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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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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최제우(崔濟愚)는 조선 말기의 종교 사상가이다.

개요[편집]

  • 최제우는 민족 고유의 경천(敬天) 사상을 바탕으로 유(儒)ㆍ불(佛)ㆍ선(仙)과 도참사상, 후천개벽사상 등의 민중 사상을 융합하여 동학(東學)을 창시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字)는 성묵(性默)이다. 아명은 복술(福述), 관명(冠名)은 제선(濟宣), 호(號)는 수운(水雲)이다. '제우(濟愚)'는 35세 되던 해에 어리석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으로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1824년 12월 18일 경주 가정리(稼亭里,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생7대조인 최진립(崔震立)이 의병을 일으켜 순국하여 병조판서로 추서되었으나, 후손들은 중앙의 관직을 얻지 못해 쇠락하였다. 그의 아버지인 최옥(崔鋈)도 영남 지방에서 비교적 이름이 알려진 문사(文士)였지만 과거에 낙방해 관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게다가 최제우는 최옥이 63세 때에 곡산(谷山) 한씨(韓氏)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재가녀(再嫁女)의 자식이라는 사회적 차별을 받아야 했다.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익혔고, 13세에 울산 출신의 박씨(朴氏)와 결혼했다. 그러나 10세에 어머니를 잃고, 17세에 아버지마저 죽자 3년 상을 마친 뒤 1844년부터 1854년까지 각지를 유랑하였다. 이때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당시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를 이해하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1854년 고향으로 돌아와 처가가 있는 울산 유곡(裕谷)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1855년 한 승려에게 <을묘천서(乙卯天書)>라는 비서(秘書)를 얻는 신비 체험을 하였다. 1856년 성산(千聖山, 경상남도 양산) 내원암(內院庵)에서 입산 기도를 시작했으나 숙부의 죽음으로 중단하였고, 1857년 천성산 적멸굴(寂滅窟)에서 다시 49일간 기도하며 도를 닦았다. 1859년 다시 경주로 돌아와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도(修道)를 하였다. 그러다 1860년 음력 4월 5일 득도(得道)를 하여 동학(東學)을 창시하였다. [1]
  • 최제우는 조선 시대 말기의 동학의 창시자이자 초대 교조요, 호(號)는 수운재(水雲齋)·수운(水雲)이다. 본관은 경주. 1824년 경상북도 월성군 현곡면 가정리에서 5대조 최국진(崔國鎭)이 음보로 통덕랑 품계 이후 벼슬이 없어 몰락한 양반 가문의 자손으로 출생하였다. 부친인 근암 최옥(崔鋈)과 재가(再嫁)한 어머니 한씨(韓氏) 사이에서 서자(庶子)나 다름없는 신분(재가녀의 자)이었으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울 수 있었다. 최진립의 큰 형 최진흥이 최제우의 7대조가 되며 경주 최부자집과는 친족관계에 있었다. 31세(1854)까지 10년 이상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유불선(儒佛仙) 삼교, 서학(西學), 무속(巫俗),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비기도참사상 등 다양한 사상을 접하는 동시에, 서세동점과 삼정문란(三政紊亂)이라는 이중의 위기에서 고통당하는 민중의 참담한 생활을 직접 체험했다. 수운은 동학을 펴기 시작한 지 만 3년도 되지 않은 1863년(철종 14년) 12월에 체포되었고, 1864년 3월 10일 '삿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혔다는 죄(左道亂正之律)'로 대구 경상감영 안의 관덕정(觀德亭) 뜰 앞에서 처형당함으로써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1907년 순종 때 그의 죄가 풀렸다. 저서로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이 있다. 수운의 사망 이후 그의 후계 동학 교주는 최시형이 이어받게 되었으며 2대 동학 교주가 되었다.[2]
