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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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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이회영(李會榮)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교육자, 사상가이다[1]

개요[편집]

이회영은(李會榮)은 대한제국의 교육인, 사상가이자 일제강점기 시대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1931년 9월에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일본과 일본 관련 시설의 파괴, 암살을 지휘하였으나 1932년 11월 상하이 항구에서 한인 교포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인하여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이회영의 가계[편집]

이회영(1867년 4월 21일 ~ 1932년 11월 17)은 선조 때 영의정 이항복의 10대손, 영조 때 좌의정 이태좌의 6대손, 영조 때 영의정 이종성의 5대손이고, 고종 때 우찬성,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이유승의 아들이다. 경주 이씨 백사공파로 조선 선조 때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오성 이항복의 10대손이었다.

자 성원(聖元), 아호는 우당(友堂). 종교는 감리교로서, 7형제 중 넷째 아들이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형이다. 해공 신익희와는 사돈 간이며, 정치인 이종찬, 이종걸은 그의 손자이다. 이종찬의 아버지 이규학과 이종걸의 아버지 이규동은 이복 형제 간으로, 이규학은 서씨 소생이고 이규동은 이은숙 소생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 1835~1906)이다. 6형제 중 넷째 아들로서. 위로는 세 형인 건영, 석영, 철영이 있었고, 아래로는 동생인 시영과 여동생 2명이 있었고, 이복 동생으로는 소영, 호영이 태어났다.

이회영의 집안은 경주 이씨 백사공파로 그의 가계는 신라, 고려와 조선에서 대대로 문무관료를 배출한 양반 가문이었다. 신라의 개국공신 이알평의 후손이자 통일신라 소판 이거명의 34대손이었다. 조선 선조 때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오성 이항복의 10대손이었다. 소론의 지도자 이광좌는 그의 6대 방조(傍祖)였고, 이시영의 7대조 이세필(李世弼)은 형조참판이었고, 6대조 이태좌(李台佐)는 소론의 중신이자 영조 때 좌의정을 지냈으며 5대조 이종성(李宗城)은 의정부영의정을 지냈고, 노론일색의 조정에서 사도세자의 몇 안 되는 후견인이기도 했다.

외교관으로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을 지낸 당대 정치거물이며 일제강점기에 친일파로 변절한 이하영(李夏榮), 국문학자 이준영(李準榮) 형제는 이시영의 14촌 종형이었다. 이하영·이준영 형제의 아버지인 증 내부대신(贈內部大臣) 이유수(李裕脩)는 그의 아버지 이유승과 12촌 종형제간이었다. 외가 역시 벌족으로 어머니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의 후손으로,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鄭順朝)의 딸이었다.

당색으로는 소론가문이었지만, 아버지 이유승은 정치색을 나타내지 않았으므로 관직에 계속 머무를 수 있었다. 여동생은 동아일보의 기자와 상해 임시정부의 복무원을 지낸 평산 신씨 신재희에게 시집갔는데, 신재희는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해공 신익희의 여섯째 형이자 동복 형이었다.

이회영의 생애[편집]

우당 이회영은 1867년 한성부의 저동(苧洞)에서 이유승과 동래정씨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어렸을 때 한학을 배우며 자랐으나 성인이 되고 개화사상을 접하며 개신교(감리회)로 개종하였다. 1896년(고종 32년) 항일 의병의 자금조달을 위하여 경기도 개성부 인근 풍덕(豊德) 지방에 삼포농장(蔘圃農場)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이후 농장의 수익금으로 의병들의 자금을 후원하였다. 그 뒤 이회영은 결혼식을 교회에서 신식으로 올렸고, 여성의 재가를 꺼리는 당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잃은 자신의 누이 동생은 거짓으로 부고를 낸 뒤 다시 결혼시켰다. 그 뒤 1906년 아버지 이유승이 사망하자 그는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면천, 해방시켰다.

1906년 이상설, 여준(呂準), 장유순(張裕淳), 이동녕(李東寧), 유완무(柳完懋) 등과 만주에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기지 설치계획을 수립한 후 만주 간도의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는데 참여하였다. 독립협회에 참가하고 장훈학교를 설립하는 등 계몽 운동을 벌였으며, 장훈학교의 교사 외에 공옥학교의 학감으로도 초빙되었다.

공옥학교의 학감으로 있을 때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그는 1907년 안창호, 이갑, 전덕기, 양기탁, 윤치호, 안태국, 이상재, 김규식, 이동녕, 김홍량, 이동휘, 신채호, 최광옥, 이시영 등과 함께 비밀 결사 조직 신민회(新民會)를 결성, 조직하여 신민회 중앙위원에 취임하고 교육, 계몽, 강연 활동을 하였다. 또한 그는 신민회의 정치·경제·교육·문화 분야 등에 관여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신민회를 탄압했고, 신민회 회원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웠다.

대구 영남중학교, 공옥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신민회의 창립 멤버로 가담하였고, 북간도에 서전서숙을 설립하였으며 일가 6형제와 함께 가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자, 상하이에서 아나키즘 사상에 심취하였으며 국내외 단체와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했다.

