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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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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정약용(丁若鏞)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실학자의 대표격 인물로 알려져 있다.

개요[편집]

  • 정약용은 조선 후기 학자 겸 문신이다.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 · 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 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 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주요 저서는《목민심서》,《경세유표》 등이 있다. 본관 나주(羅州).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籜翁)·태수(苔叟)·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가톨릭 세례명 요한. 시호 문도(文度). 광주(廣州)(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출생이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 《사례가식(四禮家式)》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심전(周易心箋)》 《역학제언(易學諸言)》 《춘추고징(春秋考徵)》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1]
  • 정약용(1762년 ~ 1836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아명은 귀농(歸農), 자는 수시(美庸),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문암일인(門巖逸人),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2012년,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아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 정약용의 선조들은 8대를 연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모두 홍문록에 올랐는데 고조부, 증조부, 조부의 3대에 이르러서는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 아버지 정재원은 1762년 3월에 생원시에 합격한 후에는 대과에 응시하지 않았다. 출세에는 큰 욕심이 없었기에 사돈인 채제공이 대과 응시를 여러 차례 권유하였으나 마다하였다. 뒤늦게 음관으로 벼슬길에 나간 것은 생활고 때문이었으며 호조좌랑, 울산부사, 진주목사(정3품)까지 지냈다.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저술하였으며, 둘째 형 정약전도 물고기의 생태를 기록한《자산어보》라는 명저를 남겼다. 고난을 겪음으로써 학자로서의 지성이 자라는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이다. 1818년(순조 18) 음력 5월에 귀양이 풀려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음력 8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혼인 60주년 회혼일 아침인 1836년 마현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다산이 남긴 마지막 시는 〈회혼시〉였다. 1910년(융희 4) 7월 18일에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으로 추증되고 시호 '문도(文度)'가 내려졌다.[2]
  • 정약용은 조선 후기에,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였으며, 실학 사상의 집대성자이자 개혁사상가로 평가되는 학자이다.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 · 사암(俟菴) · 여유당(與猶堂) · 채산(菜山).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 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經世遺表』 · 『牧民心書』 · 『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정약용은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정약용은 그의 개혁 사상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은 그의 철학적 사유 내지는 역사관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는 새로운 천관(天觀)을 제시하며 천명(天命)과 인간본성이 이중구조적 단일체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여기서 그는 성리학의 입장과는 다른 인간관과 윤리관을 가질 수 있었고, 제반 사회개혁론을 제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역사관에 있어서도 특출한 면을 드러내고 있다. 즉, 민의 일상적 생산활동을 통해 과학기술이 진보, 발전된다는 인식을 확립했던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의 객관적 이해를 위해 노력했고 그것이 도덕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비로소 그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민에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3]

정약용의 생애[편집]

  •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 마현(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5남 3녀 가운데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장재원丁載遠(1730~1792)으로 압해 정씨이고, 어머니는 해남 윤씨海南尹氏(1728~1770)이다. 정약용이 태어난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강원도 태백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정선, 영월, 충주, 여주를 거쳐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한다. 현재는 생가터와 실학박물관등 정약용 유적지가 잘 조성되어있다. 부친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인 고산 윤선도의 오대손녀인 윤소온(해남 윤씨, 조부 윤두서, 부친 윤덕렬)씨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으며, 정약용은 4남 2녀 중 네 번째 아들이었다. 정약용이 태어난 해에는 영조의 노여움을 산 사도세자가 뒤주속에 갇혀 죽는 일이 벌어졌다.(5월) 부친 정재원은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하였고 태어난 정약용의 아호를 귀농(歸農)이라 지었다. 벼슬을 탐하여 당쟁에 휘말리지 말고 농촌에 귀의하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 1776년(정조 즉위) 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이승훈(李承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李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장기(長鬐)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 정약용은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18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정약용은 평생 지은 저술을 계속해서 수정 보완하는 한편, 소론계의 석천石泉 신작申綽, 노론계의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등과 같은 당대 석학들과 학문 교류를 통해 19세기 학술사의 큰 업적을 남겼다. 정약용은 자신의 회갑 때,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썼는데, 여기서 자신의 호를 사암俟菴이라 했다. 이는 '백세 이후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됨이 없다(百世以俟 聖人而不惑)'에서 따온 이름이다. 정약용 선생의 학문적 자부심이자, 훗날에 대한 기다림과 기대로 해석되기도 한다.

강진 정약용 유적[편집]

  • 강진 정약용 유적(康津 丁若鏞 遺蹟)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실학을 집성(集成)한 유적지이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온 때는 1801(순조1년)년 겨울이며 그가 40세 되던 해이며 처음 4년간은 강진읍 동문 밖의 주막집이었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를 오자 강진 사람들은 모두 그를 죄인 취급하여 멀리하였다고 전한다. 다산은 그 주막집 한칸짜리 방을 사의재(四宜齋)라고 이름 지어 자신을 추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1801년(순조 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유배된 다산은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18년 가운데 11년간을 이곳에서 살면서 현재의 《정다산전서》와 동 <보유>에 보이는 방대한 실학 체계의 대부분을 구상하고 집필하였다.