  • 최제우는 조선의 종교사상가이자 동학(천도교)의 창시자 겸 제1대 교주[8]로 호는 '수운(水雲)'이며 '경주 최부자집'의 비조인 최진립의 7대손이다. 최제우는 순조 24년(1824) 10월 28일(양력 12월 18일) 경상도 경주부 현곡면 가정리(現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315번지)에서 유학자였던 아버지 근암(近庵) 최옥(崔鋈, 1762-1840)과 셋째 부인인 어머니 곡산 한씨(谷山 韓氏, 1785-1833)[10] 사이의 1남 1녀 중 서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최옥은 일찍이 정실부인 연일 정씨(1758-97)과 둘째 부인 달성 서씨(1773-1811) 등과 혼인하여 두 딸을 두었으나, 아들을 낳지 못하여 결국 첫째 남동생 최규(崔珪, 1770-1841)의 장남 최제환(崔濟寏, 1789-1851)을 입양하였는데, 최제우는 그 후 후실 곡산 한씨를 들여 낳은 자식이다. 그의 아명은 최복술(崔福述, 崔卜述)이고 초명은 최제선(崔濟宣)이었다. 최제우 동학에서 가장 눈에 띄는 모습은 삼칠주(21자 주문)를 가르치고 그것을 외워 일종의 신내림 체험을 시켰다는 것이다. 일단 신내림 체험에 성공한 사람은 동학에 무섭게 빠져들었다고 한다. 종교사에서 이런 신내림 체험이 유행할 때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사회에 부조리가 만연하여 억눌린 계층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롭고 불만이 적절한 선에서 관리되는 사회에서는 이처럼 신내림 체험을 유도하는 종교가 대중적인 호응을 받지 못한다. 조선 말기 혼란스럽고 부패한 시대상에서 최제우의 삼칠주 주문의 내용대로 하늘의 지극한 기를 받는 체험을 했다고 생각한 동학의 신자들은, 이제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열정에 휩싸였다. 최제우는 체포된 채로 압송되어 경기도 과천현까지 왔다가 철종이 갑작스럽게 죽어 조정이 혼란해진 탓에 다시 경상도 대구도호부에 있던 경상감영으로 이감되었다. 해가 바뀌어 고종 1년(1864) 3월 10일(양력 4월 15일) 경상감영 관덕정 뜰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41세 나이로 제자들과 함께 순교(殉敎)하였다.[3]
  • 최제우는 동학을 창시하였다. 1824년(순조 24)에 경상도 경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처음 이름인 초명은 복술(福述), 관명은 제선(濟宣)이었다. 제우(濟愚)는 그가 세상의 모든 사람인 창생(蒼生)을 구제하기 위한 수도를 하면서 어리석은 세상 사람을 구제하겠다는 의미로 1860년 경 바꾼 이름이다. 그리고 최제우의 자는 성묵(性默)이고, 호는 수운(水雲)이다. 그의 집안은 6대조부터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양반 가문으로 아버지 근암(近菴) 최옥(崔鋈, 1762-1840)은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한 유생이었다. 하지만 그의 문집인 『근암집』은 최옥이 재능과 실력을 가진 문사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옥은 첫 번째 부인 정씨(鄭氏)에게서 아들을 얻었으나 곧 병으로 부인과 아들을 모두 잃었다. 그는 다시 서씨(徐氏)와 혼인하여 딸만 둘을 얻었다. 이에 동생 최규(崔珪)의 아들 제환(濟寏)을 양자로 들여 대를 잇도록 하였다. 그런데 최옥은 다시 과부이던 한씨(韓氏)를 맞아들여 63세에 아들을 얻었다. 그가 바로 최제우이다. 그는 포교를 위해 '용담가(龍潭歌)', '안심가(安心歌)', '교훈가(敎訓歌)',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 '도수사(道修詞)', '권학가(勸學歌)', '도덕가(道德歌)', '흥비가(興比歌)', '검결(劍訣)' 등의 한글 가사(歌詞)를 지었고, '포덕문(布德文)', '논학문(論學文)', '수덕문(修德文)', '불연기연(不然其然)' 등 한문으로 된 글들을 남겼다. 그의 한문 저술들은 1880년 최시형에 의해 <동경대전(東經大全)>으로 편찬되었으며, 한글 가사들은 1881년 <용담유사(龍潭遺詞)>로 묶여 간행되었다.