1930년 4월 20일에 유자명, 장도선, 정해리, 유기석 등은 아나키스트 무력투쟁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였으나 별다른 활동이 없다가 만주사변 이후에 이회영, 정현섭, 백정기 등의 주요 아나키스트 거물들이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 단체는 기관지인 남화통신을 발간하였다. 이회영은 1931년 남화한인청년연맹과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2년 초 상해 사변이 일어나자 이회영은 중국 국민당을 찾아아 교섭, 자금과 무기지원을 약속받고 돌아왔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공격, 만주침략이 발발하자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 동지들이 상하이로 집결하여 협의기구로 조직한 항일구국 연맹의 의장에 피선되었다. 1932년 중국국민당과 교섭하여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상해 사변이 일어나자 그는 행동강령으로 일본군기관 및 수송기관 파괴, 일본요인 및 친일파 숙청, 일본외교기관 폭파, 파괴 등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결정하고, 중국 국민당에게도 협조를 구하여 자금과 무기 지원을 확약받았다. 9월 중국 국민당 요인 이석증(李石曾), 오유휘(吳稚暉), 호한민(胡漢民) 등의 지원을 받아 중국 동북부에 새로운 거점 확보와 동시에 관동군 사령관 무토(武藤)대장 암살 계획을 정하고 북행을 결정하였다.

1932년 11월 만주의 연락 근거지 확보와 지하공작망 조직, 주만 일본군사령관 암살 등 아나키스트의 활동 범위를 넓히기 위해 상하이에서 다롄(大連)으로 이동을 결심하였다. 당시 만주는 일본의 강력한 영향 아래에 있어 대단히 위험했으므로 주위의 동지들이 말렸으나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1932년 11월 조선인들의 제보와 일본 밀정의 첩보, 그와 사상이 달랐던 조카 이규서 등의 밀고로 이동중 다롄 항구에서 일본 경찰과 중국수상서원에게 체포되었고, 일본 영사관 감옥에 수감되었다. 1932년 11월 17일 이때 이미 노인이었던 그는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했다. 연락을 받고 시신을 찾으러 간 유가족에게 다롄 수상경찰은 그가 자살하였다고 했으나 믿지 않았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65세였다.

흑색공포단 지휘[편집]

1931년 9월 이회영은 정화암, 백정기, 김성수(金性壽), 그리고 중국인 왕아초(王亞樵), 화균실(華均實), 일본인 출신 아나키스트 전화민(田華民, 일본명 佐野), 오수민(吳秀民, 일본명 伊藤) 7인과 함께 상하이의 어느 건물 지하에 모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였으며, 일본측 기관 기물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며 기획, 선전, 연락, 행동 등 부서를 두는 비밀행동조직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였다.

이회영은 흑색공포단을 지휘하였으며, 흑색공포단의 단원들인 천리방, 백정기, 원심창(元心昌), 이강훈(李康勳), 유기문(柳基文) 등은 중국 국민당 당내의 친일 그룹의 리더인 왕정위(汪精衛)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대신 그의 부관을 사살하였으며, 아모이(厦門)에 있던 일본 영사관을 폭파했다. 1932년 1월 흑색공포단원을 톈진에 파견, 이들은 톈진부두에 일본 군수물자를 적재한 일본 기선을 텐진 앞바다에서 폭파시키고, 톈진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여 영사관 건물과 시설 일부를 파괴시킨 뒤, 한명도 잡히지 않고 도주했다.

이회영의 사망 관련[편집]

이회영의 죽음 원인은 고문치사에 의한 죽음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경찰에서는 고문 행위를 숨기려고 쇠창살에 목매 자살했다는 낭설을 퍼트렸으나 '대련수상서유치중 괴! 액사한 노인(大連水上署留置中 怪! 縊死한 老人)'이라는 기사가 중앙일보로도 보도되었다.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그가 삼노끈(삼으로 만든 노끈)으로 목을 매서 자결했다고도 보도되었다.

사망 당시 일본 영사관 당국은 체포된 노인이 유치장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발표했으나, 서둘러 그의 시신을 화장해 버리는 등 수상한 정황 때문에 고문 치사한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의 유해에는 '안면에 선혈이 낭자하고 타파오에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는 목격자의 진술이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설로 중국 항일 운동가인 김소묵의 보고서에 의하면 1932년 11월 17일에 일제가 뤄순 감옥에서 재판도 거치지 않고 이회영을 교수형에 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경찰의 이회영 체포 과정에서 4등선실의 수많은 중국인 중 정확히 이회영을 지목한 것을 의심스럽게 여긴 남화한인청년연맹 단원들은 마지막으로 이회영이 상하이를 떠날 때 만난 인물인 이규서와 연충렬을 의심하였고, 증거를 가지고 그들을 추궁하여 일본 경찰에 밀정행위를 한 것을 확인하고 처단하였다. 일제의 밀정들의 밀고 외에 조선인 제보자들, 그리고 임정 인사의 일족들인 이들의 사상의 차이도 역시 그를 밀고하여 옥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이회영〉, 《나무위키》
  2. 이회영〉,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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