정약용 필적 하피첩[편집]

  • 정약용 필적 하피첩(丁若鏞 筆蹟 霞帔帖)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이 두 아들에게 전하는 당부의 글을 담은 서첩이다. 2010년 10월 25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다산 정약용이 전라남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1810년(순조 10) 7월과 9월에 만든 서첩이다. '하피(霞帔)'는 본래 조선 시대 비빈(妃嬪)의 법복(法服)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붉은 치마'라는 뜻으로, 하피첩이라는 명칭은 그의 부인 홍씨가 유배지로 부쳐온 '바래고 해진 붉은 치마[紅裙]'를 잘라 만든 것이라 하여 다산이 직접 명명하였다. 1813년(순조 13) 7월 다산이 딸에게 그려준 《매화병제도 梅花倂題圖》에 하피첩을 네 첩 만들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원래 네 첩으로 구성된 것을 알 수 있지만 현존하는 것은 세 첩뿐이다. 그중 두 첩의 서문에 각각 '가경 경오년 수추(首秋; 음력 7월)'과 '가경 경오년 국추(菊秋; 음력 9월)'로 기록되어 1810년 7월과 9월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서첩은 치마를 마름질하고 종이를 덧대어 만들었다. 천의 재질은 비단이나 옅은 갈색으로 변한 상태이며, 바느질 흔적도 보인다. 세 첩 가운데 한 첩의 크기는 가로 14.2㎝, 세로 24㎝이고, 다른 두 첩의 크기는 가로 15.6㎝, 세로 24.6㎝로 같다. 한 첩의 표지는 박쥐와 구름 무늬가 장식된 푸른색 종이, 나머지 두 첩은 미색 종이로 되어 있다. 세 첩 모두 표지 안쪽에 붙이는 면지는 붉은색 종이를 사용하였다. 내용은 선비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남에게 베푸는 삶의 가치, 삶을 넉넉하게 만들고 가난을 구제하는 방법, 효와 우애의 가치 등을 담고 있어 다산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서체는 전서·예서·행서·초서가 두루 구사되었으며, 행서와 초서를 섞어 쓰는 다산의 전형적인 행초서풍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전서와 예서는 다른 서첩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필체이다.

정약용 행초 다산사경첩[편집]

  • 정약용 행초 다산사경첩(丁若鏞 行草 茶山四景帖)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시절 쓴 칠언율시 등이 담긴 서첩. 2010년 10월 25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1809년(순조 9)에 쓴 〈다산사경〉과 1818년(순조 18) 쓴 〈순암호설〉, 유배가 끝난 후인 1823년(순조 23) 쓴 〈여다산제생문답〉, 그리고 정확한 제작연대는 알 수 없으나 강진 유배 초기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오언시 등을 수록한 서첩이다. 서체는 대부분 행서이고, 일부는 초서로 되어 있다.
  • 다산사경(茶山四景)은 1801년 강진으로 유배 간 정약용이 1808년부터 사용하던 거처인 다산초당 주변에 있던 다조, 약천, 정석, 석가산에 대하여 읊은 칠언율시이다. 다조(茶竈)는 '차를 끓이는 부엌'이라는 의미로 초당 앞마당에 놓인 평평한 바위를 가리키는데, 정약용은 이 바위에서 솔방울로 불을 지펴 차를 끓여 마셨다고 전해진다. 약천(藥泉)은 초당 뒤에 있는 옹달샘, 정석(丁石)은 정약용이 직접 쓴 '丁石'이라는 글씨를 새긴 바위를 말한다. 석가산(石假山)은 초당의 연못 중앙에 돌을 쌓아 만든 조성물을 가리킨다. 서첩 크기는 가로 14.1cm, 세로 23.2cm이다. 표지의 제첨(별도의 종이에 써서 표지에 붙인 제목)은 예서로 썼는데 위쪽에 큰 글씨로 '茶山四景帖(다산사경첩)', 아래쪽에 작은 글씨로 '茶山親墨橘頌堂珍藏(다산친묵 귤송당진장)'라 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귤송당이라는 당호를 가진 이가 이 서첩을 소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보물 제1683-2호로 지정된 '정약용 필적 하피첩'과 함께 정약용의 강진 유배시절을 대표하는 서첩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정약용 선생 묘[편집]

  • 정약용 선생 묘(丁若鏞 先生 墓)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조선시대 실학자 정약용의 묘. 1972년 5월 4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능내리에 정약용을 모신 유택인 여유당(與猶堂)과 함께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다산 정약용은 1789년(정조 13)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부승지까지 이르렀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서 당시의 새로운 학문인 서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1792년 홍문관 수찬으로 있을 때는 거중기를 제작하여 수원성의 축조에 이용하기도 했다. 《경세유표(經世遺表)》 《마과회통(麻科會通)》 《목민심서(牧民心書》 등 광대한 책을 펴낸 저술가이며 정치, 경제 등 제도 개혁을 주장하기도 했다.
  • 묘는 부인 풍산홍씨와 합장한 원형의 묘로 남향하고 있고, 묘 앞에는 비좌와 비신 및 팔작지붕 모양의 옥개석을 갖춘 비가 있다. 비신에는 2열로 ‘문도공다산정약용 숙부인풍산홍씨 지묘(文度公茶山丁若鏞 淑夫人豊山洪氏 之墓)’라고 씌어 있다. 비좌는 높이 31.5㎝, 너비 129㎝, 두께 90㎝이며, 비신은 높이 179㎝, 너비 69.5㎝, 두께 34.2㎝이고, 옥개석은 높이 62㎝, 너비 119㎝, 두께 81㎝이다. 묘역 앞에는 1959년에 세운 묘비 2기와 자연석에 여유당이라 쓴 비가 서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 육각향로석이 있으며 봉분 왼쪽에 1974년에 세운 비가 있다. 계체석과 상석 오른쪽에 제단이 있고 그 앞에 또 하나의 비와 망주석이 서 있다. 상석 옆에는 높이 250㎝, 너비 10㎝의 비석과 상석, 그리고 좌우에 망주석이 서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정약용(丁若鏞,1762.6.16.~1836.2.22)〉, 《두산백과》
  2. 정약용〉, 《위키백과》
  3. 정약용 (丁若鏞)〉,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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