최제우의 사상[편집]

  •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한 1860년대에 조선 사회는 심각한 혼란과 위기에 놓여 있었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오랜 기간 외척(外戚)의 세도정치가 지속되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져 지방관과 토호의 횡포와 착취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자연재해와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농민들의 삶은 매우 피폐해졌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각지에서 농민 봉기를 일으키면서 사회 불안은 더욱 확산되었고, 서양 열강의 중국 침략 등으로 외세에 대한 위기감과 서학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성리학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을 필요로 하였는데, 19세기에는 <정감록(鄭鑑錄)>의 도참사상이나 <주역(周易)>이나 미륵사상에 기초한 후천개벽사상 등이 민중사회에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최제우는 오랜 방랑으로 농민의 현실을 자세히 알고 있었기에 사회 현실과 민중의 요구에 기초한 새로운 사상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는 한국 전통의 경천(敬天) 사상을 기초로 유(儒)·불(佛)·선(仙)과 도참사상, 후천개벽사상 등의 민중 사상을 융합하여 동학을 창시하였다.
  •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서학(西學)에 대립된 것으로서, 그는 '나 또한 동쪽에서 태어나 동도(東道)를 받았으니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이나, 학(學)은 동학(東學)이다'(논학문)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지기금지(至氣今至) 원위대강(願爲大降)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지(萬事知)'의 21자로 나타냈다. 이는 '지극한 기운이 오늘에 이르러 크게 내리도록 빕니다. 천주(天主)를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세토록 잊지 않으면 온갖 일을 알게 됩니다'라는 뜻이다. '지기금지(至氣今至)'라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최제우는 기일원론(氣一元論) 사상에 기초해 있다. 우주 만물은 모두 지극한 지기(至氣)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신의 정성으로 그 지극한 기(氣)를 몸과 마음에 모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천주(侍天主) 사상이다. 곧 기일원론(氣一元論)의 관점에 따라 하늘과 사람이 일체화될 수 있다는 것으로, 최제우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은 인간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그의 사상에서 천주(天主)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다. 천주를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 인간은 신분이나 빈부(貧富), 적서(嫡庶), 남녀(男女) 등의 구분에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고, 수행을 하면 모두 군자가 될 수 있다. 그는 시천주(侍天主)의 방법으로는 마음을 잃지 않고 기를 바르게 하는 '수심정기(守心正氣)'를 강조하였다.
  • 최제우는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을 제시하였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크게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으로 구분했으며, 혼란에 가득 찬 선천의 종말기를 자기의 사사로운 마음만을 위하는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시대라고 하였다. 그는 5만 년에 걸친 선천의 시대가 지나고 후천의 시대가 개벽하였다며 변화에 대한 민중의 갈망을 고취하였다. 또한 그는 서학과 서양 세력이 이기주의에 기초한 각자위심(各自爲心)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며, 동학에 의해 모두가 다른 마음을 이겨내고 한 몸이 되는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새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그는 무위이화(無爲而化)에 따른 조화를 강조하였다. 자연과 인간 세계의 조화는 정해져 있다. 곧 음(陰)과 양(陽)이 조화 속에서 사계절의 변화가 나타나듯이, 인간 사회의 질서도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이 변화해간다. 이로써 최제우는 사회 질서의 개혁에 대한 민중의 희망을 고취하였다.
  • 최제우는 시천주 상에 기초하여 민중의 평등의식을 반영하고 고취하였다. 그리고 여러 민중 사상을 흡수하여 지배층의 성리학에 대항하여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그의 사상은 2대 교주인 최시형에 이르러 '사람이 하늘이니(人是天)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事人如天)'는 것으로 발전했으며, 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사상으로 체계화되었다.

최제우 묘[편집]

  • 최제우 묘(崔濟愚墓)는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에 있는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묘이다.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구미산(龜尾山) 동쪽 능선에 있다. 저경 6m, 높이 2.5m 규모의 원형 봉토분이다. 일명 태묘(泰墓)라고도 한다. 묘 앞에는 상석과 문인상, 공적비가 있으며 뒤쪽에 부인 박씨 묘가 있다. 가까이에 용담정(龍潭亭), 포덕문(布德門), 최제우동상, 최제우유허비 등 동학 관련 유적이 모여 있어 "천도교용담성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최제우 유허비[편집]

  • 최제우유허비(崔濟愚遺墟碑)는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에 있는 최제우 생가에 건립된 비석이다. 1971년 최제우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비석에는 天道敎敎祖大神師水雲崔濟愚遺墟碑(천도교조대신사수운최제우유허비)라고 새겨져 있다.

