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
신사임당(申師任堂)은 조선 중기의 화가이자 문인으로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다.
개요[편집]
- 신사임당은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호는 사임당(師任堂)이다. 사임당은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겠다는 뜻에서 사용된 당호로 임사재(任師齋)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름이 인선(仁善)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자료는 없다. 아버지는 영월군수(寧越郡守) 신숙권(申叔權)의 아들 신명화(申命和)이고, 어머니는 세조 때의 원종공신(原從功臣) 이유약(李有若)의 손자인 이사온(李思溫)의 외동딸 용인 이씨(龍仁李氏)이다.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여 이선(李璿)·이번(李璠)·이이(李珥)·이우(李瑀)의 네 아들을 두었고, 조대남(趙大男)·윤섭(尹涉)·홍천우(洪天祐)에게 출가한 세 딸을 두었다. 딸들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며 맏딸이 매창(梅窓)이란 호를 사용한 기록만 남아있다. 신사임당은 죽은 뒤에 파주 두문리(斗文里)의 자운산(紫雲山)에 매장되었다.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 뒤편에 있는 율곡 이이의 가족묘역에는 율곡 이이의 묘역 아래에 신사임당과 남편 이원수의 합장묘가 있다. 율곡 이이의 가족묘역은 자운서원 등과 함께 국가지정유산 사적 525호로 지정되어 있다.[1]
- 신사임당은 조선 시대 중기의 문인이자 유학자, 화가, 작가, 시인이다. 조선시대 중기의 성리학자 겸 정치인 율곡 이이, 화가 이매창의 어머니다.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본명은 신인선(申仁善)이라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사임당은 그의 당호(堂號)이다. 그림, 서예, 시 재주가 탁월하였고, 성리학적 소양도 있었으며, 십자수와 옷감 제작에도 능했다. 성리학적 지식과 도학, 문장, 고전, 역사 지식 등에 해박하였다. 태교에서부터 정성을 기울여 아들 주나라 주 문왕을 얻은 현숙한 부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사임(師任)으로 아호를 정하였다. 후대에서 여성임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별채를 의미하는 당(堂)을 붙여 부르기 시작하였다. 별호는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이다. 2007년 한국 여성계의 반대와 집단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부에 의해 50000원 지폐의 주인공으로 전격 도안되었다.[2]
- 신사임당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화가이다. 호는 '사임(師任)'. 아무 근거없이 이름이 '신인선' 또는 '신선'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름이 나와 있는 문헌은 없는데 1990년대 위인전 출판사가 작명한 것으로 추측된다. 신사임당의 이름이 언급된 문헌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정확한 성명은 현재까지도 불명이다. 현대로 치면 '신 모 씨'지만 호가 있기에 이렇게라도 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시, 서, 화는 물론 학문에도 능했던 엄친딸의 표본. 괜히 슬하에서 이이 같은 사람이 나온 게 아니며 신사임당 당대에는 '안견에 버금가는 화가'라는 높은 평가를 받을 정도로 예술가로서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현모양처라는 이미지나 '이이의 어머니'라는 명칭이 유명하여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물론 현모양처라는 단어 자체나 이이의 어머니라는 점은 절대로 모욕이 아니지만 그녀 개인의 역량이 묻혀버린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1980~90년대만 하더라도 동양화가로서의 신사임당을 조명하는 어린이용 전기가 많았고 초충도 같은 작품이 교과서에 실려서 예술가로서도 뛰어나고 가정생활도 잘한 먼치킨 이미지가 있었다. 그녀는 당대 기준으로 상상도 하기 힘들 만큼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현모양처인 동시에 화가이자 여러 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한 재인이라는 점에서나 위인이라고 볼 수 있지만 5만 원권에 들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면이 많다는 평가가 주류다.[3]
