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양만춘

위키원
이동: 둘러보기, 검색
양만춘

양만춘(楊萬春)은 삼국시대, 고구려 안시성 성주이다.

개요[편집]

  • 양만춘은 고구려 보장왕 때 안시성(安市城)의 성주(城主).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 끝까지 싸워 성주의 지위를 유지하였으며, 당나라 태종이 침공하였을 때도 당나라군을 물리쳤다. 정사에는 이름이 전하지 않고,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등 야사에만 나온다. 지모와 용기가 뛰어났다고 한다. 642년(영류왕 25)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 연개소문에게 복종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성주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645년(보장왕 4)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개모성(蓋牟城)·요동성(遼東城)·백암성(白巖城)을 함락시키고, 고연수(高延壽)·고혜진(高惠眞)의 고구려·말갈 연합군대 15만을 무찌른 뒤 안시성을 공격하자, 군사·백성들과 힘을 합쳐 당나라 군을 물리쳤다. 당나라 군대가 성 남동쪽에 토산(土山)을 만들어 공격해 오자 성위에 목책을 쌓아 대응하였고, 하루에도 6∼7회 교전하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당나라 군대가 60여 일 동안 연인원 50만을 동원하여 성보다 높은 토산을 구축하고 성안을 공격하자, 토산 공격에 나서 정상을 점령하고 3일 동안 계속된 당나라 군대의 총공세를 물리쳤다. 겨울에 접어들면서 날씨가 추워지고 군량이 다하자 당나라 군대는 퇴각하였는데, 이때 성 위에 올라가 당나라 군대에게 송별의 예를 하니 당나라 태종이 그에게 명주 100필을 주면서 성의 방어를 하례하고 왕에 대하여 충성을 다하도록 격려하였다고 한다.[1]
  • 양만춘은 고구려 말의 군인으로 안시성 전투 당시의 안시성주이다. 1차 고당전쟁 당시 안시성에서 당 태종 이세민의 공세를 막아낸 것으로 유명하며, 후대에 구국의 영웅으로 숭앙받았다. 이를 제외한 그의 생애는 모든 것이 미상으로 그 이름조차 현전하지 않아 그저 안시성주(安市城主)라 불리기도 하나, 조선시대의 민간전승에 의해 양만춘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왔다. 양만춘이란 이름은 16세기 중국 소설에 최초로 등장한 가공의 이름으로 실제 이름은 알 수 없다. 양현감의 아들로, 양현감이 죽자, 고구려에 귀향했다는 설도 있다. 안시성 전투를 제외한 그의 생애는 모든 것이 미상으로 그 이름조차 현존하지 않는다. 현전하는 기록 중에서 양만춘(梁萬春)이란 이름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16세기 명나라의 소설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 약칭은 당서연의 혹은 당서지전)이다. 〈태종동정기〉(太宗東征記)는 이 책의 후반부를 이른다. 이익은 또 다른 전거로 하맹춘(何孟春)의 《여동서록》(餘冬序錄)을 들었으나 여동서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한편에서는 성씨가 梁(양)이 아니라 楊(양)이라 주장하였고 楊萬春(양만춘) 역시 널리 통용되었다.[2]
  • 양만춘은 645년 고구려 안시성(安市城) 성주(城主)로 당 태종의 공격을 막아 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한 고려 시기 이전의 각종 자료에서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삼국사기』의 찬자 김부식은 사론(史論)에서 안시성 성주를 호걸(豪傑)로 평가하였는데, 역사에서 성명(姓名)이 전하지 않아 애석하다고 하였다. 645년 고구려와 당의 전쟁과 관련한 중국 송원(宋元) 대 이전의 각종 자료에서도 역시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양만춘이란 이름이 보이는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는 명대(明代)의 웅종곡(熊鍾谷)이 저술한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이다. 이 책은 흔히 『당서연의(唐書演義)』라고 하는데, 현전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간행본은 1553년의 것이다. 이를 보면 당시 안시성은 좌우친위군관(左右親衛軍官)이었던 6명의 맹장(猛將)이 수비하였는데, 3명은 절노부(絶奴部)의 주수(主帥)였고 3명은 관노부(灌奴部) 주수(主帥)였다고 하였다. 양만춘은 그중에서 절노부의 주수 중 한 명으로, 안시성 전투를 주도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당서연의』에 보이는 6명의 장수는 연의소설(演義小說) 속에서 창작된 등장인물이었다. 이외에도 고구려의 장수로 창작된 등장인물이 여럿 보인다. 양만춘이란 이름은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명과 교류하며 조선 사회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 가장 먼저 양만춘이란 이름이 보이는 것은 윤근수(尹根壽)의 『 월정만필(月汀漫筆)』이었다. 『당서연의』와 『월정만필』 등 초기의 기록에서는 양만춘(梁萬春)으로 나오는데, 이후 양만춘(楊萬春)으로 정착되었다.[3]
  • 양만춘은 고구려 후기 제28대 보장왕 시대의 장수이다. 645년 제1차 고구려-당 전쟁 때 일세의 영걸 당 태종 이세민이 이끌고 온 수만 명의 대군을 요동의 안시성(安市城)에서 막아낸 명장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당나라와의 전쟁시 안시성주의 활약은 대단해서 《삼국사기》나 그 외에 《구당서》를 비롯한 중국 사서에도 그의 전공이 자세히 실려 있다. 따라서 그가 실존 인물임은 분명하지만, 안시성주의 이름을 비롯한 신상이나 안시성 전투 이외의 기록은 모두 소실되어 현재 그의 일생을 추측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조선 시대 이후 세간에 불린 그의 이름인 '양만춘'(楊萬春 혹은 梁萬春)은 소설에 등장하는 이름이 와전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해당 소설은 명나라 시대의 소설가 종곡(鍾谷)[자(字)] 웅대목(熊大木)의 저술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로 당 태종이 활약한 일대기를 소설로 각색한 작품이다. 중요한 부분인 고구려-당 전쟁 파트를 서술하면서 안시성을 지키던 성주를 절노부(絕奴部) 주수(主帥) 양만춘이라고 설정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를 실존 인물의 이름으로 착각했고, 후대에 안시성 성주가 '양만춘'이라고 널리 알려졌다. 후대의 기록들은 이 소설 내용을 바탕으로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표적으로 조선 후기 유학자 송준길의 저서 《동춘당일기》, 박지원의 《열하일기》, 이익의 《성호사설》, 윤근수의 《월정만필》 등에서도 안시성주의 이름을 '양만춘'이라 밝혔다. 이는 모두 안시성 전투가 끝나고 1,000년 이상 지난 조선시대의 기록이고 해당 소설이 쓰인 이후 나온 기록들이라 정사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오히려 안시성 전투와 더 가까운 시기인 고려 시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성주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아 애석하다고 썼다. 정사 기록에 '실전되었다'고 적힌 기록을 야사나 외국 소설에서 찾아내어 썼을 확률은 드물기 때문에 《당서지전통속연의》의 소설 내용이 와전된 것으로 보고 있다.[4]