천도교[편집]

  • 천도교(天道敎)는 조선 후기 1860년에 최제우(崔濟愚)를 교조로 하는 동학(東學)을 1905년 제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가 천도교로 개칭한 종교이다. 최제우는 전통적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 지방의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 후기는 국내적으로는 외척(外戚)의 세도정치와 양반·토호들이 일반 백성에 대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자행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민란이 각지에서 발생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무력침략의 위기를 맞던 시대였다. 최제우는 21세에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도(道)를 얻고자 주류팔로(周流八路)의 길에 나서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 양산 천성산 암굴에서 수도하고 도를 갈구하여 1860년 4월 5일 '한울님(하느님)'으로부터 인류 구제의 도인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도의 이름을 '무극대도'라고만 하였다. 최제우가 포교를 시작하여 많은 교도들이 모이자, 관(官)과 유생들이 혹세무민한다는 구실로 탄압하여 부득이 전북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많은 저술을 하였다. 최제우는 1863년 3월 경주 용담정으로 돌아와 대대적인 포교활동에 나섰다. 접주들로 하여금 교도들을 수십 명씩 동원하여 용담정에 와서 강도(講道)를 받게 하는가 하면, 동학 교단 책임을 맡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해월(海月) 최경상(崔慶翔:時亨)을 선임하였다.

삼례집회[편집]

  • 삼례집회(參禮集會)는 조선 후기 전라도 삼례에서 동학도들이 동학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을 내걸고 행한 최초의 교권운동이다. 1864년 동학을 사교(邪敎)로 단정한 조선 정부에 의해 최제우가 혹세무민의 죄로 사형을 당한 이후, 동학은 탄압을 피하면서 꾸준히 교세를 확장하였다. 20년 뒤에는 그 세력이 상당히 뻗어나가,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은 동학의 본거지를 충청도 보은(報恩)으로 옮겨 적극적으로 교권재건운동을 폈다. 그러나 부임한 충청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이 동학도에 대한 탄압과 사찰을 강화하고, 관리들의 발호가 심해져 교도들의 신변이 위태로워졌다. 최시형은 이를 동학 합법화운동의 계기로 삼아, 이 즈음에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는 것만이 교세를 떨칠 수 있는 방도라 단정하였다.
  • 최제우는 전국 교도들을 격려하는 입의문(立義文)을 보내고, 1892년 10월 1일을 기하여 전주 삼례에 모이도록 하였다. 이날 삼례역두에는 수천의 동학도가 참집하여, 손천민(孫天民)을 소두(疏頭)로 충청도관찰사 조병식과 전라도관찰사 이경직(李耕稙)에게 글을 보내어 ① 교조 신원, ② 동학을 서학(西學)과 혼동하지 말 것, ③ 교도에 대한 탄압금지 등을 요구하였다. 두 관찰사는 이에 대하여 교주의 신원문제는 중앙정부의 소관이라 자의로 처리할 수 없고, 대신 관리들의 침학토색은 시정하겠다고 약속하여 집회는 막을 내렸다. 그럼에도 동학도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동학도들은 지방관헌을 상대로 한 시위가 무의미하다고 판단, 1893년 2월 서울 광화문 앞에서 동학대표 40여 명이 복합상소(伏閤上疏)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이 집회는 당국의 동학에 대한 금령, 동학의 대대적인 보은취회(報恩聚會), 동학의 척왜척양(斥倭斥洋)운동, 동학의 봉기를 마련해 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수운문집[편집]

  • 수운문집(水雲文集)은 천도교의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연보(年譜)를 적은 책이다. 필사본. 1권. 1900년(광무 4) 저술.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 중에 관몰기록(官沒記錄)으로 보존된 15책 중의 하나이다. 제목은 《수운문집》으로 되어 있으나, 내용은 연보(年譜)이며 순한문으로 쓰여 있다. 《천도교서(天道敎書)》(1920)나 《시천교역사(侍天敎歷史)》(1920)보다 20년이나 앞서 필사되었고 그 내용도 상세하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최제우(崔濟愚,1824~1864)〉, 《두산백과》
  2. 최제우〉, 《위키백과》
  3. 최제우〉,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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