원은 820년 무렵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적산법화원은 주불(主佛)을 안치한 법당(法堂)과 여러 행사가 진행되며 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 30여 명의 승려 및 관리자들은 물론 수십여 명의 손님까지 머무를 수 있는 승방(僧房), 불교 경전을 보관하는 장경각(藏經閣), 종루(鐘樓), 식당, 창고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를 토대로, 불교 경전을 강독하는 강경회(講經會)를 정기적으로 1년에 2회 개최하였으며 그때마다 많은 신라인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적산법화원은 당나라에 거주하는 신라인의 신앙 거점인 동시에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예배처였으며, 재당신라인 사회를 결속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이외에도 신라와의 연락기관 역할을 하였고, 당나라로 건너가는 신라의 승려는 물론 일본의 승려들도 이곳을 거쳐가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장보고(張保臯,?~846)〉, 《두산백과》
  2. 장보고 (張保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장보고〉,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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