- 신사임당은 조선 중기 강릉 출신의 여류 예술가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사임당(師任堂)은 당호(堂號)이다. 증조부는 성균관대사성을 지낸 신자승(申自繩)이고, 조부는 영월군수를 지낸 신숙권(申叔權)이다.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 이사온(李思溫)의 딸이다. 남편은 증좌찬성 이원수(李元秀)이고, 조선 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신사임당은 중종대 여류 예술가로 시·그림·글씨에 능했으며, 한국 여성의 표상이 되고 있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자랐다. 19세에 덕수이씨(德水李氏)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였으며,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 달 뒤 아버지 신명화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으며, 선조 때부터 시집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1541년 38세에 시집 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과 청진동에 해당되는 수진방(壽進坊)에서 살다가 1551년 봄에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1551년 여름 남편 이원수가 수운판관(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신사임당은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났다. 그림으로는 「자리도(紫鯉圖)」·「산수도(山水圖)」·「초충도(草蟲圖)」·「노안도(蘆雁圖)」·「연로도(蓮鷺圖)」·「요안조압도(蓼岸鳥鴨圖)」와 글씨로 6폭초서병풍 등이 있다.[4]
신사임당의 예술능력[편집]
- 신사임당은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뛰어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예인(藝人)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하지만 아들인 이이의 영향으로 그녀가 조선 중기 이후 현모양처(賢母良妻)의 전형으로 여겨지면서 그녀의 글씨와 그림을 상찬하는 유학자들의 글은 많이 전해지지만, 막상 그녀가 직접 쓰고 그린 글씨와 그림으로 확인되는 작품들은 매우 드물다. 그리고 그녀의 영향으로 조선 후기에 풀·벌레를 그린 초충도(草蟲圖)가 크게 유행했다. 그래서 오늘날 그녀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들은 진작(眞作)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전칭작(傳稱作)들이 대부분이다.
- 신사임당은 쓴 시는 이이의 〈선비행장〉에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 〈사친(思親)〉, 〈낙구(落句)〉 세 작품이 수록되어 전해진다. 칠언(七言)과 오언(五言)의 한시(漢詩)인 이 작품들은 모두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을 나타내고 있는데, 격조를 갖추어 그러한 감정을 섬세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신사임당이 쓴 것으로 알려진 글씨는 현재 강릉의 오죽헌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신사임당초서병풍(申師任堂草書屛風)〉,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두 폭의 〈산수도〉에 제화(題畵)로 당시(唐詩)의 구절들을 적어놓은 것 등이 전해진다. 특히 종이에 당나라 때의 오언절구 6수를 초서로 쓴 〈신사임당초서병풍〉의 글씨는 짜임이 단정하여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차분한 풍격을 보여준다. 이러한 글씨는 그녀의 아들인 이우와 황기로(黃耆老), 백광훈(白光勳) 등의 서체와 특징을 공유하고 있어서, 일부 학자들은 이들을 '사임당서파(師任堂書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 신사임당의 그림에 관해 이이는 〈선비행장〉에서 '포도를 그렸는데 세상에 시늉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그 그림을 모사(模寫)한 병풍이나 족자가 세상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송시열(宋時烈)은 〈신사임당묘갈문(申師任堂墓碣文)〉에서 '서화(書畫)에 있어서도 묘경(妙境)에 이르러 이것을 얻은 자는 구슬을 안은 듯이 보배로 여겼다'고 기록하였으며,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 신사임당의 포도그림과 산수화가 안견에 버금간다고 적었다. 오늘날 신사임당의 그림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들은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묵포도도(墨葡萄圖)〉, 〈노련도(鷺蓮圖)〉, 〈어하도(魚鰕圖)〉 등이 있다. 안견과 중국 명나라 초기의 산수화 유파인 절파(浙派)의 영향이 드러나는 〈산수도〉는 대담하고 간결한 구도로 산수를 묘사하면서도 여성 특유의 섬세한 표현 기법이 동시에 나타난다. 강릉의 오죽헌박물관에 있는 〈신사임당초충도병(申師任堂草蟲圖屛)〉에는 8폭의 초충도가 전해진다. 여기에는 오이와 메뚜기, 접시꽃과 잠자리, 수박과 여치, 가지와 사마귀, 맨드라미와 개구리, 양귀비와 풀거미, 봉숭아와 잠자리, 원추리와 벌이 섬세한 필치와 구도로 그려져 있다. 이 밖에도 조선 후기 이후에 제작된 화첩 등에 신사임당의 것으로 수록되어 있는 그림들이 다수 전해진다.
