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우
곽재우(郭再祐)는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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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 곽재우는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다.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곽월(郭越)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로 경상남도 의령(宜寧)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한성부 좌윤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관직제수를 거부하고 낙향을 거듭하였는데 당쟁으로 나라의 형편이 날로 어지러워질 뿐만 아니라,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죄없이 잡혀 올라오고, 또 절친한 사이인 광주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휘말려 죽는 등의 일련의 사태를 보고 더 이상 관직생활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다. 그의 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있고, 그의 사우(祠宇)에는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1]
- 곽재우는 조선 중기의 무신, 정치인, 군인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크게 활약한 의병장이다. 34세 때 문과 대과에 급제하였으나, 선조를 비판한 답안지로 선조의 명에 의해 합격이 취소되고, 이후 벼슬에 뜻을 버리고, 40세가 되도록 고향에서 학문과 낚시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관군이 왜군에게 전멸당하자, 당시 고향인 경남 의령에서 스스로 의병을 조직, 붉은 비단으로 된 갑옷을 입고 활동하여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그의 용맹성에 놀란 왜병들은 곽재우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했다고 한다. 여러 번 승리한 공로로 찰방, 조방장 등을 지낸 뒤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김덕령 등의 의병장이 무고로 희생되는 것과 영창대군의 죽음을 보고, 벼슬을 여러 번 사퇴하였다. 당색으로는 북인이었으나 광해군 집권기에도 여러 번 관직을 사퇴하거나 사양하였다. 인목대비 폐모론에 이어 1613년(광해군 5년) 영창대군에 대한 유배형 여론이 나타나자 영창대군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고 낙향, 이후 창녕에 은거하였다. 본관은 현풍(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으로,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황해도 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자 제자이며, 그의 외손녀사위이다. 대제학을 지낸 김우옹(金宇顒)과는 동문이자 동서간이 되었다. 전란 중 스스로 천강홍의장군을 자처하였으며 전장에 나설 때 붉은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다녔으므로 그의 이름을 모르던 장졸과 백성들로부터 홍의장군이라 불렸다.[2]
- 곽재우는 조선 시대 의병장이자 성리학자이다. 일반인들에게는 학자보다는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의병장으로 유명하다.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하늘에서 내려온 붉은 옷의 장군) 혹은 이를 줄인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신출귀몰한 전술 및 붉은 옷을 입은 장수에 산신령 같은 뭔가 도인스러운 신비한 인상에 각종 활약상들 덕분인지 임진왜란 의병장 중에서도 대중적인 인지도가 가장 높은 편이다. 곽재우의 삶은 조선왕조실록, 첩 이씨의 아버지 이로의 용사일기, 외손자 신시망이 지은 문집, 지인 배대유가 쓴 전기에 흩어져 있다. 현대전의 관점으로 볼 때 완벽에 가까운 게릴라, 유격전을 펼쳤던 지휘관으로 직접적인 전투뿐 아니라 심리전, 기만전술까지 능숙하게 수행했다. 곽재우는 1617년 4월 10일, 망우정에서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일세를 풍미한 의병장이 남긴 것이라고는 단벌옷에 거문고, 낚싯배 한 척이 전부였다.[3]
- 곽재우는 조선 후기 임진왜란 의병장이다. 곽재우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낙동강의 요해처(要害處)[전쟁에서, 자기편에는 꼭 필요하면서도 적에게는 해로운 지점]를 방어함으로써 전쟁 초기 패퇴 일색이던 전세를 반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곽재우는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공훈을 내세워 권세에 영합하거나 출세 영달을 위한 행위를 일절 하지 않았으며, 남명 조식의 외손서(外孫壻)이면서도 당시 치열했던 당쟁에 초연하여 어느 한쪽에도 편향되지 않았다. 곽재우의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고려 시대 금오위 교위(金吾衛校尉)를 지낸 곽자의(郭子儀)의 후손으로, 고조할아버지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곽승화(郭承華)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곽위(郭瑋), 할아버지는 곽지번(郭之藩), 아버지는 곽월(郭越),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로, 강응두(姜應斗)의 딸이다. 배우자는 상산김씨(商山金氏)로, 김행(金行)의 딸이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외손녀이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1612년(광해군 4)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1611년 정인홍(鄭仁弘)이 주도하는 정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영창대군(永昌大君) 살해 논의를 배척하는 데에 힘을 다하였다. 1617년(광해군 9)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6세였다. 곽재우를 추모하며 1618년(광해군 10)에 '충현사(忠賢祠)'를 세워 위패를 봉안하였다. 1674년(현종 15)에 규모를 확장하여 서원의 모습을 갖추었고, 1677년(숙종 3)에 예연서원(禮淵書院)으로 사액되었다.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751년(영종 27)에 예연서원 앞에 신도비를 세웠다. 한편, 1972년 4월 22일에는 곽재우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에 망우당공원을 건립하였다.[4]
곽재우의 생애[편집]
- 1585년(선조 18)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답안지에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가 있었기 때문에 파방(罷榜)되었다. 이 일로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다가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義州)로 피난하자 같은 달 22일 제일 먼저 의령에서 수십 명의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의 군세는 더욱 커져 2천에 달하였고, 5월에는 함안군을 수복하고 정암진(鼎巖津:솥바위나루)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홍의(紅衣)를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이라고도 불렸다. 조정에서는 이 공을 인정하여 그해 7월 유곡찰방(幽谷察訪)에 임명하였다가 다시 형조정랑을 제수하였다. 10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하여 조방장(助防將)을 겸임하다가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어 악견산성(岳堅山城) 등 성지를 수축하였다. 또한 1차 진주성전투에 휘하의 병사들을 보내어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승리하는데 조력하였다.