안시성싸움[편집]

  • 안시성싸움은 645년(고구려 보장왕 4) 안시성에서 고구려와 당나라 군대 사이에 벌어졌던 치열한 공방전(攻防戰)이다. 안시성은 당시 인구 약 10만에 이르던 고구려의 영지로,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하이청(海城) 남동쪽에 있는 잉청쯔(英城子)이다. 643년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라는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차후 신라를 침범하지 말도록 권유하였으나 고구려가 이에 불응하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영류왕(榮留王) 살해 및 대신(大臣) 학살사건의 문책을 표방하고 644년 11월 당 태종 친솔(親率)의 10만 고구려 원정군을 일으켰다.
  • 645년 4월부터 개모성(蓋牟城:瀋陽 동남쪽) ·비사성(卑沙城) ·랴오양[遼陽] ·백암성(白巖城)을 차례로 점령한 당군은 6월에는 안시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북부욕살(北部褥薩) 고연수(高延壽),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을 대장으로 한 15만의 군사를 안시성에 보냈다. 많은 군사에 당 태종은 두려워하며 기만전술을 펼쳤다. '당은 교전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왕을 시해한 신하를 문죄하는 것이므로 고구려가 신하의 예를 다하면 잃은 땅도 회복될 것'이라고 두 사람을 기만하였다. 고연수가 이 말을 믿고 있다가 공격해 온 당나라 군에 대패하여 3만여 명이 전사하고 고연수와 고혜진은 항복하였다. 이에 당태종은 이세적(李世勣)을 시켜 안시성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그 휘하 장수 도종(道宗)은 먼저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안시성 남쪽에 토산(土山)을 쌓아 올려 점점 성높이와 같게 하였으나 성 안에서도 이에 따라 성을 높여 막았다. 당군은 하루에 6∼7차례 충거(衝車 :큰 나무로 성에 충격을 주는 攻城器) ·포거(抛車:돌을 날리는 공성기) 등을 동원, 성을 파괴하면 성 안에서는 곧 목책을 세워 이를 보완하였다.
  • 당군은 연인원 50만을 동원하여 60일에 걸쳐 안시성보다 훨씬 높은 토산을 쌓는 데 성공하였다. 당군은 부복애(傅伏愛)를 대장으로 하는 부대에게 토산의 정상에 올라 수비하게 했으나 갑자기 토산이 무너지며 성에서 고구려군이 쏟아져 나와 토산을 탈취하여 당군은 토산의 탈환전을 3일 동안 계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싸움은 날마다 6∼7회의 가열(苛烈)한 공방전이 계속되어 당군이 안시성을 포위한 지 3개월이 지났으나 요지부동, 고구려군의 용맹성에는 당태종도 어찌할 수 없었다. 9월에 이르러 기후는 이미 한랭하기 시작하고 병마(兵馬)의 양식도 떨어져 당태종은 할 수 없이 철군하기로 결정하였다. 당군이 철군을 시작하자 안시성의 성주가 성 위에 올라 당태종을 비록 바라보고 송별의 예(禮)를 표하자 당태종은 적(敵)일지라도 성주의 영웅적인 지휘력에 감동하여 비단[絲繪] 100필을 보내 고구려 국왕에 대한 그의 충성을 기렸다. 성주의 이름은 야사(野史)에 양만춘(楊萬春 또는 梁萬春)이라고 전한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양만춘(楊萬春,?~?)〉, 《두산백과》
  2. 양만춘〉, 《위키백과》
  3. 양만춘(楊萬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안시성주〉,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 양만춘 문서는 역사인물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