신사임당묘[편집]
- 신사임당묘(申師任堂墓)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있는 조선 중기 신사임당의 묘이다. 봉분 높이 1.5m, 지름 2m. 조선시대 여류 서화가 신사임당(1504~1551)과 남편 이원수(李元秀)의 어울무덤이다. 봉분 앞 중앙에 묘비가 있고, 앞에 상석과 향로석이 일렬로 놓여 있다. 오른쪽에는 후대에 새로 세운 묘비가 있으며 좌우로 문석인이 있다.
- 신사임당은 본관이 평산(平山)이며, 진사 신명화(申命和)의 딸이다. 사임당은 당호(堂號)로서 그 뜻은 최고의 여성상인 중국 주(周)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본받았다고 한다. 7세 때 이미 《산수도》《포도도》를 그렸는데, 여성적인 섬세함과 정교함을 발휘하는 화풍은 단연 으뜸이었고, 필법도 능하였다. 그뿐 아니라 부군을 잘 보필하였고 이이와 같은 훌륭한 명현을 길러낸 한국의 현모양처의 귀감이다. 1973년 7월 10일 경기도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으나, 2013년 2월 21일 사적 525호 파주 이이 유적으로 승격되면서 지정이 해제되었다.
초충수병[편집]
- 초충수병(草蟲繡屛)은 신사임당이 제작한 4폭의 자수병풍이다. 1979년 1월 26일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79년 1월 26일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의 여류문인이자 서화가 신사임당이 자수한 것으로 숙명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크기는 높이 54cm, 너비 30cm이다.
- 초충수병은 총 4폭이며 모두 생수 비단에 괴석에 꽃을 놓았는데 이는 민화에서 표현되는 화분화(花盆畵)와 유사한 양식이다. 오른쪽 첫 번째 화폭은 장미꽃에 나비가 날아드는 것을, 두 번째 폭은 괴석에 국화가 피어 있고 그 위로 벌이 날고 있는 것을, 다음 폭은 괴석에 핀 나리꽃에 나비가 날아드는 것을 표현했다. 왼쪽의 화폭은 모란에 나비를 시문했는데 기법은 궁수(宮繡)이며 치밀하게 자수한 솜씨가 뛰어나다. 화제 및 자수솜씨에서 여성다운 섬세하고 정감 어린 의장이 잘 표현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50,000원 지폐 도안 여론[편집]
- 2007년 정부에 의해 신사임당은 50,000원 지폐의 주인공으로 도안되었으나, 도안 당시부터 선정 이후에도 여성계와 시민단체의 반발과 비판으로 사회적인 이슈, 후유증을 앓기도 했다. 신사임당의 50,000원 지폐 도안설이 돌자 여성단체는 확정 전부터 신사임당 선정을 반대해왔다. 대안으로 소서노, 선덕 여왕, 허난설헌, 만덕, 유관순, 나혜석 등 다양한 여성들을 제시했다. 또 새 화폐 여성인물 선정과 관련해 '새 시대 새 여성'을 상징할 수 있는 인물이 선택될 수 있도록 폭넓은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여성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여성화폐 인물 및 모든 후보 인물들에 대한 선정 경위를 투명하게 할 것을 요구했다. 그녀가 살아생전 조선을 이끌었던 적은 없고 또 자신이 살던 시대나 앞으로의 미래 정책을 위해 고민했던 여성도 아니다. 그런 인물을 대한민국의 얼굴로 소개해야 하느냐는 비판도 있다. 국가주의와 가족주의를 의도적으로 조장한다는 비판도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신사임당〉, 《위키백과》
- 〈신사임당〉, 《나무위키》
- 〈신사임당〉, 《향토문화전자대전》
-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 《두산백과》
- 최선실 기자, 〈위대한 어머니의 상징 ‘신사임당’〉, 《팝콘뉴스》, 2024-07-18
- 류호준 기자, 〈‘신사임당의 얼 함께 기린다’…제1회 사임당주간 개막〉, 《강원일보》, 2024-05-19
- 터벅이, 〈강릉의 인물 신사임당, 그 일생을 살펴보다〉, 《네이버블로그》, 2023-03-16
- 강민혜 기자, 〈조선의 ‘화가 신씨’, 신사임당은 ‘시대착오적’ 현모양처인가?〉, 《서울신문》, 2022-08-20
- 교육부, 〈사임당, 그녀의 교육과 발자취를 따라 가보자〉, 《네이버블로그》, 2017-06-02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