- 1595년 진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가 1597년 정유재란 때 경상좌도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로 임명되어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수비하면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군을 맞아 싸웠다. 이후 계모의 상을 이유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창암진(蒼巖津) 강가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은둔하고 있다가 1604년(선조 37) 찰리사(察理使)에 임명되어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을 보수하였고, 10월에는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嘉善大夫龍驤衛上護軍)에 임명되었다. 이후 또 다시 낙향하였다가 1610년(광해군 2년) 광해군의 간청으로 오위도총부의 부총관을 역임하였고, 이어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612년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13년(광해군 5)에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문을 올린 후에 다시는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
곽재우 유물 일괄[편집]
- 망우당 칼. 임진왜란 때 사용하였던 장검(長劍)으로 '망우당 칼'이라고도 한다. 칼과 칼집이 한 쌍을 이루며,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칼의 길이는 86㎝, 너비 3㎝, 자루 16㎝이며, 칼집에 넣은 총 길이는 115㎝이다. 나무로 만든 손잡이는 표면에 가죽끈을 교차하여 감았으며, 칼자루의 목에 감은 검환(劍環;칼코등이)은 꽃무늬를 투각(透刻)하여 장식하였다. 검신(劍身)은 칼등이 위로 조금 휜 형태이며, 칼끝은 한쪽을 뾰족하게 원호형(圓弧形)으로 마름하였다. 칼집은 윗부분의 일부가 부식되어 떨어진 상태인데, 그 아래로 2개의 구리테[銅製環]가 간격을 두고 둘러져 있다. 2개의 구리테에는 끈을 묶었던 용도로 추정되는 여의두형(如意頭形)의 고리가 달려 있다. 칼집 하단부에는 반원형의 구리 장식이 부착되어 있는데, 앞면과 뒷면에 꽃무늬를 선각(線刻)하여 장식하였다.
- 마구(馬具). 곽재우가 타고 다니던 말 안장이라 전해지는데, 부식 상태가 심하여 1973년 8월에 완전 살균 처리된 뒤 보존되고 있다.
- 포도연(葡萄硯). 포도 무늬로 장식한 벼루와 거북 모양의 연적(硯滴)이 한 쌍을 이룬다. 1578년(선조 8) 곽재우는 아버지 곽월(郭越)이 명나라에 동지사(冬至使)로 갈 때 동행하였는데, 이 벼루와 연적은 당시 명나라 황제에게 하사받은 것이라고 전한다. 벼루는 가로 21㎝, 세로 31.5㎝, 두께 3㎝의 직사각형이며, 재질은 흑요암(黑曜巖)이다. 벼루의 중앙에 먹을 갈기 위한 부분인 연당(硯堂)을 타원형으로 만들고 그 한 켠에 벼룻물을 담기 위한 연지(硯池)를 초승달 모양으로 팠으며, 그 주변에는 포도와 덩굴 무늬를 입체적으로 장식하였다. 연적의 재질도 흑요암이며, 등에 거북무늬를 8각으로 장식하였는데 두 곳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 사자철인(獅子鐵印). 쇠로 만든 도장으로, 원형의 도장 위에 손잡이로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다. 원형 도장의 지름은 3.5㎝이며, 전체 높이는 3㎝이다.
- 화초문백자팔각대접(花草紋白磁八角大碟). 포도연과 마찬가지로 명나라에 갔을 때 황제에게 하사받은 대접이라 전한다. 높이 6.5㎝, 윗지름 21.5㎝, 밑지름 12.5㎝인 소형의 8각형 대접으로, 각 면을 풍경과 화초 무늬로 장식하였다.
- 갓끈. 금파(金波; 금 바탕에 파란을 올린 것)와 대나무, 호박으로 만든 네 종류의 갓끈이 보존되어 있다. 각각의 길이는 26연(聯; 갓끈에 꿰어진 구슬) 75㎝, 72연 25㎝, 179연 165㎝, 46연 168㎝이다.
창녕 망우당 곽재우 유허비[편집]
- 창녕 망우당 곽재우 유허비(昌寧 忘憂堂 郭再祐 遺墟碑)는 경상남도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에 있는 곽재우의 유허비이다. 1983년 8월 6일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이 비석은 곽재우의 전공을 추앙하고 그 뜻을 후손에 길이 전하고자 고을 유림(儒林)들이 건립한 것으로 망우정(忘憂亭) 뒤편에 세워져 있다. 비의 전면에는 '충익공망우곽선생유허비(忠翼公忘憂郭先生遺墟碑)'라는 전문이 있다. 또한 비를 세운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글씨를 쓴 배동석을 비롯하여 조언성·이기성·신영북·신계동 등이 있다.
- 곽재우의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며 경상도 의령(宜寧) 출생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함안·영산·창녕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불리고 왜적을 무찔렀으며, 1597년 정유재란에 경상좌도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가 되어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켰다. 그 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하였다가 부총관(副摠管)·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으나 조야가 혼탁하고 기강이 문란함을 개탄하여 창암(蒼巖)에 망우정을 짓고 은둔생활로 여생을 보냈다.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詩文)에도 능했다.
의병장 곽재우 생가[편집]
- 의병장 곽재우 생가(義兵將郭再祐生家)는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복원한 곽재우장군의 생가이다. 2005년 복원된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1552~1617)의 생가로,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있다.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 형태로 꾸며졌으며, 안채·사랑채·별당·대문간채·중문간채·대곳간채·소곳간채 등 7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대지면적은 5,636㎡이다. 생가 바로 앞에 '의령 세간리 은행나무'라는 명칭으로 천연기념물 제302호로 지정된 수령 600년이 넘은 노거수가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천연기념물 제493호인 '의령 세간리 현고수'가 있다. 현고수(懸鼓樹)는 수령 520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로 '북을 매던 나무'라는 뜻인데 임진왜란 때 곽재우장군이 이 느티나무에 큰 북을 매달고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훈련시켰다고 한다.
망우집[편집]
- 망우집(忘憂集)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곽재우(郭再祐)의 시문집. 활자본. 2권 1책. 편자 ·간년 미상.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왕에게 올린 소계(疏啓) 및 왕의 뜻을 봉행하며 왕복하였던 관문(關文) ·서독(書牘) 등이 수록되어 있다. 부록인 <용사별록(龍蛇別錄)>에는 그가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내력이 적혀 있다. 책머리에 세계(世系) ·연보(年譜) 및 배대유(裴大維)가 지은 전(傳) 등이 실렸다.
예연서원[편집]
- 예연서원(禮淵書院)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에 있는 곽재우와 곽준의 위패를 봉안한 조선시대 서원이다. 1995년 5월 12일 대구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7,777㎡이고 포산곽씨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 서원은 임진왜란 때 선무원종(宣武原從) 1등 공신인 의병대장 곽재우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1618년(광해군 10)에 충현사(忠賢祠)를 건립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1674년(현종 15)에 당시 현감이었던 유천지(柳千之)가 그 규모를 확장하였다. 이 서원에는 정유재란 때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황석산성(黃石山城)의 수성장(守城將)을 제수받고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곽재우의 재종숙 존재(存齋) 곽준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였는데, 1677년(숙종 3)에 예연서원이라 사액됨으로써 사액서원이 되었다.
-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원되었다가 1982년 복원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당, 강당, 동재·서재, 고사, 삼문 등이 있다. 사당에는 곽재우와 곽준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고사는 향례(享禮) 때 제수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며 동재·서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수학하던 곳이다. 1977년에는 6·25전쟁으로 소실된 강당과 삼문(三門)을 복원하였고, 1984년에는 사당을 복원하여 옛 모습을 찾아 오늘에 이르렀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곽재우〉, 《위키백과》
- 〈곽재우〉, 《나무위키》
- 〈곽재우생가〉, 《위키백과》
- 〈곽재우(동구)〉, 《향토문화전자대전》
- 〈곽재우(郭再祐,1552~1617)〉, 《두산백과》
- 〈곽재우 유물 일괄 (郭再祐 遺物 一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변경출 기자, 〈의령 충익공 곽재우 장군 탄신다례 봉행〉, 《경남매일》, 2024-10-03
- 대구광역시, 〈꺼지지 않는 민족의 불씨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네이버블로그》, 2022-06-01
같이 보기[편집]